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사람들
끌려간 사람들의 증언 :재일사학자김광렬
Late Bloomer ・ 2019. 12. 25. 20:11
악명높던 지쿠호에 끌려간 조선인은 15만여명
재일사학자 김광렬이 50년동안 수집한 13만여건의 기록물
일본 우익의 역사왜곡에 맞서 싸워
밝혀낸 희생자 2000명
찾아낸 유골만 500위
경남MBC 끌려간사람들 지쿠호 50년의 기록

2018년 3월 경남강제동원희생자 유족을 태운 배가 일본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일본의 군함도로 잘 알려진 하시마섬에 도착했다.
2015년 7월 일본의 군함을 닮았다는 하시마섬 , 군함도는 일본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산업유산으로 인정되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하지만 군함도에는 우리 민족의 가슴아픈 사연이 서려있는 곳이었다.
경남 강제동원희생자유족들이 이 섬에 온 이유는 머나먼 이곳에서 강제노역과 수탈로 고생한 아버지의 역사를 되새기 위한 것이엇다.
19세기 후반부터 미쓰비시는 수많은 조선인을 데려와 석탄을 채굴하게 한다.
지하 1000미터, 섭씨 40도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던 이곳은 지옥섬이라 불리워질 정도로 가혹한 현장이었다.
유족들은 아버지가 지옥섬이라 불리웠던 참혹한 현장을 둘러보고 눈물을 삼키며 어떻게해서 이 원수를 갚냐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폐광과 함께 광부들이 떠나고 섬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던 1980년대에 홀로 이섬을 찾았던 재일사학자가 있었다.
재일사학자 김광렬(1927~2015)은 그 섬을 샅샅이 훑어보고 그 현장이 허물어지기 전에 사진을 찍고 기록물을 수집했다.
방문당시 찍은 사진에는 군함도의 위치를 사진 뒷면에 남겨놓았고 강제된 조선인 무연고자 묘비 450개를 석비, 목비, 무비를 기록해 놓았다.

재일사학자 김광렬 선생은 국가가 강제징용에 관심을 가지기 훨씬 이전인 1960년데 후반부터 강제징용의 피눈물나는 역사를 증언할 사람들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 현장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 애써 왔다.
김광렬 선생님은 조선인 강제 노동자가 가장 많았던 후쿠오카 지쿠호일대 중심으로 활동했다.
지금도 후쿠오카 조선인 강제 연행 진상규명회는 그의 친구와 제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쿠호 탄전은 일본 역사상 가장 최초로 석탄을 캔 곳으로 가장 역사가 깊은 곳이다.
역사가 깊다는 것은 갱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굉장히 깊이 파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처음에는 너무도 열악한 환경으로 죄수 , 수인을 이용한 노동으로 시작된 곳으로 가혹행위가 출발한 곳이었다.
조선에서 뼈짜지게 농사를 지어도 입에 풀칠하기 힘들었던 조선인들이 맨처음 일자리를 찾아 일본에 왔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의 남성들이 군대에 입대하자 노동력이 부족하여 석탄, 토목, 건축회사에서는 조선인을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전에 건너왔던 조선인 노동력의 우수성을 맛보았고 그들은 일본인 임금보다 적은 돈을 주고도 조선인을 착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모노세키 항구에 도착한 조선인 노무자들은 후쿠오카현에 지쿠호로 끌려왔다.


기토마쿠토(후쿠오카 조선인강제연행진상규명회)
평생 김광렬 선생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던 기토 마쿠토(후쿠오카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규명회 사무국장)은 지쿠호 오노우라 노천 탄광을 이렇게 증언했다.
노천 탄광은 3헥타르가 넘고 깊이는 2m가량 파는데 지하 탄광은 일본인들이 일하고 쨍쨍 내려쬐는 햇볕과 눈보라도 피할 수 없는 노천탄광은 한국인이 일했다.
노천탄광의 땅이 더 단단해 체격이 더 좋고 힘이 센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 노천탄광에서 일했다.
조선인 마을에서는 돼지를 키워 냄새가 난다며 조선인을 피했고, 조선인들은 차별과 핍박을 많이 받았다 한다.
가이즈마 오누오라 탄광 일본인 노무자는 이렇게 증언한다.(1980년 육성녹음)
일본 근대화의 그늘에서 국적을 알 수 없는 광부들이 어두운 지하에서 죽었다.
가이즈마 오누우라 탄광 일본인 노무자의 증언 (1980년 육성녹음
가이즈마 오노우라 탄광은 후쿠오카현의 자료에 의하면 1944년 1월 기준으로 7930명이 동원되었다가 그중에 3930명이 탈출한 환경이 열악하고 노동강도가 강했던 곳이다.



지쿠호지역의 아소광업은 대표적인 조선인 강제 동원기업이었다.
산을 깍아 석회를 채취하는 석회광산은 지금도 영업중이다.
11개의 탄광을 가지고 있었고 석회 시멘트 회사로 11개의 탄광에 조선인을 동원했다.
김광렬 선생은 아소광업의 건강보험대장 12권을 얻게 되었다.
그 열두권 안에는 온몸으로 일제강점기하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온몸으로 어떻게 약탈당하고 버텨냈는지 보여준다.
거기에는 피보험자의 성명과 신상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942년 당시 전 직원의 절반에 해당되는 8000명(7996명)의 조선인 노무자들이 그 곳에그당시 조선인 노동자는 7936명으로 도주자가 4919명 사망이 56명이었다고 한다.
탈주자의 수가 그 곳이 얼마나 가혹한 노동현장이었음을 보여준다서 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2년 아소광업에서 조선인 노무자들은 최초로 노동쟁의를 일으키고16개의 요구조건을 내건다.
그 첫번째 요구가 관리자들이 상습적으로 가혹하게 구타하는 악습의 폐지를 요구했다. 조선인 광부를 관리한 것은 후쿠오카현 경찰인 특별고등계에서 관리되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별고등계는 사상범을 관리하고 조사하여 예비검속하던 경찰이다.

김광렬선생님 녹음기. 비디오카메라
김광렬선생은 강제징용의 당사자들의 육성을 녹음했다.
높은 산에서 전부 사람을 하나씩 죽여요. 그래서 굴안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 하금윤(요시쿠마 아소탄광 징용) 1989년 육성녹음
26살 때 라이또 (조명)가 폭발해 가지고 귀도 안들리고 눈도 안 보여요.
고 김철영 (미스비시 나마즈다 탄광 ) 1989냔 육성녹음
배도 고프지, 고향 생각도 나지, 언제 고향을 갈지 모르지 참 한심한 일입니다.
고 김성동 (미츠이 제 2탄갱) 1976년 녹음
일본인이 원인을 제공하여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된 것은 큰 불행한 역사이고 일본인으로서는 부끄러워해야 할 역사입니다.
불암사 후쿠오카현 미쯔비시와 계약을 맺은 사찰 주지 인터뷰

그들은 이렇게 노래 부르면 그 지옥같은 타향살이를 달랬다.
흘러가는 물결과 떠도는 구름
동서남북 나 홀로 헤메였건만
언제나 울고 싶은 나그네신세
아 떠나는 고향 잊을 수가 없네.
김광렬선생님의 50년 추적을 이끌었던 힘은 무엇일까?
내가 걱정한 것은 우리 민족성이란 말이지.
우리 민족성을 잃어버릴까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그 참혹하게 당했던 그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말입니다.
재일사할자 김광렬의 육성녹음
이러고도 일본은 강제동원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사를 외면하겠냐고 경남 mbc에서 만든 끌려간 사람들 2부 증언에서 말한다.
일본이 저렇게 오만하고 안하무인, 후안무치하게 나오는 것은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로 인해 우리를 만만하게 보는 탓이다.
특히 경남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관계로 강제연행된 조선인 희생자들이 유독히 많다.
그런데 우리 경남의 정치의식은 역사의식과 궤를 같이 한다.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그런데 그 고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일본인과 그에 머리를 조아리고 일본인보다 더 야멸차게 조선인의 동원에 앞장섰던 친일모리배들이 청산되지 않은 결과이다.
#일제강제징용#재일사학자김광렬#지쿠호의기록자#경남mbc#끌려간사람들#오누우라탄광#가이즈마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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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간 사람들의 증언 :재일사학자김광렬
악명높던 지쿠호에 끌려간 조선인은 15만여명
재일사학자 김광렬이 50년동안 수집한 13만여건의 기록물
일본 우익의 역사왜곡에 맞서 싸워
밝혀낸 희생자 2000명
찾아낸 유골만 500위
경남MBC 끌려간사람들 지쿠호 50년의 기록

2018년 3월 경남강제동원희생자 유족을 태운 배가 일본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일본의 군함도로 잘 알려진 하시마섬에 도착했다.
2015년 7월 일본의 군함을 닮았다는 하시마섬 , 군함도는 일본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산업유산으로 인정되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하지만 군함도에는 우리 민족의 가슴아픈 사연이 서려있는 곳이었다.
경남 강제동원희생자유족들이 이 섬에 온 이유는 머나먼 이곳에서 강제노역과 수탈로 고생한 아버지의 역사를 되새기 위한 것이엇다.
19세기 후반부터 미쓰비시는 수많은 조선인을 데려와 석탄을 채굴하게 한다.
지하 1000미터, 섭씨 40도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던 이곳은 지옥섬이라 불리워질 정도로 가혹한 현장이었다.
유족들은 아버지가 지옥섬이라 불리웠던 참혹한 현장을 둘러보고 눈물을 삼키며 어떻게해서 이 원수를 갚냐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폐광과 함께 광부들이 떠나고 섬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던 1980년대에 홀로 이섬을 찾았던 재일사학자가 있었다.
재일사학자 김광렬(1927~2015)은 그 섬을 샅샅이 훑어보고 그 현장이 허물어지기 전에 사진을 찍고 기록물을 수집했다.
방문당시 찍은 사진에는 군함도의 위치를 사진 뒷면에 남겨놓았고 강제된 조선인 무연고자 묘비 450개를 석비, 목비, 무비를 기록해 놓았다.

재일사학자 김광렬 선생은 국가가 강제징용에 관심을 가지기 훨씬 이전인 1960년데 후반부터 강제징용의 피눈물나는 역사를 증언할 사람들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 현장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 애써 왔다.
김광렬 선생님은 조선인 강제 노동자가 가장 많았던 후쿠오카 지쿠호일대 중심으로 활동했다.
지금도 후쿠오카 조선인 강제 연행 진상규명회는 그의 친구와 제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쿠호 탄전은 일본 역사상 가장 최초로 석탄을 캔 곳으로 가장 역사가 깊은 곳이다.
역사가 깊다는 것은 갱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굉장히 깊이 파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처음에는 너무도 열악한 환경으로 죄수 , 수인을 이용한 노동으로 시작된 곳으로 가혹행위가 출발한 곳이었다.
조선에서 뼈짜지게 농사를 지어도 입에 풀칠하기 힘들었던 조선인들이 맨처음 일자리를 찾아 일본에 왔다
하지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의 남성들이 군대에 입대하자 노동력이 부족하여 석탄, 토목, 건축회사에서는 조선인을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전에 건너왔던 조선인 노동력의 우수성을 맛보았고 그들은 일본인 임금보다 적은 돈을 주고도 조선인을 착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모노세키 항구에 도착한 조선인 노무자들은 후쿠오카현에 지쿠호로 끌려왔다.


기토마쿠토(후쿠오카 조선인강제연행진상규명회)
평생 김광렬 선생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던 기토 마쿠토(후쿠오카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규명회 사무국장)은 지쿠호 오노우라 노천 탄광을 이렇게 증언했다.
노천 탄광은 3헥타르가 넘고 깊이는 2m가량 파는데 지하 탄광은 일본인들이 일하고 쨍쨍 내려쬐는 햇볕과 눈보라도 피할 수 없는 노천탄광은 한국인이 일했다.
노천탄광의 땅이 더 단단해 체격이 더 좋고 힘이 센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 노천탄광에서 일했다.
조선인 마을에서는 돼지를 키워 냄새가 난다며 조선인을 피했고, 조선인들은 차별과 핍박을 많이 받았다 한다.
가이즈마 오누오라 탄광 일본인 노무자는 이렇게 증언한다.(1980년 육성녹음)
일본 근대화의 그늘에서 국적을 알 수 없는 광부들이 어두운 지하에서 죽었다.
가이즈마 오누우라 탄광 일본인 노무자의 증언 (1980년 육성녹음
가이즈마 오노우라 탄광은 후쿠오카현의 자료에 의하면 1944년 1월 기준으로 7930명이 동원되었다가 그중에 3930명이 탈출한 환경이 열악하고 노동강도가 강했던 곳이다.



지쿠호지역의 아소광업은 대표적인 조선인 강제 동원기업이었다.
산을 깍아 석회를 채취하는 석회광산은 지금도 영업중이다.
11개의 탄광을 가지고 있었고 석회 시멘트 회사로 11개의 탄광에 조선인을 동원했다.
김광렬 선생은 아소광업의 건강보험대장 12권을 얻게 되었다.
그 열두권 안에는 온몸으로 일제강점기하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온몸으로 어떻게 약탈당하고 버텨냈는지 보여준다.
거기에는 피보험자의 성명과 신상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942년 당시 전 직원의 절반에 해당되는 8000명(7996명)의 조선인 노무자들이 그 곳에그당시 조선인 노동자는 7936명으로 도주자가 4919명 사망이 56명이었다고 한다.
탈주자의 수가 그 곳이 얼마나 가혹한 노동현장이었음을 보여준다서 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32년 아소광업에서 조선인 노무자들은 최초로 노동쟁의를 일으키고16개의 요구조건을 내건다.
그 첫번째 요구가 관리자들이 상습적으로 가혹하게 구타하는 악습의 폐지를 요구했다. 조선인 광부를 관리한 것은 후쿠오카현 경찰인 특별고등계에서 관리되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별고등계는 사상범을 관리하고 조사하여 예비검속하던 경찰이다.

김광렬선생님 녹음기. 비디오카메라
김광렬선생은 강제징용의 당사자들의 육성을 녹음했다.
높은 산에서 전부 사람을 하나씩 죽여요. 그래서 굴안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 하금윤(요시쿠마 아소탄광 징용) 1989년 육성녹음
26살 때 라이또 (조명)가 폭발해 가지고 귀도 안들리고 눈도 안 보여요.
고 김철영 (미스비시 나마즈다 탄광 ) 1989냔 육성녹음
배도 고프지, 고향 생각도 나지, 언제 고향을 갈지 모르지 참 한심한 일입니다.
고 김성동 (미츠이 제 2탄갱) 1976년 녹음
일본인이 원인을 제공하여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된 것은 큰 불행한 역사이고 일본인으로서는 부끄러워해야 할 역사입니다.
불암사 후쿠오카현 미쯔비시와 계약을 맺은 사찰 주지 인터뷰

그들은 이렇게 노래 부르면 그 지옥같은 타향살이를 달랬다.
흘러가는 물결과 떠도는 구름
동서남북 나 홀로 헤메였건만
언제나 울고 싶은 나그네신세
아 떠나는 고향 잊을 수가 없네.
김광렬선생님의 50년 추적을 이끌었던 힘은 무엇일까?
내가 걱정한 것은 우리 민족성이란 말이지.
우리 민족성을 잃어버릴까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그 참혹하게 당했던 그 역사를 잊어서는 안된다 말입니다.
재일사할자 김광렬의 육성녹음
이러고도 일본은 강제동원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사를 외면하겠냐고 경남 mbc에서 만든 끌려간 사람들 2부 증언에서 말한다.
일본이 저렇게 오만하고 안하무인, 후안무치하게 나오는 것은 우리 한국인들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로 인해 우리를 만만하게 보는 탓이다.
특히 경남은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관계로 강제연행된 조선인 희생자들이 유독히 많다.
그런데 우리 경남의 정치의식은 역사의식과 궤를 같이 한다.
어디서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그런데 그 고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일본인과 그에 머리를 조아리고 일본인보다 더 야멸차게 조선인의 동원에 앞장섰던 친일모리배들이 청산되지 않은 결과이다.
#일제강제징용#재일사학자김광렬#지쿠호의기록자#경남mbc#끌려간사람들#오누우라탄광#가이즈마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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