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 김원봉(1898-1958?)에 대한 입장은 분분하다.
김원봉의 직함은 여러가지이다. 일본군이 겁내했다는 '의열단' 단장을 비롯해, 혁명간부학교 교장, 민족혁명당 당수,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군무부장... 전형적인 좌파 민족주의자이자 항일 독립의 수단으로 공산주의 계열에 선 인물...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쫒겨나다시피 월북해서는 국가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초기 북한의 건설에 일조한 인물...
그러다가 북에서도 이념, 지향, 세력에 밀려 숙청된 인물...
김원봉 연구자인 한상도 교수의 책,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 역정과 삶>(역사공간), 평전 작가인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시대의 창)을 읽으며 우리는 언제쯤 소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남과 북의 갈등과 대립,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흔한 고민을 한 번 더 진지하게 해보았다.
아래 두 장면이 기억에 좀 더 남았다.
1.
해방후 1945년 11월 23일, 15인승 미군 수송기 한 대가 상해에 도착했다. 여러 파벌로 나뉘어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 가운데 누가 먼저 탑승하느냐를 두고 심한 언쟁이 오갔다.
상식적으로는 정부의 국무위원들이 먼저 귀국해서 국무회의를 즉각 열어야 하지만, 난장판 수준으로 언쟁이 벌어지자 김원봉이 만류하며 수습했다. 그러면서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이시영, 엄항섭 등이 11월 23일에 먼저 탑승해 귀국하고, 김원봉은 2진으로 12월 2일에 다음 항공기로 귀국했다. 1진으로 귀국한 이들이 이미 임시정부의 주요 요인으로 환영받고 '임시정부 지도자 = 김구'라는 이미지도 굳어졌다. 김원봉은 임정 내에서 2인자였지만, 귀국 후에는 4인자 정도로 밀렸다고 한다. 평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약산을 잘 아는 사마로는 약산이 가끔 손해보는 일을 잘 한다고 평했는데, 이 일은 가장 적합한 예가 될 것이다"(김삼웅, 535쪽) 김원봉이 양보하지 않고 임시정부 서열 순으로 귀국하자 우겨서 먼저 국민적 환영을 받았다면 역사는 좀 바뀌었을까.
2.
1947년 3월, 전국노동조합평의회가 주도한 총파업의 연장선에서 미군정 우익청년단체들이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과 그 산하단체들을 점거했고 그 와중에 김원봉도 포고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노덕술에게 체포되었다. 노덕술은 일제하 고등계형사였다가 해방후 미군정 경찰로 복직해 반민특위 요원의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원봉의 눈에 해방조국은 친일파들이 항일 운동가를 잡아다가 고문하는 역설의 현장으로 보였다고 한다. 김원봉은 이렇게 말하며 3일 밤낮을 울었다고 한다:
"내가 조국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 놈과 싸울 때도 한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
(한상도,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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