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01

이우 - 나무위키

이우 - 나무위키

이우

최근 수정 시각: 

1조선 고종의 9남 이우2. 대한제국 의친왕의 차남 이우
2.1. 생애2.2. 유언비어
2.2.1. 독립운동 루머2.2.2. 독립운동가 딸과의 약혼 루머
2.3. 기타


1. 조선 고종의 9남 이우[편집]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1/%EC%9D%B4%EC%9A%B0%ED%99%A9%EC%9E%90.jpg
휘: 우(堣)[1]
부황: 고종태황제
모친: 보현당 귀인 정씨
생몰:1915 ~ 1916

보현당 귀인 정씨 소생이며 고종황제의 8남. 동명이인인 의친왕의 차남 이우(李鍝)의 숙부가 된다. 1915년 8월 20일 오후 6시에 덕수궁 보현당에서 태어났다. 고종은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이우를 데려와 곁에 두고 키웠다. 1916년 7월 25일에 사망하였고, 7월 29일에 장사지냈다.

2. 대한제국 의친왕의 차남 이우[편집]

4대 흥영군[2] 이우
5대 이청[3]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9/Prince_Yi_Wu_01.jpg
흥영군(興永君)[4]
우(鍝)
염석(念石) / 상운(尙雲)
박찬주
이청(李淸)[5], 이종(李淙)[6]

2.1. 생애[편집]

의친왕의 차남으로, 조선의 황족[7]이다. 유약한 성격이었고 일제에 순종적이었던 형 이건과 달리[8], 이우는 일제에 반항적이었고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기 때문에 의친왕이 총애했다. 1917년 흥선대원군의 장손 영선군의 양자가 되었기에, 일제 때 왕가의 일원으로서는 양아버지 이준용이 갖고 있던 공(公)의 지위를 계승했다. 일본 정부가 조선귀족들에게 수여한 오등작 제도의 공작이 아니라 별도의 계급이다. 그러므로 이우는 '공작'이 아니라 그냥 '공'이다. 이우를 공작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잘못된 호칭이다. 대한제국의 직계는 왕족(王族)으로, 방계를 공족(公族)으로 분류되었다. 이들의 신분상 위치는 일본 황족에 준하는 대우를 약속받았지만 대략 황족과 화족의 중간에 위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왕공족 참고. 따라서 친아버지와 같은 위치가 된 셈이다.

어렸을 때는 '이우 공자'로 불렸고, 운현궁에 양자로 입적하여 공위를 계승한 뒤에는 '이우 공(公) 전하'로 불렸다. 생전에 왕자로 불린 적은 없다. 의친왕 계열의 이복 여자 형제 사이에서는 '운현궁 오라버니'로 불렸다. 사망 이후에는 '흥영군'이라는 군호가 추봉됐지만 이미 조선왕조가 망한 때이기 때문에 나라에서 내려준 공식적인 시호가 아닌 개인이 올린 사시(私諡)이다. 언론 등에서 통칭 '황손 이우'로 불린다.

일제가 그를 일본의 황족과 결혼시키려 하자, 선수를 쳐서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와의 결혼을 확정한다. 일본이 혼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이우 쪽에서 박찬주와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다. 이우는 어떻게든 조선인과 결혼하고자 했고, 친아버지 의친왕은 친일파라도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보다야 낫다고 봤기에 성사된 약혼이라고 한다. 일본은 크게 화를 내고 약혼을 깨뜨리려고 했지만, 박영효가 겨우 일제를 달래고 설득시켰기 때문에 무사히 결혼했다고 한다. 결혼 전에 한국과 일본에서 몰래 데이트를 하거나 연애편지도 주고 받았다. 박찬주와의 사이에서 이청, 이종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이청은 이우의 사망 후에 일시적으로 공위를 계승하여 '이청 공 전하'로 불리었으며, 미국 마케트 대학교를 졸업하고, 설계사무소의 엔지니어로 근무하였으며, 귀국 후에 석파학술연구원을 설립하여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 작업을 하고 있다. 이종은 브라운대 유학 중 1966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http://img.khan.co.kr/news/2006/09/19/6i2022b.jpg
http://img.yonhapnews.co.kr/etc/inner/KR/2012/11/15/AKR20121115087600005_02_i.jpg
부인 박찬주와 찍은 사진

당시 대한제국의 황족들이 그랬듯이 선택의 여지없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육사 45기로 졸업한 이우는 포병병과 교육을 1년간 받고 1936년 도쿄 주둔 제8포병연대에서 일본군 복무를 시작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에 소속 연대가 만주로 파견되어 1년간 근무했으며, 1938년 대위 진급 후 포병학교 교관으로 전임했다가 동년 12월 육대에 입학했다. 이후 1941년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황족 신분으로 말레이, 필리핀 등을 순시했다. 1944년 3월에 중국 산시 성 타이위안으로 전출되어 일본군의 만주 일대 후방경계부대였던 제1군 사령부 참모장교로 1945년 5월까지 근무했다.

이후 1945년 6월 일본 본토결전에 대비해서 히로시마 제2총군[9] 교육 참모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일단 부임 전 휴가차 들른 서울에서 갑자기 병이 나고, 그가 병에서 회복되자 이번에는 아들이 갑자기 병이 나는 바람에 이를 돌보느라 부임을 한 달 늦추어 7월 초순에야 히로시마에 부임했다.[10] 이우는 히로시마로 전출되기 직전 운현궁과 사동궁 식구들 앞에서 일본으로 이제 들어가면 본인은 죽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자기 손으로 처와 두 아들을 모두 죽이고 가겠다고 말하였고, 동생들과 사동궁, 운현궁 식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를 말렸다고 이우의 둘째 여동생이 증언하였다.[11]

그리고 이우가 히로시마 주둔 제2총군 교육 참모로 부임하고 한 달 뒤인 1945년 8월 6일, 이우는 정시에 기마헌병 2명의 호위를 받으며 애마를 타고 출근 중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폭심지로부터 700m 떨어진 곳에서 피폭했다. 당시 무좀 때문에 이우와 함께 말을 탈 수 없어서 이우의 관용차를 타고 한 시간 먼저 출근해 있었던 시종무관 요시나리 소좌[12]가 핵공격 사실을 알고 서둘러 구조대를 파견했지만, 이우가 발견된 것은 폭격으로부터 8시간이 지난 오후 4시 경이었다. 발견 당시 얼굴에서 가슴까지 화상을 입어 피부가 문드러져 있었으며 윗옷도 날아간 상태였다. 서둘러 인접 해군병원[13]으로 후송하자 얼마 가지 않아 의식을 회복했다. 그를 진찰한 해군 군의관은 외상이 없다고 진단했고 이우 본인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라고 기뻐했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극심한 피폭 증상[14]을 보인 후 피폭 다음날인 8월 7일 오전 5시경 사망하였다. 독살설은 인터넷상에 떠도는 설일 뿐 공식적인 이우의 사인은 피폭사다. [15]
http://img.hani.co.kr/section-kisa/2007/05/03/02102400012007050316_1.jpg
1945년 8월 9일자 매일신보의 사망 기사

일제의 패망 직후 시신은 1945년 8월에 서울 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흥선대원군 묘역인 흥원에 있다.[16] 흩어져 조성되어 있던 운현궁 일가의 묘를 파주에서 천봉되어 온 흥선대원군 묘역 옆에 모아 납골묘를 조성하면서 이우의 묘는 화장되었다. 묘에 있던 비석을 비롯한 석물들은 2004년에 서울 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박물관 경내에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 경내에 전시되어 있는 이우의 신도비는 아무런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백비(白碑)인데 이우의 사망 당시 사회적 혼란상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1959년에 야스쿠니 신사에서 멋대로 영새부에 이름을 올렸다. 충공깽. 이건 뭐... 답이 안 나온다.

이우의 장남 이청이 직접 연재한 회고록을 보면 이우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링크 당시에도 좋게 평가된 외모이고[17], 적어도 현재 기준으로도 뛰어난 외모로, 현대 21세기 인터넷 상에서 "얼짱 황족"으로 유명해져 뉴스에 실렸을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 이를 계기로 한때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관심이 반짝 증가하였을 수준. 

운현궁 오라버니라는 제목의 연극 작품도 있었고, 영화 덕혜옹주에서는 고수가 연기했다. 이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양판소로 황자 이우라는 것이 있는데, 역대급의 망작이다(...) 최근 조아라에서 이우공을 주인공으로 하는 운현궁의 주인이라는 제목의 대체역사소설이 연재되고 있다.

이우 사후에 운현궁이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판명되어 장남 이청 명의로 사유화 되자, 이승만이 여길 경무대로 쓰지 못하는 게 아쉽다며 그 대가로 이우의 둘째 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요구했다. 다행히 이승만의 양자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출처

2.2. 유언비어[편집]

2.2.1. 독립운동 루머[편집]

https://blogger.googleusercontent.com/img/b/R29vZ2xl/AVvXsEig6_15vjPtVdpdGruMJWDjs4AnwH0tGKHQForWsIfXU9O3Rv1OGv0Bm5ycfjxHufB_9qnMg722Y6WnpGuE4YwsoreZ6qsX8paPQUxliCxf2PYDb5RQ4P7Y9fudwTJIhRWD5cbb2fy6kGge/s320/an.png
정범준, 《제국의 후예들》, 491쪽.
http://www.minjokcorea.co.kr/imgdata/minjokcorea_co_kr/201204/201204153046335.jpg
이우가 했다는 말은 사실 의친왕의 친서...
이우가 정신적으로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던 건 맞지만 구체적으로 행동한 건 없다
- 송우혜 (마지막 황태자 저자) 기사
이우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설이 나오는 건,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가 아버지 의친왕보다 더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됐다면 어땠을까라는 대중의 바람이 작용한 것이다
- 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한국근대사) 기사
이우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직접적인 물증이나 증거는 없다.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증거 역시 하나도 없다. 그런 거 없다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지원했었을 것이라는 '~ 카더라' 식 추측성 주장만이 있을 뿐이다. 이우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를 찾은 사람은 그 자료를 즉시 국가보훈처로 보내자 (...) 

이우가 중국 태원에서 3년간 근무하면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상에 퍼져있지만 실제로 중국에서 근무한 기간은 1년이다. 또한 이우가 일본군에서 얻은 정보를 전해주었다고 주장되는 조선의용군은 이우가 중국으로 오기도 전에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 태원을 떠나 중국 내륙 지방인 연안으로 이미 이동하고 없었다. 결국 근무 시기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체가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본군의 도로 건설로 피해를 보게된 조선인들을 위해 일본군 장교에게 총을 들이댔다는 이야기도 출처가 없는 검증되지 않은 일화이다. 이우가 말했다는 '독립한 조선은 민국이 되어야 된다' 라는 얘기는 이우의 친아버지 의친왕이 한 말이다. 의친왕이 임시정부에 보낸 편지에서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한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한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이야기가 이우가 한 말로 둔갑한 것이다.

2.2.2. 독립운동가 딸과의 약혼 루머[편집]

파일:attachment/이우/Janggang.jpg
정정화, 《녹두꽃》, 105 ~ 106쪽.

독립운동가의 딸과 약혼한 사이였다는 이야기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안천의 《황실은 살아있다》에서 이우가 독립운동가 유동열의 숨겨진(?) 딸 유정순과 정혼하여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이초남이라는 아들을 두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유정순이 이우와 약혼한 사이였다는 이야기는 이우의 숨겨진(?) 아들로 등장하는 이초남의 주장이 유일하고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유정순이 실제로 유동열의 딸인지조차 불분명하다. 우리황실사랑회와 같은 황실복원운동에 관심 있는 단체에서는 이초남의 주장을 근거 없는 이야기로 보고 있으며 《황실은 살아있다》는 역사서가 아닌 소설로 본다. 

안천과 이초남이 주장하는 이우와 유정순이 혼담이 있었고, 이우가 독립운동자금을 유정순에게 건네주었다는 주장은 김가진의 며느리 정정화가 1987년 출판한 《녹두꽃》에 나오는 이야기와 유사하다(《황실은 살아있다》는 1994년에 출판되었다). 정정화는 단신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고 이를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으며, 그의 시누이인 김가진의 딸 김영원이 의친왕 이강의 아들과 혼담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영친왕의 약혼자였다가 파혼당한 후 독립운동에 투신한 민갑완의 이야기와도 매우 유사한데 민갑완에 관련된 기록은 수십 건이 남겨져서 현재도 전해오지만 유정순에 관한 기록은 단 한 건도 없다. 2010년 5월에 《주간동아》는 이초남의 주장이 DNA 검사 결과 거짓으로 밝혀졌고, 행방이 묘연한 상태라고 보도하였다. 2010년 6월에 이초남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2005년 이후 ‘이초남은 가짜’라고 언론 등에 발표하였다며 고소장을 접수하였으나 스스로 소장을 취하하였다.[18]

오히려 이우가 김가진의 딸과 혼담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혼담이 오간 것이 확실히 이우인지는 불분명하다(이우 밑으로도 의친왕의 아들이 많다. 공식적인 의친왕의 자녀는 12남 9녀). 조선귀족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임시정부에 망명하였던 김가진은 의친왕과 친분이 있었고,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키려는 사건에 가담하기도 하였는데 김가진의 며느리 정정화는 《녹두꽃》에서 "시아버님은 당시 의친왕과 친근한 사이였으며, 사돈까지 맺기로 약속된 관계였다. 시누이 영원은 한때 의친왕의 둘째 아들(몇째 아들인지 확실하지가 않다)과 약혼했던 사이였는데, 의친왕의 상해 망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혼사가 깨진 것은 어쩌면 일본인들의 압력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회고하였으며, 김가진의 손자 김자동의 인터뷰에 따르면 "나라가 망한 후에 의친왕과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나라 걱정을 하였고 친분이 있었지요. 의친왕의 아들이 많죠. 어떤 아들인지는 모르겠는데 의친왕 아들하고 작은 고모하고 약혼까지 했대요."라고 인터뷰한 내용은 있다.

2.3. 기타[편집]

  • 슈타인호프의 대체역사소설 '내가 히틀러라니'에서는 사실상 후반부 주인공.
    히틀러에 빙의한 주인공이 광복군을 도와주라고 보낸 군사고문 오토 슈코르체니와 한국광복군 요원들에게 구출을 받아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서는데, 전선에서 조선인 병사를 회유시키는 등, 광복군 내에서 입지를 키워가는 활약을 보이다가 아키히토 황태자를 납치(!)하여 조선총독부와 조선군과 협상하여 해방을 이뤄낸다. 소설에서는 히틀러(주인공)가 실제 역사와 달리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에 선전포고하지 않고 도리어 일본군 정보를 미국에 적극적으로 넘겨줘서[19] 안 그래도 이겼을 싸움이었던 전황이 현실 역사 이상으로 미국에 유리하게 돌아갔고, 결정적으로 핵탄두 개발이 아직 완료되지 않아서(...) 이 시점의 일본은 몰락 작전이 진행되면서 개망하는 도중이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재한 일본인들이 조선에 남았고 심지어 조선 주둔 일본군의 경우는 혈서까지 써서 새로 창설되는 한국 국방군에 들어간다.(...) 한반도를 무혈 접수하면서 큰 희생을 줄이게 된 미군은 이우에게 경제 및 정치적인 지원을 하였고, 주인공이 있는 독일쪽에서도 본격적으로 군사장비를 원조하면서 한국군이 상당히 독빠스럽게 변해간다.[20]
    하지만 임정이나 광복군이 들러리가 되는 건 실제 역사와 그리 다르지 않으며,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영향력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정치적인 욕심을 감추지 않은 이우는 한국의 총통으로 집권한다. 재집권도 문제 없었다지만, 이후 삐리하게 돌아갔다는 언급이 있는 걸 봐서는 실제 역사상의 이승만 + 박정희 포지션으로, 독재가 이어지면서 결말이 별로 좋지 않은 듯...[21]
    주인공과 이우 때문에 소설 속의 한국은 분단 국가는 아니지만, 어느 면에서는 분단 국가보다 못한 국가가 되어버렸다. 의병 제대 같은 거 없다. 의가사 제대도 없다. 아프거나 집안에 일이 생기면 일단 군복무를 중지하고 귀가시켰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남은 복무기간동안 재입대해야 하며, 뷰티풀 군바리처럼 여성징병제도 시행 중이다. 분단 국가가 아니므로 최전방은 당연히 두만강-압록강이다.
  • 예전부터 이우 왕자가 엑소의 수호를 닮았다는 이야기가 많았고, 그쪽으로도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엑소의 콘서트에서 소속사가 상단의 이우왕자 사진과 수호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콘서트에 활용했는데, 역사적 인물을 함부로 사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논란이 있기도 하였다.

[1] 고종의 아들들 중 이름을 하사받은 선(墡)척(坧)강(堈)은(垠)육(堉)우(堣)는 모두 휘에 흙 토(土)변을 공유한다. 대개 같은 왕의 아들들은 이름자에 같은 부수를 공유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고종의 사가(私家) 일원인 흥선대원군과 그 형제들의 손자 이름도 항렬자를 제외한 이름 글자에 흙 토(土)변이나 흙 토가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李鎔), 흥완군의 손자 이달용(李鎔)과 이규용(李鎔), 그리고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李鎔),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鎔)과 이문용(李𪣢鎔).[2] 공식 군호가 아닌 대한제국 황실과 일본의 패망 이후에 붙인 사시이다.[3] 실제로 운현궁을 소유하며 그 곳에서 거주했던 마지막 주인. 현재 운현궁은 서울특별시에서 관리하고 있다.[4] 사망후 받은 군호. 다만 조선왕조가 망한 이후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시호가 아니다.[5] 1936년 4월 23일 ~ . 아버지 이우의 사망 이후 일시적으로 '이청 공 전하'의 경칭을 받은 적이 있다. 즉 일제강점기 정식 '왕공족'이었던 사람 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인물. 경기중과 경기고를 졸업하여 위스콘신 주 밀워키에 위치한 마케트 대학교와 드폴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졸업한 후 미국에서 생활하다 귀국하여 석파학술연구원을 설립,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여담으로 아버지 흥영군 이우를 그닥 닮지 않았다.[6] 1940년 11월 9일 ~ 1966년 12월 25일.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여 브라운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참고로 1962년 덕혜옹주가 일본에서 귀국할때 동행하였다. 여담으로 형과 달리 아버지와 판박이었다.[7] 의친왕의 서자들 중 적통으로 인정받은 자녀는 장남 이건과 차남 이우 둘 뿐이다. 일본이 이 둘만 의친왕의 아들로 인정했기 때문(의친왕에겐 적자가 없다). 언론에 가장 잘 알려진 황족 이석 씨도 방계다.[8] 광복 후 이건은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한다.[9] 현대의 집단군 사령부 수준에 해당한다. 이는 타국의 군편제와는 다른 일본군의 골치 아픈 편제개념 때문에 벌어지는 경우로 실제로는 집단군 같은 개념이 아니라 전구 사령부 개념에 가깝다. 데라우치 히사이치 원수가 맡았던 남방 군이 대표적 예이며, 남방군은 필리핀, 미얀마, 타이를 포함한 동남아 전역을 맡았다. 그 외에 군 집단은 방면군, 야전군은 군으로 불렀다. 일본군은 군단 단위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 부르며 실제로는 방면군은 야전군, 군은 군단 단위로 취급하며 해외의 번역명도 그런 추세이다.[10] 당시 그를 인터뷰한 언론인 김을한이 전후에 출간한 회고록에 의하면, 어차피 일본은 망할 것이 확실하고 일본 본토는 폭격 대상이 될 게 뻔하므로 괜히 사지로 들어가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자신과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조선에 잔류하려 한 것이라고 한다. 이 회고록 이외에도 이 시기에 근무지를 제2총군이 아닌 조선주차군 사령부로 바꾸어 달라는 청원을 여러 차례 제출했다는 일본군 관련자들의 회고가 다수 존재한다.[11] 이상현 작가의 《조선의 낙조》에서 증언한 내용http://www.youtube.com/watch?v=doE4Mdxwshs[12] 요시나리 히로시(吉成弘). 그는 이우가 사망한 것을 알고 그날 오후 늦게 병원에서 상관을 구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했다.[13] 인접한 모든 육군병원 및 민간병원이 이미 만원 상태 아니면 다 파괴되어 환자를 수용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해군병원으로 후송한 것이었다. 그나마 군인이자 왕족이어서 서둘러 후송된 것이었으며, 동 병원이 히로시마의 다른 피폭자를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다음날부터였다.[14] 피폭 후 수 시간 동안 비교적 양호한 상태였던 환자가 갑자기 심한 현기증과 구토를 일으킨 후 혼절하고 단시간에 사망하는 것은 10시버트 이상 피폭되었을 때 종종 보이는 현상이다.[15] 핵공격에 사망한 한국인은 한둘은 아니지만 대표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히로시마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도 "이우공 전하 외 무고한 동포 2만여 위"라고 적혀있다.[16] 흥선대원군의 묘인 흥원은 본래 경기도 파주에 있었으나 1966년에 미군 군사 시설이 조성되면서 남양주로 천봉하였다.[17] 김을한이 과연 듣던 대로 동탕한 인물이었다라고 회고,"李鍝 공은 과연 소문에서 듣던 바와 같이 왕실에서 제일 잘 생긴 사람이었다. 나는 그리 크지 않지만 얼굴은 白玉같이 희고 두 눈에는 영채가 도는 것이 그는 밤중에 만져보아도 貴公子임이 틀림없었다."[18] 그 이초남은 후안무치하게도 2013년 8월 의친왕 제향 때 모습을 드러내 근왕주의 단체들을 충공깽에 빠트렸다. 배향 후 이석 황손이 직접 챙겨 하산한 것으로 보아 모종의 암약이 있었다는 게 중론. 기타 황손들이 이석 황손을 저어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19] 지나칠 정도로 퍼줘서 작중 어니스트 킹 제독과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히틀러가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고급정보를 이렇게 마구잡이로 퍼주는지'를 매우 수상하게 여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유가 없어서 농담조로 '니미츠의 출신 때문이 아니냐'는(니미츠는 독일계 미국인이다) 의견까지 나왔을 정도(...).[20] 작중 대한민국의 시점에서 보면, 자기들도 양면전쟁으로 골치아픈 상황이었는데도 아무것도 없었던 암울한 광복군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준 유일한 열강인 독일이야말로 진정한 혈맹일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한국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극도의 친독 국가가 될 것이며, 한국 국방군 또한 당연히 진성 독빠가 될 것이다.[21] 현실에서도 독립투사나 혁명영웅이 장기집권 독재자로 변질된 경우는 굉장히 많다. 게다가 작중의 이우는 광복군 시기부터 이범석과 같이 행동했는데, 이범석은 독립투사였지만 동시에 파시스트이기도 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