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9

이병철 -인농(仁農) 박재일(朴才一) 선생 1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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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h
 
-인농(仁農) 박재일(朴才一) 선생 10주기/

오늘은 1986년, '한살림'이란 이름으로 이 땅의 농업살림, 밥상살림. 생명살림운동을 처음 시작하고 이끌어 왔던 고(故) 인농 박재일선생의 10주기이다.

해마다 전국의 한살림식구들이 선생의 뜻을 기리는 추모행사을 가져왔는데 올해는 코로나사태로 전국 모임이 취소되었다. 대신에 고인과 가까웠던 몇 분들을 중심으로 10주기를 맞아 고인을 회고하는 작은 자리를 준비했으나 이마저도 코로나확산으로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인농선생을 기리며 몇 자 적는다.


인농선생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선생과의 만남이 이번 생의 내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연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선생을 형님이라고 부른다. 내가 태어나 마음으로부터 형님으로 모셨던 첫 사람이 인농선생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에 형님의 10주기를 생각하며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 생을 이 땅의 살림운동, 생명운동에 오롯이 바쳤던 사람, 그 형님이 새삼 그립다.


내가 인농형님을 처음 만났던 것은 1975년이 저무는 이른 겨울의 자정이 넘은 깊은 밤, 원주의 가톨릭센터였다.
당시 이곳은 서슬 푸른 유신군부독재에 저항하던 민주화운동의 성지 같은 곳이었다.
75년 형집행정지로 출감한 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수감생활을 함께 했던 춘천의 후배가 초대해서 놀러갔다가 우연히 참석한 자리에서 만났던 이가 인농형님이었다.

당시 내 마음은 가눌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차 있어 누구든지 눈에 거슬리면 달려들 때였는데 첫 만남에서 그런 나를 한 순간에 무장해제시켰던 이가 인농선배였다. 그때까지 아무도 선배나 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내가 그 순간부터 인농을 나의 형님으로 모셨다. 그렇게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모셨던 형님이 인농선생이신 것이다.
형님과의 그 인연을 시작으로 농민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형님이 스승으로 모시던 분을 자연스럽게 나도 따라서 나의 스승으로 모셨다.
무위당선생도 그렇게 나의 스승이 된 것이다.

한살림운동도, 형님과 함께 시작했던 우리밀살리기운동도, 귀농운동이나 그 밖의 다른 운동들도 절로 함께 해가게 되었다. 인농형님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35년의 세월동안 형님과 그렇게 해왔다.

형님은 좀체로 말이 없으신 분이었다.
산을 닮았다. 그러나 그 속에 용암 같은 뜨거움을 지닌 분이었다.
평소 맑은 얼굴에 씨익 웃는 특유의 미소로 사람들을 편하게 하시고 넉넉하게 품어주시는 분이었지만 부당하거나 불의한 것에는 한치의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분이기도 했다.
형님과 함께 해온 세월동안 내가 형님이 하시는 일을 거들었던 것보다 형님이 내가 하는 일을 더 많이 마음 쓰고 도와주셨다. 조금 무리하거나 부담이 될수도 있는 일조차 내가 권하거나 요청하면 한번도 다른 의견을 내시지 않고 흔쾌히 응해주셨다. 무위당선생과 함께 형님도 그렇게 대인이셨다.

생의 마지막을 병고에 시달리며 고통으로 힘든 순간에도 한살림운동과 생명이 안전하고 충만한 세상을 염려하셨다.
형님의 장례식 때 호상을 맡았던 나는 형님의 빈소에 청수 한 그릇만 올려 놓았다. 한살림의 숱한 생명의 먹거리들을 하나도 제상에 올리지 않았던 것은 형님의 오롯한 삶과 그 뜻을 맑은 물 한 사발로 드려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벽의 장독대에 정화수 한 그릇을 올려놓고 기원하던 이 땅의 할머니, 어머니들의 그 마음과 정성을 인농의 생에도 담아 올리고 싶었다.

그렇게 형님이 이승을 떠나신지도 어느새 10주기가 되었다.
엊그제 형수님께 오랫만에 전화를 드리며 이번 추모의 작은 자리에서 뵙겠다고 했는데, 코로나를 구실로 가뵙지 못하고 이렇게 페북에 소회를 쓴다.

인농형님, 한살림선언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인류문명의 대전환의 시대입니다.
어렵고 힘든 이 시대, 생명세상으로의 전환을 위해 애쓰는 생명의 일꾼들에게 당신의 삶과 뜻이 큰 힘과 격려가 되게 해주소서.
저 세상에서 길이 평안하소서.
-인농형님의 10주기를 기리며 고희 때의 헌시를 여기에도 나눈다.
"山이 온다"
仁農 朴才一형의 古稀에
여기 山이 온다
밥상을 쌓아 산을 빚은 이
그는 참나무처럼 단단하지만
버들처럼 유연하다
불같았던 사람
불의에 맞서 온몸 불사르고
물 같았던 사람
생명 앞에선 온몸을 낮춘다
그 불과 물이 어울려 한 생명을 낳았다
한살림
밥이 하늘이고
천지만물이 한 몸, 한 뿌리임을 일깨워 주신 스승을 섬기며
그 가르침 온 몸에 새겨
한 길 에두르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예까지 왔다
돌아보면 먼 길이다
東海 영덕의 푸른 파도를 실어
혜화동 문리대 교정에서 거센 함성으로 솟구치다가
주먹을 떨며 어둠에 몸 숨기다가
原州에서 마침내 无爲堂, 기다려왔던 스승을 만나고
눈빛 맑은 아이들과 한동안 뛰놀기도 하면서
큰물난리 나 전답과 농심 함께 휩쓸려간 자리에
자립과 협동의 씨 뿌리며 일어서게 하다가
겹겹의 덧옷 껴입고도 오싹하던 86년 그 겨울,
공화국 수도 서울의 제기동 한 모퉁이에 쌀가게를 열었고
이렇게 간판을 달았다
‘한살림’,
함께 살리고 크게 살림이니
“밥상을 살려 세상을 살린다”
모셔라,
천지만물 가운데 하늘을 아니 모신 것이 없으니
살려라,
서로 죽이고 모두 죽어가는 이 죽임의 굿판을 걷고
더불어 모두를 살려라
기어라,
자신을 낮추는 것이 섬기는 것이니
분노를 놓고 품어 안으라
닭이 알을 품듯
새로운 혁명의 길에서
우리의 무기는 총칼이 아니다
한사발의 밥이다
밥 속에 모신 하늘이다, 신명이다, 해방이다, 대동세상이다
밥상살림이 흙살림 물살림이요
농업살림이고 세상살림이니
한 그릇의 밥상을 제대로 마련하고 모시는 일이
자기 속의 하늘 밝게 드려냄이니
큰 살림꾼,
한살림의 큰 살림꾼으로
온 정성 쏟아 우주생명의 큰 밥상을 차려온 지 어연 이십여 년
仁農,
어진 농부의 길을 걸어리라 하셨던 스승의 말처럼
지금 그가 경작하는 밭은
이 땅의 농촌, 농업, 농심
이 땅에서 밥 먹고 똥 싸는 이들의 모든 밥상
평생 한 평의 논밭조차 제대로 가꾸질 못했지만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큰 농사꾼
남의 말 잘 안 듣는다는 努謙형이 말했다
仁農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는다고
나 태어나 맨 처음으로
형님이라 불렸던 사람
그런 형이 황소같은 고집과 뚝심으로 치닫다가
때로는 바람처럼 물처럼 흐르면서
마침내 오늘, 古稀에 이른 자리
드려나는 것은 드려나지 않는 것에 바탕하나니
형이 이루어온 것 가운데 그 功의 절반은
숨은 꽃 향기 머금은 형수 李玉蓮님의 몫인 건 새삼 말해 무엇하랴
다섯 딸들로 풍성한 살림
저기 밥상이 온다
산처럼 거대한 밥상
일찍이 옛 스승이
‘내 몸이다. 나를 먹어라’ 하시던 그 생명의 밥상
어진 농부가 한 평생 차려온 그 밥상이
생명의 큰山이 되어 온다.
-2007년 10월 8일
如流 모심.
(아래 영상은 10주기를 맞아 한살림에서 만든 영상이다.)
You, 박정미, Namgok Lee and 105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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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 분이셨군요.
    기억해야 할 한 분을 이렇게 만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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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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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h
  • 감사합니다 선생님!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저도 아버님과 함께 한 그 시간들이 그립고 아쉽습니다!
    건강하게 오랫동안 많은 분들께 선생님의 선한 영향력을 전해 주시길 마음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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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 h
  • 벌써 10주기군요 살림문화를 이끄셨던분,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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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h
  • 박재일선생님의 추모행사 몿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래도 박재일선생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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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 m
  • 박재일 선생님 작고하신줄도 모르고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병철 선생님 덕분에 뒤늦게나마 박선생님을 기려 봅니다. 1990년인가 박재일 선생님이 불러주셔서 명동성당 한 곳에서 생명문화에 관한 발표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말이 생명문화이지 사실 철없는 알음앓이에 지나지 않았던 제가 오히려 그 때 크게 배웠고 이후 가끔 뵙곤 했습니다. 그 무렵 제게 유기농업의 세계를 알려주신 것도 박재일 선생님과 원경선 목사님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이러니하게 제가 오히려 초청을 받아 그에 관한 어줍지 않은 발표를 하던 차였으니...그 불민함을...고맙습니다. 이병철 선생님...풋풋했던 그 때를 이제 다시 새겨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토템 보러 한번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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