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5

알라딘: [전자책]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 메이지 이후의 일본 강상중

알라딘: [전자책]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 메이지 이후의 일본 
강상중 (지은이),노수경 (옮긴이)사계절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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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16년 1월부터 2017년 9월까지 교도통신이 주관하고, 전국 30여 개 일간지에 동시 연재된 화제의 기행문 「강상중 사색의 여행 1868년부터」를 한 권으로 묶은 책이다. 2018년 메이지 150주년을 앞두고 과거에 대한 찬사와 만세 구호가 휘몰아치고 전 국가적 성대한 기념식을 준비하며 애국심을 고취하던 그때, 강상중은 메이지가 남긴 야만적 차별과 불평등, 그리고 그로 인해 비참에 빠진 국민을 보듬는 작업을 시도했다. 모두가 과거의 영광에 취해 곧 완성될 완전한 국가 일본, 완전한 국민 일본인에 열광하고 있을 때, “아니오, 일본은 영광스럽지 않습니다”라고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최남단 오키나와에서 나가사키현 군함도와 구마모토현 구마무라, 효고현 고베시, 후쿠시마현 원자력 발전소 등을 거쳐 최북단 홋카이도 노쓰케반도에 이르기까지, 그가 방문한 일본 열도 전역은 떠오르는 국가에 짓눌리고 버림받은 국민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강상중은 그들을 만나 대화하며, 메이지 이후 일본의 역사는 국민을 버리는(기민棄民) 정책들로 가득했음을 밝힌다.

일본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이자 영원한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는 강상중이 이 책에서 드러낸 역사의 그늘은 단지 일본 근대에, 그리고 전후의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야만의 기록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150년간 계속되고 있는 헐벗은 백성의 현장에서 강상중은 메이지가 남긴 야만의 정체를 고발한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5
들어가며 15

1. 에너지가 곧 국가다
성장의 빛과 그림자–폐허의 섬에서 25
연기에 우는 달–근대의 비명 소리 29
산하가 무너진 곳에 국가가 있으니 33

2. 빈곤과 격차의 미래
패망의 발전–풍요 속의 어린 희생자 41
기민과 멸시–제 몸뚱어리 크기만큼의 미래 45

3. 인재를 만드는 궤적
개국과 통제의 이율배반–메이지와 경쟁하는 현대 53
폐쇄되는 자유 공간–모순에 멍드는 학생들 58
신화의 붕괴, 흔들리는 대학–성숙사회와 대학의 존재 의의 63

4. 천재지변이라는 숙명
대지진이 폭로한 사회–전쟁에 필적하는 물음 69
부흥을 가로막는 관치官治와 분투하는 사람들 74
커뮤니티가 주인공-마음을 갉아먹는 거대한 이물질 78

5. 벼랑 끝에 선 농업
농업을 망가트린 시장주의–별천지의 고질병 87
개척 정신–미래의 리트머스 종이 92

6. 경세제민의 계보를 찾아서
정치란 무엇인가–정치의 순환을 막는 가업화 99
의식의 비대화–경영의 신이 세운 정치학교 102
정치가 부족 현상–세습 의원과 벼락 의원 107
후보자 선발 시스템의 문제–공명당, 공산당의 강점과 한계 112

7. 동맥의 망치 소리
철도와 근대화– 육증기가 가져온 혁명 119
권력의 원천, 도로망–노후화와 뒤틀림 123

8. 근대의 나락으로 가다
바다가 들려준 일본의 고질병–미나마타병을 방치한 차별 구조 131
반복되는 인간 무시 사상–검붉은 아시오 의 통주저음 136

9. 잔치는 끝났다
시대착오적 발상–박람회가 꿈꾼 미래 145
반세기 전에 끊어진 미래–만국박람회 터를 바라보며 149

10. 차별이라는 이름의 병
유용성을 선별하는 시선–일등국가 강박증 157
정상을 가장한 사회의 그늘–우생 사상의 현재 161

11. 지울 수 없는 기억
폭력과 공존하라는 명령–오키나와의 과거와 현재 169
비전으로 통하는 비군의 확신–집단사의 지옥 174

12. 재벌이라는 키메라
근대화와 함께 솟아오른 이에의 지배 181
재벌의 미래를 생각하다 184

13. 자이니치라는 물방울
전후 73년, 그리고 메이지 150년 191

14. 변경적인 것
희미한 빛으로 깃드는 희망–‘야만의 기록’을 고발한다 203

마치며 207
감사의 말 220
옮긴이의 말 223
참고문헌 226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왜 사람은 빛을 구할까? 어찌하여 밝음을 좇는 걸까?



P. 17막부 말기의 사상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이 주창한 화혼양재和魂洋才가 바로 낙관을 상징하는 표어다. 「추진」은 메이지 유신 이후 150년을 관통하는 화혼양재 정신을 강조한다. 세계화의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오늘이야말로 강력한 화혼양재의 힘을 소생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화혼양재라는 이상이 과거의 사람과 미래의 사람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19세기 서구에 맞선 메이지 일본의 국가 전략이 바로 화혼양재였다. 이것이 세계화에 맞서는 현대 일본의 무기로 다시 호출됐다. _ 「들어가며」 중에서 접기
P. 19동일본 대지진과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후쿠시마로 갔다. 거기에서 질문이 솟아올랐다. ‘왜 일본에서 인류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는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 미나마타(미나마타병의 발생지)의 전례 없는 공해, 후쿠시마 원전 폭발 같은 묵시록적 사건이 왜 되풀이되는가? 세 비극만으로도 화혼양재는 완전히 빛바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메이지 150년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다. 애국심을 고무하고 화혼양재의 낙관을 선전한다. 여기에 어떤 원형이 존재한다면,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_ 「들어가며」 중에서 접기
P. 41과거에는 전쟁이 아동과 청소년의 생존을 위협했다면, 현대 일본의 어린 희생자는 빈곤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다. 거리에서 밥을 구걸하는 4살 아이, 자동판매기에서 나오는 온기에 기대어 잠을 자던 어린 형제 등 비참한 상황을 전하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2015년 일본 아동의 상대적 빈곤율은 13.9퍼센트(후생노동성 ‘헤이세이 28년 국민생활 기초조사’)에 달하여 OECD 평균을 웃돌았다._ 「빈곤과 격차의 미래」 중에서 접기
P. 54글로벌한 ‘개인 경력 모델’이 최근에 갑자기 유행한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똑같았다. 서구화라는 이름의 문명개화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으로 근대 과학기술 도입을 장려하는 학교 제도를 확립한 과거, 바로 메이지 시대의 이야기이다. 메이지 국가 초기의 대표적인 양학자洋學者 후쿠자와 유키치福?諭吉의 말을 빌리면, 개인 경력 모델은 보편적 과학 정신을 몸에 익힌 서양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1870년대 후반에는 양혼洋魂의 핵심인 자유와 민권에 대항하는 반동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앞선 시대의 통치 수단인 엄격주의에 입각한 유학儒學의 부활’이 추진되었다. _ 「인재를 만드는 궤적」 중에서 접기
P. 72자연에 반항한 인간의 세공, 즉 잔꾀. 이것이 지진의 “운동 에너지가 될 위치 에너지를 축적하여 재해를 키웠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결과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이다. 지진이라는 천재지변은 우리 사회의 강점과 약점을 폭로했다. 재난이 닥쳤을 때 지역, 사회, 국가의 ‘본성’이 드러난다. 강점과 약점, 그리고 각 개인의 삶과 죽음을 드러낸 대지진은 전쟁에 필적할 정도로 강렬하게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또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느냐?” _ 「천재지변이라는 숙명」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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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강상중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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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규슈 구마모토현에서 재일 한국인 2세로 태어나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전후戰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펼치며 시대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자리 잡았다.
재일 한국인으로서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 학교를 다니며 자기 정체성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고, 와세다대학에 다니던 1972년 한국 방문을 계기로 “나는 해방되었다”라고 할 만큼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 이름을 버리고 ‘강상중’이라는 본명을 쓰기 시작했다.
뉘른베르크대학에서 베버와 푸코, 사이드를 파고들며 정치학과 정치사상사를 전공했다. 재일 한국인 최초로 도쿄대학 정교수가 되었고, 도쿄대학 대학원 정보학환 교수, 도쿄대학 현대한국연구센터장, 세이가쿠인대학 총장을 거쳐 현재 구마모토현립극장 관장 겸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만년의 집』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위험하지 않은 몰락』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구원의 미술관』 『고민하는 힘』 『살아야 하는 이유』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한반도와 일본의 미래>,<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만년의 집> … 총 38종 (모두보기)
인터뷰 : 고민, 다들 하고 있습니까? - 2009.05.06

노수경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여자들의 테러』, 『아이들의 계급투쟁』, 『책의 길을 잇다』, 『한반도와 일본의 미래』,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만년의 집』, 『위험하지 않은 몰락』,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등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본인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가?”
메이지라는 이름의 야만 세계를 고발하다

“일본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코로나19로 드러난 일본의 맨얼굴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와 산업화를 달성한 국가이자 올림픽을 개최한 국가. “재팬 애즈 넘버 원JAPAN as NO.1”이라는 수식이 어울리는 경제대국. 20세기에 우뚝 솟은 일본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 대한 평가가 급속히 바뀌고 있다. 30년 장기 불황에도 끄떡없어 하던 나라가 새롭게 등장한 바이러스 앞에서 휘청거린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내각 관료들이 자국의 방역 시스템은 아무런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다고 발표하며 진화에 나섰지만, 일본을 향한 전 세계의 의심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그리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왜 이렇게 형편없어진 것인가?”
“일본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코로나19는 일본 경제에 낀 거품뿐 아니라, 정부와 체제를 비롯한 국가 시스템에 낀 거품까지 걷어냈다. 강상중의 새 책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은 거품이 꺼진 이유를 새로운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 거품은 메이지 유신이 남긴 그늘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 일본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국민을 버리며 떠오른 국가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150년 전의 개국과 서구화, 그리고 80년 전의 2차 세계대전이 불러온 거대한 전환에 필적할 만한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창궐한 지금, 한국과 일본의 대응을 비교하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2020년의 한국은 메이지 유신과 10월 유신의 그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중이다. 반면 메이지 국가를 영광의 시대로 칭송하며 아름다운 일본을 만들겠다고 말하는 귀태의 아이와, 그를 중심으로 하는 통치 시스템은 지금도 ‘약한 사회 위에 우뚝 솟은 국가주의’의 생리를 버리지 못했다. 그 결과 일본 전국에서 균열과 비틀림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여러 한계를 극복하며 착실하게 시민과 사회운동의 힘을 키웠다. 규범과 정의라는 관념이 사회적 결속을 강화했고 ‘강한 국가’를 견제할 수 있는 ‘강한 사회’를 갖는 데 성공했다. 한국은 강력한 통제와 처벌을 앞세우지 않고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폭발적 확산을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모범적 대응은 하루아침에 가능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민주화를 통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국가를 감시하는 능력을 길러온 역사의 성과일 것이다. _8~9쪽,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국가에 유용한 인간이 되어라.”유신의 그늘에 버려진 국민
메이지 유신이 일본에, 그리고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 국가와 민족이 가진 본래의 정신에 서양의 기술을 결합하는 ‘화혼양재和魂洋才’와 산업을 양성하고 군대를 강화하는 ‘부국강병富國強兵’은 20세기 비서구 국가의 거의 유일한 근대화 모델이 되었다. 실로 아시아의 근대는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시민혁명과 정치 체제의 민주화라는 굳건한 기반 없이 서구의 기술을 모방하는 데만 몰두한 메이지 유신의 결과, 산업화에 성공한 근대국가 ‘대일본제국’은 심각한 결함을 가진 괴물이 되어버렸다. ‘서구의 기술(洋才)’과 제대로 섞이지 못한 ‘일본의 정신(和魂)’은 제국주의로 변해 폭주했다. 그 끝은 태평양전쟁이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발의 원자폭탄이다.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알리는 천황의 목소리가 라디오 전파를 타고 퍼져나간 이후 일본에게는 ‘보통국가’로 돌아오는 길이 강제되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익히 아는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이다. 그 뒤 이어진 20세기 후반의 현대는 일본이 다시 세계 일류 국가로 도약하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150년이 지난 2018년, 강상중은 또 다른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그는 발전과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는 국가에 깔려 있던 국민들, 국가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나고 버려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본 열도를 종단하며 그가 만난 버려진 국민은 국가의 성장을 떠받친 ‘사람기둥人柱’들이었다.

국가는 살아 있는 인간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살아 있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무기질적 권한과 규칙, 관행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상황을 바로잡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전후 민주주의는 ‘평화국가’의 기치를 내걸고 개인의 인권과 함께 인간다운 ‘문화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일본은 마치 국가를 위하여 국민이 존재하는 것처럼 도착된 상태였다. 국민 없는 국가주의만 팽창했다. _211쪽, 「마치며」 중에서


“왜 우리가 도쿄를 밝히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버려진 국민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가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라는 미증유의 재난으로 이어졌다. 그 현장을 찾았던 강상중은 한 이재민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아들었다.

대지진 몇 주 후의 일이다. 취재 차 방문한 후쿠시마현 소마시에서 원전 사고로 피난을 온 주부를 만났다. “왜 우리가 도쿄를 밝히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는 그녀의 말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그 말이 ‘정치학자 나부랭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무거운 질책으로 다가왔다. _25쪽, 「1장. 에너지가 곧 국가다」 중에서

1990년대의 버블 붕괴와 이어진 장기 불황을 겪으며 ‘관리의 일본’이라던 자랑이 흔들리고 있던 때에 갑자기 찾아온 재난 상황에서 국가와 정부는 사태를 수습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원전 사고 후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후쿠시마 시민 중 4분의 1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며, 발전소 구역 안에는 지금도 처리되지 못한 원자력 폐기물이 쌓여가고 있다. 이재민의 비명 소리 같은 질문을 받아든 강상중은 국민에게 닥친 비극과 원전 사고 앞에 드러난 일본 정부의 무능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메이지 유신 이후 150년 역사의 도처에서 이 장면이 계속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선진 국가 일본 안에 후진 사회와 국민은 존재할 수 없다.”
메이지라는 망령의 패턴
산업화의 속도를 높이던 20세기 전반부의 군함도에서, 신세계를 건설하겠다는 꿈에 부풀었던 1930년대의 만주국에서, 그리고 세계 일류 국가로 우뚝 선 20세기 후반부의 미나마타와 오키나와에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일본은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것을 관리하여 회복하기보다는 한결같이 감추고 피해자를 쫓아내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선진 국가 일본 안에 후진 사회와 국민은 존재할 수 없다’라는 망령이 지난 150년간 시기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솟아올랐다. 그는 비극이 되풀이되는 이유는 문제를 “한갓 자연재해로 치부하고, 망각이라는 안전지대로 도망가서 희극적 일상을 계속하는 것이 일본 근대의 패턴”이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군함도는 과거에 존재했던 계층 질서를 공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볕이 잘 들고 전망도 좋은 빌딩 상층부나 섬 중앙의 고지대에는 상급자와 임원이, 하층부에는 광부와 그 가족이 거주하는 구조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이라는 국가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식산흥업殖産興業과 부국강병, 풍요와 번영, 발전과 성장이라는 일본의 꿈이, 그러나 그 반대였던 가혹한 현실이 응축되어 있다. _28쪽, 「1장. 에너지가 곧 국가다」 중에서

피해자들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병에 걸렸다고 멸시받으며 병고와 빈곤으로 내몰렸다. 정부는 이들을 돕지 않고, 오히려 매몰차게 내던졌다. 부작위不作爲가 반복되고 참상은 묵인됐다. (중략) 미나마타병에 걸려서 차별이 생긴 게 아니라, 차별이 있는 곳에서 공해가 발생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에 차별은 배 속의 태아에게까지 향했다. _135쪽, 「8장. 근대의 나락으로 가다」 중에서

전쟁이 막 끝났을 때 미군 해병대는 본토에 주재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본토의 반기지 감정이 고조되자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미군을 오키나와로 이동시켰을 뿐이다. 오키나와에 폭력을 집적시키고 격리한 이유는 군사 전략이나 억지력 때문이 아니다. 이는 오키나와가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니라서가 아닐까? _173쪽, 「11장. 지울 수 없는 기억」 중에서


“나는 변경을 몸에 두른 자들의 상속인이다.”
희극과 비극으로 나뉘지 않은 미래를 가리키는 이정표
재일 조선인 2세인 강상중의 삶은 변경으로 쫓겨난 기민의 삶 그 자체와 닮았다. 변경에는 그 이름 자체로 차별의 상징이 된 피차별 부락과 「우생보호법」 때문에 합법적으로 죽음에 내몰린 한센병 환자들이 있었다. 천황을 위해 죽음을 강요당한 우치난추(오키나와 사람)와 광산에서 유출된 독극물로부터 도쿄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수몰된 야나카무라 주민들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제국의 몰락과 함께 발 디딜 곳을 잃어버린 재일 조선인, 곧 자신도 거기에 있었다.
바닥에 깔린 이들을 만나고,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책으로 옮기는 일은 곧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세상을 직시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사회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인 동시에, 지은이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가는 구도求道 과정이기도 하다. 영원히 희극일 것만 같았던 근대화와 고도성장을 몇 겹 벗겨내니 힘겨운 생존의 비극이 드러났다. 하나 강상중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상처를 더욱 깊숙이 도려내어 야만의 뒷면에까지 도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국가에 버림받은 자,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말을 받아와 이 책에 옮겨 적었다. 그들의 말과 삶에서 어슴푸레한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피해 지역 주민의 생활을 부흥시키고 그것을 돕는 사람을 지원하는 조직이 공동체 내부에서 탄생했다. 대지진의 기억을 전승하고 마음의 상처를 보살피는 눈물겨운 모임이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이는 지진이 낳은 예상 밖의 결과물이다. 피해 지역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과 사회의 복원력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_78쪽, 「4장. 천재지변이라는 숙명」 중에서

메이지 초기에는 다카시마 탄광의 갱부를 억압하는 궁핍과 아시오 광독 사건의 참상을 폭로한 지식인이 있었다. 전후에도 공해 반대 운동, 시민 운동, 평화 운동, 차별 철폐 운동 등에 투신한 지식인이 있었다. (중략) 이 책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사회적 곤경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린 유사 인텔리이다. 그들의 유산이 현대로 계승된다면 메이지의 그늘에 갇혀 국가를 올려다보기만 하던 순종성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_217~218쪽, 「마치며」 중에서

강상중은 과거의 참상을 기억하고 사회의 어둡고 깊숙한 바닥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희망을 캐는 광부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지식인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마지막 장, 마지막 단락의 “나는 변경을 몸에 두른 자들의 상속인이다”라는 문장은 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체념이나 포기가 아니라, 버려진 국민으로부터 미래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이정표이다. 그의 말처럼 일본의 미래가 이름 없는 민중의 삶으로 채워질지 우리도 함께 지켜볼 것이다.

전후가 어제의 세계로 물러나고, 야만의 역사가 애국과 만세 구호에 묻히고 있다. 변경은 기억과 기록에서 지워질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승리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면서 죽은 사람들을 복원해야 한다. 역사의 묘지에 버려진 이들을 되살려 이어 붙일 때, 비로소 내 부모가 살아간 역사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변경을 몸에 두른 자들의 상속인이다. _205쪽, 「14장. 변경적인 것」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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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부터 강력하다. 요즘엔 반일과 극일을 넘어 안타깝기까지 하다.
이박사 2020-06-2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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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음집이라 그런지 내용에 깊이가 없는 것 같다. 단 “희극적 일상” 이라는 단어는 뇌리에 박힌다
가명 2020-09-04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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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고개를 돌려 현대 일본사회를 바라봅니다. 메이지 이후 일본사회를 강상중의 육성으로 들어봅니다. 수없이 보던 일본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외국인이 이런 어두움의 무게를 들어올리기는 어렵죠. 김사량, 메도루마 슌, 누쿠이 도쿠로, 무라타 사야카, 그들의 눈이 걷던 일본 하늘 아래.
청아한아이다 2022-06-0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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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에서 나온 책은 믿고 읽습니다. 흥미로운 주제네요.
햇살 2020-06-22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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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림과 버림으로 성장한 근대 일본



책의 작가는 47년 생으로 재일 교포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부모가 한국인이다. 대학의 교수로서 일본사회의 주류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출신이 철저히 변경인 재일 교포인 것이다. 재일한국인이나 조선인은 아직도 일본에서 외국인 등록증명서를 받는다. 거기엔 다양한 정보와 동시에 상륙허가와 재류기간이 써있는데 당연히 자이니치들은 국적만 한국이나 북한일뿐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들이니 굳이 필요가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마치 일본에 잠시 들르는 외국인처럼 상륙기간과 재류기간을 표기한 외국인 등록증명서를 준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인 셈이다. 본인들도 억지인걸 아는지 물론 재류기간과 상륙기간에 별표시가 되어있기는 하다.

자신들의 식민지 만행으로 생겨난 자이니치에게도 이런 대접을 하는 일본에 저자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과연 약자인 국민과 변경인들에게 어떤 대우를 했을지 살펴볼 필요가 들었던 것 같다. 2차대전의 패전, 미나마타병, 미카와탄광폭발사건,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폭발등 이런 끔찍한 사건은 대체 왜 일본에서만 반복되는지도 저자의 주요의문이었다.

역사가 보여주듯 메이지이후 150년간 일본의 역사는 떠오르는 역사였다. 아시아 최초로 산업화에 들어섰고, 그 힘으로 아시아의 많은 지역을 지배했다. 패전 후 몰락할 것만 같았지만 한국 특수로 다시 기사회생하여 60년대에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서서 거의 50년간 그 자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쇠퇴의 기미가 역력하지만 여전히 3위의 경제대국이다. 그렇게 국운이 욱일승천하는 동안 그 나라를 위해 일하고 전쟁에 참여한 국민들, 그리고 특히 약자들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국운을 올리는 것만이 제일 목적인 나라에서 뒤틀린 부분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일본은 교육부터 뒤틀려 있다. 패전 이후 68혁명을 통해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고자 현대사의 아픈 부분을 집중 교육하는 독일에 비해 일본은 전쟁이전의 메이지유신까지의 역사만 집중적으로 다룬다. 일본의 교육은 상당히 국가주의적이고 다양성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데 외세의 강한 힘과 영향으로 인해 교육의 주체성이 가장 담보되지 못했던 메이지 유신 초기와 패전 직후의 시대가 일본 교육이 가장 다양하고 교육적 자유가 보장되던 시기였다는게 아이러니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나라의 운영권을 되찾은 52년부터 일본의 권력층은 바로 교육 검토에 들어갔고, 1970년대부터는 일본의 교육이 권리만 강조하고 의무는 방기한다.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등 과거로 급격히 회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점차 검정교과서의 기준과 절차가 엄격해지고 교사의 지도방침에 대한 점검도 강화되어등 일본의 교육은 우경화와 더불어 급속히 뒤틀린다.

일본은 지진이나 해일, 화산등 자연재해가 그 어느나라보다도 많으면서도 이를 무시한 개발을 진행해왔다. 저자는 자연에 반한 이런 인간의 세공, 잔꾀 등이 지진의 운동에너지가 될 위치에너지를 키워다고 말한다. 즉, 지진으로 더 큰 피해가 될만한 인재로서의 잠재적 에너지를 더 키워단 셈이다. 지진해일이 많은 나라가 원전을 하는게 그런게 아니겠는가. 하여튼 저자는 재난이 날때 그 지역, 사회, 국가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본다. 25년전 고베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이 일어나는 순간은 무척 짧지만 그 여파는 수십년을 간다. 일본정부는 붕괴한 해당지역에 집단 이전이나 토지정리, 부흥재개발 등으로 복구를 추진했는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지역민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런 복구방식에서 지역 커뮤니티의 재생이 방해되었고, 서로 연결되어 버티며 재기해야할 사람들이 유리화되었다. 때문에 해당지역의 가설주택과 공영주택에서는 한해 이재민 고독사가 천명 넘게 발생한다고 한다. 이런걸 복구라 말할 수 있을까.

문제가 하도 많은 아베총리의 외할아버지도 기시 노부스케도 총리였고, 한국을 무시하는 일본 외무상 고노의 아버지는 아들과 다르게 일본의 가해행위를 인정한 고노담화를 한 그 고노였다. 이처럼 일본은 한국과 다르게 정치가 세습된다. 일본은 정치를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94년 정치개혁 4법을 통과시켰는데 명분과는 다르게 그 법은 자금의 운용과 인사발탁의 기능이 정당 지도부로 집중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때문에 각 지역 의원은 일본 국민이 아닌 정당의 지도자에 충성하게 되는 구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법의 통과후 정치세습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는데 96년 이후 일본 총리10명중 8인이 무려 정치가 집안 출신이다. 중의원의 세습률은 25%를 넘어서가 집권당인 자민당은 경우가 더 심해 30%를 넘어선다. 2017년 11월엔 총리를 포함해 내각의원의 절반 이상이 세습의원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니 정도가 점점 심해진다 할수 있겠다. 정당지도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의 통과후 세습의원이 많아 진것은 정당이 가족 정치인들에게 선거에 유리한 지명도와 자금, 지원조직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본 정당은 정권을 얻어 국민의 민의를 반영하기 보단 관직임명권을 얻고 권력이 당 지도부에 집중되고, 각 의원들이 지역이나 국민의 생각보다는 정당지도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형태가 된다. 제대로 튀틀린 셈이다.

변경민과 약자에게도 국가주의앞에 그저 도구일 뿐이다. 일본은 52년에 본토를 미국으로부터 찾았지만 오키나와를 찾는데는 그로부터 20년이 더걸렸다. 2차대전때 본토보다 먼저 공격당해 점령당한 오키나와는 당시 전인구의 1/4정도가 죽었다. 미군이 죽인 것보다 옥쇄당한 이들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전후 주일미군의 대부분이 오키나와에 주둔한 것도 오키나와가 일본이면서도 일본이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이니도 그렇다. 그들은 비록 이등국민이긴 했지만 일본제국의 신민이었다. 그러다 패전하니 자동으로 외국인이 되어버렸다. 어째서 일본은 동화의사가 없으면서도 한국이나 북한으로의 귀순을 희망하지 못하거나 안한 이들에게 이중국적을 부여하지 않았을까? 농민도 약자이다. 일본은 식량자급률을 높이고 쌀값안정은 도모하면서도 수입품과의 경쟁에서 이겨내기 위해 농민들에게 쌀생산 제한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농민간의 이합집산이 일어났고 자기들끼리 싸우게 만들었다. 후쿠시마에서 원전으로 재산과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어째서 도쿄의 불을 밝히기 위해 자신들이 그런 꼴을 당해야 했는지를 묻는다. 이는 하시마탄광의 일본, 조선, 중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사양화되던 탄광산업으로 인해 예산이 줄어 위험속에서 작업하다 희생된 미카와 탄광의 노동자들, 그리고 미나마타만의 어부들도 했던 말일 것이다.

이 책을 메이지 유신이후 상당히 많은 일본의 뒤틀린 역사와 현재, 희생된 사람들을 현장을 찾으며 기리고 성찰한다. 저자가 보기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당시 화혼양재를 택했다. 과거 중국을 배우자는 화혼한재에서 한을 양으로 바꾼 것이다. 한국의 동도서기나 중국읜 양무운동과 괘가 같다. 이는 기존의 정신문명을 보존하면서 서구의 과학기술만을 따르자는 것인데 일본의 경우 두 나라와는 달리 성공하면서 오히려 동아시아의 전체주의적 사고에 서구문명기술만 발달한 기형아를 낳은 셈이 되고 말았다. 때문에 메이지유신의 성공부터 일본의 뒤틀림은 배태되었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정신문명의 변화까지 이어지지 않았기에 민주주의도, 문화주의도, 성찰과 반성도 없다. 더구나 최근 버블경제의 붕괴와 저출산 고령화, 지방의 쇠퇴, 감각적 충동의 해방, 국권과 민권의 분열, 국가와 자본의 유착, 도쿄로의 부와 인구의 쏠림, 미국만의 추동과 다른 나라의 무시, 계급 격차의 확대라는 문제가 전방위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문제는 오히려 과거로 회귀에 더욱 국가주의로 경도되고 그 수단인 국민의 순수성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치닫는다는게 저자의 해석이다.

재밌고, 한국에게도 공통되는 부분이 있어 상당히 반면교사가 되는 책이지만 많은 주제를 다루면서 상세하고 깊이 있는 서술이 좀 부족해 이해가 어려운 면이 있었다. 지금 책의 두배 볼륨으로 두껍게 서술했다면 더욱 나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거기에 일본학자이니 당연히 일본식 한자를 많이 썼는데 이 부분이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여러모로 아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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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20-08-25 공감(2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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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강상중 著, 사계절)



일본 정치를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많습니다. 근대 이후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들인 나라이지만 정권 교체가 거의 없고, 그로 인해 밀실 정치가 횡행하고 기존 정치인의 재선율이 매우 높으며 지역구 세습이 비일비재하다는 점입니다.

또한 언론 역시 정치 권력을 견제하는 정도가 매우 약하고 국민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그로 인한 시민사회의 역량 쇠퇴로 정치 엘리트 주의가 만연하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우리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 시스템이 선진적이라 착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도호쿠 대지진과 이어진 후쿠시마 원전 사태, 아베 내각의 실정과 부정부패, CoVID-19에서 보여준 일본 정부의 무능, 여전히 버리지 못한 국가주의의 행태 등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이제에 와서야 과연 일본이 정치 문화적 측면에서 선진적인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 힌트를 줄 수 있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메이지 이후의 일본’이라는 부제를 가진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강상중 著, 노수경 譯, 사계절)”이 바로 그 책입니다. 저자인 강상중 (姜尙中) 박사는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나 도쿄대학 (東京大學) 교수와 세이가쿠인대학 (聖学院大学) 총장을 역임한 바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비판적 정치학자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岸信介, 1896~1987)를 제국의 귀태 (鬼胎)라 지칭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유신(維新)을 ‘복고와 동시에 혁신이라는 이율배반적 통합’이라고 정의하며 일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전통을 취사선택하여 내셔널리즘을 만들어내’고 ‘부국강병에 매진’함으로써 ‘사회와 국민은 약해졌을지언정 국가는 강력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국민은 여전히 메이지 유신을 긍정하며 ‘자신의 근대적 뿌리’이자 ‘영광스런 출발’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신으로 만들어지고 긍정하는 한 ‘약한 사회 위’에 군림하는 ‘국가주의’의 생리를 버리지 못할 것이며 이는 지속적으로 쇠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 진단하고 있습니다.




국가주의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유린되었으며 국민을 경외하지 않는 정치 엘리트 주의가 만연하여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일본은 전혀 영광스럽지 않고 이러한 국가주의를 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야만적인 유신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의문을 가졌던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순종성, 국민을 염두에 두지 않는 정치-저자는 이를 국민을 버리는 기민(棄民)정책이라 칭합니다-의 근원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떠오른국가와버려진국민, #강상중, #노수경, #사계절, #메이지이후의일본, #메이지유신, #국가주의, #기민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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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ca.Kim 2020-07-0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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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이후 일본의 야누스의 얼굴을 보다



작년 겨울 강상중 저자의 가장 내밀한 에세이 『만년의 집』을 감동 깊게 읽었던 터라 이 신작도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를 평생 동안 정신적 지주로 여기고 있는 저자라니. 한 눈에 보아도 극명한 대비가 느껴지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일본이라는 국가의 빛나는 성장을 위해 희생되어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던 국민들의 이야기다. ‘약한 사회 위에 우뚝 솟은 국가주의’(P9) 아래 가려진 채 국가의 폭력에 저항했던 이름 없는 산증인들을 만난다. 역시 나쓰메 소세키의 팬답게 『그 후』, 『풀베개』, 『태풍』, 『갱부』를 자주 언급하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소세키가 “빛과 그림자는 앞면과 뒷면 같아서,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는 분명 그늘이 생긴다.”(『풀베개』)라고 한 것을 잊어버렸다. 지하 몇 백 미터 깊이에서 바깥세상으로 나오지 못한 광부들의 영혼이 지금도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늘 속으로 사라진 것은 “세상에 노동자의 종류는 많지만… 그 가운데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아래”(『갱부』)에 있는 광부들이다.’(P26)







『풀베개』를 읽었지만 너무 어렵게 읽어서 정치 사회적인 배경이나 민중의 힘든 삶을 빗대어 표현했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화가가 화자로 나오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빛과 그림자,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당대 지식인으로서 민중의 삶에 대한 애정과 통찰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작품에 투영했을까 싶다. 저 문장을 읽었는지 기억에도 없는데. 내가 소세키의 작품을 너무 편협한 시각으로 읽은 건 아닐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또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의 개인적인 성향에 치중하여 읽었다는 것도. 강한 국가를 내세우며 오로지 성장만을 위해 내달리는 국가로 인해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던 국민들의 모습이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격동기를 살아왔던 민중의 삶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소설로도 널리 알려진 군함도, 바다 아래 600미터 깊이까지 내려가 오로지 석탄을 캐고 날라야 했던 광부들의 가혹했던 일상을 이야기한다. ‘메이지 산업혁명의 유산’이었던 하시마 탄광에서 석탄을 가장 많이 생산하던 1941년에는 1800명이 넘는 노동자 중 한반도와 중국에서 데려온 노동자를 포함하여 1420명에 달했다고 한다. 건물의 상층부와 하층부로 나뉜 계층의 질서를 공간적으로 잘 표현했다는, 그야말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축소판’이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발전과 성장이라는 국가의 꿈을 위해 희생되어야 했던 영혼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여러 이슈가 겹쳐졌다.






어느 나라든 빈곤의 격차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00년 전 일본은 가장 부유한 10퍼센트가 거의 모든 부를 소유한 시대였고 지금도 상위 10퍼센트가 국민 전체 부의 40퍼센트를 가진 격차사회라는 것이다. 나머지 중산층과 하류층은 비슷하게 가난했다고 하는데 ‘가장 조악하고 볼품없는 구조’의 주택으로 형상화되어 도쿄 변두리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고 나쓰메 소세키는 “패망의 발전”(『그 후』)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현재 일본에서 1인당 평균 소득이 가장 높다는 미나토구와 가장 낮은 구마모토의 구마무라 두 극단의 지역을 찾아간다. 한때 3대 슬럼가이며 제국 수도의 최하층 빈민들이 살던 ‘일본 제1의 쓰레기장’이었다는 미나토구는 풍요로 넘치는 부촌이 되었다. 그나마 20세기에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줄일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진다면 격차와 불평등은 확대되는 것인가 묻고 있다. 그렇다고 1인당 소득이 미나토구의 6분의 1수준인 구마무라가 꼭 불행한 지역은 아니었다. 신생아는 줄고 노인은 늘었지만 자연의 혜택과 마을의 전통을 활용하여 새로운 만남과 교류, 네트워크를 넓히며 '모럴 이코노미(moral economy)'로 부흥하기 위해 모색하고 있는데서 희망을 찾는다.







“일본은 서양에서 돈이라도 빌리지 않는 한 일어설 수도 없는 나라다. 그러면서 일등국인 척한다. 어떻게든 무리해서 일등국 자리에 끼어들려고 한다. 그러니까 모든 방면을 향해 깊이 있게 들어가려 하지 않고 일등국 크기만큼만 열어두었다. 어설프게 애를 쓰니 더 비참하다. 소와 경쟁하는 개구리처럼 말이다. ‘너, 이제 배가 찢어질 거야. 그 영향이 모두에게 쏟아질 테니. 어디 한번 보시지.’ 이렇게 서양의 압박을 받으면서 무엇을 할 수 있나. (중략) 정신적 고달픔과 신체적 쇠약에는 불행이 동반된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 패퇴도 함께 올 것이다. 일본 어디를 보아도 반짝이는 곳이 없지 않은가. 사방이 암흑이다.”(P213)(『그 후』)






백 년 전에 쓴 작품임에도 오늘의 현실이 그대로 재현되어 섬뜩하게 느껴진다. 세계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스카이트리를 예를 들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에 목말라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3조 엔의 재정을 들여 꿈의 철도를 만들기 위해 시속 600킬로미터로 달리 열차를 실험하고 있다는데 지방과 민중을 살리는 일에는 역행하는 처사다. 관심사가 다르면 작품을 읽어내는 해석도 다른 모양이다. 소세키의 작품을 찬찬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이 이야기가 꼭 일본이라는 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을 등에 업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빛 뒤에 그림자 같은 국민들의 삶이 어떤지 살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만주국에 뿌리를 둔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를 ‘역사의 귀태(鬼胎: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으로 박근혜와 아베 신조는 ‘귀태의 아이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이 책의 원제는 유신의 그늘(維新の影)이라고 한다. 아직도 과거였던 메이지 시대를 기념하는 행사를 반복하는 이유는 현재의 어두운 상황을 감추려는 국가 권력자들의 검은 음모일지도 모른다.






일등 국가를 만들기 위한 권력자의 야심에 희생되어야 했던 국민들의 피폐한 삶, 재벌의 야만적인 행위로 핍박받는 민중, 극심한 빈부 차, 흔들리는 교육 현장,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천재지변, 집단 따돌림으로 죽어가는 농업의 현실, 폭력의 한 가운데에 놓인 오키나와, 재벌로 인해 미나마타병에 걸려 멸시와 빈곤에 내몰렸던 민중, 우생사상으로 차별받는 한센병 환자들의 삶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주제를 다루며 이야기한다.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라는 일본에서 아동 7명 중 1명이 거리에서 밥을 구걸할 만큼 빈곤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도 놀라움이었다. 도쿄 여행을 몇 차례 했어도 늘 화려하고 번쩍거리고 사람들로 가득 찬 활기 있는 거리로 느껴졌기에 그렇게 어린 희생자가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반짝이는 야경을 가진 거대한 도시 도쿄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은 일본 국가주의의 야누스적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고 할까. 뭐든지 세계 제일을 지향하면서도 국민들의 삶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권력자들의 내면을 보는 일은 끔찍했다.






이 책은 당시 교도 통신 편집 위원장이던 하시즈메 구니히로(橋詰邦弘)가 교도통신에 연재 기획을 구상하고 그 기획의 여행자로 저자를 선택해 주어서 연재를 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엮어진 책이라고 한다. 나가사키 군함도부터 홋카이도의 노쓰케 반도에 이르기까지 메이지 150년을 살아낸 백성의 발자취를 따라간 사색 여행이다. 일본의 근대, 전전, 전후, 현대에 이르는 역사와 분노와 저항에 놓여있던 사람들의 힘겨운 발자취와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정치 이야기라서 딱딱하고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 투영된 문장들을 언급하고 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었고 작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알게 되어서 좋았다. 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하시즈메 구니히로(橋詰邦弘)가 일본사회의 지식인이 아닌 강상중 저자를 선택했다는 것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어쩌면 일본 사회에 있어 영원한 이방인일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닌가. 가장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라는 약간의 계산(?)과 그에 대한 영향력을 고려한 것은 아니었을까.







‘일본은 나태(懶惰), 불령(不逞), 시기, 의심, 빈곤, 무지, 몽매, 열등, 범죄, 불결 등 이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속성을 자이니치 1세에게 덮어씌웠다. 그들을 뿌리로 하면서도 민족의 언어와 문화, 전통, 풍습을 물려받지 못한 자이니치 2세에게 부모는 이율배반적 존재였다. 부정과 긍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애증이 자이니치 2세의 ’어디에도 뿌리 내리지 못한 정체성‘을 남겼다.(P199)







이 문장만 보아도 자이니치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삶인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삶이란 슬프고 고단한 삶이 아닐 수 없다.







한(韓)의 후손으로 태어나 일본에서, 그것도 일본 본토에서 산다는 것은 변경을 몸에 두르고 사는 삶을 뜻한다. 동시에 고도성장 시대의 적자라고 할 수 있는 내게 삶은 변경에서 이탈하여 볕이 잘 드는 중앙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빛을 구하려 한 결과, 나는 언제부터인가 변경적인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P204)






어쩌면 영원한 디아스포라라는 자신의 입장이어서 이렇게 따끔한 일침으로 당당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나라의 야만성을 고발했다는 자체가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한국인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땅에서 강상중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스스로 변경인의 삶이라고 했다. 이쪽과 저쪽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고뇌하며 민중을 향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사는 곳이 고향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풀베개』에서 읽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중략)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가 어렵다면,

살기 어려운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서 짧은 생명을,

한 동안만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후략)

- 『풀베개』 의 도입부-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 어려우니까,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서 더불어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둠속에서 시름하는 민중들을 위해 권력자들의 야만성을 폭로했는지도 모른다. 국가주의에 가려진 피폐한 삶을 살았던 국민의 이야기지만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엔 희망도 피어나고 있었다. 이 책은 일본 사회의 현실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이 많이 읽혀서 국가라는 ‘빛’ 속에 가려진 국민들의 삶을 보듬어 살피는 성숙하고 든든한 사회, 국가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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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1-01-15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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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이후의 일본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이 책의 원제는 '유신의 그늘'이라고 한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의 제목으로 다시 한번 '유신의 그늘'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이 2020년인데 저자는 왜 '유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걸까? 과거 어떤 사건에 엮인 제한된 그리고 이미 끝난 단어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유신' 이 무슨 뜻이지? 새삼 생각해보니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다;;; 검색해봤다. 좀 이상하게도 '유신'의 다섯번째 뜻은 한번 검색으로 나오지 않았다.

유신 維新 -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함



이 책은 일본에 대한 책이므로 여기서의 '유신'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의 그 '유신'을 뜻한다. 막부가 통치하던 시대에서 천황이 통치하는 시대로 전환된 일본의 복고는 율령국가 체제로의 복귀선언이었다고 한다.







현대 일본의 정당 가운데 하나인 '유신의 당' 의 영어 표기가 'Japan Innovation Party' 라는 사실에서 눈치챌 수 있듯, 복고란 동시에 혁신(쇄신)이기도 하다.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것을 취한다' 복고인 동시에 혁신이라는 이율배반적 통합이야말로 유신의 숨은 뜻이라고 하겠다. 유신은 전통을 취사선택하여 내셔널리즘을 만들어내고 과학기술의 끊임없는 진화를 통해 생산력을 증진시킨 서구의 선진국을 좇던 아시아 변방의 국가가 근대화를 위해 취한 방식이었다. 일본은 전통과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며 부국강병에 매진하는 과제에 도전했다. 그 결과 사회와 국민은 약해졌을지언정 국가는 강력해 졌고, 비서구 세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국민이 지금도 메이지 유신을 긍정하며 이를 자신의 근대적 뿌리이자 '영광 가득한 출발'로 간주하고 있다. (p. 7)




메이지유신 하면 일본의 근대화 라고 등식처럼 역사시간에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저자의 글을 읽다보니 과연 그러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그렇게 이룬 근대화로 일본이 한 일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점점 더 국가는 강해졌고 점점 더 국민은 보이지 않았다. 막부에 종속되어 사는 것과 국가에 종속되어 사는 것이 과연 달라진것일까? 어차피 시민은 없어 보이는데...





메이지 국가를 영광의 시대로 칭송하며 아름다운 일본을 만들겠다고 말하는 귀태(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의 아이와, 그를 중심으로 하는 통치 시스템은 지금도 '약한 사회 위에 우뚝 솟은 국가주의' 의 생리를 버리지 못했다. 그 결과 일본 전국에서 균열과 비틀림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여러 한계를 극복하며 착실하게 시민과 사회운동의 힘을 키웠다. 규범과 정의라는 관념이 사회적 결속을 강화했고, '강한 국가'를 견제할 수 있는 '강한 사회'를 갖는 데 성공했다. 끊임없이 민주화를 통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국가를 감시하는 능력을 길러온 역사의 성과일 것이다. (p. 9)




한국이 '강한 사회' 문화를 형성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자가 알려주는 일본 사회에 비하면 국가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의 한국 시민들은 국가에 쓴소리 험한소리 하는 것을 어렵지 않아 한다. 다양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어떤 피해를 당해도 감내하고 어떤 사건에도 시민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일본사회 와는 많이 다른 것 같긴 하다.





정부는 메이지 150년 세리머니를 통해 네이션의 선성과 애국심을 고취하려 한다. 네이션의 선성-국민의 정부가 어떤 죄를 저지르더라도, 때로 시민이 그 죄에 어떤 방식으로 가담한다 하더라도 네이션은 궁극적으로 선하다는 신념-을 보증하는 것은 이미 죽은 사람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갖고 있는 '단일한 색의 순수성'이다. 양쪽이 지닌 시대적 사회성을 다 벗겨내고 오직 일본인이라는 속성만 살아남았을 때 생기는 순수성 안에서만 네이션은 선하며 무구하다. 앤더슨의 반어적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완료=과거의 완성된' 일본인이라는 네이션과 '미래완료=미래에 완성될' 일본인 이라는 네이션이 현재에서 만나, 다시 말하면 죽은 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의 유령적 결합이 네이션의 선성을 보증한다. (p. 16)




일본 국가주의에 대해 이미 과거에 완성된 듯한 일본인 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일본 내부 사정에 대해 처음 알게 되는 것들이 참 많았다. 일본 사회는 정말 의아한 점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좀... 답답할 지경이었다. 이 답답함을 뻥 뚫어주는 존재가 있었는데 근대 일본의 대표작가인 '나쓰메 소세키' 였다. 저자가 종종 인용하는 소세키의 글은 시원스러웠다.





100년 전, 메이지를 대표하는 문호 나쓰메 소세키는 [단편]을 통해 메이지 익찬(힘을 보탠다는 뜻으로 일본 천황을 돕는다는 뜻으로 쓰였다)의 물결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과거로 눈을 돌리는 이유는 (1)앞날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며 (2)내리막 길에 있기 때문이며 (3)이상이 과거에 있기 때문이며 (4)훌륭한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이지39년에는 과거가 없다. 과거가 없을 뿐 아니라 현재도 없으며, 그저 미래만 있다. 청년은 이를 알아야 한다. (p. 17)




100년전에는 나쓰메 소세키 같은 사회에 직언을 던지는 지식인이 있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은 이런 지식인조차 없어졌다고 한다. 미래로 발전한 것인가 과거로 가서 머물고 있는 것인가...

이 책은 기행문까지는 아니지만 지금의 일본 사회 문제를 직면하게 해줄 장소들을 찾아가 그곳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사색을 한 저자의 기록이자 연재됐던 글의 모음이다. 그리고 저자는 "나는 버려진 자들의 상속인이다"라고 말한다. 재일한국인2세로 도쿄대학 교수인 저자는 일본인과 한국인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위치로 인해 더욱 남다른 사색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서재와 연구실에서 이루어진 학술 연구라기보다는 현장 연구와 저널리즘의 결과를 이론으로 가공한 것이다. 다시말해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서자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서자로 칭한 이유는 적자적 정통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데에 이 책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 22)




일본에서 나고자라 일본인에 가까워보이는 저자는 재일한국인2세라서인지 역사인식에서만큼은 중립적인 판단을 가지려 노력하며 산 것 같다. 일본사회가 드러내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보다 나아진 일본이 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일본에서의 왜곡된 한국역사를 바르게 말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양국 모두에 대한 안타까운 애정이 전해져오는 듯 했다. 그래서 출발장소를 군함도로 선택한 것이 더 의미있어 보였다.



군함도도 후쿠시마 원전도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을 위한 에너지 시설이 아니었다. 저자는 " '에너지가 곧 국가다' 라는 국책이 걸어온 길에는 수많은 사람기둥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p. 38) 는 것을 알아야 함을 강조한다.





왜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나라라는 일본에서 아동7명 중의 1명이 빈곤에 처해 있는 것일까. 그 배경에는 빈곤을 낳는 풍요가 자리잡고 있다. 풍요는 어린이와 한부모가정 같은 사회의 가장 약한 부분을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풍요는 극단적인 부의 쏠림을 초래하며 거대한 격차를 낳는다. 여기에서는 오직 부로서만 부를 재생산할 수 있다. 소득 상위 10퍼센트의 국민이 전체 부의 40퍼센트를 가진 격차 사회이자 불평등 사회, 이것이 오늘의 일본이다. (p. 41)

1874년 제정된 오늘날의 생활보호법에 해당하는 환난구휼의 규칙에서는 빈민, 즉 하층민은 놀고먹는 사람, 무위도식자로 간주해 엄격한 제한구제주의가 적용되었다. 남구(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람까지 보호하는 일)는 저소득층을 지원에 의존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게으른 사람이 늘어날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약자를 잘라내고 사회보장을 제한적으로-그 결과 효율적으로-운용해야 한다는 은혜주의적 사고(복지가 사회 구성원의 권리나 국가의 의무가 아니라, 마음이 따뜻한 윗사람의 은혜라는 사고방식)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복지 정책의 구실로 이어지고 있다. (p. 46)




빈부격차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일본사회만의 문제도 아니지만, 일본 복지에 깔린 사고방식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있는 나라인줄 알았더니 그 혜택을 받는 대상 선정에서의 문제가 무시할 수 없어 보였다. 양극화 문제는 대학의 우열을 가리는 것에서도 심각해보였다.





오늘날 대학을 둘러싼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대학의 우열을 구분해놓은 'G'와 'L' 이 바로 그것이다. G는 글로벌, L은 로컬을 가리킨다. G에 속하는 대학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으며 L에 속하는 대학은 피라미드의 바닥에 위치한다. G대학이 국제화와 조직 개혁을 통해 교육과 연구 분야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갖춘 소수의 엘리트 대학이라면, L대학은 지역 경제권에서 즉시 활용할 수 있는 인재 배출을 목표로 삼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대학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학문과 교육은 G에서만 받을 수 있으며, L은 이름만 대학일 뿐 실제로는 직업 훈련소 역할을 한다. (p. 53)




우리나라의 대학서열화 문제도 심각하다. 그런데 일본처럼 아예 대놓고 G 와 L 로 구분해 놓는다면 교육현장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심란하다. 일본에서는 어떻게 저렇게 대학 우열을 구분해 놓는 것이 가능했을까...

저자는 지금의 일본 대학이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창조하는 터전이 되지 못하여 '가치의 공동화 空洞化' 가 진행되고 있다며 걱정한다. 그런데 그 빈 구멍을 메우려 국가는 더욱 통제와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 한다면, 사회의 희소 자원, 재정, 서비스 등을 어디에 투여할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정치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일본의 방위비는 해마다 치솟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생긴 오염수조차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2020년 도쿄올림픽을 개최한다고 한다. 제한된 가치가 제대로 배분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잘못된 정치는 지역과 시민의 활력을 갉아먹고 지역의 힘을 감퇴시킬 것이다. 대지진을 비롯한 천재지변은 가치의 권위적 배분에 관련된 일본 정치의 존재 방식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p. 82)




우리나라처럼 분단국가도 아니면서 미국처럼 해외파병을 수시로 해대는 국가도 아니면서 방위비를 자꾸 올리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저자가 찾아다니는 곳들은 잘못된 정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지역들이었다. 저자는 이 현실들을 좀 직시하라고 정치권에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충고를 하고 있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 중에 경세제민 이라는 개념이 있다. 중국 고전에 등장하는 이 말은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고난에서 구제한다' 라는 뜻이다. 그 줄임말이 바로 경제 이다. 이 말은 영어 economy 의 번역어인 경제보다 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요샛말로 바꾸면 나라를 통치하는 동시에 곤궁에 빠진 국민을 구하여, 가난한 사람과 이재민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리라. (p. 99)

법안을 의결할 때, 당의 방침에 따라서만 투표한다면 의원은 자리를 지킬 수 있다. 당의 대표가 부르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는 정치가에게 경세제민의 기개를 기대할 수 없다. (p.100)




그렇지.. 경제가 이런 뜻이긴 했다.. 하지만 이 경제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긴 하다... 정치인도 뭐... 다만 모든 당원들이 당대표에게 예스를 남발하는 예스맨이 아니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게다가 세습에 준하는 정치가문의 세습은 우리네와 많이 달랐다. 그래서인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그런 가문의 정치가를 선거에서 뽑아주는 걸까... 정치가문 뿐만 아니라 정치가를 배출하는 학원도 있고... 흠... 이러나저러나 "산전수전을 거치며 당원에서 지도부로 올라서는 그림은 아예 불가능해졌다"(p. 111) 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그나마 시민사회에서 정치가가 배출될 수 있는 우리사회가 더 나은건가 싶기도 하고... 뭐... 비교하자고 읽은 책은 아니지만... 읽는 내내 비교가 안 될수는 없었다;;;





지금 정부는 지방 창생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균형 있는 국토 발전이라는 국가의 의무마저 방기해버렸다. (p. 122)

피해가 확인되고 12년이 지나서야 아세트알데히드 제조 설비의 가동이 중지되고 수은 유출이 멈추었다. 또 40년이 지나서야 환자 단체와 화해 협정에 조인했다. (p. 135)

사람 목숨이 가장 가볍게, 함부로 다뤄지는 순간은 바로 전쟁이다. 메이지 시대 이후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1차세계대전, 시베리아 출병,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 이어지는 70을 보냈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전쟁의 시대를 반성하며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차별을 철폐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인간이 인간을 살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야 한다. (p. 137)




지방과 중앙도시의 균형발전은 참 어려운 문제긴 하다. 미나마타병이 발생한 지역은 소외된 지방이었다. 미나마타병의 처리과정은 정말 이럴수있나 싶게 너무 안타까웠다. 피해자들의 구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도 그 질병을 안고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아파하고 있는데...

일본의 전쟁사가 70년이나 됐다는게 새롭게 다가왔다. 긴 전쟁의 상흔은 인식에 깊게 새겨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지배자들의 머릿속엔 상흔이 아닌 재도전의 욕구를 새겨놓았을지도...





애국심과 내셔널리즘에는 커다란 결함이 있다. 그것은 통치 시스템으로서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을 반성하지 않는다.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한들 국가의 통치에는 폭력이 따르기 마련이다. 국가란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요구하는 인간 공동체"(막스 베버)이기 때문이다. 패젼 이후 '평화국가'를 주창하며 민주국가로 다시 태어나려 한 일본에서도 폭력은 필수 도구였다. 그럼에도 국가가 휘두르는 폭력이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p. 170)




폭력의 대표적 상징은 '군대' 다. 일본에서 국가의 폭력을 드러내는 군대가 보이지 않는 까닭은 군대가 일본의 가장 변방 오키나와 에 거의 주둔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오키나와에 폭력을 집적시키고 격리한 이유는 군사 전략이나 억지력 때문이 아니다. 이는 오키나와가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니라서가 아닐까?"(p. 173) 라는 저자의 의문아닌 의문은 일본 본토인들이 오키나와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알고나면, 그 차별성을 알고 나면 안타깝지만 수긍하게 된다. 그리고 차별엔 늘 화가 난다. 일본내에서의 다양한 차별 문제는 이 책의 마지막 대상인 '자이니치' 로 연결된다.





2000년대가 되면서 재일 외국인 중 중국 국적자의 수가 재일 한국인·조선인을 웃돌게 되었다. 재일 외국인의 국적이 다양해지면서 자이니치가 재일 한국인·조선인을 가리키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다. 2016년 [출입국 관리 및 난민 인정법] 개정 이후, 재류 자격이 28종으로 늘어났다. 2016년 당시 재류 자격을 가진 전체 외국인 240만명 가운데 재일 한국인·조선인은 4분의 1에 불과했다. (p. 196)




'혐한' 시위대를 뉴스에서 자주 봤다. 혐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본 정치인들도 자주 봤다. 그런데 과거에 비해 일본체류 외국인중 한국인의 비중은 많이 줄어들었다. 원래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가리키던 자이니치 라는 단어는 그 의미가 무색하게 재일한국인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이제 자이니치 본래의 단어로 써야할 만큼 재일한국인의 비중은 전과 같지 않음에도 그 사용현실은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혐한분위기를 보면 그저 한국이 마냥 만만한 자기네들 밥인가 싶기도 하다. 내부문제에서 관심을 돌리기 위한 희생양으로 한국만한 상대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된 듯...





지리적 변경이 아니더라도 사회적·문화적·심리적 변경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들을 나는 왜 따라갔을까.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변경을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의 후손으로 태어나 일본에서, 그것도 일본 본토에서 산다는 것은 변경을 몸에 두르고 사는 삶을 뜻한다. 동시에 고도성장 시대의 적자라고 할 수 있는 내게 삶은 변경에서 이탈하여 볕이 잘 드는 중앙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빛을 구하려 한 결과, 나는 언제부터인가 변경적인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p. 203)

그러나 볕이 드는 곳에는 반드시 그림자가 드리우기 마련이다. 메이지 국가의 반짝이는 미래에서 가장 먼저 어둠을 찾아낸 사람이 나쓰메 소세키다. "일본국 전체 어디를 둘러보아도 반짝이는 단면은 1촌4방도 없지 않느냐. 모조리 암흑뿐이다." [그후]의 주인공의 염세적인 독백에 소세키의 심정이 잘 묻어 있다. (p. 204)

나는 변경을 몸에 두른 자들의 상속인이다. 내 앞에 놓인 지리적 국경이, 사회적·문화적·심리적 국경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이번 여행은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이들을 만나는 기쁨으로 가득했다. 일본은 그런 이들을 끊임없이 배출했다. 바로 여기에 이 나라의 희망이 깃들어 있다. (p. 206)




저자가 알려주는 일본 곳곳에 산재한 문제들은 일본의 그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늘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빛을 찾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저 제삼자로서 일본의 현실을 좀더 알 수 있었고 다른 나라의 내부사정을 알게 될때마다 그나마 우리나라가 살기 좋다는 것을 다시한번 느끼며 감사할뿐 그네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일본에 살고 있는 현지인이다. 그의 체감은 나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저자가 찾아낸 희망이 정말 희망의 빛이 되기를 바랄뿐....





국가주의의 융기와 감각적 충동의 해방, 국권과 민권의 분열, 국가와 자본의 유착, 도쿄로 쏠린 부와 재화, 피폐해진 지방, 미국에 대한 추종과 그 밖의 다른 나라에 대한 무시... 그 모든 문제는 메이지 국가가 완성될 때 이미 배태되었다. (p. 213)

이 상황을 바로잡는 것은 정치가의 몫이다. 전후 민주주의는 '평화국가'의 기치를 내걸고 개인의 인권과 함께 인간다운 '문화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일본은 마치 국가를 위하여 국민이 존재하는 것처럼 도착된 상태였다. 국민 없는 국가주의만 팽창했다. (p. 214)

메이지 초기에는 다카시마 탄광의 갱부를 억압하는 궁핍과 아시오 광독 사건의 참상을 폭로한 지식인이 있었다. 전후에도 공해 반대 운동, 시민운동, 평화운동, 차별철폐 운동 등에 투신한 지식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 힘이 화혼을 꺾을 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에 국민 없는 국가주의가 대두하면서 지식인의 사회적 응집력이 증발해 버렸다. 이제 '지식인의 종언'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렇다면 유사인텔리에 착목해야 하지 않을까? '유사'는 '사이비'라는 뜻이 아니다. 근대적 의미에서는 지식인이 아니지만, 그 아종이라할 만한 지식인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은 사회적 곤경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린 유사인텔리이다. 그들의 유산이 현대로 계승된다면 메이지의 그늘에 갇혀 국가를 올려다보기만 하던 순종성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국가라는 돔을 바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과거아 아니라 미래에서 희망을 구해야 한다. (p. 219)




노벨상도 많이 타고 이런저런 학문분야에서 세계적 업적을 거둔 일본사회에서 지식인이 증발했다는 저자의 표현은 일본사회를 지배하는 슈퍼엘리트들이 지식인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회에 올바른 목소리를 내야할 지식인들이 특권층이 되어 자신들의 이익만 따지는 사회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다만 어떻게 바꾸느냐, 바꿀수 있긴 하느냐가 문제라면 문제랄까...

이 책이 알려주는 일본사회의 문제는 우리사회의 문제또한 그대로 상기시켜주는 것도 있었기에 남의일인양 무시할 수만은 없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정도까지 곪아가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게 해주는 내용들이었기에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비하면 우리사회가 훨씬 희망적이긴 한 것 같다. 이 희망의 빛들이 점점 더 우리사회를 밝게 비춰줄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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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LY 2020-07-13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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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꿈꾸던 미래를 과거에서 찾으려는 미련한 엘리트들과 버려진 비국민들, 이 데카당스는 일본과 한국의 현실을 모두 반영하고있다. 빈 집에 본드 냄새가 은은하다.
budge 2020-08-23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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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재일 강상중 교수의 신작이 나왔다.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사계절). 그러고 보니 지난해에 나온 <만년의 집>은 건너뛰었다. 재작년에 나온 우치다 타츠루와의 공저 <위험하지 않은 몰락>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책이다. 아무튼 신작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현대사를 다루고 있다. 그 현대사를 압축한 표현이 책의 제목이다(현재 일본의 상황과도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2018년 메이지 150주년을 앞두고 과거에 대한 찬사와 만세 구호가 휘몰아치고 전 국가적 성대한 기념식을 준비하며 애국심을 고취하던 그때, 강상중은 메이지가 남긴 야만적 차별과 불평등, 그리고 그로 인해 비참에 빠진 국민을 보듬는 작업을 시도했다.˝

같이 떠올리게 되는 건 한 세기 앞서서 그러한 문제를 직시했던 작가 나쓰메 소세키다. 강상중 교수 자신도 소세키에 대한 책을 쓴 바 있고, 근대의 문제들을 사유하는 데 있어서 막스 베버와 함께 가장 중요한 저자로 참고하고 있기도 하다.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혹은 약간 변형하여 ‘떠오른 국민과 버려진 개인‘이라고 하면 소세키의 문제의식이지 않을까 싶다. 하반기에는 소세키의 <나의 개인주의>도 강의에서 다시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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