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2

Yuik Kim - '방법으로서의 자기' - 백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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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과 선비, 공공지식인
미시사 연구자 백승종 선생님은 조선의 선비문화를 깊이 연구하고 여러권의 저서를 출간하신 바 있다.
나는 '방법으로서의 자기'를 번역하고 샹뱌오가 가진 중국의 향신정체성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면서 과연 중국의 향신과 조선의 선비들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매우 궁금해졌다. 같은 유교문화에 기반한 전통사회속에서 두 나라의 지식인 계층은 어떤 점이 다르고 어떤 점이 같았을까?
중앙집권적 군현제도, 과거에 의한 관리 선발 제도, 지역의 유교 교육기관과 향약을 비롯한 자치제도 등등 을 공유하는 가운데 말이다.
그리고 샹뱌오가 설명한대로 보편가치를 논하는 공공지식인과 지역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향신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근대에 중국사회의 근대화를 고민하던 수많은 중국인 사상가와 지식인들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인 량슈밍(베이징 출신의 공공지식인으로 향촌으로 자발적으로 하향해서 향촌건설운동을 벌였다)과 페이샤오퉁(향신출신의 공공지식인)은 향촌사회를 연구하고 실천하는데 있어 서로 다른 접근 방법으로 대별된다.
사구연구(社区研究): 전통으로부터 현대로 “각미기미(各美其美) 각자의 아름다움”에서 “미미위공(美美与共) 아름다움의 서로 나눔”으로
공교롭게도 원톄쥔(그 역시 베이징의 지식인 가정 출신이고 향촌으로 내려간 활동가이기도 하다)은 량슈밍의 제자를 자처하고, 많은 사람들이 샹뱌오를 보면서 페이샤오퉁 (강남의 향신가정 출신들인 공공지식인)을 떠올린다.
샹뱌오는 또, 중국의 대표적 공공지식인중 한명인 왕후이와도 깊이있게 협력하고 있다. 과연 조선에도 이런 공공지식인과 향신이 따로 있었을까? 그리고 현대의 한국 지식인과 활동가는 어떨까? 물론 중국과 한국은 워낙 스케일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지나치게 단순화시켜서 일대일 비교를 하는 것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큰 틀에서 한번 비교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백승종 선생님이 이 책을 읽어보고 평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마침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하신 백승종 선생님은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에서 연구자로 일한 경험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샹뱌오는 지금 막스플랑크 사회인류학연구소의 소장이기도 하다. 오늘 백승종 선생님이 간략한 서평을 페이스북에 올려주셨는데, 내가 생각했던대로 대단히 흥미롭고 놀라운 지점이 있었다.
내용을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대부분 공공지식인을 지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페북 댓글로 몇가지 추가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조금 더 자세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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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백교수님. 중국내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샹뱌오 비판이 있습니다. 샹뱌오가 초월 (거시적 관점, 이념)을 비판하고 부근을 강조하는데, 지금 중국에 필요한 것은 올바른 이념과 그에 따른 실천이다라는 말이죠. 흥미로운 것은 샹뱌오가 중국내에서 계속 협력해온 지식인이 중국의 대표 공공지식인 (보편가치와 중앙의 일을 논하는)인 왕후이 교수인데 왕후이 선생은 시진핑 집권하에서는 발언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이고요(정협위원이긴 하지만). 중국 지식인 연구 측면에서 봐도 근대의 량슈밍 (베이징 출신의 공공지식인) vs 페이샤오퉁 (향신 출신의 공공지식인)의 관점의 차이에 대한 연구가 있습니다. 샹뱌오는 향신적 관점을 가진 공공지식인이라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긴 합니다. 왕후이나 원톄쥔 (량슈밍의 제자를 자처하는)과 같은 공공지식인이든 샹뱌오같은 (페이샤오퉁과 통하는) 공공지식인이든 중국 정치에 대한 자유로운 발언은 제약이 많죠. 조선의 선비중에는 향신의 입장을 취하려는 사람은 없었나요? 그것도 좀 궁금하긴 합니다. 영화 자산어보에서 정약용과 정약전의 생각이 갈라지는 모습이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샹뱌오는 굉장히 야심이 큰 사람입니다. 중국 정치 문제의 특수한 상황은 논외로 하고, 자신의 방법론과 사유구조는 anthropology for living (삶을 위한 인류학)으로 틀을 잡고 싶어하거든요.
답변:
이렇게 대답하겠어요. 중국 명청시대 향신은 대부분 지역공동체의 실무에 참여하였어요. 그러나 조정의 일에는 개입하는 법이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선비들이 어디 살든 조정의 당론(黨論, 당파싸움)에 깊이 끼어든 것과는 큰 차이고요. 조선 선비는 지역의 사무에 개입하면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특정한 지역을 제외하면 좌수와 별감 등은 등급 외의 양반으로 하대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장차 샹바오는 중국의시진핑 체제와 대립하게 되리라고 봅니다. 아무리 작은 공동체를 연구하더라도 결국에는 체제 문제와 결부되기 마련이고, 샹바오는 이미 "향신"이 아니라 "진신(縉紳, 높은 관리)"입니다. 얼마 안가서 진신으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구할 것으로 전망합니다.
과거에 저는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에서 연구도 하고, 많은 학자를 사귀었어요. 그때 연구소의 분위기는 "미시사"와 "일상사"가 주를 이루었어요. "역사인류학"이라고도 하엿지요. 지금 샹바오 소장님은 사회인류학연구소를 이끄시는데요. 과거 막스 플랑크 역사연구소의 공기를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더욱 반가운 것이 사실입니다.
문화적 전통은 쉽게 만들어지지도 않고, 쉽게 사라지지도 않지요. 그래서 한중일 삼국은 가장 비슷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른 취향을 추구하는 것 같아요.
질문자 추가 커멘트:
중국과 한국의 사회운동이나 지식인들의 성향이 여전히 그 전통을 잇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주 소름이 끼치는군요.
생각해 보니 자산어보 영화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대인들의 바람을 영화적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인데 역사학자께 여쭤보는 실례를 저질렀네요. 그런데 외국에서는 이걸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중국에서 평이 꽤 좋았고요, 저명한 중국 영화평론가가 (베이징대 다이진화 교수) 그런 식으로 촌평을 해서 저도 모르게 역사적 사실이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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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질문 (11.11)
선생님, 그렇다면 조선후기에 마을에서 실제로 향신의 역할을 하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선생님의 동학 저서를 보면 중인지식인과 몰락한 선비(소농에 해당하는)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이들이 동학지도자가 (접주)되기도 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좌수와 별감을 배출하던 향족품관층은 유교적 교양을 쌓을 수 있고 과거에 급제할 자격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정의하시는 선비로 볼 수 없는 것입니까?
조선의 중앙정부가 재지지배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향족에서 리족을 나누고, 나중에는 다시 사족과 품관향족을 나누는 정책을 취한 것은 일종의 divide & rule인가요? 저는 한국인들의 신분의식 (어떻게든 계층을 구분하고 싶어하는.... 서울과 지방, 그리고 정규직, 비정규직처럼) 의 문화적 기원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한국인들의 신분의식은 중국인보다 훨씬 강고합니다.
또, 한가지, 명청기의 중앙관료들이 퇴임한 후 낙향을 하는데요 그러면 다시 향신의 위치로 복귀하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말씀하신 진신(縉紳)일 터인데요. 이들은 다시 마을주민들의 이해관계 대변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직접 실무를 본다기 보다는 어떤 어젠다가 생겼을 때, 이름을 올려서 특정 주장에 권위를 실어주는 역할을 맡았고요. 제가 얼마전에 읽었던 꽤 재미난 중국 책이 그런 내용을 미시사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현미경하의 명") 배경이 되는 곳은 안휘성의 한 현입니다. 그렇다면 향신은 공공지식인과 지역리더의 정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이들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도 그러했는지 아니면 급제후 관료로 임용되고 나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두번째로 청말 중국 서남지역, 즉 쓰촨성 청두와 충칭의 차관문화를 다룬 흥미있는 미시사적 연구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파오거'라는 존재가 있는데요 이 사람들이 지역민의 이해를 대변하고 사무를 봤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향신이라기보다는 소작농출신입니다. 흑화되기전의 야쿠자와 비슷하기도 하고요. 확실치는 않은데 광둥지역의 흑사회의 원형도 이런 성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수님이 연구하셨던 중국의 '비밀결사'가 모두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중국도 지역에 따라서 지역민들의 이해관계의 대변자 역할을 했던 계층이 향신뿐 아니라 비지식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갑자기 정제되지 않은 질문을 쏟아내서 죄송합니다. 바쁘시면 답변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
그래도 좌수, 별감과 진신이라는 키워드를 주셔서 덕분에 조선에 대해서는 이것 저것 더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중앙정부가 국가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전가사변을 포함) 초기부터 중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divide & rule 정책을 구사한 것을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도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지배하는 계급의식과 양극화 문제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솔직히 중국안에서 지켜보는 제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시진핑체제의 문제는 답답하긴 해도 지식인이 이를 명시적으로 비판하느냐 아니냐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중국의 보통 사람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바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들은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분별력을 기를 수 있도록 생각의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요. 사실 샹뱌오는 그 일을 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선생님은 역사가이시고 역사의 장기구조를 아주 잘 알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추가질문에 대한 답변:
물어보신 말씀이 많아서 한번에 다 대답하기는 어렵고요. 여러 책에서 이미 김선생님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다룬 부분이 많습니다. 중국의 명청사회는 지역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극히 소수의 향신이 지방의 여러 가지 문제를 직접 나서서 해결하고 돈도 벌었어요. 그런데 조선에서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에서는 특권의식을 가졌으나 실제로는 행정에도 개입하지 못하고, 가난하게 사는 많은 선비들이 있었지요. 18세기 이후 한국사회의 활력은 "평민지식인"에게서 나왔다고 봅니다. 전봉준이나 김개남 손화중, 최제우와 최시형은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이밖에도 <<정감록>> 사건에 관련되어 희생당한 많은 분들이 있었지요. 그분들은 대개 떠돌이 지식인이었어요. 체제 내에서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종교를 빌려서 사회개혁운동을 벌였습니다. 중국으로 말하면 "타이핑"이나 "빠이렌"에 가까운 분들이죠. 한중 두 나라는 비슷한 점도 많으나 결정적으로는 굉장이 다른 사회였다고 봅니다. 이것은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평생에 제가 얻은 지식은 이 정도입니다.
샹바오의 <<주변의 상실 - 방법으로서의 자기>>(김유익 외 번역, 글항아리, 2022)
저자 샹바오는 특이한 인물입니다. 중국의 사회학자입니다만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대가지요. 그는 과거에 중국의 향신(鄕紳, 양반)이 지방지(地方志, 조선시대의 <읍지(邑誌)> 같은 것)를 만들 듯이 민중의 삶을 꼼꼼하게 기록합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교수를 하다가 지금은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사회인류학연구소장으로 있습니다. 아마도 중국 출신의 인문사회과학자로서는 가장 출세(!)한 분이 아닐까 합니다.
샹바오의 내면에는 ‘향신鄉紳’의 정신이 살아 있습니다. 그는 매우 꼼꼼합니다. 현지 사람의 언어로 삶의 다양한 모습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마음을 쏟고 있어요. 많은 학자가 거대 담론으로 ‘주변을 말살하는’ 풍조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읽힙니다.
에 책은 샹바오의 학문적 여정을 스케치한 것입니다. 대담 형식으로 꾸며진 『방법으로서의 자기』(중국에서 출간)를 바탕으로, 몇 가지 인터뷰 기사와 강연 원고 등을 추가하였다고 보이는데, 이 책 한 권만 잘 읽으면 샹바오의 내면을 꽤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샹바오처럼 대단한 학자가 탄생하는 과정은 어떤 점에서 특별하였을까요.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샹바오는 빈민의 아들이었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향신이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자 어린 샹바오는 체제의 정통 담론을 배웠어요. 이러한 “삼중 세계”의 차이를 절감하면서 어린 샹바오는 인간의 생활이 다차원적이란 사실을 가슴에 새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정신적 뼈대가 된 것은 외할아버지의 “향신”적 세계관이었습니다. 향신은 자신이 처한 곳을 일종의 소우주로 이식하고, 그 안에서 ‘완전체’ 공간을 창출합니다. 외부의 인정을 갈망하지 않고, 외부와의 관계가 중요하지도 않은 것이 중국의 향신이었어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미시적 우주 안에 머물며 그 세계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었지요. 일상 세계를 극히 세부적으로 구석구석 파악하는 것이 향신의 장점이었어요.
우리나라 조선의 선비와는 비슷하지만 아주 다른 것이 중국의 향신이었지요. 향신은 소우주의 주인공이었던 데 비해 조선의 선비는 언제나 중앙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선비는 세상을 고치려는 자세가 뚜렷하였고, 지방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에 섞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런 점에서 샹바오의 향신적 태도는 우리의 선비적 관점과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향신의 후예인 샹바오는 거대 담론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담론 자체를 회피한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는 중국의 향신들이 작성한 두꺼운 지방지와도 같은 르포르타주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샹바오가 호사가에 머문 것은 아니죠. 그도 현재의 모순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거기서 출발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기를 좋아합니다. 샹바오가 일종의 사회사가(사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역사를 쓸 생각이 없고, 그가 관심을 가진 작은 마을의 역사를 쓰는데 매달립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가 “미시적 사회사가”라고 생각합니다.
샹바오의 이러한 태도는 독재적인 시진핑의 중국 정부와 정면충돌을 면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깊어지면요, 언젠가는 가치관의 충돌이야말로 피하지 못할 운명이 되고 말 것으로 생각합니다. 샹바오의 행보에 저는 깊은 관심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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