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춘희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프레시안은 “‘만년 소녀’였던 할머니, 극락왕생하소서”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를 냈다. 아래는 그 부고 기사 중 일부다.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 중 상당수가 과거에 본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당했는지 고발하고 증언하는 데 적극 나서지만, 할머니는 아팠던 과거를 꺼내놓지 않았다. 살을 부대끼며 살다시피 하는 상근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른 할머니들에게서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않는다'며 종종 타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상처가 너무도 깊고 쓰린 것을 알기에, 나눔의 집 식구들은 좀체 마음을 열지 않는 배 할머니를 안쓰러워했다.”
발췌한 대목 말고도 프레시안의 부고 기사는 ‘나눔의집 식구들’의 말을 빌려 배춘희 할머니의 생애를 재구성하고 있다. 마침 최근 배춘희 할머니의 생전 녹취록을 확인할 일이 있었는데, 그 녹취록 속 배춘희 할머니와 프레시안의 부고 기사 속 배춘희 할머니는 완전히 다른 인물 같다.
배춘희 할머니가 자신의 ‘아팠던 과거’를 ‘나눔의집 식구들’에게조차 꺼내놓지 않았던 까닭은, 배춘희 할머니의 이야기는 한국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녹취록 속 배춘희 할머니는 위안부로 동원됐던 만주에서의 생활을 ‘아팠던 과거’로만 얘기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겠지만, 그 당시 시각으로 보자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일본군의 점령지였던 만주에서의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군의 일원으로서 점령지 주민보다 오히려 계급이 높았다. 또 성욕에 굶주린 일본군을 매일 상대해야 했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배춘희 할머니는 그 당시에도 일본어가 능통했고, 중국어까지 가능했다. 그건 배춘희 할머니가 단지 일본군의 성적 소모품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전에 포스팅했던 『함락된 도시의 여자』에서 러시아어가 가능했던 마르타 힐러스가 러시아 장교의 소유물을 자처하면서 러시아 사병들의 무차별 강간으로부터 벗어나고 더 이상 굶주릴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배춘희 할머니는 자신의 지배자와 어느 정도 말이 통했다. 거래가 가능했을 테고, 각종 정보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배춘희 할머니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여성(일본군과 말이 통하지 않았을 조선인 위안부나 중국인 위안부)보다 생존에 유리한 위치(일본인 위안부 정도의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배춘희 할머니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나름 주체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 주체성은 러시아군이 철수하기 전까지 마르타 힐러스가 그랬던 것처럼 온전할 수 없었고, 상당히 제한적이었겠지만. 분명한 건 배춘희 할머니의 과거를 ‘아팠던 과거’로만 기억하려는 욕망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배춘희 할머니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배춘희 할머니는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로서 한국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정권에서든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현실과, 그와 같은 현실 속에서 경제적 지원이라도 받으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정대협의 운동 방향과 나눔의집 운영 방식에도 불만이 많았지만, 그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간혹 드러내더라도 반영되지 않았다). 나눔의집 앞에 세워진 입을 꽉 다문 동상처럼 자신이 결국 피해자라는 정체성만 간직한 비주체적인 존재로 박제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녹취록에서 배춘희 할머니는 하고 싶은 얘기(한국인이라면 불편할 만한 얘기)를 꼭 일본어로 하고 있다. 이를테면 녹취록에서 자주 반복했던 “적은 백만, 나는 혼자” 같은 말은 배춘희 할머니가 말로 하지 않았던(못했던) 많은 말을 대신한다.
배춘희 할머니는 ‘나눔의집 식구들’에게도 꺼내놓지 않았던 속을 박유하 교수에게는 가감 없이 꺼내놨던 것 같다. 앞서 말한 녹취록은 박유하 교수가 당사자 동의하에 생전 대화를 녹음했던 것인데, 박유하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출간 이후 위안부 문제에 관한 당사자의 생각을 알아볼 요량으로 배춘희 할머니뿐만 아니라 여러 위안부 피해자와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이용수 선생한테 밥도 얻어먹고 그랬으나, 그와 같은 만남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정대협과 나눔의집을 통하지 않은 개별적 만남은 제한됐고, 박유하 교수는 어느 순간 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제국의 위안부』 고발 시점이 배춘희 할머니 사망 직후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분히 의도된 고발이었고, 배춘희 할머니는 생전에 그와 같은 불상사를 미리 예견해서 박유하 교수가 자신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할까 봐 박유하 교수의 신변을 줄곧 걱정했다. 뿐만 아니라 산 자들은 망자를 제멋대로 가공하기 일쑤다. 녹취록을 보면 프레시안의 부고 기사 중 아래 대목은 날조에 가까워 보인다.
“뭐든 감추고 속에 쌓아두는 할머니는 물건도 방에 쌓아두길 좋아했다. 내용물을 빼고 남은 빈 상자, 비닐봉지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뒀다. 그래서 할머니의 방은 항상 발 디딜 틈 없이 잡동사니로 가득 찼다. 직원들이 한 번 청소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고 호통을 치곤 했다. 그러나 이날(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할머니의 방 안은 깨끗했다. 온 벽을 다 가릴 정도로 높이 올려졌던 잡동사니 상자들이 모두 사라졌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별안간 '대청소'를 지시한 것.”
배춘희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대청소를 부탁한 적이 없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돼서 병원에 있는 동안 나눔의집 운영진이 당사자 동의 없이 방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치웠던 것 같다. 아직 살아 있는 피해자를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이다. 배춘희 할머니는 그 서운한 감정을 박유하 교수에게 고스란히 전했지만, 나눔의집 운영진에게 눈엣가시나 다름없던 박유하 교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후 박유하 교수는 송사에 휘말리면서 자기 자신도 구제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불과 두 달 전 윤미향-정의연 사태도 있었고, 나눔의집 운영진이 배춘희 할머니의 기부약정서까지 위조해 유산을 가로챈 정황도 드러났다. 박유하 교수는 더 늦기 전에 배춘희 할머니의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심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둘의 대화는 녹음 상태가 좋지 못하고 성주 출신인 배춘희 할머니는 경상도 사투리가 심했다. 박유하 교수는 왜관 출신인 내게 몇몇 대목의 경상도 사투리 해석을 요청했다. 나는 경상도 성주·왜관 지역 사투리 전문가로서 그 요청에 기꺼이 응했지만, 내 귀에도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는 대목이 많았다. 하긴, 나는 요즘 아버지 말도 한 번에 못 알아들어서 두 번씩 되묻곤 한다. 몇 군데 바로잡긴 했는데,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고, 아마도 박유하 교수가 준비 중인 배춘희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던 위안부 피해자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순결한 (강간) 피해자’나 ‘만년 소녀’가 아닌, 하고 싶은 얘기를 우리말로 하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한 사람을 돌아보는 계기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통해 운동의 간판이 되지 못한 비가시화된 위안부 피해자가 어떻게 살다 떠났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의 자존심 앞에 자기 생각을 끝내 말하기 어려웠던 것은 배춘희 할머니뿐만 아니었다. 배춘희 할머니와 함께 나눔의집에 계셨던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는 보상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나마 직계 가족이 없었던 배춘희 할머니는 보상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이었고, 가족이 있는 위안부 피해자는 일본 정부로부터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야 한다는 식이었다. 만일 그들이 그 돈을 원하는 만큼 받아냈다 한들, 그들이 그 돈을 자기 자신을 위해 함부로 썼을까.
“한국은 돈 없으면 형제도 없잖아”라는 배춘희 할머니의 말은 우리가 좇는 이상이(또는 정의가) 그들이 처한 각박한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잘 말해준다. 그들은 오랜 시간 ‘순결한 피해자’로 가공돼야 했고, 위안부 문제가 가시화된 이후에도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다중으로 억압받는 존재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건 비단 위안부 피해자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도 아니고, 과거의 일만도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순결한 피해자’가 아니라며(‘꽃뱀’이라며) 자신의 피해 사실을 부정당하고 있다.
아래 첨부한 이미지는 배춘희 할머니가 생전에 그린 그림이다. 다수의 교양만화를 출간한 전문가로서 아래 그림을 감히 평가하자면 대단한 솜씨다. 다만 누군가 덧붙인 ‘끌려가는 날’이라는 제목은 어처구니없다. 저 그림이 어딜 봐서 ‘끌려가는 날’이라는 걸까. 그림 속 건축물의 형태는 아무래도 중국의 위안소인 것 같고, 그 위안소 앞에는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또는 업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군 장교는 사병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무언가 지시를 받고 있는 사병은 잔뜩 얼어 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중국인 위안부가 강아지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는 자세로 앉아 있다. 어쩌면 중국인 위안부의 엉덩방아는 사병 탓이고, 장교는 그 사병을 꾸짖는 중일 수 있다. 그렇다면 ‘쿠사리 먹는 일본군 쫄병’이 더 적당한 제목 아닐까.
참고로 배춘희 할머니는 친구 ‘봉순이’와 함께 취업 사기 형태로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프레시안의 부고 기사는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끌려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끌려가야만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한계와 비극적 장면을 극대화해서 소비해야만 가까스로 공감하는 연대. 우리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대체 언제까지 이런 기만을 계속할 것인가.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배춘희 할머니뿐만 아니라 모든 위안부 피해자의 있는 그대로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애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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