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05

‘보통 사람’으로서의 ‘낭만주의자’ _ 샹뱌오를 읽은 소감 우자한 연세대 국문과 박사과정

 [부록] ‘보통 사람’으로서의 ‘낭만주의자’ 

_ 샹뱌오를 읽은 소감, 우자한 연세대 국문과 박사과정


1. ‘보통 사람’이란 무엇인가?


  서양 정치학에 따르면 국가state를 구성하는 내부적 층위는 끊임없이 유동해왔다. 그것은 서로 다른 시대와 체제, 다양한 상황적 흐름에서 영토, 민족 공동체, 억압적 국가기구, 행정기관 등 각양각색의 판단 기준에 따라 끊임없이 고쳐 쓰인다. 서구에서 연원한 국가에 관한 규정은 일찍이 사회society와 국가를 구분하거나, 정반대로 사회를 국가 시스템 범주에 유기적으로 연계시킴으로써 민생의 개선을 추구하려던 학자와 정책 입안자들에게 차용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 이래 중국에서 시민사회의 조성, 정경 분리, 당정 분리 등의 담론이 성행하고 관련된 정치 제안이 출현한 것은 이러한 이념 성향에 직결된다. 

  그러나 힘겹고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중국인들에게 ‘성숙한 사회’라는 기획은 전혀 관심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사회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공간이며, 국가는 ‘승인’을 해주는 존재다. 사람들은 온갖 방법으로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고심한다. 이는 고도의 동질성을 띤 국가의 지속적 부상에 힘입어 개인적 삶의 안락함도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고도의 동질성을 지닌 ‘국가’의 개념이다. 미시적 통치 기구들로 이뤄진 국가체계의 실체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국가’는 추상적인 이미지이며 형이상학적 기호에 가깝다. 그것은 지고한 도덕규범과 정의감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일부 중국인이 가시화된 정부, 특히 지방정부와의 갈등에 놓여 있을 때나 자신의 이익과 권리가 권력과의 충돌에서 크게 손상될 때마다 이런 신뢰받는 국가의 ‘초월적 심판력’과 도덕 담론이 지방정부를 때리는 도구로 불려 나오곤 했다.

  이와 관련하여 샹뱌오는 말했다. “그들은 한편에서 중앙정부(추상적인 국가 이미지―인용자)의 정책을 윤리적 비판의 무기로 삼으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무엇보다 지방정부가 짊어져야 하는 책임을 크게 부각하여 지적한다. 도덕의 화신으로서의 ‘국가’와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가 씨름하는 대상인 ‘국가’의 공시적 병존과 교체라는 것은 그들의 행동 전략의 핵심 원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처럼 국가에 대해 이중적 개념을 갖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추상과 실존의 지대를 넘나드는 주체를 샹뱌오는 ‘보통 사람’이라고 부른다. 대립선의 교차로 유발된 문란과 역동성, 내재적 긴장이 충만한 이중적 국가 인식, 이것이 바로 보통 사람의 ‘국가’ 이론에 접근하는 데 조명되어야 할 매우 중요한 요건이다. 

  샹뱌오는 보통 사람이라는 ‘모델’을 의미론적으로 설명하고 명확히 정의하기보다 국가와의 관계를 제시하여 그것의 개념을 간접적으로만 규정했다. 여기서는 지방정부라는 가시적 행정기관이든 자의적으로 구축된 ‘머릿속의 국가상’이든 국가는 자립적인 게 아니라 항시 보통 사람과의 역학 관계를 통해서 자리매김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국가’ 이론」이란 논문의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통 사람’을 규정하는 데 동원되는 기준이나 관계의 다른 축이 ‘국가’ 이외에 더 숨겨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보통 사람의 동전 이면에는 엘리트가 존재한다. 엘리트와 보통 사람의 국가 인식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엘리트가 국가를 여러 층위로 구획된 구조물로 여긴다면 보통 사람의 국가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산만한 형태로 흩어져 있다. 그럼에도 샹뱌오는 엘리트를 보통 사람의 대척점에 놓지 않았다. 이유는 두 부류의 국가 인식이 각각 유럽(엘리트)과 중국(보통 사람)의 역사·지정학적 요인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결과물일 뿐이며 사회 계급적 대립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엘리트는 보통 사람의 국가 개념 형성에 항상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는 점도 덧붙였다. 

  이 외에 논문 속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우리’라는 수식어는 연구자로서 샹뱌오가 자신과 보통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월경한 공동체跨越邊境的社區』에서 샹뱌오가 “나는 그저 그들의 기록원記錄員일 뿐이다”라고 고백한 것을 되새겨보면 그 관계가 무엇인지는 얼추 이해된다. ‘그들’은 저장촌浙江村 사람들이며 「보통 사람의 ‘국가’ 이론」에서 유일하게 제시된 ‘보통 사람’의 구체적인 예시다.

  보통 사람의 국가 인식을 ‘이론화’하려는 샹뱌오의 작업은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체계화하고, 이들의 행동 양식에 따라 상향식 접근법으로 국가의 여러 문제를 간파하고 미래의 발전 방향을 모색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국가 이론’에는 한계점도 자못 분명하다. 비록 ‘보통 사람’을 관계의 뒤얽힌 구조 속에서 다각도에서 개념화하고 있으나 여전히 한정적이며 모호하다. 

  “소위 보통 사람의 국가 이론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현실 속 일상적 실천에 의해 이루어진 국가 이론이다” 라는 논리에 따르면 일상생활에서 자기의식을 이론화, 행동화하는 주체라면 누구든 보통 사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샹뱌오가 말한 보통 사람은 보통 사람의 일부에 불과하다. 샹뱌오의 구도에서 보통 사람은 국가 기관으로부터 수동적으로 거리 두기를 당하면서도 지방정부 등의 국가 통치 기구와 이해 충돌에 빨려든다는 전제하에 등장한다. 정부와의 갈등이 어떤 온건한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못하는 상황에서야 도덕 상징으로서의 국가 이미지를 이용해 지방정부의 부당행위나 직무상의 과실 등 구체적인 문제를 ‘당당’하게 지적할 ‘기회’, 즉 보통 사람의 국가 이론이 현실화될 틈이 비로소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서술적 편의를 위해 이러한 특징을 갖는 보통 사람은 보통 사람의 A유형으로 지칭하기로 한다. A는 물론 보통 사람이지만 보통 사람이란 근원에서부터 A 말고도 여러 지류가 동시에 뻗어 나간다. 

  먼저 A와 정부의 갈등이 커지다가 다양한 언론 매체에 의해 화제성이 생겼을 때, 직접 사건에 개입하진 않지만 그 화제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도 보통 사람의 또 다른 유형(B유형)으로 간주할 수 있다. B는 자신과 국가 기관과의 분쟁이 그 시간대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A와 구분된다. 혹시나 사건이 극단적으로 전개되면 상황에 따라 ‘추상적 분노’가 집단적으로 폭발할 때도 없지 않으나 대개 B는 A의 ‘전투’를 인터넷의 댓글이나 일상의 수다로 만난다. 즉 방관하는 태도에 그친다. 

  거듭 음미해야 할 점은 정부 측의 문제가 더 크다고 여긴 일부 B가 불만·분노를 발산하면서 추상적이지만 절대적인 도덕 비판의 화신으로서의 ‘국가’ 담론으로 정부를 힐난할 때다. 이때 B의 행동 원리는 A와 매우 흡사해진다. 그러면 두 유형의 보통 사람 내부에서 공통으로 초월적인 국가 이미지가 구축될 가능성이 있다. A는 가시적 국가 기관과 쌍방향적이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B는 일방적이고 간접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같은 맥락에서 C유형에 관한 단초도 자연스럽게 잡힌다. A, B와는 달리 C는 정부와의 다툼이 사건화될 때 ‘부재不在’한 사람들이다. 간단히 말해 자신의 삶과 멀리 떨어진 국가와 관련된 일에는 ‘무관심’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이 보통 사람의 C유형이다. C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는 침묵이다. 그 침묵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고 별 뜻 없는 단순한 무관심으로도 볼 수 있다. 다중 해설 가능성의 병존은 이것이 C유형을 빠져나와 다른 하위 유형으로 번식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부재 혹은 침묵 때문에 C의 ‘국가 이론’은 파악하고 서술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보면 국가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통 사람은 ‘고정적인 단일체’가 아니며 끝없이 분화한다. 물론 이 글에서 보통 사람의 수많은 유형을 일일이 거론하는 작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와의 만남에서 샹뱌오가 보통 사람에 대해 추가로 답변한 내용을 제시하기에 앞서 두 유형이 보여주는 양상을 더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 유형의 보통 사람에게 국가는 단순한 초월적 표징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강렬한 내부적 분열과 모순 그 자체이고 침묵과 격투, 부재와 허무의 촉발 장치이자 촉매제다.

  「홍콩을 직면하다: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란 논문의 서두에서 샹뱌오는 홍콩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두 가지 사건, 이른바 ‘중환 점령占中’과 ‘금종 점령占鐘’을 엄격히 구별했다. 2013년부터 홍콩의 대학교수, 지식인, 종교계 인사 등은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 선거법’으로 논쟁이 불거지는 와중에 중국 본토의 관계자들과 적극적으로 접촉해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자 애썼다. 만약 일련의 시도 끝에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면 핵심 상업·금융 지구인 중환中環을 차지해 정부에 압력을 넣는다는 것도 계획의 일부였다. “사랑과 평화로 중환을 점령하라讓愛與和平佔領中環”라는 구호로 처음 시작된 중환 점령 운동에는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다. ‘중환 점령’은 비폭력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을 택하여 선거법·자치권 관련 요구를 제기하려 한 점진적이고 장기지속적이며 조직화된 운동이었다. 

  반면에 ‘금종 점령’은 홍콩 정부와 경찰청의 충돌로 발단되어 2017년 9월 26일부터 홍콩의 정치 중심지인 금종金鐘 일대에서 학생이 주도했던 우발적이고 비조직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보통 ‘중환 점령’에 비하면 ‘금종 점령’이 다소 낯선 사건이라고 여겨지나 후자의 극적인 절정, 즉 선명한 상징성을 띤 우산을 펴서 거리를 누빈 시위, 이른바 ‘우산 운동’을 모르는 자는 거의 없다. ‘중환 점령’을 민주화 운동의 온건한 전략이라고 본다면 우산 운동의 폭발로 번진 ‘금종 점령’은 유혈 사태로 일단락된 ‘혁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중환 점령은 베이징을 대상으로 한 규모는 제한적이지만 목표는 거대했던 정치 운동이었고, 금종 점령은 상당 부분 홍콩 정부를 대상으로 규모는 크지만 목표는 제한적이었던 운동이었다.”  

  당시 각국 신문의 연이은 기사들은 홍콩을 포함한 세계의 여러 사람에게 두 운동이 같은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동일한 사건의 다른 발전 단계로 오인하게 했다. 하지만 사태를 본질적으로 파악하려면 전형적 사건사의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인위적으로 두 사건을 연결하기보다는 ‘중환 점령’과 ‘금종 점령’의 차별성, 내재적 균열성, 불연속성에 주목하여 왜 조직적 운동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고 오히려 유혈 사태의 한 시발점이 됐는지, 대규모로 전개된 우산 운동이 왜 아무런 결과를 남기지 못한 혁명이 되어버렸는지, 그 뒤에 이어진 2019년의 홍콩 민주화운동이 어째서 더 폭력적으로 전개됐는지 등에 대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물론 홍콩 사회의 대중운동을 살피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럼에도 홍콩의 민주화 운동에 관한 발생론적 고찰을 수행하는 데 하나의 기본적인 배경으로 작용한, 홍콩의 보통 사람과 국가의 관계를 간단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얼핏 보면 각각 홍콩과 중국 본토에서 삶을 영위하는 보통 사람에게는 제도를 비롯한 여러 면에서 대조적 양상이 나타나기는 하나, 국가와의 내재적 관계에서 보면 공통점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우선 위 내용에서 준별된 ‘중환 점령’과 ‘금종 점령’의 시위 주체를 보통 사람의 D유형과 E유형으로 기호화해보자. 같은 유형 내부의 상이한 하위 부류(D1, D2)가 아닌 아예 다른 유형인 것은, 두 운동의 행위 주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D와 E의 내면에는 국가 이미지에 대한 강렬한 의식이 똑같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표출 방식은 확연히 다르고 심지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 모순적·균열적 지형도를 그려낸다.

  중국 본토에서는 추상적 의미의 국가를 따로 부르는 말이 없다. 하지만 홍콩에는 있다. 일반적으로 홍콩 현지인들은 ‘보이지 않는’ 중국의 중앙정부를 가부장제 집안의 최고 권력자인 ‘조부’라는 의미에서 ‘아예阿爺’라 부른다. 이러한 ‘아예’라는 호칭은 홍콩인이 영국을 ‘가게 주인아줌마老闆娘’라는 의미에서 ‘스터우포事頭婆, Lady Boss’라고 부르는 것과 비교될 만하다. ‘스터우포’가 비즈니스로 맺어진 외부적 신분이라면 ‘아예’는 생물학적 가족, 즉 혈연집단 내부의 권력적 상징이다. 항상 ‘위엄스러운 표정’을 짓는 신비스럽고 다가가기 힘든 ‘아예’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피를 나눴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한 친화성도 있다. 따라서 여러 방법을 동원해 ‘아예’를 향해 자신의 요구를 들려준다는 것은 일부 홍콩인의 사고방식이 된다. 이런 사고방식의 결과가 D가 계획하고 실행한 ‘중환 점령 운동’이라고 단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D가 국가와의 갈등을 ‘가족 공동체 내부’에서 정치적 대화로 해결하려고 한 것은 분명하다.

  이와 비교하면 E는 과격한 거부와 투쟁으로 ‘아예’의 가부장 구조에서 탈출하거나 국가 이미지를 초월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E가 ‘아예’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것은 끊임없이 의식되는 대상으로 인해 발생한 ‘부작용’이 얼마나 심각한지 설명해줄 수 있는 증후에 가깝다. E는 ‘아예’가 부재한다는 점을 가상假像으로 삼고 ‘아예’와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결국 ‘집안의 문턱’을 뛰어넘지 못한다. 그들 중 일부는 ‘피해자 의식’에 시달리다가 결국 2019년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가해자’로 돌변해 충동적인 폭력을 표출하게 된다. 피해자의 집착과 과도한 자기합리화가 오히려 가해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여러 이유로 대중 담론에 가려져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진 D든, 한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의 주목을 받아 소위 ‘민주화의 전사’가 된 E든 간에 홍콩의 보통 사람에게 국가 이론이란, 도덕의 화신으로서의 국가와 갈등의 당사자인 국가, 이 둘의 역학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국가 이미지가 도덕과 정의의 상징이 되기는커녕 그 반대가 되어 경계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나 동시에 D와 E가 초월적인 그 무엇으로 국가를 인식하는 것도 사실이다. 홍콩 정부를 넘어 초월적 ‘아예’에게 말을 걸고 싶은 D, ‘아예’를 돌파해야 하는 표상으로 내세워 홍콩 정체성 복귀와 세계시민의 추구를 동시에 바라는 E, 이른바 홍콩 보통 사람의 ‘국가’ 이론도 그 어떤 엘리트적 담론으로 쉽게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홍콩의 예에서 보듯 보통 사람의 개념에는 고정불변의 의미가 없다. 보통 사람의 특징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언어, 교육 수준, 가정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변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보통 사람의 각 유형 사이에도 분명한 경계선은 그어지지 않는다. 평생 한 유형에 속할 수도 있고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근본적 변화를 겪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보통 사람이란 개념의 구조 밑에는 서로 대조적이면서도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의 동학이 기저로 깔려 있다. 그러면 계속 상대화될 수밖에 없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에 대해 샹뱌오는 ‘보통 사람의 국가 이론’ 발표에서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아래와 같이 답했다. 


“보통 사람을 일종의 입장이나 인식 방법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가 처음 제가 탐구하고 싶었던 주제입니다. 저는 보통 사람이 ‘입장적 의미’로도 ‘구체적 의미’로도 파악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입장적 의미에서는 보통 사람 · 국가 정부 · 지식 엘리트를 삼각관계의 구도로 연결해 해석했습니다. 국가는 정책 수립 과정에서 보통 사람을 끌어와 그들의 이익을 강조하는 담론을 내놓고, 보통 사람도 국가의 그러한 ‘약속’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주곤 합니다. 한편, 지식 엘리트도 보통 사람의 이익을 강조합니다. 지식 엘리트는 자신이 보통 사람을 대표하여 그들의 요구가 실현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삼각관계에서 보통 사람은 입장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동시에 보통 사람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저에게 가장 익숙한 보통 사람이란 중국 3선 도시에 살고 있으며 안정된 직장을 다니는, 즉 삶의 안정을 어느 정도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론서를 전혀 읽지 않지만 국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활발하게 펼칩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보통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하면 보통 사람은 제가 서술하는 대상이고 ‘군중’ ‘민중’ ‘백성’ 등과 구분된 중립적 서술 개념이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의 생활 양태는 가장 직관적인 생명 체험과 연결됩니다. 그중에 진리가 함축되어 있고 생명의 강인함과 생활의 파편성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처럼 보통 사람의 시각에 담겨진 일상생활의 여러 현상은 제가 실증적으로 관찰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보통 사람의 파편적인 생활 체험은 또한 제가 명확한 구조로 체계화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마지막으로 보통 사람이야말로 제가 꼭 대화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대화에서 보통 사람을 알아보고 대화를 통해 보통 사람에 관한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샹뱌오의 이러한 대답에서 먼저 살펴지는 것은 보통 사람 규정에 적용된 기준인 엘리트의 ‘윤곽’이다. 논문을 쓸 당시를 떠올리며 회고한 샹뱌오에 따르면, 엘리트는 자본가도 정치인도 아닌 지식인에 가깝다. 여기서 지식 엘리트는 보통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내연적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눠 구체화해야 하는 개념이다. 첫째는 이론에 의거하여 ‘위’에서 보통 사람을 조감하며 분석함으로써 보통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 내는 엘리트다. 이 부류에 속한 엘리트를 샹뱌오는 경계한다. “전문가로 자처하고 도그마에 빠져 연구를 수행한다면 결국 도그마 그 자체와 부속품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는 경고를 남겼다. 둘째는 보통 사람의 삶을 자신의 삶처럼 직접 경험하고 생활이라는 현장에서 ‘끝없는 대화’를 통해 보통 사람으로 구성된 인간군상을 스케치하는 엘리트다. 대화라는 방법론과 관찰에 근거한 세밀한 서술의 중요성을 역설한 샹뱌오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두 유형의 엘리트를 명확히 정의하고 보통 사람의 예시까지 제시했음에도, 샹뱌오의 설명은 보통 사람이라는 ‘전체적 개념’을 지향하는 건 아니다. 하나의 구체적인 공동체에 한정되어 있다. 보통 사람의 ‘국가’ 이론이 갖는 한계점도 여기서 비롯된다. 원인 중 하나는 나중에 샹뱌오가 다른 글에서 “나는 한참 동안 인간의 복잡성과 다면성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고 스스로 비판한 데서 찾아진다. 또한 보통 사람과 엘리트를 대립시키지 않는다고 강조하지만 그 사이에 쉽게 넘어서지 못하는 분계선이 그어진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때로 ‘엘리트주의’로 해석되기도 할 것이다. “당시 나는 순진하게도 ‘보통 사람’이라는 넓은 관점을 환원적으로 도출해내려 했다”고 말하는 샹뱌오에게는 ‘보통 사람의 국가 이론’은 아직 미해결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샹뱌오의 ‘보통 사람론’에는 두 가지 강점이 있다. 첫째, 무수한 구체적 유형이 짬뽕된 ‘보통 사람’이지만 이 ‘집합체’는 새로운 인식 방법과 입장을 제공한다. 중립적 서술 개념으로 활용되는 그것은 국가, 문화, 사회, 인간관계 등에서 보통 사람의 의식화된 경험과 체험을 제한적이지만 서술해준다. 둘째, 일상 속 실천과 대화의 역할을 부각시켰다. 일상생활이야말로 보통 사람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기 때문에 일상에서 얻은 기초 자료 없이는 어떠한 반영과 해설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보통 사람이란 주체가 세계와 부딪치면서 생겨나는 일상생활의 파편들을 하나의 유기적 형태로 그려내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 방법 중 으뜸이 바로 대화다. 이 대화는 개방적인 상호작용이며, 즉 주관과 객관의 온갖 형태로 ‘관계 간 체계’를 만들어주는 ‘태반’의 역할을 한다. 

  현상학적 환원은 생물학적·세속적·철학적으로 우리가 모두 보통 사람이라는 사실로 귀착될 뿐이다. 그런 까닭에 ‘엘리트주의’의 내재적 권력성과 독백성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고 탈피하려면, 보통 사람의 자기의식과 행동을 관찰하고 삶에 감추어진 고유한 미학을 탐구하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 방법은 외부적 규정을 통해 ‘질서의 파도’를 도도하게 밀어내는 게 아니라, ‘방법으로서의 자기’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처럼 관찰의 주체가 철저하게 ‘보통 사람으로서의 자기’가 되어 생활하고 실천하는 것에서 직접 찾아내야 한다.


2. ‘쯔차自洽’는 어떻게 가능할까?


  샹뱌오와 우치의 대화에는 흥미로운 화제가 많다. 그중 하나는 ‘완전체’를 이룬 인간의 상태에 대한 샹뱌오의 견해다. ‘완전체’로 번역된 중국어 ‘쯔차自洽’(자흡)는 물질적·정신적인 시공간에서 ‘자기自’가 스스로 즐기면서 생겨난 ‘아늑하고 유쾌한 내면적 상태洽’라는 뜻이다. 매우 이상적인 이런 심리 상태가 현대사회에서 과연 가능할까?

  자본주의의 물화 현상에 노출된 현대인의 일상생활은 온갖 무의미한 허상으로 채워져 “내 행동은 과연 내 신념에서 나오는 것인가?” 라는 회의懷疑에 더 익숙하다. 1930년대 『화관花冠』이란 소설에서 ‘정신적 고아’ 들이 겪는 세태를 섬세히 묘파한 이태준이라면 오늘날 인간이 보여주는 갑작스러운 흥분과 허무의 왕복운동에 대해 여러 ‘비가시적 신들’에게 놀림당하는 ‘정신적 인형’의 수동적 행위를 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서 자기의식을 제거한다는 것은 그의 생명의 원리, 인격의 효모와 소금을 제거하는 것이다. (…) 자기의식을 파괴한다면 거기서 고분고분한 원숭이가 태어날 것이다” 라고 말한 알렉산드르 게르첸의 말은 ‘원숭이로의 이행’을 자각조차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외부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쯔차’적 삶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물질과 정신의 반비례 관계에 의해 자기의식의 폭이 계속 축소되고 있는 이 시대의 ‘보통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원숭이에서 다시 인간으로 돌릴 수 있을까라는 문제는 충분히 위기의식을 갖게 하는 중대한 딜레마다.

  이 문제에 대해 샹뱌오는 ‘쯔차’ 상태로부터 파생된 거리감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혼자라도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고 정신적으로 만족한다면 개인의 가치를 압살하는 세계를 전도시킬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의 자기’가 바로 이 해결책의 핵심이다. 그러나 ‘지금-이곳’에서 ‘쯔차’가 어떻게 가능할지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샹뱌오와의 만남에서 이 부분을 물어보았다. 그는 ‘쯔차’의 의미를 새삼 강조하며 ‘쯔차’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기본적 조건을 덧붙였는데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저는 자신감, 독서, 개방적인 대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주 평범하지만 마음먹으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는 대안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 가지 조건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만으로 무턱대고 실천하다 보면 그것이야말로 ‘정신적 인형’이 되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안전한 방법은 ‘나’의 지식과 경험으로 ‘너’의 말을 이해해보고 ‘나’의 방식으로 ‘너’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선 일상생활에서 자기를 성찰하고 그러한 의식을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 즉 앞에서 세속적이지만 철학적인 ‘보통 사람’의 입장으로 자신감을 획득하고, 독서하고, 개방적인 대화를 하는 이 세 가지 일상적 행위에 숨겨진 작동 원리 내지는 미학 작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들 각각은 서로 어떤 관련을 맺어 ‘쯔차’ 상태에 이른다는 것인지도 살펴봐야, 샹뱌오의 방법을 자신의 이론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것을 문자화하는 과정에서 자기를 주·객관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자기의식을 조형(造形)하거니와 순간적이지 않고 계속 의식을 반영하는 실천을 할 결심을 낳게 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는 ‘쯔차’ 상태로 대변된 생활 미학의 기본적 특징들을 면밀히 도출하기 위해 먼저 도스토옙스키의 창작 수기手記에 시선을 돌려보려고 한다.


그(주인공-인용자)는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생각해내며 ‘자신의 생각을 한 점으로 집중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는 자신과 직접 이야기를 하며 사건을 이야기해주고 그것을 자신에게 해명해준다. 그의 말은 순리적으로 보이는 듯하면서도 그는 논리나 감정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이율배반적이다. 생각하고 마음 쓰는 바가 거친 면이 있는 반면에 깊은 감정도 내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기도 하고 처음 본 듯한 사람인 어떤 재판관에게 호소를 하기도 한다. (…) 만약 어느 속기사가 그의 말을 듣고 모조리 받아 적었다면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약간 거칠고 생경해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 심리적 질서는 아마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은 ‘의식들 간의 길항’이다. 주인공은 난해한 일의 실마리를 잡기 위해 자기의식으로부터 분화된 여러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서로 언쟁하게 하고 상호영향을 주고받게 한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특징인 ‘폴리포니’(다성성)와 ‘인간 안의 인간’의 사유방식은 이런 의식들 사이의 끝없는 발견, 다툼, 대화, 합의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한 의식’이 하나 더 존재한다. 그것은 재판관 혹은 기록원으로서 복수화된 의식의 공존을 객관적인 태도로 바라보며 메모하는 ‘은폐된 청자聽者’로서의 의식이다. 의식의 모놀로그도 아니고 분열된 의식의 다성악적 합창도 아닌 그 무엇이다. 말하자면 의식은 항시 제3자 혹은 외부의 객관성에 강하게 매개되어 있다.

  단일한 의식, 극히 ‘절대화된 의식’이 초래한 직선적 편협주의는 필연적으로 개인과 집단의 허무주의와 파시즘적 사상을 수반한다. “사상의 절대화는 닫힌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 이다. 인공적으로 통합된 그 하나뿐인 의식에서 뻗어 나온 ‘자아’에게 인생 풍경은 언제든 ‘막다른 골목’의 질식감밖에 없다. 

  한편, 단일한 의식은 관념적 주체만 잉태한다. 자기비판, 자기와의 대화가 봉쇄된 관념적 주체는 외부의 사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변덕스럽게 전락하는 끝에 공허만 느끼는 주체가 된다. 이런 존재가 과연 주체로 인식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소확행)을 맹목적으로 바라는 유행도 성찰이 필요하다. 모방하거나 따라하기를 통해 얻은 소확행은 지속성을 비롯한 여러 점에서 역효과와 반작용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우리가 적응해야 할 패턴 같은 것은 없다.”  “이 세계 안에 영속적이고 단단한 것은 없다” 라는 문구들에서 보듯 관념화와 단일한 의식의 악순환에 반기를 든 사람은 수없이 많다. 단일한 의식에 지배당하는 자아가 어둠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말을 나눌 수 있는 다른 의식’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 ‘교류 대상’으로서의 다른 의식은 백일몽, 망상증, 정신분열증 따위가 아니라 외부와의 접촉이며 바로 독서와 대화다. 

  독서와 대화는 물론 명백히 다른 행위이지만 개방적 대화의 포괄적 범주에 함께 포함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역사상 독서 방식의 변화사를 살피면 낭독이나 낭송을 통해 책을 읽어주는 이른바 음독音讀에서 시작하여 개인의 물리적 공간이나 마음의 여지가 점차 생긴 시대에 접어들면 바깥세상과 잠시 단절함으로써 혼자만의 독서를 경험하는 묵독默讀으로 이행한다. 전자는 청각 문화의 헤게모니가 뒷받침하는 공동체적 독서, 후자는 인쇄술이 마련해준 시각적 텍스트와 만나는 개인적 독서다. 동아시아의 경우 이 같은 독서 방식의 이행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완료되었다.  

  공공영역에서 소리를 내거나 들으면서 이뤄지는 음독보다 담화 금지의 공약 아래서 조용하고 침착하게 내용에 집중하는 묵독은 상대적으로 고독한 편이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 이면을 보면 오히려 묵독이 대화의 형식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음독의 현장에서 청자들은 한 데 모여 경청의 여정을 통해 즐거움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청자가 책을 읽어주는 ‘이야기꾼’이나 옆에 함께 듣는 관중 또는 텍스트와의 쌍방향적인 대화를 맛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이야기의 흥미에 빠져 ‘소리’를 받아들이는 데만 힘쓰기 때문이다. 반면에 묵독은 음성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전환을 이루면서 문자문화의 밑바탕에 있는 독자와 작자, 텍스트 간의 광범위한 대화의 지평을 열었다.

  묵독에서 대화는 창작자의 서술기법으로부터 그 통로를 마련하기 시작한다. 그 예로 아이러니와 알레고리의 ‘혼성 현상’을 들 수 있다. 단순히 사물을 지시하는 ‘모놀로그’와 달리 작자의 ‘글말’에는 항상 복선의 목소리가 뒤섞인다. 『동물농장』과 『당신들의 천국』 등에서 보듯, 알레고리는 작자가 가면을 쓴 채 서술자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에 자기가 서술자의 배후에 서서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중적 서술 주체를 만든다. 한편, 루쉰과 채만식의 소설에서 나타난, 겉으로는 인정 혹은 찬양 등 긍정하는 태도이지만 내러티브의 중핵은 적나라한 비판과 폭로인지라, 서로 역방향으로 달리는 두 개의 목소리가 생생한 유동성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혼자’지만 여러 수법으로 은밀하게 ‘목소리의 카니발’을 조직하는 일은 떠들썩한 음독의 현장에서 만들어내기가 힘들고, 혹은 만들어내더라도 감지되기가 어렵다. ‘자기’라는 시공간이 있어야 작자가 꾸며낸 비밀스러운 풍경과 부분적으로 융합될 수 있다. 청자가 아닌 독자로서 작자가 만들어낸 폴리포니를 거듭 감수感受하고서야 텍스트와의 대화는 본격적으로 개막된다.

  대화로 접어든 묵독은 내밀한 내면의 표현을 계발한다. 텍스트에서 아울러 나오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독자는 저절로 그 성대한 대화의 축제에 참여하게 된다. 거기서 자기가 가진 생활 경험과 가치관으로 다른 ‘목소리’ 배후의 의식과 논쟁하고 그들 의식이 주장한 관점에 일부 찬동하거나 또는 강렬히 반발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끝에 일단락된 대화의 결과로서 예전과 어느 정도 구별된 자신의 ‘악센트’는 바로 그 내면 창출의 징표 중 하나이다.

  백여 년 전 근대적 주체, 근대적 자기는 ‘묵독 시대’의 도래와 함께 태어났다. 나중에 이처럼 탄생한 내면의 풍경은 고백체, 일기체, 편지, 기행문 등 다양한 글쓰기로 새로운 묵독에 필요한 의식들을 창조했다. 청자에서 독자로, 독자에서 작자로, 작자에서 다시 독자나 청자로 끊임없는 위치 이동은 자기 내부의 대화를 부단히 분출시키며 ‘다른 자기’의 형성과 성장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자 생활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현대인은 근대의 주체가 맞닥뜨린 그러한 ‘대화의 원리’로부터 이미 많이 벗어나 있는 상태이지만 그 가능성에는 아직도 늘 노출되어 있는 상태다.

  지금껏 샹뱌오가 말한 개방적 대화와 고독한 묵독이 모순적 관계로 보임에도 어떻게 상승 작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봤다. 중요한 것은 거리감이다. 내부와 외부가 완전히 뒤섞여 일상이 전개되면 ‘내內’와 ‘외外’의 준별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때 거리감은 ‘자기’의 존재론적 의미를 겨냥한 ‘자기’ 내면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다음에야 개방적 대화는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작이 전부는 아니다. 묵독이 허용하는 개방적 대화는 여전히 ‘나’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일상적 행위일 뿐이다. 자칫 그것은 오직 주체를 향한 형이상적인 회귀가 될 수 있다. 즉 ‘폐쇄 루프’처럼 절대적 주관의 단일한 의식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높다. 때문에 여러 명의 ‘자기’를 무대에 등장시켜 의식의 공존을 이뤄낸 뒤에는, 소홀히 해선 안 되는 그 외부관찰자, 기록원으로서의 ‘객관적 의식’이 요구된다. 

  여기서 객관은 두 가지 측면의 객관을 뜻한다. 첫째, 개방적 대화에서 자기가 보유했던 고유의 의식과 외부와의 접촉에 의해 ‘초대받은 의식(들)’ 간에 벌어진 논쟁, 싸움, 합의를 냉정하게 인식하는 객관적 태도로서의 의식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대화라고 이름 지어진 카니발의 감격과 흥분 등 자극적 정서에 감염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대화의 세부를 관찰하고 기록하며 객관적 입장을 가진 의식 형태다. 도스토옙스키가 보여준 작자 의식은 바로 자기가 창조한 작중인물을 둘러싼 ‘의식의 대화’에 대해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이것을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자기’ 내부에서 연유하는 소산임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외부 환경, 현실의 물질적 존재, 과학의 규칙성과 연관된 두 번째 객관적 의식도 요청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주관과 객관의 상대적인 연결점으로 사회적 활동, 물질적 노동을 편견 없이 고찰하고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반영해주는 의식적 사유에 가깝다. 입장이나 태도로서의 객관적 의식, 객관 현실의 과학적 반영으로서의 객관적 의식, 이 두 가지로 정립된 객관적 의식 형태는 주관적 의식 대화의 자연발생적 인간중심주의를 보완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독서 등의 일상적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대화하는 의식들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의식, 그리고 일상생활을 과학적으로 반영하는 객관적 의식의 상호공존과 상호작용은 따라서 일종의 변증법적인 유동 속에서 유기적으로 발생하고 변형하면서 동시에 보통 사람이 자기를 출발점과 중심으로 한 ‘증발되어 가는 부근’, 즉 사라지고 있는 주변 세계를 환원하려는 데 시사점, 방법 심지어 해결책을 제공해준다. 여기서 특별히 유의해야 할 것은 ‘증발되어 가는 부근’이 샹뱌오가 인터뷰에서 말한 ‘집 근처의 공간’, 즉 물리적 주변 세계에 대한 무관심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근은 또한 자기의 고유한 의식을 둘러싸고 그것과 대화를 나누는 의식, 그 대화를 관찰하는 의식, 일상생활에 관한 과학적 반영으로서 대화에 개입하는 의식, 즉 ‘부근으로서의 의식세계’로 확장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세계는 일종의 무정형한 장벽으로, 외부나 자기 내부의 못난 단일성의 절대주의로부터 부분적으로 벗어나게 해준다. 즉, ‘쯔차’에 이르는 경로를 마련해준다. 만약에 ‘쯔차’라는 생활 미학에 진정으로 조금이라도 이르게 되면 그는 “주위 세계와 관계 속에 주관적 생각과 감정을 객관화함으로써 개별적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전체, 즉 인류에 대한 의식을 창조” 해낼지도 모른다. 다만 이 글에서 강조하고 살피고자 한 것은 단일한 의식이 주도한 세계에 머물지 않고, 지속적 대화, 관찰, 과학에 기초한 객관적 반영에 집중하며 끝없이 돌파하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자기의식에 대해서만이다. ‘방법으로서의 자기’를 찾으려면 ‘방법’에 집착하기보다 먼저 ‘자기’에 시선을 돌려야 하고, 그 ‘자기’를 인식하기 위해 무엇보다 ‘자기’의 의식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일에 발목이 잡혀 힘들어 죽겠는데 뜬구름 잡는 듯한 ‘방법으로서의 자기’, 자기의식의 유동 과정 운운이 과연 와닿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까? 여기서 샹뱌오가 독서와 개방적 대화에 잇대어 말한 자신감이라는 전제조건이 환기된다. 이 자신감은 버릇없이 우쭐한다는 뜻이 아니다. 거만한 자기도취는 말할 것도 없이 ‘단일한 의식’에 속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감의 근간은 ‘용기’다. 그러나 세간의 모든 가치를 결정짓는 자본의 ‘잔인무도한 지배력’은 숱한 ‘보통 사람’들의 용기를 압살하고 있다. 용기가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결국 인간관계를 신뢰감과 이해가 아니라 자본의 작동에 수반된 편견과 폭력, 혐오로 채우고 있다. 그로 인해 개방적 대화는 골동품이 되어 간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의식’과 ‘쯔차’를 나와 관계없는 언어유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악순환의 심연에 우리는 갇혀 있다. 지금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낭만주의적 정신과 직결된다. 다정한 성격을 의미하는 ‘사교적 낭만’이 아니고 중세시대 넓디넓은 대지 위에서 용맹하게 출정하거나 유랑하는 기사의 늠름한 모습과 일탈의 용기를 그리는 데 활용되었던 ‘로맨스romance’의 어원으로서의 낭만이다. 그것은 “실재를 산산조각 내고, 사물의 구조에서 벗어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보려고”  하는 결심이다. 이 낭만파의 과격성에 반대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뿌리 깊은 고정된 믿음에 대한 회의와 성찰의 능력 또한 낭만주의적 정신이다.  낭만주의적 정신의 되찾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 어디를 향해 직진하는 용기의 원동력을 제공한다. 그 용기 자체는 자신감의 획득을 상징하고 있다. 

  시도의 첫걸음은 낭만주의적 정신이다. ‘로맨스’로부터 출발하고 독서와 개방적 대화의 추상성을 일상 행위 속에서 실체로 변화시키고 그 와중에 자기의식을 변증법적으로 유동시키며 ‘쯔차’의 조건인 거리감을 마련한다. 이처럼 ‘방법으로서의 자기’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조건이라면 ‘보통 사람’이 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소설가 김승옥은 “사람들이 결국 바라는 건 필요 이상의 음식, 필요 이상의 교미, 섹스의 가수요假需要”라고 적으며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있을까?”라고 질문했다.  이 구절을 보자마자 나는 있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질문은 이제부터 타인에게 던지기만 하지 말고 자기에게 물어봐야 한다. 

  샹뱌오가 말한 ‘쯔차’의 세 가지 조건에 대해서 나는 내가 배운 문학 지식과 경험으로 이해해봤다. 따라서 이 글은 ‘단일적 의식’이 아닌 일종의 ‘대화 자료’로 읽어주길 바란다. 각자가 보통 사람의 용기와 자신감으로 자유롭게 복합적 의식을 창조했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 보통 사람으로서의 낭만주의자가 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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