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6

娼妓等周旋業と慰安婦の要員確保 外村 大 (한역)

 

창요 등 주선업과 위안부의 요원 확보 일본 내지와 조선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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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녀등  주선업과 ​​위안부의 요원 확보    일본 내지와 조선과의 비교

외촌   

경영학론집  Vol. 61 No.2  April 2022

키워드

인신 매매 매춘 위안부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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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선행 연구와 본 논문의 과제

2. 영업허가와 관련 법령

3. 통계가 나타내는 사업 경영의 실태

4. 업무 내용과 그 전문성

5. 불법행위와 단속의 한계

6. 위안부의 구인 수요에의 대응

7. 정리 - 국가 책임 논의 심화를 목표로


1. 선행 연구와 본 논문의 과제.

근대 일본에서는 업으로서 매춘을 실시하는 것이 합법이며, 그것을 실시한다 (정확하게는 형식으로서는 자신의 영업으로서이지만, 실태로서는 강해져서 실시, 혹은 부득이하게 그것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져 있었다고 할 것이다) 여성들도 적어졌다. 그리고 매춘을 위한 시설을 경영하는 자에게 여성들을 소개하는 업체도 있어 그들의 활동도 법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와 활동은 동시대에도 불구하고 비합법화 된 후에도 당연히 알려져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활동이 그 시대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특별 중요하다고 생각된 적은 없다. 그것에 대한 학술적 분석은 거의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말이 되면 위안부 문제와의 관계 로, 그러한 매춘 시설에 여성을 소개하는 업자에 대해서도 약간의 관심이 지불되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가 정치 외교의 문제로도 초점이 된 가운데, 여성들이 어떻게 위안소로 보내졌는지의 사실이 논의의 대상이 되고, 거기에, 「업자」가 관계하고 있는 사례 가 다수 있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한국인의 피해당사자가 명제 나오자 마침내 시작된 위안부에 대한 역사연구와 관련하여 '업자'의 활동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지적이 이루어졌다.

요시미 요시아키는 위안부를 모은 주체는 일본군이라고 한 데다 “업자가 손발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이 납치나 취업 사기 등 당시의 법률에서도 불법으로 여겨지는 행위에 의해 여성들을 위안소에 보내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그러한 '업자'의 활동에 대한 단속은 충분하지 않고, 특히 조선에서는 불법행위는 묵인되었다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또한 조선의 상황에 대한 광범위한 사료를 바탕으로 분석한 윤명숙은 관련 법령의 규제가 일본 내지(식민지를 제외한 현재의 47도도부현과 호호 같은 영역)에 비해 엄격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즉, 불법 행위

'업자'가 별로 제약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또, 공창 제도 자체가 일본의 침략, 식민지 지배 속에서 조선에 반입되어 퍼져 나간 것도 논의되고 있어, 그 중에서 필요로 한 창녀 등을 소개하는 「업자」도 증가 했던 것도, 윤이나 송연옥의 논문에서 소개되고 있다). 또한 '업자'의 증가는 창녀 등의 소개가 자금이 없어도 벌 수 있는 조선인에게 성공을 전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직업이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지적 중 '업자'에 의한 불법 행위는 특히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위안부 이외에도, 그러한 여성의 인신매매 이야기는 소설이나 연극에서도 등장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관계자의 회상기조차 있다). 경찰의 불법행위의 묵인도 매춘이나 불법 도박이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여 단속되지 않고 놓쳐있는 사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할 것 같다.

다만, 납치 때 매우 중대한 범죄가 과연 그렇게 쉽게 묵인되었는가 하는 의문은 남는다. 특히 전시하의 경우 치안질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범죄가 방치된다면 사회적 불안이 퍼진다. 그것은 총력전을 수행하고 있는 일본 제국에 있어서 피해야 할 사태이다. 또한 식민지 조선에서 공창제가 퍼져, 그것을 지원하는 창녀 등을 소개하는 '업자'가 증가한 것은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동시대 사회 속에서 얼마나 의미를 가졌는지는 충분한 음미가 필요하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도시화는 일본 내지에 비해 한정적이었고, 공창이 아닌 사창, 합법의 「업자」가 아닌 루트에서의 매춘 시설에의 여성의 소개라는 행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업 (= 반복된다는 것을 그러므로 이익을 얻는 행위)가 과연 쉽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존재하는 직업의 대부분은 어떤 종류의 전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술과 판단력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그것만으로는 경영을 유지할 수 없다. 거래를 하는 상대와의 신용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 번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관계를 오래 유지해야 할 것이라면 제공하는 서비스와 상품의 질을 묻는다.

그런데 기존의 연구에서는 그와 관련된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원래 '업자'가 되는데 무엇이 요구되고, 경영이 어떻게 유지되었다는 문제 자체가 설정되어 오지 않았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업자"에 대해 여성을 속이고 팔아 다니는 거친 범죄자라는 이미지에서만 이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문적인 지식 등은 없어도 좋고, 거래도 I회한이므로 신용도 필요 없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그래서 본 논문에서는 창녀 등의 소개를 실시하는 「업자」에 대해서, 보다 밟은 실태 파악을 실시하고 싶다. 즉, 그 업무 내용이나 경영의 본연의 자세, 불법 행위와 경찰의 단속의 관계 등의 해명의 해명을 시도한다. 동시에, 일본 내지와 조선의 각각에 있어서, 그러한 「업자」의 활동인가 어느 정도의 규모로 전개되고 있었는지, 그 사회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분석해 나간다. 게다가 일본군에 의해 진행된 위안부로 할 여성의 확보에 있어서 그러한 업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일본 내지와 조선과의 차이에 유의하면서 고찰을 제시하고 싶다.

이상이 본 논문의 과제이다.

2. 영업허가와 관련 법령.

구체적인 분석에 들어가기 전에 본 논문에서 분석 대상인 창녀 등을 소개하는 '업자'가 유사한 직업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어떻게 합법성 을 부여받았는지 확인하십시오. 거기에는 관련 법령과 행정 시책의 설명이 필요 하다 .

일본에서 매춘을 하는 여성을 두는 시설, 즉 유곽 기타가 이미 전 근대에 있어서도 많이 존재하고, 거기에 여성을 소개하는 「업」도 성립하고 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직업을 나타내는 명칭으로는 로 넣어집이라든가, 계암이라는 말이 있었다. 무엇보다, 범용 가게나 계암이란, 창녀 등의 소개뿐만 아니라, 여중이나 상점원등의 소개도 실시하고 있다. 그것은 근대 이후 사설 직업 소개소로서 존속하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악질적인 행위가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일의 내용을 숨기거나, 조건에 대해 과대한 이야기를 제시한 사기 행위나 여성을 납치하고 팔아 버리는 것도 행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행위는 전근대에서도 발각하면 처벌되었고, 근대 이후에도 초기 단계에서 정비된 법령에 의해, 즉 사기행위는 민법으로, 납치는 형법을 적용하는 등으로 처벌받았다. 다만, 민간에서 이루어지는 직업소개, 특히 매춘시설에 대한 소개에서의 범죄행위는 20세기 초반이 되어도 상당히 많았다. 19 Ⅱ년에 나온 경찰 법규를 해설한 서적에서는, 창녀 등 주선업자에 대해 “왕국인 오망혹시 혹은 유혹 시테 의뢰인 노 의사 노반 술소니 주선시・・・진시키하 묘령 노부녀ヲ 해외 마타 하 유카쿠니 납치시 혹은 강강 추업 ヲ영 마시무르 등 이노 폐해 거 태수 후카라스」라는 문언이 보인다

그러나 시기가 내려짐에 따라 이러한 문제의 발생 예방과 벌칙, 관계자의 통제 등을 위해 관련 행정기관과 단속법령의 정비, 공영사업으로서의 직업소개 확충 등이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는 창녀 등의 소개와 그 이외의 직업소개와의 「업자」를 분리하고(겸업의 금지), 각각의 적용법령도 구별되어 갔다. 이것은 제 1 차 세계 대전 후 일본 내지역에서 앞으로 진행됩니다.

했다. 즉, 일본 내지에서는 1921년에 공영의 직업 소개 사업에 대해 정한 직업 소개법(다이쇼 11년 법률 제55호)이 공포되었다. 이 법에는 영리직업소개사업에 대해서는 별도의 명령에 따른 조문이 있으며, 1925년 12월 19일에는 영리직업소개사업 단속규칙(다이쇼 14년 내무성령 제30호)이 공포되었다. 그 제3조에 따라 영리직업소개업자 및 그 동거 가족들에 의한 창녀 등의 소개는 금지되었다. 또한 공영직업소개소에서는 예창녀 숙부 등의 소개는 국가공공의 시책으로서 적당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취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1938 년 4 월 1 일에 공포 된 개정 직업 소개법과 같은 해 월 1 일의 후생 장관의 고시에 의해 게이샤와 숙부, 이와 유사한 직업의 소개는 개정 직업 소개법에서의 적법 범위에서 제외됩니다. 되었다 ).

한편 조선에서는 1940년 1월 11일에 제령 제7호로서 조선직업소개령이 시행될 때까지 통일적인 직업소개 법령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약간의 공영직업소개소가 있으며, 추가로 영리직업소개소가 존재한 강). 이 영리직업소개소는 일본 내지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상점원이나 여중 등의 업종을 취급했지만 조선에서는 연예, 창녀, 숙부 등 유사한 직업의 소개 겸업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조선직업소개령과 그 시행규칙 등에 따라 공영직업소개소


뿐만 아니라 영리직업 소개소 에서도 창녀 등의 소개는 금지된다. 다만, 그때까지 창녀등의 소개를 실시하고 있던 영리 직업 소개소에서는 그것을 계속하는 것은 인정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직업소개령 시행규칙의 시행(1940년 1월 20일)부터 1년에 한해 경과조치였다. 그 연장을 전하는 사료는 확인할 수 없었고, 1941년 1월 20일 이후에는 창녀 등의 소개를 겸업으로 실시하는 영리직업소개소도 없어졌을 것이다(l).

이와 같이 행정 당국은 창녀 등의 소개에 대한 취급에 대해 일반 직업 소개와의 분리를 진행했다. 동시에 일반 직업 소개와는 별개로 창녀 등의 소개에 대한 감독과 여러 절차를 정한 법령을 정비해 나가게 된다. 그것은 일본 내지 전체 또는 조선 전체에 통일 된 법률과 성령, 조선 총독 ​​부령이 아니라 일본 내지이면 각 도부현이 내는 도령, 부령, 현령, 조선에서는 각 도가 제정하는 길 령으로 제정되었다에).

그들에 있어서 창녀 등을 소개하는 「업」의 부르는 방법도 다양했다. 구체적으로는 '인사주선영업', '소개영업', '주선업', '주선영업' 등의 단어가 적용되고 있으며, 어느 것이 통일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행정용어인지는 확정되어 있지 않다. 부현에 따라 입양, 배우자 알선, 부동산 매매 등의 영업도 같은 규칙으로 감독 단속을 실시하고있다. 그러한 사정을 감안하고, 이하에서는, 게이샤, 창녀, 숙녀와 그와 유사한 직업을 소개하는 「업」에 대해 편의적으로 「창녀 등주선업」의 말을 이용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을, 「창자 등 주선업자 라고 부르기로 한다. 다만, 문맥에 의해 그것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는 경우에는 단순히 업자의 말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창녀 등주선업을 감독하고 단속하는 각 도부현의 규칙은 어떠한 내용의 것이었을까. 각각의 부현이나 도로마다 다르지만, 가계에 의한 피소개자·소개자들의 피해나 부정한 이익의 취득을 막아, 그것이 있었을 경우는 처벌하기 위한 것인 점에서는 모두 동일 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각각의 규칙은 사업의 신청과 허가의 조건, 영업에 있어서의 금지 사항, 경찰에 의한 체크에 관련된 조문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사업의 신청과 허가에 대해서는, 창녀 등주선업을 실시하는 사람은 소할 경찰에 신고해 허가를 얻어야 하는 것나, 그 때의 허가 조건이 기재되어 있다. 허가가 인정되지 않는 것은, 금치산자나 다른 직업 소개나 대좌 부업, 돈 대여 등을 겸업하고 있는 사람 등, 구체적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 외, 「공안을 해해 풍속을 뽑는 우려」 그 외 영업상 부적당하다고 인정하는 자”라고 하는 꽤 광범위한 재량으로 불허로 할 수 있는 문언을 가지고 규칙도 있다13). 요컨대 , 경찰 당국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자, 신용할 수 없는 자는 허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일부 부현의 규칙에서는 일정한 재산을 가지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이 밖에, 부의 부현의 규칙에서는, 타현에서 허가를 얻은 업자가 활동하는 경우에, 소할 경찰서에 신고하는 것도 의무화하는 등 타부현의 업자의 활동도 관리하려고 하는 것도 있었다.

구체적인 영업활동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금지되어 있다. 예를 들어, 허위를 묘사하거나 중요한 사실을 숨긴 소개, 직접 의뢰되지 않은 사람의 소개, 비밀 유출, 피소개자를 머물게하고, 재물을 대출한다. 없는데도 다른 소개를 권유하는 등이다. 게다가 신원이 불명한 자나 법정대리인의 승낙을 얻지 못한 미성년자, 남편의 승낙을 얻지 못한 아내를 소개할 수 없다는 조문도 보통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많은 부현 등의 규칙에서는, 소개가 성립했을 경우에는, 그 연월일, 본인의 성명이나 생년월일, 본적, 소개처의 주소, 전 부채, 받은 수수료 등을 장부에 기재해 , 그것을 일정 연수 보관하는 것, 경찰이 임검해, 장부 등을 열람하는 것도 규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악질적인 소개의 사례나 부정, 그것이 의심되는 사례등의 파악을, 어느 정도는 가능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연히 위의 규정을 지키지 않고 문제를 일으킨 경우에는 벌칙이 내려진다. 관할의 경찰 당국은 과료의 지불 등 외에 영업의 허가의 취소를 명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경찰력을 강화해도 그것을 뒤쫓아 불법행위를 하는 사람은 있다. 또 발견될 위험성이 그다지 아닌가, 위반에 의한 벌칙이 그렇게 무겁지도 않다면, 그 법령을 준수하자는 의식도 태어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현실에서는 이러한 규칙의 제정 후에도 창녀 등주선업자의 악질적인 행위가 근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법령이 있는 이상, 그에 대한 위반을 적발하여 벌칙을 내리는 것은 가능하며, 그것은 불법행위에 대한 억제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창녀 등주선업에 대한 법령의 정비의 의의는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통계가 나타내는 사업 경영의 실태.

그렇다면 그러한 창녀 등주선업자와 그 활동은 어느 정도로 사회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매춘 시설과 거기서 매춘을 강요받고 있는 여성들의 수 등과 함께 논할 필요가 있다. 이하에서는 행정당국에 의한 조사나 통계를 바탕으로 그것을 확인해 나간다.

표 1 일본 내지에서의 게이코치 가게 · 대좌 부업자 · 妓 · 娼妓 · 酌婦의 추이

단위인



       게이코치야    대여    좌식업자  게이샤     창녀

1925년  20, 176  1 1 ,756 79,348 52,886     

1926년  20923   11,532 79934   50800  101,966

1927년  20, 852Ⅱ  ,393  80086       50056       111 ,032

1928년  21,468  11, 155  80, 808  49058   104931

1929년 21,708Ⅱ ,081 80,717 49,477 73,942

1930년  21,530  10,861  80,075  52, Ⅱ 7  75,535

1931 년  21,343  9,799 77,3  할인  52064    8 및 019

1932년  21,040  10,500  74,999  5해 557  85 ,951

1933년  20,949  10,281  74,200  49,302  85 ,590

1934년  21, 197  9,738  72,538  45,705  85, 121

1935년  21,610  9,526  74,855  45,837  82,621

1936년  22052   9386   78, 699 47078   85685

1937년 22, 541 9238   79, 868 47,217 85,699

1938년  22649   9,012 79585   45 ,289 83,754

1939년  23, 192  8, 514  79,908  39,984  74,472

전거 : 내무성 경보국 「제9회 경찰 통계 보고」1934년, 「제16회 경찰 통계 보제엔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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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표 1은 일본 내지의, 표 2는 조선에 대한, 게이코치야나 대좌 부업, 게이샤, 창녀, 숙부의 수의 추이이다. 조선의 통계에 있어서의 게이코에서는 조선인도 상당하기 때문에, 아마 이 카테고리는 소위 요생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서의 게이코치야도 요생권번을 포함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녀 등주선업자의 인원수는 어느 정도였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한정적으로 밖에 파악할 수 없다. 일본 내지의 통계에 대해서 보면 내무성 경보국 「경찰 통계 보고」에는 「소개 주선업」이라는 항목이 있다. 그 중에서도 창녀 등의 선회 업체가 들어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중에는 그렇지 않은 다른 업종의 사람들의 수도 카운트되어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소개 선회'라고 불리는 것에는 입양자, 배우자, 부동산을 소개하는 사람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표 2 조선에서의 게이코치 가게 · 대좌 부업자 · 게이샤 · 창녀 · 추녀의 추이 단위 : 사람

 2 조선에서의 게이코치 가게 · 대좌 부업자 · 게이샤 · 창녀 · 추녀의 추이 단위 : 사람

 

두옥업

부업

 

 

 

1925 

510

594

2,235

 

606 _

1926 

250

579

3, 165

 

670 _

1927 

242

546

3,494

2, 883

566 _

1928 

271

538

4,073

2,907

1,578

1929 

270

560

4,449

3,053

1,712

1930 

243

520

4430

,

3,205

1,685

1931 

234

521

4,508

3,093

1, 836

1932 

217

496

4,476

2, 187

1, 557

1933 

253

477

4620

,

2,561

1,438

1934 

238

475

5,066

2,759

1,528

1935 

252

461

6,061

3, 109

1,704

1936 

296

465

6,983

3,575

1,749

1937 

308

471

7, 164

3,594

1,734

1938 

368

470

7,377

3627

,

1,762

1939 

343

539

8,348

3,712

1,796

1940 

329

480

8305

,

3934

,

1,616

1941 

당겨 0

474

6,723

3, 813

1,602

1942 

289

469

6,287

3, 850

1,616

전거·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각 연판.



두옥업  부업

1925 년  510594 2,235  606

1926년  250  579  3 , 165  670

1927년  242  546  3 ,494  2, 883  566

1928년  271  538  4,073  2,907  1 ,578

1929 년  270  560  4,449 3,053  1,712

1930 년  243520  4430

3,205  1,685

1931 년  234  521  4,508  3,093  1, 836

1932년  217  496  4,476  2, 187  1 , 557

1933 년  253477  4620

2,561  1,438

1934 년  238  475  5,066  2,759  1,528

1935년  252  461  6,061  3, 109  1 ,704

1936 년  296  465  6,983  3,575  1,749

1937 년  308  471  7, 164  3,594  1,734

1938 년  368470  7,377 3627

1,762

1939년  343  539  8,348  3,712  1 ,796

1940 년  329480  8305

3934

1 ,616

1941년  할인 0  474  6,723  3, 813  1 ,602

1942년  289  469  6,287  3, 850  1 ,616

전거·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각 연판.

등이다. 다만, 확실히 연예, 창녀, 숙녀 및 유사한 직업을 소개하는 업자 = 창녀 등 주선업자에 대한 통계가 전국에 대해서는 중앙 직업 소개 사무국의 조사에서 일부 연차를 확인할 수 있으며, 도쿄 부에 대해서는 경시청 통계가 있다. 그것을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조선의 창녀 등주선업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연구에 있어서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서의 '중개업'과 '고인구입업'이라는 항목이 창녀등주선업자로 간주되어 왔어. 예를 들어, 윤명숙은 “1913년, 소개업자(고인로 입업과 중개업)는 조선인 385명, 일본인 133명이었는데, 1940년에는 조선인 3,776명, 일본인 286 명이되어 "소개업자 중,

표 3 일본 내지 전국 및 도쿄부의 창녀 등 주선 업자 수 단위 : 사람

표 일본 내지 전국 및 도쿄부의 창녀 등 주선 업자 수 단위 : 사람

 

일본 내지 전국

도쿄부

1925 

 

242

1926 

6,456

266

1927 

 

245

1928 

4972

,

221

1929 

 

217

1930 

6,403

217

1931 

 

203

1932 

 

191

1933 

 

196

1934 

 

181

1935 

6,786

174

 36 

 

184

1937 

 

187

1938 

 

205

1939 

 

209

1940 

 

191

1941 

 

189

1942 

 

180


전거 : 중앙 직업 소개 사무국 「영리 준예 창녀 추녀 소개업 조사」1929 년, 사회국 직업과 「예 창녀 준부 등 주선 영업자 수조」(「종촌 씨 경찰 참고 자료 제 46 집」, 아시아 역사 자료 센터 · 레퍼런스 코드 · A05020179500) , 경시청 「경시청 통계서」각 연판.

표 4 일본 내지와 조선 인구 10만명당 창녀 등의 수


주 같은 연차에서도 숫자가 다른 것은 사회국 직업과의 숫자를 기재하고 있다.

 

일본 내지 (1930  )

조선 (1930  )

실수

10 만명당 수

실수

10 만명당 수

총 인구

64,450,005

 

21,891,180

 

게이코치야

21,530

33.4

243

 

대여 부업자

10, 861

16.9

520

 

 

80,075

124.2

4,430

202

창녀

52, 117

80.9

3,205

14.6

숙녀

75,535

117.2

I ,685

 

창녀 등주선업자

6,403

 

128

 

전거 . 내각 통계국 「대일본 제국 통계 연감」 및 내무성 경보국 「제 9 회 경찰 통계 보고」 1934  , 중앙 직업 소개 사무국 「본방 니치 켈 영리 직업 소개 사업 조사」

.

창녀나 추녀 등 접객업부를 주선하는 고인구입업자는 1913년 조선인 25명, 일본인 78명이었던 것이, 40년에는 조선인 219명, 일본인 62명”으로 변화 한 것을 소개하는 나라. 하지만 원래 '중개업' 이콜 창녀 등 주선업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외의 「중개」, 즉 유가 증권이나 부동산, 혹은 식품 등의 매매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인구 입업」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도, 창녀 등 주선업이 거기에 카운트되고 있을 가능성은 있지만, 동시에 거기에는 여중이나 상점원의 소개, 즉은 영리 직업 소개업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서 '고입구 입업'의 인원수를 창녀 등 주선업체 수로 생각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결국,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서는 창녀 등 주선업자의 수는 불명하다.그리고, 불행히도, 다른 자료에서도 그것이 기록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단, 중앙 직업 소개 사무국 1931년, 1931년 9월 말 현재로, 조선에 대해서는 128이라고 하는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일본 내지에 비해 조선에서는, 게이코치야, 대좌 부업자나, 게이샤, 창녀 , 숙부, 창녀 등 주선 업자의 수는 적다. 그리고 그 적은 일본 내지와 조선과의 인구 규모에 단순히 비례한 것이 아니다. 1930년에 대한 인구 100,000명당 숫자를 내어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표 4). 조선에서는 일본 내지만큼은 유곽 등의 공창제하의 매춘 시설, 거기서 일하는 여성들, 창녀 등 주선업자는 많지 않았다.

 

그럼, 소개 주선업에 의한, 매춘 시설에의 여성의 소개는 어느 정도의 건수에 걸렸을까. 이 점에 대해서도 자세한 자료는 적지만, 도쿄부에 대해서는, 구인·구직·취업 건수를 알고, 그것을 정리하면 표5와 같다. 조선에 대해서는, 전술한 중앙 직업 소개 사무국의 자료에 1930년도의 건수의 소개가 있다. 그것은 구인건수 4018건, 구직 4815건, 소개건수 3438건, 취업건수 3020건이라는 것이다. 조선의 업자는 전술한 바와 같이 1931년 9월 현재의 128명이라고 하는 숫자밖에 모르지만, 1930년도와는 시기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이 수를 바탕으로 1 업자당의 연간의 취업 건수를 나누면,

23.6이다. 이것은 도쿄부의 숫자와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창녀 등주선업자를 통한 성매매 시설 취업이 어느 정도 일반적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도 전국적인 통계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음과 같은 자료가 어느 정도 참고가 된다. 우선, 일본 내지에 대해서는 1934 년

주: 조선에 대한 창녀 등주선업자 수의 128명은 19인년 9월의 숫자이다.

 

표 5 도쿄부의 창녀 등 주선 업자 수와 취급 수의 추이  단위.

 : 조선에 대한 창녀 등주선업자 수의 128 명은 19 인년 9 월의 숫자이다.



년 [1]

업체 수

채용

구직

취직

- 업체의 추천자 수 평균

1929년

217

9,552

8,371

6, 130

28.2

1930년

217

8,336

7,948

5,434

25.0

1931년

203

7,976

7,866

5,249

26.3

1932년

191

8,006

8239

,

5,770

30.2

1933년

196

8,902

12,748

6,6 

33.8

1934년

 

8,924

8,242

6,208

34.3

1935년

177

8,741

8,771

6,355

35.9

1936년

184

9,211

9, 160

6,631

36.0

1937년

187

7,864

7, 535

5,828

31.2

1938년

205

7,430

6,428

5,377

26.2

1939년

209

6,945

5,609

4,958

23.7

1940년

191

4,968

4, 864

4213

22.1

1941년

189

5,606

4, 128

3495

,

18.5

1942년

180

3,232

2,338

1,852

10.3

전거:경시청 “경시청 통계서” 각 연판.

시점의 아오모리현 하치노헤시에 대한 조사가 있다. 그에 따르면 같은 해 안에 벌어들인 여성은 948명으로 내역을 보이면 예예 122명, 창녀로 6명, 숙부 289명, 여급 193명, 그 외 218명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득자의 경로는, 「주선가게의 소개에 의하는 것」이 534명, 「치기연고의 손을 거치는 것」100명, 「모집 사업자의 손을 거는 것」이 86명이었다 했다. 하치노헤시는, 곤궁한 민중이 많은 농촌의 인접지이며, 창녀 등주선업자도 지방 도시로서는 많다(그 수는 19이며, 1935년의 국세조사에서 하치노헤시의 인구가 6만 2214명 그러므로 그 전년은 약간 이것보다 적다고 봐도 인구 10만명당 수는 아마 30정도일 것이다.

1935년도 같은 정도이다). 그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해도, 일본 내지에서는, 많은 경우, 게이샤·창녀·급부·여급이 된 사람은, 그 창녀 등 주선업자를 통해서, 직장을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생활에 곤란한 가정의 부모가 창녀 등주선업자와 접촉하는 것도, 그다지 드물지 않았다는 것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도시라면 그러한 사업소가 있어 연락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매춘 시설에서 일하게 된 여성들의 대부분은 창녀 등주선업자에 의해 취업처를 소개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1930년 말 창녀에 관한 숫자를 알 수 있다. 즉 조선 내 일본인 창녀 1798명 중 1536명, 조선인 창녀 1372명 중 985명이 창녀 등주선업자를 경유하여 취업하고 있다. 비율을 나타내면 일본인 창녀에서는 85.4%, 조선인 창녀에서는 7L8%가 된다(업자를 통하지 않는 경우는 친족이나 부모, 혹은 본인이 직접 대여 부업자와 협상을 한 것으로 한다)). 다만, 조선에 있어서는, 전술한 바와 같이 창녀도, 창녀 등 주선업자 자체도 일본 내지에 비해 소수였다. 따라서 전문적인 업체와 연락하여 그 소개에 의해 조선내 매춘시설에서 취업하게 된 자의 절대수는 일본 내지와 비교하면 적다. 조선사회에서는 창녀 등주선업체의 이용이 일본 내지만큼은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이는 물론 경찰의 영업허가를 가지고 창녀 등 주선업체와 역시 경찰에 영업을 인정받은 매춘 시설의 경영자와의 거래 사례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 뿐이다.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의 뒤따른 루트가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은 후술한다.


4. 업무 내용과 그 전문성

다음으로 창녀 등 주선업자가 어떠한 업무를 하고 이익을 얻고 있었는지 어떻게 경영 유지가 도모되었는지를 살펴본다. 이를 위해서는 창녀 등과 성매매 시설 경영자와의 관계를 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게이코, 창녀, 숙녀의 사실상 사용자는 각각 게이코치 가게, 유곽, 요리 가게의 경영자이다. 유곽의 경영자는 행정용어로서는 대좌 부업자라고 불린다. 게이코는 기예의 피로, 창녀는 매춘이 일로, 모두 건전으로서는 자영업자이다. 그러나 창녀는 대좌 부업자에 종속되어 그 지시하에 손님을 취해 매춘을 실시해야 한다. 게이코에 대해서는, 단순히 기예를 피로하는 것으로 돈을 얻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역시 종종 게이코치야의 경영자에 종속해, 그 지시하에 손님을 취해 매춘을 실시한다. 이러한 관계는 종종 게이코치 가게의 경영자와 대좌 부업자가 게이샤, 창녀를 안는 것으로 표현된다. 거기에서 게이코치 가게의 경영자와 대좌 부업자는 게이코와 창녀와의 관계에서는 포주라고 불렸다. 숙녀도 말 그대로 요리를 옮기고 먹이를 하는 일만 하는 사람도 있지만, 통상은 고용주인 요리사의 경영자에 의해 손님에 대한 매춘을 강요받고 있다. 그리고 게이코치 가게의 경영자, 대좌 부업자, 요리 가게의 경영자는 게이샤, 창녀, 숙녀가 손님에게 지불하는 꽃값, 즉 매춘의 대가의 몇 할인을 얻어 수익을 올리게 된다게다가 이 외에 게이샤, 창녀, 숙부에게 빌려주는 의상대나 식사대 등에서도 이익을 얻고 있다.

당연히, 자신으로부터 타인의 지시하에 매춘한다는 처지를 바라는 한자는 없다. 부득이하게 그것을 하는 것은, 빚을 짊어지고, 매춘에 의해 상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청나게 어리 석다. 

대체 근친자들에 대한 매춘 시설 경영자에 의한 대출이다. 그러한 전부채의 액수는 때로는 1000엔 이상, 동시대에 있어서 집 1채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액이 되었다.

창녀 등  주선업자는 이러한 매춘 시설 경영자에게 여성을 소개하고, 설정된 전부채의 일부를 수수료로 얻는다. 이 금액은 일반적으로 전 부채의 약 10 %입니다. 즉, 창녀 등  주선업자는 1회의 소개로 100엔 이상을 손에 넣는 것도 자주였다. 100엔 정도 있으면 도시에서 4, 5명의 가족이 살아가기에 충분하다). 물론 전 빚이 소액인 경우도 있어 다양한 경비가 걸리므로 매월 한 명만 소개해 경영을 계속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표준적인 경영으로는 연간 20~30명 정도, 따라서 달에 2, 3명의 소개로 80엔 정도를 얻고 있다.

이러한 창녀 등  주선업의 사업 전개에서는 우선 소개해야 할 여성=구직자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구직자는 매춘 미경험자는 아니다. 이미 연예, 창녀, 숙녀로 일하고 있는 여성으로 포주나 고용자를 바꾸는 것을 희망하는 사람이라도 좋았다. 오히려 매춘 시설 경영자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여성 쪽이 일만의 예상도 붙는 등 메리트가 있었다2의. 이러한 대체는 포주와 고용주가 아는 창녀 등 주선업자에게 연락을 취하여 진행하거나, 원래 그 여성을 소개한 업체가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물론, 매년 일정수, 폐업하는 여성과 같은 정도는, 매춘 미경험자의 여성을 참가시키는 것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새롭게 매춘 시설에 취업해야 할 여성은 어떻게 찾아내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창녀 등 주선업자나 그 사용인이 수당대로 여성에게 말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비효율적이며 법령상 금지되었다 (1). 그래서 창녀 등 주선업 자는 농촌 등에 거주하거나 행상 등에서 각지를 주위에 "곤궁하게하는 가정의 조사, 생활 상황의 조사를 위해 거주하는"자와 "잠행적인 연락 방법, 수단을 사용한다히카리에 양에게 구직자의 개척」을 진행하고 있었다22). 그러한 곤궁 가정 등으로부터 창녀 등 주선업자의 아래에 여성을 데려오는 행위는 종종 유인이라고 불리므로 23) 이하, 그것을 행하는 사람을 유인자라고 부른다.

그러한 유인자들과의 연락으로 창녀 등 주선업자에게 와서, 매춘 시설에 소개되게 되는 여성들은, 누구라도 좋고, 납치하거나, ​​속이거나 해서 데려온 여성이라도 상관없다는 것은 아니었다이러한 거친 범죄로 확보 한 여성의 거래는 매춘 시설 경영자, 창녀 등 주선업자 모두에게 위험하다. 발각한 경우 영업을 지속할 수 없으며 재판이 되어 수감될 수도 있다.

동시에 잘 모르는 여성을 받아들이고 일하는 것은 매춘 시설의 경영상도 좋지 않다. 매춘 시설의 경영은 취업하는 여성의 일 = 손님이 얼마나 붙는지에 달려있다. 그리고 여성을 고용 할 때 매춘 시설 경영자는 일반적으로 부모에게 돈을 빌려줍니다 (가장 납치하여 데려온 여성의 경우 부모와의 전부 빚 설정은 없습니다. 있을 것이다). 이 금액이 상당히 많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그러한 많은 금의 대출과 이른바 투자의 회수는 여성의 신청을 희망하는 사람에 의한 빚 잔액 의 지불이라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여성이 손님을 취하고 계속해서 실현함으로써 실현된다


ーーー

이것은 취업해야 할 여성의 선택에 의해 매춘 시설의 경영도 큰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가 있는 여성을 취업시키는 것으로, 매춘 시설 경영자가 전망한 이익을 얻을 수 없고, 나아가 최초의 투자=부모에게의 대출의 금액도 회수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혹은 큰 손실로 이어지지 않을 때까지도 트러블에 성가신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심신에 병을 앓고 있다든가(성병의 검사는 행해지지만, 일에 걸리게 하는 병은 그것만이 아니다), 서류가 위조였기 때문에, 그 여성이 일할 수 없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성매매 시설에서 일하는 데 납득하지 않는 여성이라면 정신에 변조를 하거나 자살을 도모해도 이상하지 않고, 자포자기가 되어 날뛰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손님을 취하는 것도 어렵다. 본인 이외의 문제도 있을 수 있다. 전 부채의 추가를 자주 요구하는 대우에 대해 클레임을 붙이는 부모나 정부가 있어도 귀찮다. 또한 매춘 시설 업체가 대출 한 돈을 얻은 후 도망을 도모하기 전 부채 사기도 종종 문제가되었다. 매춘 시설의 경영에서는 이러한 점의 고려도 중요했다.

따라서 창녀 등주선업자에 의한 소개도 신중하게 진행해야 했다. 본인이 성매매에 종사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신분관계가 분명하지 않은 여성(어딘가에서 납치하거나 속여 데려온 경우는 그렇다)를 취급하는 것은 피해야 했고, 본인이나 부모가 뭔가 문제를 가져올 가능성이 없는지 등의 체크도 필요하다. 게다가 소개에서는 전부채의 설정이 부수되는 것으로, 그 때문에  여성이 어느 정도 이익을 주는 일자가 되는지의 평가도 요구되었다.

그러한 절차를 밟아 소개가 성립하면, 창녀 등주선업자는 수수료 수입을 얻을 수 있다. 다만, 그들의 일은 거기서 종결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소개한 여성과 그 부모, 소개처의 성매매 시설 경영자와의 관계는, 전빚 완제하거나 또는 대체로 포주나 고용자가 바뀔 때까지 계속된다. 명문화된 계약에 근거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창녀 등 주선업자는 매춘 시설에 “소개 취직시킨 예창관의 가업 중에 일어나는 장애물에 대해서는 대체로 해결에 닿아야 했다”. 특전 빚의 상환이 끝나지 않은 여성이 취업처에서 도망쳤다면 "수색 또는 채무의 독촉에 해당하는 등 제일선에 서는 것은 소개업자[창요 등 주선업자]의 부정한 관습 책임"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트러블을 예방하기 위해서도 창녀 등 주선업자는 “한번 소개를 한 “옥”[매춘시설에서 일하게 되는 여성들을 가리킨다]는 종신 돌보는 모습 없이 가동업자 〔창녀 등이 된 여성〕 급경의 친권자와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돌보는'는 물론 매춘 시설에서 일하는 여성과 그 부모의 서로의 모습을 알린다는 친절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에게 가족의 상황을 의식시킴으로써 자신이 희생할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고 일로 향하게 한다는 효과를 창녀 등 주선업체나 매춘 시설 경영자는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전 부채를 매개로 한 창녀 등이 된 여성에 대한 "부모와 창녀 등 주선업자와 매춘 시설 경영자와의 공동 관리"가 성립되어 유지되었다.

또한, 이러한 관계의 유지는 창녀 등 주선업자가 일단 소개한 여성을 대체하여 이익을 얻는데 있어서도 장점이 있었다. 교체는 여성 본인의 희망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매춘 시설의 경영자의 의도와의 관계

같은 이유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혹은 부모의 추차금(빚 추가)의 신청을 포주가 거절하고 다른 포주를 찾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대체를 하게 되면, 여성 본인의 일만 등을 새로운 소개처에 전해야 한다. 한번 소개한 여성들과의 연락을 유지하고 있다면 창녀 등주선업체는 재갈의 움직임이 있는지, 그렇다면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새로운 포주와 협상할 것인가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창녀 등주선업자의 활동을 본다

때때로 그것은 납치나 사기로 인한 권유 등의 범죄의 반복으로 계속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업무는 전문적인 지식과 판단력, 정보 수집 능력 등을 갖추어야 했다. 우선, 정보를 가져오는 유인자나 소개처가 되는 매춘 시설 경영자와의 인맥을 구축해야 했다. 성매매 시설에 소개해야 할 여성에 대한 문제의 유무를 확인함과 함께,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를 파악하고, 전 부채가 얼마까지 설정할 수 있는지를 산출하고, 협상을 정리하는 능력이 요구되었다. 게다가 수수료를 얻은 후에도 소개한 여성의 일에 일정한 책임을 지는 것이고, 거래처가 되는 매춘 시설 경영자로부터의 신용도 불가결했다.

따라서 창녀 등주선업자는 일반적으로 관련 업무에서 일을 하거나 어느 정도의 경험을 쌓은 후에 독립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점에 대해 자세하게 기재한 사료는, 보이지 않지만, 도쿄시 사회국의 보고서에는 창녀 등 주선업자 7명의 간단한 경력이 소개되고 있다이에 따르면, 2명은 배우자가 창녀 등주선업으로 그 보조를 실시하고 있으며, 1명은 「로입업」등주선 업무도 가능한 시기에 있어서)의 거주 종업원으로서 일한 후에 독립, 또 다른 1명이 요시하라에서 대서업을 경영해, 한층 더 시나가와의 대좌 부업에서 「서기」의 경험을 가진다. 그들은 개업 전에 인맥이나 전문적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머지 3명 가운데 1명은 목수, 다른 1명은 하숙업 후에 음식점 경영이므로 창녀 등주선업과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지만, 1명은 순사 후 대서업을 하고 있었다). 경찰은 대좌 부업이나 창녀 등 주선업의 영업 허가를 하고, 창녀 등의 위생 검사 등도 관할하는 거기서 어떠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는지, 전문적 지식을 얻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아오모리현 하치노헤시내의 창녀 등 주선업자 19명 중 여성의 12명은 “모두 과거에 있어서 연창, 숙부를 가업으로 한 것”이었다). 그녀는 소개해야 할 일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사용자에게 소개함으로써 사업을 성립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사례는 적지만, 이로부터 창녀 등주선업은 누구나 쉽게 진입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던 것이 어느 정도 뒷받침될 것이다. 경험에 근거한 지식이나 판단력, 인맥 등을 얻어 시작할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5. 불법 행위와 단속의 한계.

이상, 창녀 등주선업의 업무 내용과 경영에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왔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국의 허가를 얻어 개업한 자에 의한 법령을 전제로 한 활동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허가없이 사실상 사업으로

창녀 등을 소개하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동시에 당국의 허가를 얻어 사업경영을 하는 소유자라 하더라도 그 전원이 불법행위와 무연이라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매춘 시설도 정규 사업 허가를 얻지 못한 것도 있다. 애초에 창녀의 감찰을 갖지 않는 게이샤와 숙녀가 매춘을 실시하는 것 자체도 법령 위반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뿐만 아니라 어떤 사업 허가 자체도 얻지 않고 비밀리에, 혹은 당국의 묵인을 얻고, 매춘을 하는 여성을 관리하고 이익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이하에서는 그것에 대해 설명한다.

우선, 「모그리」등이라고 불린, 당국의 허가를 얻지 않고 창녀등의 소개를 실시하고 있던 사람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러한 무허가 업체의 활동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필요한 것은 성매매 시설 경영자나 그들과 이어지는 사람과의 연락과 젊은 딸을 가지고 빈곤가정에 대한 정보, 취업을 향하게 하는 화력이며, 다른 일과의 겸업도 가능했다. 다만, 그것을 업으로서 행하는, 즉 몇번이나 소개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법에 접하는 행위가 되어, 발각하면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무허가로 소개업무 자체에 대한 처벌은 구류 내지 과료이며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면허업자로 활동하는 자는 적지 않았다. 게다가 발각만 하지 않으면 법령상의 제약을 신경쓰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법외의 수수료를 받고, 속이고, 납치하거나 지배하에 둔 신원불명이거나, 호적 등의 서류를 갖추지 못하는 여성을 매춘 시설에 소개할 수도 있었다. 그 경우에는 전부채도 설정하지 않았으므로 부모나 매춘 시설 경영자와의 연속적인 연락의 필요도 없었다. 

다만, 납치나 허위 조건에서의 권유 등의 수단을 이용하여 확보한 여성의 소개는 매춘 시설 경영자도 비밀을 지키는 것이 조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영업 허가를 얻고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렵습니다. 게이샤와 창녀, 숙녀로서의 일은 경찰서에의 신고가 불가결하며, 그 때에는 호적 등의 서류의 체크나 본인으로부터의 사정 청취 등도 행해진다

있던 31). 따라서 사기나 납치를 저지르는 무허가업체는 그러한 경찰의 정식 등록을 거치지 않은 여성들, 즉 사창을 둔 성매매 시설과의 거래를 주요 루트에 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사창을 두는 매춘 시설은 적지 않았다.

사창은 숨겨진 존재이므로 전체 수는 불분명하지만, 경찰 당국은 사창이 다수 모여 있는 곳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그 의미에서는 그러한 사창은 오히려 '준공창'이라는 호칭 쪽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러한 경찰의 파악 가능한 범위에서 사창에 관한 통계도 있다. 그것에 의하면, 우선, 1930년 6월 현재의 일본 내지에서는, 사창이 207곳 있어, 사창을 두는 매춘 시설(부르는 이름은 일정하지 않고, 다양한 명목으로 가게를 세웠다. 라고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던 가게에서는 명주가게, 신문을 둔 가게에서는 신문 종람소라고 자칭하는 케이스가 있었다)를 경영하는 사람=포주는 4513명, 사창의 수는 1만 2181명이 되고 있었다 32). 조선에 관해서는 어떠한 수법에 의한 조사인지 불분명하면서 1925년 7월 시점의 경찰조사에서 “전선에 흩어져 있는 사창급의 의심스러운 자내선인을 통해 실로 7651명의 많음을 산출하는 상황 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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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사쿠사의 명주가게에서는 속여서 데려온 자가 적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 범죄의 비밀을 유지하고 거래를 할 수 있는, 무허가업자와 무허가의 매춘시설 경영자의 연결이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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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불법행위로 모은 ​​여성들의 소개에 관여하고 있던 것은 무허가업체뿐이 아니다. 창녀 등주선업자가 의지하는 유인자가 원래 무허가업자라는 것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무허가업자가 속여 데려온 여성을 창녀 등 주선업자가 비밀리에 사창을 둔 매춘 시설 경영자에게 소개할 수도 있었다. 영업허가를 가진 매춘시설 경영자가 속아서 데려온 여성을 받아들여 사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는 위협하고 말하는 것을 들려주면 경찰의 체크를 빠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령 위반을 방치하는 것은 문제이다. 경미한 범죄는 어쨌든 속이거나 납치하거나 데려온 여성에게 매춘을 강하게 한다는 것은 사회통념상 굉장히 용서되지 않는 행위이다. 따라서 무허가업체의 활동은 물론 허가를 얻고 있는 창녀 등 주선업자나 매춘시설 경영자의 불법행위도 단속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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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20년대 이후에는 당국으로서도 단속 강화에 육박하고 있었다. 폐창운동이 활발해져, 그것은 제국의회, 지방의회에서도 논의의 俎上를 향했다. 실제로 일본 내지에서는 일부 현에서 폐창이 실현되고 있다(그렇다고 해도, 거기에서는 사창이 존재했기 때문에 완전히 매춘이 근절한 것은 아니다). 또한 제1차 대전 종결 후 성립한 국제연맹과 ILO도 인신매매나 매춘 강제 규제에 임하고 있었다). 게다가 1930년대에는 쇼와 공황이나 냉해로 흉작에 시달리는 농촌에서의 딸의 신매가 큰 사회 문제로 주목을 끌었다. 신문과 잡지에도 관련된 기사가 내걸려 사회적인 관심도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배경으로 창녀 등의 소개 행위와 창녀 등으로서의 영업 허가에서의 심사나 감독, 거기에서의 불법 행위의 단속은 강화되었다. 일본 내지의, 특히, 경제적 궁핍이 원인이 되어, 다수의 여성이 「신매」의 대상이 되고 있던 도호쿠 지방 각 현에서는, 행정 당국이 대책을 내세우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창녀 등주선업자에 대한 감독 강화, 불법행위에 대한 엄벌, 무면허업자의 활동 절감, 구직자로부터의 상세한 사정청취 등이 지시되어 있었다.

이러한 시책이 얼마나 공을 연주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악랄한 불법행위를 모두 적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무면허업자에 대해서도 오히려 증가했다는 소문을 전하는 사료도 있다). 그냥  

소개를 받으려고 하는 여성에 대해서, 가정의 사정이나 전빚의 용도도 포함해 사정을 자세하게 듣는다, 타현에의 소개시에는 신고를 시키는 등의 조치를 경찰이 취하고 있는 것 등을 생각하면 4의, 허가를 얻어 활동하고 있는 창녀 등 주선업자에게 있어서 불법 행위나 거기에 저촉할 것 같은 활동은 하기 어려워지고 있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무허가업체에 대해서도 신매방지에 힘쓰고 있던 관계자는 “단속이 엄중한 오늘날에는 그 활동 범위가 줄어들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1). 어색한 입장에서도 경찰의 허가를 얻은 유곽이 늘어선 도쿄의 요시하라에 대해서 일어날 수 없게 되어 ゐ한다”고 적혀있었다 42). 영업허가를 얻고 있는 창녀 등주선업자와 매춘시설 경영자의 활동은 경찰 감시 중 합법의 틀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상은 어디까지나 일본 내지에 대한 동향이다. 조선에서는 다른 조건이 있었고 상황은 달랐다. 우선 조선에는 보통선거도 진행되지 않았고 일본 내지와 같은 지방의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 단체의 활동도 일본 내지 이상으로 제한이 있었고, 신문 등에서의 의견 표명도 자유롭지 않았다. 애초에 일본 내지처럼 신문이나 잡지가 보급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의 존재를 의식한 여론이 행정당국을 움직일 수 있는 회로는 거의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국제적인 매춘 등에 대한 규제도 식민지에 대해 제외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조선의 경찰당국은 창녀 등의 소개에 관계되는 악질적인 인권침해 등의 단속을 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끼지 못할 수 있었다. 조선농민의 곤궁은 일본 내지 이상으로 심각하고, 따라서 여성의 인신매매도 다수 행해지는 상황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가 신매방지와 관련된 특별 한 대책은 수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경찰관이 법령을 엄격히 적용하고 업무에 힘쓰는 그것을 독려한다는 것만으로도 대책이 된다. 하지만 만약, 통상 이상으로 경찰관이 업무에 힘쓰었다고 해도, 조선에서의 창녀 등의 소개에 관계되는 악질적인 행위의 적발은, 일본 내지와 같은 레벨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순사 1명당이 담당하는 주민의 수는 일본 내지에 비해 많았고, 더하여, 조선의 순사의 과반수 이상은 일본인이며, 그 중에는 조선어의 능력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도 상당수 그러므로 조선인의 커뮤니티 내부에서 비밀리 에 행해지는 범죄행위의 적발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를 갖지 않는 자는 호주여도 드물지 않았다.매춘 시설에 여성을 보내기 위해 취하는 악질적인 행위는, 상대가 문자를 모르는 것에 덧붙여 이루어진다).일본 내지 이상으로, 속일 수 있는 여성이나 그 부모는 많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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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외에 상당히 중요한 점에서 조선에는 일본 내지와 다른 조건이 있었다. 이는 경찰 당국이 허가를 준 업체가 창녀 등주선업자와 매춘 시설 경영자 중 어느 것을 취해도 적다는 것이다. 이미 본 것처럼 인구 10만명당 수로 봐도 일본 내지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즉, 경찰 당국이 창녀 등의 소개나 등록이 법령에 따라 행해지고 있는지 여부를 체크할 수 있는 대상자도 한정적이었다.

물론 조선에서 무면허업자나 사창(특히 완전 경찰이 파악되지 않은 사창)도 또한 적다고 한다면 파악할 수 없었던 불법행위도 문제가 될 만큼 많지 않다는 것도 된다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작다. 곤궁하고 있는 민중이 다수 있어 그 상당한 수가 비식자자라는 조건은 무면허업자에게 있어서는 편리했고, 조선내에서 사창을 두는 매춘 시설도 많았다. 조선내의 사창은 1925년에 7651명을 세고, 이는 같은 해의 조선내의 연예·창녀·숙부를 합한 수의 6900명을 웃돌고 있었을 정도이다. 덧붙여서, 일본 내지에서는, 1930년의 사창은 1만2181명이며, 같은 해의 연예, 창녀, 숙부의 합계는 20만 7727명으로, 압도적으로 후자가 많다. 일본 내지와 달리 조선의 매춘 시설이란 사창을 두는 장소 쪽이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40

게다가, 1920년대 이후, 매춘 시설에서 일하는 조선인 여성의 소개처는, 조선 밖에도 퍼져 있었다. 만주와 일본 내지에서도 조선인 여성을 둔 매춘 시설 경영자가 늘고 있었다. 만주의 매춘 시설에서는, 이미 만주사 변발발시에도 매춘에 종사하는 조선인 여성이 있어, 한층 더 「사변〔1931년의 만주 사변〕후 6년간에・・・반도의 여자가 많다 되었다”. 이것은 "내지에서 여자를 안고 가면 여비와 돈이 걸린다"에 대해 "싸게 얻는"조선인이 "포주에게 쏟아지게 되게 된다"는 사정이 있었다고 된다 ). 일본 내지에서는, 1920년대에는 청년층의 남자를 중심으로 하는 재일조선인 증가의 증가를 배경으로, 매춘을 실시하는 조선인 여성을 둔 요리점이 되어 있었다). 1930년대에는 '조선유곽'이라 불리는 구획조차 성립되어 그것이 문제가 되어 당국이 철거하는 사태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각지에서 그러한 조선인 여성을 두는 매춘 시설은 증가의 경향을 보이고 재일조선인 사회 속에서 문제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러한 만주나 일본 내지의 매춘 ​​시설에서 일하는 조선인 여성은 역시 거의 사창이었다. 같은 시대의 재일 조선인 사회의 리더는 문제로 여겨지는 조선인 여성을 두는 요리 가게에 대해 「밀음매굴」이라고 표현하고 있었고(1), 원래 일본 내지에서는, 조선인을 창녀로서 등록해 해서는 안 된다는 행정당국의 방침이 있었다). 만주 에 대해서도 대련의 상황에 대해 “조선피(사창)의 세력하에 있다”고 기술하고 있는 사료가 있다).

즉, 조선에서 매춘에 종사시키는 여성의 거래는 상당한 부분 무면허업자와 무면허 매춘시설 경영자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경찰을 체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에서는 여론을 배경으로 한 단속 강화도 없고 경찰차 자체에도 일본 내지에 비해 열등한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무허가 업체에 의한 불법 매춘 시설에 대한 여성의 소개가 감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익을 올릴 수 있다면, 새롭게 거기에 진입하거나, 업으로서 항상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회가 있으면 그것을 행한다고 하는 사람은 늘어나야 할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합법의 틀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은 매춘 시설의 경영에서는, 속이거나, 납치하거나 한 여성을 감금 상태로 매춘시키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거기에서는 부모와의 사이에서의 전부채의 설정조차 행해지지 않는다. 소개한 업체가 매춘 시설 경영자나 부모와의 연락을 유지하고 여성을 일하게 하기 위한 공동관리를 계속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매춘 시설 경영자와의 거래에서는 창녀 등 주선업자가 일반적으로 착용하는 노하우나 전문적인 지식도 없어도 된다. 불법적인 활동을 하고 그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다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누구나 참가가 가능했던 것이다.


6. 위안부의 구인 수요에의 대응

이상, 창녀 등주선업의 실태, 무허가업체의 활동, 그리고 거기에 관련된 일본 내지와 조선과의 사정의 차이에 대해 설명해 왔다. 이러한 창요 등 주선업자들은 1937년 말경부터 본격화하는 일본군에 의한 위안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확보에도 필연적으로 관계를 갖게 된다.

점령지 등에 놓여진 군위안소는 일반적인 유곽 경영과 달리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있다.

예를 들어, 유객의 입장에 대한 걱정을하거나, 거기서 일하는 여성의 도망이나 인발을 경계하거나 할 필요는 그다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문제를 예방, 처리하고 여성들을 일하고 이익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는 역시 일정한 노하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 이전부터 매춘 시설을 전문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노하우를 갖지 않았다. 따라서 (나중에는 일부로 군직영의 위안소도 설치되었지만) 위안소의 필요가 인식된 시점에서는 일본군은 매춘 시설 경영자에게 위안소의 운영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자금을 제공도 포함하여 편의공여를 제시하고 그에 따른 자가 위안소 경영에 나서게 된다.

그렇게 유곽의 경영자들이 위안소를 설치, 운영하는 경우에는 원래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있던 창녀들을 그대로 데려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러면 인원이 부족하다면 새롭게 위안소에서 일하는 여성을 모으게 된다. 그 때 위안소의 경영자는 납치하거나 속임을 당해 온 일의 내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이 아니라 이미 매춘 시설에서의 취업 경험자를 선호했을 것이다. 그 쪽이, 많은 손님을 취하는 것을 괴롭히지 않고, 라기보다는 다양한 사정으로부터 그것을 부득이하게 받아들여, 손님을 다루는 것에도 갖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성을 모으는 것은 창녀 등주선업자이며, 그들이 활용되게 된다. 일본군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관리하는 위안소에서, 납치되거나 속여서 온 여성이 일하고 있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다소 외부로 전해졌다면 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본군도 합법의 틀 내에서 활동하는 창요 등 주선업자에 의한 위안부의 필요 인원의 충족을 원했을 것이다.

실제로 위안소에서 일하는 여성의 수요가 발생하면 일본 내지에서는 창녀 등주선업자가 이에 대응했다. 이는 위안소를 경영하게 되는 '대석업자'=유곽경영자의 연락을 받은 것으로 활동은 1937년 말에 시작되었다. 거기에서는 '대석업자' 자신이 타인이 고용하고 있는 추녀에게 위안소에서 일하는 것을 권유하는 등, 합법의 범위로부터의 편차도 있었지만, 일의 내용을 숨기고의 납치나 , 위협이나 납치로 여성을 데려오려고 하는 등 악랄한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다만, 그러한 활동은 일부 지방 경찰에서 군이 위안부를 모으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 의심이나 납치가 아닌가 하는 혐의를 불러 일으켜 문제가 되었다. 이 사태를 받아 1938년 3월에는 육군성은 군의 위신이 훼손되지 않도록(즉, 군의 지시하에 위안부를 모으고 있는 사실 등이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업자 선정에 주의하여 관계지방의 헌병이나 경찰당국과의 연락을 취하는 등을 관계자에게 지시했다. 또한 지난 달에는 내무성 경보국장 통통 「지나 도항 부녀의 취급에 관한 건」이 발행되어 일정한 기준 조건을 설정하고 체크를 거친 후 「추업」을 위해 중국으로 여행한다. 여성에게 신분증 발급을 해야 할 일이 전해졌다. 구체적인 조건이나 체크사항 은 이미 '추업'에 관여하는 여성에서 21세 이상인 것, 부모의 허가를 얻고 있는 것, 약취유 납에 의한 도항이 아닌 것 등이었다. 덧붙여 이 통제에서는, 「추업」 목적으로 도항하는 여성의 「모집 주선」에 있어서 허위나 과대한 사실을 전하는 것에의 단속, 정규의 허가를 받지 않은 자가 그것에 종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취지 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안부의 확보를 합법의 틀 내에서 창요 등 주선업자가 진행할 수 있도록 군과 경찰 당국간의 조정이 이루어져 가이드라인이 확인된 것이다.

일본 내지에 대해 보면 군과 경찰 당국이 구상한 이러한 통제하에 위안부를 모으는 것은 가능했다. 그 이전부터 창요 등주선업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의 눈은 어려웠다. 그리고 총력전하에서는 군의 위신을 훼손하지 않고 사회불안을 증대시키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경찰 당국은 영업 허가를 부여했다. 반면 창녀 등주선업자의 측도 이익이 된다면 군에 의한 다수의 구인수요에 응하려 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1937년 말부터 다음 해에 걸쳐 육군이 일본 내지에서 모으려고 하고 있던, 위안부로 해야 할 여성들이 어느 정도인가, 또 언제까지 요원을 확보하려고 하고 있었는지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북지 파견군 니대장 장병 위문 노위 전국 요리 2 천 500 명의 노 숙부 ヲ 모집」이라는 말이나 상하이 파견 군에 대해 「연내 니 내지 요리 3 천명의 노 창부 사토나리」라는 문언을 적은 사료를 확인할 수 있다). 북지파견군과 상해파견군은 다른 '군'이기 때문에 인원수 는 양자를 합쳐 5500명이 된다. 기간에 대해서는, 후자의 「연내」는, 위안소에서의 요원을 모으는 상담을 하고 있는 것이 1937년이므로, 동년 말까지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 내지에서 위안부를 모이는 활동은 1938년 초에도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1937년 말부터 가능한 빨리 5500명을 모으겠다는 계획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요원 확보는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도록 수행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둠 속에서 위안소에서 일하지 않을까 하고 여성에게 말을 걸 수도 없고, 원래 그것으로 다수의 인원이 모일지 어떨지는, 전망은 서지 않는다. 따라서 계획의 수행은 허가를 가지고 창녀 등주선업자만이 담당하고, 매춘 시설에서 이미 일하고 있는 여성으로부터 선택하는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보았듯이 창녀 등주선업자와 매춘 시설에서 일하는 여성들과의 관계는 소개 시점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 후에도 여성들과 그 부모와 관련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자주 연락하여 자세한 정보를 얻고 있었는지는, 개개인에 의해서도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만, 재택의 수수료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염두에 있어서, 본인의 일과, 부채액의 변동, 부모의 경제 상황 등도 찾아서 아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정보는 누구라도 위안소로 이동될지, 그것을 원하는지 판단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 즉, 돈이 더 필요해지거나, 빨리 완제해야 하는 등의 사정이 있다면, 창녀 등주선업자는 그 여성에게, 벌이 좋은 장소가 있다는 이야기를 내고 위안 소행을 진행하게 된다.

그렇다면 창녀 등주선업자가 정보를 가지고, 이미 매춘 시설에서 취업 중인 여성들은 얼마나 있었을까. 1930년대 중반 일본내지에서의 연예, 창녀, 숙부의 합계는 20만명 강으로 추이하고 있다). 만약 절반 정도가 창녀 등주선업자를 거쳐 취업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면 60), 10만명 정도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거기에서 5500명 정도의 위안부를 모으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물론, 위안부를 모으는 업무의 목숨을 받고 있던 것은 일본 내지의 창녀 등 주선업자의 일부이며, 자신이 소개한 여성 속에서 위안부의 후보자를 다수 생각해 낸다고 하는 사람만이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창녀 등주선업자에게도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동업자와 정보를 융통시킴으로써 (1) 위안소에의 소개에 노력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창녀 등주선업자는 일본 내지에서는 6000명 이상이나 있었고(표 3) 정체불명의 무허가업자와 일부러 접촉할 필요는 없었다. 일본 내지에서 위안부를 모으려는 경우 창녀 등 주선업자에게 의뢰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고,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조선의 상황은 어땠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단서가 되는 사료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원래 일본 내지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의 매춘 시설에의 취업을 위한 중국 도항에 대해서 이미 「추업」종사자만이 허가되었는가, 그 허가에 있어서, 부모나 본인의 의사 확인이나 납치 등이 아니다 일의 체크가 엄격하게 행해졌는지 등을 잘 모른다.

다만 일본 내지와 같이 영업허가를 얻고 있는 창녀 등 주선업자를 중심으로 위안부가 모인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조선의 매춘시설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만으로부터 위안부로 하여금 여성을 찾는 것은 무리였다고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말했듯이 조선에서는 창녀 등 주선업자도 게이샤, 창녀, 숙부의 인원수도 일본 내지에 비해 상당히 적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연예, 창녀, 숙녀의 합계가 1만을 넘는 수준이 되고, 그 대부분이 창녀 등 주선업자의 소개를 거쳤다고 해도, 그러한 여성의 수는 일본 내지의 10분의 1 의 수준이다.

군이 조선에서 확보하려고 했던 위안부로 해야 할 여성의 수를 어느 정도로 하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일 인구에 비례하여 일본 내지와 같은 수준으로 모으려고 했다면 일본 내지의 3분의 1 약의 인구 규모였던 조선에서는 일본 내지에서 5500명을 모으려고 했을 때 즉 1938년 초에 적게 견적하여 1500명 정도를 확보하려고 했던 계산이 된다. 이것도 만일 그 요원을 이미 조선에서 연예·창녀·숙부가 되어 있는 자 속에서 모으려고 했을 경우 상당한 무리가 생긴다. 1937년 말 조선의 연예, 창녀, 숙부의 합계는 1만 2520명이며(표 2), 10% 이상의 여성이 이른바 뽑히게 된다. 이것이 조선의 매춘 시설 경영자에게 주는 영향은 작지 않다.

물론 1938년 초에 조선에서 위안소로 데려가려던 여성이 1500명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다. 원래 위안부로 여겨진 여성이 어느 정도로 위안소에 오기 전의 거주지와 민족별 비율도 불분명하다. 다만 역사연구자에 의한 검토는 이루어지고 있어 거기서 제시된 추계는 가장 적은 숫자라도 2만명 정도의 위안부, 그 20%가 조선인이었다는 것이다. 즉, 4000명 정도가 조선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숫자는 최소 추정치라는 점에 유의해야합니다. 집에는 일본 내지 에 살고 모인 사람도 약간 있지만, 그것은 소수라고 보고 버려 둔다). 비록 단기간이 아니더라도 상당한 부분을 매춘 시설에서 취업하지 않았던 여성으로부터 구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군위안소를 이용한 병사와 여성들의 검진 담당자도 조선인의 경우 매춘 일 경험이 없는 여성이 많았음을 증언하고 있다.

게다가 조선에서는 원래 창녀 등 주선업자는 적다. 창녀 등주선업의 개업은 일정한 경험이 필요하며 위안부의 구인 수요가 증가한 것에 따라 갑자기 진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증가한 것으로도 생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창녀 등주선업자를 통해 그들이 소개하고 현재도 매춘 시설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말을 걸어도 그만큼 인원을 확보할 수 없다. 결국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으려고 하면 무허가업체에 의존해 매춘 미경험자를 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인원의 확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을 것이었고, 군으로부터 의뢰를 받은 무허가업체는 더욱 동업자나 지인과 연락을 취해 위안소에 보내야 할 여성을 찾아야 했다.

그러한 무허가업체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 지역의 경찰 당국에 의한 통제는 어렵다. 엄벌을 내리는 것을 배경으로 활동을 합법의 범위로 유도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원래 누가 그러한 활동을 하고 있는지 자체도 경찰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군도 직접 의뢰한 상대와의 연락, 통제는 가능할 것이지만, 하청으로 움직이는 무허가업자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누구인지 모르고도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무허가 업체와 그 하청을 담당하는 사람이 허위의 호조건을 전하거나 일의 내용을 숨기는 등의 수단을 사용하여 위안소에 보내야 할 여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매우 있을 수 있었다. 또한 속이고 데려가는 게다가 본인도 부모도 글자를 읽을 수 없고 현대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다액의 전부채를 설정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위안부와 목숨을 건 여성이 가족과의 연락을 끊어진 상태가 되어 있던 적도 있다. 그 경우는 전부채의 이야기 자체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하여 여성을 속여 데려온 사람은 위안소의 경영자에게 그 여성을 인도하면 거기서 거래는 종료된다. 속이는 사람이 계속해서 부모와의 연락을 취하면서 여성이 위안소의 일을 계속하도록 공동 관리를 할 의무도 필요도 없고, 위안소의 경영자도 폭력과 위협으로 여성에게 매춘을 강요 계속하는 것뿐이다. 덧붙이면, 만약 위안부가 심한 취급을 받고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해도 위안소 경영에는 그다지 영향은 없다. 전부채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인 위안부가 위안소에서 상상을 끊는 가혹한 경험을 강요받은 것은 이런 사정이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창녀 등주선업자가 소수였던 조선에서는 일본군은 그들만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위안부를 모으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므로 무허가업체들이 주로 임무를 담당하게 되어 불법적인 수단을 이용하여 여성을 모으는 행위가 횡행하게 되었다. 일본 내지와 다른 조건이 조선에서의 위안부 확보에 있어서 통제 불능을 낳고 있었던 것이다.

7. 정리.

- 국가 책임의 논의의 심화를 목표로.

본 논문에서는 창녀 등주선업의 업무 내용과 경영 실정에 대해 사료를 바탕으로 논해왔다. 선행 연구에서는, 그것에 대해, 납치나 허위를 전해 매춘 시설에 여성을 날려버리는 등 악랄한 행위만이 말해져 왔다. 확실히, 창녀 등의 주선에서는, 그러한 일이 행해지는 일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발되면 엄중하게 처벌되는 범죄이다. 당연히 창녀 등주선업은 당시 합법의 범위 내에서 매춘 시설 경영자에게 창녀 등을 소개하고 있었다. 거기서, 소개해야 할 여성이 문제없이 일을 할 수 있는지 등을 판단하고, 그 부모와의 전부채 설정의 협상을 정리하기 위해, 경험으로 길러지는 지식이나 판단력이 요구되었다 . 그리고 소개한 여성이 매춘 시설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본인과 그 부모와의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 내지에서는 그러한 합법의 범위 내에서 활동하는 창녀 등주선업자가 많았다. 이들에 대해서는 경찰당국의 측은 감시하고, 불법행위가 있으면 벌칙을 내리는 것이 가능했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창녀 등주선업체의 수는 적었다. 이것이 일본 내지와 조선에 있어서의 위안부의 구인 수요에의 대응의 차이가 된다. 일본 내지에서는 창녀 등주선업자를 이용하여 이미 매춘 시설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들로부터 위안부로 삼을 자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합법업체로 신고하던 그들의 활동을 경찰당국이 어느 정도 파악하고 통제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매춘 미경험의 여성을 무허가업체에 의존하면서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활동은 경찰 당국이 충분히 감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속여 여성을 위안소로 보내는 등 악랄한 범죄가 횡행한 것이다.

지금까지 위안부가 어떻게 모였는지에 대해 말할 때, '업자'는 실행부대라고 여겨져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군에 의해 사지처럼 움직여 있던 존재로서 말해져 왔다. 그러나 , 지금까지 말해 온 것을 근거로 한다면, 우선, 위안부를 모은 「업자」라고 하는 것이, 창녀 등주선 업자인가, 무허가 업자인가, 혹은 그 더욱 하청의 사람 인가 주의해야 한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조선에서는 종종 무허가업체나 그 하청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의뢰자  인 일본군인으로부터, 납치하라든가 속여 데려오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있는 가운데, 종종 그러한 수단을 취했을 것이다. 즉, 조선에서의 위안부를 모을 때 일어난 범죄는 그 담당자를 관헌이 통제하는 조건이 없다. 즉, 다리처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봐야 한다.   

동시에, 지금까지 말해 온 것으로부터, 위안부는 당시의 합법적인 공창 제도 속에서 민간의 「업자」에 의해 모인 것이었고, 자유로운 계약하에 상행위를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 해야 할 일은 없다는 논의가 일부에서 보이지만 65) 적어도 그것은 조선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내지의 공창 제도 하에서도 창녀 등이 되는 여성들이 자유 의사로 매춘을 하고 돈을 얻기로 선택했는지는 의문이며 그 점을 논하지 않더라도 원래 조선에서는 행정 당국이 여성의 인신매매를 파악하고 관리하는 체제 자체가 충분히 정돈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일본 제국이 적지 않은 조선인 여성을 위안부로 한 것을 문제하는 논자도 (물론 그것은 매우 심각한 인권 침해이다), 그렇지 않고 그녀들은 자유 의사로 상행위를 하고 있었다고 하는 논자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은 통상의 감각이 있으면 알 것 같은 것이지만), 아마도 일본 제국이 조선에 ​​반입한 공창제가 널리 사회에 정착해 그 안에서 행정당국이 관리, 파악하는 창녀 등 주선업이 발달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실정은 그렇지 않았다. 행정당국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행해지는 매춘과 여성의 인신매매를 충분히 파악하고 관리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즉, 식민지기의 조선을 일본 내지 수준의 근대적인 사회였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위안부의 요원 확보에 대해 논의할 때에도 그 점을 봐야 한다.

덧붙여 조선의 행정 당국이 직접, 또한 계획적으로 위안부의 요원 확보를 실시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본고의 견해에 대해서는, 일본 제국을 면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고에서 밝힌 것은 위안부의 요원 확보를 둘러싼 일본 제국의 책임을 보다 정밀하게 파악할 전제가 될 것이다.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에서는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곤궁해, 매춘 시설에 젊은 여성이 팔리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매춘 시설의 경영이나 거기에 여성을 소개하는 행위에 대한 단속도, 혹은 그것에 대해 합법의 틀을 설정해 경찰 당국이 통제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도 충분히는 할 수 없었다. 그 가운데 대량의 여성을 위안부로 모았기 때문에 범죄행위가 횡행했고, 그 단속도 철저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일본 제국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조선의 경찰 당국이나 헌병은 여성들이 속아 위안부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즉, 그들이 불법 행위를 묵인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또 일본제국의 육해군의 추요한 지위에 있던 자도, 그러한 조선에 있어서의 위안부의 요원 확보의 실정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하여 조선에서 많이 위안부 를 계속 모은 것도 추측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일본 제국의 책임은 엄격히 질문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조폭한 범죄에 관계없이 매춘 시설에 여성을 소개하고 있던 창녀 등 주선업체의 활동도, 경찰 당국이나 통제할 수 있는 합법의 범위였기 때문에 문제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존재는 매춘 시설에서 일해야 할 여성의 정보를 유통시키고 그러한 여성을 상품으로 취급하고 원활하게 거래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게다가, 소개한 여성들에 대해서, 그들은 그 부모와 매춘 시설 경영자와의 공동 관리를 계속했다. 창녀 등 주선업자의 존재는 사회 불안을 낳는 납치 등의 범죄를 수반하기 위해 여성들을 매춘 시설로 보내고, 도망칠 수 없는 채 매춘을 강한 구조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매춘 시설에 보내지고 관리되고 있던 여성들도 노출 폭력으로 지배되고 있던 위안부와 마찬가지로 나중에 심신에 상처를 입고 인생을 보내게 되었을 것이다. . 창녀 등주선업에 대해 논한다면 그 점을 잊을 수는 없다.

(수리 2021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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