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軟性) 파시즘으로 가는 21세기 대한민국
~ 에리히 프롬을 생각한다.
무한 남독(濫讀)의 청년 시절, 난 러셀과 프롬을 사랑했다. 그들의 책을 모조리 읽으려 했고, 그런 욕망은 영어공부에도 도움이 되었다. 눈부신 러셀의 영어를 난 지금도 경외(敬畏)한다.
독일 출신인 프롬은 쉬운 영어를 쓴다. 외국인이 쓰는 표준적 영어지만 내용은 풍성하다. 20세기 세계의 대표 공공 지식인이다. 프롬은 내게 막대한 '실존적' 영향을 주었다. 그 덕분에 난 좀 더 독립적인 인간이 되었다. 존재의 허망(虛妄)을 버티는 내적 힘에 대한 통찰도 그가 멘토였다. 이런 사숙(私淑)의 결과는 '인간소외론 연구'라는 내 학부 졸업논문으로 남았다.
물론 프롬에게도 빈틈은 많다. 예컨대 프롬의 '인간 파괴성의 해부'의 낙관론은 현대 인류학과 고대사 연구에 의해 논파되었다고 난 본다. 프롬은 인간의 파괴성이 본성적인게 아니라 후천적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는데 난 프롬에 동의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권의 난정(亂政)에도 탄탄한 고정 지지층이 유지되고, 다수 지식인들이 정권을 추종하는 현상에 난 관심이 많다. 이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통치자가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탈민주주의 현상이고, 직접민주주의를 빙자한 포퓰리즘의 발호이기도 하다.
하지만 좀 더 중요한 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문재인 정권을 지지하는가?'란 문제다. 여론조사 조작설을 나는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실제로 매우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문 정권을 지지한다고 난 본다.
물론 문 정권은 권력기구 장악에 이어, 알튀세르적 이데올로기 국가장치까지 총동원해 그람시적 헤게모니 싸움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문 정권이 노골적으로 장기집권을 겨냥하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추가적 설명이 필요하다. 문 정권을 지지하는 대중과 지식인의 사회심리학에 대한 분석이 그것이다. 여기서 에리히 프롬의 통찰이 중요하다.
현대인은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자유엔 불안과 허무가 필연적으로 동행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불안을 달래줄 그 누군가(무언가)를 갈망한다. 현대의 자유시민들이, 진리와 정의를 육화했다고 그들이 믿는 권위주의적 지도자에게 현실의 해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게 바로 '자유에서의 도피'다.
흥미롭게도 자유에서의 도피는 '자발적인' 겉모습을 가진다. 그들은 '진심으로' 지도자를 신뢰하고 찬미한다. 정의실현에 매진하는 지도자의 길을 곳곳의 사악한 적(敵)들이 막아선다고 확신한다. 같은 생각을 하는 무리 속에서 황홀해하면서 열정적 구호를 외친다. 불안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역사에 대한 사명감으로 벅차 오른다.
한국적 상황에서 그 적은 일제(日帝)고, 토착왜구인 보수정당이며, 한민족의 길을 막는 미제(美帝)의 조선총독이고, 검찰-재벌-보수언론의 수구 신성동맹이다. 진리와 선(善)의 이름으로 이런 악의 세력을 박멸해야 한다고 이들은 믿는다. 이들에게 문 대통령과 조국 전 장관은 정의의 수호천사다.
대통령과 조국을 비판하는 건 이들에게 신성모독이다. 모든 현실권력을 독점한 대통령과 조국이 악의 세력에게 오히려 '핍박'받고 있다며 이들은 눈물짓는다.
이들에겐 사실과 합리성보다 자신들의 가치와 신념이 훨씬 더 중요하다. 떼로 모인 군중의 숫자와 열정에 스스로 감동한다. 자신들의 주관적 가치와 신념이 곧 정의일진대, 이견은 곧 이단으로 정죄된다.
사실과 이성에 입각한 비판자는 이들에겐 마녀(魔女)일 뿐이다. 지금 상황에서 이들이 보기엔 문 정권의 위선과 부패를 촌철살인하는 진중권 교수야말로 흉칙한 마녀일 것이다.
디지탈 민주주의를 빙자한 디지탈 독재가 비판자를 마녀사냥한다. '다중의 전제(專制)'에 질린 시민들이 침묵한다. 비판언론과 지식인조차 자기검열과 무력감에 빠진다. 자신감을 얻은 권력은 더욱 폭주한다. 파시즘의 시작이다.
원래 파시즘은 전면적인 사회정치적 불안과 경제위기에 대해 무능한 기존 정당과 의회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빈 틈을 파고든다.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反국제주의, 反이성주의, 자유민주주의와 입헌주의에 대한 냉소와 멸시, 일당독재, 대중동원, 지도자 숭배 등이 파시즘의 특징이다.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대중의 열광적 지지 속에 민주적 수단을 통해 집권한다. 집권이후엔 민중과 민족을 앞세워 선전선동과 폭력으로 의회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파괴한다. 파시즘은 무수한 가상의 적들을 양산해 강권통치를 정당화한다. 그들에게 정치는 적과 동지의 생사를 건 투쟁이므로 기만과 조작이야말로 파시스트의 핵심 정치수단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파시즘의 밑바탕에 자유로부터 도피한 다수의 시민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총체적 불안이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는 시대에,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독립적으로 행위하는 자유의 주체가 되는 건 매우 힘겹다. 이게 나치 제3제국때 평범한 다수 독일 시민들이 자유로부터 도피해 퓨러(Fuhrer, 우릴 이끄는 자) 히틀러를 따른 이유라고 프롬은 분석한다. 대중의 그런 태도가 파시즘을 가능케 한 것이다.
'자발적으로' 자유에서 도피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업고 연성 파시즘이 흥기(興起)하려 하고 있다. 21세기 대한민국, 문재인 정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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