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5

[이상언의 직격 인터뷰] "깔보지도 겁내지도 않으면서 공부해야 일본 넘습니다"

[이상언의 직격 인터뷰] "깔보지도 겁내지도 않으면서 공부해야 일본 넘습니다"


지일·극일 외치는 ‘기부왕’ 이종환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이 지난달 30일 서울 혜화동의 ‘관정 이정환 교육재단’ 사무실에서 ‘일본을 알고 이기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1923년생인 그는 4년 뒤에 100세가 된다. 우상조 기자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이 지난달 30일 서울 혜화동의 ‘관정 이정환 교육재단’ 사무실에서 ‘일본을 알고 이기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1923년생인 그는 4년 뒤에 100세가 된다. 우상조 기자

일본을 능가하는 나라를 만들자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행동으로 그 애국심을 보여주는 이는 드물다. 이종환(96)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 그는 일본을 뛰어넘는 세계 초일류 국가를 이루자고 외치며 개인 재산의 거의 전부를 기부해 장학재단을 만들었고, 그 재단은 아시아 최대 규모(기금 약 1조원)로 컸다. 그가 2000년에 설립한 ‘관정(冠廷) 이종환 교육재단’은 지금까지 약 1만 명에게 2300억원의 장학금을 수여했다. 주로 기초 과학과 산업 기술을 공부하는 학생이 수혜자다.
 

일류 국가 염원해 장학재단 설립
수천억원 기부, 재단 기금 1조원
서울대 일본연구소 지원 끊기자
최근 연구비 2억5000만원 쾌척

이 명예회장은 지난달 이 재단이 서울대 일본연구소에 1년 치 연구 지원금으로 2억5000만원을 보내도록 했다. 이 연구소에 대한 정부 지원금이 1년 전에 중단됐다는 중앙일보 보도(7월 15일 24면, ‘말로는 지일·극일 … 서울대 일본연구소도 지원 끊겼다’)가 결심의 계기가 됐다. 이 명예회장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강제 징집을 당했고, 태평양 전쟁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었다. 기업을 일구고 제품을 개발할 때는 일본 업체와 경쟁했다. 그가 ‘캐퍼시터 필름’이라는 첨단 소재를 개발하지 않았다면 이것 역시 일본의 수출 규제 품목에 올랐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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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러 차례 “일본을 잘 알아야 일본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연구소 지원도 그런 맥락에서 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100년 가까이 산, 한국 현대사의 생생한 증언자이기도 한 그를 지난달 30일에 만났다.
 
올해 한국 나이로 아흔일곱인데,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의사 말로는 앞으로 10년은 더 살 것이라고 합디다. 오래 살아도 건강하게 살아야 하고, 어떤 보람 있는 일을 하고 가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관정 재단이 서울대 일본연구소에 연구비로 2억5000만원을 지원했습니다. 어떤 뜻이 담겨 있는 것인가요?
“상대를 이기려면 지피지기해야 합니다. 일본을 뛰어넘으려면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죠. 일본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역사적·도덕적 우월감에서 일본을 깔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의 과거·현재·미래를 철저히 연구해서 일본보다 한 수 앞서가야 합니다. 서울대 일본연구소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정부 지원이 끊겼다기에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도운 것입니다.”
 
서울대 일본연구소에 무엇을 바라십니까?
“당면한 문제에 대한 대책도 궁리해야 하지만 일본 문제를 극복할 중·장기적 전략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연구에 집중하기를 기대합니다.”
 

7월 15일 자 중앙일보 24면.

이번 지원은 1년 치 연구비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지원할 의향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계속 돕는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1년간 연구 활동을 잘 지켜보겠습니다.”
 
그동안 산업 현장에서 일본 기술력과의 싸움도 많이 하셨을 텐데, 일본을 뛰어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일본인은 남의 것을 보고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보다 나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데 소질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뛰어납니다. 그런데 일본인은 무엇인가 하나에 천착해 연구하고 그 연구를 산업 생산에 활용하는 것을 잘합니다. 그것이 집단적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본의 동향을 잘 파악해야 산업에서도 뒤처지지 않습니다.”
 
삼영화학도 산업 소재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일본 업체와 경쟁한 적도 있지 않으셨습니까?
“삼영화학은 석유에서 플라스틱 바가지 등의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캐퍼시터 필름(Capacitor Film·전자 제품의 핵심 소재로 쓰이는 축전 및 절연용 필름)이라는 극초박막 필름을 만들어 냈습니다. 일본 회사가 그걸 만들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미국의 초기 기술을 재빨리 도입해서 일본 업체와 대등하게 개발을 해냈습니다. 삼영화학이 일본의 도레이와 독일의 트라우판과 함께 세계 3대 메이커입니다. 일본이 소재 수출 규제에 돌입했지만 캐퍼시터 필름 같은 것은 해 봐야 소용이 없어요. 우리가 이미 생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게 더 많아져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강제 징병도 겪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학 사업도 그런 경험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요?
“1942년에 일본 메이지(明治)대 상경과로 유학을 갔습니다. 당시 어린 마음에도 일본 사람을 능가하려면 일본 사람보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 말기인 44년에 강제 징집이 됐습니다. 간토(關東)군에 소속돼 소련군과 대치한 만주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대포를 끌다가 45년 8월에 일본 오키나와로 부대가 이동하기 위해 한반도로 내려왔는데, 그때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오키나와로 갔다면 목숨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이지요. 그 뒤 나라가 잘 살아야 국민이 고생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내내 하게 됐습니다. 나라가 잘 살려면 똑똑한 청년들이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나라 상황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요즘의 한반도 정세를 구한말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근 100년을 산 사람입니다. 우리 국력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이제 누구든 우리에게 함부로 못 합니다. 지금 주변국들이 으르렁거리는 이유는 한반도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서로 무시당하거나 배제당하지 않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상황에 끌려다니지 않고 잘 대처하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한·일 갈등은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양국 모두 하루빨리 상호의 국익을 위한 실용주의로 돌아가야 합니다. 상대가 먼저 물러서기를 바라며 마주 달리는 ‘치킨 게임’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싸움은 둘 다 나빠지는 마이너스 섬 게임입니다. 일본이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앞으로 세계사를 이끌어 나가는 나라 중 하나가 되겠다는 꿈은 접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일본을 앞서게 되는 날, 일본 스스로가 먼저 와서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긴 역사적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관정 재단은 주로 이공계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왔습니다. 장학금 수여자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길 기대한다는 말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재단이 설립 뒤 19년이 흘렀지만 아직 그 희망이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답답하십니까?
“내 생전에 노벨상 수상자가 한 사람이라도 나왔으면 하는데, 10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장학금을 받은 해외 유명 대학의 박사학위 취득자가 10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해 이제 600명 정도가 됩니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오랜 연구 결과 또는 평생 연구 결과로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늦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20여 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왔는데 우린 아직 한 사람도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계속 분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5년 전에도 했던 질문입니다. 거의 모든 재산을 내놓으신 것에 후회 없으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느낍니다. 저는 재산의 약 97%를 내놓았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94%를 기부하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내가 더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재산 기부와 관련해 법률적 문제로 소송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몇 년 전에 내가 가진 주식을 다 팔아 그 돈을 재단에 넘겼습니다. 우리나라 법이 주식을 그대로 기부하기 어렵게 돼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양도세 문제가 있다고 국세청에서 나를 고발했습니다. 재판 중이어서 더 자세히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그 돈을 단 한 푼도 만져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돈 욕심 때문에 세금을 일부러 피했겠습니까? 현재의 기부 관련 법과 제도가 잘 정비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송에 임하고 있습니다. 잘 해결되리라고 믿습니다.”
 
세월이 조금 흐른 뒤에 다시 한번 인터뷰할 기회가 생기면 좋겠습니다. 꼭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습니까?
“요즘 우리 청년들 어려 면에서 고생하는 것 압니다. 좋은 일자리 더 많이 만들지 못해 어른으로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부모 세대가 적어도 먹고 살게는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힘껏 도전하면 어느 날 꽉 막힌 문이 열릴 것입니다. 100년 가까이 살아 보니 세상이 그렇습디다.”
 
◆관정(冠廷) 이종환
1923년 경남 의령에서 부농의 아들로 출생. 마산중(중·고 통합과정)을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明治)대로 유학. 1944년 학병으로 징병. 1959년 플라스틱 바가지 등을 만드는 삼영화학공업사 창업. 2000년에 개인 재산으로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 설립. 200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현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

    
이상언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이상언의 직격 인터뷰] "깔보지도 겁내지도 않으면서 공부해야 일본 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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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 논설위원이 간다
말로는 지일·극일…서울대 일본연구소도 지원 끊겼다
중앙일보


업데이트 2019.07.15 10:40업데이트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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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기자중앙일보 논설위원 구독


일본 연구의 참담한 현실을 보다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의 2015년 서울대 일본연구소 초청 강연 모습.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로 한국에서 유명해진 그는 이 강연에서 일본 보수화의 배경을 설명했다. [사진 서울대 일본연구소]

서울대 일본연구소에 전임 교수 6명이 있다. 수업은 맡지 않는 ‘풀타임’ 연구자들이다. 여기에 국제대학원 소속의 ‘일본통’ 교수 3명이 있다. 세 사람 모두 이 연구소의 전·현직 소장으로 사실상 연구소 식구다. 이 9명이 서울대 일본 연구의 핵심이다. 요즘처럼 일본 문제가 국가의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면 이들은 정부나 민간 주최의 회의·토론회에 연신 초청된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쇄도한다. 최근의 한·일 갈등에 대한 보도에 수시로 등장하는 김현철(전 청와대 경제보좌관)·박철희·한영혜·남기정·조관자 교수가 그 9명에 속한다.


서울대학교일본연구소 심볼

이 연구소가 요즘 주목받는 것은 이곳만큼 종합적이고 조직적으로 일본을 연구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10여 개 대학에 일본·일본학 연구소가 있지만, 역사·문학·언어 연구에 집중한다. 서울대 연구소처럼 정치·경제·역사·문화를 아우르는 종합 연구소는 아니다. 정부 쪽에도 제대로 된 일본 연구 조직이 없다. 국립외교원에 일본연구센터가 있는데, 교수급 연구진은 총 2명이다. 외교·안보 전문 민간 싱크탱크인 세종연구소에도 일본연구센터가 있기는 한데, 진창수 센터장 말고는 연구진이 없는 1인 기구다. “일본을 알아야(知日), 일본을 넘어선다(克日)”고 외쳐 온 나라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런데 서울대 일본연구소에 대한 연구비 지원이 끊겼다. 정부 지원금이 중단된 것이 지난해 8월이니 벌써 1년째다. 일본 관련 사업을 하는 한국의 한 중견기업(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 관련 피해를 우려해 익명으로 표현)에서 지난해 봄부터 매달 1000만원을 받기도 했는데, 지금은 이것마저도 없다. 지난 3월 입금이 마지막이었다. 본래 1년만 계획된 기부였다.


서울대 일본연구소가 펴낸 책들. 일본 동향, 한·일 관계, 동아시아 정치·외교 문제 등 최근의 현안을 주로 다루고 있다.

정부 지원은 왜 멈췄고, 그렇다면 이 연구소는 어떻게 되나. 지난 12일 서울대 관악캠퍼스 국제대학원 건물 4층에 있는 이 연구소에 가 봤다. 소속 교수와 행정 직원의 말을 종합하면 상황은 이렇다.

2004년에 서울대 내의 일본 전문가들이 뜻을 모아 세운 이 연구소는 설립 직후인 정운찬 총장(전 국무총리) 시절에 10억원의 기금을 받았다. “일어·일문 학부 과정도 없는데 연구소가 왜 필요하냐”는 대학 내부의 반발이 있었다. 서울대·연세대·성균관대·이화여대에는 일어·일문 학부 과정이 없다. 있었던 적도 없다. ‘민족 정서’와 연관된 부분이다. 하지만 정 전 총장은 “우리나라에 일본 연구가 많이 부족하다”며 밀어붙였다고 한다.

2008년에는 정부의 인문한국(HK)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지원서를 냈다. 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10년간 매년 8억원의 사업비를 받기 시작했다. 사업 계획에 6명의 연구 전담 교수를 두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계획대로 연차적으로 6명의 교수가 모였다. 타 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한 직급 강등을 감수하고 부교수 신분으로 합류한 경우(남기정 교수)도 있었다. 이들의 급여와 연구·사업비가 정부 지원금 8억원에서 나왔다.

문제는 HK 계약이 10년으로 정해져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 지난해 8월이 끝이었다. 연장을 요청해야 했는데, HK 사업에 대한 서울대와 교육부의 견해가 충돌했다. HK 지원금을 받는 서울대 내 다른 연구소의 인력 운영이 문제였다. 대학과 교육부가 힘겨루기하는 상황에서 일본연구소는 지원 연장 신청도 못 했다. 당시 서울대는 총장 후보자가 성추행 논란 때문에 총장직을 포기해 어수선한 상태였다.

그 뒤 전임 교수 6명의 급여는 서울대가 지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구와 학술사업에 드는 비용(연간 약 3억원)을 조달할 방법은 없었다. 조관자 교수(일본 사상사 전공)에 따르면 자료 수집, 번역, 학술회의 개최, 연구서 발간 등의 사업 중 상당 부분이 중단되거나 축소됐다. 연구소에서는 그동안 『질곡의 한일관계 어떻게 풀 것인가』·『일본의 한반도 외교』·『일본의 혐한파는 무엇을 주장하는가』·『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도입과 한반도』 등 한·일 관계 현안에 대한 책을 꾸준히 내왔다. 대부분 제작비도 건지지 못하는 ‘적자 출판’이었지만 정부 지원 덕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다시 지원을 받지 못하면 이런 책들이 계속 나오기는 어렵다.


서울대 일본연구소의 소장 김현철 교수, 전 소장 박철희 교수, 남기정 교수, 조관자 교수(위에서부터).

이 연구소의 소장이자 창설 멤버인 김현철 교수에게 현재 상황과 재정난 타개책에 관해 물었다. 김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보좌관으로 청와대에서 일하다 지난 3월에 학교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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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취임 인사말에 연구소를 ‘싱크탱크’로 키우고 싶다는 내용이 담겼다. 어떤 뜻인가.
“예전에는 삼성·LG 등의 대기업에 일본 연구 조직이 있었다. 주로 경제 분야를 탐구하고 분석했다. 그런데 일본 경제 침체기를 거치면서 조직이 줄어 지금은 삼성이나 LG에도 한 사람씩만 있다. 공공 부분에도 제대로 된 연구 조직이 없다. 거시적이고 종합적 관점에서의 일본 동향 파악, 한·일 관계 분석과 전망을 할 기구가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서울대 일본연구소만큼 그런 연구 역량을 갖춘 곳을 찾기 어렵다.”
왜 이토록 현안과 관련된 일본 연구를 하는 곳이 드물게 됐나.
“돈 문제가 핵심이다. 1970, 80년대의 일본 연구는 경제·산업에 집중됐다. 그러다 90년대에 일본이 저성장기에 접어들자 별로 배울 게 없다는 생각이 퍼졌다. 일본의 고령화·저출산 현상과 청년 문제 등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 연구할 게 많았지만 일본 연구자 수 자체가 대폭 줄었다. 소위 ‘돈 되는’ 연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2012년에 한·일 관계가 악화하기 시작한 뒤 일본의 정치·경제·역사·문화를 총체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이 커졌는데 정부나 학계가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서울대 일본연구소는 어떻게 이처럼 ‘종합적 접근’을 하게 됐나.
“연구소를 만들 때부터 일본을 다양한 각도로, 유기적으로 연구하는 조직을 만들어 정책적 대안까지 제시하자는 생각이 있었다. 이 시대의 일본을 탐구해 이 시대에 필요한 연구물을 제시하자는 취지에 맞춰 연구진을 구성했다.”
정부 후원이 끊겨 연구와 학술 사업이 어렵게 됐는데, 어떻게 타개할 생각인가.
“일단 정부의 HK 사업에 다시 지원을 요청할 계획이다. 선정되면 연간 3억원을 받을 수 있다. 잘 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사회적 관심도 바란다. 서울대 내부의 연구소 평가에서 우리 연구는 늘 최상위권으로 평가받았다. 15년 동안 여기까지 오는 데 여러 사람의 헌신과 국민 세금이 투입됐다. 이대로 멈춰서는 안 된다.”

한국에서 일본 연구가 주춤거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일본 정부나 일본 기업의 지원을 받기 어렵다는 점이다. 미국 연구나 중국 연구와 상황이 다르다. 지원받을 길은 열려 있지만, 연구자들이 꺼린다. 일본 쪽 돈을 받는 순간 ‘순수성’ 논란이 불거진다. 일본 기업 미쓰비시가 서울대 일본연구소에 연구비 지원 의향을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연구소가 사양했다.

2004년에 이 연구소가 설립되자 경향신문에 이런 내용의 사설이 실렸다. ‘만시지탄이다. (중략) 그간 우리 사회에는 ‘반일이냐, 친일이냐’ ‘일본은 없다’는 식의 감정적·도식적 접근이 앞서는 분위기 때문에 진지한 일본 연구의 토양이 척박했다. 이제는 그들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실상을 객관적이고 심층적으로 분석해야 할 시점이다.’ 15년이 흘렀다. 그런데 마치 어제 쓴 사설 같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센터장은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일본 연구자들이 청와대, 정부, 언론사로 많이 불려 다닙니다. 그런데 이러다 좀 조용해지면 관심이 싹 사라집니다. 지긋지긋하게 안 변합니다.”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중앙일보 논설위원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의미 있고 정확한 기사,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칼럼을 쓰기 위해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보다 많은 생각을 하겠습니다.

lee.sang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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