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996과 소외異化:
도시의 새로운 빈곤층, 경제적 빈곤과 의미의 빈곤
『청년지』43 인터뷰, 2021년 1월
‘내권內卷’과 ‘996’44으로부터 생겨난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2021년에 접어들어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여기에 최근 핀둬둬拼多多45 노동자의 돌연사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노동’이나 ‘직장’의 의미 를 둘러싼 여론의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지며 복잡해지고 있다. ‘열심 히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노오력’이라는 말은 막 사회에 진입한 사회 초년생과 오 랜 기간을 직장에서 묵묵히 일해왔던 사람 모두에게 더 이상 큰 공감
43 사회학과 인류학을 바탕으로 중국 청년층과 청년문화 연구에 전념하는 연 구컨설팅 단체
44 오전 9시 출근, 오후 9시 퇴근, 주 6일 근무라는 뜻으로 중국 IT 기업들의 살인적인 야근 문화를 비판하는 용어
45 중국의 신흥 전자상거래 플랫폼. 박리다매를 특징으로 한다. 저소득층, 노 년층, 농촌 소비자들의 인기를 끌면서 크게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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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얻지 못한다. 이제는 오히려 노동에 대해 회의감 섞인 목소리가 나 오기 시작했다.
『청년지靑年志, Youthology』는 오늘날 우리가 노동과 직장에 대해 그 저 분노하거나 좌절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를 둘러싼 문제를 좀더 깊게 이해해볼 수 있을지, 또 어떠한 방식으로 일상생활에 기반해 주 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일이란 무엇이 고, 일의 의미란 무엇이며, 좋은 일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심오한 문 제와 마주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고민을 안고, 우리는 샹뱌오 교수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 문제의 해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되었으 면 한다.
01 왜 도구가 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까요?
‘도구’는 무조건 부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핀둬둬에서 한 직원이 과로사한 이후, 저는 인터넷 전자상거 래互聯網大廠 업계의 업무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큰 규모의 전자상거래 회사들은 대부분 ‘소수 인원, 고강도의 노동, 높은 임금’의 형태로 사람을 고용하고 있다는 이해 하기 힘든 현상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저는 이런 방식으로 고용하 는 것보다 근로자 개개인에게 가는 돈이 줄어들더라도 사람들을 좀 더 고용하고 인간적인 수준의 일을 시키면 안 되나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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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인원만을 채용하는 방식은 취업 시장의 경쟁을 더욱 심 화시킵니다. 수많은 청년이 취업하기 위해 몰려들지만 소수만이 채용되죠. 그리고 회사는 이른바 ‘3-4-5’(3명이 4명분의 급여를 지급 받으며 5명분의 일을 한다는 말)라고 해서 다시 이 소수의 인원에게 과도한 작업량을 할당합니다. 이들 근로자 개개인이 받는 임금은 일반 근로자들의 평균 임금보다는 높을 수 있어도 해야 하는 작업 량은 다른 근로자들의 두 배에 육박합니다. 대체 왜 평균적인 작업 량, 평균적인 임금이라는 형식으로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을까요? 저는 회사가 ‘소수 인원, 고강도의 노동, 높은 임금’의 형태로 사람을 고용하는 이면에는 ‘통제’라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설일 뿐입니다만, 업무 시간을 늘리고 근무 인원을 줄이는 대신 높은 임금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제도적 설계는 매우 팽팽한 경쟁 상황을 조성합니다. 이런 회사에 취직한 근로자들은 직장에 도착한 뒤 업무량에 치여 별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그냥 시간에 쫓겨 일할 뿐입니다. 인원도 적고, 동료들 간의 유대
도 한정적이다보니 고용하는 입장에서는 통제가 더 쉬워지죠. 언뜻 보기에 이와 같은 상황은 고임금 일자리를 두고 사람들이
경쟁하는 형태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정말 다른 사람들과 경쟁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 기서 중요한 것은 경쟁을 하고 있는 A나 B가 아닙니다. 반대로 소 수의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는 긴장 가득한 업무 환경을 누가 만들 었냐는 것, 즉, 이 게임의 규칙을 누가 정했냐는 것이 더 중요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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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시간에 대한 압박과 업무 강도가 너무 세다보니 사람들은 소외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이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느낌을 강하 게 받는 것입니다. 8시간을 일하더라도 어느 정도 완충 장치가 있 으면 사람들은 도구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 고 일이 모든 삶의 기초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어지겠죠. 하지만 현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납작하게 짓눌리고 곧 도 구가 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서 생각할 시간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 저 장기간의 고된 노동을 할 뿐이죠.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스스로 도구가 되었다고 느끼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02 일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자기반성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도구처럼 이용되는 사람工具人’,46 즉 호구라는 말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이 개념은 철학, 사회학의 범주에서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입 니다. 베버 이후, 사람들은 ‘도구적 이성’을 현대성과 현대화 과정 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46 중국어로 공구인工具人은 ‘남을 돕지만 어떠한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항상 도구처럼 사용되고 부려지는 사람’을 칭하며 한국말의 ‘호구’와 그 의미가 가장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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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적 이성’의 기본적 의미는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때 그 수 단과 목적을 분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단과 목적이 무조 건 대립되는 것 은 아니에요. 어떻게 목표에 도달할지, 이를 위해서 어떠한 수단을 사용할지를 두고 이성적인 추리나 설계과정을 거 친다는 뜻이죠. 베버는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 축적이 돈 그 자체를 위해서 발생했다기보다는 “열심히 일해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보았습니다. 즉 축적과정은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죠.
베버의 관점에서 본다면 중국 문화에는 도구적 이성이 없었습 니다. 유교 문화에서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최 종적인 목적과 호응해야 하는 것 이어야 합니다. 과거 문인들은 관 직에 나가 유교 사상에 따라 사회적 관계를 조정 및 관리하며 인간 의 본성을 성찰하는 동시에 백성을 교화했습니다. 여기서 관직은 유학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목적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수단이었죠. 하지만 상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는 왜 과거 유 교문화권에서 상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는지를 부분적으로 설 명해줍니다.
반면 유럽은 중국과 달랐습니다. 유럽 공예 발전의 경로를 살 펴보면 공예와 기술, 도구 사용이 굉장히 중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최소한의 조작적 의미에서 도 구적 이성에 대한 이해가 매우 높았습니다. 지금도 일본인들을 보 면 등산할 때 꼭 등산복을 입는 등 일상생활에서도 늘 그 상황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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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에 맞는 복장을 착용합니다. 하나의 사물은 하나의 목적을 위 한 것이죠.
직관적으로 이야기해볼 때, 도구를 강조하는 것은 현대 사회와 현대 경제의 매우 중요한 특징입니다. 물론 중국어에도 ‘일을 잘하 려면 우선 좋은 도구가 필요하다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이 말은 일상생활에서의 지혜와 관련된 말일 뿐 자 신의 삶이나 인생 원칙과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속담은 초기 도구주의의 의미를 보여주는데요, 여기서의 ‘도구’는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개념을 어떻게 다 시 활성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사고가 요구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도시의 새로운 빈곤층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고 있는 것은 ‘경제적 빈곤’이 아니라 ‘의미의 빈곤’입니 다. 여기서 ‘의미의 빈곤을 겪고 있다’는 말은 사람들이 아무런 의 미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반대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직접적인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죠. 물론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일이 직접적으로 궁극적인 의미를 가질 수는 없습니 다. 그럼에도 ‘의미의 빈곤’은 현대사회가 겪고 있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청년들의 잘못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하는 일의 의미를 알지 못하게 하는 우리 사회와 경제 체제의 구조 가 문제입니다.
궁극적인 의미를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더 어려워요. 따라서 현대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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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두드러진 특징인 도구적 이성의 핵심은 ‘연결 고리’를 구축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에요. 하지만 수단 그 자체를 넘어 특정한 ‘의미’와 결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합의 방식 또한 구체적이어야 합니 다. 수단들이 하나씩 연결되며 이어져야 하는 것이죠. 가령 기술의 발전이 그렇습니다. 기술도 이전의 기술을 이어받아 하나씩 이어 지죠.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이 연결 고리를 넓게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 연결 고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날 청년들이 ‘소외’를 느끼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과거 공장의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작업은 전 형적인 소외의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조립 라인 앞에서 노동자 가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근육과 신경, 몸과 정신력을 동원해 똑 같은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작업과 마지막에 생산되는 제품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또 누가 이득을 보는 것인지 등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어요. 오늘 날 전자상거래 업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비슷합니다. 같이 일 하는 동료와 특정한 관계를 맺을 수가 없어요. 회사에서도 실명을 쓰지 않으니 일을 그만두면 서로의 이름도 알지 못합니다. 마치 지 하에서 비밀공작을 하는 것 같죠.
다시 ‘연결 고리’의 문제로 돌아가 이야기해봅시다. 연결 고리 는 A의 일과 B의 일이 서로 연결되고, 동료 간 작업이 상호작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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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최종적으로 단기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이 일이 의미 있다고 느끼게 되는 부분이죠. 예를 들어 몇 몇 사람이 함께 머리를 맞대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해내고, 상호작 용을 하며 단기적인 목표를 갖게 되면 막연하게나마 자신이 하는 일이 종국적으로는 사회에 의미 있는 것이라고 느낄 수 있게 됩니 다. 사실 막연하게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가 매일의 업무 속에서 횡적으 로 이어진 연결 고리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 습니다. 그리고 이 업무의 연결 고리가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일반 적으로는 알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이 연결 고리는 실제적인 논리적 추론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많은 경우 자신의 업무와 다른 사람의 업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즉, 온전한 의미의 연결 고리가 형성되지 못한 것 이죠.
오늘날의 청년들은 ‘반복적인 일’에 대해 왜 이토록 거부감을 느낄까요?
청년들은 일과 의미 사이의 연관성을 찾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즉각적인 피드백을 원하죠. 자신이 하는 일 의 의미에 대한 다른 사람의 명확한 대답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즉, ‘의미의 즉각성’이 필요하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실현되기 어 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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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은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도구 가 되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매일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면서 업무의 반복성에 대해 반감을 갖지요.
저는 청년들이 반복성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참 흥미로 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이나 생활 대부분은 사실 반복적인 것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매일 하루 세 끼 의 식사를 반복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수천 년 중국의 역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반복’이었습니다. 이전 세대의 생활 방식을 그 대로 따르지 않는 자손은 ‘불초자손不肖子孫(가업을 잇지 않는 변변 치 못한 자손)’이라고 불렸죠. ‘불초자손’에서 ‘불초不肖’는 닮지 않 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무튼 과거에는 ‘반복’이 정상적인 것이었어 요. 오히려 선대의 일을 반복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거라 생각 했죠. 하지만 오늘날 청년들이 ‘반복’에 저항하고 이토록 민감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 앞서 언급한 ‘연결 고리’로 돌아가보죠. 자 신이 하는 업무에서 즉각적인 의미를 직접적으로 보고 싶다면 일 에서 직접적으로 흥분을 느끼거나, 매일 다른 일을 하며 새로운 일 이 주는 신선함을 느끼고 이를 통해 정신적·감정적·심리적 만 족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큰일,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반복이 필요한 법입니 다. 사실 우리도 이를 알고 있어요. 반복의 의미는 매일 같은 일을 하는 데서 나옵니다. 일을 반복하다보면 그 일이 점점 깊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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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하는 일과 계속해서 연결되며, 이후 하나의 큰일로 이 어지는 것을 보게 되죠. 따라서 우리는 왜 사람들이 ‘반복성’에 대 해 이토록 민감한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의미에 대해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리고 이런 심리적 갈망은 개체화個體化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도구화’와 ‘개체화’는 대립적인 것 같습니다만 실 제로는 하나입니다. 현대사회의 사람들은 수많은 도구에 의지해 생활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지 않습니다. 늘 도구와 함께 붙어 있다보니, 개인의 자아의식은 갈수록 강해지죠. 한 사람이 하 루 종일 자신의 머릿속이나 정신 공간 속에서만 생활하면 필연적 으로 의미를 갈구해 자신을 지탱할 필요를 느낍니다. 이때 사람들
은 하나의 폐쇄적인 ‘체계’가 되어버리죠.
그렇다면 여기서 체계란 무엇일까요? 독일의 사회학자 니콜라 스 루만은 생물학의 ‘체계’ 개념을 가져와 생명을 정의했습니다. 루만은 외부의 개입이나 간섭이 없는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자기 순환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을 하나의 생명이자 폐쇄된 ‘체계’로 봤 어요.
청년들은 거대한 체계 속에서 일하며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습 니다. 그리고 청년들 또한 하나의 폐쇄된 ‘체계’가 되죠. 하루 종일 자신의 정신 공간과 머릿속 세계에서만 생활하다보면 사소한 심 리적 문제도 큰 위기로 변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청년들의 의식이 끊임없이 자기 강화를 하고, 폐쇄된 체계 속에서 계속 회전하며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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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로를 감정의 원자로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농촌이나 집 근처 골목 귀퉁이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아주머니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요, 이분들은 대체로 굉장히 활발하고 하루 종일 이야 기하며 수다 떨길 원해요. 이 아주머니들은 청년들과는 다르게 자 신의 머릿속에만 갇혀 생활하지 않습니다.
최근 중국을 보면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많아졌는데요, 사 실 이런 문화 현상도 제 나이대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일입니다. 사 람과 동물의 관계는 중국의 전통문화와 서양이 서로 다릅니다. 하 지만 오늘날의 청년 세대는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반려동물 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특히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이 심각하던 시기에 더욱 그랬죠. 왜 우리는 반려동물을 필요로 할까요? 그리 고 반려동물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는 반려동물이 사람의 ‘체계’ 내부로 들어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 명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심리치료에 반려동물이 사용 되기도 하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 저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젊은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통해서라도 자신에게 자그마한 창문을 열어줘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니까요.
오늘날의 소외는 이전의 소외와 다릅니다. 이전의 소외는 기계 에 대한 증오와 물질·돈에 대한 숭배와 관련됩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소외는 이전의 소외와 반대되는 것 같아요. 오늘 날의 소외는 매우 거대한 개인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거대한 개인이라는 의미는 삶 속에서 자기 자신만을 보고,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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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과 개체성이 최소한 생활과 인식의 범위 내에서는 우주의 중심이라고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직장에서 혹은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자신은 매우 작은 존재죠. 오늘날 청년들의 구체적 인 표현(형식)들을 보면 이들이 겪고 있는 소외는 이전의 ‘소외됨’ 의 감정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소외가 ‘사람의 소실’이라고 생각하며 사람의 중심성과 주체성을 반드시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정신 공간에 서 나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배려하며 그들에게 흥미를 느껴야 해요.
하지만 솔직히 말해, 오늘날 전자상거래 업계의 업무 환경을 보면 앞서 말한 것들을 것들이 실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경쟁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개방하거나 다른 사람과 연결할 기회를 주지 않습 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과 같은 비판적인 토론과 반성을 시작 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 구조에 사회적인 압력을 형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03 우리에게 ‘좋은 일’이란 무엇인가?
이 일이 나에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바로 ‘반복하더라도 싫지 않은 일이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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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같은 일을 하더라도 두렵지 않다면 곧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의미의 연결 고리 속에서 반복이 하는 역할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협력해서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예술가의 작업을 예 로 들어볼게요. 사람들은 예술가의 작업이 굉장히 개인적이고 창 조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예술가의 작업은 사 실 협력적인 작업입니다.
일본 요리를 예로 들어볼게요. 일본 요리는 재료의 구매에서부 터 모든 과정이 고려됩니다. 2~3명의 사람이 신선한 해산물을 전 담하고 일부는 빵가루와 튀김가루를, 또 몇몇은 요리를 담당하죠. 화가들 또한 이와 같습니다. 광물과 식물 추출물에서 안료를 추출 하는 사람이 있고, 누군가는 종이를 공급합니다. 만약 예술가가 자 신의 작업이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면 , 그 작업 속에서의 기 쁨은 사실 다른 사람과 협력하고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에서 나옵 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 람에게 쓸모 있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최근 사람들이 자신을 한 기계의 부품이라며 자조적으로 ‘나 사’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과거 사회주의 중 국 시기, 나사는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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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은 하나의 나사가 되는 것”이라는 레이펑雷鋒47 정신의 주요 상 징이었습니다. 당시 나사라는 단어에서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은 ‘소외’가 아니라 ‘자부심’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자부심을 느꼈다 는 표현이 당시 노동자들의 상황을 얼마만큼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재차 실증 연구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했던 몇몇 인터뷰에 따르면 완전히 허구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많은 노동자 는 정말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노동자들 의 일상적 일, 생활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학문에 있어서도 ‘쓰임’에 대한 의식이 매우 중 요합니다. 자신의 작업이 후속 학자들에게 어떤 공헌을 하고, 어 떤 의미를 가질지를 고려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똑똑함만을 뽐내 고 싶어한다면 훌륭한 학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쓴 글이 다 른 사람의 글과 어떤 점에서 다르고, 어떤 점에서 창의적인지만을 상 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연구의 측면에서 학문의 목적은 혁신 이 아니라 타인과 세계에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최근 들어 많은 청년이 자원봉사에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설령 운동회 같은 행사에서 보조 역할을 하는 일이더라 도 굉장히 많은 청년이 참여합니다. 주요 역할이 아니라 도구로 쓰 이는 업무인데도 말이에요.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문은 순전
47 인민해방군의 모범 병사. 자신을 희생해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정신 을 상징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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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저 개인의 일인 것만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학문이라는 것도 결국 학자를 하나의 도구로 삼아 진행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저와 여러분과의 이 대담이 사람 들에게 하나의 도구를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구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의미는 세계를 바꾸는 사람이 되는 데 있는 것도,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 자 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의미는 자신을 주체로 가치를 실 현해 다른 사람들에게 쓰임이 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말 씀드렸듯 최근 청년들이 스스로를 도구라고 여기는 주요 원인은 시간의 압박 때문입니다. 24시간을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상사가 데이터 자료를 바로 찾아오라고 하는 경우도 있고 배달원의 업무 또한 그렇습니다. 모두 강한 시간적 압박을 느끼죠. 이런 요인들이 ‘나는 도구가 되었다’라고 느끼는 주요 원인입니다. 추가로, 우리는 자신의 자율성을 타인에 의해 박탈당해서는 안 됩니다. 상사가 우리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는 이 일이 정말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되돌아보고, 관 찰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질문자: 리이李颐·
장안딩張安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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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질문
2021년 1월 9일, 샹뱌오 교수는 ‘텐센트 과학기술의 문제해결向善 및 디지털 미래 대회 2021’에서 「‘사회인’에서 ‘시스템인’까지」라는 제목 의 발표를 했다. 그는 과학기술 산업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 다며 ‘과학기술 업계의 사람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아래는 발표 전문이다.
사실 저는 과학기술과 사회 변화라는 주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술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오늘 이 자리를 빌려 과학기술계에 계신 여러분께 몇 가지 질문, 특히 ‘시스템’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게 되어 매 우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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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이란 알고리즘에 따라 설계된 폐쇄적인 순환 체계를 말합니 다. 우리는 매일 시스템 속에서 일과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 고 동시에 알고리즘 시스템에 의해 큰 영향을 받고 있죠. 심지어 통제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알고리즘과 시스템도 사람들의 행동 데이터라 는 ‘먹이’가 필요합니다. 사람 개개인의 활동 참여가 있어야 비로소 존 재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대체 이 시스템과 사람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요? 저는 이전에 ‘사회인’48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요,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사회 속의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수많 은 저소득 계층의 사람들과 소수의 고소득자들을 포함합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안정적인 기구와 어떤 안정적인 관계도 형성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농민공이나 영세 자영업자들이 있 겠네요. 그리고 오늘날 이들 수많은 ‘사회인’은 모두 ‘시스템인’으로 바 뀌었습니다. 시스템은 안정적인 조직의 형태나 제도화된 관계를 통하 지 않고도 수많은 개체를 한데 모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 을 매 순간 조율하고, 영향을 주며, 심지어는 통제하기까지 합니다. 시 스템의 힘은 이전처럼 안정적인 사회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데이터 를 통제하며 발현되는데요, 이는 곧 이전의 ‘사회인’이 ‘시스템인’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스템인은 시스템과 사람이 서로 다르 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새로운 행동 양식이나 새로운 인격 유형을
48 제1부 베이징 방담, ‘청년들의 상喪 문화’에서 ‘사회상의 인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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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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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질문: ‘시스템’의 개념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질 건데요, 이 질문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생각을 듣고자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바로 ‘시스템’의 개념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학기술의 관점이나 비즈니스 운영 의 관점 혹은 플랫폼이나 회사의 일상적인 관리의 관점에서 이와 같은 사회적 존재 상태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요?
사회과학 영역에서의 체계 이론49은 과학의 영향을 받아 등장했습 니다. 체계 이론은 ‘개체의 총합은 단순한 개체의 합보다 크며, 개체들 이 모이면 곧 새로운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체계는 독 자성을 가지고 있으며 끊임없는 자기 발전을 할 수 있고, 비교적 폐쇄 적이기 때문에 외부에서의 투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하버마스의 ‘체계’ 개념이었습니다. 그는 ‘생활세계’라는 개념에 대응하여 ‘체계’ 개념을 제시했는데요. 그가 말 하는 ‘생활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연언어와 일상 속 언어를 통해 세상
49 중국어 원문은 ‘系统’으로 ‘시스템’이나 ‘체계’로 모두 번역 가능하다. 이 책 에서는 일반적으로 시스템으로 번역하나 ‘체계 이론’은 이미 하나의 학술 용어 로 자리잡았기에 체계로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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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이해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연언어를 통해 다른 사 람들에게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 물어볼 수 있으며 그 동기를 이해할 수 있죠. 반대로 질문을 받은 사람은 자연언어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처럼 미시적 수준에서 자연언어의 의 사소통을 통해 효과적인 상호작용, 효과적인 사회질서가 형성될 수 있 습니다. 하지만 시스템은 이러한 자연언어를 초월합니다.
하버마스가 말한 ‘체계’는 대규모의 행정 체제나상업 경영, 시장, 화 폐 등을 포함하는데요, 이들은 자연언어로 설명할 수 있거나 이해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생활세계에서 사람들이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의사소통입니다. 반면 앞서 말한 체계(행정, 경영,시장 등)에서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은 ‘계산’입니다.사람들은 체계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방법을 계산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 니다. 가령 출근 후 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이른바 ‘월급루팡 행위摸魚’ 는 체계 속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일종의 계산 행위라고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오늘날의 시스템은 하버마스가 말한 체계와는 다릅니다. 왜 냐하면 현대의 핵심은 의식적으로 행하는 계산算計이 아니라 알고리즘 에 의해 진행되는 계산計算이기 때문입니다. 체계가 알고리즘식 계산計算의 방식을 통해 설계되고 나면 주도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생각할 수 있는 계산算計의 가능성은 매우 낮아집니다. 이러한 알고리즘 시스템 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은 이른바 “약자의 무기”50라는 대응 전략을 채
50 정치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은 농촌 마을을 조사하며 농민들이 일상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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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저 알고리즘에 따르는 것이죠. 예를 들어 택시 기사는 다른 기사들이 원치 않는 경로로 가는 승객을 받아야 할 때, 자신에 대한 평점을 높여 소득을 더 올리고자 합니다. 알고리즘 속의 규칙에 순응하며 이득을 최대화하는 것이죠. 저는 개인이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계산算計에서 알고리즘에 의해 진행되는 계산計算으로의 변화는 의미 있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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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질문: 시스템과 노동의 관계
제 두 번째 질문은 사람들이 ‘시스템’과 ‘노동’의 관계를 어떻게 생 각하는가입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는 배달 라이더들의 노동 조건을 다룬 「배달 라이 더, 시스템 속에 갇히다」라는 르포 형식의 글이 올라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배달 라이더들의 노동 상황은 19세기 노 동자들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일회성 서비스를 제공한
소극적으로 저항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농민들은 모심기 등을 미루고 축제에 참가하지 않는 식으로 지주들에게 저항한다. 고의적인 생산 속도 저하와 식량 절도, 지주 험담 등은 대표적인 약자들의 무기로 이들은 제한된 한도 내에서 자 신들의 이득을 취한다. 상기한 ‘월급루팡 행위’ 또한 소극적으로 행하는 약자의 저항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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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고객이 그 자리에서 돈을 지불하고 나면 그 걸로 끝입니다. 이들의 노동은 특정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닐뿐더 러 어떠한 사회·경제적 관계도 만들지 않습니다 . 모든 것이 즉각적이 지요. 이러한 시스템의 한 가지 이점은 즉각성이 극대화된다는 것입니 다. 가령 주문을 받지 않은 배달 라이더들은 해당 시스템과 아무런 관 계도 맺지 않습니다. 주문을 받은 이후 혹은 그 배달을 하는 과정에서 야 비로소 IT 플랫폼과 시스템을 통한 관계가 발생하죠. 이들은 시스 템 속에 갇히고 업무 상황 또한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어 강한 압박감 을 느낍니다. 이들은 19세기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행해지던 사탕수 수 농장의 노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유럽 식민 지배자들이 도착한 이후, 라틴아메리카에 생겨난 사탕수수 농장은 모두 인공적으 로 만들어졌습니다.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은 농부가 아닙니다. 농 부는 한 식물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식물과 토양, 식물과 다른 식물들 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볼 필요가 있지만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 은 이러한 것들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름 과학적인 방법으로 재배되던 사탕수수 농장에는 오직 사탕수 수 이외에 다른 작물은 재배되지 않았습니다. 사탕수수 사이의 간격은 모두 사전에 계산되었고 사탕수수의 생장은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기 에 따로 사람의 관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 하지만 사탕수수가 다 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사탕수수는 품질의 문제 때문에 수확한 지 24시간 내에 제당해야 합니다. 결국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은 24시간 내에 수확을 마무리해야 하고 따라서 극심한 시간적 압박을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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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겠죠. 손이 빠르지 못하면 기계에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사탕수 수 농장의 예시가 친숙하지 않다면 초기 공장의 조립 라인을 예로 들 수도 있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스」에도 잘 나타나 있듯 조립 라인 앞의 노동자들은 시간의 압박 속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초 기 공장의 조립 라인 또한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탕수수 농장과 초기 공장의 조립 라인은 모두 하나의 ‘시스 템’이었고, 따라서 ‘압력’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 하지만 오늘날 시스템 속 노동관계는 이전보다 더 ‘유동적’이라는 확연한 차 이가 하나 있습니다. 사탕수수 농장이든, 조립 라인이든 이전에는 모 두 구체적인 물리적 공간 속에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일을 했습니다. 이 렇게 모여서 일했기에 향후 노동관계의 변화가 있을 수 있었죠. 사람 들은 늘 항의를 하거나 변화를 원했고, 점점 협상과 같은 작업 공간에 서의 정치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시스템의 중요한 특징은 고 정된 물리적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신 공간이 매우 분산적이죠. 그리고 이 분산성은 많은 노동자를 유동적으로 만듭니다.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 또한 다양한 플랫폼 사이를 유동적으로 오갑니 다. 게다가 노동 자체도 유동적 과정입니다. 특히 물건을 운반하는 행 위는 특정한 시간 안에 정확히 어떤 장소로 전달되어야 하는 ‘흐름’이 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기서 ‘흐른다’는 행위 자체가 매우 중요한 노 동의 내용입니다.
노동, 특히 공간적으로 분산적이고 유동성이 강한 노동은 시스템의 설계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노동의 정확도를 향상시킬지’ ‘노동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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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효과를 어떻게 포착할 것인지’ ‘노동자의 주관적인 의지를 어떻게 피드백을 위한 데이터로 활용할지’ 등 여러 미시적인 요소를 고려해야 합니다. 요컨대 시스템의 내부적 설계는 노동자들이 받은 느낌이나 그 들의 피드백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더 다원화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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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질문: 시스템과 사용자의 관계
세 번째 질문은 시스템과 사용자입니다. 사실 노동자 또한 일종의 시스템 사용자인데요, 오늘 제가 말하는 ‘사용자’는 주로 소비자를 가 리킵니다. 전 세계적으로 배달이나 택배 업종들은 지금까지 큰 손해를 보며 투자를 해왔는데요, 이토록 많은 자본을 투자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새로운 생활 방식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기 도 합니다 . 우리 주변 생활을 둘러보면요,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뭐든 집 앞으로 불러다놓을 수 있어요. 엄청난 편리함을 누리 고 있죠. 여러분도 주목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대학은 음식 배 달 서비스 업계의 주요 소비자입니다. 이게 굉장히 특이한데요, 사실 중국 학생들은 대부분 학교 기숙사에 살고 있고 식당도 가까이 위치하 고 있기 때문에 굳이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 도 학생들은 배달을 시켜요. 배달이 더 편하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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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눈에 보이는 음식을 사는 것이 더 편할 수 도 있어요. 그렇다면 학생들이 배달을 시키는 이유, 다시 말해 학생들 이 배달을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학생들은 배달을 통해 ‘꿀을 빨 고자慵懶’51합니다. 극단적인 경제학적 관점에서 접근해보면 학생들은 그저 꿀을 빠는 것을 원했고 배달을 통해 이를 구매한 것일 뿐입니다 . 하지만 문제는 학생들이 얻는 그 편안함 뒤에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 이 꿀을 빠는 행위의 이면에는 배달 라이더들의 고된 노동과 전체 시 스템을 기술적으로 유지 및 보수하는 인력이 있습니다. 이외에 원재료 소모도 엄청납니다. 한 번의 배달을 위해서는 그것의 크기와 상관없이 포장을 해야 합니다. 작은 토마토 주스일지라도 플라스틱 상자에 담아 야 하죠. 그리고 배달하는 데 필요한 전동차의 전기 소모야 말할 것도 없지요.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처럼 꿀을 빨려는 행위는 그다지 큰 이점이 없 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일 텐데요, 이 꿀 빠는 행위는 그저 꿀 빠는 행위에 불과할 뿐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 감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반면 이 꿀 빨려는 행위를 위해 사회 전체 가 치른 대가는 그 효용에 비해 과도하죠. 그런데도 이러한 시스템이 왜 나타났느냐면 누군가가 돈을 투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 은 투자라는 것이 대량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기에 당연히 좋은 것
51 ‘慵懶’는 하나도 힘들이지 않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갖는 데서 오는 편안한 느낌과 상태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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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말합니다만, 이 주장에 대해서는 좀더 확실한 논증이 필요합니 다. 투자된 돈을 그냥 사람들에게 직접 나눠준 뒤 모든 개개인이 얻는 이점과 비교해본다면, 어느 것의 이점이 더 큰지는 말하기 어렵습니 다. 또한 굳이 배달 산업이 아니더라도 어떤 산업이든 간에 이처럼 엄 청난 규모의 자금이 투자되면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될 것입니다. 따라 서 저는 이런 현상의 배후에 숨겨져 있는 의도는 새로운 생활 방식의 구성이라고 봅니다. 물론 그것은 또한 새로운 인격 유형의 구조를 형 성할 테죠.
저는 성급하게 비판적인 분석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 논리를 이해하려 시도하는 것이지요 . 예컨대 이러한 생활 방식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과학기 술계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이해해야 한 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스템 속에 갇혔다’라고 말했을 때,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은 노동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일 수 있는 것이죠. 사람들 은 스스로 많은 편리함과 이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두가 자신의 데이터를 시스템에 공급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갇혔다’는 말처럼 시스템과 사용자는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습니다. 저는 사회를 연구하고 있는데요, 이 를 위해서는 특히 과학기술계에 종사하고 계신 여러분과의 교류가 필 요합니다. 아마 어떤 분들은 제가 방금 한 질문들이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실 수도 있습니다 . 혹은 과학기술이 방금 말씀드린 이 질문들을 이미 해결했기 때문에 제 질문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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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이 저 같은 업계 외 사람들도 이해 할 수 있도록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좀더 명료한 언어로 설명해주세 요. 저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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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경제의 역노동 과정
이 글은 2021년 10월 9일, 상하이대학 커뮤니케이션新聞傳播학과, 중 국사회과학원 뉴스미디어연구소, 쑤저우대학 뉴미디어와 청년문화 연구센터가 상하이에서 개최한 ‘스마트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포럼: 스마트 커뮤니케이션과 디지털 플랫폼’에서 샹뱌오 교수가 발표한 기 조연설 「플랫폼 경제의 역노동 과정」을 번역한 글이다.
‘플랫폼 경제의 역노동 과정’이라는 주제로 여러분 앞에서 발표하자 니 약간 긴장이 됩니다. 사실 저는 플랫폼 경제에 관심이 있을 뿐 미디 어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 조사를 해본 적도 없어요. 그 저 몇 편의 논문을 살펴봤을 뿐이죠. 방금 사회자께서 저의 이전 연구 들을 소개해주셨는데요,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해당 연구들이 오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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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어느 정도 연관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몇 개의 질문을 던질 겁니다. 이 질문들에 어떻게 답할 것인지 그리고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발표의 제목을 보니 ‘역노동 과정’이라는 말 이 눈에 띄네요. 그렇다면 이 주제부터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플랫폼 경제의 핵심 과제,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인 ‘노동과정’ 이론은 사회학에서 널리 사용됩니 다 . 이 이론은 자본이 노동과정에서 이윤을 어떻게 취하는가? 착취는 어떻게 발생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탐구하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노동보장 체계가 구색을 갖추고 노동조합의 정치적 활동 이 활발해집니다. 또한 노동 조건이 개선되고 근로계약이 안정적으로 변하면서 복지국가의 기본적인 형태가 완성되죠. 그리고 이런 변화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노동과정은 매우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노 동보장 체계가 갖춰진 이후부터 자본가들은 ‘노동’이라는 순간의 ‘행 위’가 아니라 ‘노동력’, 즉 ‘사람’을 도매의 형태로 구매해야 합니다 . 여 기서 ‘도매’는 한 번에 많은 수의 인원을 고용한다는 말이 아니라 노동 자와 근로계약을 맺을 때, 몇 년 혹은 수십 년 동안의 노동능력을 한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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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에 구매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약하는 순간 노동자의 급여와 복 지, 사회보장 등의 노동 조건도 모두 정해집니다 . 복지나 사회보장이 없는 최악의 계약이더라도 최소한 월급은 꼬박꼬박 받을 수 있죠. 심 지어 유럽이나 일본처럼 종신고용을 실시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의 미에서 자본가에게 불리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시스 템 아래에서 자본가는 근로계약 체결 이후 노동자가 작업장에서 자본 가를 위해 열심히 일할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본가는 노동 자에게 먼저 돈을 지불하고 노동자는 노동을 통해 자신이 받은 급여를 되갚는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근로계약은 미래 시장과정에 더 가깝습 니다. 자본가라면 노동자에게 지불한 돈에 상응하는 노동력을 어떻게 끄집어낼 수 있을까를 궁리해야 합니다 .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과정’ 연구는 자본이 어떻게 구체적인 노동을 통제하는지를 탐구 해왔습니다.
자본주의의 발전 초기인 19세기에는 이것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노동 환경은 열악했고 고용도 보장되지 않아 자본가는 언제든 노동자 를 해고할 수 있었죠. 하루 치 일거리가 있다면 일을 먼저 시키고 이후 나중에 돈을 주면 됐습니다. 이 점에서 현대사회의 플랫폼 경제는 19세기의 노동 형태가 부활한 것 같기도 합니다. 오늘날 자본은 ‘노동력’을 도매 의 형태로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 즉 즉각적인 노동의 실천을 구매. 합니다 다시 말해, 노동이 실현되고 난 뒤 비로소 노동자 에게 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죠. 플랫폼은 ‘어떻게 노동을 감 시하고 관리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전후 자본주의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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랬던 것처럼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을 효율적으로 일하도록 만들지, 미 리 지불한 돈에 상응하는 노동을 끄집어내기 위해 어떤 시스템을 설계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전후 자본주의와는 반대되는 문제 를 가지고 있습니다. 플랫폼 경제에는 노동력(사람)보다 즉각적인 노 동(행위)이 먼저 필요합니다. 따라서 노동력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공 급할 것인가가 주요 문제가 되죠. 전후 자본주의의 노동과정과 비교해 볼 때, 플랫폼 경제가 해결해야 할 것은 ‘역노동 과정’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왜 안정적인 노동력의 공급이 필요할까요? 일단 일을 하 는 사람은 안정성을 기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배달원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훈련이 필요합니 다. 훈련을 마친 후에는 한 건의 배달을 완수한 뒤 바로 일을 그만두거 나, 하루만 배달하고 이튿날부터 그만둔다거나 하는 행위를 할 수 없 습니다. 일정한 안정성이 없으면 즉각적인 노동은 이루어질 수 없죠. 기업 입장에서는 잠재적 공급의 안정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오늘 날 중국에서는 이 문제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지금 은 경제 변혁의 시기이고, 특히 팬데믹 시기에 이르러서는 언제든 투 입될 수 있는 노동력이 대도시에 많기 때문에 노동의 공급 문제가 크 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본 운영과 전체적인 시스템의 관점 에서는 명확히 예측되고 신뢰할 수 있는 노동력의 총량이 있어야 합니 다. 이것이 바로 플랫폼 경제 모델 운용의 핵심 과제예요. 정리하자면, 플랫폼은 즉각적인 통제가 아니라 총체적인 노동력 공급의 안정성에 대한 해결을 고민합니다 . 왜냐하면 유연성, 개체성, 즉각성, 정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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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에 따른 서비스 제공이 플랫폼 경제의 특장점이기 때문이죠. 그렇 다면 안정성이라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요?
중국의 젊은 학자들이 한 여러 조사에 따르면 플랫폼 주위에는 작 은 플랫폼, 비플랫폼, 오프라인 중개식 플랫폼이 많이 존재합니다. 가 령 배달 업계는 인력사무소 같은 것이 있고, 택배 업계에도 마찬가지 로 비슷한 것들이 존재해요. 이들은 모두 플랫폼 기업을 위해 노동력 을 조직하고 노동의 안정적인 공급을 보장합니다. 따라서 플랫폼은 다 층적인 중개자들로 둘러싸인 시스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연 구는 ‘디지털 테일러주의’ ‘디지털 기술과 빅토리아 시대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의 결합’ 등 19, 20세기의 사상에 기대어 플랫폼 경제의 작동 을 설명합니다. 이런 연구는 서술적 의미에서는 일리가 있으나 플랫폼 이나 데이터 경제의 근본적인 조직 방식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2
인적 관계성은 플랫폼 경제 이윤의 주요 원천
다음으로 제가 언급할 것은 일종의 가설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미 언급했을 수도 있어요. 예전에 저는 둥베이 지역의 노동력 수출을 연 구한 적이 있는데요52 이 연구를 오늘날의 플랫폼 경제와 나란히 놓고
52 제1부 옥스퍼드 방담의 ‘새로운 연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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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인적 관계성human relatedness’이라는, 깊이 논의해야 할 개념을 하 나 발견했습니다. 인적 관계성은 현대 경제의 주요 이윤의 원천이자 경제 운용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관계성Relatedness’이라는 표현은 인류학의 친족제도 연구에서 유래 합니다. 과거 인류학자들은 친족관계가 혈연으로만 맺어진다고 생각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통해서도 친족관계가 형성될 수 있기에 혈연 만으로 친족관계를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 이 흘러 생리학적, 유전적, 사회적 관계가 교차하며 친족관계를 구성 하기 시작합니다. 인공수정이나 시험관 아기, 정자은행, 입양, 동성 가 족이라는 관계가 나타난 것이죠. 친족관계는 본래의 정의보다 더 넓어 졌습니다.
‘관계성’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친족제도’라는 개념이 유라시 아인들의 관점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프리카와 태평양 도서지역의 일부 사회는 친족제도라는 개 념으로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친족제도는 매우 당연한 것으 로 받아들여지지만 일부 지역의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혈연관계 나 출생이 아니라 같이 밥을 먹고, 같은 화로를 사용하며, 함께 거주하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같이 거주하고, 하나의 화로를 공유하는 밥상 공동체 관계가 출산으로 이어진 관계보다 더 중요한 거죠. 혈연관계는 동거 및 식사 등의 행위와 관련은 있지만 혈연관계라고 해서 반드시 같이 살거나 밥을 함께 먹는 것은 아닙니다 . 아프리카와 태평양 도서 지역의 사람들은 ‘혈연’보다 ‘공유’를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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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서 공유와 공유경제는 매우 중요한 전통입니다. 따라 서 그들의 기본적인 사회관계를 친족제도를 통해 분석하는 순간 문제 가 되죠. 그렇다면 친족관계 이외의 여러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 었을까요? 학자들은 이를 정확히 설명해낼 단어를 찾을 수 없었고 따 라서 관계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친족관계 연구에 서 관계성은 혈연과 지연, 사회적 관계,경험의 공유 관계, 경제적 교환 관계처럼 일상생활에서 형성된 각종 관계가 착종된 것을 가리킵니다. 유라시아 사람들에게 관계성의 핵심은 친족관계입니다만, 이는 관계 성에 대한 여러 이해 중 하나의 특수한 것일 뿐이죠 . 관계성이라는 개 념의 제기는 다양한 문화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 지, 그리고 그 실천 속에서 관계성은 어떻게 조직되는지와 관련됩니다. 저는 관계성을 더 넓은 개념으로 봅니다. 제가 생각하는 관계성은 사람 간의 관계를 넘어 사람과 사물 간의 구체적인 관계를 포함합니 다. 여기서 관계란 반드시 실질적인 관계의 형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 데요 , 예컨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 우정, 스트레스, 제약制約과 같 은 것도 실체적인 관계라기보다는 관계성의 한 표현에 더 가깝잖아 요? 제가 생각하는 관계성에 따르면 사람들이 특정 애플리케이션이나 플랫폼, 각종 기구에 의지하고 여기에 깊이 빠져드는 것도 관계성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관계성이 플랫폼 경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 기업들이 소비자의 데이터를 판매하고 있다는 말이 있는데요, 사실 저는 이 말을 이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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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겠습니다. 이 기업들이 정말로 데이터를 팔고 있다는 실체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데이터를 파는 행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 다. 비슷한 행위를 하고 있기는 해요. 하지만 데이터 시장이라는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유럽연합은 데이터 판매를 허용하지 않 겠다고 명확히 표명했는데요, 사실 유럽연합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 가도 이와 같은 규제를 하고 있어요. 단지 그 정도에서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그렇다면 기업들은 왜 데이터를 팔려고 할까요? 예컨대 제가 한 인터넷 플랫폼 기업을 설립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수많은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면 저는 이것들을 팔지 않을 겁니다. 팔고 싶은 것이 있 다면 오히려 소비자를 정확하게 공략하는 능력입니다. 데이터가 4차 산업혁명의 석유라는 말이 있는데요, 정말로 데이터가 석유라면, 사실 중요한 것은 석유 그 자체가 아닙니다. 핵심은 석유를 운반할 수 있는 송유관, 즉 통신 채널이에요. 데이터를 흡수하는 플랫폼의 통신 채널 은 특정 개인을 추적할 수 있고 시시각각 변하는 개인의 상황에 따라 플랫폼은 업데이트됩니다. 그리고 플랫폼의 채널은 광고와 같은 기타 정보를 소비자에게 맞춤형으로 내보냅니다. 관계성이 가장 중요한 이 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플랫폼 기업들은 관계성으로 인해 하나의 사회 적 시장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죠.
20세기에 우리 인류는 ‘시장화된 사회’를 두려워했습니다. 모든 것 이 상업화되고, 모든 사회적 관계가 시장관계로 변할 것이라 생각했어 요.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목도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인 시장’입니 다. 다시 말해 시장과 기업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어요. 상업적 관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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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관계 또한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플랫폼은 독특한 조형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데이터 자체가 아니라 데이터를 운반할 수 있는 통신 채널과 관계성이죠 . 데이터 매매라는 것은 매우 실체적物化이고 객체화된 사유인데요, 그 말은 ‘기업이 영리 를 추구하고 그렇기에 상품화와 거래를 한다’는 기본적인 논리에 근거 해요 .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체화가 아니 라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왜 관계성은 자본 이윤의 원천이 되었을까요? 두 가지 예시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둥베이 이주자들을 연구하며 중개의 중요성을 발견 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까지 사람들 간에 맺었던 중요한 관계라면 노동관계와 고용관계가 있을 텐데요 , 가령 일본 고용주들은 중개인을 통해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데, 이는 곧 노동력을 사용하 기 위해 관계성에 의존한다는 말입니다. 고용주에게 이런 관계성은 경 제활동의 기초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중요합니다. 반대로 중개 인에게 관계성은 그 자체로 이익의 원천입니다. 경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관계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성이야말로 경제 행위의 주요 대상인 것이죠. 왜냐하면 중개가 하는 일이 바로 노동관계를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개업 자체가 곧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중개인들은 노동자와 그 가족 간의 관계, 노동자와 동네 사 람들 간의 관계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보증금을 받은 뒤 이를 통해 노 동자를 통제하기도 하고, 일본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거나 도망가면 가 족이나 동네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라며 노동자들에게 경고하기도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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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여기에는 경제적 관계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관계, 노동자와 다 른 노동자 사이의 관계와 같은 비경제적 관계도 있습니다. 여러 관계 가 하나의 압력을 구성하고, 중개인들은 이를 통해 일본에 가 있는 노 동자에게도 원격 통제를 실시할 수 있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사람들 간의 다자적인 관계성이 형성되고 특수한 고용관계가 만들어지는데 요, 중개업자들은 이 관계성을 이용해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제가 연구하는 동안 중개 업계의 발전이 노동 인구의 유동량 증가 를 크게 능가했습니다 .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사람 간의 관계성을 만들 며 돈을 벌었습니다 . 반면 그런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생산/소비와 직 접 관련된 기업은 중개업만큼 빠르게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현상 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전에 우리는 ‘내권화’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관계성이 경제 운영의 대상이 되면 내권화되 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무한하게 세밀해지고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죠.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물질 자원과는 다르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매우 복잡해질 수 있고, 따라서 이를 이용해 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시로 중국의 인터넷 셀럽인 왕훙網紅을 들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왕훙 업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 매체들의 보도 를 보면 ‘소수만이 성공할 수 있는승자독식一將功成萬骨枯’ 구조를 가진 업계라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4퍼센트의 승자만이 돈을 벌 수 있고 나머 지 대부분의 사람은 돈을 벌지 못합니다. 왕훙들 또한 관계성을 통해 돈을 법니다. 팬들의 관심과 덕질이 일종의 관계라고 할 수 있죠. 앞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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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듯 돈을 많이 버는 왕훙들은 극소수입니다. 하지만 플랫폼 기업과 소셜 미디어, 전문적으로 왕훙들을 양성하는 매니지먼트 회사MCN는 엄청난 이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왕훙들이 돈을 벌 수 있는지 여부와 는 ㄱ 상관없이 플랫폼 회사들의 이윤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어요. 왜 냐하면 플랫폼은 관계성을 만들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많 은 팬과 왕훙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아 중개합니다. 이 두 집 단이 만나서 하나의 관계성이 형성되죠. 앞서 언급한 플랫폼 회사들은 특정 왕훙이 일정한 규모의 팬들을 보유할 수 있을지, 혹은 이들이 돈 을 벌 수 있을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해전술의 방 식으로 많은 관계성을 그저 만들어내기만 해도 돈 버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각주 추가… 중국에서는 플랫폼의 이런 특성을 유량流量경제라고 표현한다.)
#3
플랫폼의 실험적 특징을 통한 집단적 성찰성 구축
한편 인적 관계성이 중요한 사업 자원으로서 플랫폼 운영의 기본 단 위가 될 때 하나의 모순이 발생합니다. 20세기에 우리 인류는 참여와 교류, 개방을 갈망했습니다. 21세기가 도래함에 따라 기술과 사회가 함께 진보했고 앞서 말한 참여와 교류, 개방이 가능해집니다 .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 지금, 도리어 우리는 우리가 갇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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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기업은 ‘큰’ 기업입니다. 막대한 이윤을 벌어들일 뿐만 아니 라 그 규모도 엄청나죠. 권력과 사회적 영향력 또한 전례 없이 막강합 니다. 발전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요. 이 모든 것은 관계성과 관 련됩니다. 인적 관계성은 자기 확장을 통해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하 기 때문이죠. 물론 여기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관 계성을 핵심으로 하는 경제는 아주 강한 실험적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요, 이 실험적인 측면으로 인해 계속해서 학습하고, 피드백을 받아들 이며 조정될 것입니다. 언제든 변화가 일어날 수 있으며 하나의 고정 적인 구조나 모델은 존재하지 않아요. 현재 학계는 알고리즘의 사이버 네틱스 특징에 대해 많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고, 이를 통해 알고리즘 이 자기 성찰과 조정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개인 수준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플랫폼 속에서 성찰성 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니면 집단적 성찰성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할 까요? 저는 사람의 학습, 성찰, 조정에 대해 향후 더 많은 관심을 기울 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증적인 측면에서 봐야 할 뿐만 아니라 미 래지향적으로 어떠한 것들이 권장할 가치가 있는지 발견해야 합니다.
현재 다양한 실험이 진행 중입니다. 가령 중국은 플랫폼의 블록체인 을 공공복지와 타임뱅크에 이용하며 그 효과를 테스트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약하게나마 참여한 일이기도 하지만 뉴욕의 택시 기업들은 협 동조합을 결성하고 우버에 맞서기 위해 (아직은 미약하나) 일종의 플랫 폼 협력주의 혹은 플랫폼 협동조합주의를 발전시키기도 했습니다. 물 론 플랫폼 경제의 실험적인 특징을 어떻게 이용할지, 그리고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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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모델로 발전시킬지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요.
#4
실증적 상상을 통한 플랫폼 속 인간 이해
마지막으로 플랫폼 경제 연구에는 어떤 새로운 생각들이 필요한지 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플랫폼 경제는 사물 보다 인적 관계성을 중심으로 합니다. 따라서 플랫폼 경제를 연구하려 면 전통적인 경제학적 사유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교환가치는 사용가치를 뛰어넘습니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 작동의 주요 방식 이죠. 하지만 플랫폼 경제에서는 사용 가치가 교환가치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까요?
플랫폼 경제에서 사람은 단순한 개체로서의 개인으로 이해될 수 없 고, ‘계급’과 같은 집합적 범주로서도 이해될 수 없습니다. 인적 관계 성에 의해 사람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연결된 사람 입니다. 따라서 플랫폼 경제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상상을 하는지를 포착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과 다른 사람이 연결되었다고 인식하는 것 은 쉽지 않습니다. 이는 개인의 경험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것이기 때 문입니다. 알고리즘에 의해 만들어진 ‘사용자의 데이터 프로필用戶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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像, user personas’을 예로 들어보죠. 이 데이터 프로필은 분명 일종의 관 계성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선 데이터 프로필을 만들기 위해 알고 리즘은 연관 있는 사람들의 수많은 데이터를 종합해야 합니다 . 그리고 한 개인의 행동은 추후 동일한 데이터 프로필로 분류되어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이런 관계성은 개인 차원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개인의 행동이 스스로의 데이터 프로필에 얼마만 큼의 영향을 끼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추리와 철학적 사 고가 필요한데요, 실증적으로 확인하기 힘든 부분이죠.
인류학적 사고는 여기에 하나의 통찰을 안겨줍니다. 예컨대 모종의 친족관계 안의 관계성에 대한 사고가 있는데요, ‘아버지와 딸’ ‘할머니 와 손자’는 매우 구체적인 관계죠.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관계에 대한 이해는 죽은 조상과의 관련성이나 우주 전체와 연결되었다는 상상과 는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관계는 이런 상상 속에서 비로소 일 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방법과 이론 구축에 대한 문제를 통해 여러분과 함께 생 각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인적 관계성’을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입니다. 관계성은 주로 실증적 조사에 의해 발견됩니다. 하지만 개인 의 경험을 통해 직접적으로 포착하기는 어렵죠. 따라서 추론과 상상 력을 필요로 합니다. 향후 관계성은 미래의 이념이자 공공 인식, 토론 의 기초가 될 텐데요, 이와 관련해 기존 사회과학이 행해오던 통상적 인 조사 방식은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이를 메우기 위해 기술이나 철학, 윤리가 필요해질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물’의 문제입니다. 플랫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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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사람의 관계성은 휴대폰, 애플리케이션, 인터넷과 같은 사물 관계 를 통해 구성됩니다. 하지만 물질과정은 물질 및 물질화物化와는 다릅 니다. 왕훙들의 퍼포먼스나 대중의 소셜미디어 속 교류는 얼마만큼 물 질화된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이런 행위들이 실체적인 것이라면, 여기서 이 물질화는 물질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이 물질화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어떤 종류의 인식이 그 이면의 모 순을 더 잘 반영할 수 있는 것일까요? 세 번째 질문은 사람의 능동성에 관한 것입니다. 일부 연구에서는 플랫폼 경제 속의 사람을 상대적으로 허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그립니다. 이는 물론 중요한 발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고려해야 할 잠재적인 능동성은 존재하는지, 사람의 능 동성은 어떻게 억제되는지, 혹은 어떻게 개발될 수 있는지와 같은 질 문이 던져질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이나 계급과 같은 범주로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일종의 관계 속에 위치한 능동성입니다. 한 개인이 다 른 것과 연결되면 그의 의식과 상상, 인식도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새로운 공공의식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여 러분의 생각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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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근의 소실: 즉각성, 관계, 정신
이 글은 2019년 말 영상 방담 프로그램 「슈산야오十三邀」 시즌 4에서 촬영된 쉬즈위안과 샹뱌오 교수의 대담 중 이 책 1부 내용과의 중복 을 제외한 ‘부근의 소실: 즉각성, 관계, 정신’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특히 이 부분은 샹뱌오 교수의 고향인 원저우에서 촬영됐다.
쉬즈위안(이하 쉬): 의미 있는 사회란 (아마) 수많은 보통 사람이 자신 의 생활을 명확하게 묘사할 수 있고,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세계를 면밀히 분석할 수 있는 사회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주변 세계 에 대한 중국인들의 묘사 능력이 일반적으로 좀 떨어지는 것 같습 니다. 이곳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볼 때 느끼셨겠지만, 평생을 한곳 에서만 살았던 사람도 자신의 주위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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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중국인들의 묘사 능력이 좋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샹뱌오(이하 샹): 중국인들의 묘사 능력이 유독 떨어지는지는 잘 모르 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하신 것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는 중 국인들이 자기 주위 세계에 대해 몰입해서, 하나의 서사를 만들고 자 하는 욕구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은 여기서 말하는 ‘능력’과 앞서 우리가 논의한 ‘초월성’53의 관계입니다. 만약 오늘날 중국의 젊은 학생에게 부모님은 무슨 일 을 하시는지, 부모님께서 이 동네에서 살기로 결정했을 때 어떤 생 각을 하셨는지, 이 동네 혹은 이 도시에서 이 학생이 생각하는 자 신의 사회적 위치는 어떠한 것인지 , 근처 재래시장이나 가게, 점포 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다니고 있는(혹은 졸업했던) 학교 는 어떤 교육과정을 보유하고 있는지 등을 묻는다고 생각해봅시 다. 아마 명확하게 묘사하지 못할 확률이 큽니다. 왜냐하면 이 질 문들은 그 학생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죠.
쉬: 그 학생에게는 중요하지 않죠.
샹: 맞아요. 학생들에게 이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학생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들을 넘어선 것입니다. 학생들은 보통 대학에 가 려 하고, 따라서 어떻게 대학에 갈 수 있는지는 자세히 알고 있습
53 초월성에 대해서는 제1부 베이징 방담의 ‘1980년대로 1980년대를 비판하 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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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세계 대학 랭킹을 꿰고 있으며 토플이나 GRE를 어떻게 봐 야 하는지와 같은 글로벌 대입 시스템에도 매우 익숙하죠 . 여기에 는 이른바 변증법적 관계가 있습니다. 앞서 저는 이런 초월감이 매 우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초월감이 없으면 주변 사물이나 자신이 하는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 지만 이제는 또 다른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이 초월감‘만’ 가지고 있게 된 것이죠.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 세계를 돌아보 지 않습니다. 주변 세계는 버리고 떠나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죠.
쉬: 사람들은 이따금 자신들의 생활 환경이나 공동체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서도 벗어나려 하죠. 그렇다보니 자신과 상관없는 ‘큰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모순인데요, 모두가 자아를 많이 강조하지만 동시에 그 자아는 집단적인 성격의 자아이자 큰 자아이기도 합니다.
샹: 맞습니다. 이는 사실 모순보다는 분열에 더 가깝습니다. (쉬: 분열! 맞아요.) 왜냐하면 각각의 개인은 폐쇄적이거나, 자족적이고 독립 적인 생물체가 아니라 세상에 있는 여러 요소의 집합이자 역사적 조건하에서 이루어진 임시적인 집합체이기 때문이죠. 개인은 여 러 층차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순수한 자아로서의 개인이고, 다른 하나는 큰 집단의 담지체로서의 개인입니다. 이처럼 다층적 인 개인들은 그 층차 간의 길항관계를 유지한 채 대부분의 시간 동 안 하나로 통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엔 여기에 분열 이 생겼습니다. 원자적인 개인으로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큰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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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갖다가도 때로는 거대한 사건에 대해 갑자기 거창한 논평을 해 댑니다. 반면 이 둘의 중간 지점, 즉 자신의 부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나 가족 아니면 전 세계에만 관심을 두죠.
쉬: 맞습니다. 두 가지 극단으로 나뉘죠.
샹: 그리고 이것이 바로 부근의 소실이라는 문제입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현대사회는 부근을 소멸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신 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시장은 만병통 치약이며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라는 식의 신자유주의 이데올 로기가 존재한다고는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식) 시장은 부근을 소실시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예요. 거래과정에서 별다른 마찰이 없어야 하기에 시장은 부근을 일종의 장애물로 생각합니다.
쉬: 그렇다면 오늘날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위챗微信, 알리페이支付寶, 배달음식 애플리케이션인 메이퇀美團 같은 것은 부근의 소실 을 추동하는 힘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부근’에는 여러 층차의 감각들이 있지만 현대사회는 손가락질 몇 번이면 못 닿는 곳이 없 습니다. 따라서 모든 ‘부근’이 소멸되었죠.
샹: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근’은 어디로 갔을까요? 메이퇀 플랫폼 설계자에게도 부근은 아주 중요합니다. 플랫폼을 설계하기 위해 선 언제 차량과 사람의 유동량이 가장 많고, 언제 사람들이 돌아다 니지 않는지와 같은 부근의 교통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설계자들에 의해 본래 우리의 신체를 통해 직접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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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감지할 수 있었던 물리적 의미로서의 ‘부근’은 데이터화된 ‘부 근’으로 바뀌었습니다. 부근은 단순히 증발해버린 것이 아니라 다 른 것으로 ‘전화轉化’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화의 배후에는 기술 의 발달이나 여러 관계의 재구성이라는 자본의 힘이 있죠. 한편 부 근의 데이터화轉化는 우리에게 새로운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습니 다. 내가 원하면 무엇이든 내 앞으로 가져다놓을 수 있게 되었죠.
쉬: 그렇다보니 5분이라는 시간이 갑자기 중요해졌습니다. 이제 사람 들은 5분을 기다리는 것도 불편해합니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감 각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1년 전의 일은 역사나 교과서 에서 나오는 사건처럼 아주 오래전 일로 느끼면서도내 눈앞의 5분 은 기다릴 수조차 없는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샹: 말씀하신 내용은 아주 거대한 철학적 명제이지만 인류학의 관점 에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일반적인 추세, 즉 ‘시간이 공간을 정복하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원래 공간적인 거리감을 통해 세계를 인식했습니다. 과거 사람들은 사 람의 행위를 통해 멀고 가까움을 묘사했어요. 예를 들어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걸어가면 네가 있는 곳에 도착한다’는 말은 나와 상 대 사이의 거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시간이 없고 담배 피우기 와 걷기라는 두 가지 행위만 존재할 뿐이죠. 하지만 시간은 점점 추상화되었고 공업화 시대에 이르러서는 시계에 따른 시간 구분 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죠.
쉬: 근대의 상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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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 맞습니다. 시계가 지시하는 시간 감각은 사람의 행위와 분리된 시 간 감각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의 행위를 통해 시간을 묘사하 지 않습니다. 반대로 시간이 사람의 행동을 규범화하죠. 이를테면 직장인들은 8시까지 출근해야 합니다. 저는 과거 광둥성 둥관東莞의 이주노동자들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요, 둥관의 노동자들은 화 장실마저 정해진 시간에 맞춰 다녀와야 했습니다. 그들은 조립 라 인의 부속품이었기 때문에 생리적인 현상 또한 조절되어야 했고, 한 번 화장실 가는 기회를 놓치면 다음 쉬는 시간까지 화장실에 갈 수 없었습니다. 반면 소셜네트워크 시대社交時代에 이르러 큰 변화 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시간은 더 이상 선형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비해 파편화되었죠. 지금은 8시간 동안 공장에서 일한다고 했을 때, ‘2시간 동안 이 일을 하고, 15분 동안 저 일을 한다’ 식으 로 하지 않습니다. 8시간 사이에 여러 태스크To do task가 계속해서 추가되죠. 이처럼 시간의 일체성이나 선형성은 모두 조각조각 파 편화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의 시간 감각은 한층 더 강렬해집니다. 저는 지금 그냥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 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지만, 현대의 시간 감각은 산업시대의 선형적이고 일방향적인 시간 감각과는 다를 수 있습 니다. 즉, 오늘날의 시간 감각은 일종의 즉각성을 추구합니다. 사 람들은 5분 늦은 라이더에게 화를 내요. 이런 마음가짐은 현대사 회에서야 나타난 새로운 것이죠. 사실 라이더가 늦은 고작 몇 분의 시간은 나의 하루 일과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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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5분이라는 시간을 굉장히 따지죠. 왜일까요? 그 이유 는 사람들이 이 5분을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지 않기 때 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몇 분이 나의 하루 일과에서 어디쯤 위치 해 있고, 이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몇 분’이라는 시간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죠. 다시 말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지금, 바로’와 같은 일종의 즉각성입니다. 오늘날 기술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데요, 5G가 일반화된다면 거래에 소요되는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 테고 즉각성에 대한 요구 는 점점 더 늘어나겠죠. 그리고 그만큼 ‘부근’도 소실될 것입니다.
쉬: 그렇다면 이러한 즉각성이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킬까요?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이 즉각성이라는 것이 결국은 사람의 심 리적인 측면이나 심성적인 측면에 직접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것 이기 때문입니다 . 사람들이 어떻게 변할지 혹은 인간사회의 조직 방식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합니다.
샹: 성찰하는 능력이 저하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게 거리가 없 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달 라이더는 당신이 주문 한 것을 바로 가져다줍니다. 만약 배달이 늦어져 즉각성에 대한 욕 망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화를 내게 되겠죠. 하지만 화를 내면서도 나와 라이더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냐하면 그 관계는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배달을 시 킬 때마다 만나는 라이더가 매번 다르니 그 관계는 일회적이고 즉 각적인 것이 됩니다. 바꿔 말해, 사람들은 즉각성과 편리함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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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됐습니다. 굉장한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투덜거리고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즉각성을 추구해나가죠.
쉬: 그렇다면 새로운 야만이 나타날 수도 있을까요? 상호 존중, 공감 과 같은 시민의 미덕은 장기적인 관계 속에서 비로소 형성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즉각성이 추구되는 세상에서는 어떠한 공감이나 이해 능력도 기를 필요가 없겠죠. 어쩌면 사람들이 동물적이고, 야 만적이며 본능만 추구하는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추세는 이미 어느 정도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샹: 이론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즉각성의 추구는 도덕을 매우 감정적이고 극단적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쉬: 이미 모든 중국 사회가 매우 감정적으로 변했습니다. 가령 사람들 은 마치 자신들이 피해를 입은 것처럼 어떤 일에 대해서 갑자기 공 감하거나 분노를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이 감정들은 실제 행동으 로 전환될 수 없기 때문에 빠르게 식어버립니다. ‘부근’이나 ‘주변’ 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단순한 방관 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이 세계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방관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에 참여할 어떤 기회도 없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알리바바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만 사실 어떻 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샹: 맞는 말씀입니다. 막연한 느낌이지만 저는 세상이 점점 원자화·개 체화되고 있으며 사람들 사이의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관계도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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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느슨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신뢰나 의미 체계 의 영역만큼은 극단적으로 집중화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 들은 서로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알리페이는 신뢰 합니다. 결국 우리는 사람 대신 추상적인 시스템을 크게 신뢰하고 있는 겁니다(물론 추상적일지라도 이 시스템은 매우 구체적이고 복잡한 기술로 구성되어 있겠지만요). 만약 이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즉각성과 편리함을 누릴 수 없겠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는 가장 원초적인 사회관계가 본질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부모와 자식 관계처럼 생물학적으로 정의된 관계들만이 다시 매우 중요 한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쉬: 마지막에 지적해주신 부분이 인상 깊네요. 우리 세대는 사회 전체 가 점점 더 개인주의적인 방식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 다. 원자화와 같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이 더 중시되고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더 평등해지며, 혈연관계의 영향력은 약 해지는 형태로 말이죠. 하지만 지난 몇 년간을 돌이켜보면 우리가 사라지거나 약해지리라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요즘 젊은 세대들은 결혼하는 데 부모가 결정 해주길 바란다고 한다는데요 , 우리 세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샹: 맞습니다. 당시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죠. 우리가 젊었을 때는 부모가 결혼 상대를 소개해준다는 건 굉장히 창피한 일이었 어요. (쉬: 위스키 한 잔만 주문해주시겠어요? 샹: 술을 마시고 싶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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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요? 쉬: 그냥 한잔하고 싶습니다. 너무 기쁘네요.) 듣고 보니 참 이 상합니다. 어떻게 시간 감각의 변화가 결혼관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하지만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원래 이렇습니다. 삶 전 반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기고 이에 따라 결혼이나 가정에 대한 이해도 새로워질 수 있죠. 우리 세대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사람 들은 어떻게 결혼 상대를 직접 만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당 시의 우리는 ‘부근’에서 사랑의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심지어 버스 안에서도 우리는 사랑 이라는 관계를 구축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 은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구축할 능력과 자신감을 잃은 듯합니다. 때문에 점점 사회를 초월한 생물학적 관계를 의미의 기초로 삼게 되는 것이죠.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물학적 관계 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적인 계산입니다. 예를 들어 나와 비슷한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진 사람과 만나는 것도 타인의 소개와 많은 양의 정보를 비교한 끝에 이루어집니다. 아마 이 과정에서 빅데이 터가 사용될 날도 머지않을 겁니다.
쉬: 바이허百合 같은 결혼정보 회사는 이미 빅데이터를 이용해 사람들 을 매칭해주고 있습니다.
샹: 그렇죠. 저는 과학기술을 사용해 나와 적합한 사람을 찾는 행위의 등장은 경제적인 이성이 극단적으로 커져 자연스러운 사랑 본연 의 감정을 말살시켰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더 정확한 이유 는 앞서 언급한 자신감의 상실 때문일 것입니다.
혼돈의 시대를 꿰뚫어보는 힘 407
쉬: 자신감의 상실은 곧 자유의지의 소멸로 이어집니다. 사람의 가능 성을 믿지 않는 것이죠.
샹: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어떻게 이를 마주하고 대응할 것 인가입니다. 가령 최근 노처녀 담론과 부동산의 관계에 대해 흥미 로운 가설을 제시한 연구들이 있는데요, 연구가 주장하는 것처럼 부동산 업계가 의도적으로 노처녀 담론의 확산을 부추겼다고는 보기 힘들지만, 실제 현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노처녀 담론의 가장 큰 수혜자는 부동산 업계가 맞습니다. 사람들은 노처녀가 되 는 것에 큰 공포를 느끼고, 결혼에 대한 압박을 받죠. 그리고 결혼 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입니다. 나이 든 여성의 어머니들은 부동산 시장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 되죠. 여기서 가장 큰 피해 자는 여성 자신이지만 정신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사람이 피 해자입니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치욕의 감정을 느낍니다. 도덕 적으로는 부모님께 죄송스럽고, 사회적 가치에 비춰 굴욕감을 느 껴요. 이렇게 사회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굉장히 획일적으로 변 하고 노처녀 담론과 같은 특정 담론 앞에서는 모두가 취약한 존재 가 됩니다.
쉬: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저항하고 개인의 의미를 발견하거나 존엄을 다시 세울 수 있을까요?
샹: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원주민들은 한 마리의 소를 두 고 ‘소’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소는 ‘한 무리의 소’이지 ‘한 마리의 소’는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우리 인류는 현대사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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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서야 비로소 한 개인을 하나의 개체이자 세상의 유일한 존재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독특함을 추구함으 로써 자신에 대한 존엄과 자유를 얻을 수 있는데요, 이 또한 현대 에 와서야 나타난 새로운 사고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의 개성을 추구하는 행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 습니다. 오히려 개인의 의미와 존엄을 되찾는 방법은 개인이 아니 라 관계에 있습니다. 개인의 존엄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 닙니다. 그곳에 원래부터 개인의 존엄이 있었던 게 아니에요. 한 개인은 스스로 사람의 존엄성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대신 부근을 세우고 이 관계를 재고하며 관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쉬: 현대사회의 수많은 연결은 소비의 형태로 이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니쿠퍼를 모는 사람끼리는 모종의 동질감을 형성하고 자 신들의 의미 시스템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약한 연결이 어느덧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연결 방식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모든 것 이 약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반대로 생물학적 관계는 강하게 연결 되어 있죠. 생물은 강한 연결의 한 방식이 되었습니다.
샹: 아주 잘 표현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중간이라는 층차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간 고리가 존재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언제든 느슨한 관계 속으로 뛰어들어가 협조하거나 동원, 협상, 관계 구축을 할 수 있습니다.
쉬: 우리 세대는 자신들이 중간 사회, 중간층, 즉 국가와 가족/개인 사 이에 존재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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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 즉 선생님 외조부의 부친 세대부터 시작해 중간 사회 를 만들어왔죠. 하지만 40대가 된 지금, 우리가 발견한 사실은 중 간 사회의 형성이란 게 불가능하단 것이었습니다. 혹은 그동안 만 들어졌던 것이 소실되고 다시 양극단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었 죠. 여 기서 말하는 양극단이란 IT 종사자들의 세계와 텐센트의 설 립자 마화텅의 세계를 말합니다. 마화텅을 마윈으로 바꿔도 말이 됩니다. IT 종사자들과 마윈의 세계인 셈이죠.
샹: 중간의 소실이 곧 부근의 소실입니다. 둘은 연결되어 있어요. 경 제 지표의 관점에서 보면 중간은 크게 번영했습니다. 왜냐하면 사 람들은 사회를 일종의 소비 행위로 이해하고 있고, 각종 동호회 또 한 많이 생겨났기 때문이죠. 하지만 정신사회의 측면에서의 중간 은 미약합니다. 매우 약해요. 이 문제는 중국의 문제일 뿐만 아니 라 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포퓰리즘의 흥기도 이와 관련됩 니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와 민중,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단 포퓰리즘의 배후에는 엘리트주의가 있어요. 엘리트주의가 없으면 포퓰리즘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포퓰리즘이란 곧 엘리트 가 자신이 민중을 직접적으로 대표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렇다 면 포퓰리즘과 대척점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중간층입니 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몇 마디의 말일지라도 나서서 발언할 필요 가 있습니다.
쉬: 그럼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지식인은어떤 모습입니까?
샹: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장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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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고전을 잘 알고 있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현실의 실천 속으 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하죠. 또한 지식인의 문제의식은 시대를 따라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반드시 현재의 곤경, 대중의 곤 경, 최신의 변화에 기반해야지 공자나 아리스토텔레스, 마르크스 가 말한 무언가에서 출발해서는 안 됩니다. 공자가 과거에 말한 것 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지를 더 이상 물어봐서는 안 됩니다. 지식인들은 만약 공자가 오늘날을 살아가고 오늘날의 정보를 모두 습득했다면, 그와 같은 지식인들은 현대사회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말을 할 것이며,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와 같은 것을 물어야 합니다.
쉬: 선생님은 이제 곧 50대가 되는데요, 가슴속의 무엇이 선생님을 연 구로 이끄나요?
샹: 다른 연구자들도 그렇겠지만, 첫 번째는 지적 호기심입니다. 두 번 째는 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매우 구체 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역사적 환경 속 에서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환경에 대해 어떤 말을 하길 원하죠. 만약 이 말을 할 수 없다면 자아를 실현하지 못하는 것과 같고 역 사나 자신의 주변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존재가 될 따름입니다. 우 리는 우주가 아주 거대하고 우리는 우주에 비해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설령 미약할지라도 모든 개체는 자신 의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죠.
쉬: 오늘 이렇게 이야기할 시간을 가져서 참 기쁘네요. (샹: 정말요?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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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잘 했는지 모르겠네요.) 원저우에는 매우 시적인 정취가 있습니다. 비록 지난 40년 동안 경제 논리에 의해 완전히 억눌려왔지만요.
샹: 맞습니다. 원저우에 산과 물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방방곡곡 숨 겨진 구석이 많고, 이 구석들이 곧 부근이죠. 말씀하신 것처럼 해 가 지면 부근에 감춰진 수많은 사람의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 렇다면 우리 인생의 황혼이란 무엇일까요?
샹쉬: 태양이 지기 전에 잠시 빛나는 것처럼 죽을 무렵 정신이 맑아지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갑자기 세상을 다시 사랑하게 되고, 모든 연 인을, 모든 생각을 사랑하게 되는 때 말입니다. 그 순간이 우리의 황혼입니다. 30년 후에 한 번 더 보기로 약속합시다. 그때까지 이 프로그램이 유지될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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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쥐안을 말하다:
실패와 퇴장이 허용되지 않는 경쟁
펑파이신문 인터뷰, 2020년 10월
2020년, 아마 ‘네이쥐안內卷, involution’만큼 화제가 됐던 유행어는 없 었을 것이다. 원래 네이쥐안은 급격한 발전이나 점진적 성장 없이 단 순한 수준에서 자기 반복을 하는 사회나 조직을 설명하기 위해 인류 학자들이 만든 개념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치열한 경쟁’을 묘사하 는 데 사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매 순간순간 안간힘을 쓰며 살아간다. 사소한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 하고 타인의 생존 공간을 빼앗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신력까지 낭비하고 소모한다. 이 러한 소모적 경쟁은 유치원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시작해 직장을 얻거 나 결혼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렇게 현대사회 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활 전반에 걸쳐 끝없이 ‘말려들 어卷’ 가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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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파이신문澎湃新聞』은 인류학자인 샹뱌오 교수를 초청해 네이쥐 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날에 사용되는 네이쥐안과 처음 만 들어질 당시의 네이쥐안은 어떤 의미상의 차이가 있을까? 또한 현대 인들은 우리의 일상 속 네이쥐안을 어떻게 묘사할까? 일상에 대한 면 밀한 관찰과 비유를 통해 새로운 개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데 능숙한 샹뱌오 교수는 네이쥐안을 두고 “계속 때리지 않으면 쓰러지 는 팽이처럼 ‘자신을 끝없이 다그쳐야 하는 팽이식 무한 루프不斷抽打自己的陀螺式的死循環’”라고 묘사한다. 그는 인류학적 시각에 입각해 경 쟁이라는 큰 틀에서 네이쥐안을 이해하고 있으며, 인류사회의 예외적 현상인 네이쥐안 현상의 이면에는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고도로 일 체화된 경쟁’이 있다고 지적한다. 글의 마지막에서 샹뱌오 교수는 네 이쥐안에 따른 불안감을 해결하는 몇 가지 사고방식으로 ‘구체적으로 생각하기想細’와 ‘거리를 두고 명확하게 생각하기想開’를 소개한다. 이 사고방식을 통해 인류학자는 어떻게 일상 속 곤경과 불안에 대처할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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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쥐안은 때리지 않으면 멈추는 팽이와 같은 무한 루프
왕첸니王芊霓(이하 ‘왕’): 네이쥐안이라는 말은 인류학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된 학술 용어입니다. 미국인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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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먼저 이 단어를 사용했고 이후 프라센지트 두아라가 ‘정부 조 직의 네이쥐안화’라는 말을 사용했죠. 따라서 우리는 ‘네이쥐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선 인류학자에 게 물어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네이쥐안은 영어로 “인볼루트Involute”인데요, 어떤 자연과학 서적에서는 네이쥐안이 라는 단어가 조개껍데기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날카로운 부분 이 밖으로 뻗어나와 있는 조개도 있지만, 네이쥐안형 조개는 바깥 으로 향해 있는 게 아니라 안쪽으로 계속 말려들어가는 형태를 띠 고 있습니다. 하지만 겉보기엔 이렇게 휘감겨 있는 구조가 나타나 지 않죠.
샹뱌오項飆(이하 ‘샹’): 네이쥐안이라는 말은 기어츠가 인도네시아 자 바섬의 농업경제를 묘사하면서 최초로 사용한 개념입니다. 그는 농경사회가 오랜 기간 큰 변화 없이 지속되어온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자바섬의) 농업경제는 갈수록 정교 해졌지만 각 토지 단위에 투입되는 노동력은 줄어들기보다는 갈 수록 늘어만 갔어요. 투입되는 노동력이 늘어날수록 그 생산력도 늘어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생산력의 증가 또한 노동력의 투 입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곧 상쇄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먹 을 입이 많아졌으니 생산이 증가했다 하더라도 투입된 노동력에 의해 다시 소비될 뿐 잉여 생산량이 늘지는 않죠. 늘어난 생산력과 증가된 노동력 간의 평형 상태는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그렇다면 기어츠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왜 네이쥐안內卷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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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했을까요? 그 이유는 농사의 세세한 부분에 대한 관심이 커졌음 에도 마지막으로 산출되는 생산량과 당시 자바 사람들이 투입했 던 노동력 사이의 평형 상태가 별다른 변화 없이 오랫동안 지속되 어 종국에는 마이너스 성장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경우로, 만약 황무지를 발견해 그곳을 개간하고 별다른 에너지를 들이지 않은 채 농사를 짓는다면 그 생산량은 투입된 노동력에 비 해 높았을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 재학 중일 때 제 스승이었던 쑨 리핑 교수께서는 중국인들이 농사짓는 모습이 “마치 꽃을 심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정성스레 밭을 갈고 조 심스레 심는다精耕細作”는 말은 아시아 사람들의 농업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죠. 이후 황쭝즈黃宗智, Philip Huang는 창장長江강 삼각 주와 그곳의 농업경제 발전을 연구하며 중국의 농업경제사 분석 에 네이쥐안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요. 그의 분석은 마크 엘빈 이 말한 ‘고수준 균형의 함정high-level equilibrium trap’의 의미와 기본 적으로 같습니다. ‘고수준 균형의 함정’이란 농업 기술, 행정 관리, 사회 조직, 인력 동원 등의 영역에서 일찍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 음에도 그 이후 새로운 혁신 없이 고수준의 균형 상태가 오랜 시간 이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중국의 농촌생활과 농업 생산 방식은 오랫동안 변함없이 유지되었습니다. 마크 엘빈의 주장은 개간할 수 있는 땅은 모두 개간했기 때문에 토지가 더 이상 증가할 수 없었지만, 이에 비해 인구는 계속 증가했던 17세기 중국의 상 황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 인구의 증가가 가능했던 이유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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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일까요? 바로 ‘정성스레 밭을 갈고 조심스레 심는’ 매우 네이쥐 안적인 방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구의 증가는 문화와도 관련됩니다. 왜냐하면 중국의 전통문 화에선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을 복이라 여기기 때문이죠. 인구의 증 가는 노동력을 저렴하게 만듭니다. 무슨 일이든 값싼 노동력을 사 용하면 되니까 기술을 혁신해야겠다는 동기가 생기지 않죠. 중국 의 농업과 유럽 농업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는 멜대의 존재 유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유럽에서 는 기본 적으로 멜대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찾아보기 힘들죠. 하지만 중 국은 어느 농가든 멜대를 가지고 있었어요. 유럽에서는 힘든 일이 있으면 동물이 하도록 했지 사람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은 별로 없 었습니다. 이는 증기와 기계 같은 기술 혁신의 동기가 되었고 이후 유럽은 자연의 물리 에너지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한편 두아라는 네이쥐안 개념을 행정 및 정치와 연관 지었습니 다. 그는 청말 신정 당시, 청조 정부가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 해 큰 비용을 들여 수많은 관료 기구를 설립했으나 기층 민중에 대 한 국가의 행정능력은 전혀 강화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지방사회에 대한 서비스는 하나도 개선되지 않았죠. 두아라에 따 르면 이는 국가 건설에서 나타나는 네이쥐안 현상입니다. 이 네이 쥐안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을까요? 역설적이게도 굉장히 많 은 관료가 생겨났고 이들에게 봉급을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농민 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임금을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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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들은 농촌사회를 위해 봉사하기보다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 우기에 급급했습니다. 수탈은 더 많아졌지만 반대급부로 돌아오 는 복리가 없으니 결국 농촌사회의 해체와 혁명으로 이어졌죠.
왕: 그동안 학자들이 사용해왔던 네이쥐안의 개념은 오늘 우리가 다 루려는 현대사회의 네이쥐안과는 그 개념의 맥락과 표현에서 의 미의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샹: 이전 학자들의 네이쥐안에 대한 논의와 현재 중국에서 유행하는 네이쥐안 담론은 모두 ‘뚫고 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 다’는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각 네이쥐안의 작동 메커니즘 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어츠와 황쭝즈, 마크 엘빈이 말한 네이쥐 안의 핵심은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경쟁 결핍입니다. 과거 사람들 의 목표는 가정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 아이를 많이 키우는 것이 었습니다. 이들 학자는 왜 아시아 사회에서 공업화나 자본주의가 나타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려 했던 것이죠. 다시 말해, 인류학에 서 네이쥐안은 한 사회의 작동 방식에 왜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 는지, 왜 양적 축적에서 질적 변화로 나아가지 못했는지, 특히 왜 농경사회에서 자본주의 경제로의 전환이 나타나지 않았는지를 설 명하기 위해 등장했습니다. 이러한 네이쥐안 개념은 오늘날 유행 하는 네이쥐안 담론의 내용과는 상반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말 하는 네이쥐안은 경쟁이 심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다만 제가 더 흥 미롭게 생각하는 점은, 우리가 말하는 네이쥐안이 대체 무엇이냐 는 것입니다. ‘네이쥐안’은 굉장히 직관적인 단어입니다. 많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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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 우려하고 있는 문제를 반영하고 있죠.
왕: 이전에 중국 사회과학원의 양커楊可 연구원은 「‘매니저 맘’의 등장 母職的經紀人化」(2018)이라는 논문에서 엄마들이 점점 아이들의 매 니저로 변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곤 엄마가 아이를 위해 해 야 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점에서 엄마의 역할이 네이쥐안 화됐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저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요, 지난해에 아이를 낳고 양육을 시작하고서야 엄마가 해야 하는 일 이 정말 끝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뭔가 를 해주고 나면 다음 단계로 해줘야 하는 일이 계속해서 늘어납니 다. 제 경우 아이의 하루 일정을 촘촘히 짜고, 아이를 보살피며 피 부에 이것저것 발라주는 데 다른 엄마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씁니 다. 또 얼굴에 바르는 것과 몸에 바르는 것, 엉덩이에 발라줘야 하 는 것이 다 다릅니다. 굉장히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하더라고요. 선 생님께서는 ‘엄마 역할의 네이쥐안화’ 같은 네이쥐안이 의미가 있 다고 보십니까? 또한 아이 돌보는 일에 네이쥐안이라는 단어를 사 용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제 말은, 사실 오늘날 매우 다양한 상황 에 네이쥐안이라는 단어가 붙고 있는데요, 주로 사회에 대해 비아 냥거리거나 투덜거리는 식의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잖아요? 따라 서 제가 방금 말씀드렸던 예시들에 대해서도 선생님의 생각을 말 씀해주시겠습니까? 최근 사람들이 이것저것에 네이쥐안을 붙이 는 데에는 어떠한 오류가 있는지 혹은 네이쥐안이라는 단어를 사 용하면 안 되는 상황은 어떤 것인지, 이를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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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지 말입니다.
샹: 단어 사용은 하나의 사회 현상입니다. 사람들이 네이쥐안이라는 단어를 통해 자신의 불안함을 표현하고 있다면 저 같은 지식인들 이 할 일은 먼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이후 분석을 하는 것이 지 처음부터 이 단어를 이런 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늘날의 네이쥐안이 대체 무엇이고 과거 사용되었던 네이쥐안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지를 명확히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방금 말씀하신 엄마 역할의 네이쥐안화는 대략 두 가지 측면에 서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투입해야 하는 것 이 끊임없이 증가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 섰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는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다는 말은 그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지금 하는 일이 어떤 의미 를 지니는지도 모르며, 이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멈 출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막다른 골목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내부에서 계속 돌고 있는 골목입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무한 루프에 들어선 거예요. 네이쥐안이 무한 루프라는 말은 이처럼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말 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무한 루프는 에너지를 계속해서 소모하도 록 하는 끝없는 순환이죠. 그렇다면 왜 중국 사람들은 에너지를 많 이 소모하게 만드는 막다른 골목, 무한 루프에 들어서는 것일까 요? 그 이유는 당연히 사회적으로 느끼는 집단 압력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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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엄마들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하니 집단 압력을 느 끼는 것이죠. 여기에는 경쟁심이나 남과 비슷한 수준이 되어야 한 다는 생각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존재합니다. 이런 배경과 맥락 속에서 중국인들은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는 것이겠죠.
사람들이 엄마의 역할에 네이쥐안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도 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네이쥐안이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의 의미와 비교해보자면 새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전통적 의미의 네이쥐안이 다룬 문 제는 고수준 균형의 함정이 어떤 이유에서 오랜 기간 대를 지속하 며 유지되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17세기 무렵부터 중국 사회에 는 경쟁이 존재하지 않았고 모두가 입에 풀칠할 정도의 생활만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은 끊임없 이 반복되는 무한 루프입니다. 사실 엄마들은 육아과정에서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로션 이나 이유식을 발견하고, 단톡방에서 다른 엄마들이 사용하고 있 는 최신 용품들을 하루 종일 보고 있죠. 만약 자녀에게 매일 똑같 은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면 불안함을 느낄 겁니다. 게다가 아이가 좀 크면 유치원을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떤 초등학교로 보내 느냐 하는 것까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되겠죠. 중학교에 올라갈 때가 되어서는 미칠 지경에 이릅니다. 이런 것들은 농경사회에 존재했 던 고수준의 균형과는 다릅니다.
전통적인 네이쥐안이 반복적이고, 경쟁이 없으며 농경사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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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구조적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상황을 가리킨다면, 오늘날의 네이쥐안은 때리지 않으면 쓰러지는 팽이처럼 자신을 끝없이 다 그쳐야 하는 무한 루프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을 다그치고 팽이처럼 계속해서 돌아가도록 하며 매일매일 자신을 움직이지 않나요? 이건 ‘고수준 균형의 함정’에 대비되는 ‘고수준의 동태적 함정高度動態的陷阱’입니다. 에너지 소모가 커요. 과거 소농사회에 서는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정신적 고통은 없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에게 조상에 대한 숭배는 매우 중요한 일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생활 방식은 선대의 일을 대물림하 는 형태였기 때문입니다. “불초소자不肖子孫(가업을 이어받지 못하 는 변변치 못한 자손)”라는 말에서 불초不肖는 ‘닮지 않았다’라는 뜻 입니다. 즉, 조상들이 앞서 하던 일을 그대로 이어갈 능력이 없다 는 말이죠. 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다릅니다. 우리가 아이를 키 우는 방식은 우리 부모님들의 방식과는 다릅니다. 그렇지 않나요? 나중에 커서 아빠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아이를 교육하는 것은 오늘날 중국 가정 교육의 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 는 또 다른 형태의 함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청년들은 부모님의 생 활 수준을 계속해서 뛰어넘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죠. 더 높이 올라 가야 하고 더 빨라져야 하며 더 강해져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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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쥐안의 이면: 고도로 일체화된 경쟁
왕첸니·거스판王芊霓·葛詩凡: 네이쥐안이라는 말이 최근 정말 ‘핫’합 니다. 배달 라이더부터 IT 업계의 프로그래머까지 모두 자신의 일 을 두고 “완전 말려들어갔다太捲了”며 푸념하고 있습니다. 그러곤 은행이나 다른 좋은 일자리로 가려 합니다. 하지만 취업을 위해 보 는 필기시험의 내용은 업무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이에요. 다 시 말해, 이 시험은 단지 다른 사람들을 이기기 위한 것, 경쟁을 위 한 경쟁일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네이쥐안이라는 단어를 통해 현실을 풍자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는 데요, 우리가 네이쥐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실제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고 보는것이 맞을까요? 예를 들어 사람들은 밤새 야 근을 하며 SNS에서 996 문화를 조롱합니다. 우리는 특히 1990년 대에 출생한 젊은이들을 주목하고 있는데요, 이들은 거시적인 사 회 구조가 어떠한지를 이미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대안 적인 생활 방식을 상상하죠.
샹: 직장과 관련된 이야기에 국한해서 바라본다면, 네이쥐안은 현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 지만 자본주의라는 말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불명확합니다. 왜 냐하면 영국 같은 자본주의의 발원지나 현대 자본주의가 잘 발달 된 독일에서는 ‘네이쥐안’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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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네이쥐안은 중국적 특색일 수도 있다는 거죠. 네이쥐 안의 이면에는 ‘고도로 일체화된 시장 경쟁’이 삶의 지향점이 되고 더 나아가 사회의 기본적인 조직 방식이나 생활 및 자원 분배 형태 의 원칙이 되어버린 상황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시장 경쟁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사실 대다수의 경쟁은 시장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예컨대 엄마들이 하는 교육 은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시장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보 는 시험 또한 국가나 학교가 지정한 것이죠. 다만 시장 경쟁을 모 방해 교육이나 시험을 시장의 경쟁처럼 만들었고 이 경쟁에 사람 들이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다음은 네이쥐안의 이면에 있는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고도로 일체화된 경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는 네이쥐안의 중요 전제 조건은 ‘삶의 목표가 다양하지 않고 동일해 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중국 전역의 14억 인민은 모두 동일 한 목표를 세우고, 하나의 목표를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직장에서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퇴사한 뒤 국숫집을 차리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의 좁은 길 위에서 서로의 어깨를 밀치고 있는 거죠.
또한 사람들은 선전深圳의 인력 시장인 싼허三和의 일용직 노 동자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는 것에 대해 일종의 두려움을 갖고 있 습니다. 이 경쟁에 참여하지 않고 물러나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죠. 사람들은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압력뿐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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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압력에도 직면해 있습니다. 최근 한 대학원생 친구가 제게 해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학생은 아르바 이트를 하기 위해 맥도널드에 지원했는데요, 해당 지점에서 그 학 생의 학력을 보더니 처음 했던 말이 “여기서 일하면 부모님이 어 떻게 생각하실지 생각해봤냐”였다고 해요. 이 질문은 굉장히 무거 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단지 공부를 헛되게 했다거나 등록금을 낭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반대로 감정 및 도덕의 문제와 직접적 으로 연관된 질문을 던진 것이죠. 다시 말해, 당신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사회적 계층을 포기하고 낮은 계층의 삶을 선택 하는 것은 도덕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배신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돈을 많이 벌고, 30여 평의 집과 차를 사고, 반드 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 다. 특정 나이가 되면 반드시 어느 정도의 돈을 모아야 하고 일정 한 일을 해야 한다는 식의 담론들 또한 잘 짜여 있죠. 모두가 하나 의 시장에서 같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 도로 일체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왕: “일체화”라는 의미는 단일하다는 의미가 맞나요? ‘다원’과 반대되 는 의미로요.
샹: 목표도 단일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도 매우 단일하다보니 경 쟁 방식도 마찬가지로 단일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험을 통해 경쟁하잖아요? 그렇다보니 결국 상벌의 방식이나 인센티브의 형 식 또한 단일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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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적으로 볼 때 이런 상황은 꽤나 특이합니다. 원시사회 같은 다른 사회에도 경쟁이 있었냐고 한다면 물론 있었습니다. 하 지만 원시사회의 경쟁에는 두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생활이 일반적으로 두 개의 영역, 즉 ‘명성의 영역’과 ‘생존의 영역’으로 분화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생존의 영역은 사 냥과 농사를 뜻하는데요, 생존 영역에서 사람들은 경쟁보다는 협 력을 합니다. 배불리 먹어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이 사회에 서는 어떤 사람들이 경쟁을 할까요? 일반적으로 부족장이나 씨족 의 수령들과 같은 지도자들이 경쟁을 합니다. 이들은 대개 남성으 로, 다른 촌락의 우두머리와 일종의 경쟁관계에 있습니다. 이들은 명성을 얻기 위해 경쟁합니다. 이것이 바로 명성의 영역에서의 경 쟁인데요, 대표적으로 “항아리 부수기砸罐”가 있습니다. 족장들은 자신이 축적한 부를 부족민들에게 나눠주거나, 모두의 앞에서 불 태워버리는 방식을 통해 각자의 명성을 뽐냅니다. 명성을 둘러싼 족장들의 경쟁은 재분배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기 때문에 더 큰 의 의가 있는데요, 그들은 명성을 획득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부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죠. 그리고 이들의 명성 경쟁은 물질적인 재분 배이자 종국적으로는 재화의 균형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원시사회의 사람들은 생존 영역에서만큼은 경쟁하지 않습니다 . 여기서 ‘능력’과 ‘재화의 분배’ 사이의 관계가 조금 복잡 한데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의 사냥 능력은 모두 다릅니 다. 만약 사슴 한 마리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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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로부터 많은 명성을 얻을 것입니다. 부족 사람들은 그의 용 감함과 사냥 기술을 찬양하겠죠. 하지만 그가 사냥해서 잡은 고기 는 반드시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합니다. 반면 현대 중국은 과거 원 시부족 사회와 같이 명성의 영역과 생존의 영역이 나뉘어 있지 않 습니다. 모든 것은 경쟁을 통해 얻어야 해요.
왕: 선생님께서는 『방법으로서의 자기』54에서도 부자들은 더 부유해 지려고 하지만 이를 나누려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였죠. 지적하셨 듯 중국 사회에는 명성의 영역과 생존의 영역이 나뉘어 있지 않으 니 모든 계층이 각자의 불안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층 사람들은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을 원합니다. 중산층은 내가 노력하면 엘리 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또 자식에 대해서는 내 아이가 아이비리그에 갈 수 있을까, 금융을 공부해 투자은행이나 월가에 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와 같은 생각을 합니다. 엘리트들은 자신들 의 위치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으며 자식들이 예술 같은 것을 공부 하는 걸 선호합니다. 상층계급은 자신들의 신분과 품위를 과시할 방법을 갖고 있고 이를 다른 계층과 나눌 생각이 없습니다. 이처럼 현재는 모든 계층이 초조함을 느끼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신이 어 느 계층에 속하든 상관없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여요. 이것 이 바로 이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막차를 놓치면 안 된다는
54 이 책의 제1부를 뜻한다. 책 출간 후 이뤄진 인터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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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바심”55일 텐데요, 이런 조바심이 모든 계층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겠죠?
샹: 맞습니다. 문제는 막차가 이미 떠났다는 것입니다. 일체화된 경쟁 은 1990년대부터 일찍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갑자 기 네이쥐안이라는 문제를 들고나온 이유는 뭘까요? 막차가 모두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층계급은 자신들의 운명을 바꾸길 원합니 다. 반면 중산층과 상층계급은 더 이상 위로 올라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더 두려워하죠. 이들은 다 음에 오는 차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습니다. 단지 지금 타고 있는 차가 멈추지 않길, 나아가 자손 대대로도 멈추지 않길 바랍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잃는다는 게 더 큰 두려움인 것입니다.
만약 희망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극도의 네이쥐 안 상황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를 모았 던 “985폐기물”56 담론이 내포한 의미는 공부가 힘들다는 게 아닙 니다. 오히려 985공정에 속한 대학에 입학한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말이에요. 결국 사람들이 네이쥐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나는 그토록 많은 경쟁에 참여했으나 가장 기본적인 바람도 이루 지 못했다”입니다.
55 제1부 원저우 방담의 ‘계층 유동의 역설’ 참조.
56 중국에서 명문대로 인식되는 985공정에 속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자 신들을 자조적으로 일컫는 말. 이들 중 대부분은 지방 출신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대학에 합격했으나 이후 직면한 현실은 순탄치 않았기에 자신들을 ‘실 패한 학생’이라며 985폐기물이라고 불렀다. 이는 나중에 다시 小鎮做題家라는 표현으로 발전한다. “읍내의 시험문제풀이 고수”라는 뜻인데, 농촌출신 한미한 집안의 청년들이 오로지 대학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미 계급이 나뉘고 부동산을 비롯한 대도시의 생활비용이 지나치게 올라간 상황에서는 명문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부잣집 자식富二代이 아니라면 자기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자조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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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아주 중요한 몇 가지를 말씀해주셨는데요, 중국 사회는 수평적으로 분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면 독일은 중국의 상황과 다릅니다. 독일에서는 견습공 제도를 아주 중시하는데요, 이 제도 는 독일에서 중요한 취업 방식 중 하나입니다. 한번은 독일에서 이 발한 적이 있는데요, 사실 이발하기 전에는 조금 걱정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시아인들의 머릿결과 유럽인들의 머릿결이 좀 다르기 때문에 독일의 이발사가 익숙지 않은 제 머리카락을 잘 자를지 확 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이발 이 아주 잘 되었습니다. 여태까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이발이었 어요. 이발사는 제 머리를 손질하는 과정에 크게 몰입했고 그 순간 을 기뻐하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추측건대, 독일에서 이발사는 견습공에서부터 양성됩니다. 그들에게 이발은 일종의 자기만족과 자부심을 얻을 수 있는 생업입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이발소를 열어 먹고살려고 하면 그때부터 동창회에 나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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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와 퇴장을 용납하지 않는 경쟁
왕: 방금 선생님께서 막차가 이미 지나갔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여기에 100퍼센트 동의하진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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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아마 한쪽에서는 막차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고 볼 것입니다. 오늘날 교육이 이토록 과열된 이유도 여기 에 있습니다.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모들은 아이 들 교육에 많은 것을 투자합니다. 예를 들어 가족 모두 좋은 학군 으로 이사를 가거나 좋은 사립학교로 아이를 보내기 위해 필사적 으로 면접을 준비합니다. 이마저 안 되면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키 기 위해 엄마가 교장과 성관계를 맺는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해 아이 를 합격시킵니다. 이들의 생각에 막차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고, 따 라서 기회는 아직 남아 있죠. 하지만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막 차는 이미 지나갔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말 려들어가는’ 상황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겠 죠. 선생님께서는 오늘날 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리고 대체 현대사회는 어떤 상황에 빠져 있는 걸까 요? 아니면 사회의 어떤 영역은 막차가 지나갔지만, 어떤 영역에 서는 막차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요?
샹: ‘막차’는 매우 조잡한 은유에 불과합니다. 만약 막차가 집단적인 계층 상승의 방법을 가리킨다고 한다면 저는 막차가 이미 떠나갔 으며 이와 같은 구조적인 공간 또한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 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 구조 속의 틈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뿐이 죠. 지금 매우 극단적인 예를 드셨는데요, 사실 자녀 교육에 열성 인 부모도 막차를 기다린다기보다는 그 뒤를 열심히 쫓고 있는 것 뿐입니다. 때문에 그렇게 극단적으로 변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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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말씀하신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교장과 성관계를 맺 었다”는 것은 반대로 구조적인 공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집단이 아닌 개체의 차원에서 극단적인 행위를 하고 그 틈새를 찾으려 하죠. 틈새가 없더라도 어 떻게든 그 틈을 파고들려 합니다.
이미 막차가 떠나가고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과연 편해질까요?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쟁점 은 다시 ‘계급 분화’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성숙한 사회의 사람들이 비교적 평안하게 사는 이유는 뭘까 요? 이는 사람들이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희망과 노력이 재분배되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회 에서는 자신의 특기와 흥미를 발견하면 이를 통해 나아갈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생깁니다. 잘 사는 방법도 다양하죠. 이렇게 성숙한 사회의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갈 길을 찾아서 평안하게 살아갑니 다. 이들 사회가 노력을 경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곳의 사람들 도 노력합니다. 다만 노력의 방식이 다를 뿐이죠. 그저 자신의 방 법을 찾으면 되거든요. 중국의 가장 큰 문제는 막차가 이미 지나갔 음에도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네이쥐안은 경쟁이 치열하거나 그렇지 않고의 문 제를 넘어 헛된 경쟁, 즉 경쟁 이후 얻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해서 경쟁해야 한다는 점과 관련됩니다. 우 리는 경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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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경쟁에서 탈출하려고 해도 도덕적 압력을 느껴야 하죠.
왕: 그렇다면 이어서 경쟁에서의 탈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 다. 선생님께서는 중국 사회가 경쟁에서의 탈출을 허용하지 않는 다고 보시나요?
샹: 오늘날 네이쥐안의 중요한 메커니즘은 탈출 메커니즘이 없다는 것, 즉 탈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경쟁에 참여하지 않고 물러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죠. 앞서 말씀드린 그 대학원생이 맥도 널드에 일하러 갔을 때, 면접관이 첫 번째로 던진 질문이 ‘여기서 일하면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냐’는 것이었죠. 만약 사람들 의 인식보다 더 낮은 사회적 계층의 삶을 선택하고 경쟁에서 탈출 해 살아가고자 한다면 엄청난 도덕적 압력에 맞닥뜨릴 것입니다. 오늘날 선전의 인력 시장인 싼허에서 일용직 일을 하며 어떤 희망 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이 살아가는 청년들에 대한 각종 토론 의 이면에는 일종의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 청년들 은 자발적으로 경쟁에 참여하지 않느냐는 것이죠. 중국 사회의 안정 과 발달이란 모두 이런 치열한 경쟁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실패를 꼭 인정해야 한다는 데 집착을 보입니다. 너희는 돈도 적게 벌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롭지 못하니 도덕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실패와 무능함을 인정하라는 것이죠. 이들이 자신의 실패를 인정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이 경쟁에서 퇴장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 다. 많은 비난을 받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보니 오늘날 경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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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할 수 있는 이들은 부유한 사람들뿐입니다. 아이들을 외국에 보내거나 하면 되니까요. 경쟁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이 메커니즘 이 아주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아이가 공부를 잘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다른 좋은 길을 갈 수 있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있어 야 한다는 것입니다. 학교 교육이란 것도 바로 이런 부분에 맞춰져 야 합니다. 교육자들은 공공 교육 체제를 확립해 모든 아이가 즐겁 게 자신의 특기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긴 합니다 만 이것이 쉽지 않죠.
왕: 최근 「성적 지상주의績點爲王, 중국 최고 명문 학교 청년들이 가진 죄수의 딜레마」라는 글이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 글은 베이 징대학, 칭화대학과 같은 명문 대학에 다니는 중국 최고의 젊은 수 재들이 극심한 경쟁 속에서 성장보다는 성공을 중시하고, 동기들 과 피 터지는 싸움을 하다 결국에는 기진맥진해지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전적인 교육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학생 이 ‘자신을 알도록know yourself’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교육은 학생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도록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오늘날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은 아주 당연한 것 이 되었죠. 학생들은 이런 현실에 말려들어가며 막막함을 느끼고, 교수들은 학문에 몰두하는 학생들을 찾기 힘드니 괴로움을 느낍 니다.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에서 나타난 ‘성적 지상주의’가 곧 네 이쥐안이라는 현실을 만들어낸 것인데요, 아마 선생님이 공부하 셨을 때와는 상황이 매우 다를 것 같습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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났다고 생각하시나요?
샹: 성적을 최고로 여기고 이를 중시하는 경험은 제게도 완전히 낯선 것이 아닙니다. 1990년에 1년간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그때 훈련을 받던 저와 동기들은 미미한 점수 차도 굉장히 중요하 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약간의 점수조차 중요하다고 생각했 던 이유는 경쟁이나 다른 사람과의 대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단 지 권위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였죠. 권위에 의해 인정을 받으면 동기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사훈련에서 얻은 환 심은 당연히 이후 동기끼리의 관계에도 영향을 줬고요.
경쟁은 단순히 수평적이거나 양자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 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쟁은 늘 삼자 관계에서 발생했습니다. 왜 냐하면 모든 경쟁은 제3자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스포츠와 같은 보편적인 경쟁 형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경쟁에는 경 쟁의 규칙을 정하는 심판이나 경제 집단과 같은 제3자가 필요합니 다. 동기끼리의 경쟁도 사실은 제3자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고 있 었던 것이죠.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원이 제한적이고 수요와 공급 이 불균형하기 때문에 경쟁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렇지 않습니다. 한 부족장이 부족민들을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을 인정해주는 것입니 다. 이렇게 하면 부족장은 참 편하지 않을까요? 사실 부족하다는 것은 모두 인위적인 것입니다. 무엇이 좋은 삶인지, 어떤 물건을 가져야 체면이 서는지와 같은 것도 다 인위적인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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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가 개입하여 규정하는 형태의) 경쟁은 고도의 인식적, 행위 적 통합을 초래합니다. 이 경쟁으로 인해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생 각을 하게 되고, 다 같이 정신과 생명을 소모하게 됩니다. 다른 것 은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니 너도나도 경쟁 속에서 분주해지죠.
경쟁은 자원이 유한하기에 존재한다는 것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원의 유한성은 경쟁을 치열하게 만들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에요. 대학 강단에도 실적에 대한 경쟁과 압박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승진이 보장된 사람이라면 굳이 발표 실적에 의존할까 요? 그렇지 않죠. 왜 젊은 교수들이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서로 경쟁할까요? 경쟁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경쟁을 둘러싼 삼자 관계 를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삼자 관계가 구성되느냐에 따라 그 경쟁 의 양상과 함의가 매우 다양해지기 때문이죠.
네이쥐안은 인류사에서 예외적인 현상
왕: 옥스퍼드대학에서 학부생들을 직접 지도하시지는 않죠? 네이쥐안 현상은 주로 학부생들에게 더 많이 나타나는 것 같은데요, 제가 궁 금한 것은 서구권 명문 대학의 상황입니다. 옥스퍼드대학의 학생 들에게도 네이쥐안 같은 현상이 나타나나요?
샹: 저는 옥스퍼드대학의 학부생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적 지 향적이고 조심스럽게 권위의 환심을 사려고 하며 동기를 잠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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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경쟁 대상으로 보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우선, 이런 성적 지상주의적 경쟁 혹은 네이쥐안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현상은 인류 역사에서도 굉장히 예외적입니다 . 중국에 서도 네이쥐안 현상이 생긴 건 10년이 채 안 됩니다. 물론 영국에 도 집단 압력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중국의 집단 압력과는 다르죠. 그렇다면 옥스퍼드의 학생들이 느끼는 집단 압력이란 뭘까요? 예 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학생이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주변 학생들 은 그가 어떤 이유에서 그 일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만약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다면 그 학생은 체면이 깎이죠. 다른 학생들은 그가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이 해당 일을 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거 나 혹은 다른 사람이 이 일을 하는 것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고 생각하겠죠. 그는 지루한 사람으로 여겨질 겁니다. 따라서 이곳 옥스퍼드에서는 무슨 일을 할 때, 반드시 좋은 ‘서사’를 갖고 있어 야 합니다. 이는 옥스퍼드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습관입니 다. 이곳의 학생들은 보고서나 연구 프로포절을 쓸 때도, 늘 그 서 사를 담아내며 자신이 왜 이 일에 흥미를 느끼는지를 강조합니다. 반면 이곳으로 유학 온 중국 학생들은 자신의 서사를 담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프로포절이나 보고서에도 서사를 드러내기보 다는 자신의 작업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는 점을 강조 하죠. 하지만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 은 충분히 많고, 이미 수없이 연구가 진행되어왔는데, 그 학생들이 어떤 새로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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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할 수 있을까요? 중국 학생들은 이 점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현실과 부합하지도 않 고, 다른 사람이 이미 말했던 주류 담론들을 반복할 뿐입니다.
왕: 그 배경에는 계급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다시 말해, 좋은 가 정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바를 더 쉽게 찾 을 수 있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일수록 대세에 순응하 거나 다른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더 살피게 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런 시각에서 본다 면 방금 말씀하신 학생들의 차이도 계급 문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요?
샹: 물론 계급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평등이란 대체 뭘까 요? 상층 계급은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지만 하층 계급은 잘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불평등의 일차적인 의미 만을 나타낼 뿐입니다. 불평등의 또 다른 의미는 상층 계급의 사람 들이 잘 사는 것을 넘어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더 바쁘게 살아가도 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층 계급의 사람들은 물질적으 로도 풍족하지 못한 것에 더해 강한 도덕적 압력에 직면하게 되죠.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을 모방해야 하고 자신만의 자주성을 포기하 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불평등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불평등이 정의롭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 자원의 불평등을 의미 할 뿐만 아니라 하층 계급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 방식을 왜곡시키 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하층 계급 사람들이 이 경쟁에서 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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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탈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층 계급과 같은 게임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게임을 한다면 높은 확률로 패배합니다. 그리고 이 패배는 물질적인 의미의 패배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의 패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방금 하나의 계급 문제가 출현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셨는 데요, 물론 계급 문제의 측면도 존재합니다. 특히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도 계급 문제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고전이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가정 환경을 보면 최소한 중산층 이상은 됩니 다. 먹고사는 문제를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많아요. 반 면 이민 2세와 같이 사회적 계급이 비교적 낮은 학생들은 대개 금 융이나 컴퓨터, 의료, 법률과 같은 실용적인 학문을 공부합니다. 계급 간 차이가 나타난 것이죠.
중국은 재화의 분배가 매우 불평등하게 이루어지지만 하층 계 급이 먹고살 수 없을 정도로 불평등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중 국만의 독특한 배경이 있는데요, 사회주의 중국 시기에 형성된 일 종의 평등 관념과 최근 몇 년간 개선된 국가의 복지제도로 인해 하 층 계급의 기본적인 생활이나 소비생활은 크게 나쁘지 않습니다. 특히 남아시아나 남미,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중국은 사회보 장을 통해 기층을 포용하는 힘이 강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중국은 상층 계급에 대한 모방과 계층 상승에 대한 욕망이 매우 강 하고 자신을 왜곡시키는 힘이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나라입니다.
왕: 이것을 유교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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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글은 중국, 일본,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의 문화가 유교 문화 의 영향을 받아 교육을 매우 중시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동남아시아에는 또 다른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에 대 해서도 공부에 대해서도 크게 필사적이지 않죠. 이와 같은 네이쥐 안도 유교 문화와 관련이 있을까요?
샹: 관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교 문화는 어떤 사람도 크게 뒤처 져서는 안 된다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데요, 이는 좋은 전통입니 다. 한편 유교 문화의 강한 통합성은 모두를 위로 올라가고 싶게 만들기도 합니다. 경쟁을 강조하지는 않지만 (네이쥐안 현상에) ‘일 체화’라는 배경을 제공하죠.
오늘 우리는 매우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성적이 인생의 전부라 고 여기게 만드는 네이쥐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네이쥐 안의 이러한 특성은 유교적인 면모가 아니면서도 굉장히 유교적 입니다. 개인주의와 성적 지상주의는 유교적이지 않습니다. 하지 만 사람들을 하나의 사상 공간 속에 밀어넣고 한가지 생각만을 강 요한다는 점에서 경쟁이 결합된 유교 문화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교는 굉장히 광범위한 개념이에요. 예컨대 일본인들 이 업무와 학업에서 겪는 스트레스는 중국의 네이쥐안 현상과 온 전히 같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일본에도 과로사가 있지만 이는 경쟁 이 아니라 주로 집단 압력 때문입니다. 이 집단 압력은 일종의 유 교 문화로, 공과 사 중에서 공을 더 강조하고 동일해야 한다는 것 을 도덕적으로 매우 중시합니다. 가령 다른 사람이 퇴근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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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 나도 퇴근하면 안 됩니다. 혼자 퇴근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죠. 반대로 권위의 환심을 사려고 하거나, 경쟁에서 이기 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일본인 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일본에는 아무런 성취욕도 없는 히키코모리가 많습니다. 마침 어제도 일본인 아내에게 “피곤에 찌들어 있으면서도 어떤 경쟁의 식도 갖고 있지 않은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는데요, 일 본의 교육은 매우 평균주의적입니다. 어느 누구도 낙오되도록 하 지 않습니다. 수업은 가장 공부를 못 하는 학생에게 맞춰지며 다른 학생들은 해당 학생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죠. 중국의 교육 은 일본의 교육과 정반대입니다. 남들보다 뛰어나야 해요. 중국은 유교 문화를 기초로 하고 있지만 개혁개방 이후 매우 (신)자유주 의적인 시장 경쟁 속으로 뛰어들어갔어요.
왕: 사실, 마침 일본의 네이쥐안이 중국보다 더 심한지를 여쭤보려 했 는데요, 방금 말씀을 들으니 각국의 내재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비교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방금 신자유주의를 언급하셨는데요, 『방법으로서의 자기』57에서는 “좌파 학자들의 문 제가 우파 학자들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 교조적인 방식으로 서방 을 반대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서구의 좌파 이론을 베껴온 것이 다”라고 말씀하시며 신자유주의를 통해 너무 많은 것을 해석하려
57 제1부 원저우 방담 ‘중개업으로서의 인류학’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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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제 느낌에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네이쥐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아마 자신도 모르게 신 자유주의를 통해 네이쥐안을 이해할 가능성이 높은데요, 왜냐하 면 신자유주의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관리(경영)해야 하 고, 개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최근 수차례 발생한 박사과정생들의 자살 사건에서도, 그 학 생들은 분명 일정 부분 자기 탓을 했을 겁니다. 따라서 우울증에 걸렸겠죠. 이런 일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신자유주의와 네이쥐안 을 연관 짓곤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이유로 신자유주의를 통 해 네이쥐안을 이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샹: 신자유주의처럼 거대한 개념은 상황을 너무 쉽게 설명합니다. 경 쟁은 양자 간의 관계가 아니라 권위에 환심을 사고 표준화된 하나 의 규칙을 제정하는 것인데요, 이는 자유주의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완전히 개방된 시장이지만 현실에서는 굉장히 많은 규제가 존재하죠. 자 살한 박사과정생은 자신이 자유주의의 압박을 받고 있다고 생각 했을까요? 아마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밖에 나갈 수 도 없었으며, 학창 시절 동창이나 대학 동기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던 것이 더 직접적인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 학생이 건물에서 뛰어내린 이유는 경쟁 그 자체에 실패해서가 아닙니다. 중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담론 속에서 자신의 경쟁 실패를 설명할 수 없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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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왜 이 경쟁을 원치 않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신자유주의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거대한 개념은
세세한 것들을 너무나도 쉽게 소거해버리죠. 하지만 우리는 디테 일이 있는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거창 한 개념을 통한 일반화가 아니라 사소한 것들을 세밀하게 풀어내 는 것입니다.
미시적 메커니즘은 특히 중요합니다. 남녀의 차이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실 여성들의 경쟁관이 상당히 흥미로운데요, 일반 적으로 우리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경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가 령 여성은 한 부서를 맡는 것에만 욕심이 있고 더 위로 올라가려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죠.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보는 여 성들의 질투나 그들 간에 행해지는 비교는 굉장히 치열합니다. 직 접 현장조사를 진행할 때, 남성들이 저에게 하는 푸념 중 하나가 자동차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한 남성이 말하길, 그가 이 차를 산 이유는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라 아내의 체면을 위해서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요구했다고요. 중국과 인도에서는 실제로 이런 일이 많습니다. 남녀 간의 불평등은 여성이 피해자라 거나 사회에서 더 적은 것을 가져간다는 것을 넘어 여성에 대한 인 식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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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 생각하기’와 ‘거리를 두고 명확하게 생각하기’
왕: 인류학은 다양한 사고를 제공합니다. 저도 학교에서 인류학을 전 공했는데, 현재는 베이징에서 주류사회의 생활을 따라가고 있습 니다. 선생님의 서술 속에서 베이징이라는 공간은 하나의 통일된 장소로 그려지는데,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원저우와는 다르 게 베이징이라는 중심에서 생활하다보니 저도 모르게 주류의 게 임 속으로 말려들어갔습니다. 인류학을 공부하는 것은 저를 더 성 찰하도록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제 모든 것이 더 쉽게 바뀌지는 않 더군요. 오히려 다른 사람에 비해 더 복잡하고 비관적으로 생각하 게 된 것 같아요. 일례로, 저는 인류학 정신이 네이쥐안에 대한 불 안을 해소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 선생님께서는 인류학이 사람들에게 만연한 불안을 해소하 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방법으로서의 자기』에 서도 선생님이 대학을 다니실 때는 학생들이 정치, 경제, 법률, 미 디어, 역사 같은 인문사회과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최근에 는 인류학에 흥미를 느껴 공부하는 학생이 늘어났다고 하셨습니 다. 인류학이 청년들에게 이미지를 보여주는 ‘도경식 사고圖景式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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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考’를 제공해준다면서 말이죠.58 어쩌면 이게 바로 제가 던지고 싶은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여러 불안을 해소하지 못했고 도경식 사고를 얻는 데도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저 자신을 어 떻게 위로할 수 있고, 어떻게 인류학을 통해 현대사회의 불안을 해 소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인류학의 대중적 영향력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겠네요.
샹: 인류학은 하나의 연구일 뿐입니다. 현대인들의 삶에 대한 불안 해 소는 인류학의 주요 임무가 아니에요. 물리학자나 화학자에게 우 리 주변의 문제를 어떻게 직접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지를 묻지 않 잖아요? 그래도 충고를 원하신다면 두 가지 방법을 말씀드리겠습 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하기想细’와 ‘거리를 두고 명확하게 생각하 기想開’입니다.
인류학자가 하는 일 중 하나는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생각하도 록 돕는 것입니다. 가령 도대체 어떤 부분이 자신을 불안하게 하 는지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구체적으로 생각하기’는 어떤 이유로 도움이 될까요? 먼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심화시키고, 상황에 대한 돌파구나 해결 방 안을 생각해내도록 하며, 주요 문제와 부차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58 제1부 원저우 방담의 ‘새로운 언어를 찾아서’와 ‘중개업으로서의 인류학’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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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명확히 구분하도록 합니다. 또한 마음 챙김mindfulness과 구체적 인 것에 초점을 맞춰 집중하는 것을 통해 불안을 해소합니다. 이 는 주로 불교에서 비롯된 것인데요, 마음이 불안할 때 이를 안정시 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망가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 음 챙김’입니다. 현재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물리적인 것을 포함하여 명확히 의식하는 것이죠. 가령 당신이 방 안에서 매 우 분노해 있는 상황이라고 칩시다. 화난 이유는 방금 전 동료의 불쾌한 말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테이블 앞에 앉아서 명상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테이블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과 기분이 좋지 않다 는 사실, 그 원인과 나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겁니다. 처 음 잠깐은 불쾌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겠지만 잠시 후에 점점 괜찮 아질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화가 나 있는 자신을 깨닫는 겁니다. 명상은 자신의 존재에 관심을 갖게 하는데요, 자신 의 존재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기면 곧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물 론 인류학은 명상과는 다릅니다. 인류학은 과학적인 사고를 통해 더 분석적으로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하죠. 또한 구체화 과 정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깨닫고, 한 인간으로서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인류학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거리를 두고 명확하게 생각하기’입니다. 이 방법은 인류 실천의 다양성을 보게 해주는 전통적인 인류학적 방법입니 다. 여기서 말하는 다양성은 문화적 다양성이 아닙니다. 중국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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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빠르게 변했고, 10년 전과 지금의 다양성도 다르죠. 이런 식으 로 사고하다보면 거리를 두고 명확하게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 습니다. 예를 들어, (강제)수용소에서의 생활을 이해한다고 칩시 다. 난민들(혹은 유대인들) 사이에도 투쟁은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거대한 권력 아래서 그들은 모두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기 때문이죠. 인류학자는 이런 상황들을 기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록은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명확하게 생각하는 데 도움을 줍 니다.
이른바 ‘거리를 두고 명확하게 생각하기’는 자기 자신을 대상 화하고 상대화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생활 방식은 일시적인 것이 고 꼭 이게 정답일 이유는 없다는 것이죠. 14억의 인민이 하나의 길 위에서 부대끼고 있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피곤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인 역사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피곤함을 느낄 이유가 없어 요. 현재 긍정되는 것도 10년만 지나면 상황이 달라지고 20년 뒤 에는 또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죠. 우리 인 류학자들은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사람들은 이를 통해 더 쉽게 거 리를 두고 명확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왕: ‘거리를 두고 명확하게 생각하기’는 개인적인 특성과도 연관되는 것이 아닐까요? 인류학적인 훈련뿐만 아니라 개인의 성격을 이야 기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선생님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시는데요, 어쩌면 태어난 가정에서부터 선생님의 자아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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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같은 형태였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성격과 관련이 있다고도 생 각되는데요, 맞나요?
샹: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사고의 훈련이고, 거리를 두고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성격의 영역일 수 있습 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거리를 두고 명확 하게 생각하는 능력 또한 길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유 과정은 하나의 물리적 과정입니다. 어떤 재료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특정 한 사유의 결과물이 나옵니다. 인류학은 사람들에게 더 구체적인 재료와 구체적인 이야기를 제공합니다. 그저 사람들의 생활 방식 과 이해 방식이 서로 다르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류학은 사람들에게 세밀한 분석을 제공해줍니다.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 라 그 다름 뒤에 일련의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렇게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이면에 존재하는 특수한 원인들 을 보는 것이죠.
왕: 오늘 네이쥐안의 개념과 더불어 다양한 상황에서의 네이쥐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또한 좋은 경쟁이란 어떤 기준을 가 진 것인지, 경쟁에 탈출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면 어느 시기에 그 런 메커니즘이 존재해야 하는지, 우리 사회는 타인을 어떻게 대해 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도 말씀을 들어봤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장인정신을 매우 높게 봅니다. 이에 대한 토론 또한 많은데요, 이 점도 참 흥미롭습니다. 혹시 네이쥐안과 서로 관련되는 부분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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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지 궁금하네요.
샹: 저는 장인정신을 매우 높게 평가합니다. 왜냐하면 한 그릇의 밥을 만들고 작은 가게에서 두세 가지 메뉴만을 파는 장인정신은 일부 러 가게를 작게 유지해 자신이 하는 행위 속에 온전히 몰입하기 때 문입니다.
이전에 일본에 있는 한 덴푸라 가게에 갔는데요, 그 가게는 오 직 덴푸라 하나만을 팔았습니다. 그곳의 요리사들은 성게를 채취 하기 위해 바다에 들어가는 해녀들부터 세토내해瀬戶內海에서 채 취한 성게를 도쿄로 운반하는 사람까지, 하나의 성게가 얼마나 많 은 사람의 노동을 포함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요리 사는 덴푸라 하나를 만들 때마다 일종의 경외심을 갖고 기름이나 밀가루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생각하며 일련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듭니다. 이런 의미에서 장인정신은 현재와 자신이 서 있 는 곳, 세계 속의 나의 위치에 대해 깊게 몰입하고 이해하는 것을 돕습니다. 저는 장인정신이 오늘날의 ‘부유 상태懸浮’59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대담자: 왕첸니王芊霓, 거스판葛詩凡)
https://www.douban.com/note/781577426/
59 제1부 옥스퍼드 방담의 ‘인류학 학계’, 원저우 방담의 ‘방담에 앞서’와 ‘계 급 유동의 역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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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긴을 말하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일상의 의미
이 인터뷰는 2022년 3월에 이뤄졌으며 『방법으로서의 자기』를 출판 한 단두單讀출판사의 위챗 홈페이지와 팟캐스트를 통해 공개됐다. 우 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샹뱌오 교수의 생각, 러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자 ‘푸틴의 브레인’이라고 불리는 알렉산더 두긴에 대한 분 석을 담고 있다. 샹뱌오는 러시아 사람들이 두긴의 철학에 관심을 갖 게 된 원인을 분석하고 이 전쟁이 중국 사회와 청년들에 대해 갖는 함 의를 ‘일상생활에서의 의미 구성’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우치吴琦(이하 W): 이전에 이메일을 통해 선생님과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궁금해진 게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시각에서 혹은 어떤 계기를 통해 우크라이나 사태와 같은 국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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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샹뱌오項飆(이하 ‘샹’): 올해 2월 13일 정도였나요, 베를린 집에 있던 저는 쓰레기를 버리러 밖으로 나오다가 윗집에 사는 이웃을 만났 습니다. 70세의 퇴직 엔지니어인데요, 1960~1970년대에 히피족 이었던 그분은 냉전 시기 독일에서도 상당히 발전된 곳이었던 독 일 남부에서 베를린으로 건너왔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궁금했습 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동독과 서독은 베를린을 거의 관리하지 않 았기 때문이에요. 당연히 산업이나 일자리 같은 것도 없었고 베를 린 사람들은 양쪽 정부가 주는 재정 지원으로만 생활했죠. 이상한 점 하나가 있다면 서베를린의 거주민들은 병역 의무를 지지 않아 도 된다는 거였어요. 하나의 고립된 섬 같았죠. 아마 기술적인 이 유에서였을 텐데요, 당시 베를린은 징병된 인구에 대한 관리나 호 적 관리를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징집되기 싫은 사람들 이 모두 베를린으로 향했습니다. 그분 또한 이러한 이유로 베를린 에 왔던 히피족이었습니다.
이튿날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우크라이나를 방문했습니다. 그러곤 러시아에 가 푸틴을 만나려 했죠. 당시의 상황이 참 이상했 어요. 미국은 1월부터 계속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려 한다 고 말하기 시작했지만 이와는 반대로 우크라이나 정부는 거듭 두 려움을 조성할 필요가 없다며 국제사회에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 고 요청했습니다. 독일과 프랑스 또한 러시아가 침략할 것이라고 보지 않았죠. 이후 독일 외교장관이 먼저 러시아에 갔고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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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롱이 갔습니다. 이어 숄츠도 갔죠. 그리고 잘 알려진 기다란 테이블에서 5시간 동안 이야기했습니다. 회담 이후 양측의 기자회 견을 보면 이상한 것 없이 정상적이었습니다. 다들 협력과 평화를 이야기했거든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누군가 숄츠 에게 우크라이나 상황에 대해 묻자 그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문제는 우리의 논의 대상이 아니며 이로 인해 군사적 충돌이 발생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저와 그 이웃은 미국· 영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싸울 것이라 말하는데 독일·프랑 스·우크라이나는 그럴 일이 없다고 말하는 상황이 참 이상하다 고 느꼈습니다. 그러곤 그분은 이라크 전쟁 이후 독일 사람들은 미 국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하셨어요. 제가 쓰레기를 다 버리고 돌 아가려던 순간 “그런데 러시아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죠”라고 말 씀하시더군요. 이처럼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일상생활 속의 작은 일부분이 었습니다.
이후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저는 놀라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에 게 더 놀라웠던(그리고 이 일에 큰 관심을 갖도록 한) 일은 2월 27일 숄츠 총리의 의회 연설이었습니다. 숄츠의 격앙된 연설, 몇몇 의원 의 마찬가지로 격앙되고도 놀란 반응을 볼 수 있었는데요, 저는 하 룻밤 사이에 독일에 이런 변화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 습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역사에 대해 매일 이야기하고,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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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에 대한 혐오의 감정이 몹시 높아 나치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국가입니다. 지금은 독일의 사민당과 녹색당이 연정 집권해 전쟁에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석탄 에너지와 원자력 에너지의 조 속한 폐기를 추진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정책들이 갑자기 바뀌었어요. 원래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5000개의 헬맷을 보내기로 했어요. 하지만 27일이 되어서는 1000억 유로를 투입해 군비 지출을 크게 확대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보며 저는 독일인 들이 속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는 상황이 매우 위급해 보였죠. 저는 그런 결정의 배후에는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 니다. 실제로 독일은 오랜 기간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러 시아와의 관계를 발전시켜왔습니다. 왜냐면 과거 소련은 독일 통 일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거든요. 독일 사람들은 (최소한) 고르바 초프에게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 푸틴이 집권해 본격적인 개혁과 개방을 실시했고 당시 독일의 사민당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독일도 스스로 군 사력 증대나 영토 확장에 대한 야욕이 없었습니다. 실용적이고 민 생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죠. 독일이 이렇게 변한 것은 러시아의 행동이 독일의 생각보다 지나치게 과도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단순히 나토의 동진 때문이라거나, 돈바스 지역의 러시아인 학살을 막기 위한 것이라든가 혹은 러시아와 크 림반도 간의 직접적인 교통이나 에너지 공급 통로가 없다는 이유 에서만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이유였다면 독일이 그렇게 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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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을 겁니다. 독일의 놀라움은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충격과 공 포에서 온 것 같습니다.
26일, 독일의 관영 통신사가 「러시아와 세계의 새로운 구도」라 는 글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번 군사 작전의 승리로 우크라이나 가 러시아로 다시 편입되면서 서방의 패권이 완전히 제거된 세계 질서가 다시 쓰였다고 선언했습니다. 당시 우리 지식인들은 놈 촘 스키, 타리크 알리의 글을 봤는데요. 제가 존경하는 학자인 타리크 알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에 『뉴레프트리뷰』에 「나토 랜드로부터의 뉴스News from Natoland」라는 글을 통해 나토의 동진東進은 큰 잘못이고 재앙적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우크라이 나는 나토에 들어갈 수 없고 일정한 중립성을 유지해야 하며, 러시 아를 무시해서는 안 되고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전 쟁 이후 서구 좌파들 사이에는 큰 균열이 일어났는데, 이에 대해서 는 나중에 이야기해보도록 합시다. 우선, 이전에 제가 관심을 가졌 던 것도 미국과 나토의 동진 제국주의나 우크라이나 내부 문제 등 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발발 이후 중국의 몇몇 논평을 보면서 단 순히 ‘나토의 확장’이라는 문제만으로는 이 전쟁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대부분의 사람이 러시아의 우크 라이나 침공 때문에 놀랐을까요? 키신저나 미어샤이머처럼 나토 의 확장에 반대하고, 러시아의 부활을 경고하던 사람들도 이와 같 은 군사행동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전쟁 발발 전에도 미국, 독일, 프랑스, 우크라이나, 러시아는 어떻게 유럽의 새로운 전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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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를 구축할지 이야기해왔고 모두 문제를 대화로 풀어갈 수 있 다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러시아도 새로운 전쟁으로 목적을 달 성할 필요가 없어 보였어요. 그래서 저는 푸틴의 연설이나 글을 상 세히 살펴봤는데요, 제 생각은 이데올로기와 동시에 정서적 측면 을 반드시 함께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즉, ‘의미’라는 측면 에서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전쟁은 단순히 (특정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 자 체로 현실을 초월하는 모종의 의미 추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 람들은 대체 푸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우리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2021년 6월에 푸틴이 발표한 글의 내용을 살 펴보면(푸틴은 이 글을 모든 병사에게 읽으라 했다고 합니다), 우크라 이나는 하나의 국가가 아닙니다. 푸틴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하나一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점은 ‘우크 라이나는 국가가 아니다’라는 푸틴의 발언의 의도가 우크라이나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신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 이우를 러시아 문명의 기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두긴 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두긴에 따르면 사실 우크라이나인 들은 러시아인들보다 러시아 문화의 정수에 더 가까운 사람들입 니다. 러시아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죠. 우크라이나의 문명이 러시 아 본토의 문명보다 더 장구합니다. 이번 전쟁은 문명의 유전자를 보관하고 있는 곳이자 문명의 발원지를 탈환하기 위한 것입니다. 전쟁과정에서 주민들이 사는 지역도 폭격하고 있지만, 도심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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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역사 유적에 대해서는 비교적 조심스러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상상적 감정’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푸 틴이 했던 말로 되돌아가자면, 그의 글에서는 새로운 러시아에 대 한 그의 상상과 그 배후에 있는 이데올로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리고 두긴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포린어페어스』는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 처음으로 두긴을 ‘푸틴의 브레인’이라고 칭했 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두긴의 몇몇 글을 살펴봤는데요, 이 전쟁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전쟁 뒤에 있는 의미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 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W: 『포린어페어스』도 직접적인 증거 없이 두긴을 푸틴의 브레인이라 고 칭한 것 아닌가요?
X: 맞아요. 우리가 명확히 해야 되는 점이기도 한데요, 그런 표현도 사실 그냥 해석이에요. 하지만 그가 국회 대변인의 특별 고문을 맡 았던 것을 보면 고위층과 네트워크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게 첫 번째예요. 두 번째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까지 두긴 은 여러 매체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의 저서도 스테디셀러가 되 어 널리 읽혔죠. 몇몇 저명한 매체는 스스로 두긴주의자이자 신 유라시아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했어요. 세 번째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두긴이 1997년 출판한 책 『지정학의 기초The Foundation of Geopolitics』가 러시아군 총인사부의 교재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긴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보입 니다. 푸틴이 연설에서 사용하는 단어들도 두긴의 그것과 흡사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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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리고 전쟁 이후 두긴의 기자회견을 보면 그냥 푸틴의 대변 인입니다. 단어나 수사, 일부 개념에서 푸틴의 생각과 대부분 일치 합니다. 두긴은 확실히 주목할 만한 인물입니다. 실제로 1997년부 터 두긴이 밝혀온 생각과 이번 전쟁의 전개는 많은 부분 일치해요. 그렇지 않다면 이 전쟁은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은 푸 틴이 코로나 기간의 격리로 인해 뇌에 문제가 생겼다거나 등의 이 유를 말합니다만, 두긴의 이론을 통해 접근하면 설명이 됩니다. 크 게 설득력 있죠.
하지만 두긴이 영향력이 있는 것과 별개로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이론이 틀림없이 전쟁을 상당 부분 변호할 수 있다는 것 과, 그가 지금도 이론적으로 이번 전쟁을 옹호하는 학자라는 것입 니다. 두긴의 이론은 하나의 이론이지 일반적인 선전이 아닙니다. 이 이론은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 사회의 변화과정과 밀접한 연 관이 있습니다. 체계가 있고 논리적으로도 정합성이 있으며, 생명 과 인간에 대한 이해와도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죠. 그의 이론은 인 류학이나 언어학, 철학적 바탕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를 분석할 가치가 있냐면 그를 분석하면서 일종의 의미에 대한 이해와 그것 이 어떻게 하나의 이론으로 바뀔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의 전쟁 이데올로기로 바뀌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긴이 이 전쟁과 무슨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이 논의는 그를 심판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그 저 학자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은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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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두긴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지를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W: 다시 말해, 두긴은 우리가 이 전쟁의 배후 원인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실마리일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선 생님께서는 어떤 관점에서 두긴의 이론을 이해하기 시작하셨습니 까? 우리가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부분은 그가 프란츠 보아스, 마르 셀 모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제이컵스와 같은 여러 인류학자의 관점을 인용했다는 것인데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앞서 말씀하셨 던 것에 따르면 단순히 인류학이라는 것 말고도 다른 경로가 있을 것 같아서요.
X: 핵심은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사상 역정을 살펴보면 그 자신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천재였고 어릴 때부터 9개의 언 어를 배웠습니다. 백과사전과 같은 학자라서 유럽의 여러 이론에 도 익숙합니다. 소련 시기에 그는 소련에 반대하는 ‘불순분자’였 고 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두긴이 지정학에 관심을 갖게 된 시 기는 1990년대 소련의 해체 이후였는데, 그가 말하길 소련의 해체 는 그에게 하나의 ‘거대한 공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도대체 이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모두가 길을 잃 었습니다. 그렇게 거대했던 소련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요. 사실 많은 사람이 이런 감정을 느꼈을 겁니다. 제 기억에 푸틴 도 자서전에 이와 비슷한 말을 썼던 것 같은데요, 1989년 11월 베 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시기에 푸틴은 동독에 있었습니다. 동독 사 람들이 서독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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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B의 명령을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계속 침 묵했고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때의 침묵으로 그 는 모든 세계가 사라진 듯한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옐친 시대에 러시아 경제가 입은 피해는 독소전쟁 시기보다 심했다는 것입니다. 이 시기 러시아 사람들은 늘 술에 찌들어 있었 고 기대 수명도 급격히 감소했으며 사회가 붕괴되고, 조폭이나 올 리가르히라 불리는 과두정치 세력이 증가했습니다. 푸틴이 1999 년에 쓴 「천년지교의 러시아」를 보면 러시아의 모든 것이 추락하 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긴은 지 정학을 통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할 것인지, 어떻게 희망을 찾을 것인지에 대한 단초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우선, 그는 칼 슈미트로부터 대륙 문명과 해양 문명이라는 양 분된 관점을 배웠습니다. 해양 문명은 지중해부터 대서양에 이르 는 이른바 ‘대서양주의’로 미국과 서구로 대표되며 개인주의, 상 업적·개방적·민주적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와 대립되는 것이 바로 대륙 문명입니다. 대륙 문명은 집단주의적이고 상업 네트워 크가 아니라 위계적인 권력을 통해 조직됩니다. 푸틴을 이를 ‘수직 적 권력’이라고 부르는데요, 모든 것을 종적으로 배치해 개인은 국 가와 집단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설명하면서도 두 긴은 인류학과 사회학 관점을 인용하는데요, 특히 뒤르켐의 ‘집단 이 개인에 우선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치 화하죠. 두긴이 머릿속에서 이 세계는 대서양주의와 유라시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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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사이의 대결입니다. 그가 보기에 1990년대 러시아가 쇠락한 이 유는 대륙과 해양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입니다. 대서양주의가 불 공평하게 대륙주의를 침략했고 유라시아 문명의 질서가 무너지면 서 각종 병폐가 발생했던 것이죠. 동시에 두긴은 사회주의도, 소련 도 반대했습니다. 그에게는 소련 사회주의 또한 재난의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대륙 문명이 대륙 문명을 공고히 하지 못했기 때 문에 서양의 침입을 당한 것이죠. 그는 왜 인류학이나 포스트 모던 이론에 관심이 많을까요? 왜냐하면 그는 철저한 상대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대륙 문명과 새로운 유라시아주의 의 문명은 자기만의 유전자와 규율, 언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긴 은 계속해서 언어철학을 인용합니다. 그는 해양 문명이 대륙 문명 을 이해할 수 없으며 양자는 소통할 수 없고, 반드시 균형을 유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륙 문명 내부의 일들은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만 이해되고 평가될 수 있으며 오늘날의 가장 큰 문제는 해 양 문명의 기준으로 대륙 문명을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두긴의 주장은 단순히 민족주의가 아니라는 것입니 다. 그에게 (근대 민족)국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 한 것은 문명이죠. 그가 지리, 환경, 기후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두긴은 또 유라시아 대륙의 기후가 이와 같은 문명의 기질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불변적인 것이며 존중받아 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문화다원주의자입니다만 그가 주장하는 문화적 다원성은 좀 이상합니다. 만약 당신이 문화적인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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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나 무슬림이지만 유대교나 이슬람을 믿지 않는다면 두긴 의 눈에는 일종의 죄악으로 비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문 명적 유전자를 배반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두긴은 해양 문명의 현대성의 가장 큰 문제가 자신의 문명적 근간을 배반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서도 두긴은 이렇게 말해요. “만약 당신들이 무언 가를 하고 싶다고 해도 우리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 륙 문명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두 긴 이론의 일부 내용입니다. ‘문명’이라는, 매우 추상적이면서도 본질적인 개념이 바로 그의 모든 사상의 근간이죠.
여기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그의 서술이 나옵니다. 푸틴은 일련 의 글에서 레닌이 주로 우크라이나 문제를 통해 러시아의 민족 정 책을 이야기했다는 점을 들어 그가 우크라이나라는 허구적 국가 를 만들었다며 비난했는데요. 두긴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서쪽 의 세 개 지역을 제외한 전체 지역을 점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서쪽 지역은 슬라브 문명과 완전 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에요. 하지 만 다른 부분은 반드시 점령해야 합니다. 점령은 신의 뜻을 행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들은 본래 문명적으로는 같지만 이후 정당하 지 못한 정치 변화가 이 관계를 왜곡시켰기 때문이죠. 최근 두긴은 “러시아는 당연히 국제법을 위반해도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명 이 국제법보다 더 상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명확히 말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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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중국의 맥락에서도 두긴 및 푸틴의 묘사와 크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랜드 체스 게임’이 생각나는데요, 어떤 사람들은 그 들이 완전히 미쳤고 이성을 잃었으며 선을 넘었다는 생각을 하는 반면, 또 일부 언론에서는 이들의 주장이 제국주의·서구 문명에 대한 반대와 배제에 기초하므로 나름의 합리성이 있다고 말하기 도 합니다. 제가 원래 질문하려 했던 것은, 오늘날 두긴의 이론과 과거 파시즘 이데올로기의 흥기 사이에는 직접적으로 대조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막 생각이 든 것 은, 두긴의 주장을 과거 중국 봉건 왕조의 ‘하늘의 도天道’와 같은 인식과도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X: 우선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두긴의 이론이 (중국 봉건 왕조의) ‘천하’ ‘천도’에 따른 호소, 인식 방식, 감정 구성 방식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두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이 세계의 절대적인 진리를 터득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상대화하여 다 른 사람과의 공감을 형성할 능력이 결여돼 있죠. 두긴은 매우 현대 적인 맥락 속에서 언어학 및 존재론적 논쟁을 통해 이와 같은 정서 를 재차 논증합니다. 존재론에 대한 논쟁의 의미는 본디 하나의 세 계가 존재하나 모든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고 인식하는 것이지만, 존재론적 전환 이론은 우리의 생각이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 지고 있는 세계(관)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즉 존재론적으로 다르 다는 것이지 인식론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중국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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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 자신을 절대적인 천명의 담지자로 인식했던 것은 그들이 다 른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중국의 왕조뿐만 아니라 이전의 모든 문명이 이런 특징을 갖고 있 었다는 점입니다. 중국은 천하를 ‘천하무외天下無外(천하에는 바깥 이 없다)’로 이해했습니다. 모든 세상이 하나의 천하였던 것이죠. 당연히 중국의 천자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구조이고 경계가 없 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무외無外’가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유 교를 공부(교화)하기만 하면 (만이蠻夷의 상태에서 빠져나와) 중화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두긴의 ‘신유라시아 주의’의 근본적인 입장은 자신을 중심에 두고 외부로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중심에 두고 (외부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 의 이론의 중요한 시작점은 해양과 대륙의 이분법인데 이는 절대 적인 선긋기입니다. 두긴은 이 양자가 서로 뒤섞여서는 안 되고 균 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문명, 천명, 기질, 본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는 한편, 그 구체적인 서술과정 에서 현대성, 현대 지정학의 틀을 사용해 구체적인 이해를 시도합 니다. 예를 들면 영국과 미국의 관계, 유럽연합에서의 독일의 위치 같은 것이지요. 원래의 ‘천하’ 개념은 문명론일 뿐이지 지정학적인 개념이 없었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두긴과 나치의 이념은 크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두긴은 자신의 ‘제4의 이론’을 제기하며 인류의 현대사 회가 자본주의, 공산주의, 나치주의, 신유라시아주의를 겪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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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합니다. 신유라시아주의는 앞의 세 주의에 대한 ‘지양’이자 극복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을 나치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겠 지만 그가 쓴 글들을 보면 나치의 정책에 영향을 준 사상가를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주의자’라거나 그가 나치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의 사상적 근원이 나 치의 사상적 근원과 상당히 가깝다는 것이죠. 그게 뭐냐면 바로 문 명에 대한 강조입니다. 19세기 독일의 낭만주의 사상은 이후 인류 학의 발전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확실히 나치에 영향을 주었습니 다. 가령 게르만인의 문명적 본질과 본성은 바꿀 수 없으며 자신의 전통과 역사, 뿌리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들 말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왜 나치가 1930년대에 일어났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전 세계적 자본주의 경제 위기에 따른 거대한 공황과 사람들이 느끼는 공허와 미망 속에서 전통을 발견합니다. 그에 따라 인종적 자부심이 되살아나며 ‘이토록 고귀한 민족이 어 떻게 이런 굴욕을 당할 수 있는가?’라는 각성으로 이어진 것이죠. 이런 자부심에 굴욕이 더해지면 거대한 동원이 가능해지고 특히 당시의 엘리트들에게 호소력을 갖게 됩니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 후 거대 자본 또한 그를 지지했는데, 이는 경제적인 고려와 더불어 패배의 설욕이나 영광의 추구와 같은 의미세계의 구성과도 연관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후에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중국 사회 또한 이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 한 것을 들으면 모두 처음에는 좀 정신 나간 이야기처럼 생각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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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하지만 일정한 경제사회적 조건하에서는 많은 사람의 마 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여러 번 이야기하면 하나의 집착이 됩니 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치에도 맞지 않고, 인생의 어떠한 문제 도 해결할 수 없으며, 물질적인 현실 세계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지 만, 하나의 집착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논리나 원인, 이치도 따지지 않고 그것을 위해 희생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집 착에 반대하는 사람은 적으로 규정됩니다. 반론의 여지는 없습니 다. 그리고 이는 모두 나치즘의 근원과 연결됩니다.
W: 그렇다면 나치와 크게 비슷한 문명론의 총체적인 사회 동원이나 이데올로기적 동원이 어떻게 21세기의 맥락에서도 성공할 수 있 었을까라는 문제가 뒤따릅니다. 일전에 우리는 중국에서 나타난 탕핑躺平,60 네이쥐안内卷,61 허무와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요, 오늘날의 사람들은 정치적인 열정도 없는 것 같고 정치적 열정에 불을 지필 이론 같은 것을 알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 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나 낮은 투표율은 중국은 물론 전 세계적 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에요. 어떠한 이론이나 주의에 대한 흥미도
60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이며 그 속내는 “열심히 노동을 해 도 대가가 없는 중국 사회의 노동 문화에서는 최선을 다해 눕는 게 현명하다”라 는 뜻을 담고 있다. 삶이 나아질 희망이 없자 자포자기하여 경제활동 참여를 거 부하는 이들을 탕핑족이라 부른다.
61 네이쥐안이란 본래 ‘한 사회나 조직이 급진적인 발전이나 점진적인 성장 없이 행하는 단순한 자기 반복’을 의미하는 인류학 용어이지만 2020년 중국에 서 유행한 네이쥐안은 극심한 경쟁의 격화와 과로사회에 내몰린 사람들을 묘사 하는 단어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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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활 의미에 대한 추구도 사라졌다 는 것이 일전에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보며 이해했던 일종의 단계 적 사회의 특징이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두긴의 사상이 현실 에 이토록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유는 뭘까요? 두긴의 사상 은 한 국가의 정책, 특히 군사 정책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공감대 를 형성했어요. 그리고 실행에 옮겨지기까지 했습니다. 오늘날 우 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대체 어떤 세계인가 하는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데요, 평화와 발전이 세계의 주요 흐름이라는 식의 호소를 다시 분석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X: 맞아요. 유럽의 주류 정치가들에게 물어보면 모두 ‘오늘날 우리는 평화적 발전의 흐름과 냉전 이후의 평화 배당peace dividend62을 잃 었다’고 말합니다. 평화 배당이 사라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가 슴 아픈 일이죠. 두긴은 이에 대해 “전쟁은 전 세계를 위해 싸우는 것이고, 하늘의 뜻을 대신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즉, 기존의 평화 배당은 정의롭지 못했고 따라서 평화 배당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죠.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에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만 우 리는 이라크나 시리아, 예멘 지역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으며 다 른 지역의 충돌 또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과학기술과 신재생 에너지, 교육, 사람들의 생활을 중요시하는 사
62 전쟁 등 갈등 상황이 마무리되면서 발생하는 경제적인 이득을 뜻하는 용 어. 조지 H. W. 부시와 영국 수상 마거릿 대처는 1988~1991년 소련의 해체에 비추어 국방 지출 감소의 경제적 이점을 설명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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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서 전후 세계질서의 전형典型이었던 독일이 현재 (군사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독일 국민은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습니다. 매일 1만4000명의 난민이 베를린 기차역 에 도착하고 있고 저의 많은 동료도 자신의 집에 적지 않은 난민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두긴과 같은 케이스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우선 여기에는 러시아 의 특수성이 있기는 합니다. 만약 다른 국가였다면 두긴의 발언에 대해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러시아는 여 러 영역에서 지위가 불일치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 대 군사적으로는 강대하고 핵무기도 가지고 있지만 경제적 위상 은 이와 맞지 않습니다. 인구수와 국토의 크기, 과거의 역사와 작 금의 현실이 불일치해요. 소련과 같은 초강대국의 추락처럼 다른 사회는 쉽게 경험하지 못할 거대한 추락을 경험했어요. 서방 국가 와의 관계도 상당히 복잡합니다. 여기에는 나토나 미국의 책임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들 국가에게는 러시아를 압박할 책임이 있 었으니까요.
또 한 가지는 허무주의에 관한 것입니다. 두긴과 푸틴의 서술 을 보면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가 중요한 화두입니다. 방금 이 문제를 물어보셨는데, 사람들이 의미를 찾지 못해서 허무함을 느 끼는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현재 상 황에 대한 그들의 역사적 서술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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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긴과 푸틴은 이에 대한 견해에서 일치합니다. 잘 알려진 푸틴의 명언이 있지요. “소련의 해체를 아쉬워하지 않는다면 양심이 없 는 인간이고, 소련 체제로의 회귀를 꿈꾼다면 머리가 없는 인간이 다.” 또한 소련의 해체는 체제의 부조리, 이상의 모순, 사회 실험 의 실패, 인류 역사 발전의 딜레마가 아닌 지정학의 비극일 뿐이라 고도 강조해왔습니다. 푸틴은 제국주의 패권이 붕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소련의 해체는 불가하다고 생각했어요. 반면 사회주 의 실험으로서의 소련의 실천 결과와 구조는 해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는 좌파들의 이해와는 상반됩니다. 또한 푸틴은 존재 하지 않았던 우크라이나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레닌을 비판했습니 다. 1913년부터 레닌은 우크라이나 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논쟁을 했습니다. 1919년에는 우크라이나의 노동자-농민들에게 편지를 보내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해야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 도 명확하게 이야기했는데요, 두긴-푸틴의 발언과는 흥미 있는 대 조를 이루죠.
첫 번째로 레닌의 분석은 대부분 경제와 정치적 안배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경제적으로는 지주의 토지소유제를 폐지하고 공 업화를 해서 소비에트를 세워야 한다고 봤으며 정치적으로는 두 개의 볼셰비키를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우크라이나의 볼셰비키로 이들은 국가의 독립을 요구할 수 있고 여러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고 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총체적인 볼셰비키로 이른바 소비에 트 연방, 즉 소련을 의미합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여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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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우크라니 아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레닌에게 가장 중요한 것 은 프롤레타리아 연합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크라이나가 현지 지주와 자본가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허락할 수 없었죠. 다만 프롤레타리아 연합만 유지되면 그만이었습니다. 이런 조건하에서라면 우크라이나는 스스로 독립 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레닌은 우크라이나가 하나 의 독립된 공화국이 되는 문제가 우크라이나 스스로의 결정, 특히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 되어야 한다고 매우 명확하게 말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소련에 편입된 것은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들이 하나의 민족이라거나, 하나의 문명이라서가 아니라(레닌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공 통된 이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몽골의 상황도 매우 비슷했 습니다. 우란푸烏蘭夫63도 몽골이 한족과 공통된 이상을 가져야 한 다고 봤지 같은 문명적 기원을 가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 는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중국의 사회주의 운동과 연대하길 원 했죠. 레닌은 자신의 편지에서도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다른 민족 을 억압했으며 이 지역 내에서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민족을 억 압한 민족이기에 우크라이나 민족의 요구를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재차 말했습니다. 그의 편지와 두긴의 주장 사이에는 큰 차
63 중화인민공화국 전 국가부주석(재임 1983~1988), 몽골족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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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 있습니다. 레닌은 토지, 권력, 당의 관계와 같이 매우 구체적인 것을 이야기한 반면, 두긴은 인종, 기후, 성질과 같은 매우 모호하 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푸틴은 ‘패셔내러티passionarity’라는 단어를 인용하는데요, 저는 이 단어를 야성血性이라고 번역했습니 다. 이 단어는 두긴이 아니라 한 역사학자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방금 말씀하신 내용으로 되돌아가서요, 두긴과 같은 인물의 사 상이 어째서 이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에 대한 가장 적절한 답은 바로 허무주의라는 겁니다. 적어도 푸틴과 두긴의 언 설 속에서 이 허무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는 사 회주의 실천에 대한 부정적 평가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1917년부 터 1989년까지의 60년은 비극적인 역사적 실수였습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본래의 유라시아 문명에 대한 왜곡이었 죠. 다른 하나는 당시 소련의 모든 전략과 오늘날의 국제정치를 모 두 단순한 권력 투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적인 원칙 이나 정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죠. 왜냐하면 해양과 대륙은 근 본적으로 통할 수 없고 화해할 수도 없는, 오로지 목숨 걸고 경쟁 해야 하는 상대이기 때문입니다. 푸틴은 2월 21일 러시아에서 TV 연설을 했습니다. 사실상 전쟁 준비를 위한 것이었는데요,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원래 존재해서는 안 되는 국가로서 소련과 레닌의 인공적인 창조물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또한 레닌이 왜 이런 국가 를 만들어냈는지에 대해 자문자답합니다. 이는 당시의 볼셰비키 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이런 국가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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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자결권을 준 것이라는 설명이죠. 이들을 끌어들여 차르를 타도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당시 소련이 이들 소수민족에게 잘 대해주었던 것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일종의 책략일 뿐이지 이 상이나 원칙을 추구한 게 아니라는 거죠.
자유주의에 대한 두긴의 비판 중 하나는 그것이 허무주의라 는 것입니다. 그는 해양 문명의 자유주의가 곧 허무주의라고 봅니 다. 참 재미있는 말인데요, 두긴은 서방이 말하는 자유주의에는 사 람들 간의 평등이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서구 현대의 자유주의 는 이미 공동체의 범주를 모두 해체시켰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고는 개인이죠. 두긴은 서구 현대의 자유주의가 역사 와 전통, 풍습, 민족을 부정하고 있기에 이를 허무주의라고 봅니 다. 2017년 즈음, 두긴은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앙리 레비와 토 론을 한 적이 있는데요,64 그들은 서로를 허무주의자라고 불렀습 니다. 레비는 두긴의 담론에는 문명과 공동체만 있을 뿐 개인과 일 상생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를 허무주의자라고 불렀습니 다. 두긴은 ‘민족/국가가 전부이며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다Nation is everything, individual is nothing’라고 말했는데 참 흥미롭습니다. 레비 는, 두긴의 허무주의에 따르면 총체적인 문명적 요구에 부합하지 못하는 개인들은 소멸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W: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이 몇 가지 있는데요, 우선, 신유라시아주의
64 넥서스 토론 https://www.youtube.com/watch?v=x70z5QWC9qs&t=11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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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파시즘, 나치즘은 서로 아주 유사하지만 러시아는 전쟁을 일으 키며 우크라이나 내부의 나치화에 반대한다고 선언하기도 했거든 요. 방금 이야기한 허무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러 시아가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 러시아가 상대 편에게 허무주의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데 열중하죠. 생각해보면 오늘날 공적인 토론에서도 서로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개념을 상대편에게 갖다 붙이는 현상이 자주 보이는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와서요, 앞서 소련에 대한 몇 가지 내용에 따라 다시 여쭤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소련의 민족 정책이 중국에도 영 향을 미쳤다고 말씀하셨는데요,65 이 사건의 이면에는 소련을 어 떻게 다시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또 하나 있습니다. 중국의 맥락에서 볼 때,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고, 오늘날 세계는 중국의 관점과 태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층차에서 이 문제를 파악하고 있을까요? 단순히 지정학적인 문제 인가요, 아니면 공통의 이상이라는 부분의 문제인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전에 여러 번 토론한 적이 있기도 한데요, 사회주의 전 통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요?
X: 우선, 우리는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 워하는 것은 일련의 원칙입니다.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은 당시 레 닌이 했던 생각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
65 제1부 옥스퍼드 방담, ‘공동의 이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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렀고 오늘날의 상황은 그때와 다릅니다. 우리는 소련이라는 실체 나 제도를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소련과 사회주의는 당연히 구분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주의 기본 원칙이죠. 여기서 두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첫째, 저는 사회주
의 원칙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는 허무주의와도 연관됩 니다. 왜냐하면 현재 중국 청년들은 자신의 일상생활이나 국제사 회를 논할 때 하나의 정글을 상상합니다. 일상생활은 경쟁입니다. 누구든 능력만 있다면 위로 올라갈 수 있죠. 원칙 같은 것은 우스 갯소리로 치부할 뿐이에요. 국제사회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왜 그리도 많은 사람이 국제 정치에 관심을 가질까요? 저는 일종의 현실 투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글을 살아가는 것 같은 개인 생활 을 국제사회에 투영하는 거죠. 경쟁으로 가득 찬 ‘정글을 살아가 는 기분叢林感’은 사람을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직 접 경험하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설령 경쟁에서 승리하더라도 다음번에는 실패할 수 있죠. 하지만 국제 정치에 이 감정이 투영되 면 매우 강경한 민족주의적 입장이 나타납니다. 모든 것이 도덕적 인 의미를 지닌 놀이로 변해버려요. 진짜 도의적인 원칙은 필요하 지 않으며 이런 언설은 도리어 더 자극을 줍니다. 이런 허무주의 는 사람을 정글 속의 짐승처럼 만들어버립니다. 작은 나라나 한 집 단, 일개 개인이나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것 은 상관없어요.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너무나 강대한 힘을 가지 고 있습니다. 중국의 아주 작은 정책 조정도 일정한 구조적 후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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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할 수 있고 원칙적인 문제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 원칙을 견실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 곤란한 상황이 닥칠 수 있 습니다. 또한 국제사회든 국내의 일이든 상황이 매우 복잡하고 빠 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때 원칙이 없다면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 다. 중국이 1950년대부터 국제적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존중 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저우언라이가 반둥회의에서 제시한 평 화 5원칙66이 작용했으며 이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평화 5원칙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지닌 기본적인 명함이자 정치적 정체성입니 다. 만약 이번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크고, 헤게모니 쟁탈 전에서 중국의 입지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기울어, 원칙을 젖혀 두자고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계산입니다. 상황이 매우 복잡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모릅니다. 명확한 원칙 없이 당 장의 이익에 현혹되어 결정을 내린다면 결국 모든 것이 혼란스러 워집니다.
또한 사회주의 원칙이 남긴 유산에도 큰 타격을 주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물론 이 타격은 두긴의 이론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두긴은 명확히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사람이기에 그를 사회주의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가장 직접적인 영 향이 우리 학계에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재 몇몇 학자끼리는
66 평화 5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영토·주권의 상호 존중, 2) 상호불가침, 3) 내정불간섭, 4) 평등과 호혜의 원칙, 5) 평화적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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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말조차 섞지 않죠. 본래 서구 좌파들은 나토에 반대해왔습니 다. 버니 샌더스와 같은 미국의 좌파들 또한 나토의 확산을 반대하 고 있으며, 일부는 동시에 미국이 나토에서 탈퇴할 것을 요청하기 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입장 때문에 현재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한편 우크라이나 내부의 좌파들은 서구 좌파들이 서구 자체에 대한 비판을 과도하게 강조해 다른 유형의 제국주의에 대 해서는 비판하고 있지 않다며 서구 좌파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런 분열이 나타났죠. 저는 앞으로 몇 년간 글로벌 좌파들이 궁지에 몰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신보수주의가 대두되고 이른바 ‘군사-공업 복합체’가 흥기할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이러 한 추세가 이미 분명해졌습니다. 이후에는 신보수주의와 자유주 의가 서로 연합하여 안보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것입니다.
W: 다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앞서 두긴을 대표로 하는 신유라시아 주의와 이것이 오늘날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 는데요, 이 이론들이 그 자체로 정합적이고 나름의 논리성을 가지 고 있으며 실질적인 역할도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 인 학문의 관점, 예컨대 인류학이나 사회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 떤가요? 두긴의 이론에 특정 지식에 대한 오독이나 남용이 있지는 않나요? 특히 이론은 현실 정책에 활용되는 과정에서 왜곡이나 의 미 전도가 발생할 수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 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식별할 수 있을까요? 왜냐면 중국 일부에 서도 두긴의 저술을 번역하고 이에 대해 적잖은 찬성과 동의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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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을 발견했거든요.
X: 두긴의 이론은 매우 철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칼 슈미트와 마찬가지로 두긴은 사회나 역사를 과학의 언어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과 이성, 추론과 실 증은 원래 해양 문명의 인식론이라고 합니다. 대륙 문명의 인식론 은 신비로우며 정신적 감응과 문명체 정체성을 중시하는데 이것 이 야성이라는 것입니다. 야성은 러시아의 인류학자 레프 구밀료 프가 제기한 개념이에요. 구밀료프는 스탈린 시절 시베리아로 유 배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사람들이 가혹한 환경 속에서도 어떻 게 생존해나가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러곤 시베리아의 각종 부락 을 대상으로 민족지 조사를 실시한 뒤 야성이라 불리는 개념을 창 안해냈습니다. 그는 야성을 발현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예시로 알 렉산드로스 대왕을 꼽았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왜 끊임없이 정 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갔을까요? 사실 이건 이성적인 판단이 아닙 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약탈한 것들을 다시 고향 땅으로 가지고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밀료프는 이를 일종의 야성이라 고 봤습니다. 야성은 타고난 정신력의 일종으로 끊임없이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현실을 소유하며 추구하 도록 합니다. 구밀료프는 가혹한 자연 조건 때문에 야성이 시베리 아 민족들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었고 유라시아 전 대륙의 사람들 에겐 야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두긴의 이 론에서 칭기스칸은 유라시아 대륙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그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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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활동은 인성의 고양으로 해석됐습니다. 두긴은 자기 논리가 스 스로 정합성을 갖기 때문에, 외부 논리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야성을 느낄 순 있지만 그것을 보여줄 수는 없 고, 이를 막을 수도 없다고 말입니다. 누군가 이에 동의하지 않는 다면 야성이 발현될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의 살육은 인성 자체의 본질적 표현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보면 두긴이 인류학 이론을 사용하는 것을 옳다 그르다 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가령 그는 뒤르켐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사람들을 인용합니다.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자살은 하나의 사 회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자살의 의미를 개인의 자살 행위에 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자살률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 하면 자살률은 사회의 구조를 체현하기 때문입니다. 사회 구조와 사회 환경은 많은 사람을 자살하도록 이끕니다. 만약 한 개인의 자 살만을 본다면 진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죠. 개체의 자살 이 더해져서 자살 현상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자살 현상 이 사회 구조 문제의 상징으로서 먼저 존재하는 것이죠. 이런 조건 하에서 비로소 개체의 자살 행위가 벌어집니다. 참 흥미로운 생각 이죠. 두긴의 논리에서 이런 설명이 조금 변용되어 나타납니다. 문 명은 개체의 행위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체의 존재는 중 요하지 않아요. 총체적인 사실, 총체적인 문명에서부터 먼저 이해 해야 합니다. 뒤르켐과 모스는 총체적 사실에는 우리의 주관적인 의식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집단의식은 사회 현상의 일부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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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두긴은 우리가 사실을 간단히 볼 수 없 고 볼 수 있는 것은 집단의식을 포함하는 총체적 사실이라고 말했 습니다. 예를 들어 러시아 국영방송 뉴스의 주장을 거짓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진실이나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핵 심은 그것을 믿느냐 마느냐예요. 뉴스의 보도는 종교의식에서 말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모두 우리의 의미 체 계의 일부입니다. 몇몇 인류학적 생각에 대해 두긴이 이를 오용했 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간단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 입장에서 비판해본다면 두긴의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이론 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결합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의 출발점은 보통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무엇에 가장 관심 을 가지고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어떻 게 사실을 이해하는지가 아니에요. 물론 보통 사람들도 무엇이 절 대적인 참이고 거짓인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으며 총체적 현실이 라는 것에도 참과 거짓이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보통 사 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관심 있는지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습니 다. 가정생활이나 아이, 노인, 분배의 불공정 같은 것에 대해서 말 이죠. 하지만 두긴은 이런 것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러시아 문명의 핵심을 지킬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그의 출발점은 우리의 일상적 실천과 완전히 유리되어 있습니다. 두긴은 자신의 집착에서부터 시작해 멀리 나아갔으며 논리적 추 론들은 모두 뒤에 따라올 뿐입니다. 따라서 그와는 일반적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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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학술 토론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를 하나의 인류학적, 사회 적 현상 자체로 두고 분석해야 합니다. 그가 행하고 있는 것은 연 구가 아니라 의미의 구축입니다. 그에 대한 반박은 글을 통한 것이 아니라 군중 동원을 통해 이뤄져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두긴의 이 러한 생각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두긴의 의미는 도대체 어떤 의의 를 가지고 있는지, 그들의 일상생활적 실천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 는지 사고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 위에 두긴의 발언을 올려 놓을 수 있습니다.
W: 처음에 선생님께서는 의미를 언급하셨는데요, 저는 이 의미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이전부터 우리가 계속해 서 말해왔던 중국 사회, 특히 청년층들이 어떻게 의미를 찾고 만들 어내는지입니다. 다른 하나는 방금 말씀하신 집단적인 의미입니 다. 최근 몇 년간 새로운 세대의 청년들의 의미 구성과 더불어 중 국 여론에서도 집단의 의미가 점점 더 우세해지고 있습니다. 집단 적 의미는 중앙의 권력과 그 주위의 각종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통 해서 점점 새로운 세대에게 익숙한 소셜미디어나 인터넷 속 파편 화된 사회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처럼 시끄러운 선전 방 식이 아니라 서서히 아래로 침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습니 다. 저는 이 과정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중의 의미(큰 의미와 작은 의미) 사이의 긴장을 느끼게 만들었고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 한 채 혼란 속으로 빠지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막 대화 를 시작할 때 선생님께서 아주 일상적인 일화를 묘사했던 것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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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나는데요, 쓰레기를 버리러 갔다가 만난 이웃 아저씨가 했던 말, ‘미국을 믿을 수 없지만 러시아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날 중 국의 맥락에 놓고 보면 많은 중국 청년도 이런 문제에 자주 직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이 국가는 믿을 수 없으며 저 국가도 믿을 수 없다, 혹은 이 매체는 믿을 수 없으며 저 매체도 믿 을 수 없다, 이 선생은 믿을 수 없으며 저 선생도 의심스러워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죠. 심지어 친구조차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매일 수많은 의미의 상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는 먼 곳에서 일어난 이 전쟁과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을 연관 지으 셨는데요, 그렇다면 이 문제가 우리의 오늘날 일상생활으로 들어 왔을 때, 세상에 이러한 격변이 발생했다는 것을 감지했을 때, 구 체적으로 개인의 의미 구성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두긴의 이론은 하나의 신념을 강하게 표출하는데요, 앞서 언급한 공통의 이상도 하나의 신념이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오늘날은 도 대체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혹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신념이 필 요합니까?
X: 저는 의미의 구성 방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 쟁을 볼 때는 반드시 푸틴의 의미 구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최소 한 러시아 사회의 의미 구성을 이해해야 하죠. 또 다른 문제는, 지 금과 같은 격변의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의미 구성과 마주 해야 하는가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말한 개체의 의미 구성 과 집단의 이데올로기 및 정서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입니다. 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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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쟁들을 보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 니다. 특히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중국 내부의 상황을 좀 알고 싶어서 중학교 동창들의 모멘트67를 봤습니다. 원래 우리 원 저우 사람들은 장사를 하기 때문에 사회성이 매우 좋습니다. 웃는 얼굴이 부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이번에 본 모멘트는 생각이 다른 친구와 절교를 해야 한다는 식의 유쾌하지 못한 내용 이 많더군요. 그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차이 보다는 감정적 충돌이었습니다. 만약 이념적 차이라면 토론이 가 능합니다. 하지만 감정의 충돌이라면 서로를 이해하기 쉽지 않습 니다. 감정은 이데올로기적 이론과 관련되기보다는 의미 그 자체 와 연관됩니다. 좋고 나쁨, 기쁨과 언짢음, 통쾌함과 불편함같이 직관적인 반응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 감정적인 의미가 어떻게 구성되느냐 하는 과정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믿는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방향감을 잃는다거 나 실의에 빠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굉장 히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일에 대해 일정한 의심을 품거 나 거리감을 가지고 있어야 하죠. 나는 나만의 원칙이 있지만 이 원칙과 전혀 다른 타인의 원칙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 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 양한 주장과 모습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자신의
67 위챗의 기능 중 하나. 한국의 ‘카카오스토리’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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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비교적 일치하고 스스로 정합성을 갖는 ‘완전체自洽’적 의 미의 도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이 어떻게 가능할 까요? 저는 자신의 물질적 삶이 드러나는 일상적 실천에 대한 이 해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는 그리 직관적 이거나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고, 이 일을 하 면서 왜 어떤 때는 기쁘지만 어떤 때는 그렇지 않은지, 월급은 얼 마이며 전체적인 업무를 어떻게 배치하는지, 당신은 어디에 사는 지, 그리고 그 집은 누가 지은 것이며 어떤 건축 자재가 사용되었 는지, 돈을 얼마가 들었는지 등 이런 것들에 더 관심을 갖는다면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불안이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희로애락의 사회적 기원도 알게 되겠죠. 이에 대해 기본 적인 이해가 있으면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논문을 쓴다거나 꼭 체 계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의식하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다양한 사건이나 서사를 접할 수 있습니다. 직접 적인(즉자적인) 답을 얻을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이 이 사 회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다른 견해를 만났 을 때도 여기에 동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왜 그런지, 없다 면 또 왜 그런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기본적으로 더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문제는 SNS에서 아주 다양한 주장 을 보고 있을 때 여기에 동의할지 말지에 대한 개인의 결정이 대부 분 막연한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설 명에 대해, 예를 들어 러시아가 정의를 수호하고 있다는 주장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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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동의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고 (심지어) 스스로에게도 설명 할 수 없어요. 이에 대해 근거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적지만 이런 입장에 자신을 투영하는 사람은 꽤 많습니다. 혹 은 반대편 입장에 자신을 투영해 러시아가 그저 야만적이고 합리 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죠. 특히 저는 중국의 SNS에 나타난 우크 라이나에 대한 비하들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 을 광대라 칭하고 우크라이나를 ‘유럽의 자궁’68이라며 조롱하는 데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편전쟁을 떠올려보면 중국은 외부 세력이 주권국가에 침입한 이 사건에 대해 매우 민감 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 은 사람들이 어떤 감정적 측면에 심하게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의 미합니다. 먼저 이런 감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그 기준이 매우 다양해서 뭘 따라야 할지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이 문제가 크게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 다. 다양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에 대해 생각하면 됩니다. 작금의 문 제는 투영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별다른 고민 없이 절대적인 진술 속에 투영하면 일종의 집착이 되고 강렬한 충동이 생겨납니다. 자 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반드시 설득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68 우크라이나는 대리모 산업이 합법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범 이후 키이우의 한 아파트 지하에 대리모들이 출산한 신생아들이 누워 있는 사진이 화제가 되었는데, 이 사진을 두고 중국 웨이보에서는 우크라이나의 대리모 산 업을 비꼬며 ‘유럽의 자궁’이라는 비하적 표현이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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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그 사람은 누군가에게 속았기 때문이라 여기므로 그를 설득하 는 것이 곧 그를 구원하는 일이라 여기게 되죠. 두긴이 그렇습니 다. 그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속고, 괴롭힘 당하 고,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래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해방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물질세계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물질주 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물질적 생활에 대해 관 찰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부근附近을 강 조합니다. 부근에 대한 재검토와 부근의 발견은 의미 구축에 매 우 중요합니다. 허무맹랑한 거대 서사에 대해서는 반드시 재검토 가 필요합니다. 반둥회의의 평화 5원칙과 같은 기본 원칙도 비교 적 추상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료하게 이게 왜 필요하고 또 옳은 지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위 문명론, 야성론보다 명확하게 말해질 수 있는 원칙들을 보호해야 합니다. 오늘날 중국의 독자들 은 두긴의 주장을 검토하면서 중국인 자신의 의미 구조 문제를 짚 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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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국뽕에서 위기를 읽다
지난 4월, 샹뱌오 교수는 알렉산더 두긴 및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 공과 관련해 한국의 이병한 박사, 임명묵 작가와 토론을 가졌다. 해당 대담은 한국의 시사주간지 『시사IN』(제766호, ‘러시아의 국뽕에서 한중 이 위기를 읽다’)을 통해 공개되었으며 이 글은 해당 대담의 번역 결과 물이다.
■ 사회: 이오성 기자(『시사IN』)
■ 통역: 김유익(중한통역), 우자한牛紫韓(한중통역) ■ 정리: 김명준
■ 대담 일시: 1부 2022년 4월 19일 / 2부 2022년 4월 22일
(이 대담의 내용 일부는 『시사IN』 제766호 ‘러시아의 국뽕에서 한중이 위기 를 읽다’에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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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뱌오(이하 샹): 이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무척 감사드립니다.
이오성(이하 시): 샹뱌오 선생님께 우선 묻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 찍부터 알렉산드르 두긴에 주목하셨는데요. 왜 두긴과 같은 인물 에 주목하게 되셨는지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샹: 제가 두긴에게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푸틴의 침략전쟁에서 겉으로 드러난 이유들은 지정학적
·군사적 설명이 있는데요, 저는 이 전쟁이 이것들만으로는 설명 이 안 되고 더 큰 어떤 배경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품게 되었 습니다. 그래서 전쟁 배후의 의미, 철학, 정서를 파고들고 싶었습 니다. 그 과정에서 두긴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두긴의 철학 과 그가 느끼는 감정과 같은 것이 이 전쟁의 배경이 됐을 수도 있 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두긴은 원래 서방 매체에 의해서 푸틴의 브레인으 로 소개되고 있었는데요, 중국 학자들이나 일부 청년이 두긴의 담 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거든요. 왜냐하면 두긴이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은 일부 중국인이 관심을 갖고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었기 때 문입니다.
세 번째는 두긴의 철학 때문입니다. 두긴이 역사와 문명을 보 는 관점은 굉장히 추상적입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전쟁과 연결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증거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우리 일상생활의 의미들이 과연 두긴이 얘기하고 있 는 것들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또 두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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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하는 소위 지정학도 우리 삶과 과연 어떤 연관이 있는 것 일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 지금 저희가 두긴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오늘날 청년 세대들에게 두긴과 같은 사상가가 중국이든 한국이든 매력적으로 비칠 가능 성이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 때문인데요, 그 가능성을 어떻게 보십 니까?
샹: 저는 청년들이 두긴의 영향을 받는 것에 대해 큰 걱정은 하지 않아 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두긴을 추앙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긴의 화법을 보면 그의 이론이나 설명이 선동 적인 것도 아닙니다. 설득력도 별로 없어요. 일부 청년이 두긴 같 은 사람의 주장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사실 허무주의에서 비롯됩 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 경험이나 주변 환경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면 세상이나 생활의 의미에 대한 이해도 깊이 가 떨어지죠. 전체나 사물 혹은 세계를 보는 더 명확한 관점, 그걸 저는 도경圖景69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이 도경을 잘 파악하지 못 하는 겁니다. 그런데 두긴의 이론 같은 것들이 그 빈 부분을 보충 해준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보통 청년들이 자신의 삶을 잘 파악하고 잘 이해할 수 있다면 두긴 같은 사람의 주장에 쉽게 휩쓸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진짜로 걱정하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중국이 그
69 제1부 베이징 방담, ‘어린 시절의 기억과 도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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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고 아마 한국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는데요, 바로 공허감에 빠진 관료 체제입니다. 테크노크라트들은 시험을 통해 선발됩니다. 이 들은 원래 나름의 공공 서비스를 해야 되는 사람들이고 이에 대한 복무 이념을 가져야 되지만 실제로는 그런 사람들이 관료가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냥 성적이 좋고 시험을 잘 봐서 그 자리에 올 라간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권력을 갖고 있지만 스스로 의 미 구성이나 의미 부여를 하지 못하니까 정신적 공허감을 갖게 된 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상당히 높은 지위의 정책 결 정권자가 되는데, 결국 모종의 ‘숭고한 이론’을 추구하게 됩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아실 거예요. 악하지만 눈 에 띄지 않는 평범성과 숭고한 의의를 찾는 경향, 즉 초월성 추구 가 만나면, 탈정치화된 상황에서 위험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 니다. 보통 청년들은 생활의 의미를 찾을 수만 있다면 두긴류의 주 장에 대해 충분히 저항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관료 체제는 아직 이런 위험성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고 있죠.
시: 중요한 말씀이군요. 시진핑에게도 숭고한 이론 같은 것을 제공해 주는 브레인, 두긴 같은 사람이 있을까요?
샹: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비슷한 사조들은 분명히 중국 사회에 영 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외교 정책에 대해 2000년대 중국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기존에 덩샤오핑이 주장했던 외교 기조는 도광양회韜光養晦였습니다. 몸을 숙이고 우 리 발전에 힘을 쓰자. 리더 역할을 자처하며 머리를 쳐들고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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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하기보다는 조용히 우리 실속을 챙기자는 말이었죠. 그런데 2000년대 초반이 되면서 이제 중국이 제법 커졌는데, 그럼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변화해야겠느냐는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그때 두 가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중국이 미국 모델을 따라가며 일종의 ‘무임승차자free rider’로서 발전을 해왔는데 이제는 중국만의 독자적인 모델을 만들 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독립 모델에 대한 첫 번째 논의는 굉장히 도덕적인 요구였어요. 우리가 너무 이기적으로 경제적 이 익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 중국이 세계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면 서 공헌해야 되는데 그러자면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리더 십을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거였죠. 이런 생각은 어떤 숭고함 을 추구하는 측면이 있는 건데요, 잘못된 말은 아니죠. 당연히 권 력이 생겼으니까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되는 거고요.
그런데 두 번째는 조금 더 공격적입니다. 도광양회라고 말은 했지만 우리는 원래 코끼리 같은 존재다, 머리를 숙이고 몸을 감춘 다고 드러나지 않는 게 아니다, 그러니 힘을 활용해서 새로운 질서 를 제안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이 UN 얘기를 많이 하죠. 미국 중심의 질서가 아니라 유엔처럼 좀 더 국제적인 조직과 원칙이 중요하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중국 도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제3의 조직을 정말로 중시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뭔가 새로운 비전이나 질서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게 제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구체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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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적인 차원의 요구에 대해 중국이 뭘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 나 노력이 부족하다는 거죠. 그러면서 (중화)문명론과 같이 굉장히 추상적인 논의를 내세웁니다.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논의에 의해 정당한 요구가 공중납치hijacking되었다고 볼 수 있죠. 이런 것들이 현재 중국의 이슈이자 향후의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병한(이하 이): 대체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고 또 아시아나 일본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라 고 표현을 하는데요, 호칭에서부터 이미 각자의 관점이 많이 투영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샹뱌오 박사님의 글(「두긴 을 말하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보통 우리는 전쟁의 동기로 자원 수탈 등의 경제적 이유를 떠올리는데요, 이번 전쟁은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의미의 추구를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씀하신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전쟁이) 러시아의 어떤 정체성 혹은 새로운 러시아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가 가장 핵심적인 독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탈냉전 이후의 세계사 에 대한 몇 가지 전망 중 모든 것이 다 서구화 혹은 미국화될 것이 라는 식의 관점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냉전이 끝났기 때문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싸우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더더욱 오래 된 문명의 가치가 귀환해 문명의 충돌로 이어질 것이다(헌팅턴 같 은 사람이 대표적이었죠)라는 관점이 있었죠. 샹뱌오 선생님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앞으로의 세계사가 어떻게 전개될 거라고 보시는 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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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 저는 문명의 충돌로 이번 전쟁을 해석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물론 두긴 자신은 헌팅턴의 이론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편입니다. 저는 지금 두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추구하는 의미를 얘기한 것이지 의미 자체가 전쟁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한 것 은 아닙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좀 명확하게 말씀드려야 될 것 같 고요. 제가 왜 이 전쟁과 관련해서 의미를 말씀드렸냐면 이런 전쟁 의 훨씬 더 구체적인 조건들, 특히 내부의 경제 문제라든가 정치적 인 조건들과 ‘의미’가 단절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두긴의 사상이 러시아에서 인기를 끌게 된 배경에는 소련과 동 유럽의 몰락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소련 역사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고 반성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문자 그대로 몰락이 가속 화되면서 러시아 사회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몰락의 배경이 된 역사적 상황, 특히 그 정치경제 적 맥락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이 너무 적었고, 또 몰락 이전 소련 사회가 발전하고 영향력을 확대시켰던 시절의 경제적·사회적 성 취들이 너무나도 간단히 부정됐습니다. 푸틴 자신도 레닌을 부정 적으로 설명했죠. 그렇게 물리적 실체와 변화의 디테일에 대한 설 명이 거부된 채, 타락한 일상의 의미를 설명할 길이 없어 아노미 상태에 빠진 러시아 사회에 제시된 숭고하고 초월적인 사상이 바 로 두긴의 신유라시아주의입니다. 두긴은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 아’라는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만의 의의를 만들어냈고, 이런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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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그가 주장하는 추상적인 문명론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문명론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먼저, 냉전 이후 세계 경제나 정
치가 발전하는 구체적인 내용들, 예컨대 생산 방식, 특히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금융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 다. 문명론은 이런 내용을 설명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논의에 머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1990년대에 등장했던 동아시아 문명론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의 역사적 발전과정과 그 이 후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 에 추상적인 논의만 진행됐지요. 그래서 나중에 생명력을 잃었습 니다. 두 번째로 문명론이 힘을 얻은 이유 중 하나는 9·11 사태 에 있습니다. 그 당시에 ‘문명 대 야만’과 같은 이원론적인 사고가 등장했고 이를 테러리즘으로 연결시켜서 사람들이 공포를 느끼게 하며 관련 정책들을 지지하도록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중요한 건 이런 문명충돌론이 왜 일정 부분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데 설득력 을 얻게 됐는지를 우리가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신냉전은 코앞에 닥쳐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거 냉전시대와 지금은 상황이 많 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념 간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사 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있고 반대편에 자본주의가 있고, 이념에 따 라 진영이 나뉘고, 각 진영은 자기만의 발전 모델을 가지고 경쟁 을 했습니다. 그리고 각 진영의 핵심 국가들의 상황도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꽤 괜찮았어요. 그러니까 소련은 소련대로 나름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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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발전 모델을 통해 근대로 들어오면서 괜찮은 사회를 만드는 거 고, 서구는 서구대로 상당히 발전된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양 진영 모두 진보나 현대화의 결과를 보여주고 입증할 수 있었습니다. 그 런데 지금은 서로가 설득력을 갖는 발전 모델 간의 경쟁이나 논쟁 이 아니라 추상적인 문명 간의 대립입니다. 그리고 이 대립이 군사 대립으로 이어집니다. 과거의 냉전과 현재 상황의 또 한 가지 차이 점은 각 나라와 각 진영 안에 굉장히 많은 국내적 문제가 존재한 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이 있습니다. 미국의 불평등 문제, ‘BLM(Black Lives Matter)’로 대표되는 인종차별 문제는 냉전 시기 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줬죠. 하지만 지금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중국이 든 러시아든 내부의 여러 정치경제적인 갈등이 존재하고 있습니 다. 그래서 과거의 단순하고 선명한 이념적 냉전이 아니라 지금은 훨씬 더 복잡한 상황 속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 야 합니다. 우리가 문명 이야기를 할 때 문명이 정말 대립의 원인 이 되는 건지 실증적으로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문 명은 굉장히 추상적인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시: 네. 그러면 기왕 지금 신냉전 문제나 포스트 체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이병한 선생님이 준비하셨던 질문을 바로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제가 2017년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여행했거든요. 우크라이 나, 러시아만 간 게 아니라 서유럽부터 쭉 돌아다녔는데요,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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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받았던 인상은 서유럽과 미국이 점점 멀어진다는 것이었습 니다. 그러면서 독일을 선두로 한 서유럽과 동유럽, 러시아가 연결 되고 있는, 즉 대서양은 멀어지고 유럽 대륙은 통합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그 흐름이 완전히 뒤집힌 것 같기도 합니다. 좀 두고 봐야겠으나, 일단 독일 과 러시아 사이에 여러 긴밀한 경제적인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 고 이렇게 갈등이 표출됐고, 브렉시트 이후 유럽에서 목소리가 작 아지고 존재감이 거의 없어진 나라라고 간주됐던 영국이 다시 유 럽의 정세에 깊이 개입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실 영국은 미국의 의지를 대리해주고 있죠. 그래서 대서양 동맹이 다시 강화되고 그 동안 동·서유럽 간 갈등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했던 북유럽 국가 들도 나토에 가입하겠다고 하니, 정말 명실상부한 신냉전으로 가 는 것 같습니다. 저는 유럽이 어디로 나아가느냐가 세계사에 굉장 히 큰 영향을 줄 것이라 보거든요. 대서양 너머의 미국과 다시 연 합할 것이냐 아니면 러시아 내지는 아시아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나갈 것이냐가 관건이죠. 샹뱌오 선생님께서는 지금 독일 에서 활동하고 계시니, 이번 전쟁 이후 유럽에 대해서 어떻게 전망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샹: 일단 지금 질문하신 부분에 대해 제가 전문성을 가지고 답변을 드 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물론 굉장히 중요하고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저는 국제정치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이 점 은 고려하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말씀하신 대로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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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있고, 유럽의 정세를 좀더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어 떤 가설을 말씀드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먼저, 새로운 냉전의 문제입니다. 이전 답변에서 말씀을 드렸 던 새로운 냉전 체제 같은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냐라고 했을 때 저 는 그런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고 봅니다. 하지만 분명 히 다시 강조하건대, 1946년부터 1989년까지 유지됐던 제1차 냉 전 시대와 아마도 새롭게 등장하게 될 냉전 국면은 그 양상이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진보가 아니라 퇴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공공 복리 같은 것이요. 재차 자세한 설명은 않겠습니다.
두 번째로 말씀드릴 것은 유럽과 미국의 관계에 대한 전망이 죠. 지금 유럽, 러시아와 미국의 상황에 대해서 저는 별로 낙관적이 지 않습니다. 그리고 향후 5년은 세계가 상당히 안 좋은 방향으로 흘 러갈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로든 좀 엉망진창이 될 것 같아요.
일단 미국은 과거 10년간 굉장히 많은 사회와 국가적 변화를 경험해왔죠. 여러 문제에 직면해왔고. 그래서 현재 미국의 강점은 두 가지뿐입니다. 첫 번째는 여전히 압도적인 군사력입니다. 그리 고 두 번째는 조금씩 금이 가고 있긴 하지만 달러 기반의 금융 패 권이죠. 결국 이 두 가지 무기로 세계의 리더십 역할을 하고 있는 데, 과거 10년간, 특히 트럼프 정권을 거치며 국제적으로 미국의 도덕적인 리더십은 상당히 힘을 잃었습니다. 이게 현 상황이고요. 그러면 향후 5년은 어떻게 될까요? 제가 보기에는 미국의 엘리트 들, 특히 방위산업 엘리트들이 굉장한 이득을 얻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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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번에 전쟁을 호기로 삼아서 자기네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 전쟁은 사실 굉장히 ‘해피’한 상황인 거죠. 현재 세계적인 국면과 역학이 재조정되는 상황 에서 각국이 군사력을 확장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 그리고 방 산업체들은 유럽을 비롯한 각국에 무기를 엄청나게 팔아먹으면서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겠죠. 그런데 동시에 이들은 지금까 지 관심을 기울이던 국내 문제, 즉 인종차별이나 경제 문제, 기후 위기 같은 전 지구적 문제의 우선순위를 낮추며 그 해결을 뒤로 미 뤄버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여러 제재를 통해 달러 패권을 강화하려 할 것 이고요. 미국은 과거에 자랑하던 진보나 자유주의 같은 이념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통해 이익을 추구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이 늘어지는 것에 미국의 의도적 역할이 있 지 않나 하는 의견은 상당히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미국 엘리트들 의 이익이 우크라이나 인민 보호보다 더 우선시될 가능성 말입니 다. 미국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를 약화시키고 자국 엘리트들의 이 익을 극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고통은 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 리고 미국이 향후 5년간 이런 방식을 통해 패권을 회복하는 과정 에서 한편으로는 전 세계 사회주의 세력의 약화가 일어날 것이 라고 봅니다. 미국에서도 버니 샌더스가 대표하는 민주사회주의 democratic socialism 진영이 힘을 잃고 있고요. 유럽의 좌파들 또한 우 왕좌왕하는 상황입니다. 동유럽은 원래 군사적으로는 나토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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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하면서 미국이나 서유럽에 의지하고 싶어했지만 독일이나 프랑 스가 이를 원한 건 아니었거든요.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입 지를 확보하고 싶어했습니다. 문제는 이 국가들도 내부적인 갈등 이 너무 심해서 정치적으로 뭔가를 하기가 힘든 상황이라는 겁니 다. 따라서 방금 질문하신, 과연 유럽의 핵심 국가들이 계속 아시 아와의 협력을 강화할 것이냐 아니면 영미 세력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냐의 문제에 대해서도 내부적인 어떤 컨센서스를 이루기는 힘들고, 주체적으로 결정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겁니다. 그럼 에도 큰 흐름에서는 결국 아시아와 협력하는 걸 모색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중 국이 자신의 소소한 이익이 아니라 전 세계의 발전을 위한 정책을 만들어나갈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게 제대로 되지 않고 있어서 문제 입니다.
끝으로 저는 인류학자이기 때문에 국제 정치를 글로벌 엘리트 들의 이익 다툼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국가 관점보다는 계급의 관점으로 이 문제를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미국의 엘리트들이 패권을 회복하는 것이 미국의 약자들, 즉 소수 인종이라든가 흑인 들의 이익과 부합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패권을 추구하는 과정 에서 이런 국내 문제들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게 될 거고요. 한국 과 중국 같은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국내외적인 계급의 관점을 통해서 다시 국제 문제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프레 임을 아직은 다른 학자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고 저도 찾지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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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습니다.
시: 네, 고맙습니다. 인류학자가 보는 국제 정치 문제도 흥미롭습니다. 이제 임명묵 선생님께서 질문해주실 차례가 된 것 같습니다. 모스 크바의 변화에 대한 중국의 관점이라든지.
임명묵(이하 임): 저는 샹뱌오 선생님이 과거의 냉전과 최근의 지정학 적 혹은 강대국 간의 갈등의 차이를 지적해주신 게 많이 동의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구냉전의 어떤 이념과 지형의 대립적인 성격 은 많이 줄어들었고 글로벌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체제나 이념 간 의 차이는 특히 정치경제적 면에서는 굉장히 옅어졌다고 생각합 니다. 그런데 최근에 러시아의 도전들을 보면 여전히 이념적인 부 분이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것이 정치경제 체제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의 문화나 공동체의 정체성 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둘러싼 도전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 이 서구 각지에서 국내의 문화 전선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페미니 즘, 글로벌리즘, 자유주의, 코즈모폴리터니즘 등을 비롯한 서구의 합의에 대해서 제기되는 도전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러시아 나 두긴이 제기했던 문화적·이념적 의제와 조응하면서 서구와 러 시아 그리고 동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문화적 갈등과 이 념적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크라이 나 전쟁도 이러한 문화 투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시각을 갖 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러시아나 두긴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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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청년들은 당연히 거의 없고요, 대신에 러시아가 보여주는 남 성성, 규율과 질서에 대한 찬양, 그리고 서구 사회가 보여주는 문 화적 혼란과 무질서에 대한 혐오 정서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 다. 한국의 인터넷, 특히 (이대남이라 불리는) 청년 남성 커뮤니티에 서 자주 눈에 띄죠.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도 페미니즘을 둘러싼 젠 더 갈등이라는 정치적 의제로 강하게 전선이 형성되어 있기도 하 고요. 모스크바가 서구에 대해서 제기하고 있는 문화적 도전, 이념 적 도전, 전통에 대한 강조부터 정치적 올바름 문제에 대한 반감 등 다양한 수사와 논리를 동원하는 이런 도전에 대해 중국에서 어 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고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있는지 궁금합 니다. 제가 듣기로 중국에서도 서구의 정치적 올바름을 내면화한 이들에 대한 조소를 담은 ‘바이쭤白左’라는 용어가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러한 점을 둘러싼 중국 내부의 논의 지형이나 상황을 듣 고 싶습니다.
샹: 일단 중국도 비슷한 상황이라는 게 맞고요. 그래서 중국에서 정치 적 올바름에 대해서 이거는 속 빈 강정 같은 거다, 허무주의다 이 런 식으로 비판을 합니다. 일단은 미국과 서구가 이중 기준을 적용 한다는 비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중국에서 BLM을 들어서 미국을 많이 비판합니다. 그런데 더 극단적인 경우가 PC 는 원래 백인들이 인종적으로 만들어낸 백인의 도덕이고 거짓말 이다, 우리를 속이기 위한 세뇌공작이다, 그러니까 아예 이중 기준 이라고 비판할 만한 가치도 없고 다 가짜다라는 조소와 비판도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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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합니다. 이 배후의 원인으로 주목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PC는 확실히 지나치게 추상적입니다. 현실 속의 권력 투쟁을 제 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서구 사회가 가진 원래의 행위 양식도 마 찬가지입니다. 또 청년들이 자기네 생활과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유리된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는 높은 도덕적 원 칙을 가지고 나를 무시하는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담론이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맺지 못하고 도덕적 원칙만을 구호적으로 제시할 때 위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이 되고, 비판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더 큰 반발을 하게 됩니다. 특히 아시아에서는 이게 우리의 역사적 과 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서구의 이론을 가져와 자기 맥락화하는 노력도 부족하다보니까 이런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는 듯합니다.
이제 반대편 입장에서 PC를 조롱하는 사람들을 비판해보겠습 니다. 제가 지금 ‘잔혹한 도덕주의Brutal moralism’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정치 제도에 대한 비판이 어느 정도냐 하면, 모든 도덕 원칙과 이런 표준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는 지 경입니다. 이걸 왜 잔혹한 도덕주의라고 부르냐는 것을 알려면, 극 단적인 ‘여혐’과 같은 소위 남성 권력의 담론을 들여다봐야 합니 다. 두긴의 지정학에도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굉장 히 ‘도덕화’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정확하고 이게 나의 존 엄성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존엄성을 끌어오고 영예로움을 끌어 옵니다. 그리고 만일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수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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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운 사람인 것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영광과 치욕의 감정을 끌어 오는 것이 고도의 도덕화라는 겁니다. 그러면 잔혹함이란 무슨 뜻 일까요? 이들은 바로 상대에게 딱지를 붙입니다. 여기서 토론과정 따위는 없습니다. 저는 이걸 “잔혹하게 정직하다Brutally honest”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특징은 바로 그들이 드러내는 잔혹함 이 정직함 혹은 일종의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겁니다. 그들에게 지금의 PC는 허위이자 위선입니다. 반면 그들의 도덕은 진짜라는 거죠. 여혐은 여혐이고 나는 솔직히 그렇게 말했다, 이게 나의 도 덕성이다, 네가 말하는 페미니즘의 구호는 듣기는 좋아도 알맹이 없는 가짜다. 그래서 도덕적인 문제가 있다. 그리고 서방의 PC에 대한 회의가 전통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다고 하셨죠. 중국에서 도 분명히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모두들 중국이 중화 문 명으로 돌아가야 하고,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했는지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말은 성립되기 어 렵죠.
러시아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페미니즘에 반대하고 있죠. 하지만 소련의 역사에서 여성이 해방되었고 중국도 마찬가지예 요. 중국도 서구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 역사의 전통 속에서 여 성들을 더 존중하고 여성들의 권력을 강화해온 전통이 분명히 있 거든요. 그러면 이 전통은 가짜란 말입니까? 물론 푸틴과 두긴 같 은 사람들이 그걸 부정하고 있긴 하지만 이건 실존하는 역사적 경 험입니다. 그러니까 고대와 중세의 예를 들어 페미니즘이 반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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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을 현재 상황으로 부터 이해해야지 전통이라는 추상적인 구호에 휩쓸려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주로 기층 민중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갈수록 더 불안정하죠. 하지만 기대는 여전히 높습니 다. 이런 상황이 왜 동아시아에서 더 두드러질까요. 중국도 그렇고 한국도, 동아시아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동아 시아 모델이라는 게 있거든요. 동아시아 모델의 서사는 우리가 열 심히 노력하면 경제가 성장하고 삶이 갈수록 나아진다는 거죠. 그 런데 실제 상황, 특히 2010년 이후의 청년들의 현실은 더 이상 이 서사를 뒷받침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새로운 목소리가 필요했던 겁니다. 자신의 존엄을 발설할 대상이 필요했고 그래서 PC를 공격 대상으로 삼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양성 관계에 대해 좀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한국의 대선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과도했기 때문에 이런 백래시가 온 것이라고 말하죠. 오늘날의 남성들이 많이 살기 어렵다고 합니다. 정말로 생활에 압력이 적지 않죠. 그래서 자기 권리와 공정에 대해서 발언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1960~1970 년대에 자신들이 페미니즘을 외치면서 자신들이 겪는 불평등에 대해서 항의했는데 우리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 다. 제 생각에 이건 다릅니다. 과거에 여성주의가 출현한 것은 단 순한 남녀 문제가 아니라 정치경제적인 문제입니다. 가정 내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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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원 간의 권리 문제가 있고, 이 권력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그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페미니즘입니다. 그런데 남권 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런 구조 안에서의 권력과 자원 배분을 둘 러싼 투쟁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너는 여자고 나는 남 자다라는 식으로 편을 가르고 상대를 공격합니다. 구체적이고 실 증적인 분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기층 남성들이 불만을 갖게 되 는 구조에서 실제 패권을 가진 사람은 누구입니까. 실제로는 대부 분의 경우 성공한 남성일 가능성이 높죠. 그런데 왜 남성들은 성공 한 남성을 비판하지 못하고 여성들에게 화살을 돌릴까요. 왜냐하 면 성공한 남성, 즉 시스템을 비판하는 순간 자기는 초라한 ‘루저’ 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걸 견딜 수가 없는 거죠. 이게 잔혹한 도덕 주의, 포퓰리즘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들의 비판은 거대한 권력 관계, 경제관계, 정치관계에 대한 디테일한 분석에 의한 것이 아닙 니다. 간단한, 심지어 연성의 반역입니다. 여자니까 공격할 뿐 가 정이나 경제 시스템의 문제를 보지 못합니다. 서방의 PC라고 공격 하는데 구체적 분석은 없고 딱지를 붙여 비판할 뿐 불평등의 원인 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냥 전통으로의 회귀라기보다는 지금의 불만스럽고 좋지 않은 상황을 단순화시켜 서 보고 격렬하게 표현하는 반역에 불과합니다.
임: 덧붙여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한국 인터넷상의 논쟁을 좀 자세히 들여다보는 편인데 한국의 안티페미니즘 혹은 남권주의가 처음에 는 단순한 비난과 딱지 붙이기의 형태를 취했다면 최근에는 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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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즘의 전술 혹은 이론적 경향들을 역으로 이용해 자신들만의 정 치경제적 분석 틀과 공격 논리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꽤 흥미 로우면서도 이게 어디로 튈지 몰라 좀 불안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 습니다.
저는 러시아를 여행했을 때 현지 청년들과의 대화에서 두 가 지 정서를 엿보았습니다. 하나는 러시아에는 어떤 희망도 없고 외 국으로 탈출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체념적 정서를 보이는 사람들 이 있었고요. 그리고 강대국이자 제국으로서 러시아가 갖고 있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정말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해서도 (그땐 전쟁 전이었는데) 특별한 조치를 취해서라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동아시아에도 이 런 정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 굉장히 광범위 하게 퍼져 있는 어떤 체념적 정서가 있는 것 같고요. 그러니까 말 씀하신 동아시아 모델에 대한 기대가 좌절된 데서 오는 배신감이 랄까 그런 정서. 동시에 전투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강력한 민 족주의 정서가 청년 대중 안에서 활발하게 뿜어져나오고 온라인 에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도 현대사회에서 의미 상실 그 리고 일상생활에 대한 설명 부재에서 오는 서로 다른 반응인지 궁 금합니다. 같은 뿌리에서 온 다른 반응인지 아니면 조금 종류가 다 른 사회적 여론의 반영인지도 모르겠고요. 저는 그런 맥락에서 동 아시아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K-pop 팬덤 문화에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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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 당연히 중국에도 이 문제가 존재합니다. 한국에서도 많이 들어보 셨을 텐데요. 샤오펀훙小粉紅(리틀 핑크)이라고 하죠. 연령대로 보 면 1990년대생 이하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2020년부터는 네이쥐 안이라든가 탕핑躺平 같은 유행어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N포세 대, 달관세대라 불리던 현상과 유사하죠. 그런데 두 그룹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첩이 없지 않으나 인구 구성으로는 대체로 경제사 회적 조건에 따라서 나뉩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그룹은 대략 25세 이상의 사람들입니다. 첫째, 탕핑이나 네이쥐안을 말하는 이들은 전반적으로 사회경제적 조건이 좋은 사람들이에요. 도시에서 살 고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더 높은 계급으로의 신분 상승을 추구하다가 좌절을 겪으면서 이런 반 응을 보입니다. 앞으로 1~2년 내에 이런 사람들이 더 급격히 늘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팬데믹이 이 경향을 가속화할 겁니다. 두 번째 경우는 애국주의자, 샤오펀훙입니다. 원래는 숫자가 좀 많은 편이 었는데 지금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요. 숫자가 줄어드는 대신 주장과 자기 논리는 좀더 극단화되고 있습니다. 이 그룹은 농 촌 기층 출신 청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동아시아 서사 안에서 자기네가 처한 상황에 대한 불만이 많고 존엄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처한 현실에서 뛰쳐나오는 환상을 제 공하는 게 바로 강대국에 대한 상상인 거죠. 방금 말씀드린 건 25 세 이상의 그룹에 대한 것이고요. 좀더 어린 친구들, 18세에서 25 세 사이의 청소년들, 아직 학생이거나 막 학교를 졸업한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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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런 경향들이 모호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좋은데 도 중국이 강대국이 되길 바라는 정서를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앞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자면, 같은 역사적 맥락에 처해 있지만 다른 사회경제적 배경을 갖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죠. 근본적인 원인은 같습니다. 자기 일과 생활의 구체적인 조 건과 상황 속에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탕 핑 같은 경우 그럼 이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하겠어요.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은 별로 선택지가 없습니다. 집에 돈이 좀 있고 조건 이 되는 사람들은 이민을 가고 싶어하죠.
그래서 제가 최근 몇 년간 사회적 대화를 통해 강조하는 게 ‘부 근’이라는 개념입니다. 청년들이 자기 주변을 다시 깊이 있게 검토 해볼 수 있도록 하자는 겁니다. 만일 주변에 문제가 있다면 이 문 제를 구체적인 방식으로 명확하게 설명하고 어떻게 이 문제를 직 면할 것인지 생각하는 겁니다. 당연히 대부분의 젊은이가 수많은 문제의 해결은 자기 능력 밖이라고 느낄 겁니다. 여기에 학자나 예 술가들이 개입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개인으로서도 여러 방면에 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해줘야 합니다. 어떻게 개 인의 노력과 자기 생존의 전체적 상태에 대한 결정 사이에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알게 해야 합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 서 모두가 자기 부근과 일상생활 속의 구체적인 문제 및 모순을 재 발견하도록 고무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문제와 모순을 통해서 만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노력의 방식도 더 명확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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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으면 뒤로 물러나 탕핑을 하든지, 거대한 그림 속에 길을 잃게 됩니다.
시: 이제 좀 민감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샹뱌오 선생님 개인적으로 는 전 세계적인 반중 정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 궁금하고요. 중국 내에서도 해외의 반중 정서에 진지하게 대응하고 논의하는 분위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샹: 일단 중국 청년들의 반응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요, 외국의 반중 감정에 대해서 확실하게 의식하고 있고 기본적으로는 더 강하게 맞서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중국을 비판 하는 외부 논리들은 일종의 음모다, 그리고 불공정하다 혹은 중국 의 굴기에 대해 질투심을 느끼는 거다,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제가 한 대학생과 얘기를 해봤습니다. 예전에 중국 사람들이 해외로 나 가면 대접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들 중국인이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니 우리를 추앙해서 왔구나 생각했다는 거죠. 지금은 중국 여 행객들이 돈을 많이 쓰니까 역으로 질투하는 느낌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을 반대하는 해외의 시각이든 아니면 이 에 대한 중국 내의 시각이든 서로 악순환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 어요. 또한 앞으로 러시아 사람들을 해외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 가에 대해서 좀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을 넘어 비난하는 형식으로 접근하면 일반 러시아 민중은 방어적으로 나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외부에서 공격할수록 내부적으로는 더 단 결하기도 하고 대응 담론을 강화시킬 가능성도 높지요. 그러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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툼이 아닌 교류를 하고 어떻게 차분하게 대화하는 방식으로 얘기 를 풀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중국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반중 감정에 대한 중국 내 반응을 보자면요, 일단 중국 외교부 대변인의 발언 방식 같은 게 있죠. 이 를 전랑외교라고 부르는데, 이런 공격적인 대응이 외부의 반중 정 서를 오히려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중국 외교부 대변 인의 발언 방식도 앞서 설명한 잔혹한 도덕주의의 틀로 분석하려 합니다. 우리 솔직히 까놓고 얘기해보자. 나는 성과를 내고 있으 니 진정성이 있고, 도덕적이야. 반대로 말만 앞세우는 너는 위선적 이야라는 식의 반응이죠. 저는 중국이 대국으로서 자기의 실제 능 력과 위치, 역할에 대해 좀더 설득력 있는 이론과 방안을 내놓아 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이 자기 상황과 미래의 방향에 대해서 해석하고 설명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보니 손쉽게 대립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이게 외부에서는 공격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 중 국의 확장 욕망으로 해석돼 공포의 대상이 되는 거죠.
이: 『방법으로서의 자기』라는 책 제목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가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중국 지식인들, 그러니까 동아시아에 천 착한 쑨거, 왕후이 선생님이나 천하를 이야기한 자오팅양과 확실 히 결이 다른, 신세대 지식인이 등장했다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자 기를 방법으로 한다는 발상도 신선했습니다. 한동안 중국 학계를 눈여겨보지 못했는데 그사이에 이런 흐름이 생겼구나 싶어 반가 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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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1990년대에 대학에 진학한 저와 같은 X세대가 등장했을 때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페미니즘 맥락에서 개인과 일상 의 문제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대화를 강조했고요. 이 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K-컬처의 주역이 되기도 했죠. 그런데 이 때 태어난 Z세대가 지금은 2030세대로 자라나 샹 교수님이 말씀 하신 많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또 이들이 발하는 상호 적대 와 혐오감의 정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합니다. 이 역설을 어떻 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샹 박사님이 제기 하는 방법론은 그럼 포스트-포스트모던으로 봐야 합니까?
샹: 굉장히 좋은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이 질문의 의미는 우리 책을 단 순히 현재의 한·중 관계 프레임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역 사 진화의 프레임 안에 놓고 이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말씀하신 역사는 역사의 변증법을 보여주 기도 합니다. 말씀하신 1990년대의 개인과 대화는 개인의식의 각 성을 강조하고 페미니즘과 연계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반성적 사 고와 경험을 통해 권력 구조를 비판합니다. 이 상황과 담론은 아마 1990년대 이래 한국의 정치경제 구조 자체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겁니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이 해체되면서 IMF의 조정을 통해 금 융화가 일어납니다. 원래 진보의, 개인을 강조하는 담론이 아마 일 종의 개인주의 담론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 개인주의는 자신 의 반성적 사고를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외재적으로 주어진 것 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개인이고, 자기 주변과 세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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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개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비 판적 개인주의가 태생적인 절대화된 개인주의가 된 겁니다. 이런 개인주의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 다. 왜냐하면 세상과 사회는 단순한 개인들의 합이 아니거든요. 반 드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아이 들이 이런 담론 속에 놓이고 매우 잔혹한 혹은 단순화된 도덕적 요 구 안에 놓입니다. 이런 역사적 발전의 맥락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철학적 의미에 대한 질문,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에 대한 말씀이 참 재미있는데요. 우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1990년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이라면요, 이 시대는 자신들이 선택 하거나 투쟁해서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 환경 속에 태어난 것이죠. 이 시기에는 이미 큰 노동조합이나 사회운동이 없었죠. 개 인화되고 자산화된 세상입니다. 그래서 안정적인 의미를 갖지 못 하고, 이들이 이걸 반대하면서 문명론, 전통, 사람의 본성으로 돌 아가게 됩니다. 젠더에 대해서도 남성은 이렇고, 여성은 이렇다는 본질주의적인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 본질주의는 1950 년대 이전의 전통적인 본질주의와도 다릅니다. 여기서 다시 두긴 으로 돌아가는데요, 두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남성이다. 그리 고 너는 여성이라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 소 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나의 문명은 내 언어를 통 해서만 설명이 가능하고 이해받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충돌하 면 오로지 폭력을 통해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여기서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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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의 깊은 영향을 볼 수 있습니다. 제 책은 이 문제를 지적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요. 절대화된 자아를 내려놓고, 마음을 열고 경험과 반성적 사고를 통해 실증적empirical으로 자아를 재구 성할 것을 권합니다. 실천을 통해 실현하는 자아입니다. 그래서 제 책의 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모더니즘입니다. 안정적인 실증을 강조하고 이성으로 세상을 이해할 것을 권합니다. 좋은 질 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 저는 중국식으로 90허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94년에 태어났 고 제 경우는 정말 의식이 있을 때부터 인터넷을 하는 것이 정체 성 형성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항상 인터넷과 연 결이 돼 있었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스마트폰을 쓰면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자아가 거의 일치된 상태로 살았던 것 같아요. 제 주변 의 또래들도 다 이렇게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해주신 ‘부근’에 대한 감각 그리고 자기 삶의 구체적 경험과 거기서 의미 를 찾는 데 있어서 온라인 세상이 굉장히 부정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상 오프라인의 현실이 온라인 세계에 포획된 느낌이고, 진짜 삶은 SNS 안에 존재하는 것 같아요. 현실 에 대한 조소와 냉소 같은 태도가 청년층 안에서 광범위하게 유통 되고 있고 이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그런 상황 에서 자기 주변의 삶과 경험을 상실한 이들이 엔터테인먼트라든 가 민족주의에 빠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온라인 기술이나 온 라인 미디어 환경에 대한 관점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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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 생태계를 갖고 있는 나라로서 중국 청년들과 온라인 문화 그 리고 그들의 일상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샹: 저도 이 문제를 굉장히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다. 중국 혹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야말로 이 인터넷 문화가 굉장히 압도적인 영향력 을 끼치고 있는 상황이죠. 그 변화도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습 니다. 우리가 예전에 생각하던 단순한 문화 현상이나 교류의 도구 역할을 이미 뛰어넘어 새로운 경제를 만들어가는 담지체가 됐습 니다. 자본이 가장 많은 이윤을 얻는 새로운 소스이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자본이 가장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것이 플랫폼 경제이고 새로운 비즈니스 모 델입니다. 플랫폼이 필연적으로 청년들을 포함한 우리의 사회관 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요. 사람들이 보는 콘텐츠, 뉴스가 빅데이 터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당신의 취미가 뭐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지, 정동이 무엇인지에 따라 예측하기 때문이죠. 이게 엄청나게 큰 문제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정보와 자본, 감정이 결합해 사람과 사 람 그리고 사람과 사회, 즉 사람과 주변의 관계를 압도하고 통제하 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인터넷상의 토론이나 논쟁이 상 당히 극단적이 되죠. 사람들이 감정에 휩쓸리면서 이성을 압도하 고, 받아들이는 정보 자체도 감정에 의해 필터가 되는 상황이 벌어 집니다. 그렇게 객관적인 정보라는 게 의미가 없어집니다. 또, 문 제의 배후에 자본이 있어서 상황을 악화시키죠. 인터넷이 여러 상 징과 기호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거기에 휩쓸리면서 의미를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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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려고 하는데요. 저는 여전히 사람들이 자기 부근을 돌아보고 실 증적으로 생활의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으로 이런 상황을 타개하 고 저항할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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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대담
시: 오늘은 일반 대중이 궁금해하는 것들 위주로 여쭤보겠습니다. 샹뱌오 선생님께서는 청년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걸로 알
고 있는데요. 과거 세대와 달리 경제적 풍요를 누리며 성장했다는 점에서 현재 중국이나 한국의 청년들은 비슷한 점도 있는 것 같습 니다. 중국의 청년 문제를 경제적 문제와 도덕적 문제로 나눠서 설 명해주실 수 있는지요.
샹: 두 가지 문제 다 존재합니다. 서로 연결돼 있다고 볼 수도 있고요. 겉으로 보기에는 도덕 문제지만 실은 경제 문제에 더 가깝다고 생 각합니다. 매크로한 환경을 볼 때, 지금까지의 중국 성장 모델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즉 수출과 제조업, 가공업 위주 이고, 국가가 인프라에 많은 투자를 해서 GDP가 급속히 성장하 는 상황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중국 속담에 ‘물이 불어오 르면 배도 떠오른다’는 말이 있는데요, 개인이 특별히 노력하지 않 아도 주변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이익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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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대는 지났고, 또 지금 국제관계가 굉장히 복잡합니다. 중 국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 속에서 경제적 문제들도 있습니다. 지금 의 경제적 문제는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입니다. 앞으 로 내가 5년 후에 어떻게 될까, 경제적 안정을 계속 누릴 수 있을 까에 대해 청년들은 불안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안감 때문 에 인터넷 같은 데서 여러 사회적 논쟁이 벌어집니다. 겉으로 보기 에는 뭐가 맞고 틀리고 식의 도덕적인 논쟁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잔혹한 도덕주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젊은 이들이 도덕적인 혹은 의식의 미망에 빠져 있다고 할 때, 이건 도 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논 쟁이 실은 고도로 ‘도덕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경제 상 황이 악화되는데 희망을 갖기 힘들다는 것이죠. 그러니 정서적이 고 감정적인 반응이 생겨납니다. 그러니 가장 큰 문제는 도덕의 결 핍이 아니라, 도덕적 요구와 실제 상황이 유리되는 것입니다. 결과 적으로 이에 대한 반응이 극단화됩니다.
결국 해결책은 경제적인 측면일 것입니다. 지속 가능성에 중점 을 둔 대안적인 경제 발전 모델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사회에서 제 시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중국 사회도 여느 나라와 다르지 않습니 다. 지속 가능한 경제로의 변화는 어떤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보 자면 모든 사람이 다 큰 집, 고급 아파트를 원하고 자기 차를 갖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특히 중국처럼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는 이런 요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거죠. 모두가 표준적인 중산층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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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구할 수 없습니다. 중국 내에서도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구체적으 로는 귀농하는 사람들도 있고 향촌 진흥이라는 정부 정책도 있습 니다. 또 도시에 살면서도 이미 5~10년 전부터 중국 전역에서 진 행되어온 마을 만들기와 같은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 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경제 모델들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시: 말씀하셨던 도덕적 논쟁의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주실 수 있는지요.
샹: 두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짐작하시겠지만 샤오 펀훙과 같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이야기죠. 새로운 경제적 환경 이 사람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서 생활의 의미를 상실하 고, 그 대체재로 국가와 민족에 대한 대서사들을 찾게 됩니다. 여 기서 문제는 이 담론이 굉장히 공격적이라는 겁니다. ‘나는 애국자 다’라고 주장을 하는데요, 내가 나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거 는 사실 개인의 문제일 뿐이죠. 그런데 다른 사회 성원들에게도 같 은 요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상대방이 애국자가 아니고 민족을 사 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공격합 니다. 두 번째 사례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들입니다. 한국도 그렇지만, 중국도 인구 감소가 문제 되고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도 입된 새 정책에 따라 세 자녀까지 낳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에게 아이를 더 낳을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겼 습니다. 같은 이유로 이혼율을 낮추기 위한 이혼 숙려 기간 제도가 도입됐습니다. 이혼을 요구했을 때 바로 수리해주는 게 아니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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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유예 기간을 뒀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에 가정폭력 문제가 발생 하면서 여성들이 위험에 처하는 사례들이 나타납니다. 여성이 아 이를 더 낳아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있는 가운데 여성들이 육아 에 부담을 느끼고 일하는 여성이라면 부담은 더 커집니다. 이런 부 담 때문에 여성들이 불평하는데, 이건 아직은 육아 환경이나 가사 부담의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 여론까지는 아닌 개인적인 수준입 니다. 그런데도 너는 출산과 육아 부담을 회피하는 이기적인 인간 이다, 이런 식의 도덕적 비난을 합니다. 지금 나라의 인구가 줄어 들어서 경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데 개인이 사회적 책임 을 다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거죠. 이 여성은 일종의 이기적 괴물 로 취급받기도 하고, 서구 백인 여성들의 영향을 받았다며 비난이 가중됩니다.
시: 말하자면 보통 여성에게 왜 인민과 국가를 위해 복무하지 않느냐 는 도덕적 압력이 가해지는 것이군요.
샹: 정확하게 표현하고 싶은데요. 이건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화’ 의 문제입니다. 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선택이 고 개인의 문제인데 사회가 이를 도덕화합니다. 실제 도덕이 아니 라 사회경제적인 개인의 선택의 문제일 뿐인데 사회 전체가 이를 추상화하고 도덕화하는 것이죠.
시: 『방법으로서의 자기』에서 본 ‘모Morality 선생’70 이야기가 생각납
70 제1부 베이징 방담 ‘베이징대학 학생이 느끼는 초조함’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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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도덕과 도덕화를 구분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좀 낯선 개념이 네요.
어쨌든 이왕 여성 문제가 나왔으니까 바로 여쭤볼게요. 「두긴 을 말하다」 팟캐스트는 공개한 지 일주일 만에 1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들었더군요. 여기서 가장 ‘좋아요’를 많이 받은 댓글이 인 상적이었습니다. ‘이런 정복, 확장, 야성론과 같은 언어와 사상은 느낌상 전 세계적으로 남성들이 정치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그래서 더 많은 영토를 얻고 싶어하고, 전쟁을 일으 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중국의 페미니 즘 현황이 어떤지도 궁금합니다.
샹: 저는 중국 내의 여성주의 토론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 다. 왜냐하면 페미니즘 논쟁이 여성이 남성을 공격하기 위한 게 아 니라 가부장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어떻게 해체하거나 재조직 할 것이냐에 대한 질문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이 그런 측면을 정확 히 이해하고 사회의 진보를 위해 함께 논의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이건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매일매일 부딪히는 구체적인 생활의 문제거든요.
댓글에 대해서는 조금 비판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치를 장악한 것이 생물학적 여성이냐 남성이냐에 따라서 그 폭력성이 결정된다는 것은 실증적으로 말하기 쉽지 않은 명제입니다. 역사 적으로 여성이 정치를 장악한 사례가 너무 적기 때문이죠. 또 사회 적 발언권 측면에서도 여성의 비중이 적기 때문에 공론장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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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목소리가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반례도 충분히 많습니다. 마거릿 대처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되겠죠. 인디라 간 디, 힐러리 클린턴, 콘돌리자 라이스는 어떻습니까? 모두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념적 입장이든 정치경 제적 디테일을 생략하고 문제를 단순화시키면서, 기호화된 적을 찾는 순간 오류의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좋아하던 시절이 있지만, 인종 문제가 더 악화돼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 Matters’ 운동 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인종뿐 아니라 금융기술 엘리트와 농민, 공 장 노동자들 간의 빈부격차, 문화자본의 차이가 확대되는 정치경 제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흑인이 백악관에 들어갔 으니 상징적으로 인종 문제가 많이 해결될 것 같다는 도덕적 선언 을 한 건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오히려 트럼프가 등장했죠. 복잡하 고 구체적인 경제와 인종 문제를 직시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 한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정학은 지정학의 논리가 있는데 이것을 바로 젠더 문제로 치환하는 비유는 적절하 지 않습니다. 안티페미니스트들이 도덕화, 추상화를 통해 논리적 비약을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죠.
시: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런 도덕화 문제는 중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적인 현상이군요.
샹: 보편적인 문제라고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고요, 다만 미국과 유럽 에는 분명히 이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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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원래 정부의 프로파간다에 도덕적이고 추상적인 얘기들이 많 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변화한 지점이 지금은 오히려 민간 이 자발적으로 이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거예요. 여성주의든 애국주의든 물론 정부가 일부 부추기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실제 벌어지는 양상은 민간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별, 시대 별로 상황이 좀 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
시: 샤오펀훙 문제를 보면 아무튼 중국에도 애국주의 세력이 적지 않 고, 그래서 한·중 청년 세대들의 인터넷 충돌이 심각해지고 있습 니다. 지금 중국 청년들이 시진핑 체제, 현 중국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떻습니까?
샹: 일관된 건 아니고 상황에 따라서 계속 변화하고 있다고 느껴집니 다. 과거에 상당히 많은 지지자가 있었던 건 사실이고요. 그중에는 청년이 많았어요. 그런데 지난해부터 청년들 중에서도 여러 관점 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터넷 플랫폼 기업과 게임 및 엔터테인먼 트 산업에 대한 통제가 있었고요, 신동방같이 교육 사업을 하는 대 기업들의 업무를 모두 제한했죠. 그때부터 지지 입장을 철회하는 청년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가장 최근에는 상하이 록다운 문제 때문에 불만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 정확한 지지율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시: 민감한 질문에 답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국도 불평등 문제가 심각합니다만 최근에 한국에 『보이지 않는 중국』이라는 책이 번역 출간됐습니다. 도농 격차를 포함해서 중국의 불평등 문제도 심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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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 문제가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요. 샹: 불평등 문제의 사회적 영향은 동아시아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생 각합니다. 사회는 불평등한데 배제성을 갖지 못합니다. 전형적인 서구 사회는 불평등이 명확한 계급 분화를 가져오고 이때 계급 간
에 배제성을 갖게 됩니다. 이를테면 영국처럼 계급이 명확하게 나 뉘어 있는 사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름의 계급의식에 기반한 문 화와 정치적 요구를 갖게 됩니다. 불평등 문제가 서로를 배제하는 계급을 만들고 계급끼리 갈등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요구 가 형성되는 거죠. 저는 독일로 이주하기 전에 영국에 있었는데요, 아시는 바와 같이 영국 노동계급의 문화와 중산층, 귀족 문화가 모 두 다릅니다. 폴로, 럭비, 축구 이런 식으로요. 즐기는 음악도 다릅 니다. 노동계급은 자기만의 문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계급의식을 갖고 계급 정당 안에서 정치적 요구로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발 전이 있었던 것이 서구의 역사입니다. 한·중·일의 경우에는 이 게 모두 한 통 안에 있다는 거죠. 계급의식도 생기지 않고 최상층 부터 최하층까지 통하는 소위 ‘국민XXX문화’가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경제적·사회적 권력의 계급 분화가 이뤄졌는데도 말이 죠. 중국은 그렇습니다. 이건 한국이나 일본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최하층의 기층 민중조차 노력하면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런 믿음이 생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대 중문화가 영향을 끼치는 라이프스타일 때문입니다. 돈이 많은 사 람이나 해외의 명문 대학으로 유학을 간 사람이나 시골의 매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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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한 지역 농민들이나 모두 틱톡을 사용합니다. 물론 이건 인터넷 의 특수한 오락문화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같은 문 화 안에 있다는 얘기는 같은 이상을 추구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 다. 자연스럽게 계급 정치, 계급 문화가 형성되지 않고, 모두 상향 이동하려 하고 다들 중산층이 되고 싶어하는 거죠. 그러자면 노력 을 해야 하고 자신의 현재 상태에 영원히 만족하지 못합니다. 만인 대 만인의 경쟁이 지속되는 이런 상황을 네이쥐안involution이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심리적 압력에 노출되어 있는 이런 상황은 중화권과 동아시아 국가 특히, 한·중 모두 비슷한 상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 이 말씀은 우리 한국과 너무나 일치되는 이야기네요. 이른바 메리 토크라시가 한국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얼마 전 샹뱌오 선 생님도 마이클 샌델 교수와 미국과 중국의 능력주의에 대해 온라 인 토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한두 가지 정도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불편하면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한국은 정권 교체기인데 새 정부가 반중 지 향을 뚜렷이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샹: 제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 답하지 못하겠습니다.
시: 예, 좋습니다. 이번 대담의 주요 취지는 중국 지식인 사회와의 대 화인데요. 어쨌든 중국 지식인 사회가 과거에 비해 활기가 떨어진 게 아니냐는 말이 한국에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의 지식인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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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많이 줄었고요. 현재 중국 내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에 대해 여 쭤보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지금 중국 지식인 사회의 논 의를 전혀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샹: 일단 중국의 지식인 사회가 활력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건 당연합 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부정적이죠. 출판도 검열 문제 때문에 제약을 많이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 1990년대에 왕후이, 쑨거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담론이 있었는데요. 다음 세대 학 자들 중에 여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고 있어요. 저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중국 정부가 국가 비교연 구에 자금을 많이 투입해서 중국 내에서 해외 지역학 연구는 활발 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등 각각의 지역에 대한 것입니다. 이건 일종의 진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지역학을 계승하는 거죠. 그런데 이건 특별 하긴 합니다. 톱다운 방식을 통해서 정부가 발주하는 것이니까요. 두 번째는 중국과 바깥세계 사이의 갈등입니다. 이게 영향을 끼쳐 서 중국 학자들이 동아시아나 다른 국가들과의 교류의 기회가 줄 어들고 있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흥미롭게 관찰하는 것은 학 자들이 사적인 공간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사회 문제에 대해 토 론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론장이 물밑으로 잠수했다고 나 할까요. 어느 순간 이렇게 묵혀둔 생각들이 부화되면, 환경이 나아졌을 때 사상적으로 좋은 것들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적하자면, 제 관찰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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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사상계도 상당히 침체돼 있는 듯합니다. 물론 중국과 다른 문제 때문일 텐데 일본 사회에도 많은 갈등과 모순이 잠재해 있는 것으 로 보입니다. 일본 지식인들도 대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요. 이렇 게 전반적으로 폐색 상황에 놓여 있을 때가 오히려 사상의 재도약 이 일어나기 전의 단계가 아닌가, 이런 느낌적 느낌도 있습니다.
시: 마지막으로 간단한 질문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혹시 기회가 된다 면 중국에 가서 연구하거나 활동할 생각이 있으신지, 그렇다면 어 떤 연구와 활동을 생각하시는지요.
샹: 팬데믹 때문에 저도 2, 3년째 귀국을 못 하고 있는데요, 구체적으 로 뭘 연구해보고 싶다는 것보다, 굉장히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것을 인터넷으로밖에 보지 못하니까 답답한 점이 있습니다. 직 접 보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시: 오히려 밖에 계시니까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보실 수도 있을 것 같 습니다.
샹: 맞습니다. 갈등이 많고 감정적이 되니까요. 거리를 두고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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