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6

李宇衍 서평: 박유하, {역사와 마주하기},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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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서평: 박유하, {역사와 마주하기}, 2022, 뿌리와이파리

이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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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제1장 냉전 붕괴와 한일관계, 제2장 징용 문제, 제3장 위안부 문제, 제4장 한일병합`한일협정, 제5장 역사와 마주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3장 각각에 대하여, 그리고 4~5장을 한 데 묶어 내용을 소개하고 감상을 밝히겠다. 물론 소개는 평자[본인]의 주관에 따른 것이며, 저자[박유하]의 입장에서는 불충분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서평이 다 그렇다.

제1장은 위안부나 징용 등 역사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 ‘반일’이 강력하게 대두하는 현상과 원인을 서술한다. 사실, 분명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저자는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후 그간 냉전체제 하에서 억눌렸던 좌파세력이 분출하고, 역사 문제에서도 논의를 주도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듯하다. 물론 있을 수 있는 논리다.
하나 주의할 것은 그것이 좌파의 반일이 득세하는 배경이 되었음은 사실이지만, 필연적인 원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크다는 점이다. 당장 50년간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대만에서는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또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가 식민통치를 받다 제2차대전 이후 해방되었다.
40여년간 한국에 체재한 산케이신문의 구로다 카쓰히로[黑田勝弘]는 마침 올해 한국에서 출판한 {누가 역사를 왜곡하는가}에서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경제성장, 87년 민주화운동의 성공, 88년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배경으로 한국인들에게 “자신감”이 생겼고, 그것이 이후 일본에 대한 “우월의식”으로 전화[轉化]하였다고 말한다. 이러한 접근도 의미가 크다.
평자는 반일을 지향하고 이용하려는 “정치세력”을 지적하고 싶다. 비록 실패했지만, 지난 수년간 민주당이나 좌파 세력이 보인 “반일캠페인”을 알고있는 독자들로서는 당연히 이 문제를 생각할 것이다. 1992년에 출범한 김영삼정권은 삼당합당이라는 태생적 불순성을 지우기 위해 과거와 단절, 통 크게 1948년 대한민국의 성립까지 부정하다시피 하면서 1919년 임시정부에서 한국의 정통성과 기원을 찾으려 했고, 그 핵심적 이데올로기는 반일민족주의였다.
다른 한편, 1987년의 전격전에 성공한 좌파 운동권세력은 통일운동과 “조선은 하나다”는 민족운동으로 활동영역을 확장하여 진지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87년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주사파로서는 미국을 적으로 하는 "반제민족해방혁명"의 제 본령을 찾음이었다.
좌파 여성운동계에서는 일본의 “양심세력”이 제기한 위안부 문제를 우연히 발견한 후, 예상치 못한 국민적 호응에 힘입어 그에 “올인”하는 세력이 “한국정신대대문제대책협의회”라는 방대한 조직으로 결집하였다. 평자는 이러한 정치권과 운동권의 전략전술이 90녀대 이후 반일이 극성을 부리게 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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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전시노동자[징용노동자] 문제

제2장은 저자가 그간 다룬 바 없는 징용 문제다. 저자의 생각은 {조선인 강제연행}이라는 책을 낸 도쿄대학교의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교수와 비슷해 보이는데, 동원에 있어서는 ‘강제연행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일본에서의 노동과 생활은 “차별과 폭행, 사과와 질병에 의한 죽음이 일상화”된 상황이었다고 주장한다.
평자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첫째, 저자가 말하는 “징용”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글자 그대로의 징용은 1944년 9월부터 실시되어 25-30만 명이 동원되었다고 추정되지만, 조선인 노동자 전시동원은 1939년 9월부터 “모집”과 “관알선”, 일반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도일[渡日]이라는 형태로 출발하였고, 그 인원은 43-48만 명으로 생각되며, 일본으로 간 이들 전시노동자는 총 73만 천 여명이었다.
많은 한국 연구자들이 이들 전시노동자를 모두 불응시 법적 처벌이 따르는 국가적 강제동원, 즉 “징용”으로 통칭하여 사실을 왜곡해왔고, 그 결과 일반 한국인들은 실태와 동떨어진 “상식”을 갖게 되었다. 저자의 서술에서는 이들 73만 명 모두를 통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는 기존 연구자들과 같은 오류를 범하는 일이 된다.
두번째는 조선인의 노동과 생활에 대한 서술에서 안회남(安懷南, 1909~?)의 소설 [소]와 [불]을 중요한 자료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에서 징용된 조선인 주인공은 자신을 “소”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불]에서는 ‘48명 중에서 7명만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자는 이를 마치 실태라도 되는 듯이 서술한다.
“소”나 “노예”라는 자기인식이나 기업의 조선인에 대한 극히 열악한 대우는 당시 자료가 말하는 바와 전혀 다르다. 노무현 정부에서 6천 억원의 “위로금”을 지급하면서 만들어진 국가기관에 의해 수집, 채록된 증은은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위로금 지급 전 그들의 회고는 ‘고생은 되었지만 살아가는 데 좋은 경험이 되었다’, ‘역시 신세계였다’는 건강함이 기본적인 정서였다.
사망자 수에 대한 이야기는 통계적 실태를 심각히 왜곡한다. 저자는 SNS를 통해 평자에게 답하면서 ‘나머지 41명이 모두 죽었다는 뜻이 아니며, 일본에 남은 사람들도 많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종전과 함께 일자리를 잃은 전시노동자는 거의 모두 조선으로 돌아왔다. 1960년대에 수행된 일본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재일조선인 중 전시노동자 출신은 채 2%도 되지않았다.
“차별과 폭행, 사과와 질병에 의한 죽음”이라는 서술과 관련하여, 하나의 숫자를 소개하고 싶다. 1939-45년간 전쟁과 무관하게 순수한 자유 의지로 일본에 단기 노동이민한 조선인이 전시노동자의 2.3배인 170만 명이었다. 조선 남부의 2-30대 청년이 260만 명 가량이었으니, 한국사 최초의 대규모 이민이 전개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전시노동자와 같은 곳에서 같은 조건으로 일하고 생활했다. 전시노동자와 기타노동자가 함께 일하는 곳이든, 아니면 기타노동자만 있는 곳이든, 조선인이 이렇게 뒤섞인 상황에서 전시노동자에게만 극악한 대우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시노동자의 실태가 저자가 소설을 이용하여 주장하는 바와 같다면, 이 기타노동자 170만 명은 스스로 노예가 되어 죽기를 자원한 셈이 된다.
저자는 안회남을 “작가”, “지식인”으로 소개하는 데 그친다. 그런데 안회남은 짧은 징용생활 뒤에 815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 직후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문학동맹]이라는 공산주의 문학단체의 결성에 소설분과위원장으로 참가했다. 소설 [소]는 1945년에, [불]은 1946년에 씌어졌다 그는 1947년에 월북한 후, 6`25전쟁 중에는 [종군작가단]으로 남한으로 내려왔다가 동료들을 이끌고 북으로 올라간 뒤, 1960년대에 숙청되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저자는 언급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의 소설이고, 그러니 그 소설은 무조건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1차대전부터 2차대전까지의 시기에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취한 전략전술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1단계 혁명으로서, 정치적으로는 "반제반파쇼 민족해방투쟁", 조직적으로는 “통일전선”의 구축을 당면과제로 설정했고, 이 1단계 혁명을 급속도로 2단계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시킨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조선 공산주의자도 마찬가지였고, 일본은 “제국주의”, 조선인은 소나 말과 다름없는 그 “노예”로서 혁명의 주체세력이었다.
공산주의 작가들에게 문학은 '혁명을 위한 선전선동의 수단'이고, 공산주의 문학운동에 앞장선 안회남은 이러한 전략전술에 충실하게 소설을 쓴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공산주의혁명가에게 혁명 과업의 수행은 자신의 존재이유다. 그가 [소]와 [불]을 쓴 것은 반일 〮반미 반제국주의 혁명을 위해 그 주체세력인 조선인에게 투쟁을 선전선동하기 위함이었다. 그를 수행함에 안회남은 오히려 순수했던 것이다. 그 일본이 실시한 징용에 대해 조선인을 상대로 공산주의 작가 안회남이 하는 “창작”이, 선전선동이었던 것은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는 말이다. 거기에서 ‘징용의 진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평자의 이러한 지적에 대해 소설을 이용하면서 “상상력을 키우는 것이 먼저다”는 저자의 답변을 듣고 크게 놀랐다. 얼마전 한 위안부 연구자가 ‘자료를 넘어 상상력을 동원하자’는 말을 듣고 참으로 황당한 기억이 난다.

III 위안부 문제

다음으로 제3장 위안부 문제다. 위안부의 동원과 위안소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는 과거 {제국의 위안부}와 같은 입장이다. 위안부가 되는 경로는 다양했고,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이 일반적으로 행해질 수 없는 “구조”였고, 위안소에서는 “글자그대로의 ‘노예’상태”였다고 말한다. 적어도 이에 한해서는, “넓은 의미의 강제”나 “구조적 강제”를 주장하는 일본 쥬오대학의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의 견해와 비슷해 보인다. 저자는 이러한 판단에 대해 즉각 반발한다.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논의를 흑백의 극단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그 대신 다양한 형태와 측면을 살필 것을 주문한다.
학문은 개별 사례나 그 특수성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는 성립할 수 없고, 요약과 분류가 출발이자 기초가 된다. 위에서 말했듯이 저자 자신도 “구조”를 종종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의 다양한 측면과 복잡성을 추구하는 것과 함께 그를 관통하는 제도와 구조를 파악하여 많은 사례들이 갖는 일반적인 성격을 논의하는 것이 모든 학문의 과제다.
평자는 위안부를 전장[戰場]의 성노동자로 파악한다. 그들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강제연행된 성노예동자가 아니라, 선불금을 수취하고 고용주[업자]와 장기노동을 계약한 성노동자였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한바탕 소란의 중님에 서게 된 미국 하버드대학의 램지어[Mark Ramseyer] 교수는 ‘연계봉공계약[年季奉公契約 indentured servitude contract]이 전전[戰前]이 정부 관리[허가제, 의무적 건강검진, 집창 형태와 이동 제한] 하에서 매춘업을 하던 공창[公娼]이나 전시 위안부가 고용주와 맺는 계약관계의 특성임을 밝힘으로써, 위안부가 노예가 아니라 장기계약노동자였음을 간접적으로 주장하였다.
이 내용의 중요성과 램지어의 주장이 한국 사회에 일으킨 파문을 생각할 때, 저자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혹시 일반적인 구조나 제도의 파악을 가급적 피하려는 저자의 학문적 태도∙방법과 관계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위안부는 물론 개인차는 있지만, 다른 직종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입이 보장되었고, 그 돈으로 조선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하고, 공창과 마찬가지로 선불금을 상환하거나 공창보다 훨씬 짧았던 계약기간이 종료되면 조선으로 귀국하거나 계약을 연장하였다. 그에 대한 구체적이고 풍부한 증거를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2013 안병직 역, 이숲]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투현장에서 가까워 이동에 위험이 따랐으므로, 이동의 자유는 업주의 인솔이나 허가를 받아야하는 제한이 있었지만, 이는 군인, 군속, 간호부 등은 물론이고, 전전 공창들도 마찬가지였다. 종전과 함께 번 돈을 분실하거나 군표가 순식간에 가치가 없어지는 불운을 겪었던 위안부도 있었지만, 그것은 종전 이전에 귀환한 이들과는 무관한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노예 상태”라고 하는 근거가 궁금하다. 공창도 노예상태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위안부 관련, 이 책에 있는 새롭고 유익한 서술 중에 정대협[현 정의연]의 북괴 지원과 그들과의 협력을 들 수 있다. 북한이 위안부 문제해결을 목표로 내건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는 “사실상 정부의 한 부분”이었고, 유엔에서 정대협 등과 함께 위안부문제를 호소한 일본의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도 대표는 “북한국적”이었다.
1991년 1월, 평양에서 열린 제1회 북일 국교정상화 협상에서 북한은 위안부 문제를 제기, 보상조치를 요구하였다. 북한은 유엔에서도 일본의 "양심적" 변호사들과 정대협 등 위안부운동단체와 연대하여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다. 북한도 위안부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대협과 북한 담당 기구는 1991년 5월 도쿄, 그 11월 서울, 1992년 9월에 평양에서 회의를 열었다. 양측은 “긴밀하게 협력하는 관계”였고, 유엔인권위원회에서도 1년에 두 번은 만났다고 한다.
윤미향 전 정대협 대표는 1992년 8월, 일찍이 “북에서는 정치적으로 조일수교협상을 진행하면서 전쟁범죄 배상을 확실히 받아내려고 하고 있다. 지금은 그 어느때보다도 남과 북 모두가 일본으로부터 정신대 문제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해내고 배상을 받아내기에 충분한 주체역량이 마련되어가고 있는 때이다”고 말했다. 주사파적 선전의 에테르가 짙은 언사다.
정대협이 조선-일본을 식민지-종주국 관계가 아니라 "교전국" 논리를 들여온 배경에는 위안부 문제를 이용하여 북일국교정상화 교섭에서 북한의 협상력을 증대할 의도가 있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많은 독자들이 이 정도에서 윤미향의 남편과 시누이가 체포, 처벌된1993년 [남매간첩단사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IV ]한일병합 불법론], [일본-한국, 독일-유대인이라는 조합],, [일본 군사적 위협론]

제4, 5장에도 여러 주목할 만한 서술이 있다. 첫째, [한일병합불법론]이 1990년대부터 비로소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서울대학교 이태진 교수가 이를 주장하는 책을 1995년에 발간했고, 일본에서도 도쓰카 에츠로[戶塚悅郞] 변호사가 이 문제를 제기했다. 도쓰카는 위안부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 1996에 인권위원회가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작성, 채택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는데, 평자가 볼 때는 “위안부문제의 세계화”의 선두주자이자 현 [위안부 성노예설]의 창시자다.
저자의 각주를 확인하니, 도쓰카가 [한일병합불법론]을 제기한 것은 1993년이다. 1993년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위안부문제는 일본 언론들이 한국인의 반일감정에 불을 지른 것’이라고 하였다. 한국의 [반일]은 일본이 시작한 일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반일∙좌파 “양심세력”은 위안부문제를 급조하여 한국에 수출하고, 서로 양국을 넘나들며 공동활동을 벌이고, 유엔, 북미, 유럽 등 국제무대에 진출했다. “한일병합불법론” 역시 그와 같지 않은지 의심해볼 일이다.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도쓰카는 ‘한일병합 불법’을 주장함으로써 조선-일본 관계를 식민지-종주국 관계가 아니라 “교전국” 관계로 치환하고, 그로써 국제법상 합법 행위로 인정될 수 있는 전시 징병이나 징용마저도 불법 행위로 규정하여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 그와 함께 위안부 제도를 “강간”이 아니라, 교전국 국민에 대한 “인도에 반하는 죄”, 즉 “전쟁범죄”로 치죄할 수 있는 논리적 전제를 만들었다.
뜬구름 잡는 논리지만, 한국 법원은 이를 수용했다.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은 4명의 한국인이 일본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벌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피고가 원고들에게 1억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하여 한일관계를 19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최대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때 가장 중요한 판결 논리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이라는 것이다. 2021년 1월 8일 전 위안부 배춘희 외 11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이 원고승소를 판결할 때도, “일본제국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라는 논리가 적용되었다.
지금 한국인들은 식민지 말기 전시동원을 독일의 유대인에 대한 반인륜적 범행위와 비슷한 것으로 여기는 인식∙감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생각이 언제부터 어떻게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보통 생각해보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생각은 200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도쓰카가 일찌기 1990년대에 이러한 사고방식을 제기했다고 한다. 지금도 한국인은 “독일은 사죄하고 배상했는데, 일본은 왜 안하는가” 하고 말한다. 독일 베를린에 위안부동상을 세울 때도 독일인이 유대인에게 갖는 죄의식에 호소했고 결국 성공했다. 조선인을 유대인에 견주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비춰볼 때, 물론 황당한 일이지만, 그것은 이미 국민의 상식과 정서가 되어버렸다.
저자는 일본을 “전범국가”로 인식하고 현존하는 군사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분위기 또한 1990년대 초에 위안부문제가 돌출한 뒤의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 전까지는, 심지어 1965년 국교정상화 당시에도 그저 막연하게 “문화적 침략”을 염려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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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宇衍

박유하 교수의 최근 저서 {역사와 마주하기}을 통해 
90년대 초 정대협[현 정의연]의 북괴 지원과 협력을 알 수 있다.
 
해당 부분 요약.

북한이 위안부 문제해결을 목표로 내건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는 “사실상 정부의 한 부분”이었고, 유엔에 참석해 정대협 등과 함께 위안부문제를 호소한 일본의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도 대표는 “북한국적”이었다.
1991.01. 북한은 평양에서 열린 제1회 북일 국교정상화 협상에서 위안부 문제를 제기, 보상조치를 요구하였다. 북한은 일본의 "양심적" 변호사들과 정대협 등과 연대하여 유엔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다. 한국과 일본의 지원자들과 연계하여 북한도 위안부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1991.05. 됴쿄, 91.11.서울, 92.09. 평양, 정대협과 북한지원단체가 회의를 가졌다. “긴밀하게 협력하는 관계”였고, 유엔인권위원회에서도 1년에 두 번은 만났다.
윤미향 1992.08. “북에서는 정치적으로 조일수교협상을 진행하면서 전쟁범죄 배상을 확실히 받아내려고 하고 있다. 지금은 그 어느때보다도 남과 북 모두가 일본으로부터 정신대 문제에 대한 진상 규명을 촉구해내고 배상을 받아내기에 충분한 주체역량이 마련되어가고 있는 때이다”고 말했다.
정대협이 조선-일본을 식민지-종주국 관계가 아니라 "교전국" 논리를 들여온 배경에는 위안부 문제를 이용하여 북일국교정상화 교섭에서 북의 협상력을 증대할 의도가 있었다.

(윤미향의 남편과 시누이가 <남매간첩단사건>의 주인공인 건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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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omments
Phile Young Choi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 김영삼, 1993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
1990년대를 전후한 한국인들의 기저에 깔려 있는 막연한 민족주의를 이것보다 더 잘 설명하는 예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서 반일은 정치 색을 띄는 이들이 이용하기 딱 좋은 자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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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ko Nagashima
『韓国が「反日」をやめる日は来るのか』の著者、鄭大均教授は、80年代を「膨張主義的ないし自己陶酔的ナショナリズムの台頭」と表しています。70年代まで、即ち、朴正煕大統領の歴史観は、むしろ自虐的であったが、80年代の高度成長やソウルオリンピック開催で民族主義が昂揚したと。金泳三はそれを利用しただけで、韓国の民族主義は左右関係ない。これは日本在住のKorea系の方々がしばしば指摘する事です。


鄭大均教授が仰るには、韓国にはナショナリズムの膨張を抑止するようなエスニック・マイノリティ(ethnic minority)の存在がない。ここが日本との違いだそう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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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uichi Kanno
歴史的には朱子学的「華夷意識」が大きいと思います。朝鮮は小中華だが倭は禽獣である。この両班の意識が文化的優越意識として庶民にまで浸透したのでしょう。チョッパ離などという差別意識を持つ言葉が浸透しているよう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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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호
저는 일본의 그 세력이 '자칭' 양심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를 '선'으로 보이도록 하기위한 일종의 겉포장 행위 일뿐이라는 겁니다.
진짜 양심은 '진실'을 밝히는 거죠. 내 입맛과 상관 없이 말입니다.
때로는 그 진실이 정말 괴롭고, 불편하고, 슬프더라도…
세상에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시는 이우연 교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응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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