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6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이카리’

IJS일본리뷰 -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2023年 07月 12日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100년을 맞이하는 역사학자로서의 단상
이형식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간토(関東) 지방에는 매그니튜드 7.9라는 역대 급 거대 지진이 발생했다. 25만 명의 사상자와 1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면서 일본 사회 는 순식간에 대혼란 상태로 빠져들었다. 자연재해로 유발된 대위기 속에서 ‘조선인이 폭동 을 일으켰다’, ‘우물에 독을 넣었다’ 등의 유언비어가 유포·확산되면서 군대, 경찰, 자경단 등 에 의해 6,000여 명의 조선인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그러나 이 학살은 국가권력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사체를 은닉하고 학살에 대한 항의 및 추도행위를 탄압하였다. 사건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사건의 진상도 희생자도 매장지 도 모른 채 어느덧 1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이카리’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문제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계기·배경에는 재일사학자 강덕상 선 생님 등의 연구에 힘입은 바가 크다. 강덕상 선생님은 미국에서 반환된 지 얼마 지나지 않 은 시점부터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일본 육·해군 문서를 열람하셨다. 당시 복사가 허용되지 않던 시기였는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모님과 함께 거의 매일 국회도서관으로 출근 해 자료를 필사하셨다고 한다. 강덕상 선생님께서 필사한 자료와 금병동 선생님이 고서점에 서 구입한 자료를 모아 ‘관동대진재 40주년’을 맞이하던 해인 1963년에 사료집 『관동대진 재와 조선인(関東大震災と朝鮮人)』을 출판했다. 사료집에는 관동대진재 시기의 조선인 학 살을 입증하는 일본 정부의 공문서와 조선인의 증언, 체험담이 다수 수록되어 있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 근대사 연구자인 교토대학의 마쓰오 다카요시(松尾尊兊) 선생의 논문도 발표 되었지만, 강덕상 선생님의 사료집 출판의 파급효과는 대단했다. 재일조선인과 일본의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만이 알고 있었던 조선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은 일본 언론에도 대서특 필로 다루어지면서 학계를 넘어서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게 된 것이었다. 사료 집 출판을 계기로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연구와 학살의 진상을 구명하려는 시민운동이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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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화되었다. 하지만 정작 강덕상 선생님은 당시 일본 내에 한국사 수요가 없는 점과 ‘재일조 선인’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대학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셨고, 56세의 나이로 히토쓰바시대 학에 교수로 취임하셨다. 연구자의 이른바 ‘학문 전성기’인 40∼50대에는 생계 유지를 위해 중국집 주방에서 ‘웍’을 잡고 요리일을 병행하셨다고 한다. 조선인 학살 연구는 강덕상 선생 님과 그 가족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은 바가 가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 유학하던 당시 강덕상 선생님을 몇 번 개인적으로 뵌 적이 있다. 내가 2002년 석사 1학년 시절, <강덕상 자료 수집>을 목적으로 출장 온 국사편찬위원회에 근무하던 선배를 따 라 선생님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통역을 겸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평생 근대 한일관계 를 연구하셨던 ‘전설의 원로 학자’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게 작용했다. 술이 한 순배 돌아간 후 선생님께서는 이제 막 연구를 시작하려는 까마득한 석사 1년 차이던 내게 “이군(李君), 연구자는 이카리를 어디에 두는지가 중요해”라는 말씀을 하셨다. 일본어 가 서툴렀던 당시로는 ‘이카리’를 ‘분노(怒り)’로만 생각하고 ‘이카리를 두다’라는 표현이 일 본어에 있나? 하며 갸우뚱해졌다. ‘일본 사회에서 평생 차별과 편견 속에서 살아오셨던 재 일조선인이었기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겠지’ 하며 그 자리에서는 무심코 지나쳤다. 그러다가 한참 지나고 나서 ‘이카리’라는 일본어에 동음이의어로 ‘분노(怒り)’ 말고도 배에 내리는 ‘닻 (錨)’이라는 뜻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날 선생님께서는 내게 역사를 대하는 연 구자의 자세와 태도를 말씀하셨던 것이었음을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탈진실의 시대’의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관동대진재 관련 사료의 발굴과 편찬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아 울러 10주년 간격으로 심포지엄, 집회, 각종 잡지의 특집호, 서적 출판 등으로 연구, 운동 모 두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가운데 무라야마 담화, 고노 담화로 대표되는 식민지 지배 인 식에 대해 반발하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일본에서의 배외주의 고양과 함께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조선인 학살에 대한 역사수정주의적 해석이 등장하기 시작 했다. 그들이 논거로 삼는 것은 ‘대량 학살을 증명하는 공문서가 없다’, 즉, 연구자가 제시한 6,000여 명이라는 숫자를 문제 삼는 것이었다. 홀로코스트나 난징학살을 부정하는 독일과 일본 우익들의 논리와 유사하다. 또 당시 일본의 신문보도를 근거로 ‘유언비어는 근거 없는 소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선인 폭동을 사실로 단정하고 조선인이 일본 황태자 암살을 기도한 테러리스트였기 때문에 조선인을 살해하는 것은 학살이 아니라 일본인의 정당방위 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인 학살 부정론은 처음에는 극우 성향의 작가, 저널리스트나 정 치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동조하는 사람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당 연히 학술적인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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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후 일본의 역사학계에서도 관동대진재 시기의 경찰, 군대의 유언비어 확산과 조 선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면죄해 주는 수정주의적 해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발 더 나아 가 2019년에는 하버드대학의 램지어(John Mark Ramseyer) 교수는 극우 서적과 우익의 블 로그에서 인용되는 사료를 여과 없이 사용하여 조선인 학살과 일본 정부의 개입과 주도를 부정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공개되었고 2021년에는 캠브리지대 학 출판국에서 출판되었다. “위안부는 계약에 의한 매춘부다”라는 취지의 논문을 발표해 물 의를 일으키기도 했던 램지어 교수는 미쓰비시 그룹이 하버드대학에 기부해 만들어진 기금 교수(정식 직함은 하버드대학 미쓰비시 일본 법학 교수)다. 논문에는 하버드대학 법과대학 원과 도쿄대학 법학부의 아낌없는 지원에 감사한다고 적혀있다. 세계적인 유수 대학의 학문 적 권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정당화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조선인 학살 부정론은 근거 없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점차 공적인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 심각한 부분이다. 예를 들면, 2013년에는 요코하마 시(横浜市) 시의원의 문제 제기로 시위원회가 제작한 사회과 부독본(副讀本, 보조교재)에서 ‘학살’이라는 용어가 사라졌다. 작년 3월에는 일본 교과서에서 관동대진재 당시 조선인 학살 사건이 삭제됐다.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2022년 도쿄도 인권부가 관동대진재 당시의 조선인 학살을 다뤘다는 이유로 다큐멘터리 영화 <In-Mates> 상영을 금지해 논란이 되었다. 감수에 참여했던 재일조선인사를 연구하는 도노무라 마사루(外村大) 도쿄대 교수 등은 도쿄도의 ‘검열’에 항의했다.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지사는 관동대진재 조선인 희생 자의 추도식전에 6년 연속 추도문을 보내지 않았는데, 도지사의 이러한 자세를 지레짐작하 여 처리(손타쿠, 忖度)한 게 아닌가 의심되었다. 작년 9월 1일에는 조선인 학살 피해자 추도 식이 거행되는 도쿄 요코즈나쵸(横綱町) 공원 근처에서 평소 조선인 배척을 호소하는 배외 주의자 집단이 ‘학살 부정’ ‘헤이트 스피치’ 집회를 열었다. ‘학살 부정론’은 더 이상 인터넷 우익의 망상이 아니라 일부 언론과 정치가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학술적인 영역으로, 역사 교육으로, 사회적 운동으로까지 진화를 거듭하면서 확산되고 있다. 역사의 역주행, 백래시 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인 것 같다.
 
재일조선인 차별과 배제의 역사와 ‘학살의 기억’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문제는 100년이나 지난 과거의 일로 치부될 사안만은 아니다. 재 일조선인을 둘러싼 유언비어, 가짜뉴스는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아시아태평 양전쟁 시기 내무성은 관동대진재를 교훈으로 공습에 대비한 방공훈련을 거듭했다. 공습 때 발생하는 화재나 땅울림은 관동대진재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관동대진재 20 주년에 해당하는 1943년 오다치 시게오(大達茂雄) 도쿄도장관은 공습 때 날뛸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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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우에노(上野) 공원에 있는 맹수의 살처분을 명령했다. 치안을 어지럽힐지 모른다는 이유 로 동물도 처단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1944년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본격화됨에 따라 경제 불법행위(식량, 물자의 암시장), 조 선 민족의 독립, 조선인 학살과 같은 조선 관련 유언비어가 증가했다. 일본인 사이에는 조선 인이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증가해 조선인을 ‘위험시’했다. 치안 당국은 징 용 등으로 재일조선인 인구가 늘어나면서 공습을 이용하여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하는 ‘비상시의 조선인 대책’ 마련에 고심했다. 공습이 시작되자 공습과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을 결부시킨 유언비어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재일조선인들은 공습에 의 한 피해뿐만 아니라 학살의 공포 속에서 또 다른 전시 생활을 견뎌내야 했던 것이다.
  한국전쟁 시기에도 재일조선인에 대한 각종 유언비어와 가짜뉴스가 난무했다. 「일본에 잠 입한 빨갱이 조선인 3만명의 테러단」(1952년 3월 30일자), 「북한 조국방위대의 정체가 밝혀 지다 혈판의 특공대 3만」(1952년 7월 16일자), 「일본에 잠입한 북한부대 전국에 약 80만 일 본공산당 지휘하에 조직화」(1952년 7월 17일자) 등 일본의 언론들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근 거 없는 악의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2023년 5월 참의원에서 스기오 히데야(杉尾秀哉, 입헌민주당) 의원이 다니 고이치(谷公一) 국가위원장에게 관동대진재 시기 조선인 학살에 공권력이 관여했는지 조사를 요구했
다.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는 100년 만의 질의였다고 한다. 다니 위원장 은 “정부가 조사한 바로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최근에도 구마모토 지진 때 동물원에서 사자가 도망쳤다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나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 들었다”고 답했다. 우에노의 동물을 살처분한 오다치를 연상시키는 발언이다. 2011년 동일 본대지진 때에도 외국인들이 구호물자를 약탈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차별과 편견이 사라지지 않으면 그 앞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학살과 전쟁”이라고 했던 재특회(在特會)를 추적해왔던 저널리스트 야스다 고이치(安田浩一)의 주장은 이 시점에 더욱 귀담아 새겨야 할 표현이 아닐까. 외국인, 사회적 마이너리티에 대한 차별과 편견 문제는 비단 일본만의 문 제는 아닐 것이다.   
 
관동대진재 100년을 맞이하며 

  2017년 일본 유행어 대상을 수상할 만큼 유행어가 되었던 ‘손타쿠(忖度)’는 일본 사회만의 고유한 현상이 아닌 듯하다. 작년에 돌아가선 강덕상 선생님께서 평생 수집한 자료가 국내 에 들어왔다.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 100주년을 맞이하여 선생님께서 수집하였던 관련 자 료를 몇몇 공공 박물관과 역사관에 전시 의사를 타진했다가 거절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 우익들이 쏘아 올린 역사수정주의가 한국의 전시까지 혹시 영향을 미친 것인가?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새삼 강덕상 선생님과의 첫 대면 때 말씀하셨던 ‘이카리’ 언급이 떠올랐다. 만약 살아계셔서 한일 양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보셨다면, 선생님의 그때 의 ‘닻을 의미하던 이카리’가 이제는 ‘분노를 의미하는 이카리’로 변했을 것이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경험한 후로 일본 사회 내에서도 관동대진재에 대한 관심이 차츰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은 착잡하다. 올해로 100년째를 맞지만, 자료 은 폐로 진상 규명도 사과도 요원하기만 하다. 관동대진재를 체험한 사람도 이제는 대부분 생 존해 계시지 않는다. 그들의 체험과 기억은 후세대에 제대로 전승되지 못하고 있다. 조선인 학살의 연구와 조사 활동을 주도했던 세대가 고령으로 돌아가시거나 더 이상 활동을 하실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반해 조선인 학살을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는 갈수록 극성을 부리고 있다. 문제는 일본 사회뿐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과연 얼마나 관동대진재에서의 조 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알고 있고 기억하려 하고 있을까?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현재적 고민에 대해 짚어보고 돌아봐야 할 중요한 테마이자 계기일 것이다. 
  올해는 관동대진재와 관련하여 학술회의를 비롯하여 전시회, 강연회 등 많은 행사가 예정 되어 있다. 대학에 부임한 후 10년 만에 첫 안식 학기를 받아 7월부터 도쿄에 체재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방문한 도쿄의 일상이 한국과 달리 매우 ‘변함없음’을 느끼는 ‘낯설지 않은 어딘가 어색한 익숙함’ 속에서 80주년, 90주년과 다르게 일본 사회가 대면하는 관동 대진재 100주년의 되새김의 현장을 올해 이 현장에서 살피고 갈 임무가 일본 역사 전공자의 한 사람인 나의 임무일 것이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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