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5

권용득 - 배춘희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프레시안은 “‘만년 소녀’였던 할머니, 극락왕생하소서”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를... | Facebook

권용득 - 배춘희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프레시안은 “‘만년 소녀’였던 할머니, 극락왕생하소서”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를... | Facebook

배춘희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프레시안은 “‘만년 소녀’였던 할머니, 극락왕생하소서”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를 냈다. 아래는 그 부고 기사 중 일부다.
“나눔의 집에 계신 할머니 중 상당수가 과거에 본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당했는지 고발하고 증언하는 데 적극 나서지만, 할머니는 아팠던 과거를 꺼내놓지 않았다. 살을 부대끼며 살다시피 하는 상근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른 할머니들에게서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않는다'며 종종 타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상처가 너무도 깊고 쓰린 것을 알기에, 나눔의 집 식구들은 좀체 마음을 열지 않는 배 할머니를 안쓰러워했다.”
발췌한 대목 말고도 프레시안의 부고 기사는 ‘나눔의집 식구들’의 말을 빌려 배춘희 할머니의 생애를 재구성하고 있다. 마침 최근 배춘희 할머니의 생전 녹취록을 확인할 일이 있었는데, 그 녹취록 속 배춘희 할머니와 프레시안의 부고 기사 속 배춘희 할머니는 완전히 다른 인물 같다.
배춘희 할머니가 자신의 ‘아팠던 과거’를 ‘나눔의집 식구들’에게조차 꺼내놓지 않았던 까닭은, 배춘희 할머니의 이야기는 한국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녹취록 속 배춘희 할머니는 위안부로 동원됐던 만주에서의 생활을 ‘아팠던 과거’로만 얘기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겠지만, 그 당시 시각으로 보자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일본군의 점령지였던 만주에서의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군의 일원으로서 점령지 주민보다 오히려 계급이 높았다. 또 성욕에 굶주린 일본군을 매일 상대해야 했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배춘희 할머니는 그 당시에도 일본어가 능통했고, 중국어까지 가능했다. 그건 배춘희 할머니가 단지 일본군의 성적 소모품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전에 포스팅했던 『함락된 도시의 여자』에서 러시아어가 가능했던 마르타 힐러스가 러시아 장교의 소유물을 자처하면서 러시아 사병들의 무차별 강간으로부터 벗어나고 더 이상 굶주릴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배춘희 할머니는 자신의 지배자와 어느 정도 말이 통했다. 거래가 가능했을 테고, 각종 정보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배춘희 할머니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여성(일본군과 말이 통하지 않았을 조선인 위안부나 중국인 위안부)보다 생존에 유리한 위치(일본인 위안부 정도의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배춘희 할머니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나름 주체적으로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 주체성은 러시아군이 철수하기 전까지 마르타 힐러스가 그랬던 것처럼 온전할 수 없었고, 상당히 제한적이었겠지만. 분명한 건 배춘희 할머니의 과거를 ‘아팠던 과거’로만 기억하려는 욕망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배춘희 할머니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배춘희 할머니는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로서 한국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소비되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정권에서든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현실과, 그와 같은 현실 속에서 경제적 지원이라도 받으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정대협의 운동 방향과 나눔의집 운영 방식에도 불만이 많았지만, 그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간혹 드러내더라도 반영되지 않았다). 나눔의집 앞에 세워진 입을 꽉 다문 동상처럼 자신이 결국 피해자라는 정체성만 간직한 비주체적인 존재로 박제될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녹취록에서 배춘희 할머니는 하고 싶은 얘기(한국인이라면 불편할 만한 얘기)를 꼭 일본어로 하고 있다. 이를테면 녹취록에서 자주 반복했던 “적은 백만, 나는 혼자” 같은 말은 배춘희 할머니가 말로 하지 않았던(못했던) 많은 말을 대신한다.
배춘희 할머니는 ‘나눔의집 식구들’에게도 꺼내놓지 않았던 속을 박유하 교수에게는 가감 없이 꺼내놨던 것 같다. 앞서 말한 녹취록은 박유하 교수가 당사자 동의하에 생전 대화를 녹음했던 것인데, 박유하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 출간 이후 위안부 문제에 관한 당사자의 생각을 알아볼 요량으로 배춘희 할머니뿐만 아니라 여러 위안부 피해자와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이용수 선생한테 밥도 얻어먹고 그랬으나, 그와 같은 만남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정대협과 나눔의집을 통하지 않은 개별적 만남은 제한됐고, 박유하 교수는 어느 순간 그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제국의 위안부』 고발 시점이 배춘희 할머니 사망 직후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분히 의도된 고발이었고, 배춘희 할머니는 생전에 그와 같은 불상사를 미리 예견해서 박유하 교수가 자신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할까 봐 박유하 교수의 신변을 줄곧 걱정했다. 뿐만 아니라 산 자들은 망자를 제멋대로 가공하기 일쑤다. 녹취록을 보면 프레시안의 부고 기사 중 아래 대목은 날조에 가까워 보인다.
“뭐든 감추고 속에 쌓아두는 할머니는 물건도 방에 쌓아두길 좋아했다. 내용물을 빼고 남은 빈 상자, 비닐봉지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뒀다. 그래서 할머니의 방은 항상 발 디딜 틈 없이 잡동사니로 가득 찼다. 직원들이 한 번 청소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건들지 말라고 호통을 치곤 했다. 그러나 이날(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할머니의 방 안은 깨끗했다. 온 벽을 다 가릴 정도로 높이 올려졌던 잡동사니 상자들이 모두 사라졌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별안간 '대청소'를 지시한 것.”
배춘희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대청소를 부탁한 적이 없다고 한다. 병세가 악화돼서 병원에 있는 동안 나눔의집 운영진이 당사자 동의 없이 방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치웠던 것 같다. 아직 살아 있는 피해자를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이다. 배춘희 할머니는 그 서운한 감정을 박유하 교수에게 고스란히 전했지만, 나눔의집 운영진에게 눈엣가시나 다름없던 박유하 교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후 박유하 교수는 송사에 휘말리면서 자기 자신도 구제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불과 두 달 전 윤미향-정의연 사태도 있었고, 나눔의집 운영진이 배춘희 할머니의 기부약정서까지 위조해 유산을 가로챈 정황도 드러났다. 박유하 교수는 더 늦기 전에 배춘희 할머니의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심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둘의 대화는 녹음 상태가 좋지 못하고 성주 출신인 배춘희 할머니는 경상도 사투리가 심했다. 박유하 교수는 왜관 출신인 내게 몇몇 대목의 경상도 사투리 해석을 요청했다. 나는 경상도 성주·왜관 지역 사투리 전문가로서 그 요청에 기꺼이 응했지만, 내 귀에도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는 대목이 많았다. 하긴, 나는 요즘 아버지 말도 한 번에 못 알아들어서 두 번씩 되묻곤 한다. 몇 군데 바로잡긴 했는데,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고, 아마도 박유하 교수가 준비 중인 배춘희 할머니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던 위안부 피해자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순결한 (강간) 피해자’나 ‘만년 소녀’가 아닌, 하고 싶은 얘기를 우리말로 하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한 사람을 돌아보는 계기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통해 운동의 간판이 되지 못한 비가시화된 위안부 피해자가 어떻게 살다 떠났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의 자존심 앞에 자기 생각을 끝내 말하기 어려웠던 것은 배춘희 할머니뿐만 아니었다. 배춘희 할머니와 함께 나눔의집에 계셨던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는 보상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나마 직계 가족이 없었던 배춘희 할머니는 보상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이었고, 가족이 있는 위안부 피해자는 일본 정부로부터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야 한다는 식이었다. 만일 그들이 그 돈을 원하는 만큼 받아냈다 한들, 그들이 그 돈을 자기 자신을 위해 함부로 썼을까.
“한국은 돈 없으면 형제도 없잖아”라는 배춘희 할머니의 말은 우리가 좇는 이상이(또는 정의가) 그들이 처한 각박한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잘 말해준다. 그들은 오랜 시간 ‘순결한 피해자’로 가공돼야 했고, 위안부 문제가 가시화된 이후에도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다중으로 억압받는 존재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건 비단 위안부 피해자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도 아니고, 과거의 일만도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순결한 피해자’가 아니라며(‘꽃뱀’이라며) 자신의 피해 사실을 부정당하고 있다.
아래 첨부한 이미지는 배춘희 할머니가 생전에 그린 그림이다. 다수의 교양만화를 출간한 전문가로서 아래 그림을 감히 평가하자면 대단한 솜씨다. 다만 누군가 덧붙인 ‘끌려가는 날’이라는 제목은 어처구니없다. 저 그림이 어딜 봐서 ‘끌려가는 날’이라는 걸까. 그림 속 건축물의 형태는 아무래도 중국의 위안소인 것 같고, 그 위안소 앞에는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또는 업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군 장교는 사병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다. 무언가 지시를 받고 있는 사병은 잔뜩 얼어 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중국인 위안부가 강아지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는 자세로 앉아 있다. 어쩌면 중국인 위안부의 엉덩방아는 사병 탓이고, 장교는 그 사병을 꾸짖는 중일 수 있다. 그렇다면 ‘쿠사리 먹는 일본군 쫄병’이 더 적당한 제목 아닐까.
참고로 배춘희 할머니는 친구 ‘봉순이’와 함께 취업 사기 형태로 위안부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프레시안의 부고 기사는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끌려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끌려가야만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한계와 비극적 장면을 극대화해서 소비해야만 가까스로 공감하는 연대. 우리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대체 언제까지 이런 기만을 계속할 것인가.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배춘희 할머니뿐만 아니라 모든 위안부 피해자의 있는 그대로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애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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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박정미, Park Yuha and 23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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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인식
    잘 읽었습니다.
  • 양승인
    배춘희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많이 외로우셨을 것 같습니다. 춘희라는 고인의 아름다운 이름이 La Traviata(길을 잘못 든 여자)를 연상시키며, 어느 순간에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삶을 살고 가셨던 건 아니었는지 마음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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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rk Yuha
      양승인 네. 이 분은 위안소에서도 일본 이름 쓰지 않고 이 이름을 쓰셨다네요.
      그런데다 스님이 될 사주였단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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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용득
      양승인 네. 걍 사투리 번역해주면 되는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듣다가 혼쭐났습니다. 듣는 내내 괴롭더군요. 반면 대단히 유머러스한 분이셔서 웃긴 상황이 아닌데 웃겨서 혼쭐나기도 했고요.(특히 주변에 다른 할머니 디스할 때 너무 웃겼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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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용득
      박유하 신실한 불교 신자신데, 땡중들한테 뒤통수 맞으시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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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rk Yuha
    왜관어 전문가님, 고생하셨고 감사했어요.^^ 아마 배할머니도 기뻐하셨을 겁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젊은청년이(당시 할머니 나이 반도 안되는!)다름 아닌 고향 사람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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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rk Yuha
      아닌게 아니라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록 굉장히 재밌는 그림이네요.
    • Park Yuha
      원본을 한번 보고 싶어지는.
    • 권용득
      박유하 선생님, 요즘 마흔세짤은 영포티꼰대예요. 어디 가서 젊은 청년 행세하다 욕만 푸짐하게 먹습니다. 그러나 배춘희 할머니 입장에서는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한 애기일 테니까...
      그리고 그림은 아마 누군가 도와줬을 거예요. 심리 치료 차원의 일환이었을 텐데, 누군가 도와줬다 하더라도 대단한 솜씨입니다. 저보다 훨씬 잘 그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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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ark Yuha
      권용득 전에 본 적은 있었는데 다시 찬찬히 보니 흥미로워요. 생전에 좀 여쭤 볼걸.
  • Chee-Kwan Kim
    그림도 그리셨군요. 녹취록만 보고는 강단있고 지적인 분이라 생각했는데, 그림은 파스텔톤의 서정적인 풍이네요. 내면에 다양한 층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셨던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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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용득
      네. 노래도 잘 부르시고 욕도 잘 하시고... 녹취록 듣다 옆에 계신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종종 있었어요. 제 외할머니도 욕 잘 하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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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an Shin
    나눔의 집 전시에 가서 이 그림을 본 적이 있어요. 애 한테 그려준 제 그림보다 훨~씬 더 잘그리셔서 놀라면서 봤지요. 이 예술적 기질 무엇?
    • 권용득
      네. 배춘희 할머니 말고도 저보다 훠얼-씬 잘 그리는 분들 종종 계시더군요. 갑자기 자괴감이 드네요...
  • 오지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권용득
      좋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Park Yuha
    참, 청소 관련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 부분도 녹음이 안 좋아서.
    하지만 작고 3주일이나 전에 짐을 빼 간 건 사실. 누가 시켰든, 익숙한 물건들조차 옆에 없는 황량한 방에서 홀로 세상을 떠나야 했던 마지막 날들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어요..
    • 권용득
      그래서 '보인다', '같다' 등으로 종결 어미를 모두 수정하였습니다. 존 볼턴처럼 확신에 가득찬 단정적인 어조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나저나 프레시안 기사는 아무래도 '나눔의 집 식구들(할머니들을 제외한)' 말만 받아쓰고 사실 관계 취재는 없었던 것 같네요. '식구들'이란 말도 그 어느 때보다 폭력적으로 다가오고요.
  • Younsik Woo
    비극적 장면을 소비하는 연대란데에 너무 공감되네요. 이제는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좀 연대했으면.
    • 권용득
      비극적 장면뿐만 아니라 잔뜩 미화되고 부풀려진 영웅서사... 부채의식을 자극하는 낡은 말과 구호들... 아주 진절머리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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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cknim Jang
    박교수님 포스팅을 읽어가면서
    위안부 문제의 실체에 한발씩 다가가는 느낌이네요
    모두 강제로 끌려가지는 않았을 거라는,
    일종의 취업사기도 있었을 것이고,
    다양한 동기나 이유가 있었겠지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좀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접근과 인식이 필요합니다.
    미래의 건강한 한.일관계를 위해서라도 말이죠.
    • 권용득
      위안부로 동원된 조선인 여성은 거의 모두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 그들에게 '다양한 동기나 이유'가 있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취업 사기 형태로 동원된 경우에도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자세히 몰랐고, 위안부로 동원된 이후에는 선택권이 박탈당한 상태였으니까요. 일본군이 자신들의 전쟁에 여성을 필요로 한 동기는 점령지에서의 집단강간 예방과 병력 손실 예방(또는 사기 충전) 차원이었고요. 따라서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이 그 약한 고리(가난한 여성의 낮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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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철휘
    왜관어 통번역에는 샤론 권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 권용득
      외국어 늘려면 진짜 일상 속에서 자주 쓰는 것 말고는 별 도리가 없는 것 같아요. 오랜만 본토 발음 알아듣기 너무 어렵더라고요.
    • 박철휘
      권용득 토(착)익이나 토(착)플 시험 점수같은걸 취업시장에서 봐야합니다. 내수 소비자들이랑도 소통이 어려운데 글로벌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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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향숙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송문숙
    공유합니다.
  • Lee Jaewoo
    그러고 보니 고미카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에서도 위안부 여성들에게 “그래도 당신네들은 군인들이랑 같이 있어서 우리보다 사정은 좋았잖냐?”고 욕하는 민간인들이 나오는 대목이 있었네요
    • 권용득
      이재우 (Lee Jaewoo) 말씀하신 대목은 배봉기 할머니 사례를 기록한 가와다 후미코의 <빨간 기와집>에도 나오더군요.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 공습 이후 일본군이 식량을 통제하면서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나, 일본군으로부터 옥쇄를 당하기도 했다는 얘기 등등. 그런데 그건 해방 후 미군을 상대하던 여성을 향한 혐오와, 또 지금도 여전한 성노동자를 향한 혐오와 아주 무관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책은 기회되면 찾아볼게요. 고맙습니다.
  • 오진우
    오래전에 읽어서 몇권인지는 모르지만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들'에도 일본군 위안부가 된 경로가 여러가지였습니다.
    취업사기도 강제로 보고 증언집 제목을 '강제로 끌려간'이라고 표현한거죠. 저는 정대협 관계자들이 취업사기등도 녹취해서 기록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제가 본게 박유하씨가 녹취한 거였나요?
  • 오진우
    지금 목차만 봐도 1권에 방직공장에 간다더니/오오목, 근로정신대에서 위안부로/강덕경,
    2권에 주인과 관리인에게 맞아서 귀가 멀었다, 공장에 가서 돈을 벌려고, 5권에 식량을 벌려고 따라 나섰다가가 보이고 아버지가 팔았다는 것도 있는데 왜 증언집을 잘못썼다는거죠?
    배춘희 할머니 증언은 정대협에서 책에 쓴 할머니 의도와 다른 내용이 있고 박유하씨가 녹음한 다른 내용이 있는건가요?
    • 권용득
      오진우 본문에서 말씀드린 배춘희 할머니 녹취록은 증언집과 별개입니다. 증언집은 과거 정대협이 주도해서 발간한 것이고, 배춘희 할머니 녹취록은 상술한 것처럼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 출간 직후 위안부 문제에 관한 당사자 의견을 청취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증언집이 피해 서사 중심의 단편적인 정보라면, 녹취록은 '개인사'에 가깝습니다. 다만 박유하 교수가 그 녹취록을 어떤 방식으로 공개할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녹취록이 공개되면 소식 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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