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yung-joong Yoon
pteonSdrsotg773c18i07u0bimu02111 rr1a790lgyuic 4226mF935e710 ·
인상적인 안병직 선생과의 토론.
('철학과 현실' 봄호와 youtube에 공개 예정).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이명현 전 교육부장관(철현 편집인)과 10일 오전 10시~ 오후 5시 반까지 좌담.
불꽃튀는 토론이었다. 촛불과 맞불의 논리, 보수와 진보, 역사 해석, 대한민국의 미래와 국가정체성 등에서 한치의 양보없이 설전舌戰이 이어졌다.
내겐 조선 사회경제사 논쟁이 매우 흥미로웠다. 조선 왕조가 특히 중기 이후엔 성리학적 왕도王道정치의 명분론을 앞세우고 부국강병책을 패도覇道로 이단시해 경제와 국방을 그르침으로써 국가의 사명을 배반했다고 나는 주장했다.
특히 정조 때 신해통공(상업독점폐지), 서얼허통(서자차별없앰), 노비추쇄 혁파 등은 정조 나름의 부국강병 국정혁신책의 마지막 노력이었으나 이 모든 시도는 정조 사후 신기루가 되고 만다. 나아가 정조 자신도 계몽군주라고는 하나 문체반정과 박지원에 대한 억압이 상징하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중세적 성리학의 틀 안에 머무른 지도자였다. 또한 조선 왕조는 개국 시기 정도전의 비전 등을 제외하면 중화 사대주의 천하관을 자발적으로 수용해 중국에 국가안보를 의탁한 치명적 한계를 가졌다.
이런 내 주장에 대해 안 선생이 단호한 반론을 전개했다. 예컨대 안 선생은 조선 중앙정부가 거둔 세금수취율이 관료 양반지주층의 농간 탓에 10%에 불과해 강한 상비군을 유지할 경제력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건 맞다. 하지만 왜 조선왕조는 그런 치명적 결함을 혁파하지 않았는가? 나의 반론은 왕가와 관료, 재지사족在地士族 등이 결탁해 착취 위주의 조세정책과 수탈적 병역정책을 온존시켜 경제와 국방을 황폐화시킨 조선 지배층의 책임이 결정적이라는 거였다.
왜 당시 지배층은 농업생산력을 늘리고 교역을 장려하며 세제를 합리화해 국방력을 보강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하지 않았는가? 민중을 성리학의 천하관 안에 가두어 수탈하는 착취적 국가시스템이 조선 지배층의 기득권 보호에 오히려 유리했기 때문이라는 게 내 주장이었다.
임진왜란때 도체찰사 및 영의정으로 국정책임을 맡았던 류성룡이 골머리를 앓던 현안은 그런 국가존망의 위기상황임에도 어떻게하면 명明 구원군의 숫자를 줄이는 방식으로 교섭할 것이냐(늘릴 것이냐가 아니다!)의 문제였다. 원군援軍 수만명을 먹일 군량에다 기병騎兵 위주 명군 군마의 잡곡사료를 당시 조선경제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명으로 귀부歸附를 타진하던 선조의 망동妄動을 차치하고라도 이 모든 난맥상이 지배층 책임 아니면 뭐란 말인가! 서자와 노비를 발탁한 면천법, 양반에게도 병역의무를 부과한 속오군, 작미법(양반에게 더 많은 세금 부과) 도입 등으로 초유의 국가비상사태를 견뎌낸 류성룡 정도만이 고군분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서애의 실각 이후 모든 개혁책은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안 선생은 미시적 통계자료를 인용하며 나의 왕도-패도론을 신랄하게 논박했으나 논쟁이 '산으로 가는 걸' 중단시킨 이 장관의 제지로 논전은 더 확대되지 않고 현대세계로 복귀했다.
다산의 경세유표를 다룬 책 집필을 막 끝냈다는 안 선생은 한국경제사의 대가大家이며 경제 통계에 입각한 실증연구로 유명한 낙성대 학파의 창시자다.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NL 대부代父로 운동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나 이후 식민지 근대화론과 중진자본주의론으로 전환, 캐치업 근대화론으로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를 '긍정'하는 사상적 전환을 감행해 진보진영에게 '변절'로 비난받기도 하는 거물이다.
대가와의 논전 일수록 흥미롭고 생산적인 경우가 많다. 이번 토론도 그랬다. 국가의 필수조건인 부국강병을 경시한 조선 지배층의 마인드가 현대 한국문화에 온존되고 있으며, 특히 지식인 사회 저류底流에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총체적 안보위기 앞에서도 무덤덤한 채 현대판 당쟁에 여념이 없는 오늘의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조선 왕조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다.
개혁을 외친 율곡, 다산, 북학파 등의 제안은 조선의 실제 국가정책에 거의 반영되지 않은채 국가가 민중에 대한 착취 위주 정책을 폈다. 안 선생은 이런 내 주장을 일축했고, 나는 선생의 조선경제사 해석도 경제학계의 한 '학설'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촛불을 비롯한 현 시국에 대한 진단, 국가정체성 이슈도 서로 의견이 크게 엇갈렸으나 안 선생은 시종 진지하고 열정적이면서 논쟁적이었으며 자신의 학문에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했다. 82세의 노老학자로선 놀라운 일이다.
헤어지면서 난 그에게 꼭 사상적 자서전을 쓰길 권했다. 현대 한국지성사의 소중한 기록이 될 것이다.
난 많은 부분에서 안 선생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학문적 열정과 패기에서 그는 청춘이 무색한 노익장이었다.
All reactions:51Hyuk Bom Kwon, Jeong-Woo Lee and 49 others
3 comments
10 shares
Like
Comment
Most relevant
오동일
7 y
Like
Reply
손봉래
안병직~ 이명현~
이분들은 '박순실' 물구나무의 인과관계를???
7 y
Like
Reply
김헌률
감사합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