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석
사람이 큰물에서 놀아야지, 작은 물에서 놀아봐야 의미가 없다.
한국에서 공부를 해봐야 재미가 없는 게 최정상 올라가도 기껏 한다는 게 죽창가 부르고 해방 70년이 넘은 상황에서 제2의 독립운동 어쩌고나 해대는거다. 무엇보다도 문제적인 것은 아무리 뛰어나도 태생적으로 한국과 같은 중간규모 국가에서 할 수 있는 건 중국 - 미국 등의 세계적 규모의 국가들 사이에서 어떻게 자기보전 할 수 있는가, 그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큰물에서 놀아야 생각이 달라진다. 냉전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려 봉쇄전략을 입안한 조지 케넌의 글을 다시 읽다보니 전에는 미어샤이머의 서문에서 논해지는 것처럼 케넌이 19세기적 지식인이라 민주주의와 핵무기, 그리고 민족주의에 대한 혐오에 기초한 18세기적 궁중외교를 선호하는 걸로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 이면에는 케넌이 지니고 있던 미국인으로서의 거대한 관점이 보인다.
케넌이 민주주의를 비판했던 것도, 민족주의를 언급하지 않고 핵무기를 혐오했던 것도 모두 그가 단순히 18세기적 외교를 선호해서 그런 게 아니라, 유럽으로부터 미국으로 근대문명의 헤게모니가 넘어온 20세기 중반의 상황에서 소련과 같이 반反(근대)문명적인 이들을 근대문명의 운명을 짊어진 미국 같은 문명국이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하는 입장에서 나온 거였다.
민주주의의 특성상 당장의 위협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쉽고, 민족주의는 그것을 극단으로까지 추동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미국이 핵무기와 같이 한번 사용하면 '협상의 여지'를 두지 않는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손에 쥐게 되면 인류사 전체와 근대문명의 미래를 짊어진 "어른"으로서, 장기존속이 불가능하며 궁극적으로 서구 문명의 품으로 돌아올 소련 공산주의와 같은 야만을 교화시킬 수 있겠는가. 오히려 미국 특유의 경박함과 '호전성'으로 인해 그럴 기회도 없이 적을 말살시키는 것에 몰두하지 않겠는가, 하는 어떤 우려가 그 근저에 있다.
케넌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은 러시아에 지나칠 정도로 무지했고 독일에 대해서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2차세계대전을 유발하기까지 했다. 문명의 지도국으로서 갖춰야 할 진중함과 포용력, 그리고 관리자로서의 치밀함이 미국에게는 부족했다는 걸 케넌은 강하게 질책했던 것이다. 그가 이라크 전쟁 등에 반대했던 것도 아마 이런 맥락이리라. 이 연장에서 보면 봉쇄전략의 핵심은 미국이 반反문명적인 국가들을 어떻게 관리하여 서구문명을 이끌고 궁극적으로 인류 전체를 지도할 것인가에 있다.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에서도 비슷한 관점이 나온다. 그는 케넌에 비해 훨씬 더 노골적이다. 세계적 지도국으로서 미국이 유라시아를 잘 관리해야 미국의 번영과 안녕을 보장할 수 있다는 주장과, 미국의 번영과 안녕이 곧 인류 전체에 이득이 된다는 이데올로기적 만족감까지 모두 들어 있는 이 책을 읽노라면 아니꼽고 고깝지만 어쨌든 세계적 패권국가로서 미국이 세계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체스판'을 놓고 고민할 수 있는 그네들의 사정에 부러움을 감추기가 어렵다.
한국이 이정도 선도 국가가 되려면 적어도 일본과 연합하고 대만, 동남아 등을 거느리며 미국의 후원 속에서 중국에 도전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너머를 그릴 수가 있는데 죽창가나 부르며 미국의 대對아시아 파트너 지위를 일본과 경쟁할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이 얘기는 일본에게도 적용된다. 일본정도의 대국이 고작 자국민의 혐한 감정을 이용하고 있으니.. 좀더 크게 대동아공영권 버전 2정도는 내세워 볼 수 있지 않나. 세계 제조업의 중심지가 된 동북아의 상황을 이용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가 아니라 일본이, 한국이, 아시아가 주도하는 세계화, 공업 재편 등을 내세울 수는 없나. 그 공업재편에 맞는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형성할 수는 없나. 미국 지성인들의 스케일이 부럽다. 하다못해 옆의 중국의 신좌파들도 글을 읽어보면 그 스케일의 거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인 동기 자체는 비록 정치적으로 중국 공산당 일당독재를 옹호하기 위함일지 몰라도 그들은 서구 문명이 내세우는 자유, 법치, 민주주의 등의 개념을 분석하고 연구하며 나름대로 근대문명 자체를 넘어서고자 하는 거대한 정치적 기획과 지적 프로젝트를 내세운다.
미국의 제후국 수준이나 겨우 되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근대에 대해 그정도 수준을 논할 수 있을까. 중국이 수당을 거쳐 근세로 이행하고 있을 때 한국의 신라는 겨우 고대국가를 완성하고 중세를 예비하고 있었다. 중국이 명청을 거치며 전기적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정체되어 있을 때에도 한국의 조선왕조는 여전히 중세적 상황에서 헤매고 있었다. 조선 성리학이 낳은 최고 수준의 사상가인 정약용은 동시대인 18~19세기 서유럽 자유주의와 달리 아직도 신분제적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떻게 인간을 차별할 수 있는가를 철학적으로 논증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제후국으로서의 한국의 지적 후진성은 현대에도 반복되는 게 아닌가. 중국의 제후국으로서 도달하지 못했던 자기창조의 길을 미국의 제후국으로서도 도달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 여기서 학문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어 괜시리 암울함을 느낀다.
천조국의 지성인들은 세계를 논하고, 인류 문명의 향방을 논하는데 경박한 제후국의 지성인은 죽창가나 부르고.. 브레진스키의 책에서 한국을 미국이 수호해야 할 주요한 거점으로 선정한 것을 두고 나도 모르게 무언가 반가워하며 기뻐했던 것이 수치와 모멸, 그리고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다. 이 열등감이 내 생애 안에 바뀔 수 있을까. 이 작은 나라에도 인물이 있다 하고, 세계 지성계를 이끌 지성인과 세계인을 지도할 정치인을 내놓을 수 있을까. 내 재주가 변변찮은 게 가장 큰 문제이겠으나 뛰어나다는 이들이 보이는 실망스러운 모습에 제후국 시민으로서 서글픔만 늘어간다. 존 루이스 개디스의 <미국의 봉쇄전략>을 읽으면서 느꼈던, 최강대국 내부에서는 이런 게 논해지는구나! 하는 어떤 지적 해방감과 몰입감 같은 걸 한국인 지성인의 글에서 느껴보고 싶다. 한국은 내게 너무 폐색된 곳이라 숨이 막힐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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