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8

알라딘: 모스크바와 김일성 - 냉전기의 북한 1945~1961 시모토마이 노부오

알라딘: 모스크바와 김일성


모스크바와 김일성 - 냉전기의 북한 1945~1961 
시모토마이 노부오
(지은이),이종국 (엮은이)논형2012-06-15





전자책
22,000원
314쪽

책소개 
                        
북한 정권의 형성과정에서 구소련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외교사료를 통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구소련과 북한의 관계로부터 북한을 분석하며, 스탈린체제로부터 이식된 체제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연구동향과는 다르게 냉전사관과 수정주의사관을 넘어 새로운 외교문서를 기초로 소련의 강력한 지도와 북한의 저항이라는 동학 속에서 사회주의와는 ‘이질적인 체제’를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범례/ 문헌목록

1장 소련 참전으로부터 분단까지
1. 소련의 북한점령정책/ 2. 권력탄생/ 3. 모스크바 외상회의로부터 미소합동위원회로/ 4. 진행하는 38선 분단

2장 점령권력으로부터 건국으로―북한의 형성과 소련
1. 통역정치/ 2. 선행된 국가기구 건설/ 3. 헌법 제정으로부터 국가건설로/ 4. 북한건국과 소련/ 5. 남침통일 야망

3장 한국전쟁
1. 개전 전후/ 2. 개전/ 3. 유엔군의 반공과 중국 참전/ 4. 1950년 12월(제3회)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5. 화평교섭이라는 전쟁/
6. 스탈린은 조기정전론자였는가?/ 7. 남노당의 수난/ 8. 스탈린 사후

4장 전후 북한―1953년 8월~56년 1월
1. 전후복구와 소련·북한관계/ 2. 숙청/ 3. 4월 테제/ 4. 깊어가는 농업위기/ 5. 1955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 ‘주체’의 정치학―문예평론과 탈 소련

5장 스탈린 비판과 북한
1. 제20회 소련공산당대회와 최용건의 보고/ 2. 제3회 조선노동당대회/ 3. 김일성의 소련·동유럽 방문/ 4. 8월종파사건/ 5. 이상조 대사의 김일성체제 비판 6. 소련공산당·중국공산당의 반응/ 7. 동유럽 혁명과 김 체제/ 8. 1956년 총괄

6장 ‘주체’ 체제의 확립
1. 김일성 지배체재/ 2. 반대파 숙청/ 3. 중소 대립과 북한/ 4. 후르시초프의 구애/ 5. 허울뿐인 동맹조약

맺음말/ 관련연표/ 역자 후기/ 색인

접기


책속에서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참전이 결정되면서 일본의 패배가 예상되던 동북아시아 지도는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한반도에 관한 문제는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의 주장에 따라 독립이 보장되었지만, 그 후 얄타회담에서 미소는 ‘상당기간’ 신탁통치 아래 두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7월 포츠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미소 간 구체적 합의가 없었다. 그 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이어서 9일 소련은 일본과 전투개시를 선언했다. 이렇게 하여 소련 적군(赤軍)이 대일참전을 했다.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하여 주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제25군이었다. 이 군대의 최초 역할은 관동군이 한반도를 통해 본국으로 탈출하는 것을 저지하는 일이었지, 한반도 북쪽을 점령·지배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 해결은 새로운 문제, 즉 분단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소련 측과 합의하고 양국의 점령에 관한 분계선을 38선으로 설정했다. 왜냐하면 소련의 대일참전 후,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급속하게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5년간 한반도의 점령통치, 1948년 북한 건국 그리고 50년 6월 25일 김일성에 의해 시작된 남침통일과 같은 과정에 매우 깊이 관여한 것은 소련 적군(46년부터 소련군)이었다. 그러나 1945년 말 작성한 소련 외교문서는 일찌감치 미소 점령정책의 차이로 불가피하게 대립이 발생했다고 보았다. 소련 측이 일본 침략자의 군사력 일소, 한반도에서의 일본 영향력 배제, 한반도의 민주적 통일을 목표로 했다면, 미국은 그것과 정반대로 구체제 유지, 일본점령 협력자의 유지를 목표로 했다. 45년 말경에는 이미 미소 사이에 생각의 차이가 명확해졌다.
이후 소련외무성은 12월 20일 몰로토프 외상 이름으로 극비리에 보낸 답장에서, 한반도문제에 대해 합동위원회문제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 소련 측이 미소 군을 48년 초까지 철군 제안한 반면에 미국 측은 유엔대표위원회의 감시 아래서 선거를 제안했다는 것, 이것에 대해 소련 측이 내정간섭이라고 반대했다는 것 등을 보고했다. 이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관계는 더욱 멀어져갔다. (1장 소련 참전으로부터 분단까지) 접기
국제적인 측면에서는 분열국가로 향한 움직임이 점점 멈출 수 없게 진행되었다. 1948년에는 47년 유엔에서 한반도문제의 상정으로 그리고 유엔감시 아래서 총선거를 실시하는 형태로 문제가 첨예화되었다. 특히 북한에 대한 유엔 감시단의 출입을 소련이 거부했다. 유엔은 2월 회의에서 5월 10일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는 문제를 내놓았다. 이어서 3월 31일 유엔총회에서는 미국이 유엔 감시 아래 전국에서 선거 실시를 제안했다. 이것에 대해 소련 측도 유엔이란 장에서 한반도에서의 미국·소련군의 동시철군과 한반도문제는 자국민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것은 거부되었다. 이렇게 하여 5월 10일 한국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 7월 24일 친미파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내각도 8월 5일 발족했다. 이후 1948년 소련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는 유엔 주도 아래 한국에서 행한 선거결과를 거부하고, 대신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와 그 이후 전국선거를 지지하는 시나리오가 승인되었다. 란코프가 말하는 것처럼, 이 조직은 남한에서 유엔 주도의 선거결과는 분열선거라고 계속 부인하면서, 한편으로 북한 주도의 선거는 전국적 선거라고 보았으며, 그것과 동시에 북쪽에서의 독자적인 국가 창설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그 후 북한의 독자적인 국가건설의 흐름이 결정되었다. 1949년 9월 2일 제1회 회의가 개최되고, 8일 헌법을 채택하고,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선언되었다. 그리고 9월 10일 최고인민회의가 열리고, 김일성은 북한인민위원회를 대표하여 ‘전북한의 통일적 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에 권한을 이양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 결과 탄생한 중앙정부는 남북한 인민의 총의에 기초한 것이라고 강변했다[⑤/2/142]. 북측은 형식적으로는 남측을 해방되지 않는 영토로서 남측 인사를 자신들의 정부나 당에 포함시키려 했다. 북한헌법 아래서 통일이 가능하다고 한 이상, 북의 체제를 남한에까지 확대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1948년 9월 북한에서 국가제도형성이 완성되었다. (2장 점령권력으로부터 건국으로) 접기
한국전쟁은 왜 발발(勃發)했는가? 1948년 상대방을 서로 인정하지 않은 채 통일을 과제로 한 남북의 두 정권이 출범했다. 양측의 헌법으로부터 볼 때, 상대 측의 ‘해방’은 합법적이었고 침략이 아니었다. 통일이라는 것은 각자의 지배영역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과 이것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상황에 따라 내전으로 전화하여 동맹관계를 통해 국제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인식되었다.
1948년 9월 성립한 북한을 둘러싸고 그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소련 그리고 점차적으로 중국 내전에서 승리를 하게 된 중국공산당의 영향이 커지면서 새로운 국가 건설이 현실적 과제가 되었다. 소련지도부는 49년 1월 A. 미코얀 정치국원을 마오쩌뚱에게 보내 중국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한 후를 대비했다[⑩-47]. 실제로 이러한 일련의 회담에서 무력통일에 대한 지시가 내려졌다. 러시아 자료에 정통한 A. 만스로프에 따르면,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5월 15일 조선통일에 관한 결정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김일성은 군사적 전술을 그리고 박헌영은

여론과 정치동원을 분담했다. 17일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 소련군 고문 바시리에프 장군과 방문 결과를 이야기했다. 또한 조선인민군의 향후 통일계획이 방어적이라면서 선제공격을 위한 계획을 입안하도록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姜健)과 소련 측 고문에게 요청했다. 소련 본국으로부터도 바시레프스키, 스테멘코 대장의 이름으로 공격계획 입안이 바시리에프에게 요청되었다. 소련인의 손으로 작성된 안은 세 개의 국면으로 되어 있는 1개월 간의 작전계획이었다. 첫째로 38선에서 남측의 북측에 대한 도발, 둘째로 공격에 대한 전면적 반격 그리고 셋째로 ‘3~4일 안에 서울을 점령’하는 전격작전안이었다. (3장 한국전쟁)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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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시모토마이 노부오 (下斗米 伸夫)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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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학 대학원 법학정치학 연구과 수료
현재 호세이대학 법학부 교수
아시히신문사 논설위원, 일본국제정치학회 이사장 역임
러시아 정치, 비교정치 전공
주요 논저
<고르바초프의 시대>, <러시아 현대정치>, <아시아 냉전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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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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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북한의 주체사상과 김일성체제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한반도 냉전에 대한 이해는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고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강조된 냉전에 대한 단순한 해석, 즉 이념과 군사적 대립이라는 이해를 넘어, 어떻게 한반도에서 북한정권이 형성되었으며, 그 이후 북한은 정체성 확립을 위해 어떠한 국내정치의 과정을 경험하였는가? 북한은 국내정치에서는 체제 강화와 주체화를 진행하고, 소련과 중국관계에서는 국내정치에 방해되지 않는 정도에서 협력하였다. 이 과정 속에서 북한은 58년 3월을 정점으로 자신이 원하는 체제를 만들어 갔다.

이 책은 북한 정권의 형성과정에서 구소련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외교사료를 통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구소련과 북한의 관계로부터 북한을 분석하며, 스탈린체제로부터 이식된 체제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연구동향과는 다르게 냉전사관과 수정주의사관을 넘어 새로운 외교문서를 기초로 소련의 강력한 지도와 북한의 저항이라는 동학 속에서 사회주의와는 ‘이질적인 체제’를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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