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 나무위키
홍범도
최근 수정 시각: 2020-08-08 13:29:42
분류
조선 의병장
한국의 독립운동가
한국계 러시아인
평양직할시 출신 인물
대종교 신자
남양 홍씨
1868년 출생
1943년 사망
건국훈장 대통령장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홍범도
洪範圖
출생
1868년 10월 12일[1]
조선 평안도 평양
사망
1943년 10월 25일(향년 75세)
카자흐 SSR
국적
조선 → 대한제국 → 무국적자 → 대한민국[2]
본관
남양 홍씨(南陽)
호
여천(汝千)
직업
독립운동가, 군인(장군)
신장
190cm추측
가족
홍윤식(부)
종교
대종교
조직
소련 공산당
소속
대한독립군, 대한독립군단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의병 활동2.3. 러시아로2.4. 말년3. 기타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의병장.
본래 사슴, 노루, 멧돼지 등 짐승들을 사냥하였던 포수 출신이었으나 조국의 망국을 보게 되었던 영향과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 당시 대한제국 군인들의 의병 활동에 영향을 받게 되어서 수렵을 그만두고 독립 투사가 되어서 포수 시절에 갈고 닦은 사격술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사냥을 그만두었을 때도 이 총으로 짐승이 아닌 왜놈들을 사냥하겠다는 다짐으로 구국 운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의 영향으로 일제가 국내 포수들을 대상으로 총포 및 화약류 단속령에 따라 총기 회수령을 발표하자 이에 영향을 받아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평양 출신[3]. 양반집 머슴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태어날 때 홍범도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돌아가셨고 머슴살이하던 아버지마저 9살에 세상을 떠난다. 이 때문에 어린 홍범도는 자신의 뿌리조차 모른 채 다른 양반집에 머슴으로 보내진다. 10대 중반이던 1883년에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인생을 바꿔보고 싶다는 맘에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이탈한다. 여러모로 열악했던 군대와 대우에 못 이겨서라는 이야기가 있다.[4]
이후 이래저래 맘을 달래고자 금강산에 있는 절에 불제자로 출가한다. 평생 교육이란 걸 못 받았던 홍범도는 이때 절에서 글을 깨치고 우리 나라 역사에 대해 배우게 된다. 이순신 장군도 이때 알았다고 한다. 비구니였던 아내도 이때 알게 되어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 항일 투쟁 노선 외길을 걸었던 홍범도 개인에게 있어선 이때가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2.2. 의병 활동[편집]
이후 절을 떠나 황해도로 아내와 거주지를 옮겨 한동안 제지소에서 일했다. 그러나 1886년 3년치 임금을 체불한 고용주를 말다툼 끝에 살해하고 도주, 강원도 북부 산악 지대에서 산포수 생활을 했다. 이때부터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시기까지 10년 동안 평범한 사냥꾼으로 생활했다. 총을 잘 쏘기로 유명해서[5] 일대 포수들에게 지지를 얻고, 포계(砲契)라는 포수 권익 단체를 만들고 대장이 된다.
1895년 을미 의병 발생 직후 강원도 철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유는 일제의 총포기화류 일제 단속법이 발령됐기 때문. 포수로 생계를 책임지던 홍범도와 조합원들에게 있어서 의병 투쟁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의병은 14명으로 전해지며, 대부분 함께 사냥 일을 하던 강원도 산포수들이었다. 이 시절의 그는 말 그대로 전설의 스나이퍼. 동료들 먼저 가라고 한 뒤 홀로 수십 명을 쏴죽이고 돌아왔다라는 야사도 있다. 이후 유인석의 의병대에 합류하여 전투에 들어갔으나 1896년 이후 을미의병의 기세가 사그러지자 홍범도 역시 의병을 해체하고 귀향, 다시 산에서 포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05년 대한제국의 을사조약 체결 시점에서는 딱히 의병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1907년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을 전후한 (정미칠적 참조)에 따른 정미의병 운동이 시작되고,이젠 강제 총기 수거령으로 생계까지 막막해지자 함경도 갑산 일대의 포수들을 모아 다시 궐기한다. 홍범도는 최대 600명 ~ 700명으로 생각되는 의병대를 이끌고 주로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를 무대로 하는 유격전을 벌였다. 말이 무대지 사실상 산속 수백 리를 축지법급으로 숨어다녔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때 민중에서는 나는 홍범도라는 별명까지 붙는다.[6]이 시기 일본 헌병대 및 육군 정규 부대를 상대로 대소 37회의 전투를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런 의병 투쟁에도 불구하고 1910년 결국 대한 제국이 일본에 병탄되면서 의병 항쟁 여건은 지속적으로 악화돼 왔으며, 이 시기 국내 무장 독립 투쟁 단체들의 일반적인 조류에 따라 홍범도 역시 결국 1911년 연해주로 망명,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하는 독립 운동 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월경, 접경 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괴롭히는 유격전을 수행했다.
2.3. 러시아로[편집]
홍범도가 훗날 공산주의 독립 운동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서였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혁명의 저지를 위해 국제 간섭군이 러시아에 진주(시베리아 내전)할 때 일본군이 연해주에 진주했는데,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홍범도를 포함한 연해주 소재 조선 무장 독립 운동 단체를 소탕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조선 측 무장 독립 운동 단체도 적극적인 교전을 벌임과 함께 그나마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되던 적위군과 손을 잡게 되었다. 이것이 홍범도와 공산당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함경북도로 수 차례 진출, 1919년 10월 혜산진 일대에서의 유격전 성과로 지명도를 높인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 일대에서 잡다한 무장 독립 운동 단체가 연합해서 결성한 대한북로군독부 예하 북로 제1군 사령부장(부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이어서 1920년 6월에 봉오동 전투를 치르고, 그로부터 불과 4개월 뒤 청산리 전투에 참여, 상당한 활약을 했다.[7] 그러나 이후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 및 만주 군벌과의 충돌로 인해 부득이하게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 연해주 및 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자유시로 이동했으며, 이 시기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새로 창설된 대한 독립 군단 부총재가 돼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홍범도는 독립군 내 공산당 파벌 싸움으로 발생한 자유시 참변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최소한 홍범도 측 부대의 사상자는 한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오래 가지 못해, 1922년 일본의 연해주 간섭군 철수를 조건으로 일본측이 요구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의 해산이 이루어지고 나서 결국 홍범도 이하 공산측 독립군은 무장 해제, 다른 동료들은 상해 임정으로 다른 지방으로 뿔뿔히 흩어졌으나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던[8] 홍범도는 결국 러시아에 남아 소련 시민으로서의 삶을 시작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 때에 두 번째 부인과 재혼하게 된다.
2.4. 말년[편집]
홍범도는 그간의 무훈으로 얻은 인망에 힘입어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한인 콜호즈의 지도자가 되었고, 1927년에는 소련 공산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이후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해 왔으나,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이뤄진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당시 소련 영토였던 현재의 카자흐스탄 땅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후 고려인 극장에서 고려인 희곡 작가 태장춘의 배려로 수위장을 맡았고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였다. 홍범도는 매월 80루블의 연금과 50루블의 보수를 받아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또한 태장춘의 아내 리함덕에게 독립운동가로서의 활약상을 구술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홍범도 일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홍범도 일지를 토대로 한 연극 '홍범도'가 고려극장에서 상영되는데, 이를 관람한 홍범도는 자신을 너무 추켜세웠다며 계면쩍어했다고 한다.# 홍범도가 맡은 직책인 수위장도 고려극장의 배려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일은 널널하였다. 홍범도는 고려극장의 제일 뒷편에 앉아 당시 인기리에 상영중이던 연극인 “춘향전”, “심청전” 등을 관람하고 주연배우들과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1941년 6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엔 물자를 아껴 전선의 병사들을 돕자는 선전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레닌기치>를 읽으며 이웃들에게 전선소식을 전하거나 직접 글을 투고하여 젊은이들에게 참전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1942년 4월 홍범도가 몸담고 있던 조선극장이 우스또베로 옮겨간 이후엔 공장노동자로 일했으며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홍범도가 한국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력을 감안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말년이지만, 해방 후에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수많은 항일지사들의 처지보단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중들이 말년에 불우하게 연명했을 거라 여기는 것과 달리, 고려극장이 이주하기 전까진 그럭저럭 살았다고 한다.
홍범도의 묘지는 지금도 크즐로르다 공동 묘지에 있으며, 스탈린이 죽고 소수 민족 탄압이 중지되면서 업적을 인정받고 복권되어 지금은 크즐로르다에 홍범도 거리가 있다.
1962년 10월 25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91년 카자흐스탄이 구소련에서 독립하게 된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유해봉환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남북한대사관 간 외교전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한다. 사실 홍범도 장군 태생이 평양 출생이니 한국 입장에서도 마냥 밀어붙이기도 어려운 데다,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들이 크즐로르다 묘역을 그냥 존치시키자고 해서 아직까지 카자흐스탄에 묘역이 있게 된 것이다.#
2019년 4월에 들어,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국빈방문 계기에 유해 송환을 추진한다.#
2020년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마침내 송환된다.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국빈 방한길에 유해를 모셔올 예정이다.# 그러나 북한은 당연히 고향인 평양으로 모셔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게 막는 일은 반인륜적인 도발 행위라며 대한민국을 비난했다.#
3. 기타[편집]
경력이 경력이고 해서 종종 독소전쟁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했다는 말이 돌곤 하는 인물이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지역 한인들과 함께 의용군 편성을 자원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게 사실이었다 해도 소련 당국이 고려인만의 부대를 창설하는 것은 절대 엄금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고려인만이 아니었다. 독소전에 참전한 소수 민족들은 민족별로 구분된 부대를 창설하지 못하도록 규제됐으며, 심지어 아예 참전을 금지당한 경우도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있던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이 고려인 참전 금지 사태에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하나, 이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요소였다.
단지 늙은이가 어떻게 전쟁에 나가느냐는 소련군 장교의 말에 공중으로 코페이카 동전을 던지고 권총으로 명중시켜서 빼어난 사격술을 자랑했다는 흥미로운 일화만 전해져 온다.
과거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까레이스키(김희애, 차인표, 한석규 출연)'에 등장하는 '박하치 장군(김동현 분)'이 그를 모태로 하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딱히 그가 홍범도 장군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독립 운동을 한 장군이고,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부대를 잃었고, 말년에 극장 경비원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홍범도 인증. 다만 여기서 박하치 장군은 실제와는 다르게 극장을 침범한 괴한을 쫓다가 공격받고 그대로 운명.(여기서 옛 부하의 아들 부부가 운영하는 극장 관계자가 장군에게 엄청난 멸시를 주고 무례하게 굴지만, 때마침 찾아온 부하 내외가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하자 그들이 사과한다)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에서 밝힌 것에 따르면 190cm에 이르는 장신이었다고 한다...당시 한국인 평균 남성키가 163cm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금으로 따지면 2m 이상의 거구나 마찬가지.
2019년 영화 봉오동 전투에서는 최민식이 홍범도로 등장한다. 주연은 독립군 병사들이고 잠시 얼굴을 비추는 정도.
2016년 2월 해군은 손원일급 잠수함의 7번함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홍범도함은 4월 5일 진수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아리랑을 제작한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나운규는 홍범도의 부하 중 하나였다.
홍범도의 첫째아들인 홍양순도 의병활동을 하다가 전사하였고 막내아들 홍용한은 아버지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다.
[1] 음력 8월 27일[2]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신채호, 홍범도, 이상설, 김규식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국적등록을 하지 않고 무국적자로 남았다. 이후 2008년이나 되서야 이들 독립운동가들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등록하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2009년에 국적이 회복되었다.[3] 평안북도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4] 우리가 생각하는 탈영과는 전혀 다르다. 저때 조선군은 원래부터가 실 근무 병력과 장부상 병력이 다르고, 장부상 군사의 이름과 실제 복무하는 군사의 이름도 맞지 않는 형편이었다. 입대한 것도 병적에 이름이 있는 노인 또는 사망자를 대신해서 이름만 올린 것일 가능성이 크고, 탈영했다 해도 애초에 인원 확인조차 되지 않으며 복무를 계속하는 게 곧 굶어죽는 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말 다 했다. 야사에는 꼴같잖은 상관을 피양 박치기로 받아버렸다는 흠좀무한 이야기도 있다.[5] 먼 거리에서 총을 쏴, 유리병의 입구를 통과해 병의 바닥을 맞히는 신기의 사격 실력을 보유했다고 한다. 현대 총기로도 이 정도 사격 실력은 마냥 쉽지만은 않으며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당시 총기의 성능을 고려해 보면 더더욱 놀라운 실력[6] 머슴 아버지 밑에서 자라 유년기부터 머슴살이를 했기에 엄청난 힘과 체력을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증언에 의하면 홍범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체구도 우람했으며 근육량도 엄청났다고 한다. 포수 생활을 하면서 산을 자유자재로 타넘었던 원동력.[7] 청산리 전투의 주도적인 인물로 잘 알려진 김좌진이 우파 인사였던 탓에, 중국 내 한인 사회에서는 이 청산리 전투의 주요 지휘관으로 김좌진보다 홍범도를 더욱 높게 친다. 거꾸로 국내에선 홍범도가 결국 소련군과 손을 잡았었다는 점 때문에 1980년대 후반까지도 아예 홍범도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거나 간단하게 언급만 되고 홍범도의 말년도 '독립 운동 하시다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돌아가셨다' 정도로만 언급되었다. 사실은 김좌진과 홍범도 부대의 공로가 반반이라고 보는 편이 좋으며, 특히 일본군끼리 서로 싸우게 한 작전은 홍범도가 주도했다. /단, 이범석 장군이 쓴 우등불에는 홍범도가 봉오동에서 큰 전공을 세우긴 했으나 청산리에선 일본군의 군세에 겁 먹고 말도 없이 달아났다고 한다. 여러 사람의 기록을 직접 읽고 판단하길 바란다.[8] 첫 아내 이옥구(이옥녀라고도 한다.)는 일본의 고문으로 사망했고 장남 홍양순도 정평배기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차남 홍용환도 고문당한 뒤에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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