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8

임건순 - "노신과 윤치호를 넘어서"

임건순 - 얼마전 돌아온 개화파들의 공부모임 서래포럼에서 발표회를 했는데 제 발표문을 올려봅니다. 욕을 먹든 비판을... | Facebook


임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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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돌아온 개화파들의 공부모임 서래포럼에서 발표회를 했는데 제 발표문을 올려봅니다. 욕을 먹든 비판을 받든 어쨋건 공유해서 같이 보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1. 근대는 존나 좋은것이지만 기회과 계획의 산물이 아닌 우연의 결과

2. 근대는 닥치고 상인들의 세상, 경제인들이 권력을 가지고 그들이 누리는 권리가 점차적으로 확대 되는게 근대

3. 상인들의 세상인 근대는 우연의 산물인데 복수의 권력구조가 경쟁하고 열국이 경쟁하는 와중에 만들어진 것. 아무도 예상하거나 기획하지 않았고 의도하지 않았다

4. 왜 동양은 근대의 길을 가지 못했는가??라고 묻지 말고 서구는 어떻게 무슨 이유와 원인들로 근대의 길을 갔을까 철저히 그렇게 물어야한다. 안그래도 아인슈타인이 중국, 동양에서 왜 자연과학이 발달하지 못했을까 물으면 안된다. 서양이 무슨 이유로 자연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건지 그렇게 질문해야한다고 했는데 제 생각도 동일합니다.

5. 우리의 전근대성을 직시하고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윤치호와 노신이 했던것처럼. 거기에 함몰되거나 머물기만해선 안된다. 우리를 까기만 하지 말고 눈을 서구로 돌리고 서구를 더 철저히 연구해보면서 질문해보자. 그들은 무슨 이유로 근대를 만들내게 되었던것인지.

아직도 사회에 전근대적인 모습들이 많고 국민들의 모습을 보면 여전히 계몽이 필요하지만 가장 먼저 던져야할 질문, 해야할 일은 따로 있다 바로 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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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과 윤치호를 넘어서"

1.명이대방록의 황종희를 아십니까

중국은 서세동점의 시기에 많은 반성을 했다, 우리가 무엇이 부족했고 어떤 점들이 못나서 서구에 뒤처지고 열강들에게 유린당했고 식민지가 될뻔 했을까하는 반성을 많이했다. 그런데 그들의 반성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명이 청에게 망하고 만주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도 그들은 많은 반성을 했다.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칩거하면서 뼈저리게 반성하고 성찰했는데 2백년 후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청이 망하고 그러면서 그들은 다시 한번 집단적으로 반성하면서 미래를 모색했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다. 우리의 경우는 달랐다. 국권자체를 상실했겄만 우리가 왜 이리도 뒤 쳐지게 되었고 무엇이 부족하고 못났기에 부국강병의 길을 가지 못하면서 망해야만 했는지 제대로 반성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신채호, 그나마 윤치호가 전부였다.
신채호는 진시황 이야기를 하면서 한을 했다. 분서갱유하려면 제대로 하지 제대로 하지 못해 우리가 이꼴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할 때 유학자들 모두를 제대로 살처분을 하지 못해 조선이 유학의 독에 망했다고 한탄을 했던 것이다. 망국의 시기. 국권찬탈의 시기에 일기를 쓰던 윤치호와 더불어 그나마 신채호가 망국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한 편이다, 정말로 그나마. 중국의 지식인집단에 비하면 그 반성과 성찰이란 지적 작업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국권자체를 상실했기에 더욱 혹독한 반성과 청산의 작업이 있었어야 했지만 외려 국권상실이란 현실이 가혹한 비판과 청산을 가로막았다. 조선의 과오를 냉정히 분석하면서 내 자신 자체를 부정할 수 있었기에 나라 자체를 잃은 조선의 사람들은 처절한 반성앞에서 망설이기만 했다. 그 작업을 그냥 유보하기만 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고 역사에 월반은 없다. 청구서는 언제든 발행되어 날라오고 늦게 날라올수록 가혹하게 이자까지 잔뜩 불어있는대 청구 되는게 세상사의 법칙이다. 우리는 눈앞의 숙제만 해야 하는가? 묶은 과제는? 현재 우리가 압축성장을 훌륭히 해냇다고 해서 묶은 과제가 그저 없는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외면하고 모르는 척하면 할수록 가혹한 청구서로 날아올 수밖에 없다. 왜 조선이 망했고 우리가 무엇이 부족해서 망했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제대로된 반성이 없었는데 그렇기에 조선은 부활한 게 아닌가 싶다. 386을 앞세워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청산이 없었떤 우리에게 청구서를 역사가 날리지 않았나 싶은데 이제라도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부국강병의 길을 가지 못했을까? 왜 근대화와 거리가 멀었을까? 한없이 정체된 틀 안에서 우물안 개구리로만 살았을까? 이런 질문들을 하면서 냉철한 분석과 뼈아픈 반성을 해야한다 그런데 이제라도 반성을 해야하는데 무작정 우리가 못났다, 잘못했다는 반성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질문할 준비를 해야한다. 질문이 틀리면 답이 틀릴 수밖에 없다. 질문을 제대로 벼리지 못하면 뻔한 답밖에 나오질 않는다. 우리의 지적 작업이 하나마나한 일밖에 될 수 없는데 오늘 발제는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들이 뭔지 짚어보려는 것이고 그 질문들에 대한 논의다. 그런데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만이 아니라 어떤 순서대로 질문을 던져야할 것인가도 오늘 중요하게 논하려고 한다. 질문의 순서, 빌드업의 과정을 제대로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왜 우리가 망했을까 이전에 던져야할 질문

왜 조선이 망했고 우리는 망국의 길을 갔는가? 우리가 무엇이 못나서 근대의 길을 가지 못했
는가만 묻지 말고 사전에 이런 질문을 해보자. 일단 근대와 근대화란게 뭔지? 물어야 한다고 본다. 단순히 질문을 제대로 해보고 정교하게 벼려 보자는게 아니다. 질문의 대상과 항목만이 아니라 순서를 좀 명확히 하자는 것인데 빌드업의 시작은 근대, 근대화가 뭔지 묻는 것이다. 왜 우리가 망했고 근대화와 거리가 멀었는지 묻기전에 근대란게 뭐고 근대화란게 뭔지부터 묻는게 순서라는거다. 근대와 근대화란게 뭔지 묻고 그리고 그 근대는 어떤 과정과 인과관계를 거쳐서 달성되었고 이룩된 것인지 물어야한다고 보는데 무턱대고 우리는 왜 근대화를 달성하지 못했는가?라고 바로 묻기 이전에 근대, 근대화란게 뭔지 물어야한다. 자 일단은 근대, 근대화란게 뭔지 좀 나름 살펴보자

3. 근대, 근대화란 무엇인가

근대란 것이 뭘까 단순히 중앙집권일까 과학기술의 발전일까? 개인의 발견과 욕망의 인정과 격려일까? 막스베버적 정의대로 가산제를 관료제로 대체하는 것이 근대일까. 기하학적 질서와 원리를 국토에 구현하는 것일까? 국민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헌법이 만들어지고 사적자치의 원칙을 천명하고 보장하는 민법이 만들어져 도입되는 것일까 ?
왜 우리가 근대 만들기와 근대화에 실패했는지 따져묻기 전에 우리는 근대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하고 근대란 것에 합의를 해야한다. 조선이 가지 못했고 동아시아가 가지 못했던 근대란게 대체 뭐고 근대화란게 대체 무엇일까 질문하며 답을 내야한다. 서구만이 갔던 길 근대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본인은 근대는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근대이고 자본주의 논리를 도입하는 것이 근대화라고 생각하는데 더 부연설명하자면 경제가 얼마나 정치와 종교에서 독립한 영역이 되느냐의 문제다. 상인들이 무사와 사제, 정치인들의 눈치를 최대한 보지 않을 수 있고 상인 자신들이 얼마나 독립된 권력을 가지고 자신들 중심으로 국가의 제도와 정치를 재편할 수 있고 문화가 상인을 주류로 하는 문화로 개변 되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근대고 근대화다.
자본주의란 그 본질에 있어서 전체 사회에서 경제인이 차지하는 권력의 문제이다. 근대라는 것은 경제인들이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다. 근대화란 상인들의 권력을 차지한 상태에서 상인들이 누리는 권리들이 사회에 점차 확대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중앙집권, 과학기술의 발전, 시장의 확대, 관료제의 가산제 대체, 헌법과 민법의 확립 모두 상인, 경제인이 가지는 권력과 권력의 확대문제라는 틀 안에서 살펴 봐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역사관이나 자본주의와 근대를 바라보는 눈에서 맑스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자본주의라는 말로 표현되는 근대 내지 현대경제의 본질적 특징을 단순히 높은 생산력으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착오이다, 잘못된 이해다

서구적 자본주의 발전의 진정한 본질은 시민계급(경제인)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함으로써 사회의 전체적 권력구조가 변화하고 이와 관련하여 경제가 정치나 종교 같은 다른 생활 영역에 못지 않은 중요한 생활영역이라는 사회문화적 가치관이 대두하는 것이다. 경제인들이 정치권력자들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활동을 원활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 수 있을만큼 강력한 권력 기반을 확보하고 경제가 사회의 많은 유능한 구성원들이 심신을 바쳐 일하고 싶어하는 가치 있는 영역이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근대의 가장 특징적인 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이란 단순히 경제적 번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세력구도와 사회문화적 가치관에 있어서 근본적 변화를 함축하는 것이다. 자 근대를 간단하게 상인들의 세상으로 규정했는데 여기서 그쳐선 안된다. 우리는 질문의 후속타를 던져야한다. 근대와 근대화란게 뭔지 물어야한다고 했는데 그 다음으로 던져야할 질문이 뭘까?
 
4. 서구는 왜 상인들의 세상이 되었는가?

근대란게 뭔지 물었고 그 답으로 상인의 세상이라 했는데 후속질문은 이것이 되어야한다고 본다, 근대가 상인의 세상이라면 서구는 왜 상인의 세상이 되었는가? 말이다. 우리는 서구는 왜 상인들의 세상이 되었는데 우리는 상인들의 세상이 될 수 없었는가 어떤 차이가 상인들의 권력을 차지하고 못차지하고를 만들어냈는지 물어야한다, 그런데 중요한건 역시나 순서다 우리는 왜 상인들의 세상이 되지 못했고 상인들의 힘을 가지지 못했는데 물으면 안된다. 서구가 왜 상인들의 세상이 되었는지부터 물어야한다. 서구부터 물어야 한다고 본다. 서구는 왜 우리와 다르게 상인들이 권력을 잡는 세상이 되었고 무엇이 그런 변화를 추동했는지를 물어야한다. 그런 다음에 왜 우리는 상인들의 권력을 가지지 못했는가? 상업이 독자적 영역이 될 수 없었는가? 상인들이 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정치와 문화를 바꾸지 못했는지? 이런 순서대로 질문을 던져야한다. 여기서 빌드업의 순서를 정리하자면 근대란 무엇인가?
=> 왜 서구는 상인들의 세상이 되었는가
=>왜 우리는 그들과 달리 상인들이 세상이 될 수 없었는가? 이렇게 되어야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라고 할 때는 단순히 조선만이 아니라 중국까지 같이 헤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구와 조선 이런 구도보다는 서구와 동아시아, 더 정확히는 서구VS 중국-조선 이렇게 틀을 정해놓고 가면 어떨까 싶은데 사실 중국사는 한국사의 종속변수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중국까지 같이 넣고 따져봐야할것인데 통일제국 진이 생기고 한이 생기면서 우리도 느슨하게나마 통일된 정치권력이 만들어졌다. 한이 무너지며 한사군에 균열들이 생기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부여, 가야가 생겼고 당이 무너지면서 발해와 신라 남북국시대가 사라지고 고려가 탄생했으며 원이 무너지면서 조선의 건국이 일어났다. 

중국사는 한국사의 종속변수인 경우가 많았다. 한국사는 중국사에 큰 영향을 받았고 송, 원과 고려, 명과 조선처럼 바로 동시대 중국왕조의 정권 특징, 특성을 우리가 함께하거나 그것이 우리의 한계를 규정짓는 경우가 많았다. 개방적이고 상업이 흥했던 송과 원과 동시대였던 고려와 달리 폐쇄적이기만 했던 명은 우리 조선 역시 문호를 닫고 살게 했는데 한국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랄 수 있는 유교만해도 중국산이다. 
(여기서 유교는 단순히 공맹사상이 아니라 관료제와 중앙집권을 포괄하는 중국식 체제유지 시스템과 컨텐츠의 전부를 가리킨다)

근대화 관련해서 우리가 무엇이 부족하고 못냤느냐는 질문은 중국까지 포괄해야한다. 중국이 무엇이 없었고 중국이 서구에 비해 무엇이 달랐고 못났는지 따져야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과거를 반성하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정체와 지지부진은 중국의 정체와 지지부진과 독립되어 논해선 안되는데 자 그런데 무턱대고 중국이 조선이 무엇이 부족했는지 물으면 안된다, 질문의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고 했고 앞서부터 서구부터 질문을 해야한다고 했다. 그들이 중국, 한국과 무엇이 달랐고 우리가 환경에서 어떤 차이가 있었기에 상인중심의 세상이 되었는지를 따져야한다고 했다. 안 그래도 아인슈타인도 말한 바 있다. 왜 중국에는 자연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던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아인슈타인은 ’왜 서구에는 자연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가?“ 라고 물어야할 것이라고

5. 복수의 권력구조, 열국 경쟁체제

근대화란게 기획이 산물인가? 의도적 결과인가? 인간의 본성과 맞는가? 세월의 만들어낸 인간의 DNA와 맞는가? 이런 질문들에 단도직입적으로 답하자면 아니다라고 할 것이다. 근대, 근대화는 철저히 우연의 산물이다.

근대, 자본주의라는 것은 몇가지 요인들이 우연히 만나고 겹쳐서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한 가은데 생겨나고 굳어진 것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복수 국가의 공존-열국 경쟁체제였다. 국가들이 서로 부국강병을 위해 고민하고 생존을 위해 경쟁하면서 군대와 관료제를 만들고 여러 가지 국가기구와 제도, 정책의 합리화를 꾀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국왕은 경제인, 상인들에게 손을 빌리거나 일을 맡기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러면서 상인들의 힘이 갈수록 세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시나브로 상인들의 세상이 오게 되었다,

성직자와 귀족이 열국이 경쟁하는 상황에 있어 적합한가? 그들을 대신해 꼼꼼하게 정책을 입안하고 예산계획을 세울 수 있는 이들은 누구였을까? 
  • 상비군과 관료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능력 있는 정책입안자만이 아니라 막대한 재정수입이 있어야 하는데.........열국 경쟁체제가 계속될수록 국왕의 입장에서는 경제인이 더욱 많이 필요해졌다. 
  • 여러나라가 장시간 군사경쟁을 하는 와중에 경제인들의 세력성장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 군주는 이들을 무시할 수 없었고 존중해야했고 보호해야 했는데 각국의 정치권력은 경쟁적으로 상인들을 자기편으로 포섭할 수밖에 없었다. 
  • 심지어 종교권력 역시 상인의 힘을 필요로 했고 상인의 힘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 독일의 푸거가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선에 영향을 미치고 메디치가 역시 교황인선에 큰 힘을 썼는데 중세유럽의 분산된 권력구조하에 치열한 경쟁은 상인, 경제인 포섭 경쟁으로 이어졌다. 
  • 이렇게 갈수록 상인, 경제인 그들의 지위와 위상은 시간이 갈수록 격상 되었다. 
  • 부국강병을 위해 그들은 보호 받고 중용되었는데 문제는 상인들이 시간이 갈수록 단순히 국왕의 보호에만 만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보호는 보호로 그치지 않는다. 제한이자 족쇄이기도 하다. 
  • 상인세력은 성장하면서 그 족쇄를 풀려고 했다. 결국 그 결과는 시민혁명이었다, 
  • 시민혁명으로 인해 서구사회는 경제인이 권력을 장악했고 법과 제도를 경제활동을 뒷받침하도록 뜯어고치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또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 결국 복수의 권력구조, 열국 경쟁체제라는 권력의 관계와 권력환경이 서구 사회를 근대사회로 추동하게 된 것인데 이런 결과는 혹은 발전은 국왕도 귀족도 성직자도 원하지 않았던 결과이고 사실은 상인들 자신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 중세 유럽의 독특한 권력관계에서 중앙집권과 부국강병을 꾀하던 군주들은 상인이 그 주축인 시민계급과 결합했다. 
  • 이것은 이 계급의 자부심을 고취하는 원인이 되었는데 이들은 단순히 신분상승과 우월적 지위를 얻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 궁극적으로는 국왕를 전복할 세력으로 성장했다. 
  • 서구의 교회는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세속권력과 투쟁하고 세속적 사업에 참여했는데 이것은 결국 서구에서 종교가 사회를 통제하는 권위를 상실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 시민혁명이나 종교의 권위 상실은 모두 근대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었지만 국가권력도 종교권력도 계획하지도 않았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바다. 
  • 요컨대 근대적 발전의 최종적 소산은 원인 제공자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다. 
  •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맞아 떨어져 생긴 소산에 불과하다. 
  • 근대란 자본주의란 그런 것이다. 
  • 자 근대, 근대화란게 뭔지 물었다. 답은 상인들의 득세였다. 
  • 그리고 나서 왜 서구가 상인들이 권력을 가지는 근대의 길을 갔는지 물었다. 
  • 답은 장시간 이어진 열국 경쟁체제라는 환경이었다. 
  • 이제 동양은 상인들이 왜 득세하지 못했는지 물어야할 것이다.

6. 동양의 경제발전과 생산력, 상업의 융성

송의 생산력은 대단했다. 철기의 생산량과 소비력은 유럽이 도저히 비벼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명청시대 중국의 상업은 흥했다. 진상晉商과 휘상徽商으로 대표되는 청의 상업은 매우 융성했고 독자적인 부기와 어음등이 만들어지고 발전했으며 이미 송나라때만 해도 어음과 수표만이 아니라 계좌를 만들고 원거리 송금등이 가능했다고 한다
생산력의 신장. 상업만이 아니라 동아시아도 과학, 기술이 흥한 적 있었다. 그러나 이 모두 큰 의미 부여를 할 수 없고 근대와 연관 짓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 근대, 근대화란 앞서도 말했듯이 상인들 지위와 상인이 가지는 권력의 문제이다, 그들의 종교와 정치의 논리에서 얼마나 해방되느냐의 문제이고 돈을 벌고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 가장 제일 가치 있는 일로 인식되는 문화와 인식의 천지개벽적 변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상인들이 돈을 벌어서 계속 자본축적의 길을 갔는가? 아들들에게 상인이란 직업을 물려줬는가? 아닌 것 같다. 상업으로 번 돈으로 토지를 사고 유학자들과 교류했으며 교류한 유학자들을 자식들의 스승으로 삼아 자식들은 과거를 보게 했는데 중국, 동아시아는 아무리 상업이 흥한 적이 있어도 상인이 제일의 지위를 얻은 적이 없어다. 정치권력과 맞선적도 없고 정치와 종교논리, 도덕의 논리에서 자유로운 독자적인 area를 상인들이 구축한 적이 없었다. 그마나 그런 시기가 있었다면 춘추전국시대일 것이다. 여불위로 대표되는 상인들이 꽤나 힘을 썼는데 사실 서구의 15~18세기와 유사한 시기가 동양에도 있었다. 바로 춘추전국시대다. 열국 경쟁체제, 일극의 중심이 있는게 아니라 여러 권력의 중심이 경쟁하던 체제. 그때도 군사혁신이 일어났고 과학기술이 발전했고 제도와 정책, 법과 관습들이 합리화의 길을 걸어갔다. 군사혁신의 와중에 국가는 늘 돈이 부족했고 그러다보니 상인들의 지위가 격상되고 상공인들을 관료로 임용하며 똑똑한 상공인들의 힘을 국력으로 전환시키려 국왕들이 골몰했다. 여불위 같은 상인이 나름 시대의 아이콘인 셈이었다. 

그만큼 상인의 지위 상승이라는 흐름이 거셌던 시기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동양의 경쟁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찍 종식 되었고 제국질서로 귀결되었다. 진이라는 통일제국이 생기고 곧 또다른 통일 제국 한이 들어섰다. 여러개의 이질적인 힘의 중심이 경쟁하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 경쟁하지 않으니 혁신과 합리화 역시 끝이 났다. 아편전쟁으로 서구의 힘을 맛보기전까지 동양은 경쟁과 혁신, 군사혁명과는 늘 거리가 있었다. 

서양의 경쟁은 제국주의로 귀결되며 경쟁이란게 지속되었고 상인들의 위상은 우상향해가기만 했지만 어디까지 서양의 이야기다. 경쟁의 시기가 일찍이 종결된 동양은 상인들의 지위상승의 흐름이 일찍이 끝이 났는데 기원전에 이미 상인들의 득세는 꺽여버렸다, 이게 동양의 역사다, 서양과 대조되는. 상인들이 권력을 얻고 체제의 중심부로 가지 못했다. 복수의 권력구조가 경쟁하던 시기가 너무 일찍이 끝나는 바람에. 이렇게 서양과 동양은 다른길을 갔다.
 
일찍이 경쟁이 종식되고 상인들이 득세할 수 있는 환경이 사라져버린 동양, 더 정확히 말해 중국은 열국이 경쟁하던 시기에 인기가 없었던 유교를 통치사상으로 삼아 신해혁명시기까지 아주 장시간 유교를 제국경영의 소프트웨어로 삼았는데 ........사실 유교는 근대화를 지체시킨 원인이 아니다. 반대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근대의 길을 포기했기에 유교가 대세가 된것이지 유교 때문에 근대와 반대의 길을 간 것이 아니다.

7. 노신과 윤치호를 넘어서자

여기서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 던지고 싶다. 동양사회가 근대화를 달성하지 못한 것, 지체된 것 관련해서 비난 되어야야 할 것은 유교가 아니라 유교를 깨뜨릴 수 있는 조건의 결여가 아닐까?하는 질문 말이다. 

여러 열국이 경쟁하던 시기에 필요한 통치학과 통치의 기술과 일국을 유지해야하고 커다란 체급의 국가를 가성비 좋게 경영해야하는 시기의 통치학과 통치기술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유교가 중국과 조선을 정말 망친 것일까? 유교가 원인일까? 유교를 버릴 수 없었던 내외적 조건이 지속 되었던 것일 뿐이 아닐까? 
유교대신 다른 통치기제와 사상을 받아들이게 강제하는 환경의 변화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데 우리는 그런 내외적 환경과 조건을 더 따져 봐야지 않을까 싶다. 
노신은 예교가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하면서 공자와 유교를 비판했다. 한국의 윤치호는 일기를 통해 조선인들의 전근대성을 비판했다

필자가 그들의 주장을 동감해온 세월이 길었다. 그런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단순히 그들의 주장에 동조만 하지 말고 더 나아갔으면 한다. 좀 진도를 나아갔으면 좋겠는데 눈앞의 유교잔재, 전근대성, 그 전근대성을 가진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행태를 비판, 풍자하는데에서 그치지 말아야 한다과 생각한다. 
사실 앞서 던졌던 질문들도 윤치호와 노신의 문제의식에 한정되어선 안된다는 생각 끝에 나온 것들이다. 
단순히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비판하기보다는, 왜 우리가 뒤쳐졌을까 생각하기보다는 서구가 왜 우리와 다른길을 갔을까 고민해야한다과 생각했다. 
그게 윤치호와 노신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 노신을 비롯한 중국의 신문화운동가들이 중국의 유교와 비교대상으로 삼은 것은 근대화된 서구이다. 
동시대 근대화된 서구의 모습을 가지고 자신들을 모습을 비판하고 풍자했다. 윤치호도 큰 틀에서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당대의 서구에 비해 뒤쳐진 자신들의 모습을 비판만해댔지. 왜 서구는 어떤 조건이 있었기에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동양을 훨씬 추월한 문명한 사회가 되었는지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지금 자신의 모습을 비판하고 풍자만했다. 물론 그들의 문제의식은 당시 상당히 유효했고 지금도 적잖이 참고할 점이 있다. 하지만 그들도 한계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근대적 간지와 통찰이 기가 막혔던 윤치호가 영어일기를 통해 조선인들의 전근대성을 비판했는데 나도 한때 윤치호를 따라하고 흉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진도는 나아가야한다. 노신과 윤치호의 수준과 그들의 문제의식이 아무리 훌륭했다고 해도 과거의 일일 뿐이고 우리가 그 수준에 멈추어 있다면 정체일 뿐이다. 과거 동아시아가 그랬던것처럼.

그들이 하지 못했던 작업을 해보자. 서구사회가 근대화할 수 있었던 원인과 조건 그리고 그 과정을 차근차근 검토해보자. 그 작업에서부터 시작하고 그 작업에 철저해야지 않을까. 노신과 윤치호가 살았던 시기에도 그렇고 지금 우리도 그렇다. 이미 근대화된 서구와 서구인을 기준으로 하여 중국 사회와 중국인, 조선사회와 조선인들을 비교하고 비판하기만해서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지금 21세기의 우리가 노신과 윤치호를 흉내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봐야 특히 세상을 바꾸는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자 근대란 뭔지부터 따져야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근대는 상인들의 세상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왜 동아시아??라는 질문보다 왜 서구가??? 상인들의 세상이 되었는지부터 철저히 따져보자고 했다, 그런 순서로 질문해야하고 그렇게 빌드업되어야한다고 했는데 윤치호와 노신 그들이 지금 살았으면 어땠을까? 그들이 그시절, 그 때와 같은 문제의식에 한정된채 사유했을까? 아닐 것 같다. 동시대 서구를 기준으로 자신들을 비판만하기보다는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근대란 것을 만들어냈는지 우리와 달랐던 그들만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 같은데
그러고 나서 다시 현실을 짚어봤을 것 같은데 서구에 비해 영미에 비해 이것이 부족하다, 후진적이다, 아직 이러저러한 전근대적인 면들이 많다고만 하지 말고 단순히 유교 때문에, 성리학 때문에 조선이 정체되었고만하지 말고 다른 질문들을 던져보고 질문의 순서와 빌드업의 순서를 명확히 해보려고 하자.

  난 근대와 근대화란게 뭔지 물어야하고 섣불리 동양의 과거에 대해서 살피려고 하기보다는 서구의 조건들을 철저히 보려고 해야한다과 생각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유교는 동아시아 정체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였던게 아닌가 싶다. 그게 맞다면 유교를 좀 놓아줘도 되지 않을까? 유교가 행했던 역기능이 뭔지 살피기보다는 유교를 버릴 수 없었던 조건들의 결여가 뭔지 살피는게 우선일 것 같은데 생각보다 유교의 책임은 크지 않을 수 있고 유교가 우리 조선을 망쳤다기보다는 우리가 유교를 망친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갈수도 있다고보는데 자 유교의 책임 내지 유교를 버릴 수 없었던 조건들의 결여는 차후에 논의하기로 하고 오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질문을 제대로 해보려 하자. 특히 질문의 순서가 중요하다. 동양보다는 서구의 조건들을 더욱 명확히 살피려 노력해보자는 것이다.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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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wo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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