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언론-⑮ 구산 스님 (1909∼1983) - 법보신문
⑮ 구산 스님 (1909∼1983)
권오영
승인 2004.08.10
현대한국불교의 수행자 사표1983년 12월 16일 입적
“스님은 오늘도 진흙 속에 허덕이는 우리를 놓아두고 마침내 가셨습니다. 스님! 스님은 좋으시겠습니다. 스님은 참 좋으시겠습니다.”
1983년 12월 22일 구산 스님의 영결식에서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 박완일 신도회장은 이 같은 조사를 통해 스님의 입적을 애도했다. 그 만큼 스님은 나고 죽음이 둘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29세의 늦깎이로 출가한 구산 스님은 그렇기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수행에 전념했다. 출가 이후 송광사와 백양사, 통도사, 해인사, 금강산 등을 돌며 장좌불와 수행을 계속하면서 끊임없이 ‘이뭣꼬’를 의심했다. 생사를 건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는 일대사를 해결하게 된 스님은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회향하기 위해 전법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조계총림 개원 견인
1954년 교단이 정화운동으로 종단 안팎에서 시끄러움이 끊이지 않자 스님은 상경해 500자 분량의 혈서로 정화의 당위성을 역설하기도 했으며 대중들의 교화를 위해 만리 길도 마다 않고 달려가 설법을 하기도 했다. 또 은사 스님으로부터 ‘승보종찰 송광사의 중흥을 이룩하라’는 유촉을 받은 스님은 곧바로 송광사로 거쳐를 옮기고 3년에 걸친 노력 끝에 송광사에 조계총림을 개원시키고 초대 방장에 올라 납자 양성의 길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스님은 후학들에게 ‘이뭣꼬’ 화두를 강조하는가 하면 생활불교를 실천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70년대 해외포교 개척
불교가 절집 안에서만 머물고 사회에서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생명력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스님은 ‘칠바라밀 요일’이라는 독특한 신행 체계를 만들어 매일매일 목표를 정해 생활불교를 실천할 것을 불자들에게 강조했다. 이와 함께 스님은 70년대부터 해외포교를 강조해 미국 등지에 송광사 분원을 설립하는가 하면 송광사에 국제선원을 개원하기도 했다.
<사진설명>53년 구산 스님이 창건한 미래사 전경.
평생을 수행자로서 포교사로서 전념했던 구산 스님은 1983년 12월 16일 ‘정진에 힘쓰고, 자신을 속이지 말 것이며, 선풍에 누가 되는 행동을 삼가고, 서로 화합하며 방일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기고 가부좌를 튼 채 이생의 인연을 마감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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