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퇴진이 왜 국익인가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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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들판
입력 2023.07.14 18:55
함석헌 학회 및 관련단체 시국선언
함석헌기념사업회 씨ᄋᆞᆯ의 소리, 함석헌 사상연구회, 함석헌 평화연구소, 함석헌 학회 등 함석헌 관련 4개 단체가 14일 ‘대통령 윤석열은 퇴진하라’는 제목의 공동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시국선언에서 4개 단체는 “검찰 권력으로부터 태어난 윤석열 대통령은 한반도를 극한 위기 상황으로 내몰고 있다. 경제 외교안보 남북관계 등 모든 분야에서 윤 정권은 급속히 퇴행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바야흐로 백주대낮에 정체가 드러났다. 대통령이 왜 퇴진해야 하는지 한결 분명해졌다. 역사의 법정에서 씨ᄋᆞᆯ(민중) 배심원들의 판정은 마침내 내려졌다. 피고 윤석열을 탄핵한다. 윤석열 퇴진은 국익이다”라고 주장했다.
시국선언문은 같은 날 한겨레 신문 1면 하단에 8개 단락으로 축약, 게재되었다. 시민언론 민들레는 4개 단체의 동의를 얻어 시국선언문의 본문(A4용지 11쪽 분량)을 싣는다. /편집자
윤석열 퇴진이 왜 국익인가
검찰-언론의 유착과 무속신앙까지 가세하여 탄생한 기형아 윤석열 정권은 국민의 여망을 저버리고 한반도를 벼랑 끝 위기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마치 20세기 초 한말의 상황이 재현되는 형국이다. 경제, 외교, 안보, 남북관계 등 어떤 분야에서도 정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급전직하 퇴행하는 형세다. 1년 전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가 이제 눈떠보니 낭떠러지다. 비상 브레이크를 밟고 운전사를 바꿔야 할 상황이다. 무역수지, 경상수지, 외환보유고도 급감하는 상황에서 집권당은 정권 유지 연장에 혈안이 되어 정적 제거와 이전 정권 단죄에만 몰두하는 바람에 국가의 안위와 민생은 내팽개쳐진 상태다.
참다못해 은인자중하던 지식인들이 상아탑 속 긴 동면에서 깨어나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대일본 저자세와 굴종 외교를 규탄하는 시국선언이 대학가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연일 발표되고 있다. 위안부와 노동자에 대한 일제의 강제적 동원을 두고 그 해결책으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쪽 한국 기업이 보상하는 ‘제3자 변제’라는 해괴한 방식을 대통령이 제안하여 일본 보수파의 주장만 만족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묻는다: 당신은 우리 대통령인가, 일본 정부의 총리인가. 후자일 수 있다는 징후가 이후에도 계속 나타나고 있다. 최근 불거진 증거는 “백년 전 일로 일본이 아직도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하느냐.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취지의 말(WP와의 인터뷰)이다. 영락없는 일본 사람이다.
일본의 ‘밀정(密偵)’ 설이 나돈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밀정이 되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윤석열이 대선 후보가 되기 전에 미국 CIA와 접촉한 사실을 들어 미국이 파견한 첩자의 가능성을 말했다. 미국 방문에서 일본처럼 미국에도 모든 것을 내주고 굴종할 것이 점쳐진다. 그렇다면 그는 미ㆍ일 2중 간첩이란 말인가. 사실이 아니라도, 그가 자발적으로 떠맡은 역할일 수 있다. 성격적으로 그는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타입으로 국제관계에서는 사대주의자이다.
시국선언; 현대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쏟아지고 있는 시국선언은 저 최치원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881년)을 연상시킨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 가서 과거에 합격, 관리까지 되었다. 그 시점에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高騈)은 그를 토벌하러 나가면서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했다. 최치원이 격문을 쓰게 되었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해서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에 순응해 성공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하는 법이다”(夫守正修常曰道 臨危制變曰權 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이렇게 시작한 이 격문은 황소에게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드러내놓고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이미 너를 가만히 죽이려고 의논했을 것이다”(不惟天下之人 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 已議陰誅)며 엄중 경고하기도 하고 “나는 한 장의 글을 날려서 너의 거꾸로 매달린 위급함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너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고 일찍 기회를 보아 좋은 방책을 세워 잘못을 고치도록 해라”(飛吾折簡之詞 解爾倒懸之急 汝其無成膠柱 早學見機 善自爲謀 過以能改)며 회유하기도 한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던지 황소는 이 글을 읽고 결국 패퇴하여 자결했다.
지금 폭발하고 있는 지식인들의 시국선언은 현대판 ‘토황소격문’이다. 황소는 도적이지만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이나 홍길동과 같은 의기(義氣)가 있었다. 부패한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것이 검찰 집단과 다른 점이다. 현 상황에서 폭력적 방법을 대안으로 삼는 사람들도 나타난다. 오죽하면 그럴까 이해는 된다. 일부 종교인들, 즉 개신교와 가톨릭 성직자들이 공개적으로 얼마 전 대통령이 해외 순방차 타고 간 ‘전용기가 추락합소사’ 기도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아베 전 수상과 기시 수상을 암살하려는 테러가 따로 발생하여 아베는 사망하였다. 폭력 혁명은 (간디와 함석헌이 강조하듯이) 바람직하거나 현실적인 방법이 아니지만, 다른 마땅한 대안이 당장 가능하지 않을 때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유익한 충고를 들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chatGTP이다. 시험삼아 질문을 던져보았다. 다음과 같은 신기한 답변이 돌아왔다. 질문은 “윤석열을 어떻게 할까요”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윤석열 독재자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저는 법과 윤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폭력이나 불법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대신, 합법적인 방법으로 불만이나 우려 사항을 제기하고, 민주적인 경로로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독재자’라는 규정에 감탄했다. 무수한 모든 자료를 검토한 끝에 나온 ‘중립적, 객관적, 과학적’인 엄정한 판정이다. 법을 철저히 일방적으로만 적용하는 한국의 검찰, 판사보다 훨씬 더 신뢰가 갈 수밖에 없다. 증언이니 정황 증거니 하는 애매한 근거보다 확실한 정보에 기초한 결론이다. 이제 우리는 ‘(대통령 대신) 독재자 윤○○’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 검찰은 아직 인공지능은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검찰이 하도 독재적인 집단인지라 정권이 바뀌면 아예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근래 팽배해지고 있다. 그때까지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더 정교해질 것으로 본다. 거짓말 탐지기보다는 더 신빙할 만하지 않겠는가.
그 표현 이후의 내용은 언뜻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 다소 혼란이 일 수 있다. 윤 당사자보다는 우리 쪽에게 주는 지침이라고 여겨진다. 어느 쪽이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다. 비행기 추락이나 암살 같은 비상한 폭력적 수단이 아니고 비폭력적, 합법적인 방식이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차분히 진행하면 된다.
역사적 사실과 과거 한일 간 협정에 반하는 퇴행적 언행은 다수 국민의 공분을 야기했다. 일본과의 합의와 정책을 파기하지 못한다면 대통령의 퇴진 운동에 나서겠다는 경고가 대세가 되어간다. 군사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 운동을 선도한 함석헌 선생의 정신을 받들고자 조직된 우리 함석헌 관련 단체들도 이러한 선언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동조하는 바이다. 대통령과 정부는 즉각 이 요구를 수용하고 모든 필요한 후속 조치에 나서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실과 진실을 탐구하는 학회로서 우리는 대통령과 정권의 실체를 밝히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 퇴진 운동에 나름으로 기여하고자 한다.
윤석열의 정체: 무속신앙 빙의
한일 정상회담에서 일부 드러난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권력 실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한 개인의 정체는 여러 단계로 규정된다. 큰 테두리에서 그는 한국 사람이다. 국적이 한국인이다. 그러나 모든 행동거지에서 실로 그렇다고 할 수 있는가. 한층 더 내려가서 그는 직업적으로 검사다. 그것은 가시적인 측면이고 ‘심리적, 의식적, 무의식’ 측면에서는 무엇인가. 종교, 신앙과 관련된 문제다. 그는 직무수행 과정에서 주로 두 가지 가치관, 세계관에 근거하여 판단했다. 잘 알려진 대로 검찰과 무속(巫俗)이다. 윤 정권은 검찰 권력과 무속신앙에 바탕을 두고 정책을 집행한다. 검찰 출신이 정부(장ㆍ차관), 대통령실, 국가정보원, 금융감독원, 법제처, 국가보훈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등 곳곳에 침투해 있다. 나라를 통괄하는 대통령이라면 사회를 구성하는 각계각층을 고루 망라해야 할 원칙과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일탈 행위다.
이는 헌법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위헌적 통치다. 그것은 세 가지 조항에서 명시된다.
첫째, 제7조 ①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둘째, 제11조 ①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②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검찰은 사실상 특수계급이 되어 온 국민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검찰 자신만 예외다.
셋째, 제20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지금은 신정(神政)시대가 아니다. 거의 모든 중요한 결정은 그가 부인과 함께 빙의된 법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와대 입주 거부, 용산 국방부 청사로 집무실 이전, 외교부 장관 주택으로 관사 이전, 엘리자베스 여왕 조문 거부, 미국 펠로시 하원의장 면담 회피, 영국 수상 면담 초청 거절, 일본에 대한 친일 행각 등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풀린다. 무속(shamanism)은 원시 시대 신앙의 잔존물이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신앙이 개인의 복을 비는 기복(祈福)신앙으로 퇴락한 형태다. 그들이 믿는 신은 성령(聖靈)이 아닌 낮은 단계의 영, 악령(惡靈)이다. 고대 문명에서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이 구분되듯이 성령이 아닌 낮은 단계의 영이나 악령일 수 있다. 절대신을 믿는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국민은 검-무 혼합 정치체제 밑에서 검찰과 무속에 떨고 있다. 현 정권은 한 지도자가 아니고 두 권력을 대표하는 대통령 부부가 통치하는 연합 체제다. 이런 유례가 세계 정치사에 또 있었던가. 이것은 명백한 위헌 사항이 아닌가. 헌법재판소는 무엇을 하고 있나.
나아가서 대통령은 이 민중 시대를 군주/왕정 시대로 착각하고 있다.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다닌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당연히 헌법 제1조(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위배한다. 왕정이건 민주공화국이건 문명이나 공동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덕성이 필수요건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도덕률은 종교에서 연원했다. 삼강오륜(유교), 5계와 10계(불교), 십계명(기독교) 등이 그것을 보여준다. 신라의 화랑도가 받든 ‘세속 5계’도 세 종교(유불선) 계율을 종합한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종교와 신자는 존재하지만, 과연 이들 계명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든 종교의 공통 계명의 하나인 ‘거짓말(거짓 증거)하지 말라’(不妄語)의 예를 들어보자. 만인의 사표가 되어야 할 정치지도자조차 정직은 쉽지 않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우는 극단적인 사례다. 재임 시 3천 번 이상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 대통령의 경우도 그에 못지않다. 중요한 사안에 대한 그의 진술 대부분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바이든 날리면’ 사건에서도 솔직하지 못했다. 진실을 말한 사례가 언제 있었던가. 인격을 가진 사람인가. 일본 수상과의 협의에서도 공동성명이나 기자회견도 없이 모든 것을 숨기고 있다. 그의 말에는 논리도 진실성도 없다. 언행에서 윤리도 양심도 찾을 수 없다.
대통령의 노골적인 친일 행각도 천공의 가르침(“한국 사람은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에서 나온 행동이다. 일본 정부 장학생 1호인 아버지의 친일적 성향으로도 거슬러 가지만, 더 큰 발원지는 천공이다. 권력의 한 축인 검찰 출신 대통령이 무속 권력까지 거머쥔 것은 그가 천공과 부인의 영에 빙의(憑依), 즉 점유(occupation)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박근혜가 최순실과 그 부친 최태민에게 빙의된 것과 같다. 빙의되면 자기 주체성은 사라진다. 인면수심(人面獸心)처럼, 생김새는 사람이지만 인격이 형성되지 못한 채 도덕성도 영성도 결핍된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도덕성의 문제: 전통 윤리에 비추어
도덕성이 없는 사회는 생존할 수 없다. 토인비가 인류의 문명사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모든 문명은 종교가 밑바탕이 된다는 사실이다. 함석헌도 동의하는 생각이다. 종교는 도덕성의 원천이다. 동양의 전통 윤리는 종교를 떠나서 말할 수 없다.
도덕성의 측면에서, 윤석열은 유교에서 말하는 인격의 기본 요소인 오상(五常)을 전혀 갖추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즉 관용성/자비심(仁), 정의(正義), 예의(禮儀), 지혜(智慧), 신뢰성(信賴性) 가운데 어느 한 가지라도 보유하고 있을까 의심스럽다. 그 단초가 되는 ‘네 가지 마음씨’(四端), 즉 측은지심, 시비지심 등도 마찬가지다. 양심(良心)이라도 남아 있을까. 동물적인 감각만 노출될 뿐이다. 공익, 국익보다 사익만 앞세운다. ‘퇴진이 국익이다’는 민중의 소리가 들릴 리 없다. 오상(五常)이나 삼강오륜(三綱五倫)은 케케묵은 전통 윤리라기보다 수천 년간 공동체를 지탱해온 기본 도덕이었다.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면 된다. 예를 들면, 5륜의 하나인 ‘군신유의’(君臣有義)는 ‘관민유의’(官民有義)로 바꿀 수 있다.
서양 윤리를 대표하는 기독교 ‘십계명’도 살인, 거짓말, 도둑질 금지 등 인간 사회에 필요한 기본 도덕을 가리킨다. 고대의 팔조금법(八條禁法), 불교의 5계-10계 등도 같은 윤리 체계이다. 전통 종교의 핵심으로 말하면, 함석헌도 그 동의어로 곧잘 아우르는 ‘불교의 자비(慈悲), 유교의 인(仁), 기독교의 사랑’에 모든 윤리가 농축되어 있다. 간디의 비폭력(ahimsa)도 모든 종교 계율의 기본인 불살계(不殺戒)를 말한다. 이는 화랑도의 ‘세속오계’(世俗五戒)에도 담겨 있다. 불살계는 슬기롭게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바뀐다. 상황윤리적 변용이다.
검찰은 인간 사회의 관습법은 무시하고 오로지 법치(法治)에만 의존한다. 법치조차 자신들은 빼고 타인에게만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극악무도한 폭력집단이다. 조폭조차도 그들 나름의 의리를 강조한다. 그가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해 한때 신선한 충격을 준 바 있지만, 민주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그것은 관리가 충성을 바쳐야 할 역사의 주체다. 정작 자신은 충복들의 충성을 받는 군주로 군림한다. 역사를 역행하는 뻔뻔한 통치자다.
함석헌 사상에 비추어
국가 지도자라면 기본적으로 도덕성은 물론 어떤 세계관, 가치관을 가져야 할까. 그 준거를 20세기 마지막 선비 함석헌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에 윤석열의 행태를 비추어 보면 그의 실체가 선명히 드러난다.
함석헌의 다양한 사상을 키워드로 살펴보자면: 비폭력 평화, 민중(씨ᄋᆞᆯ), 개혁/혁명/진화, 초국가주의, 민족주의-세계주의, 전체론(holism), 같이 살기(상생), ‘한’사상, ‘하나됨’(통일) 등이다. 그것은 한민족이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이 모든 사상은 궁극적인 근거를 종교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윤리, 도덕을 내포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1. 비폭력: 이 사상은 간디(힌두교)와 톨스토이(기독교)의 입장과 일치한다. 비폭력(ahimsa)은 ‘살인하지 말라’(不殺戒)를 가리킨다. 이는 개인만이 아닌 집단(평화)에도 적용된다. 폭력은 ‘신체적인 것’(身)만이 아닌 ‘언어’(口), ‘생각·사상’(意)에도 적용된다. 폭력으로는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없다. 작은 폭력이 큰 폭력을 이길 수도 없다. 지금의 검찰은 세 가지 폭력을 관리하면서 직접 행사한다. 그 행적을 종합해볼 때 폭력 집단(조폭)과 다를 바 없다. 검찰 출신 대통령은 그 지휘자이며 출발점이다. 검찰과 유착한 보수 언론도 왜곡된 사실과 가짜 뉴스로 국민을 오도하는 언어폭력을 일삼는 집단일 뿐이다. 한국 사회는 폭력적이라 할 측면이 많다. 검찰은 그 산물이다. 남북 평화와 민족통일도 폭력적으로 달성할 수 없다. 그런데도 독재자 군주는 ‘선제공격’을 뇌까린다. 그래서 왕비가 수렴청정하고 있는 것인가.
2. 민중(씨ᄋᆞᆯ): 역사의 주체는 군주나 영웅이 아니고 민중이다. 민주주의는 더욱 그렇다. 현 대통령은 ‘王’자를 손바닥에 써서 일부러 노출한 사실이 그 증거다. 이 인간은 인격이 있는 성인인가, 바보 유아인가.
3. 개혁/진화: 생물 진화처럼 인간도 자라나고 진화한다. 역사나 사회나 발전한다. 통치자는 기본적인 가치를 보전하기는커녕 역사와 사회진화를 역행하는 기득권 보존주의자 편에 서 있는 수구파이다. 원자력 정책에서도 나타난다. 그 결과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다시 퇴행하고 있다.
4. 초국가주의: 특히 강대국 중심의 대국가주의는 극복되어야 한다. 작은 국가들은 강대국 제국주의의 먹잇감이 되었다. 지금 우리의 처지는 4대 강국에 포위되어있는 사면초가의 형국이다. 무엇보다 이를 교묘히 회피해 가는 지혜가 필요한데, 두 나라(미, 일)와만 군사동맹을 하고 다른 두 나라(중, 러)와는 적대관계를 갖는 쪽으로 가는 흑백 논리에 갇혀 있다. 함석헌은 중국의 민족주의를 경계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우리 한민족을 가장 많이 침략한 국가이다. 중국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 일찍이 그는 동남아시아 연합 기구를 제안, 예언처럼 ‘아세안연합’(ASEAN)이 구성되었다. 함석헌은 당시 안보 차원만 고려했지 경제 차원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과 중국의 경제적 관계는 미국도 양해했던 정책이었다. 그 점도 고려하지 못한 독재자가 중국을 경제에서까지 등돌리게 만들었다. 그는 국익이나 공익은 안중에도 없는 미·일 사대주의자이다.
5.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역사는 민족주의에서 세계주의로 이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국가들이 고수하는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민족의 경우는 외침에 눌려 민족주의 단계를 제대로 거쳐 가지 못했다. 남북 분단이 그 상징이다. 일단 민족이 하나가 되는 단계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세계주의는 나아가야 할 이상이고 민족주의는 거쳐가야 할 현실이다. 이것을 파악하지 못한 대통령은 북한을 주적으로 설정하는 우행을 범했다. 세계고 민족이고 안중에 없는 어리석은 지도자다. 그를 선출한 국민도 (세종대왕이 규정한) 여전히 ‘어리석은 백성’으로 남아 있다.
6. ‘전체’(전일)주의: 인류는 원시 부족 시대에서 군주 시대, 개인주의, 민족주의 시대를 거쳐 전체(사회, 세계) 시대로 발전했다. 함석헌이 동서양 어느 누구보다도 일찍이 ‘전체’ 의식을 갖게 된 것은 늦어도 1949년이었다. (히틀러의 가짜 판이 아닌) 종교적 ‘전체주의’ 사상을 제창한 프랑스 신부 샤르댕을 앞선 시점이다. 양 아흔아홉 마리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가 더 중요하다는 이론이다. ‘최대 다수를 위한 최대 행복’을 겨냥한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넘어선 개념이다. 함석헌은 예수의 열두 사도 중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가롯 유다를 ‘전체’ 논리로 재해석했다. 예수는 ‘열둘’을 상징한 ‘전체’ 운동으로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여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함석헌이 그 바통을 받아 유다를 다시 전체로 편입시켰다. 이는 제2의 종교개혁에 해당한다.
이 시대의 뛰어난 사상가 켄 윌버도 ‘전체’(whole)를 중시한 ‘전체론’(holism, wholism)을 전개했다. 역사는 전체가 단위가 되어 앞 ‘전체’를 품고 나아가야 한다. 함석헌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을 강조한다. 동양 고전을 다시 보자는 것이다. 윌버는 트럼프라는 괴물이 등장한 것도 그가 상징하는 옛 질서를 품지 못한 탓으로 해석한다. 윤석열도 우리에게 던져진 괴물이다. 그만 탓할 것 없다. 그만의 따로가 아니고 우리 마음의 투영이며 한국 사회의 축도다. 문재인 정권 말기에 진입한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고 기고만장할 뻔했다. 여기에 브레이크가 걸린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 화두를 풀지 못하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수 없다. 풀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이다.
함석헌을 이단으로 몰아 공격한 한국 기독교야말로 개혁 대상이다. ‘무속 정권’과 그 앞잡이 전광훈을 끌어내리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은 (신학자 하비 콕스가 순복음교회를 관찰하고 진단한 것처럼) 그 스스로가 무속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근 가톨릭 사제들과 일부 개신교 목사들이 윤석열 정권 비판에 나선 것은 고무적이다. ‘전체’론은 민주주의 다수결 원칙이라는 명분으로 소수자를 무시하기 쉬운 정치인이 참조해야 할 사상이다. 야당과도 전혀 소통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도취에 빠져 천박한 낭만만 구가하는 지도자는 ‘전체’ 국민을 통치할 자격이 없다.
7. 같이 살기(相生): 함석헌은 1970년대 서울 빈민촌에서 발생한 일가족 자살 사건에 충격을 받고 ‘같이 살기 운동’을 제창했다. 이것은 19세기 김일부(金一夫)의 ‘상생 사상’과 마주친다. 그는 중국의 주역(周易)의 원리인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부정적 상극(相克) 관계를 적극적인 상생(相生) 관계로 바꾸고 주역을 대치하는 혁명적인 정역(正易)을 저술했다. 상생은 동시대의 강증산(姜甑山)에 전해져 증산교의 핵심 사상인 ‘해원상생’(解冤相生)으로 표현되었다. 대대로 ‘같이 살기’로 부활한 셈이다.
그만큼 ‘같이 살기 정신’은 한국 전통에 연면히 흐르는 특성이다. 다만 지배층이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것은 민중의 삶 속에서 ‘두레 정신’ 등으로 표출되고, 단군 사상에서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원효 사상에서는 화회(和會), 즉 화쟁(和諍)과 회통(會通)으로 나타났다. 인도 사상의 초월, 중국 사상의 대립/부정과는 다른 화합의 정신이다. 함석헌은 그 나름으로 그것을 도출해냈다. 상생은 그가 수립한 ‘전체’론과 맞닿는다. 그와 같은 긍정적인 사상과 정신이 묻혀버린 것은 조선 시대 지배원리인 유교 주자학의 배타적인 사상 때문이었다. 이 상생 정신은, 일제 통치 공백기를 거쳐 해방 후에는 이분법적 흑백 논리의 산물인 이념(공산주의, 자본주의)에 눌려, 결국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갈려 70년이 지나도록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함석헌은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제3의 사상이 등장해야 한다고 보고, 그것이 한민족 속에서 나올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 발굴한 ‘한’ 사상이다.
현재 진행되는 정치 상황은 이러한 깊은 정신 전통과는 무관하게 전개된다. 그 주역인 검찰 집단은 그것을 접하거나 배울 틈도 없이 출세 가도를 달려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야, 관/민, 보수/진보, 남/북이 대립과 갈등의 관계밖에 모른다. 상생 정신과는 동떨어진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자기중심주의다. 상생의 원리로 무장한 지도자가 4강에 포위된 우리의 처지를 역이용하여 4강 지도자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하고 그들을 설득한다면 역경을 순경으로 바꾸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노무현이 제안했다가 수구 언론의 서리를 맞은 ‘조정자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중국과 미국도 무한 대립을 거두고 상생의 관계로 전환하도록 다리를 놓을 수도 있다. 현 정권으로서는 아무래도 불가능한 꿈이다. 상생적인 ‘햇볕 정책’을 편 김대중 같은 지도자가 긴요하다.
여기에 축약된 함석헌의 사상에 민족과 인류가 갈 길이 비장되어 있다. 그 정신으로 국제관계도 당당히 대처하면 된다. 상생 속에 모든 이념이 추구하는 자유, 평등 등 보편적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 통치자와 집권당은 전통적 윤리 도덕이나 사상과도 무관하게 오로지 권력에만 도취하여 자기들만 만족하는 방식으로 통치하고 있으니, 국민은 각자도생하기에 바쁘다.
법치의 허구성: 헌법은 지키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으로 근거를 삼고 통치한다고 그들은 말할까. ‘법치’(法治)라고 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법 중의 법이라고 할 헌법에는 충실하게 국사를 집행하고 있는가. 정책과 실천에서 위헌적인 요소는 없는가. 헌법을 놓고 검토해보면 놀라운 결과를 접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도 윤석열의 위헌적인 언행과 정책을 몇 가지 지적한 바 있다.
헌법에 규정된 대로 3권분립이 엄정하게 시행되고 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많다. 그 단적인 증거가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법원의 판정(2018)에 정면으로 배치된 ‘제3자 변제(辨濟)안’을 제시한 사실이다. 그러고도 정부측의 해설이나 변명이 없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무책임한 임무 방기다.
그것은 헌법 전문(前文)부터 드러난다.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전문).
친일 정권이 이 전문의 취지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은 명백하다. 그것은 3ㆍ1절, 4ㆍ19 기념사에서 잘 드러난다. 일제와 이승만의 잘못에 대한 지적이 없는 공허한 메시지다. 서두의 비판적인 언사는 국민을 겨냥하지만 사실상 자신이 지금 보이고 있는 행태를 지적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임시정부 법통은 이전 보수정권 때부터 문제를 제기하여 현 정권도 지지하는 입장이다.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도 이 정권과 무관한 말이다. 특히 ‘평화통일’은 본문(4조, 66조, 69조)에서도 거듭 강조된다. ‘선제공격’을 강조하고 북한과의 대화나 교류에 일체 무관심 일색인 정부가 이제는 (우크라이나 무기 수출로) 러시아까지 자극하여 북한과의 동맹을 강화시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헌법은 뭐라고 규정하는가. 국가로서 진 의무는,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5조). 이 의무는 6ㆍ25전쟁에서 국제연합(UN)군의 지원을 받은 한국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함석헌은 2차 대전 후 새로운 세계 질서가 형성될 것으로 보고 UN군은 침략에 대한 집단적 방어의 효시로서 큰 의의를 갖는 첫 사례로 높이 평가했다. 국가로서 한국의 의무는 ‘평화적 통일’을 위한 작업은 대통령이 수행해야 할 ‘성실한 의무’다(66조). 윤 대통령이나 현 정권이 과연 이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알면서도 ‘선제공격’ 같은 무력 통일을 시사했는가. 이것은 부여된 자기 임무의 방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임무 방기죄, 의무 태만죄를 면할 수 없다. ‘인도(humanism)와 동포애… 민족의 단결’도 이들의 사전에는 없다. 민족을 수호하지 않는 보수는 사이비다. 무엇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자기만의 자유와 재산, 기득권뿐인가. 그것은 보수가 아니고 수구가 추구하는 가치다.
종교와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헌법은 뭐라고 규정하는가. 이미 앞에서 논의한 대로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20조). 바로 무속 정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두 사람이 나눠 갖고 있지 않느냐고 할 텐가. 더구나 무속 신앙은 종교치고는 수준이 낮은 기복주의 신앙이다. 옛 시대에는 종교와 정치가 혼합된 신정(神政, theocracy) 체제가 있었다. 중동 이슬람 국가들은 아직도 일종의 신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 역사에서도 신라 초기의 왕들은 ‘자충’(慈充)이라 불리는 신정 군주였다. 현 ‘대통령’ 부부는 각기 군주와 제사장의 임무를 나누어 갖는 형식이다. 신정 부부인 셈이다. (대통령실을 2층과 5층에 두고 두 사람이 수시로 교체하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그 증거다.) 정치와 종교를 원시 시대로 되돌려놓은 행위다. 21세기 대명천지에 가능한 일인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밖에 없다.
검찰이 정치적으로 남발하여 마치 정적을 때려잡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내다보고 만든 듯, 수사 관련 행태를 규정한 원리도 헌법에 명시되어있다: “무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27조). 검찰은 무죄추정원칙도 무시하고 온 국민을 잠재적 죄인으로 다루어 공포 사회로 몰아가고 있다. 그것을 교정할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마저, 가재는 게 편이라고, 검찰의 편을 들어 영장을 남발하고 있다. 검찰개혁을 주도하는 조국 민정수석(법무장관)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검찰은 조국 교수 본인의 죄는 찾을 수 없어서 마치 폐기된 연좌제처럼 그의 가족(부인, 두 자녀)의 행적을 이 잡듯이 뒤져 관습적인 자녀 사회봉사 추천장을 문제 삼아 재판 심리도 하기 전에 회복할 수 없는 폐해, 일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만들었다. 설사 표창장이나 봉사 기록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검사들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적 상식과 관례를 무시한 치사한 행위다. 이는 사회적 형평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윤석열의 정체를 다각도로 조명해보았다. 왜 퇴진해야 하는지 분명해졌다. 위헌적 행위 등 모든 정보를 종합한 결과 씨ᄋᆞᆯ 배심원들의 판정은 내려졌다. “피고 윤석열을 탄핵한다.” 진행 과정에서 당사자가 사퇴한다면 퍽 다행한 일이다. 그의 ‘퇴진은 국익(國益)이다.’
일단 탄핵으로 묶어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켜보는 동안 나라의 안위와 민생이 하루가 급하다. 경제와 민생은 악화일로, 밖으로는 네 제국주의 열강에 둘러싸여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태다. 국가 무역/경상수지에서,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섰다. 윤석열은 “세계역사의 흐름에서 뒤쳐진 정권은 망한다”(2023년, 대통령 3ㆍ1절 기념사)는 취지의 말이 바로 자기 자신을 지칭한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는 지도자다.
교훈과 과제
과도기와 그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너무나 간단하다. 능란한 외교관이 아니라도 된다. 모든 정책과 결정을 여론대로 하면 된다. 4강 지도자에게도 통보하면 이해하리라 본다. 현재의 여론으로는 미국, 일본과의 3각 군사동맹은 안 된다. 중국과는 미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경제 교류를 독자적으로 지속한다.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문제도 해소된다.) 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수출은 중단한다. 러시아와의 관계도 복원될 것이다. 일본과의 관계도 옛날처럼 여론에 따른다. 우리가 잃을 것은 없다. 일본과의 관계는 무시할수록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
남북 관계도 국민에게 묻고 그대로 한다. 개성공단, 금강산도 다시 열릴 것이다. 해주, 원산 등지에 공단을 건설하는 것도 국민이나 김정은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백두산, 칠보산도 개방할 수 있다. 구태여 중국 장가계, 중국 쪽 백두산 관광보다 북한 관광에 기꺼이 돈을 쓸 사람이 많을 것이다. ‘퍼주기’가 아니다. 남북 상생이다. 독일을 보라. 꼭 통일을 주장할 것 없이 경제 교류부터 하면 된다. 중국과 대만의 무역량을 검색해보라. 안보와 경제를 분리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당리당략을 떠나 여론 정치, 여론 외교를 하면 인기가 치솟을 것이 명약관화하다. 누가 더 여론에 더 충실할 것이냐에 따라 당선 가능성도 높아진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은, 언론이 중립적인 제 기능을 할 때에만 정확한 여론을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비참한 현실이 초래되었다. 자손만대에 민족사의 죄인으로 남을 것인가, 자기 자손을 위해서라도 발상 전환을 할 것인가. 전두환의 손자를 보라. 대통령직을 성실히 수행했느냐의 여부는 퇴임 후 어디를 가나 “대통령님 막걸리 한잔하시죠” 같은 말을 듣느냐 못 듣느냐에서 판정된다.
여기에 기술된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으면서 동시에 많은 것을 얻기도 했다. 일본과 미국의 실체를 새롭게 파악한 것이 그 하나다. 이 나라들의 국익을 위해서 우리 민족이 분단 상태를 유지해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 국력이 성장한 만큼 당당히 맞서야 한다고 다짐한다. 우리가 4강을 일면 조종하고 일면 설득하는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설득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미국과 소련이 갈라놓은 남북이 분단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 4강의 국익과 동아시아 평화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미국과 일본을 납득시키고 국민의 양심에 호소해야 한다. 우리의 특장인 고도의 창조적 기술력과 한류 문화를 한껏 이용할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남북 정부가 4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주적으로 경제 교류를 활성화하여 과거에 남북이 합의한 ‘느슨한 연방제’ 구축에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다. 남북끼리라도 평화협정을 맺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에 제3의 중재자가 필요하다면 유럽연합 중립국가들을 세울 수 있다. 안보와 경제 양면에서 미국 의존도를 줄이고 유럽연합과 긴밀하게 협조하는 것도 유익한 전략이 된다. 동남아 국가들과 호주, 캐나다 등과도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통일의 논리 및 전략의 개발이다.
그 맥락에서 한국의 국제관계도 새로 정립할 수 있다. 그래서 한반도를 포위한 네 제국주의 세력(러시아, 미국, 일본, 중국)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꼭두각시 신세를 면할 수 있다. 외교의 연속된 참사로 말미암아 굴종 아니면 적대관계로 돌아서 자주 국가의 독립성은 사라지고 국위와 국격은 급격히 추락하고 있다. 왜 딴 나라를 꼭 동지가 아니면 적으로 구별해야 하는가. 상생의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 왜 우리는 모두의 친구가 된다고 선언하지 못하는가. 중립국가를 선포하면 된다. 남북은 통일을 지향하지 않고도 ‘중립연방국가’로 공존할 수 있다. /끝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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