2022-11-26

사상자 2621명 vs 3만5000명…‘장진호 전투’의 진짜 승자는?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사상자 2621명 vs 3만5000명…‘장진호 전투’의 진짜 승자는?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사상자 2621명 vs 3만5000명…‘장진호 전투’의 진짜 승자는?

등록 :2021-10-29 
권혁철 기자

‘육로 철수’ 미 해병보다 중국 9병단 피해 더 커
스미스 미 해병 1사단장 ‘11월 전쟁영웅’에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이 얼어붙은 길을 가고 있다. 국가기록원

“후퇴라니?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고 있다.”

“후퇴하느냐?”는 미국 종군기자의 질문에 올리버 스미스 미 해병 1사단장이 쏘아붙였다.

1950년 11월27일 미 해병 1사단은 함경남도 장진호 근처에서 중국군 12개 사단에 포위됐다. 중국군 병력은 미 해병보다 10배 많았다. 강추위 속에 고립된 미 해병 1사단은 전멸 위기에 빠졌다.

장진호 일대는 해발 1000~2000m 개마고원 고산 지대다. 낮 영하 20도, 밤 영하 30도의 강추위가 몰아쳤다. 탱크, 트럭 등 각종 장비의 윤활유가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포를 쏘면 얼어붙은 포신이 충격으로 깨졌다. 곳곳에 매복한 중국군이 기습공격을 해왔다. 미 해병은 전사자를 땅에 묻으려고 했으나 언 땅을 팔 수 없자, 주검을 목재처럼 세 겹, 네 겹으로 쌓아 올렸다.


미 해병 2개 연대는 악전고투끝에 12월4일 사단사령부가 있는 하갈우리(장진호 남쪽 끝)에 집결했다. 하갈우리에 군 병력 1만명, 피란민 1500명, 차량 1천대가 모였다. 미 해병대는 하갈우리에서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 황초령을 넘어 흥남항이 있는 함흥까지 110㎞ 거리를 철수해야 했다. 황초령과 장진호를 연결하는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한데다 차가운 눈이 쌓여 얼어붙었다. 포위·고립된 미 해병의 운명은 바람앞의 등불처럼 보였다.

당시 장진호 전투는 미국과 중국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미국 처지에선 미국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용맹한 미군의 상징인 해병 1사단이 강추위에 떨다 전멸한다면 대참사였다. 이를 노리고 12월 초부터 중국 관영매체는 “미 해병 1사단 포위 섬멸 임박”이라고 계속 보도했다. 미국 언론들도 미 해병사단의 포위·철수 과정을 크게 보도했다.

일단 미 해병은 하갈우리 간이 활주로를 이용해 부상병 4500명을 항공기로 후송했다. 전멸을 우려한 미군 지휘부는 올리버 스미스 미 해병 1사단장에게 “모든 장비를 버리고 병력만 항공기로 철수하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스미스 소장은 “해병대 역사상 그런 불명예는 없다”며 거절했다. 항공철수를 할 경우 마지막 수송기가 이륙할 때까지 2개 대대 병력이 공항에 남아 중국군 공격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스미스 사단장은 2개 대대 병력을 적진에 희생양으로 남겨두고 철수하는 것은 해병의 불명예라고 여기고 흥남항이 있는 함흥까지 110㎞를 걸어서 철수를 결정했다. 스미스 사단장은 장병들에게 “해병은 철수하는 게 아니라 후방의 적을 격멸하고 함흥까지 진출하는 새로운 방향의 공격”이라고 강조했다. 이때 “후퇴하느냐” 종군기자의 확인 질문에도 스미스 사단장은 “다른 방향으로 진격한다”고 답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이 쉬고 있다.

중국군은 미 해병 철수를 막기 위해 대규모 추가 병력을 투입했고, 미군 후퇴로에 있는 모든 다리를 폭파하고 장애물을 설치했다. 미 해병은 끊어진 다리를 긴급복구하는 데 필요한 자재를 수송기로 긴급 공수해 복구했다. 미 해병은 12월11일 함흥에 도착했다. 낯선 지형, 강추위, 절대적 병력 열세, 포위 기습 공격 같은 악조건 속에서 미 해병처럼 장비와 부대 단위를 유지하고 계속 전투를 벌이며 후퇴한 것은 무척 드물고 어려운 일이다. 실전에서는 적 포위 공격이나 재해 등으로 장비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후퇴하는 일이 잦다.

1950년 11월27일부터 12월11일까지 장진호 일대에서 벌어진 미 해병 1사단과 중국군 제9병단 사이에 벌어진 사투가 장진호 전투다. 최근 중국에선 장진호 전투를 다룬 영화 <장진호>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장진호>에 등장한 “양놈들이 우리를 무시하지만, 존엄은 전쟁에서 싸워서 얻는 것”이라는 마오쩌둥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은 이 영화를 통해 반미정서와 애국을 강조한다. 중국은 장진호 전투를 ‘항미원조’(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움)의 대표적 승전으로 부각한다. 어쨌든 장진호에서 미군을 몰아냈으니 이겼다는 것이다.



지난 10월11일 중국 베이징의 영화관 앞에서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장진호> 포스터 앞으로 한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뉴스

그러나 한국과 미국 군사 연구자들의 평가는 다르다. 장진호 전투 미 해병 사상자는 2621명이었다. 중국군 9병단은 전사 2만5천명, 부상자 1만200명이었다. 장진호 전투 피해로 전투 기능을 상실한 중국군 9병단은 함흥 일대에서 머물며 4개월 동안 부대정비를 하느라 1951년 1월4일 서울을 점령했던 중국군 제3차 공세에 참가하지 못했다. 당시 중국군은 수원에서 남진을 멈췄는데 만약 9병단까지 3차 공세에 가세했다면 대전까지 진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때문에 한-미 전쟁연구자들은 장진호 전투를 두고 중국이 ‘전투’에서 이겼더라도 ‘전쟁’에선 못이겼다고 평가한다. 미 해병1사단이 장진호 전투를 벌이는 동안 함경도 두만강까지 진출했던 국군 수도사단, 국군 3사단 등이 큰 피해없이 함흥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미 해병 1사단이 육상 철수를 하며 중국군과 보름 동안 사투를 벌이는 동안 한국과 미국은 흥남항에서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 10만명까지 포함한 대규모 해상 철수 작전을 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2일 존 아퀼리노 미국 인도·태평양 사령관을 접견한 자리에서 “장진호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여기에서의 값진 승리 덕분에 흥남철수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고, 나의 부모님은 그때 미군의 도움으로 남쪽으로 올 수 있었으며, 나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스미스 미 해병 1사단장

국가보훈처는 올리버 프린스 스미스(1893~1977) 미 해병 1사단장을 ‘1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고 29일 밝혔다. 미국 정부는 장진호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그의 공로를 인정해 1950년 12월 십자수 훈장을 수여했다. 스미스 장군은 대서양함대 해병대 사령관을 거쳐 1955년 9월 대장으로 예편한 뒤 1977년 84살의 나이로 숨졌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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