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이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다
02.07.19
한국 고전문학 연구로 이름 높은 조동일 선생(1939-현재)을 만나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대개 내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고 더 고명하신 분들을 취재하게 마련인 만큼 아무리 의미가 있다고 해도 다소 성가신 일로 느껴지는 것이 바로 그 인터뷰라는 것이다.
그러나 모 잡지로부터 조동일 선생을 인터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나는 망설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쌓아놓은 업적이 많은 만큼 인터뷰를 준비하는 일도 간단치만은 않았으나 그럭저럭 몇 개 질문을 만들어 며칠 전 오후를 빌어 서울대학교로 찾아갔다.
물음은 즉석에서 만든 것이 아니로되 답은 즉답이다. 그런데도 선생의 말씀은 막힘이 없고 빠르다. 나는 말씀을 이어가는 선생의 얼굴이 연세에 비해 훨씬 젊어보임을 깨닫는다. 내가 만들어간 네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최근 몇 년간 한국의 비평계에서는 이른바 동아시아 문학론이라는 것이 상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는 한국문학을 동아시아문명이라는 공통적 특질 속에서 새롭게 재발견하자는 것으로 서양문학사 중심의 세계문학사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을 가진 시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담론은 오리엔탈리즘orientalim에서 포스트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으로 이어지는 서양문학사상의 비평적 조류의 변화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학과 지성사> 등에서 동아시아를 주제로 삼은 인문학, 문학 서적을 잇따라 내고 있고 많은 비평가들이 동아시아문학론 등에 관련하여 활발한 논의를 펴고 있습니다. 또한 현대문학 연구분야에서도 개화기 문학을 새로운 문제인식틀 속에서 재발견하려는 흐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양질 면에서 이러한 논의는 {하나이면서 여럿인 동아시아문학}(1999), {공동문어문학과 민족어문학}(1999), {문명권의 동질성과 이질성}(1999) 등으로 이어지는 조동일 선생님의 연구에 견주어 그 구체성과 쌓은 성과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논의의 과정에서 선생님께서 펼치고 계신 동아시아문학론의 내용을 간략히 특징화한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앞에서 열거한 선생님의 노작들에 '중세문학의 재인식'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서 볼 수도 있듯 선생님의 시각은 중세중심적이라거나 지나치게 공시적이라는 비판을 수반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장황한 질문에 대한 선생의 대답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저는 담론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슨 담론은 많이 내고 문제 제기는 많이 하지만 정작 이를 실행에 옮겨 구체적인 연구 결과를 내놓는 이는 적습니다……."
본래 대답이란 질문자와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질문자의 질문 자체를 타파하는 높은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조동일 선생의 답은 후자의 것에 가까웠다. 선생의 자부심은 남들이 말로만 한 일을 실제로 행한 데서 나오는 것이었다.
어떤 태도와 시각을 밝히는 것도 노동이라면 노동이지만 태도와 시각의 표명을 넘어 이를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훨씬 과중한, 평생을 필요로 하는 노동일 것이다. 그리고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실제로는 여전히, 세상은 그런 노력가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선생의 대답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선생의 입을 바라보다 아랫니 가운데 새로 해 넣은 금속쪽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비록 연세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지만 선생은 이미 60세가 넘은 사람이었다.
돌아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사람이 늙어 육체가 손상되기 시작하면 그때 그 사람은 무엇으로 자기의 아름다움을 주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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