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지젝의 책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에 대한 내 서평('황해문화' 2006년)이다. 그 이후에 난 지젝 책을 읽는 걸 중단했다. 지젝의 길과, 내가 가는 길은 너무나 달랐다. 지젝은 아마 지금도 매해 새 책을 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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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무망한 시대에 혁명을 사유하라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슬라보이 지젝 지음, 도서출판 길, 2006)서평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지젝은 구 유고지역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 난 ‘스타 철학자’로서 ‘동유럽의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사뭇 낯선 인구 2백만의 소국 출신이지만 그는 현재 가장 독창적인 ‘서구 사상가’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독일관념론을 양대 축으로 삼는 그의 사유 실험은 영화이론, 대중문화분석, 미학에서부터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을 거쳐 21세기 정치의 지형과 국가론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끊임없는 특강과 강의로 구미 유수의 대학에서 화제를 모으고 세계 곳곳의 학회를 누비고 있지만 철학자와 사회비판가, 그리고 문화평론가로서의 그의 창조성은 아직 소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국내에도 적지 않은 지젝 매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어 지금까지 번역된 책만도 수십 권에 이른다.
라캉 전문가라는 인상과는 달리 지젝이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라 부른 것은 꽤 오래되었다. 2003년 방한해 강연했을 때도 이 명칭의 함의에 대해 길게 토론한 적이 있는데, 그 토론의 저본 노릇을 한 것이 이 저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제목 만으로도 독자들의 즉각적 반응을 불러온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21세기에 유물론에 입각한 혁명을 운위하다니! 자본주의가 인류의 뇌수와 무의식까지 점령해버린 이 시대에 처절한 실패로 끝나버린 소련 혁명의 창도자이자 볼셰비키 당의 지도자였던 레닌을 화두로 삼다니! 대안이 사라져버린 시대의 대안을 갈구하는 지식사회의 성감대를 어루만지는데 탁월한 능력을 과시하는 지젝은 의도적인 충격요법을 구사한다.
책 앞부분에서 지젝은 총체적 재앙으로 귀결되었던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즉 포스트사회주의 시대에 급진적 좌파혁명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시대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관련해 레닌이 현실사회주의 파탄의 원죄로 간주된다는 것도 인정한다. 현실정치는 결과가 말해주는 것이므로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적대계급을 일소하는 계급투쟁이나 전위당에 의한 폭력혁명의 이념과 실천이 오히려 온전한 사회주의의 꿈, 즉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이라는 마르크스의 비전을 철저히 배반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살아남은 좌파들이 마르크스를 살리기 위해 레닌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통례이기도 하려니와, ‘인본주의적 마르크스’를 운위하는 일반인들도 ‘인간의 얼굴을 한 레닌’에 대해 말하는 경우는 거의 찾기 어렵다. 레닌과 스탈린은 비슷한 범주로 취급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젝 같은 논자가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안이하고 피상적인 해결책이다.
과연 "레닌은 죽었다." 그는 붉은 광장의 창백한 미이라로 누워있으며 궤멸된 사회주의의 기표로 허공에 떠돌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지젝은 극적인 반전을 시도한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지젝은 선언한다. 레닌의 완벽한 죽음은, 레닌 스스로도 알지 못한 "레닌 안에 레닌 자신보다 더 많이 있었던 --- 유토피아적 불꽃이 남아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득세는 오히려 그 불꽃을 내연시키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일극적 세계지배가 제국의 몰락을 내장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 왜 하필 마르크스나 스탈린이 아니고 레닌인가? 약간의 혁명 활동을 했지만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지식인이었다. [자본론]은 세계의 공장이자 제국주의의 모태였던 영국이 구축한 지적 인프라인 대영도서관 고정석에서 쓴 것이다. 이에 비해 스탈린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인 현실 권력투쟁의 달인이자 생래적 마키아벨리스트로서 음험한 비잔틴적 궁정정치를 혁명의 이름으로 체현했다. 편집증에 가득 찬 냉혈한과 교조적이고 독단적인 사회주의 교리가 결합할 때 소련을 휩쓴 전체주의적 大 테러가 이미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레닌은 바로 그 경계선 상에, 즉 마르크스와 스탈린 사이에 있다. 독일로 망명한 패배자 레닌은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당시 유럽의 상황은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거의 제로로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절망적인 정황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 레닌은 무엇을 했던가? 그는 헤겔의 논리학을 정독하는 학습노트를 쓰면서 철학적 성찰을 계속하였다. 동시에 그는 러시아의 사태 전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유하던 레닌은 2월혁명이 발발하자 동료 볼셰비키들의 판단, 즉 그것의 부르주아 혁명적 성격과 멘셰비키들의 단계론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제2인터내셔널의 대기론을 근본적으로 뒤집은 레닌의 판단과 정치적 실천은 단순한 급진적 主意論으로 폄하될 수 없으며, 차라리 민주주의의 근원적 아이러니를 예시하는 것이라 지젝은 본다.
예컨대 정치공동체 테두리 바깥에 놓여있는 Homo Sacer(희생인)의 21세기적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고대 로마인들에게 호모 사케르는 인간이지만 아무런 법적 정치적 권리를 인정받고 있지 못하는 존재이며,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희생인들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그런 대상이다. 이태리의 정치절학자 아감벤(G. Agamben)은 미국이 관타나모 수용자(이른바 ‘이슬람 테러리스트’ 용의자)들을 미국 국내법과 국제법의 ‘외부’에서 다루는 것, 즉 그들이 마치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에 대해 현대 정치의 근원인 주권의 본질적 실재(라캉적 의미의 빈 틈)를 가리키는 현상으로 읽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젝은 고대 그리스 직접민주주의의 혁명적 의의를 평민의 권력 장악뿐만 아니라 ‘배제된 자들이 사회 전체를 대신하는 진정한 보편성으로 등장’한 주체화의 계기로 판독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이 책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지젝의 ‘반시대적 고찰’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단일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강고한 성채에 균열을 내기 위해 채택된 것이다. 레닌의 기동전은 ‘자본론에 反하는’ 10월혁명을 성사시켰다. 자칭 레닌주의자 지젝은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 어떤 급진주의자도 더 이상 변혁의 가능성을 꿈꿀 수 없는 세태를 뚫고 혁명의 원천을 사유한다. 혁명의 잠재력이 사멸한 듯 보이는 시대가 혁명의 가능성을 극한의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는 지평이라는 역설이 레닌주의의 기치 아래 펼쳐지는 것이다.
13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본문은 지젝 類의 ‘혁명적 유물론’을 실험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바깥’을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는 그것의 내파 가능성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그의 말처럼 “누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주체화할 수 있는가”로 귀결된다.
지젝이 독일관념론, 특히 헤겔에 대해 그토록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도 결국은 주체 형성의 문제 때문이다. 이 문제와 연관해 우리는 러시아혁명사의 일단을 상기하게 된다. 말년에 레닌은 스탈린에 대해 갈수록 경계심을 가졌지만 애초에 당 운영의 핵심 직위에 스탈린을 임명한 것은 다름 아닌 레닌 자신이었다. 스탈린이 권력을 착착 굳혀가던 와중에 발생한 레닌의 연이은 심장발작은 그의 지력과 신체뿐 아니라 탁월한 전략가로서의 기능도 마비 상태에 빠뜨리고 만다. 결국 레닌은 공산당 전체회의에서 자신의 사후에 발표될 유서의 형태로 스탈린을 숙청하려 한 주관적 의도와 관계없이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의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히게 된다.
레닌의 때 이른 퇴장은 러시아 혁명의 총체적 타락에 대해 레닌에게 상당한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닌이 정식화한 볼셰비키 혁명의 구조와 동학, 그리고 혁명 지도부의 면면을 보면 혁명의 진로가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카메네프나 지노비에프, 또는 트로츠키나 부하린이 스탈린의 자리를 대신했더라도 레닌이 착근시킨 혁명의 구조와 동학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은 레닌이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를 타격하기 위해 수립한 혁명적 주체화의 전략이 당 내부에서나 전(全)사회적으로 원천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나의 이런 비판이 어느 정도 유의미한 것이라면, 지젝이 책 말미에서 강조하는 “레닌이라는 기표가 가진 전복적인 측면”은 유명무실해지고 만다고 나는 본다. 결국 혁명에 대한 근본적 사유라는 지젝의 실험은 근본적으로 공허한 것이다.
그러나 지젝에게도 할 말은 있다. 라캉에게 있어 실재계는 零 그 자체, 즉 공허로서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다. 사태의 뿌리를 드러내려는 지젝식 급진주의(Radicalism)는 그 공허로서의 실재와 맞부딜 칠 때 빛을 발한다. 지젝은 이런 역설을 온몸으로 증거하는, 아마도 데리다 이후 가장 생산적이고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상가일 것이다.
지젝의 텍스트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지식의 향연은 우리를 매혹한다. 근본적인 것을 사유함으로써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그의 재기발랄함은 눈부실 정도다. 나는 이 저작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수많은 자료와 사례들을 버무려 현란한 생각의 탑을 쌓아 올리는 지젝의 솜씨는 여전하지만 이 책이 ‘읽히는 데’는 역자의 공이 컸다. 복합성의 사상가 지젝의 불투명할 수밖에 없는 글이 번역자의 지젝 이해를 바탕으로 투명한 한국어로 옮겨져 있다.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는 혁명이 무망한 시대에 좌파혁명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책이다. 나는 지젝의 사유에 동의할 수 없지만, 좌파혁명의 가능성을 자본주의 내부에서 모색하고 있는 한 ‘레닌주의 실천이론가’의 고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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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무망한 시대에 혁명을 사유하라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슬라보이 지젝 지음, 도서출판 길, 2006)서평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지젝은 구 유고지역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 난 ‘스타 철학자’로서 ‘동유럽의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사뭇 낯선 인구 2백만의 소국 출신이지만 그는 현재 가장 독창적인 ‘서구 사상가’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독일관념론을 양대 축으로 삼는 그의 사유 실험은 영화이론, 대중문화분석, 미학에서부터 칸트, 헤겔, 마르크스 등을 거쳐 21세기 정치의 지형과 국가론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끊임없는 특강과 강의로 구미 유수의 대학에서 화제를 모으고 세계 곳곳의 학회를 누비고 있지만 철학자와 사회비판가, 그리고 문화평론가로서의 그의 창조성은 아직 소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국내에도 적지 않은 지젝 매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어 지금까지 번역된 책만도 수십 권에 이른다.
라캉 전문가라는 인상과는 달리 지젝이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라 부른 것은 꽤 오래되었다. 2003년 방한해 강연했을 때도 이 명칭의 함의에 대해 길게 토론한 적이 있는데, 그 토론의 저본 노릇을 한 것이 이 저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제목 만으로도 독자들의 즉각적 반응을 불러온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21세기에 유물론에 입각한 혁명을 운위하다니! 자본주의가 인류의 뇌수와 무의식까지 점령해버린 이 시대에 처절한 실패로 끝나버린 소련 혁명의 창도자이자 볼셰비키 당의 지도자였던 레닌을 화두로 삼다니! 대안이 사라져버린 시대의 대안을 갈구하는 지식사회의 성감대를 어루만지는데 탁월한 능력을 과시하는 지젝은 의도적인 충격요법을 구사한다.
책 앞부분에서 지젝은 총체적 재앙으로 귀결되었던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즉 포스트사회주의 시대에 급진적 좌파혁명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시대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관련해 레닌이 현실사회주의 파탄의 원죄로 간주된다는 것도 인정한다. 현실정치는 결과가 말해주는 것이므로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적대계급을 일소하는 계급투쟁이나 전위당에 의한 폭력혁명의 이념과 실천이 오히려 온전한 사회주의의 꿈, 즉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이라는 마르크스의 비전을 철저히 배반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살아남은 좌파들이 마르크스를 살리기 위해 레닌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통례이기도 하려니와, ‘인본주의적 마르크스’를 운위하는 일반인들도 ‘인간의 얼굴을 한 레닌’에 대해 말하는 경우는 거의 찾기 어렵다. 레닌과 스탈린은 비슷한 범주로 취급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젝 같은 논자가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안이하고 피상적인 해결책이다.
과연 "레닌은 죽었다." 그는 붉은 광장의 창백한 미이라로 누워있으며 궤멸된 사회주의의 기표로 허공에 떠돌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지젝은 극적인 반전을 시도한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지젝은 선언한다. 레닌의 완벽한 죽음은, 레닌 스스로도 알지 못한 "레닌 안에 레닌 자신보다 더 많이 있었던 --- 유토피아적 불꽃이 남아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득세는 오히려 그 불꽃을 내연시키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일극적 세계지배가 제국의 몰락을 내장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 왜 하필 마르크스나 스탈린이 아니고 레닌인가? 약간의 혁명 활동을 했지만 마르크스는 기본적으로 지식인이었다. [자본론]은 세계의 공장이자 제국주의의 모태였던 영국이 구축한 지적 인프라인 대영도서관 고정석에서 쓴 것이다. 이에 비해 스탈린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 늑대인 현실 권력투쟁의 달인이자 생래적 마키아벨리스트로서 음험한 비잔틴적 궁정정치를 혁명의 이름으로 체현했다. 편집증에 가득 찬 냉혈한과 교조적이고 독단적인 사회주의 교리가 결합할 때 소련을 휩쓴 전체주의적 大 테러가 이미 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레닌은 바로 그 경계선 상에, 즉 마르크스와 스탈린 사이에 있다. 독일로 망명한 패배자 레닌은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당시 유럽의 상황은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거의 제로로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절망적인 정황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 레닌은 무엇을 했던가? 그는 헤겔의 논리학을 정독하는 학습노트를 쓰면서 철학적 성찰을 계속하였다. 동시에 그는 러시아의 사태 전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사유하던 레닌은 2월혁명이 발발하자 동료 볼셰비키들의 판단, 즉 그것의 부르주아 혁명적 성격과 멘셰비키들의 단계론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제2인터내셔널의 대기론을 근본적으로 뒤집은 레닌의 판단과 정치적 실천은 단순한 급진적 主意論으로 폄하될 수 없으며, 차라리 민주주의의 근원적 아이러니를 예시하는 것이라 지젝은 본다.
예컨대 정치공동체 테두리 바깥에 놓여있는 Homo Sacer(희생인)의 21세기적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 고대 로마인들에게 호모 사케르는 인간이지만 아무런 법적 정치적 권리를 인정받고 있지 못하는 존재이며,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희생인들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그런 대상이다. 이태리의 정치절학자 아감벤(G. Agamben)은 미국이 관타나모 수용자(이른바 ‘이슬람 테러리스트’ 용의자)들을 미국 국내법과 국제법의 ‘외부’에서 다루는 것, 즉 그들이 마치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에 대해 현대 정치의 근원인 주권의 본질적 실재(라캉적 의미의 빈 틈)를 가리키는 현상으로 읽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젝은 고대 그리스 직접민주주의의 혁명적 의의를 평민의 권력 장악뿐만 아니라 ‘배제된 자들이 사회 전체를 대신하는 진정한 보편성으로 등장’한 주체화의 계기로 판독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이 책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지젝의 ‘반시대적 고찰’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단일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강고한 성채에 균열을 내기 위해 채택된 것이다. 레닌의 기동전은 ‘자본론에 反하는’ 10월혁명을 성사시켰다. 자칭 레닌주의자 지젝은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 어떤 급진주의자도 더 이상 변혁의 가능성을 꿈꿀 수 없는 세태를 뚫고 혁명의 원천을 사유한다. 혁명의 잠재력이 사멸한 듯 보이는 시대가 혁명의 가능성을 극한의 방식으로 실천할 수 있는 지평이라는 역설이 레닌주의의 기치 아래 펼쳐지는 것이다.
13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본문은 지젝 類의 ‘혁명적 유물론’을 실험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바깥’을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는 그것의 내파 가능성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그의 말처럼 “누가 오늘날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주체화할 수 있는가”로 귀결된다.
지젝이 독일관념론, 특히 헤겔에 대해 그토록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도 결국은 주체 형성의 문제 때문이다. 이 문제와 연관해 우리는 러시아혁명사의 일단을 상기하게 된다. 말년에 레닌은 스탈린에 대해 갈수록 경계심을 가졌지만 애초에 당 운영의 핵심 직위에 스탈린을 임명한 것은 다름 아닌 레닌 자신이었다. 스탈린이 권력을 착착 굳혀가던 와중에 발생한 레닌의 연이은 심장발작은 그의 지력과 신체뿐 아니라 탁월한 전략가로서의 기능도 마비 상태에 빠뜨리고 만다. 결국 레닌은 공산당 전체회의에서 자신의 사후에 발표될 유서의 형태로 스탈린을 숙청하려 한 주관적 의도와 관계없이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의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히게 된다.
레닌의 때 이른 퇴장은 러시아 혁명의 총체적 타락에 대해 레닌에게 상당한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닌이 정식화한 볼셰비키 혁명의 구조와 동학, 그리고 혁명 지도부의 면면을 보면 혁명의 진로가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카메네프나 지노비에프, 또는 트로츠키나 부하린이 스탈린의 자리를 대신했더라도 레닌이 착근시킨 혁명의 구조와 동학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은 레닌이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를 타격하기 위해 수립한 혁명적 주체화의 전략이 당 내부에서나 전(全)사회적으로 원천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나의 이런 비판이 어느 정도 유의미한 것이라면, 지젝이 책 말미에서 강조하는 “레닌이라는 기표가 가진 전복적인 측면”은 유명무실해지고 만다고 나는 본다. 결국 혁명에 대한 근본적 사유라는 지젝의 실험은 근본적으로 공허한 것이다.
그러나 지젝에게도 할 말은 있다. 라캉에게 있어 실재계는 零 그 자체, 즉 공허로서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다. 사태의 뿌리를 드러내려는 지젝식 급진주의(Radicalism)는 그 공허로서의 실재와 맞부딜 칠 때 빛을 발한다. 지젝은 이런 역설을 온몸으로 증거하는, 아마도 데리다 이후 가장 생산적이고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상가일 것이다.
지젝의 텍스트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지식의 향연은 우리를 매혹한다. 근본적인 것을 사유함으로써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그의 재기발랄함은 눈부실 정도다. 나는 이 저작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수많은 자료와 사례들을 버무려 현란한 생각의 탑을 쌓아 올리는 지젝의 솜씨는 여전하지만 이 책이 ‘읽히는 데’는 역자의 공이 컸다. 복합성의 사상가 지젝의 불투명할 수밖에 없는 글이 번역자의 지젝 이해를 바탕으로 투명한 한국어로 옮겨져 있다.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는 혁명이 무망한 시대에 좌파혁명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책이다. 나는 지젝의 사유에 동의할 수 없지만, 좌파혁명의 가능성을 자본주의 내부에서 모색하고 있는 한 ‘레닌주의 실천이론가’의 고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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