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7

Taikyu Oh 한국에 손석희가 있다면 일본엔 치쿠시 데쓰야가 있었다

Taikyu Oh - <오태규 리포트> 서평 128 : 한국에 손석희가 있다면 일본엔 치쿠시 데쓰야가 있었다... | Facebook:

Taikyu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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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규 리포트>

서평 128 : 한국에 손석희가 있다면 일본엔 치쿠시 데쓰야가 있었다 

<뉴스캐스터>
내가 도쿄 특파원을 하고 있던 시절(2001년 3월~2004년 3월)에 즐겨보던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이 있었다. 하나는 <아사히테레비>의 '뉴스스테이션'이고, 또 하나는 <TBS>의 '치쿠시 데쓰야의 뉴스23'이었다.

두 프로그램 모두 앵커의 개성뿐 아니라 뉴스의 이면을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공영방송인 <NHK>는 표준어를 구사하는 아나운서가 사실에 충실한 뉴스 내용을 또박또박 읽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민영방송인 두 방송사는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뉴스 프로그램을 시도했다. 쉽게 말하면, 손석희 앵커 시대의 <JTBC> 뉴스룸과 같은 프로그램을 두 본 방송사가 그때 이미 시작했다.

일본의 방송은 공영방송인 <NHK> 1개와, <아사히테레비>, <TBS>, <니혼테레비>, <후지테레비>, <도쿄테레비> 등 민영방송 4개 체제로 되어 있다(도쿄 기준). 아사히테레비는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아사히신문> 계열이다. 나머지 민방들도 모두 신문사와 계열 관계를 맺고 있다. 니혼테레비는 <요미우리신문>, 후지테레비는 <산케이신문>, TBS는 <마이니치신문>, 도쿄테레비는 <닛케이신문> 계열이다. 방송국의 성향도 신문사의 성향과 비슷한데, 아사히테레비와 TBS가 진보 성향이 강하다.

내가 특파원 시절에 아사히테레비의 '뉴스스테이션' 앵커는 TBS 아나운서 출신의 구메 히로시였고, TBS의 '치쿠시 데쓰야의 뉴스23 앵커'는 아사히신문 기자 출신의 치쿠시 데쓰야였다. 두 사람이 당시 일본 뉴스 앵커의 쌍벽이었다. 야구 투수에 비유하자면, 구메 히로시는 기교파였고 치쿠시 데쓰야는 정통파였다. 치쿠시 데쓰야가 정론으로 프로그램을 이끌고 갔다면, 구메 히로시는 뭔가 어눌한 어투지만 상대의 급소를 찌르는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재미는 구메 히로시 쪽이 더 있었지만, 저널리스트로서 배울 점은 치쿠시 데쓰야가 더 많았다.

최근에 그 중 한 명인 치쿠시 데쓰야가 쓴 <뉴스캐스터>(집영사신서, 2002년 6월)라는 책을 접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에 대한 생각이 소록소록 되살아났을 뿐 아니라, 그가 내가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저널리스트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아사히신문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기 전 오키나와 특파원, 워싱턴특파원, <아사히저널 편집장>을 지낸 유망한 기자였다. 그런데 그가 1989년 30년여 근무하던 아사히신문을 떠나 경쟁사의 계열사인 TBS로 이직해, 그의 이름이 붙은 뉴스프로그램의 앵커가 됐다. 물론 그의 능력을 높이 산 TBS의 끈질긴 영입 노력에 따른 것이다.

이 책 곳곳에 그의 언론관이 잘 나와 있다. 일일히 다 소개할 수 없으므로 대표적인 내용 몇 가지를 소개하면 이렇다. 그는 뉴스 앵커를 맡으면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도쿄에서 방송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도쿄 중심의 생활이 뉴스도쿄 중심의 시각으로 전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방송을 하지 않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가급적 도쿄를 떠나 지방에서 지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앵커로 일하는 내내 주말은 거의 지방에서 보냈다고 말했다.

또 한 가지는 그가 첫 방송을 진행하면서 이른바 부락민(우리나라로 치면 '백정')에게 오해를 살 만한 용어를 썼고, 이른바 일본에서 식육처리를 하는 사람들의 맹렬한 항의를 받았다. 이를 반성하는 뜻에서 그는 매년 적어도 1회 이상 그들이 일하는 장소를 찾아 그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나중에는 그들과 인생 상담을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1996년 TBS 관계자가 옴진리교 쪽에 옴진리교에 빠진 신자를 구출하는 운동을 하는 변호사의 인터뷰 영상을 넘겨 그 변호사가 옴 진리교 관계자에게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앵커였던 그는 뉴스 진행을 하면서 이 사건과 관련해 "TBS는 죽었다"고 폭탄 발언을 했다. 그의 발언은 면피에 급급하던 TBS의 경영진 사퇴를 불러왔고, TBS가 잃었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이티비시 앵커 손석희와 그가 매우 닮았다는 걸 느꼈다. 아니 그가 손석희의 롤 모델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JTBC의 뉴스룸보다 20여 년이나 빨리 시작한 그의 프로그램에서 손석희가 추구했던 저널리즘의 원형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뉴스가 끝날 때 틀어주는 음악도 그가 일본에서 처음 도입했다. 그는 "방송은 사라져도 뛰어난 음악 생명력을 갖는다"면서 일본의 저명한 음악인들에게 프로그램에 쓸 곡을 부탁했다. 그 중에는 최근 숨진 세계적인 일본의 음악가 사카모토 유이치도 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애착은 뉴스 프로그램에 음악뿐 아니라 그림, 연극, 오페라, 영화를 많이 소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손석희도 마찬가지였다. 치쿠시 데쓰야는 뉴스 속 앵커 칼럼인 '다사경론'도 처음 도입했다. 이것도 우리나라 텔레비전 뉴스에서 앵커 칼럼을 처음 시작한 손석희와 닮았다.

또 하나는 의제 유지(어젠다 키핑) 노력이다. 손석희가 유명해진 것은 세월호, 국정농단 등의 주요 사건을 아주 끈질지게 끝장을 볼 때까지 물고 늘어진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손석희가 말하는 어젠다 키핑이다. 그런데 치쿠시 데쓰야도 이미 그보다 20년 전에 그렇게 했다. 1995년 일어난 고베 대지진 사건과 관련해, 매년 빼놓지 않고 고베 현장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현지 방송을 이어갔다.

저널리즘 정신에 투철한 그의 뉴스는 일본에서 지식층이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그는 애석하게도 2008년 73살의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내가 오사카 총영사로서 다시 일본 생활(2018년~2021년)을 할 때는 테레비전에서 그를 볼 수 없었다.

이 책은 그가 앵커를 시작한 1989년부터 뉴욕의 9.11 동시다발 테러가 있었던 2001년 말까지를 다루고 있다. 아마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일본의 우경화와 역사 인식의 퇴조에도 일침을 가했을 터인데, 그의 부재가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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