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24

[5대 총림 禪의 현장을 찾아서]조계총림 송광사 구산(九山)스님 上 下 - 경향신문

[5대총림 禪의 현장을 찾아서]조계총림 송광사 上

입력 : 2002.11.25


전국 사찰의 선방을 돌면서 조선시대에 맥이 끊겼던 한국불교를 다시 일으킨 경허(鏡虛)스님이 송광사에 나타난 것은 1900년 1월 하순이었다. 송광사 불상의 점안식에 증사로 초청된 경허스님은 잠시 이곳에 머물며 삼일암(三日庵)에 선방을 열었다.

그러나 일제시대를 거치며 대처승들의 절이 되어버린 송광사는 1937년 효봉(曉峰 1888~1966)스님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효봉스님이 근대 한국불교에서 송광사의 가풍을 세우고 기틀을 닦았다면, 그 맏상좌인 구산(九山)스님은 해인총림에 이어 호남의 송광사에 조계총림의 문을 열고 초대 방장으로 취임해 송광사 선풍을 진작시킨 양대 거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불교에서 송광사의 역사는 효봉문중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판사 이찬형’ 홀연 출가 엿장수로-

▲ 효봉원명스님의 출가와 수행

지금은 ‘판사스님’으로 잘 알려진 효봉스님이 속세에서 판사였다는 사실은 스님이 출가한 한참 뒤에나 알려졌다. 이전엔 ‘엿장수 스님’으로 알려졌을 뿐이었다.

2남1녀의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던 판사 ‘이찬형’이 출가한 것은 판사생활 10년째인 36세때였다. 평양 복심법원(고등법원)에서 판사생활을 하던 이찬형은 처음으로 사형선고를 내리고 난 뒤 몇날 며칠을 뜬눈으로 고민한다. 어느날 출근하던 길로 집을 떠난 이찬형은 엿판을 메고 3년간 전국을 엿장수로 떠돈다.

정처없이 떠돌던 스님은 드디어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금강산 도인’ 석두(石頭)스님에게 계를 받고 머리를 깎는다.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최소한 6개월 정도는 행자생활을 해야 머리를 깎을 수 있기 때문이다. 효봉스님에게 석두스님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자 “유점사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연이어 “몇걸음에 왔는가”라는 스승의 물음에 효봉스님은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며 큰 방을 한 바퀴 빙 돌고 앉았다. 이에 석두스님은 “10년 공부한 수좌보다 낫다”고 감탄하며 바로 계를 주고 원명(元明)이란 법명을 내렸다.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머리를 깎은 스님은 이후 무섭게 정진하였는데, 엉덩이 살이 헐고 진물이 나 방석과 들러붙을 정도였다.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란 별칭이 따라붙었다. 1930년 법기암에서 크게 깨달은 스님은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불 속의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달이네/이 집안 소식을 누가 능히 알꼬/흰구름 서쪽에 날고 달이 동쪽으로 뛰누나’하고 오도송을 읊으며 토굴벽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참선 중시 직접 죽비들고 경책-

▲ 송광사 조실과 가야총림 방장

효봉스님의 판사전력이 들통난 것은 출가 7년째 되던 해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함께 일하던 일본인 판사와 마주친 때문이다. 이후 스님은 금강산을 떠나 제방선원을 떠돌다가 1937년 송광사 조실로 10년을 머물게 된다. 송광사에서 고향같은 편안함을 느낀 스님은 꿈에서 16국사중 마지막 국사인 고봉화상을 만나 “이 도량을 빛내 달라”며 내린 법명 ‘효봉’을 받는다.

선방인 삼일암에서 납자들을 지도했던 스님은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의 대근기(大根氣)는 참선이요, 중근기는 경을 보고 강사를 하는 것이며, 하근기는 사람이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니 기도와 염불을 하면서 절밥을 얻어 먹는 것이다”. 이처럼 참선을 제일 중요시하던 스님은 직접 죽비를 들고 선방에서 경책(졸거나 딴생각 하는 수좌를 죽비로 내려침)을 했다. 스님은 ‘동구불출(洞口不出), 오후불식(午後不食), 장좌불와(長坐不臥), 묵언(默言)’의 4가지 규약을 정해 이를 엄격히 지켰다.

그리고 늘 조주스님의 무자(無字) 화두를 들어 “무(無)라, 무라…”하고 입버릇처럼 외워 ‘무(無)라 스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효봉스님은 1946년 처음 총림을 개설하는 해인사의 방장으로 초빙되어 송광사를 떠난다. 이때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당시 송광사의 주지가 ‘선방 폐쇄’를 통보해 난감해 하던차에 가야총림의 방장으로 효봉스님이 추대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송광사 대중들은 ‘효봉스님이 가야총림의 문을 열었으니 결국 총림의 기원은 바로 송광사에 있다’고 은근히 자부심을 드러낸다. 맏상좌 구산스님은 은사인 효봉스님을 따라 해인사로 가서 가까이 모시고 시봉을 했다고 한다. 스님은 통영 용화사, 쌍계사를 거쳐 1957년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어 58년 2월까지 재직하고 이후 종정에 취임했다. 58년 겨울부터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통영 미래사에서 정진했고 62년부터 66년까지 통합종단 초대종정을 지낸 후 밀양 표충사 서래각에서 열반했다. 스님은 ‘내가 말한 모든 법은/그거 다 군더더기/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천강에 비치니라’고 임종게를 읊었다.

-축구대회 꼴찌, 법고·사경대회 1등-

▲ 송광사의 가풍을 일구다

송광사의 위치는 ‘승보종찰’답다. 주지 현봉(玄峰)스님은 “스님들끼리 회의를 하거나 의논할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송광사 스님 눈치를 본다고 합디다. 그만큼 여법(如法, 법대로)하게 산다는 이야기지요”라고 말한다. 백장청규(백장스님이 만든 청정하게 살아야할 스님들의 규칙)에 따라 근검절약과 청규적용이 엄격하다. 이는 효봉스님 때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효봉스님의 상좌였던 법정(法頂)스님이 찬거리를 구하러 갔다가 10분 늦게 돌아오자 효봉스님은 “오늘은 공양을 짓지 마라. 단식이다. 수행자가 그렇게 시간관념이 없어 되겠니?”라며 용납하지 않았다. 또 밥알 하나만 흘려도 불같이 화를 냈고, 초 심지가 다 내려앉기 전에는 새 초를 갈아 끼우지 못하게 했다.

또한 울력(공동 노동)을 하는 것에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음력 4월 보름부터 석달간 하는 하안거에 참여하려면 연등을 만드는 일을 비롯한 사월초파일 울력을 해야 했다. 당시 수행에 힘쓰느라 울력을 소홀히 했던 성철스님이 송광사에 방부를 들일 때 효봉스님이 “책보따리만 메고 다니면 안된다. 울력도 함께 해야지”라고 역정을 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송광사에서는 안거를 쉬는 산철에도 산철결제를 한다. 또한 경내에서 TV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여름 월드컵 때도 거의 TV시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 통도사, 중앙승가대 등이 참여하는 스님들끼리의 축구대회에서도 유일하게 유니폼 대신 그대로 승복을 입고 출전한다. 물론 성적은 꼴찌다. 대신에 법고·사경(경전 풀이) 등의 실력을 겨루는 대회에서는 1등을 도맡아 한다.

-구산스님 해인사까지 가 극진 시봉-

▲ 효봉스님의 제자들

훗날 조계총림의 초대방장이 된 구산스님이 맏상좌이다. 효상좌로도 유명한 구산스님은 그림자처럼 효봉스님을 시봉했다. “속가의 자식도 그렇게 잘 할 수는 없어”라고 상좌인 법흥(法興)스님(조계총림 동당)은 회상했다.

환속한 제자 중엔 시인 고은씨가 있다. 스님일 때는 일초(一草)라는 법명을 썼다. 전국신도회장을 지낸 정치인 박완일씨도 효봉스님의 상좌로 일관(一觀)스님으로 불렸다. 현재 생존해 있는 효봉스님의 상좌로는 수필집 ‘무소유’로 유명한 법정스님과 법흥스님이 있다.


-푸근한 조계산에 안긴 16국사 배출‘승보사찰’-

티베트 출신의 세계적인 불교음악가 나왕케촉이 공연을 위해 전남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처음 들렀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아마도 전생에 송광사 스님이었던 것 같다. 예전에 왔던 것처럼 편안하다. 일생을 여기서 마치고 싶다”.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한 조계산(曹溪山) 자락에 포근히 자리잡은 송광사는 이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해인사가 남성적이라면, 송광사는 흔히 여성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신라말 혜린(慧璘)선사가 터를 잡아 길상사라고 칭했던 승보(僧寶)사찰 송광사는 법보사찰 해인사, 불보사찰 통도사와 더불어 3보사찰로 손꼽힌다.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 깨우친 뒤에도 계속 수행을 함)’와 정혜쌍수(定慧雙修,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음) 가풍, 즉 목우자(牧牛者) 가풍이 면면히 흐르는 송광사는 고려시대 16국사를 연이어 배출한 승보사찰로 이름이 높고, 전국의 어느 절보다 법대로 살고 법대로 수행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보조의 정혜쌍수를 의심했던 경허스님도 이곳의 관음전에 와서 다시 깨닫고 참회를 한 후 선문촬요를 펴냈다. 용성스님도 보조스님의 ‘수심결’을 보고 깨달았고, 혜울스님과 한암스님도 보조법어를 보고 확철대오했다.

승보사찰이라는 특징은 가람배치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승보사찰이기 때문에 대웅전보다도 스님들의 선방이 위쪽에 위치했다. 그리고 선방인 ‘수선사(修禪社)’에는 문수사리나 달마대사를 모시는 대신 크고 둥근 거울을 놓았다. 이것은 대원경지(大圓鏡智)의 큰 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선정을 닦아 마음의 거울을 밝게 비추라는 의미다.

또한 유순한 산세를 가진 조계산 자락의 송광사는 풍취나대(風趣蘿帶) 지형에 자리했다. 바람이 불면 흔들거리는 모양을 한 이 지형에는 무거운 석물이나 커다란 건물은 금물. 그래서 가람 내부에는 보조국사의 ‘불일(佛日)보조국사 감로탑’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석물이 거의 없다. 이것도 외부로 내보냈다가 근래에 다시 들여온 것이다. 또한 커다란 건물이 없는 금계포란(金鷄胞卵)형 건물배치를 이루고 있다.



/송광사·이무경기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211251559501&code=900102#csidxf9826d79182aad38f62d652a8a6f249 






[5대 총림 禪의 현장을 찾아서]조계총림 송광사 下 - 경향신문

[5대 총림 禪의 현장을 찾아서]조계총림 송광사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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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2.12.02 16:07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
호남불교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송광사(松廣寺)에 효봉스님이 조실로 초빙되어 갔던 1937년부터 10년간은 ‘효봉문중의 송광사 뿌리내리기’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1946년 해인사 방장으로 효봉스님이 떠나면서 송광사와 효봉문중의 인연은 잠깐 끊겼다. 그러나 30년뒤인 1967년, 효봉의 맏상좌 구산(九山, 1910~1983)스님이 다시 송광사 산문을 들어섰다. 그리고 2년뒤 보란 듯 호남 최초의 총림인 ‘조계총림’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일제시대를 거치며 송광사를 장악한 대처승들의 선방폐쇄로 인해 효봉스님이 해인사로 떠난 것에서 알수 있듯이 여전히 송광사에는 대처승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경찰 진압때 500자 혈서로 맞서-

▲다시 송광사로 돌아온 구산스님

구산스님은 제자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대처승들 등쌀에 보따리를 3번이나 쌀 뻔했어. 그래도 내 이를 악물고 꾹 참았지. 효봉문중이 앞으로 송광사를 지켜내야 할 거 아니여”

대처승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송광사에 구산스님이 다시 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송광사의 실권자였던 취봉스님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다른 대중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취봉스님은 구산스님을 송광사로 다시 불러들인다. 취봉스님의 도움으로 송광사에 들어온 구산스님은 착실히 송광사의 기반을 다져 2년 뒤 ‘호남 최초의 총림’인 조계총림을 세운 것이다.

이처럼 구산스님이 온갖 어려움을 참아가며 송광사에 자리를 잡은 것은 스님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효(孝)상좌였기 때문이었다. 마음놓고 수행할 수 있도록 송광사에 터를 잡는 일은 효봉문중으로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비록 효봉스님이 해인사의 방장과 조계종 종정을 역임했다고는 하지만, 효봉스님은 이후 한곳에 거처를 정하지 못한 채 팔공산 동화사, 통영 미래사, 밀양 표충사 등을 오갔다. 표충사에서 입적한 효봉스님은 “승보종찰 송광사 중흥을 이룩해 종단의 기둥이 될 훌륭한 승려를 많이 양성하라”는 유언을 내렸고, 구산스님은 그 유언을 훌륭히 받든 것이었다.

그러나 구산스님이 뚝심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그것은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님의 뚝심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정화불사가 한창이던 1954년 하안거가 끝났을 때, 서울 조계사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비구승들의 승려대회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 경찰들이 행사를 저지하려고 실력행사에 들어가자, 한 승려가 분연히 일어나 정화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500자 분량의 혈서를 써내려 갔다. 그 승려가 결연한 표정으로 혈서를 낭독해 내려가자 법당안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었는데, 바로 그 승려가 구산이었던 것이다.

-이발관 운영하다 큰병 얻어 출가-

▲구산스님의 출가와 구도

효봉스님은 속가에서 판사출신의 인텔리 계층이었지만 그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이자 맏상좌인 구산스님은 이발사 출신으로 속명은 소봉호였다. 남원 역 앞에서 ‘명치이발관’을 운영하던 소봉호는 27세에 큰 병을 얻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불법에 귀의한 것이었다. 지리산 영원사에서 100일 기도를 한 뒤, 2년뒤인 1937년 효봉스님을 은사로 송광사 삼일암에서 머리를 깎은 구산스님은 이후 그림자처럼 효봉스님을 시봉하는 한편, 늦깎이 승려로서의 수행에도 힘쓴다.

해인사 가야총림 초대방장이 된 은사 효봉스님을 따라 총림의 도감을 맡는 한편 가야산 상봉 아래 토굴 법왕대(法王臺)를 짓고 생쌀과 솔잎만 먹으면서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에 들어갔다. 3년간 용맹정진을 하던 어느날 문득 남아있던 일체의 먹구름이 걷히고 사방이 훤히 트인 경계없는 세계가 홀연히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깨달음의 기쁨, 생사의 굴레를 벗어난 구산스님의 입에서는 저절로 오도송(悟道訟)이 흘러나왔다. ‘대지의 겉모습은 본래 공한데/손을 들어 공을 가리키니 어찌 뜻이 있으리오/고목나무는 반석 위에 서서 계절이 없는데/봄이 오매 꽃피고 가을에 열매 맺는다’. 스승 효봉은 훗날 애제자 구산의 깨달음을 기뻐하며 ‘한 그루 매화를 심었더니/옛 바람에 꽃이 피었구나/그대 열매를 보았으리니/내게 그 종자를 가져오너라’라고 전법게를 내렸다. 구산스님을 시봉했던 현봉(玄鋒, 송광사 주지)스님은 “구산스님은 앉아서 조실 때도 앞뒤가 아니라 좌우로 고개를 흔드는 버릇이 있는데, 토굴에서 정진할 때 턱 밑에 날카로운 송곳을 놓고 졸 때마다 턱밑을 찌르도록 해서 부지불식 간에 생긴 습관”이라고 이야기했다. 구산스님의 정진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安居중인 스님들과 면담’ 새 전통-

▲효봉가풍을 잇고 생활불교 ‘칠 바라밀’을 세우다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쌍수 가풍, 즉 목우자(牧牛者) 가풍을 이으면서 전국의 어느 사찰보다 엄격한 선풍을 지켜온 효봉가문의 장자 구산스님은 1969년 조계총림의 문을 열고 초대방장으로 취임한다. 구산스님은 1983년 입적할 때까지 15년간 송광사의 웃어른으로서 ‘가장 여법(如法, 법대로)하게’ 사는 효봉가풍을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

송광사 선방 수선사에서 안거를 하는 납자들은 석달동안의 안거기간에 최소한 두세번은 방장스님과 개인적으로 인터뷰를 할 기회를 갖는다. 이는 다른 사찰의 경우에는 거의 없는 일인데, 구산스님 때부터 내려온 송광사의 전통이라고 한다. 구산스님은 방장으로서 가끔씩 점검을 나오는 것이 아니라 틈나는 대로 대중들과 함께 선방에서 수행을 했는데 특히 스님들이 좋아하는 국수가 점심공양으로 나온 날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은 국수가 나와서 많이들 드셨을테니 한 숨 푹 자고 나면 개운하게 정진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의 육(六)바라밀을 딴 ‘칠바라밀의 생활불교’를 강조한 구산스님의 정신은 송광사의 달력에서 엿볼 수 있다. 달력에는 ‘월요일은 베푸는 날, 화요일은 올바른 날, 수요일은 참는 날, 목요일은 힘쓰는 날, 금요일은 안정의 날, 토요일은 슬기의 날, 일요일은 봉사의 날’로 정해놓고 있다.

1973년 송광사내에 불일 국제선원을 개원한 구산스님은 해외포교에도 힘써 수많은 해외제자를 길러냈고, 해외 사찰의 문을 열었다. 1983년 송광사 방장실인 미소실(微笑室)에서 열반한 스님은 ‘온 산의 단풍이 봄의 꽃보다 붉으니/삼라만상의 큰 기틀을 온통 드러냈도다/생도 공하고 사도 또한 공하니/부처의 해인삼매 속으로 미소지으며 가노라’ 하고 임종게를 남겼다.

▲뒤를 이은 방장들과 구산의 제자들

구산스님의 뒤를 이어 방장을 역임한 일각(壹覺, 1924~1996)스님과 현재의 방장 보성(普成, 1928~)스님은 철저하게 효봉가풍을 이어갔다. 효봉스님의 상좌인 일각스님은 교사출신으로 아이를 때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괴감과 허무함을 느껴 출가했다고 한다. 일각스님도 24시간의 용맹정진과 14시간 가행정진을 함께 하며 수행에 모범을 보였다. 구산스님에게 사미계를 수지한 보성스님은 율사로 이름이 높다. 구산스님의 상좌들은 대대로 주지와 선원장을 역임하며 송광사의 가풍을 지켜나갔다. 현고스님(전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현묵스님(송광사 선원장), 현봉스님(현 주지) 등이 구산스님의 상좌들이다.



/송광사/이무경기자 lmk@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0212021607151#csidx85557aace8a4936a3de293a1148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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