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최근 수정 시각: 2020-08-19 13:44:01
일제강점기의 시인
윤동주
尹東柱
1941년 연희전문학교 졸업 당시.
본명
윤동주(尹東柱)
아명
윤해환(尹海煥)
일본명
히라누마 도쥬(平沼 東柱) (창씨개명, 1941[1])
본관
파평 윤씨
출생
1917년 12월 30일
중화민국 지린성 허룽현 용정 명동촌[2]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룽징시)
사망
1945년 2월 16일 (27세)
일본 제국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후쿠오카 형무소
학력
숭실학당 중퇴
(현 숭실중・고등학교)
연희전문학교 영문학과 졸업
(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학과 중퇴
(현 릿쿄대학 문학부 문학과 영미문학전수)
도시샤대학 문학부 영문학과 제적
종교
개신교(장로회)
직업
시인
가족
아버지 윤영석, 어머니 김용
형제자매 윤일주, 윤광주, 윤범환, 윤혜원
유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정음사)
1. 개요2. 상세3. 생애
3.1. 사망과 의혹4. 사조5. 성격과 일화6. 작품
6.1.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7. 중국의 자국 시인화
7.1. 윤동주와 코리안 디아스포라7.2. 한국인과 조선족간의 민감한 문제8. 기타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연변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한국의 시인.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저항시, 삶의 고뇌에 대한 시로 민족의 길과 다른 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부끄러움을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사망한 지 반 년 뒤에 조선이 일제로부터 독립했으므로 생전에 조국의 독립을 보지는 못했다.
2. 상세[편집]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의미인 ‘해환(海煥)’이다. 동생인 윤일주는 ‘달환(達煥)’, 갓난아기 때 세상을 떠난 동생은 ‘별환’이다.[3][4]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특유의 감수성과 삶에 대한 고뇌,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작품들로 인해 대한민국 문학사에 큰 기여를 한 문인이다. 더군다나 1930년대부터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의한 문인들의 절필, 변절이 심화되어 1940년대쯤부터는 다수의 문인들이 절필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했기 때문에, 윤동주는 이육사와 더불어 1940년대를 대표하는 민족시인으로 추앙받는다. [5]
북한의 경우 김일성이 말년에 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시인 윤동주는 평양 숭실학교 졸업생이다."고 간단하게 언급한 적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주간신문 《문학신문》에서도 긍정적 논조의 윤동주 평론이 기고된 적이 있다. 일각의 편견과 달리 북한 문학계에서는 윤동주와 그의 시에 대해 알고 있고 관련 논의도 하고 있다.[6] 또한 북한 문학계는 윤동주에 대해 '일제말기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1989년 문익환과 같이 방북한 황석영에게 백인준 당시 조선문학예술총동맹[7] 중앙위원장은 "자신이 윤동주와 같은 하숙에 있었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 증언은 2013년 KBS 보도에 의해서도 다시금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렇게 북한도 윤동주를 매장하기는커녕 나름 기억하고 있지만 한국처럼 어린이와 청소년 학교교육에서 윤동주와 그의 시를 가르치진 않는다. 문학계 내에서만 논의·소비되고 대중화되지는 못한 상황이다.
3. 생애[편집]
만주 북간도 명동촌 일대, 지금의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에서 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윤동주는 기독교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윤영석(尹永錫)과 어머니 김용(金龍)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이었다. 출생 당시, 위의 손윗 누이 둘이 연이어 요절한 후에 태어난 아이라 집안의 기대가 남달랐다고 한다.
명동촌[8]은 윤동주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그 마을의 실질적인 정신적 리더는 목사인 김약연이었다. 그는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일제에 맞서 저항하기 위해 민족의 지도자를 신앙으로 양육한 외숙부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자랐다. 항일과 통일 운동으로 유명한 민족주의자 문익환 목사도 바로 이 명동촌 출신이며, 윤동주와 함께 자랐다. 참고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도 거사전 이 명동촌에서 사격 연습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고 알려져 있다.
명동촌 사람들은 항일 감정으로 인해 일본을 일본이라 부르지 않고 왈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9] 이 때문인지 윤동주는 18살인 1935년 평양에서도 일본 순사들 멱살 잡기가 연일 화제였던 숭실학교[10]로 건너왔으나 일제가 신사참배운동을 강요하자 문익환 등과 함께 동맹 퇴학을 감행한다.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지를 자퇴함으로써 드러낸 것이다. 숭실학교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38년 3월 19일에 정식으로 폐교한다.
유소년 시절 대부분을 만주에서 보냈기에, 윤동주의 시에는 만주, 북간도에 대한 묘사가 빈번하다. 별 헤는 밤이 대표적이다.
숭실중을 거쳐 진로를 결정할 무렵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 문과[11]로 진로를 정하고, 경성에 있는 연희전문학교 문과[12] 진학을 희망한다. 연희전문학교는 민족주의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선어를 가르치고 태극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13] "문학은 민족사상의 기초 위에 서야 하는데 연희전문학교는 전통과 교수, 학교의 분위기가 민족적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야." 라고 후배에게 이야기 할 정도. 당시에도 연희전문 문과는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당시 위당 정인보 선생(역사학자, 건국훈장 독립장), 외솔 최현배 선생(국문학자, 건국훈장 독립장) 같은 한학자(韓學者) 이외에도 일제 식민사관에 맞서 자본주의 맹아론을 처음 주장한 백남운(경제학자), 유물론적 경제학 이론을 도입한 이순탁(경제학자), 노동규(경제학자)등 많은 학자들이 일제에 직접적으로 대항할 뿐 아니라 관념과 학술적으로도 맞서 싸웠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합격자 명단
붉은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는 사람이 윤동주와 송몽규[14]
연희전문 문과는 일제강점기 때 국학 연구의 중심이었던 학교이기도 했다. 이때 학과 문제로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 '문과 졸업하면 신문기자밖에 더 되냐' 는 반대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의대나 법대를 원했고, 윤동주는 문과를 고집하여 매일 이 문제로 밥그릇, 물그릇이 날아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아버지와의 싸움을 말리고 고생 끝에 윤동주는 문과로 진학을 가게 된다. 실은 할아버지도 아버지에게 동의했으나, 너무 싸움이 심해져 어쩔 수 없이 중재에 나선 모양이다.
결국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로 진학에 성공, 서울에 살던 시기에 많은 명시가 쓰였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전횡이 갈수록 심해지던 시기 무사히 졸업하고, 졸업 후 학문에 대한 열의로 유학을 결정, 1942년 일본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흉흉해진 도쿄의 분위기로 인해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친우(親友) 정병욱(1922-1982)과 함께
하지만 그는 함께 교토에서 조선인 유학생으로 지낸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1943년 일본제국 경찰에게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2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윤동주의 시에 담겨 있는 독립 의지로 인해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고, 여러 자료 등을 통해 살펴보면 이미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된 바 있는 송몽규는 일제의 요시찰인이었다. 송몽규가 교토에서 사촌이자 유학생인 윤동주, 교토3고학생 고희욱과 어울리며 조선독립, 민족계몽에 대해 논의했고 특히 "징병제를 이용,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을 체득, 일본이 패전에 봉착할 즈음 무력봉기를 일으켜야 된다"고 주장했으며, 윤동주가 이에 동의해 위 3인 외 다수의 조선인 유학생이 더해진 민족주의 그룹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파악한 일본제국 경찰은 송몽규, 윤동주를 포함한 조선인 유학생 그룹을 체포한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일본 내무성 1943년 12월 특고월보, 일본 사법성 사상월보 109호, 교토지방재판소 송몽규, 윤동주 판결문에 나와 있다(번역본은 송우혜 저 '윤동주 평전' 수록) 윤동주, 송몽규와 같이 투옥되었던 고희욱은 제3고등학교 재학생이었는데, 담당검사가 다름 아닌 3고의 선배. 독방에 수감되었지만 기소유예로 6개월 만에 풀려났다. '윤동주 평전'의 저자 송우혜 씨가 생존한 고희욱 씨를 직접 만나 관련 증언을 듣고 평전에 실었다.
수감 후 윤동주는 2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수감된 뒤 1년 7개월 뒤인 1945년 2월 건강이 악화되어 불과 27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요절했다. 불과 광복 6개월 전의 일이었다.
죽기 직전, 윤동주가 무언가를 말했지만 일본인 간수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하는데, 어떤 전기에서는 한국어가 아니었겠느냐고 추측하고 있고 '아'라는 외마디의 소리였을 가능성도 있다. 윤동주 사후 육필 원고를 바탕으로 펴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친구 강처중이 그를 생각하며 쓴 발문이 있다. 당시 간수가 말하기를, 윤동주가 마지막으로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죽었는데, 이 소리가 마치 대한독립만세라고 하는 듯 들렸다고 한다.
3.1. 사망과 의혹[편집]
당시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동주는 정말 건강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윤동주가 복역 중 생체실험을 당해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있다.
윤영춘이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러 후쿠오카 교도소에 들를 당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동주와 나는 계속 주사를 맞고 있어요.그 주사가 어떠한 주사인지는 모릅니다." 라는 말을 하여 오래 전부터 살해당한 거 아니냐는 추측이 많았다. 그리고 1980년 5월호 현대문학지에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고노오 에이치씨가 윤동주와 송몽규가 혈액대체 실험을 위한 실험 재료로 쓰여서 사실상 살해당했다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윤동주의 죽음과 얽힌 음모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 일본군은 전시 체제라 생리식염수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후쿠오카 형무소 내에서 독립운동을 한 괘씸죄로 윤동주가 실험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보고 싶은 사람은 727회를 보면된다. 방영날짜는 2009년 8월 15일이다.)
2000년대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해제 문서 중에서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문서에 당시 큐슈제국대학이 실제로 연구하고 있던 대체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생리식염수 대체용액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쓰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혈장대체용 생리 식염수이다. 이것은 전쟁 당시 수요 때문에 미국도 연구한 것인데, 다만 일본의 경우는 기술상의 문제로 해수를 생리식염수로 바꾸는 실험을 했다.기사 딱히 고문당한 일도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생체실험이 윤동주의 사인으로 추정되었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당숙인 윤영춘이다.[15][16] 일각에서는 뇌일혈이라는 사인도 일제의 조작 아닌가 했지만 해수 속의 세균감염의 증상과 비슷한 것으로 확인된 상태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동주에서도 주사로 인해 사망했다고 묘사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던 주사로 인해 1800여명이 사망했다고 언급된다.
다만 이 숫자와 실험 내용은 과장되고 불분명하다는 주장도 있다.기사 일제가 조선인 정치범들에게 행했다던 생체 실험이 그 악의성과 피해자 수 측면에서 1차 사료(행형통계연보, 전시행형실록 등)와 상반되거나 과장되었다는 것이다.[17] 또한, 시대적 상황과 증거라고 주장한 것들이 서로 상반되어지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의혹이며 정설이라고 볼 수는 없다.
4. 사조[편집]
시는 15살 때부터 썼고, 만주에서 지내던 시절의 시는 대체적으로 신변잡기를 소재로 삼은, 발랄한 형태의 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20세를 넘어가면서부터 점점 삶에 대한 고뇌, 조국의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고뇌가 시의 주제로 등장하게 되지만 30년대까지는 대체적으로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 옛날의 평화로 돌아가고 싶다는 노스텔지어적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연희전문 시절인 1941년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삶에 대한 고뇌,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주제의식이 한층 더 강렬하게 표현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윤동주의 유명한 작품인 별 헤는 밤, 서시[18], 자화상, 참회록 등도 이 시기의 작품들. 더불어 그는 시를 쓴 날짜를 모두 적어둬 그의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지인 강처중, 정병욱 등이 윤동주의 자필본을 기초로 1946년에 출판했다. 세간에는 정병욱(1922~1982)이 이 시집 출간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대외적으로는 윤동주의 동기인 경향일보 기자 강처중이 앞장서고 편집 교정 등 출판 실무는 국문학자인 정병욱이 맡아 하였다. 여기에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등이 합세하여 원래 19수의 시만 있던 시집(1946)이 31편의 시집(1948)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이 시집을 간행할 적 윤동주의 도시샤대학 동창이자 경향일보 주필이던 정지용이 도움을 주었으며 추천사를 써준 것도 정지용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 정지용과 강처중은 각각 납북, 월북 등의 사정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이름을 언급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바람에 정병욱 교수만이 도움을 주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윤동주의 7살 터울 여동생 윤혜원씨가 1948년 12월 고향 집에서 윤동주의 미발표시(85수)들을 품에 안고 내려와 현재의 116편의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 되었다. 본시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자선시집을 3부 만들어 자신이 한 부 갖고 스승 이양하(1904~1963)에게도 증정했는데 정병욱이 증정받아 보존한 유고만 남고 나머지는 여러 사정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범우사(윤동주 시집) 참조. 기사1 기사2
5. 성격과 일화[편집]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윤동주의 성격은 같은 하숙집에서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의 회고록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가 있는데, 학교 갈 때나 사석에서 만나면 매번 옷이나 신발이 새것처럼 깨끗하고 반듯했다고 한다.
2016년 3월 6일 KBS에서 「불멸의 청년, 윤동주」가 방송되었다. 해당 방송분에서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1년 후배인 유동식 교수에 의하면 윤동주는 피부가 희고 깨끗했는데, 됨됨이 자체도 깨끗한 선비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시도 그렇지만 윤동주 자체가 맑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조용했지만 항상 미소 짓고 있었다고 한다. 발간되자마자 직접 구입해 이사할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는 정지용 시집에는 인상 깊은 구절에 옆줄을 치고[19]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적어놓은 글귀도 있다. 정지용의 시를 읽으며 동시를 재평가하게 되고, 자신도 동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유품으로 남아있는 책들을 보면 인상깊은 구절에 옆줄을 치고 중간중간 자신의 감상이나 소견을 메모한 흔적이 있다.
학창시절에는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며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가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배웠다고 한다. 북간도에서 기독교계 학교는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라 일제가 학교 담장조차 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북간도에서 다니던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중학생 때는 '가톨릭 소년'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는 등, 어릴 적 그가 기독교 문화의 토양에서 자라난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가 청년기를 넘어서까지 기독교 신앙을 간직했는지는 잘 알려져있지 않으나, '십자가' 등 그의 시들을 통해 유추해볼 때 적어도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다고 생각된다. 간도에서 어릴 적부터 기독교계 학교를 다녔던 것이 추후 상급 학교로 진학할 때 서울 소재 기독교 학교인 숭실학교나 연희전문학교를 선택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후에도 당시 일본에서 흔치 않던 기독교계 대학이었던 릿쿄대학[20]에서 유학을 했었는데,[21] 당시 교목(校牧)이었던 다카마츠 다카하루[22] 교수에게 특별히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윤동주는 남이 자신의 시를 지적하는 것에 따라 고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병욱의 지적이나 조언만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별 헤는 밤의 '그러나~'로 이어지는 마지막 연은 정병욱의 조언으로 추가된 것이다. 이 방송에서 정병욱의 회고록인 「동주 형의 기록」도 인용되는데, 그에 의하면 항상 남보다 먼저 느끼고 깊이 생각하고 무엇이든 예사로 넘기지 않았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거나 유심히 쳐다보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길가에 난 이상한 풀에 꽃이 피어있으면 꺾어서 단춧구멍에 꽂고 다녔다고 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육필 원고를 세 부 만들어 한 부는 정병욱에게 주고, 다른 한 부는 스승인 이양하 교수에게 전했는데, 제자의 안위를 걱정해 원고 출판을 만류했다고 한다. 한글과 한국어 모두 엄격히 금지된 시대에 한글을 사용해 한국어로 쓴 시를 출판한다는 것은 시인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것이었다.게다가 윤동주의 시를 보면 알겠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도 내포되어 있으니 스승으로서는 만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포기하지 못해서 용정의 아버지께 보여드렸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출판하지 못했다고. 학창시절에 이미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고 한다. 돈이 많아서 유학까지 간 것이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와중에도 계속 공부한 것이다. 이때 윤동주는 300원(현대의 가치로 약 300만 원)이 없어 출판하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도시샤대학 영문학과 동기였던 모리타 하루에 의하면 키가 크고 항상 바른 자세였으며, 자신을 '윤동주'라 소개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학교 동기였던 기타지마 마리코에 의하면 동급생들에게 한국어로 아리랑을 들려준 적도 있다고 한다. 누군가가 윤동주에게 노래를 청하자 활짝 웃으며 한국어로 아리랑을 불렀다고. 약간 허스키하고 저음인 목소리였는데 노래를 잘 했다고 한다. 송몽규와 체포될 당시에는 1년 가까이 일본 경찰에게 미행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1년 동안 미행한 끝에 내건 죄목이 '독립운동(개정치안유지법 5조 위반)'이라는 것이다. 다행히 시는 편지와 함께 강처중에게 보내 무사할 수 있었는데, 정병욱이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항아리에 담은 뒤 마루 밑에 묻어서 보관했고 편지는 모두 태웠다고 한다. 윤동주와 그 가족들의 묘는 문화대혁명 때 파헤쳐지는 바람에 소재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1985년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나선 오무라 마츠오 교수가 비석을 찾아내면서 다시 윤동주의 묘가 드러났다. 발견 당시 무덤은 봉분조차 없었고 완전히 버려져 폐허였다고 한다.
위의 방송에서 2010년에 공개된 윤동주의 재판 판결문도 나왔는데, '조선민족의 실력과 민족성을 향상해 독립이 가능하게 한다.', '장래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게 될 때 우수한 지도자를 얻어 민족적 무력봉기를 결행해야 한다.',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를 위한 것이라는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한다.' 등 윤동주의 독립 의지와 저항정신이 엿보이는 구절이 여럿 있다.
강처중에 따르면 소심하고 좀체 말이없는 성격탓에 친구가 없을것이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의 방엔 친구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낮이고 밤이고 친구들의 부름에, 산책권유에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도 별말없이 그저 묵묵히 걸었고 얼굴은 침울했다고 한다. 그도 가난했지만 항상 돈을 빌려달라는 친구들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해서 항상 그의 외투와 시계는 부지런히 전당포를 드나들었다고 한다.
책을 볼 때는 책에 줄이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정독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전시물자수탈에 의해 학교 밥이 제대로 되지 않은 양과 맛임에도 불구하고 배고파하는 후배들에게 밥을 나눠줬다고 한다.
시내에서 영화를 본 날이면 중국집에서 한잔하기도 했는데 술에 취해도 남의 뒷담화 한 일이 없었다.
밤에 공부나, 시를 쓰다가 산책을 즐겨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후배 정병욱을 불러서 같이 산책을 갔다고. 정병욱이 5살이나 어린 후배임에도 반말을 전혀 하지 않고 '정 형' 이라 부르면서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가 자신의 친필 원고 1부를 정병욱에게 맡길 때, 표지에 '정병욱 형 앞' 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볼 수 있다.[23]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의 기준으로도, 지금의 기준으로도 엄청난 미남이기에[24], 일본유학 당시 여러 일본 여인네들을 울렸다는 도시전설도 존재한다.[25] 이 때문인지 백석과 임화, 황순원과 함께 수업시간에 여학생들에게 자주 관심을 받는 시인이다. 윤동주를 회고한 글에 이렇게 쓰여 있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 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美男)이었다.’
- 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 中
잊지 못할 윤동주를 여기서 볼 수 있다.
곱상한 외모 때문에 유약한 샌님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운동을 좋아했으며 특히 축구를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북간도의 조선인 민족학교에선 체육을 굉장히 중요시하며 체육교육을 장려했는데 그 때 축구가 가장 인기 있었던 과목이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말에 따르면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 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 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라고 한 바 있으며 친동생 윤일주 씨도 "은진중학교 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고 하였다기사 참조
6. 작품[편집]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밑의 목록은 1941년에 시집에 실으려 했던 24편의 시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서시(序詩)
자화상
소년
눈 오는 지도
돌아와 보는 밤
병원
새로운 길
간판 없는 거리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 후에 김주원 작곡가가 노래로 만들어 팬텀싱어3에서 고영열, 존 노, 김바울, 정민성이 불러 많이 알려졌다.
십자가
바람이 불어
슬픈 족속
눈감고 간다
또 다른 고향
길
별 헤는 밤
쉽게 씌어진 시 - 현대 국어의 어문 규범에 따르면 '쉽게 쓰인 시' 또는 '쉽게 써진 시'.
참회록
간
황혼이 바다가 되어
봄
국어영역에서 꽤 자주 나온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이 많고, 주제의식 또한 분명한 데다[26], 1940년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민족 시인인 이육사의 시보다는 은유의 난이도가 낮고, 이상처럼 시에 어려운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기에 수험생들에게 사랑받는 작가.[27] 시에 담긴 주제의식 또한 학생들에게 상당히 건전하고 권장할 만하기에 출제위원들도 잘 출제하는 듯. 다만 자주 나오는 만큼 내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위에서 말한 사실이지만, 친일 행적이 없는 작가이기에[28][29] 유난히 출제위원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소문이 있다. 2011년 수능에서도 그의 시 <자화상>이 또 출제되면서 모든 장르의 작가를 통틀어 수능에서 가장 많이 출제된 작가가 되었다. 2020 수능에서도 그의 시 <바람이 불어>가 등장했다! 또 그의 시가 일본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30]
시인 백석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고[31] 백석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기 세계를 온전히 펼치기 전에 요절해 후대 학자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준다.
6.1.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편집]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32], 김소월의 <가을 아침에>, 필자불명의 <편지>[33] 등
특히 <편지>는 윤동주가 지은 동명의 시가 있어서 혼동된 듯하다. 필자불명의 <편지>와는 달리 윤동주의 시는 '흰 봉투에 눈송이를 넣어 누나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다'는 내용의 시이다.
아래가 잘못 알려진 필자불명의 <편지>의 전문.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그리고 이것이 윤동주 시인의 <편지>이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왔읍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온다기에
심지어, 잘못 알려진 시를 부산일보에서 확인도 안하고 기사에 실었다.#게다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윤동주의 시로 잘못 알려진 작품들을 바로잡는 기사도 있는데, 윤동주 作이라고 아는 시들과 대조해 보는 것도 좋은 일.#
7. 중국의 자국 시인화[편집]
윤동주의 묘소는 윤동주가 태어난 북간도에 있는데, 윤동주가 죽은지 얼마 안 되어 해방이 되고 관동군이 무너지고 소련군이 쳐들어오고 만주가 공산화되는 현실속에서 윤동주의 가족과 친인척들은 모두 북간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40년 넘게 북간도에 방치되어 있었다.[34] 그러다 어느 일본인 교수가 마침 중국에 가게 되자, 유가족들이 그의 묘소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는데 다행히 윤동주 묘소가 찍힌 사진을 유가족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92년 한-중 국교가 수립된 뒤 육촌동생 윤형주가 재종형인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갔더니[35] 풀이 무성하고 비석이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석도 세우고 묘소도 제대로 정비했다. 그런데 생가와 묘소를 새로 꾸미는 과정에서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포장해 버린 것이다.
윤동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명분이 섰다.
中 동북공정이 덧칠한 항일시인 윤동주 생가. 대문 경계석에 '중국 조선족'으로 국적 바꿔 / 대표작 '서시'도 한자로 번역한 조형물 설치했다.
7.1. 윤동주와 코리안 디아스포라[편집]
중화인민공화국법상 <조선족> 은 <민족(民族)은 조선민족이며 국적(國籍)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명확한 합의를 가지고 있다.[36]
재만 조선인들의 조선족이라는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는 대장정 이전의 1931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아닌 인민공화국 건국, 즉 1949년 10월 1일 이후부터다. 따라서 윤동주는 조선 출신 재만 조선인의 후예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상단에서 서술한 중국측의 공작과 같이 중국 국적을 소유한 "조선족"이 아니다. 윤재옥은 고종 즉위 22년인 1886년 북간도로 이주했고 그의 증손 윤동주는 1917년에 출생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사망했다.
윤동주는 그렇다면 한국인인가?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으며. 한민족으로서의 민족개념 외에 국가로서의 근대 한국(韓國) 개념은 개화기인 1897년 8월 17일 광무 건원 대한제국[37] 시기부터 문헌상 실질상 양면 모두에서 존재하였다. 윤동주가 디아스포라 조선인으로 윤동주 생전에 한국의 개념이 부재했기에 윤동주는 한국인이 아니고 되려 현대에 일컬는 조선족의 정체성과 직접적 연관점을 찾을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현재 조선족은 남북한의 국적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고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시문학의 현대 연구에서 만주, 중국지역 대비 재일 조선인 측에 코리안 디아스포라적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례가 훨씬 많은 원인 중 하나다.[38]
결론적으로 얘기해 윤동주가 한국국적이냐 중국국적이냐 하는 논란은 별 의미가 없다.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현대 국가의 기준으로 과거를 재량하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윤동주 본인은 스스로를 '조선인'이라고 지칭했다. 윤동주나 윤동주의 선조는 한국(대한제국 혹은 대한민국)에 거주한 바가 없다. 윤동주의 선조는 조선인으로서 19세기 후반 간도로 이민을 갔다. 당시 간도는 조선의 8도 행정구역 밖이었고 청나라 역시 방치해두고 있던 변방지역이었다. 윤동주 출생 시점에는 중화민국 영토였고, 1930년에는 일제 만주국이 됐다.
윤동주의 활동 시기인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간도와 한반도가 모두 일제 치하에 있었으므로 굳이 윤동주가 본인의 국적을 따질 일이 없었다. 국적으로는 일본인, 민족으로는 조선인이었을뿐이다. 그는 조선인 즉 조선민족의 광복을 꿈꾸었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광복을 원한 바는 없다. 더군다나 남북 분단은 상상도 하지 못하던 시절이다. 윤동주가 죽지 않았다면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중 어느 쪽을 택했을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굳이 따지지면 윤동주는 한국인이 아니라 한인(韓人) 저항시인, 조선인 저항시인이라 하는 게 맞다. 그는 간도에서 태어난 조선인 이민자 4세이며, 일제시대 하나의 생활권이던 용정과 평양과 서울과 도쿄와 교토에서 자라고 활동했다. 현대의 지도로 보면 4개국을 넘나든 것이다.
그에 대한 직접 지분을 따지자면 고향사람들 즉 연변 조선인(現 중국 조선족)들이 가장 큰 애착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윤동주는 연변 조선인뿐 아니라 모든 한민족의 자유를 갈구했으며 그의 가족이 중국 공산화 이후 대한민국으로 이주했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인들 역시 그를 자국인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크다. 물론 북한에서도 윤동주는 민족시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윤동주 본인의 뜻과는 거리가 먼 국적 문제에 매몰되기 보다는, 모든 한민족(한국인, 중국 거주 조선족)의 위대한 시인으로 기억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7.2. 한국인과 조선족간의 민감한 문제[편집]
위와 같은 기념이나 추모행태를 동북공정같은 걸로 생각해서 윤동주를 중국인화하려 한다며 중국 정부를 성토하기는 하지만, 정작 중국 중앙정부는 위와 같은 일개 소수민족 시인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렇게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의 대표적 인물로 자리매김 하려는 인물들은 대부분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인사들이다. 또한 이는 동북공정과는 관련이 없다.
여기서 조선족이 주장하는 윤동주가 조선족 역사의 일부라는것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사의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이지 그가 중국인이라 주장하는것은 아니다. 윤동주가 태어날때는 군벌이 간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가 유년기를 보낼 때 일제가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간접통치하고 있었으니 윤동주와 중국의 접점은 없다 볼 수 있다. 현 조선족 들의 선조도 1948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전까지는 중국 국적을 받지 않은 사실상 무국적 또는 만주국 국적인 상태였다.
한국인 입장에서야 중국 조선족들이 "민족 공동의 시인"으로서 인정해주길 바라겠지만, 민족주의의 확산을 강력히 우려하는 전체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실제로 이는 매우 민감한 문제다.[39] 조선족들의 입장도 사실 이해할 만한데, 20세기 초반에야 형성된 중국 조선족은 대표적인 문학이나 시인이 드물기에, 윤동주야 말로 자기 고장 출신의 거의 유일한 네임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윤동주를 조선족 차원이 아니라 남북한을 아우르는 전민족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이는 오히려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억제하고 있는 중국 중앙정부의 어그로를 끌 우려가 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중국 당국에 의해 이런 "중국조선족" 출신 민족시인로서의 추모마저도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일 뿐.
이런 역사 인물의 국적 문제는 천년 이상 한반도에 자리잡고 단일민족으로 정체성을 확립해온 우리에겐 생소해도 유럽에서는 굉장히 흔한 일이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만 해도 독일과 폴란드가 자국인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로 글을 쓴 유대계 작가 프란츠 카프카는 독일 작가로 봐야하는지 체코 작가로 봐야하는지 논란이 되는 가운데 이스라엘이 자기네 작가라고 꿋꿋하게 우기고 있다. 그레고어 멘델도 멘델의 혈통 자체는 독일계 오스트리아인이지만 체코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가 자국인임을 주장하고 있다.
8. 기타[편집]
2010년 12월 30일, 구글에서 그의 탄생 93주년을 기념하여 제작한 구글 두들 로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그런데 소수 의견이기는 해도, 윤동주가 정말로 항일 시인이었느냐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고 윤동주가 친일 문학가였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이들의 주장은 대체로 윤동주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자 시인이었다는 것인데, 딱히 거창하거나 대단한 일을 이루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즉, 사상적으로 보면 중립적이었다는 것. 다만 한국의 학계가 특히 근대 일제강점기에 한민족 역사에 긍정적인 획을 그은 한국인(조선인)을 어쨌거나 마치 항일의 큰 뜻을 품은 것처럼 다소 영웅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의견에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윤동주는 적어도 민족적 배반을 하지는 않고 본인의 정체성과 뜻을 ― 그게 굳이 항일이 아니라 개인적인 문학가로서의 뜻이었다고 할지라도 ― 굽히지 않은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TV문학관 특선으로 저항시인 3부작이[40] 방영되었는데, 윤동주 편에서 송승환이 열연했다.
https://youtu.be/0SZ3rH0BEs4
2011년 MBC스페셜에서 윤동주를 기념하는 일본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2014년 최근에는 EBS <라디오 인물열전>[41]에 그의 삶이 총 6부작으로 그려졌다. 이 라디오 드라마는 윤동주 역 성우의 윤동주의 실제 성격을 고려하지 못한 목소리 연기로, 윤동주의 팬들이라면 감정이입을 못하고 이따금 폭소를 쏟아낼 수도 있을 것이나, 마지막 6부에서는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이 저려올 것이다. 추가로, <윤동주 평전>을 읽은 분들이라면 이 드라마가 그 책을 많이 참고하였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도 좋을 것이다. ebs 라디오 인물열전 1~6부작
숭실중학 재학 시절에 찍은 사진 중에 앞에는 정일권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앉아 있고, 그 뒷줄의 가운데에 문익환 목사[42]가 있고, 그 오른쪽에 윤동주가 서있는 사진이 있다. 문익환의 왼쪽 사람이 장준하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젊은 시절의 장준하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 생김새가 다르기에 확실히 장준하가 아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코만 봐도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익환의 왼쪽에 서있는 분은 코가 휘어져 있는데, 젊은 시절 장준하의 코는 휘어져 있지 않다. <윤동주 평전>의 3번째 개정판을 보면 이 사진에 관한 이야기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이 책에 실린 문익환 목사의 말에 따르면 "이 사진은 은진중학교 출신으로 숭실에 전학 간 학생들끼리 모여서 찍은 것이다. 앉아있는 친구는 이영헌이라고 장로회신학대 교수를 지낸 사람이고, 내 왼쪽은 잘 아는 윤동주, 오른쪽은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은 잊었다. 그 사람은 숭실시절 이후 전혀 보지 못했다."라고 하였고, 장준하 선생은 은진중학교에 다닌 적이 없을 뿐더러, 선생의 유족들 또한 "사진에 있는 분은 장준하 선생님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증언하셨다고 이 책의 저자 송우혜는 말한다.
문익환 자신이 장준하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장준하와 윤동주가 친분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사진은 정일권 항목 참조.)
또,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문익환 본인이 말하길, 숭실중학에 한 학년 아래로 진급하게 된 윤동주가 평소에는 물욕이 없는 사람인데 유난히도 자신의 모자와 바꿔 달라고 조르기에 문익환이 윤동주에게 호떡을 실컷 얻어먹고 모자를 바꿔 쓴 후에 찍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일권도 숭실중학에 다녔는가하는 점을 따져야 할 것이다. 저 사진은 윤동주와 문익환이 숭실중학에 다니던 시절에 찍은 사진이니 말이다. 고로,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정일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덧붙여, 숭실중학의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일제가 숭실중학에 압력을 행사하자 윤동주, 문익환은 자진 퇴학[43]을 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북간도 유일의 5년제 학교인 광명중학으로 진학했다. 문익환 목사의 말에 의하면 이때의 일을 '솥에서 뛰어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광명중학이 일본식 교육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윤동주, 문익환과 정일권은 이 광명중학의 동창이다. 이 광명중학을 문익환은 5학년으로 편입했고, 윤동주는 4학년으로 편입했으니 각기 1년, 2년을 다녔고, 이때 윤동주의 성적표를 보면 일본어 성적이 제일 나빴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윤동주가 일본어로 수업을 받은 것은 이 광명중학교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전에 다녔던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숭실중학은 민족주의계 학교로 수업을 모두 조선어로 했으니, 전 과목을 일본어로 수업했던 광명중학의 성적은 나빴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고종 사촌인 송몽규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 연희전문학교를 같이 다닌 동갑내기 절친한 벗이자 사촌형이다.
의외일지도 모르지만 일본인들 중에서도 팬이 존재하며 연구자[44]도 있다. 시 낭송회를 열기도 하는등 여러모로 팬층이 꽤 있는편. 노년층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중년과 청년층들도 꽤 자주 보인다.[45]
2015년 일본의 중견 시인이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일본어로 완역했으며, 이에 대한 일본인 독자들의 평가는 "서시를 쓴 시인이 누구인줄 몰랐지만 이 시를 익히 알고 있었다. 작가가 윤동주였나" "윤동주의 시 몇 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천재성이 있는 작가였나" 라는 극찬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윤동주 시인의 시는 전부 작가가 어휘선택을 쉽고 간결하면서도, 영혼의 울림이 있게끔 고르고 고른 시어들로 구성된 시라 모르는 사람이 봐도 보통 수준이 아닌 것임을 파악 가능한 것. 대신, 이것을 한자나 어순이 비슷한 일본어로 번역할 때에는 높은 싱크로율로 일본인들도 찬양하는 명시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기타 영어나 외국어로 번역되면 무슨 학생이 쓴 시가 되어버린다는 단점이 있다.[46]
일본인들조차 그 재능을 인정하는 천재. 위에서 언급했듯 일부 일본 교과서에도 '서시'가 실려 있다. <별 헤는 밤>의 첫 대목인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는 한국인을 넘어 일본인들도 울려버린 명 구절이다.
우연히 윤동주의 사진을 본 후 "이런 미남이 무슨 시를 썼나??"하면서 찾아보다 빠져들었다는 예도 보이며, 윤동주의 시를 알게 된 후 윤동주의 죽음에 대해서도 알아보다 충격을 받았다는 예도 있다.
가수 윤형주의 육촌형이며 건축사학자이자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였던 윤일주의 친형이기도 하다.
그가 일본에서 체포되기 전 마지막으로 다녔던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대학에는 현재 윤동주의 시비(詩碑)가 서 있다. 시비에 적혀 있는 시는 서시. 그의 친필과 일본어 번역이 적혀있다.[47] 이 시비를 보기 위해 다수의 한국인 관광객이 일본 교토여행 중 도시샤대학 캠퍼스를 찾기도 한다. 시비 위에는 한국인 관광객이 놓은 한국과 관련된 물품이 놓여져 있다. 가끔씩 소주나 담배, 동전 등도 보인다. 그가 일본에서 약 6개월 정도 다녔던 도쿄에 위치한 릿쿄대가 성공회 미션스쿨인 관계로 성공회대학교와 자매결연하였으며, 이런 식으로 한 다리 건너 릿쿄대학 동문 등 관계자들에게 윤동주가 알려져 윤동주 추모 감사성찬례, 시 낭송회 등을 열기도 한다.
상기한 도시샤대학 시비 말고도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윤동주의 시비가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수험생이 배우는 '윤동주=자아성찰'의 코드는 소설가 마광수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윤동주 연구'에 의해 정립되었다. 오늘날 윤동주가 국민시인으로 발돋움하기까지 지대한 공로를 세운 것이 바로 마광수. 어째 현재의 마광수에 대한 인식은 "야설이나 쓰는 노망난 할배" 정도지만(...) 모종의 사건[48]으로 체포되기 이전에는 유망한 국문학자로 기대를 받았는데 바로 이 논문 덕이다. 논문은 1986년, 2005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윤동주의 생을 다룬 영화 '동주'가 2016년 2월 17일 개봉했다. 감독은 이준익. 윤동주 역에는 영화 쎄시봉에서 6촌 동생으로 출연한 배우 강하늘이 캐스팅되었다. 흑백으로 촬영되었고, 일본 형무소에서 취조받는 씬과 과거를 번갈아 가며 스토리를 이어가는 연출. 평단의 평은 전체적으로 좋다.
<바람의 화원>, <뿌리깊은 나무> 등으로 유명한 이정명 소설가의 책 중 "별을 스치는 바람"이라는 소설이 있다. 윤동주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서 벌인 일과 간수의 죽음, 그리고 우리말의 아름다움 등이 시각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스토리도 흥미진진하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간수의 죽음을 수사하는 다른 간수가 윤동주 시인과 죽은 간수, 그리고 수감자들 사이의 비밀을 알아가는 내용이다.
일본 영화 <안녕, 쿠로(2003)>의 엔딩으로 교장이 윤동주의 <서시>를 낭독한다. 자막이 별헤는밤이라고 적어놨다.
무한도전 위대한 유산에서 개코, 황광희, 오혁이 윤동주 시인을 주제로 한 "당신의 밤" 노래를 제작해 불렀고, 여러 음악 차트에서 오랜 기간동안 1위를 차지했다. 윤동주 시인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다는 내용의 가사로 "서시", "별헤는 밤"의 가사를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모임(詩人尹東柱を記念する立教の会)"이 12년간의 노력끝에 2017년에 교토 우지시 강변에 윤동주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05년부터 일본, 한국의 900여명의 사람들에게 모금을 받았으며 윤동주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해 "윤동주기념비건립준비"모임에서 12년간 30번 이상 본청에 요구하였으니 정말로 노력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2019년 8월 15일 KBS2에서 3.1운동 100주년 기획 윤동주 콘서트 별 헤는 밤 특집회를 방영했다. 실제 녹화는 7월 18일에 했으며 배우들은 시 낭송을, 가수들은 노래를 부르며 그를 추모하는 콘서트를 가졌다. 사회자로 김영철, 한혜진, 출연배우로 박혜수, 장동윤이 출연가수로는 윤형주, YB, 이적, 스윗소로우, 백지영, 민우혁, 포레스텔라, 다이나믹듀오가 나왔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이하림이 출연했다.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념을 기념하여 별 헤는 밤의 가사로 만들어진 노래가 있다. 보러가기
9. 관련 문서[편집]
윤동주문학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 윤동주의 집안이 윤동주의 내지 유학 문제로 '히라누마(平沼, 평소)' 씨로 창씨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북간도'는 지리적으로 모호한 개념이다. 문서 참조.[3] 윤동주의 막내 동생은 윤광주였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지내다 1965년에 사망한다.[4] 손위로 두 누이와 손아래로 여동생인 윤혜원이 여자형제로 모두 7남매다[5] 시 세계도 대단하지만 윤동주가 현대문학사 최고 정점 중 하나가 되는 이유는 변절하지 않은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6] 북한에서 윤동주와 그의 시가 금기시된 적은 없다. 관련 논의가 한국에 비해 부족한 정도이다.[7] 조선작가동맹이 가맹해 있는 단체다.[8] 동쪽은 조선을 의미, 즉 조선을 밝히는 마을이란 뜻이다.[9] 한자로 일(日)자와 왈(曰)자는 표기가 비슷하다. 왈자가 가로로 긴 모양.[10] 숭실중고등학교에서는 윤동주가 우리 학교 출신이라며 자부심을 은근 강요한다.[11] 지금의 이과-문과의 이분법이 아닌 문학과를 의미한다.[12] 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13]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있어서 1920년에 지어진 스팀슨관, 1924년 지어진 언더우드관 중앙에 태극문양이 건물에 남아있다.[14] 조선일보 1938년 4월 3일 석간 2면에 실려있다. 당시 전문학교 이상의 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매우 드물었고 통신수단도 편지, 전신 이외에는 마땅치 않았기에 신문에서 합격자 명단이 올라오는게 일반적이었다.[15] 한국의 시인(1912~1978), 영문학자, 중문학자이자 윤형주의 아버지. 윤동주보다 5살 많다. 외국어에 능통해 영문학과 중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윤영춘 본인도 윤동주가 체포될 시기 비슷하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아들 윤형주에 의하면 일본 메이지학원 고등부에 다닐 정도로 일본어에 능통했지만 본인의 수감과 5촌 조카 윤동주의 옥사를 겪는 바람에 일본에 대한 증오심으로 그 이후 일본어를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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