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만나는철학자김상봉교수를만나다
정지영 251호2011년9월호
251호 그사람의서재
형이상학이란 말은 현실과는 동떨어지고 추
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관념이라는 인식이 우
리 시대의 분위기로 자리 잡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이다.먹고 살기 바쁜,제 몸 하나 건사
하기 힘들어 다들 자기 계발에 골몰하고 있는
지금,형이상학이 던지는 질문에 우리를 처절
하게 대면하게 만들고,본질적인 것으로 삶의
무게를 가늠하게 만드는 김상봉 교수를 사람
들은 거리의 철학자,벌거벗은 철학자라고 부
른다.형이상학의 철학자를 거리로 내몰았던
원동력이 거리의 예수에 있었음을 아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철학,문학,신
학,교육,정치,이제는 경제학까지 사고의 영
역을 확장해 가는 그를 ‘그 사람의 서재 팀’이
살아남은 자의 책임을 묻고 있는 빛고을 광주
에 위치한 전남대에서 만났다.
김 교수의 신앙 이력
정지영(이하 정)/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가 철학자라는 얘기가 있습니다만,먼저 교수님의 삶의 궤적을 신앙을 중심으로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김상봉(이하 김)/ 저는 부산에서 목회를 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1남 3녀 중 장남
으로 태어났습니다.아버지는 부산에서 교회를 개척하시고 목회를 하시다가 제가 중3때 신
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습니다. 2년 뒤엔 저만 남겨두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가셨지요. 10여 년 뒤 공부를 마치시고는 목원대학교에서 실천
신학을 가르치시다 퇴임을 하셨습니다.
정/ 소위 PK, MK라고 해서 목회자 자녀들이 교회와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떠셨는지요?
김/ 그렇군요.다행히 저는 행복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아버지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
시기 전,그러니까 제가 중3때까지 본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너무나 헌신적인 목회자의 모
습이었습니다.물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고요.진정으로 당신이 믿는 바를 믿는 분이셨
죠.저는 한국의 절대 다수의 목회자는 무신론자라고 생각합니다.신이 존재한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죠.하지만 제 아버지는 열정적인 신앙을 일관되게 지켰던 분
입니다.어른이 된 뒤에 제 아버지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많았으므로 관계가 좋았다고 할 수
는 없지만 그 점에서 마음으로 아버지를 늘 존경했습니다.특히 개척교회 시절에 군용 천막
으로 교회를 만들어 예배를 드렸는데 밤엔 아버지와 둘이서 숙직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잠
을 자곤 했습니다.추운 겨울엔 끓인 물통을 담요에 감아 발밑에 두고 아버지 품에 안겨 잠
을 잤는데,생각하면 행복한 추억이었습니다.어려움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순수한 신앙의
열정을 아들로서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돈이나 세속적인 명예를 목표로 하지 않는 아버지
의 그런 삶을 통해 이 세상의 척도를 뛰어넘는 어떤 것,이 세상에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어
떤 숭고한 가치가 있고,그런 삶을 가능하도록 마음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열정’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제겐 그 열정의 내용이 더 중요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그것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인간
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바로 이것이 목사 아들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것에 대해 제가
특별히 감사하는 이유입니다.예수가 가르친 약자에 대한 사랑은 제게는 다른 모든 이데올
로기에 앞서는 가장 근본적인 실천적 원리였습니다.이를테면 제가 ‘학벌’을 문제 삼든 ‘삼
성’을 문제 삼든 아니면 다른 어떤 사회적 불의를 문제 삼든지 간에 어릴 적에 교회에서 배
웠던 인간에 대한 소박한 사랑이 그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제가 재벌의 해체를 말하고
자본주의의 극복을 주장할 때조차,마르크스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요즘 진보적인 기독교청년운동에 열정을 가지고 참여하는 젊은이들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만,굳이 세속적인 이데올로기에 기대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에만 기초하더라도 이 땅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하는 것은 얼마든
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제게 절대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을 심어 주었습니다.말하자면 철학
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무한한 것에 대한 감수성이죠.물론 이런 모든 것들은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배울 수 있는 것들이므로,배타적인 의미에서 기독교가 아니면 불가능하
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도리어 많은 경우 기독교는 신의 절대적 권력을 맹목적으로 강조
함으로써 선에 대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어린 마음에 심기보다는 절대자에 대한 비
굴한 복종의 마음이나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미신적 태도를 심는 경우가 많은데,저는 기독
교에서 그런 미신이나 비굴함이 아니라 자유로운 열정과 사랑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을 늘 고
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 감리교 목사님이셨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아버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결혼한 다음에 신학을
공부하셨습니다.공부를 늦게 시작하신 셈이지요.그래서 공부에 한이 맺혀서 마흔이 넘어
서 유학을 가신 거죠.그 학구열이 저에게는 또 하나의 모범이었습니다.성격도 매우 곧은
분이셨고 또 유달리 검소하셔서 그런 것 역시 제가 늘 존경했지요.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버지와 그다지 가까이 지내지 못했습니다.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서
두 번이나 총살당할 뻔한 경험이 아버지의 정치적 의식을 결정한 근원적 체험이었지만 저
의 경우에는 박정희의 독재와 5․18광주에서의 국가 폭력이야말로 비판적 정치의식의 토대
였거든요.말하자면 6․25세대와 5․18세대의 충돌이었던 셈이지요.게다가 아버지는 유신 독
재와 전두환의 5공 시절 미국에 계셨던지라 군부 독재의 실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신 까닭
에 그 점에서도 저와 정치적 감정의 결이 매우 달랐습니다.그런 까닭에 아버지가 귀국하신
후에는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지요.그래서 아들로서 아버지 마
음에 상처를 드린 적도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 한동안 아버지가 목원대학교 학장 서리로 계셨는데,운
동권 학생들이 아버지를 감금한 적이 있습니다.원래 학생들은 학생처장을 감금한 것인데, 아버지가 자청해서 학생처장을 대신해 감금되었습니다.제 아버지다운 책임감 때문이었겠
지요.그렇게 대신 감금되어 학생들과 학내 문제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으나 합의보다 갈
등이 증폭되었고 급기야 학생들이 아버지의 머리를 강제로 깎아버리는 일이 발생했죠.그
해가 정원식 전 총리가 외대에 가서 학생들에게 밀가루와 계란 세례를 받았던 해인데 운동
권이 그런 일들로 궁지에 몰렸던 때였어요.저는 그 당시 독일에서 유학 중이었는데,철없이
아버지께 신랄한 비난의 편지를 보냈습니다.아들로부터 위로는 고사하고 보수적 정치의식
과 신앙관에 대해 비난을 들었으니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아버지와 제 사이가 대
개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귀국하고 그 일에 대해 서로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여러 해 지난 뒤 아버
지가 한번은 그 때를 회상하며 말씀하시더라고요.그 당시 검찰에 피해자 조사를 받으러 갔
을 때 검사가 가해자인 학생들의 이름을 대라고 하더랍니다.그러자 제 아버지는 이렇게 반
문하셨답니다.‘내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목사요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인데,나보
고 내 제자를 고발하라는 얘기요?’그러고는 입을 닫으셨답니다.그것이 여러 해 전 저의 비
난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이었던 셈인데,그 이야기를 들은 후 저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
하게 되었습니다.여전히 정치적 입장은 달랐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 것이지요.특히 아버지께서 보여 주신 청빈하고 절제하는 삶의 모
습은 제가 흉내 내기 어려운 외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정/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김/ 바로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훌륭한 목회자의 아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자식들 입장에서 보자면 자식들에게는 관심이 없으셨죠.교회와 교
인,아버지가 전부였던 분이시죠.그게 제가 어머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의 대부분입니
다.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목회자들이 가정과 자녀를 가짐으로서 아무래도 직업
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거잖아요.그러나 제 부모님은 기본적으로 가족보다는
하나님의 사업이 늘 먼저였던 분들이니 그 점에서 훌륭한 분들이었다 할 수 있겠지요.
정/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생활은 어떠셨는지요.정치를 하기 위해 철학을 먼저 공부하기로
작정하셨다고 들었습니다.학교를 다니셨을 때가 격동기였고 또 보수적인 정치관을 갖고
계신 목회자이자 아버지 밑에서 자라시면서 여러 생각이 드셨을 것 같습니다.
김/ 아버지가 유거학리을에서떠만나나시는고철조학금자있김다상가봉교가수족를모만두나미다국에 건너간 이후 한국에 혼자 남았습니다.외할머니와 같이 지냈는데,아무래도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고
또 정신적으로도 권위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지요.정치에 대해서는 어린 나
이엔 그다지 깨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처음엔 박정희가 굉장히 멋있는 사람처
럼 보였지요.박정희를 한국 민족의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고 말할 수도 있
겠지요.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으니까요.제가 중3때 유신이 단행됐는데,그 때까지만 하더
라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지지했어요.하지만 그것이 더도 덜도 아
니고 독재체제의 시작이며 독재자의 절대 권력의 폭력 아래 나 역시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그 시대가 그만큼 폭력적인 시대였잖아요.
고등학교 올라가자 사회는 점점 더 살벌해지고 여기저기서 은밀하게 두려움을 자극하는 이
야기가 들렸어요. “너 조심해라.언제 어디 가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어
느 목사님이 어디 가서 말 잘못했다가 남산에 끌려가 반신불수가 되어 나왔다더라.”박정희
의 독재와 폭력은 제가 교회에서 배운 사랑과 정의의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고
저는 그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불의한 권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각성되었지요.그
시절 가장 좋아하던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가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주노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갈라디아서 5:1)는 것이었는데,이 말씀은 독재 치하에서 내가 어떻게 살
아야 하는지 표준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인간을 노예적으로 억압하는 어떤 권력도 정당
성을 가질 수 없으며,내가 복종해야 할 대상은 오직 진리와 절대자일 뿐 다른 어떤 것에도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면 안 된다는 것은 기독교가 내게 가르쳐 준 가장 큰 가르침 가운데 하
나였지요.문화적으로 보자면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순종을 가르치는 종교요,사람을 비
굴하게 만드는 종교라고 할 수도 있지만,제가 기독교에서 배운 것은 어떤 경우에도 종의 멍
에를 매어서는 안 된다는 자유인의 정신이었죠.
정/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서울 지역 부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셨지만 실질적으로 고등
학교 이후 교회에 대한 기억보다는 학교생활,특히 운동권에 대한 기억이 많으셨을 것 같습
니다.참여하셨던 운동권은 어떠셨나요.
김/ 1976년에 대학에 들어갔지만 학생운동에 입문한 것은 좀 늦었습니다.처음엔 기독교청
년협의회를 통해 학생운동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그런데 교회운동의 테두리가 좁다고 느
껴져 일반 학생운동 서클에 참여했습니다.하지만 당시 일반적인 운동권 이데올로기를 곧
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제가 너무 자유분방한 정신이었고 그것이 때로는 조직 활동에 장애
가 되기도 했습니다.특히 이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어린 눈에도 무언가 부실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의사가 환자의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해야 치료도 할 수 있을 터인데,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과연 우리가 정확히 통찰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
던 거지요.그것이 저로 하여금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했습니다.다
른 한편 저는 학교 내의 서클 활동과 별개로 야학 활동을 했는데 야학 생활은 세월이 가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그것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별적
인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던 까닭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정/유학 생활에 대해서도 들려주시지요.독일로 가신 이유가 있으셨나요?
김/ 처음부터 유학 갈 생각은 없었습니다.우선 제 처지가 그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그리
고 이미 그때부터 철학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이 있었습니다.남의 나라에서 철학을 공부한
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죠.철학은 주체의 자기 인식이요 현실의 자기반성이
니 나는 이 땅에서 현실을 가지고 철학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죠.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다른 현실적 고려는 하지 않았지요.하지만 부모님이 귀국하
시고 몇 가지 우연적인 일들이 저를 유학길로 떠밀었습니다.
제가 칸트 연구로 철학 공부를 시작했고 석사 논문을 썼으니 자연스레 독일로 유학을 간 것
이지만,그게 아니더라도 독일이 여전히 서양철학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는 점도 무
시할 수 없죠.크게 봤을 때,근대 철학의 패러다임을 독일이 완성했으니까요.그러나 학부
시절부터 제가 독일철학에 친화성을 느꼈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감
수성이 독일철학의 근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더 나아가 독일철학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이고 형이상학적인 깊이 역시 제가 그에 대해 호감을 가진 이유였지요.
가서는 공부만 했어요.다른 정치적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죠.유학을 갔던 까닭이 거기서
만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였으니 저로서는 짧은 시간에 배울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배우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 생각했지요.그래서 일부러 힘들게 공부했습니다.서양고
전 문헌학과 신학을 부전공으로 같이 공부한 것도 그런 생각 때문이었습니다.제 논문 주제
는 칸트철학이었지만 나중을 위해서는 서양 정신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 사유할 수 있어
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요.특히 그리스어나 라틴어는 ‘지금 내가 이걸 배우지 않으면 나중
에 누가 나에게 이 어려운 언어들을 가르쳐 줄까.내가 배우고 가서 내 학생들은 나 같은 고
생을 안 하도록 좋은 선생이 되어야겠다’생각하고 열심히 했지요.그렇게 공부만 했지만 정
치적 관심을 버린 적도 없었고 제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잊은 적도 없었습니다.그러
나 현실의 모순과 싸우더라도 철학자는 철학적인 방식으로 싸워야 할 과제가 있겠지요.유
학 시절은 그것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김 교수의 독서 편력과 서재
정/이야기를 현재로 돌려 보면 좋겠습니다.칸트를 전공하
신 철학자시면서 또한 서양 고전문헌학,신약학을 공부하
셨습니다.그러면서 ‘학벌없는사회’를 만들어 반학벌운동을
전개하셨고,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을 역임하시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셨습니다.최근에는 어떤 것에 관
심을 두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김/ 최근에는 경제학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
니다.과학철학부터 법철학을 거쳐 예술철학에 이르기까지 ‘철학’이 관여하지 않는 학문이
없는데,유일하게 철학이 담 쌓고 있는 분야가 경제(학)입니다.간단히 말해 ‘경제 철학’이 없
다는 말씀입니다.경제야말로 인간의 가장 현실적인 삶의 지평인데,그런 경제에 대한 철학
적 성찰이 없다면 철학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공리공담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이는
거꾸로 말하면 경제 그리고 경제학이 삶의 총체성으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제 갈 길을 간다
는 뜻인데,이것이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그런데 근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확
립된 이래 경제학에 대한 철학적 비판과 성찰을 한 철학자가 거의 없습니다. 19세기만 하더
라도 칼 마르크스나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철학자들이 직접 경제학을 한 경우가 있었으나 20
세기에 들어오면 마치 경제학은 철학적 비판의 영역 외부에 있는 것처럼 철학과 유리되어
전개되어 왔습니다.칼 포퍼를 따르는 하이에크나 프리드만이 있었고 여전히 마르크스 철
학이 일군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정도로는 경제학과 철학의
생산적 대화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그 결과 철학은 현실로부터 소외되고 경제학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엄밀한 철학적 비판으로부터 벗어나 지극히 상투적인 원리들을 마치
자명한 것처럼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하면서 점점 더 독단적 학문으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
다.특히 오늘처럼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어떤 근본적인 문제 상황에 봉착한 시대엔 자본주
의 경제와 경제학의 전제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필요한데,이를 위해서는 경제(학)의
좁은 한계를 벗어나 그것을 삶의 총체성으로부터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이런 의미에서
이제 철학과 경제(학)가 만날 때가 되었습니다.
정/ 칸트가 그랬던가요?‘철학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라고요.그 말을 그대로 실천하고 계
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또 인간의 삶을 총체성 속에서 고찰하려 할 때 꼭 필요한 작업이
경제학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실제적 계기가 책으로도 다루셨던 삼성 문제와
관련 있지 싶군요.
김/ 그렇습니다. 30여 년 전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부조리가 군부 독재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었다면,오늘 재벌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삼성은 가장 심각한 사회암입니다.하지
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삼성이라는 기업 집단 자체가 아니라 기업들이 특정 개인이나 족벌
에 의해 부당한 방식으로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그리고 더 나아가 재벌 가문이
부당하게 축적한 비자금으로 국가권력 위에 군림하면서 사회정의를 파괴하는 것이 문제라
는 것이지요.마치 북한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당이 국가 위에 있는 것처럼,기업이 국가
권력 위에 군림할 때 나라의 법치와 민주주의는 근본부터 위협받게 됩니다.그런데 오늘처
럼 기업이 개별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으로 활동하는 시대엔 기업의 횡포를 막는 것
도 더 어렵습니다.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기업 자체를 민주화시키는 것밖에 없습
니다.쉽게 말해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국민이 선출하듯이 사장을 노동자들이 선출하면
안 되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이를 통해 기업을 폴리스로 만드는 것만이 우리 시대 자
본주의의 모순을거리해에결서하만는나유는일철한학자길이김상라봉생교각수합를니만다나.다이렇게 말한다면 도대체 사적 소유
인 기업의 경영권을 어떻게 노동자에게 위임할 수 있느냐고 되묻겠지요.하지만 주식회사
법인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다는 것도 틀린 생각이고,거꾸로 기업의 경영자를 주주가 아니
라 노동자들이 선출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와 주식회사 이론에 비추어 보더라도 결코 불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마치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듯이 기업의 경영권 역시 노동자들
에게 위임받은 권력일 때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철학과 법 그리고 경제적 차원에
서 총체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요즘 저의 관심사입니다.기업을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같
은 자유 시민들의 자치 공동체인) 폴리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학창시절부터 생각해 온
일이었으나,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말씀하신 대로 삼성 문제와 부딪
히면서부터였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이 재벌을 해체했듯이 재벌
을 해체하되 노동자 경영권의 원리에 입각해 기업의 지배구조를 근본에서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이처럼 경영권이 노동자에게 위임되면 자본주의의 많은 모순이 근본
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제가 존경하는 함석헌 선생 역시 공산주의와는 다른 방
식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할 것을 역설했는데,저는 노동자 경영권이 그 새로운 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정/ 함석헌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자연스럽게 본격적인 독서 이야기를 함석헌 선
생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지요.최근 ‘함석헌과 씨알 철학의 이념’이란 제목으로 발제를 하기
도 하셨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 오신 것으로 압니다.
김/ 저는 함석헌의 글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느낍니다.처음으로 책을 읽
으면서 절대자가 내게 말을 건넨다는 느낌,성령의 감동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닐까 하는 느낌
을 받았습니다.성경이 아무리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수천 년 전에 쓰인 글
의 한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그러나 함석헌의 글은 지금의 나에게 우리 시대의 문맥 속에서
하나님이 바로 나에게 말씀하신다고 느끼게 해 줍니다.특히 그가 1930,40년대에 기독교에
대해 썼던 글들은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거둔 가장 풍요로운 열매라고 생각해요.그리
고 저는 그분이야말로 제가 이어받아야 할 한국 철학의 전범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 교수님과 함석헌 선생님의 만남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함
석헌을 처음 알게 된 건 언제이신가요?
김/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대학 때 읽었지만 그 때는 그 책의 가치를 온전히 알
아보지 못했습니다.유학을 다녀오고 난 다음에야 함석헌을 다시 만났습니다.물론 그 때는
그분이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니 한번도 직접 뵙지는 못했지요.유학을 갔다 와서는 이제 저
도 한 사람의 전문적이고 자립적인 철학자로서 이 땅에서 제 길을 걸어야 했죠.그런데 모든
철학자는 누군가를 이어감으로써 (이어가는 것은 대결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자기 세계를
만들어 가는 거죠.대결하고 이어갈 대상은 어디까지나 동시대,자기보다 한 세대 앞선 사람
이지,저 멀리 있는 플라톤이나 공자가 아닙니다.그런 고전적 철학자들은 현재적 철학을 극
복하고 비판하기 위해 소환하는 것이고,내가 직접 비판하고 대결해야 할 상대는 동시대 철
학자인 것이지요.그렇다면 나는 이 땅의 누구와 마주 서서 대화하고 대결하며 또 비판하고
극복하고 계승할 건가를 생각했죠.철학자는 혼자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누군가와의 만
남을 통해서만 태어나는 겁니다.그럼 이 땅에 누가 있느냐?처음엔 없는 것 같더라고요.‘우
리 시대 이 땅에 내가 배울 철학자는 없다’고 생각했으니 남의 나라 가서 공부했잖아요.그
럼에도 돌아와서는 누군가를 찾아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죠.내 후학들이 나처럼 ‘우리는 아
무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남의 나라 철학자들 하고만 얘기하겠다’고 하면 이 땅에서 어떻게
주체적 철학을 할 수 있겠어요?힘들게 이 사람 저 사람 보는데 문득 생각나는 게 함석헌 선
생이더라고요.학생 때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읽으며 느꼈던 가슴 찡함을 기억한 겁니다.
예전에는 그 파토스가 좋았어요.건강한 자기비판도 좋았고요.그러고서 다시 그 책을 보니
까 그 책이 철학책인 겁니다.예전에는 몰랐죠.젊은 시절에 봤을 때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사유의 깊이가 있는 거예요.공부할 만큼 공부하고,읽을 만한 고전을 읽고 나서 보니까 이
책 자체가 고전인 거예요.그래서 함석헌의 다른 글들도 찾아 읽기 시작했죠.그것이 시작이
었습니다.
▲ⓒ김병규
정/신학적인 관심에서 볼 때,함석헌 선생 사상은 자연히 민중신학,해방신학에 대한 관심
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함석헌 선생의 씨알사상과 민중신학이 그와 가장 가족
유사성을 보이며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으니 말이지요.어떠신지요?
김/ 저는 민중신학,해방신학에 그리 큰 매력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교의학과 조직신학
적․철학적 토대를 생각할 때 민중신학이 보편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었지요.종
교와 신학은 똑같은 인간의 삶과 세계에 대해 말하더라도 사회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
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그냥 사회정의를 신학적 언어로 말하는 것이
라면 사회과학을 하면 되지 신학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그런 점에서 민중신학은 당시
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너무 사회과학적으로 기울어진 결과 신학이 지켜야 할 삶의 종교
적 차원을 방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그리고 그것이 민중신학이 한국의 기독교에서
지속적인 생명력과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도 하지요.저는 도리어 서
구신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진정으로 토착화된 게 함석헌의 철학과 신학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민중신학자들은 함석헌을 학문적으로는 거의 백안시했습니다.이를테
면 함석헌과 안병무가 개인적으로는 가까이 지냈지만,제가 보기에 안병무는 함석헌의 학
문적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생각하면 함석헌의 철학이야말로 민중신학의
진정한 기초가 될 수 있었는데 민중신학자들이 이를 몰랐다는 것은 민중신학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 하지만 김규항 씨처럼 한신에서 공부하고 민중의 편에서 투쟁하고 있는 이들을 볼 때
한신의 민중신학이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서 저항 세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사상적 보루
역할을 해 왔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거리에서만나는철학자김상봉교수를만나다
김/ 물론입니다.비단 민중신학뿐 아니라 한국의 신학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신학의 토착
화와 민중화를 위해 선구적인 시도를 해 온 것은 철학의 입장에서도 본받아야 하는 일이라
고 생각합니다.신학자들에 비하면 철학자들은 부끄러울 정도로 외래 사상의 노예 상태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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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호그사람의서재
김 교수의 독서 편력과 서재 (계속)
김 :하지만 신학은 영원성으로부터 시작합
니다.영원에 대한 갈망,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하지 않는 것은 신학
이 아닙니다.그런 게 아니라면 사회과학을
해야죠.철학도 영원한 것에 대한 갈망이거든
요.하지만 저는 민중신학 텍스트에서 그러한
갈망을 읽지 못했습니다.그래서 실패했다고
보는 것입니다.왜 우리 내면의 말을 하지 않
느냐는 겁니다.제가 현장을 벗어나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 때문입니
다.인간은 형이상학적,종교적 존재예요.빵
만으로는 살 수 없어요.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정의,평등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남는 문제
가 있죠.독재 치하에서 민중신학자들이 “정
의가 강물처럼”같은 얘기를 한 것은 참 존경
스런 일이었지요.그런데 그런 얘기만 계속
한 겁니다.정의에 대한 말은 사회과학자도 할 수 있어요.목사님들은 영성에서부터 말씀해
주셔야지요.그리고 이를 통해 민중신학이,한국의 80년대 운동이 강퍅함에서 벗어나 어떤
내면적 깊이나 사회적 영성을 실현하도록 이끌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 것입니다.그랬더라
면 우리 시대 진보적 정신의 저수지가 이렇게 치명적으로 고갈되지는 않았을 겁니다.혁명, 좋지요.하지만 마음이 공허한데 어떻게 합니까.그때 종교적이고 영적인 차원이 필요한 거
죠.혁명적 열정을 백안시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이고도 영적인 위로,내면의 기쁨이 필요
한 건데 이런 걸 제공해 주지 못했잖아요.초창기에는 도시산업선교회로 대표되는 진보적
거리에서만나는철학자김상봉교수를만나다2
정지영 252호2011년10월호 댓글0
기독교회가 세속보다 앞서서 진보운동의 전선을 이끌다가, 80년대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교회는 제 2선으로 뒤처져 할 일이 없어져 버리고,교회 주류는 속절없이
보수화되어 지금까지 온 것 아니겠습니까.외람되지만 저는 상황을 이렇게 판단하고 있습
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민중신학의 열정과 나름의 성과는 여전히 존경할 만한 한국 현대
사의 일부입니다.저 역시 그 영향 아래서 성장했고요.다만 함석헌 선생과 관련해 민중신학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다소 비판적으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
시길 바랍니다.저는 민중신학자들이 함석헌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 민중신학의 본
질적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 :그건 성과 속을 너무 구별되게 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 :제 비판이 바로 그겁니다.성과 속이 구별되면 안 되는 거죠.혁명과 종교는 한국의 역
사상 구별되지 않았습니다.미륵신앙,동학혁명,삼일운동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종교 대표
자들이 왜 그런 얘기를 했겠어요.그걸 철학적으로 보여 준 이가 함석헌 선생이에요.성과
속이 분리되지 않은 채 하나로 존재했던 이가 바로 함석헌이었지요.그러니까 교회의 주류
입장에서 볼 때 함석헌의 텍스트는 너무 정치적이어서 싫고,정치적 운동가의 입장에서 보
면 함석헌은 너무 종교적으로 비쳤던 거죠.그런데 민중신학의 정치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함석헌을 이해할 수 있었을 법한데 그렇지 못했으니 제겐 그것이 한국 현대 기독교 역사에
서 큰 아쉬움으로 남는 거죠.
정 :이야기의 물꼬를 돌려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연구실이라서 그런지 철
학 관련 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군요.도서 분류는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김 :네,대부분의 책이 철학과 수업에 관련한 책들입니다.분류를 대충 나누자면 철학 고전
이 있고,그와 관련한 2차 저작들,그 외 마르크스부터 시작해서 5·18자료들,도덕 교과서 같
은 교과서들 등이 전체적으로 섞여 있습니다.책상에는 글을 쓰고 강의하면서 참고하는 책
들과 최근 공부하고 있는 경제학 책들이 있고요.
정 :그밖에도 여러 주제의 인문 교양서들이 책장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군요.보통 교수님
을 거리의 철학자라고들 하지요.강의실에서가 아니라 삶의 실존을 바탕으로 철학을 하시
기 때문일 텐데요.
김 :철학이 보편학이잖아요.내가 칸트를 공부했다고 해서 평생 그것만 전달하려고 한다면
온전한 의미에서 시대가 원하는 역할은 못 한다고 봐야지요.원래 고전적인 철학자들의 작
업이라고 하는 건,그 시대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겁니다.때에 따라 각 영역을 막힘없이
넘나들면서 시대를 총체적으로 보여 줘야겠지요.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국에는 제대로 된
철학자가 거의 없습니다.우리가 서양 학문을 받아들인 지 고작해야 100년입니다.제대로
철학을 하려면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개별 과학과 학문에 대한 기초를 쌓아 놓고,즉 지적인
바탕을 갖고 대학에 와서 철학을 해야 합니다.하지만 우리는 입시 위주 교육이다 보니 그게
어렵습니다.저 자신도 마찬가지였는데,대학에 와서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철
학 외부에서 알아야 하는 게 정말 많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지요.
정 :서재에는 신학이나 종교학 책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데 아무래도 독일에서 공부하실
때 신학책들을 많이 보셨을 듯합니다.특히 고백교회와 관련한 칼 바르트나 본회퍼의 책들을 보시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바르트나 본회퍼를 여전히 정통주의의 가면을 쓴 자유
주의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김 :학창 시절에 신학자들의 책은 조금씩 읽었습니다.독일에서 부전공으로 신약학을 공부
했던지라 불트만 이후 신약학자들 책도 좀 보았는데,지금은 세세한 건 다 잊어버렸습니다. 바르트와 본회퍼의 저작들도 조금씩 읽어 봤습니다만,그들을 가리켜 무슨 가면을 쓴 자유
주의자 어쩌고 하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적어도 저의 경험으로 보자면 하나님 팔아서 성
전에서 장사하는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에 비하면 독일의 신학자들은 훨씬 더 경건한 신앙
인들입니다.신학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바르트는 개신교의 정통적인 흐름을 이어받고 또
스스로 형성했던 신학자라 봐야겠죠.그들을 가리켜 한국에서 이러저런 비평을 한다지만
과연 그들의 책을 읽고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한국에 몇이나 있을지
그것 자체가 의문입니다.
정 :정통주의와 실증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하나는 대속론의 문제입니다.이 점에서도 저는 함석
헌의 제자인데,함석헌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는 구절에
서 ‘나’라는 1인칭 대명사가 예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우리 각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마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에서 ‘나’라는
것이 단지 데카르트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우리들 각자를 가리키는 말인 것처럼 ‘나는 길
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에서 ‘나’도 예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를 지시하는 말
이라고 본 것이지요.이는 유영모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무튼 그들은 정통 기독교에서 말하
는 대속론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내 죄를 남이 대신 사해 준다는 건 그 당시에 노예 사회
에서나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말이지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그런 차이 때문에 함석헌은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볼 때 결국 정통적인 기독교
인이라고 볼 수는 없겠죠.이 점에서 그는 바르트와도 다르고 우치무라 간조와도 다릅니다. 그리고 저 역시 절대자를 향한 종교적 동경이 아무리 강렬하다 할지라도,대속론을 받아들
일 수 없다는 점에서 다시 정통 기독교의 울타리 안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느낍니다.
제가 실증 종교로서 기독교에 대해 느끼는 또 다른 한계는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어
떤 완전성이 ‘홀로주체’로서 인간의 완전성일 수는 있지만,결코 ‘서로주체성’속에서 실현된
공동체 또는 하늘나라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기독교뿐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종
교가 어떤 완전성을 계시해 주는 것이고,우리는 그 종교를 믿음으로써 그 완전성에 다가가
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
전하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그런데 지금까지 세계 종교가 우리에게 보여 준 완전
성이 어떤 것입니까?이를테면 예수가 계시해 보여 준 완전성은 ‘홀로주체성’의 완전성,고
립된 개별자로서의 온전함입니다.개별자가 아무리 완전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공동체 또는
나라일 수는 없습니다.그런 점에서 예수는 만남의 온전함이나 그 만남이 주·객관적으로 온
전하게 실현된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그런 까닭에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잘 믿고 그의 삶을 모방한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참된 만남에 이르는 길을 발
견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경험적 존재이기 때문에,우리에게 계시가 되어야지 하나의 원형으로 삼아서 모방
을 하고 닮아갈 텐데,‘이미타치오 크리스티(imitatio christi)’곧 그리스도의 모방이라는 것이
개인으로서 예수를 본받는 것일 수는 있어도 그로부터 이상적인 공동체의 구성 원리를 이
끌어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오히려 우리의 스승을 따라 원수까지도 사랑한다 하더라도,그
▲김 교수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사람들의 염려에 대해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 그는 염려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인문학이 과연 인문학다운지, 철학이 참으로 철학다운
지'라고 했다. ⓒ김병규
럴수록 남들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똬
리 틀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신약성서의 행간에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기독교는
초대교회 복음서에서부터,‘사랑으로 세상을 이겼노라’는 허세와 ‘사랑 때문에 박해받을 거
야’라는 불안 사이에서 늘 동요하고 있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그것이 이후에 역사적으로
반복되지요.저는 바로 이 동요에 기독교의 폭력성이 뿌리박고 있다고 생각해요.‘선제 타격
을 하지 않으면 안 돼,사랑이 밥 먹여 주나,결국 십자가에 못 박혔잖아’이런 거죠.저는 이
것이 기독교의 치명적인 한계라고 생각합니다.예수는 하늘나라가 땅 위에 임하도록 해 달
라는 기도를 가르쳤으나,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는지 그 길을 보여
주지는 않았습니다.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을 끊임없이 쇄신하는
활력과 생명의 원리가 될 수 있어야 하는데,그게 안 되는 거죠.그래서 오늘날 속절없이 현
실의 논리에 포섭돼 버리고,길을 잃고 있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현실이죠.이런 점에서 저
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나라를 보여 줄 수 있는 새로운 계시라고 생각합니다.제
가 작년에 5․18을 두고 온전한 공동체로서 하늘나라의 계시라고 해석하는 글을 쓴 것은 그
런 문제의식의 소산이었습니다.예수나 부처를 통해 계시되지 않았던 하늘나라가 5․18을 통
해 계시되었다고 본 거지요.
정 :책 읽기와 관련한 질문을 좀더 드려볼까 합니다.총체적인 철학,동사로서의 철학을 하
기 위해 어떤 책들을 읽어 오셨나요.구체적으로 책을 추천하기 어려우시면 어떤 책은 피하
려고 하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읽지 말아야 할 책이 어디 있겠습니까만,남들이 열심히 읽는데 애써서 무시하는 경우
가 있다면,저는 유행하는 책은 잘 안 봅니다.유행하는 책이 내가 관심을 갖는 주제와 관련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읽지 않죠.제가 품고 있는 어떤 질문에 대해서 같이 생각하게 해 주
는 책이 아니면 잘 안 읽습니다.그리고 이 책 저 책을 잡다하게 같이 읽기보다는 지금 제가
고민하는 주제에 관한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는 편입니다.
정 :여전히 구체적인 책을 언급하시는 건 피하시는군요.(웃음)
김 :책을 읽고 연구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 책을 열거하기 시작하면 한이 없으니 그런 것
이겠지요.그래도 저의 철학적 성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을 꼭 말해 보라면,<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시작하는 함석헌 전집을 들고 싶습니다.하지만 함 선생님에 대해서는 앞
에서도 말씀드렸으니,다시 말씀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정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가 오래 전
부터 있었습니다.인문학의 중요성,필요성이
전제된 담론인데 기본적으로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김 :저는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그다지 공감
하지 않습니다.인문학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인문학의 위기를
염려한다는 것은 대개 인문학의 세력이 위축
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하지만 교회의
세력이 축소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 결코 신
앙적 염려가 아닌 것처럼 인문학의 세력이 위
축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 역시 전혀 철학적인
염려라 할 수 없습니다.‘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도
하나뿐입니다.그것은 인문학이 과연 인문학다운가,철학이 참으로 철학다운가 하는 것이
지요.
보다 근본적으로 묻는다면 인문학이 왜 필요합니까?그리고 철학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
까?세상 사람들이 인문학이나 철학에 관심이 없는 까닭은 자기 자신의 고통과 무관하다고
느끼기 때문이겠지요.세상에 고통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그 고통에 대해 말을 건네
는 게 철학이고,그 고통을 반추하는 게 문학이겠죠.어디 인문학뿐이겠습니까?경제학도
마주하고 있는 고통이 있습니다.경제학의 과제가 부를 연구하는 거라고 한다면 그건 틀린
소리지요!경제학이 마주하는 건 바로 가난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부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
지 고민하는 것입니다.의학은 육체적 고통,법학과 정치학은 불의라는 고통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고통의 근원적 뿌리를 찾는 것,또는 총체성 속에서 고통을 반추하는 게 철학
입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왜 그걸 무시하겠어요?결국 철학이 가장 절실한 삶의 근본
문제를 외면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거지요.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가
찍혀 불에 던지움을 당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 :그런 의미에서 지금 하시는 경제학 공부가 88만 원 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의 문제
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작업이신 거군요?
김 :제가 얼마나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우리가 겪는 다양한 고통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경제적 고통이야말로 제가 마지막으로 씨름해야 할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 :하지만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더라도 부모라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존중을 받
아야 할 이유가 있듯이 인문학의 위기라는 이야기는 인문학이 지금의 고통에 대한 답변을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문학적 소양이나 교양 같은,인문학 공부에 힘을 쏟아야 할 일종의
당위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요?인문학의 위기란 지금의 젊은 세대가 그것을 등한시한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 아닐까요?
김 :당위성이 있지요.하지만 전 지금 세대가 문제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넓은 의미의
인문학,좁은 의미의 철학 책은 늘 격동기에 많이 팔립니다.젊은 세대가 자기들의 고통을
자각하기 시작할 때 책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생각하면 지금 인문학 책을 펴내는 큰 출판사
들 가운데 많은 수가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생겨난 출판사들입니다.젊은이들
이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자각하고 그와 싸우기 시작하면서 인문학 책도 날개 돋친 듯 팔
렸지요.하지만 이즈음 인문학 출판 시장이 위축되었다는 말은 젊은이들이 현실에 안주하
여 별 고민 없이 살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하지만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세상이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지면서 이제 다시 젊은이들이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에 눈뜨는
시대가 되었습니다.저는 이런 점에서 인문학에 대한 수요가 점차 증가하리라고 봅니다.문
제는 그런 새로운 자각과 물음에 대한 참된 인문학적 응답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시대가
달라졌으니 문제 상황도 다르고 그에 따라 대답도 달라져야 할 텐데,과연 우리 시대의 문제
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는 철학이 있는지 그것이 문제입
니다.
정 : 70~80년대 혼란스러운 시기에 박정희식 독재적 개발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
모두에 동의할 수 없던 한국교회는 제3의 길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대안을 진지하게 고민
하기 시작했습니다.그러면서 소위 기독교적 사회관,기독교적 역사관,특히 기독교적 철학
에 대한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논했습니다.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신지요?
김 :기독교적 세계관이 말씀하신대로 박정희식 독재와 마르크스주의적 유물사관에 모두
반대하고 제3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라면,저는 얼마든지 긍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더
나아가 그것이 종교적 내면성에 기초해서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전망을 열어 주는
세계관이라 한다면,그 역시 바람직한 일이겠지요.세상을 바꾸는 것과 나를 바꾸는 것은 언
제나 같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일반적으로 말해 근대 이후 세속 학문 또는 세계관의 기초
에는 세 가지 믿음이 있어요.첫째 존재론 및 형이상학에서 보자면 근대적 세계관의 기초는
유물론입니다.이건 물질적인 것이 진짜로 있는 것이고 나머지는 다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믿음이지요.둘째,인식론에서는 실증주의입니다.이것은 보이는 것만 진리라고
믿는 겁니다.마지막으로 가치에 관해서 즉,윤리학에서 보자면 이익이 되는 것만 좋은 것이
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공리주의가 있습니다.본래 이 세 가지는 중세적 세계관에 대항하여
해방의 이론으로 등장했는데,지금은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억압하는 도그
마가 되었습니다.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분들이,이런 것들을 고려
하면서,유물론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인 지평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그 다음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통해 실증주의를 넘어서고,마지막으로 한 마리와 아흔아홉
마리 사이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를 위해 자기를 던질 수 있는 탈공리주의로서 기독교 세계
관을 말하면 얼마나 좋겠어요?하지만 오늘날 교회가 스스로 물질의 노예가 되어 참된 믿음
을 져버리고 언제나 주류 세력의 편을 들면서,세속 학문에 빼앗긴 기독교적 도그마의 헤게
모니를 되찾기 위해 기독교적 세계관을 입에 올리는 것이라면,그런 세계관이야 부질없는
잡담에 지나지 않겠지요.
정 :혁명과 종교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하려는 차원에서 기독교 세계관이 지향하는 바는 맞
다고 할 수 있겠지만,최근 기독교세계관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듣는 큰 비판 중 하나는 각각
의 학문 속에서 전문성,탁월함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특히 창조론이나 지적설계
를 주장하는 분들에 대해서 과학계에서의 비판은 매우 거칠지요.
김 :기독교적 세계관을 말하면서 아직도 창조냐 진화냐를 두고 다투는 수준이라면 우려스
런 일입니다.그런 말을 하는 분들이 함석헌을 읽었더라면 창조론과 진화론이 다투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요.과학은 눈에 보이는 증거를 가지고 말하는 학문입니다.신
의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하물며 신의 의도를 어떻게 과학적으로 증명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과학이 신의 창조를 말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지요.하지만 눈에 보이
는 것이 존재의 전부를 다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그러므로 철학자나 종교인은 눈에 보이는
증거로부터 보이지 않는 뜻을 물을 수 있고 또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눈에 보이는 증거를
두고 말하자면,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해 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단세포 생명체가 인간에 이르기까지 진화해 온 그 사실의 의미는 진화론 자체가 말
해 주지 않습니다.이 점에 대해 완고한 진화론자들은 진화의 과정에는 어떤 뜻도 없다,그
래서 맹목이라고 말하지요.하지만 과학자들이 그렇게까지 주장한다면 그것은 월권을 행하
는 것입니다.왜냐하면 과학은 현상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 그 이면의 뜻에 대해서는
긍정할 수도 없지만 부정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철학의 영역이고 종교의 영역입
니다.그런 점에서 철학 및 종교와 과학이 다툴 필요는 없습니다.진화에 관해 철학이나 종
교의 일은 과학의 연구 성과를 존중하면서 과학자들이 말하지 못하는 진화의 의미를 묻는
것이지요.
정 :추천을 해달라는 요청에 구체적인 책을 거의 언급을 하지 않으시지만,유독 함석헌 선
생의 책과 서준식 선생의 책을 거명해 추천해 주시곤 합니다.서준식 선생의 동생인 서경식
선생과 대담해 <만남>이란 책을 내기도 하셨죠.
김 :서준식 선생은 그의 형인 서승 선생과
1971년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구
속되어 7년형을 받았지만 전향을 거부해 10
년을 더 복역해 17년 동안 형을 지내고 결국
비전향자로 석방되어 ‘인권운동사랑방’을 창
립하는 등 한국 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분입니다.그분이 옥중에서 쓴 편지를
모아 책으로 낸 것이 <서준식 옥중서한>인
데,이 책은 제가 감히 평가할 수 없는 정신의
기념비입니다.그런데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분이 편지에서 가장 자주 이야기한 사람이 바
로 예수입니다.그에 비하면 마르크스에 대해
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그분은 예수의 길을 걸어가야겠다
고 결단했다는 점에서 예수의 제자였는데,그 까닭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의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예수가 단순히 ‘약자의 편’이었기 때문이
라기보다는 우리들이 그 어떠한 강자가 된다 하여도 영원히 약자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있
는 방법을 예수가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겠다.예수는 모든 이념이 경직화되
고 ‘자율적’인 것이 되어 버릴 때 그것이 인간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억압하는지를 나에게 가
르쳐 준다.우리들이 이념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에 대한 개개의 구체적인 사
랑’에 굳건히 발 디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305쪽.)
이런 의미에서 서준식 선생은 화석화된 마르크스주의를 떠받드는 자들과 기독교의 도그마
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모두 우상숭배자들이라 보았습니다.
“제가 예수를 사숙하는 데 대하여 짜증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태도를 분명히
하라고.예수냐 마르크스냐.양자택일 하란 말이야 라고 하고 싶은 사람들 말입니다.어리석
기 짝이 없는 넌센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런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정의
롭고 착하게 살아가는가가 아니라 역사적 감각도 분별도 없는 ‘예수냐 마르크스냐’라는 것
입니다.이것이 우상숭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요란하게 하늘을 찌르는 교회 건물과
그 꼭대기에 설치된 십자가가 우상숭배를 금하는 기독교의 우상이 되어 버리고 있듯이 그
것과 약간 다른 의미에서 마르크스도 역시 우상숭배의 대상이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227
쪽.)
하지만 예수를 따르든 마르크스를 따르든,인간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면 예수나 마르크스
를 팔아 장사하는 것일 뿐,종교도 혁명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지요.이 점에서 서준
식 선생의 다음과 같은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소외 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강렬한 사랑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것이며,늘
옳은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의지할 수 있는 지표입니다”(228쪽.)
한편에서 함석헌 선생처럼 기독교적 신앙에서 시작하여 혁명을 꿈꾼 것처럼,서준식 선생
처럼 정치적 인간으로서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 싸우면서도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이토록
깊은 이해와 공감을 보인 것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교훈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대로 참된 혁명은 내면의 쇄신과 바깥 세계의 변화가 같이 갈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서준식의 <옥중서한>은 2002년 출간한 야간비행 판과 1989년에 형
성사에서 3권으로 나눠 처음 출간했던 <모래 바람 맞은 영혼>,<새벽의 절망을 두려워 않고
>,<고뇌 속에서 떠오르는 희망>을 포함하면 모두 세 판본이 있다.인용한 책은 최근 ‘노사
과연’에서 출판된 것이다.)
정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저희 잡지 이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복음과상황>입니
다.오늘은 교수님이 바라보시는 오늘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마무리를 짓고 싶습
니다.
김 : 30년 전에 우리 사회의 가장 절박한 과제는 독재 타도였습니다.지금 독재자들이 물러
간 자리에 돈이 왕 노릇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보다 직설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박정희나
전두환이 물러간 자리를 이건희가 차지한 것이지요.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이것이 저의 현
재 한국 사회에 대한 상황 인식입니다.군부독재든 자본이든 인간을 노예로 삼아 자유를 억
압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그러므로 자유롭게 살려는 자,이제 자본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하지만 군부독재와 자본의 독재 사이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자본은 밖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권력일 뿐 아니라,동시에 우리의 내면에서 욕망을 지배하는 유혹자이기
도 합니다.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황금을 숭배하고 스스로 자본의 지배에 순응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본에 저항한다는 것은 외적으로 재벌을 해체하고 경제를 민주화하는 것뿐만 아니
라 내면적으로 황금송아지에 대한 우상숭배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의 상황이 동학혁명과 삼일운동 때처럼 다시 종교와 혁명이 하
나로 만날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담을 쌓고 황금 송아지를 키
우면서 입으로만 영혼의 구원을 말해 왔다면,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황폐해 가
는 내면을 돌보지 않고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서만 분노했었죠.이제는 다시 정치와 종교가
만날 때가 되었습니다.돈의 지배에 저항해 싸운다는 것은 인간을 억압하는 악한 힘에 맞서
약자 편에서 싸우는 것인 동시에 자기 내면의 공포나 욕망과 싸우는 것이기도 하니까요.이
런 의미에서 저는 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진보적인 기독교 청년운동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
고 있습니다.아무쪼록 다시 한번 새로운 세대의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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