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yung-joong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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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는 왜 지적·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자부하는가? 그런 자부심에 객관적 근거가 있는가?
좌파 지성이 과대 평가되는 이유는 우파 지성이 과소 평가되는 이유와 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약자와 억압 받는 자를 위해 싸운다고 주장하는 좌파 지성은 진보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따라서 좌파 지성은 역사의 대의를 위해 복무한다고 자부하며 스스로가 선과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한다.
반면에 우파 지성은 복합적 현실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지 않으며 자신을 선과 정의의 대변자로 여기지도 않는다. 우파 지성은 현실의 큰 틀을 지키면서 체제 오류를 점진적으로 개혁하려는 입장이므로 보수주의자에 머물거나 최악의 경우 기회주의자로 여겨지기 일쑤이다.
좌파와 우파가 만날 때 좌파의 목소리가 크고 선명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레토릭의 선명성과 호소력에 있어 우파의 경쟁력은 좌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하다고 할 수 있다. 담론의 지평에서 좌파와 우파의 만남은 태생적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좌파를 진보로, 우파는 보수로 규정한 진보좌파와 보수우파의 구별은 이런 도식에서 비롯되었다.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근·현대 세계에서 진보좌파의 모델은 마르크스주의였고 보수우파의 모델은 자유주의였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유주의는 극복되어야 할 부르주아 사회의 반동적 잔재에 불과했다. 모든 이들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미래사회는 부르주아 시스템을 영구적으로 철폐한 사회주의(공산주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공식 교리였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설파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는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디스토피아적 현실에 의해 파탄에 이르렀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역사 현실에 의해 부정되어 버린 것이다. 그게 20세기 현대사의 쓰라린 교훈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종말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논증’한 ‘과학적 예측’의 '최종 심급'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게 이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확신이다. 이론과 실제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이들은 소수화하고 과격화하면서 자기들만의 폐쇄적 이론의 성채 속으로 칩거하게 된다.
역사 현실이 자신들의 신념과 다르게 전개되면 이들은 핵심 이론을 수정하기보다 숱한 보조 가설을 동원해 빠져나가거나 팩트 자체에 눈을 감게 된다.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점차 종교화되어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제 극소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구세주 재림의 날인 휴거가 오지 않자 휴거를 끊임없이 미래로 미루는 신흥종교 교인 집단 비슷하게 고립되어 간다.
진보좌파의 모델이 마르크스주의였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와 진보좌파가 동일한 것은 결코 아니다. 현대 진보좌파의 상당수는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사회민주주의나 민주사회주의, 생태주의와 페미니즘, 아나키즘 등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수정하였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를 중심축으로 하는 보수우파에 대해 진보좌파가 갖는 본질적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보좌파는 여전히 자신들이 보수우파에 비해 지적·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자부한다. 그런 우월감으로 무장한 진보좌파가 대학과 지식사회의 담론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게 한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의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이론과 담론의 타당성은 오직 현실에 의해서만 판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사상체계도 자기충족적일 수 없다. 그게 이론과 실천, 실천과 이론 사이에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무한 검증의 체계이고 이것이 과학적 의미에서 진리에 이르는 보편적 길이다.
따라서 진보좌파와 보수우파를 기계적으로 나누는 개념쌍은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이는 때와 장소에 따라 우파도 진보적일 수 있으며 좌파도 보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나아가 좌파와 우파의 지적·도덕적 우월성 여부도 역사 현실과 대면함으로써 엄밀하게 검증되어야 한다. ‘과연 역사의 특정 국면에서 특정 진보좌파는 특정 보수우파에 비해 지적으로 뛰어나고 도덕적으로 우월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짚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사회의 풍경을 압축한 나의 이런 그림은 매우 소략하지만 현대세계의 결정적 이면을 건드리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예컨대 6·25전쟁 이해에서 진보좌파 사르트르는 틀렸고, 보수우파 레이몽 아롱은 옳았다.
1950~70년대뿐 아니라 근래까지 진보좌파 사르트르가 시대의 양심으로 추앙되며 세계적 명성을 구가하고 무수한 추종자들을 거느린 데 비해, 보수우파 레이몽 아롱은 시대의 반동으로 비난받으면서 따돌림당했고 대중에게 망각의 저편으로 침몰해 들어갔다. 그런 레이몽 아롱이 21세기 들어 부활하고 있다.
사르트르 자신이 창립을 주도했으며 프랑스 진보좌파의 기수인 ‘리베라시옹’지는 2017년 7월 2일자 기사에서 “오호라! 레이몽 아롱이 옳았다!”고 선언하면서 사르트르의 파산을 선고하고 있다.
진보좌파 사르트르와 보수우파 레이몽 아롱의 이데올로기 논쟁에서 레이몽 아롱은 완승을 거두었고 프랑스 진보좌파조차 그것을 흔쾌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중국 문제', 그리고 '북한 문제'에 대한 이해에서 우파와 좌파의 간극이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단순화하자면 이 사안에서 '진보우파'와 '보수좌파'의 출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진보좌파와 보수우파라는 관행적 표현을 거부하는 이런 새로운 명명법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푸틴의 러시아'와 '시진핑의 중국', 그리고 '김정은의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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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gin Lee
좌파 VS 우파.
일반인이 잘 모르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을 오늘 확실히 배우고 갑니다.
긴 글이지만 너무 평의하게
쓴 글이라 단숨에 잘 읽었습니다.
Pyung-joong Yoon
Gangin Lee 감사합니다. 에셰이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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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진보좌파? 한국의 진보좌파로 자부!하는 사이비진보지식인들은 '아편중독자'를 넘어 탐욕의 화신이 된지 이미 오래가 아닌가요? 진보좌파 행세를 하는 사이비 진보지식인들의 탐욕을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입니다. 윤 교수의 예리한 글들을 보면서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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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ung-joong Yoon
장기표 갑자기 쓴 글이어서 에세이입니다. ㅎ
Samuel Chung
좋은 배움의 시간을 주시네요, 감사합니다
읽으면서 떠 오르는 두분 목사가 한경직 그리고 김재준 ,이분이 카나다 망명전 진보 좌익의 우월성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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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ung-joong Yoon
Samuel Chung 두 분은 따로 분석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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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렬
진보좌파의 태생이 무산계급이예요. 무산계급의 특성이 좌파라 보여집니다. 선동적이고 설득적이며 지성을 가장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천박한 근성이 있습니다. 글 잘 보았습니다. 공감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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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ung-joong Yoon
전병렬 그렇게 보실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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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렬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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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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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
많이 공감합니다. 좌파는 역사적으로 현실세계에서의 무능을 드러냈는데, 우파의 담론의 빈곤 또한 여전한듯 합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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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ung-joong Yoon
유창선 유 박사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담론의 빈곤에서 비슷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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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연
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봅니다. 나머지는 그저 견해차이일 뿐입니다.
Pyung-joong Yoon
변종연 바이든-날리면은 팩트의 영역이고, 나머지의 대부분도 팩트의 영역에서 측정가능......
Jerry Jongil Ahn
한국에서 양대정당을 놓고 보면 이들은 보수의 동일한 전철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왼편 팔다리와 오른편 팔다리를 붙여서 보수우파네 보수좌파네 하는 모양새이며 이것은 결국, "기득권 지키기"라는 놀랍지도 않은 사실에 기함을 토하고 만것이 그동안 보아온 대선공약이나 총선공약이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투입예산의 강약이 Detail에서 조금 다를 수는 있으나, 유사단어의 표현만 다를 뿐 그 공약의 내용을 분석해보면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어제의 파란색은 빨간색이 되었고 어제의 빨간색은 파란색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방송에 나오는 정치행태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속히 타파하고 직접민주주의의 대안정당이 깨어있는 시민의 힘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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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hul Lee
정서적 흐름이 잘 정리되어 있네요. 잘 배우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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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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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Cheol Park
공유합니다 교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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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on Kwaak
Paris의 Club de St. Honore에서 레이몽 아롱과 점심하며 그냥 손자 손녀 이야기하며 즐겼던 기억이 되살아 나네요. 오전 시간은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는 다드라구요. 그리고 오후에 Blvd Raspail사무실에서 우리 남북통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면서 Totalitarianism and Democracy, War and Peace 제목의 책 두권을 주며 purposeful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을 풍기셔서 좋은시간 가졌었습니다.
늘 윤박사님의 글에 매료됩니다. 감사합니다!
Yeocheol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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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녕
과학적 글이군요^^
감사합니다.
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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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jin Ah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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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ᆢ
쉽게 이해에 이르게 하는 깊은 글ᆢ잘 읽었습니다
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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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 Shick Seo
린드버그 안경을 쓰고,아르마니아 양복을 입고,자녀들은 해외유학을 보내고,시민사회단체에서 일하면서 정부정책자금을 빼먹고,정치인이 되는 것이 한국진보좌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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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Wonbae
100% 공감합니다. 진보우파와 보수좌파가 대부분인 나라가 선진국이겠지요~ 이런 기준에서는 우리나라는 아직 선진국이 못 되는것같아서 안타깝습니다.
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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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seong Lee
많이 배웠습니다. 이맛에 페이스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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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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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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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합니다!
Seol Han
잘읽었습니다. 저는 일단 한국사회에서 진보 보수 우파 좌파란 사이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념적인 구분보다는 현실주의적인 접근이 먼저 이루어저야 할 것 같습니다. 국내문제는 진보와 보수, 좌파, 우파의 접근 방법이 가능하겠지만, 국제정치의 문제는 그런 접근 방법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정치에서는 오로지 현실주의적인 접근 방법만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간략하게 제 생각을 사족으로 붙였습니다
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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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 Jung-Kwan
동감입니다!
Tae An Choi
너무 좋은글이며 생각하게 하는 깊이 있는 글입니다...공유합니다
Choong Nam Kim
객관성과 합리성을 무시하는 한 좌파든 우파든 민주시민으로 자격미달이다.
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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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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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감사합니다. 우리의 경우는 우파 주도의 산업화 이후 좌파 주도의 민주화가 있었는데, 그 선후관계가 이런 상황을 낳았다고 봅니다. 마치 대한민국이 가난했던 시절 흔히 각 가정마다 벌어졌던..곧 맏이들이 공장에 나가 벌이해 가장 역할하며 동생들을 공부시켜 출세토록 해 놓으면 오히려 그 동생들이 그들을 위해 몸받쳤던 형 누나를 자신도 모르게 무시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는데, 대한민국의 진정한 사회통합은 민주화 세력인 좌파가 대한민국의 물적 토대를 세운 산업화 세력인 우파의 그 공로를 진심으로 인정해줄 때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는 어르신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그들의 울분을 깊이 느끼는데, 그러면서 지나간 과거에서 이른바 좌파의 길을 걸어오면서 반쪽 세상만 봤던 제 자신을 반성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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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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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young Kim
Tae-ho Kim
저는 솔직히, 포스팅 등에서 좌파 우파 분류하는 사람들의 글은 (한계가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분이 대부분이겠지만서도...) 그리 읽고 싶지 않습니다. 저 역시도 '잠정적으로' 사용할 때도 있었겠지만, 좌파 우파 이런 분류나 도식이 들어가면 제끼는 편입니다. 윤 교수님의 글은 예외적으로 읽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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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홍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은 사회변화를 해석하는 이론의 정립에 게으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서구의 이론 수입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한국 산업 특히 제조업은 로봇 도입 비율이 세계1위라고 합니다. 노동자 1,000명당 로봇 도입 대수를 비교한다고 합니다. 4차산업 혁명이 회자된지 오래되었습니다. 모두 노동의 종말을 우려합니다. 한국의 기업들은 치열한 국제 경제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이념 정립에 있어서 산업구조와 노동의 관계가 중심이 되어 왔습니다. 이제 후기 산업사회를 넘어 지식정보화시대, 디지털경제, 4차산업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국의 산업과 노동이 어떠한 틀을 형성하고 노동, 복지, 인권, 정치, 사회시스템이 어떻게 체계를 갖추어가야 하는지 지식인과 국민은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요?
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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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홍
우리는 비생산적 파괴적 허위 보수진보담론에 갖혀 있습니다. 산업과 노동이 질곡에서 신음해도 수십년전 보수진보 담론만 확성기에 틀어 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작은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의 산업과 노동에 맞는 시스템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의 역할이 어느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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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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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홍
참여정부 당시 노동운동이 격화되고 있을 때 GS칼텍스노조는 기존의 4조3교대 근무제를 5조3교대 근무제로 전환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하였습니다. 사용자 측은 강경대응으로 노조활동을 대처하였습니다. 상대적으로 고액의 임금을 받고 근무여건은 최고의 환경이었습니다. 노동의 요구가 어느 정도까지 가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기업은 생산성이 없는 근무제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진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최근에는 근무시간 단축을 노동운동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90년대 유럽은 주35시간 근무제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진지한 모색이 필요합니다. 산업 더 밀착하여 기업의 노동생산성과 기업의 생존을 동시에 고민해야 합니다.
박천홍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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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홍
전세계 경제 자산시장은 계속 부풀어 가고 양극화는 극단으로 가고 있습니다. 정치는 나태합니다. 유럽에서 전통적 보수진보정치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보다더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은 국가시스템의 부패입니다.
송문희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좌.우파 모두 선악이분법에 빠져있는것같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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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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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oon Kwaak
윤대사님, 나라 이메지가 좀 더 나아지게 노고가 많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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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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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현
우리나라에 보수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우리나라는 친일매국노와 수구독재자들이 이익집단으로 형성된 모리배들만 있다.
어떻게 진보와 같은 선상에 놓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를 형성한 것과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이념 논리 자체가 다르다. 보수가 나라를 위해 일했는가? 자기들 이익만을 위해 온갖 어둠의 짓을 일삼았던 과거를 잊고, 고상한 척 나라를 위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어이가 없다.
물론 급진 세력은 좌우를 막론하고 있지만, 이들은 의식 자체가 다르기에 대화가 불가능한 논외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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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훈이
저는 그래서 항상 어떤 이념이나 사상이란 것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을 때야 말로 그 사상의 현실적 한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나 다들 필요에 의해서 생성됩니다. 자유주의의 뿌리는 절대왕정을 앙시앵 레짐으로 비판하며 성립되었고, 그들이 헤게모니를 쥐었을 때 자유는 부르주아의 이권을 수호하고 노동자 착취를 정당화 하는 이념으로 흘러갔지요. 맑스주의 역시 이런 부르주아 이념인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왔고, 소련이란 현실태로 형상화 됐을 때 그 한계가 입증되었지요.
결국 이런 헤게모니를 쥐었을 때가 이념과 사상이 스스로를 입증해야 할 그 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요. 운동권들이 만들어낸 진보정권이 딱히 보수 정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했는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었음 역시 입증되었고요.
이 입증하고 검토하는 과정이야 말로 합리성의 핵심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당장 아렌트가 찬양하던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도 자신들의 탁월함, 덕을 입증해서 누가 더 잘났고 못났는지를 가려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고, 이는 플라톤 대화편에서도 잘 드러나지요. (항상 자기 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에게 그걸 입증해서 보여달라고 부탁하는 소크라테스가 대표적 예시)
문제는... 현대의 '좌파',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 조류는 이런 검증과 입증, 검토에 대한 것 자체를 두려워 하고 거부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객관적 현실의 거부, 이성의 거부. 다원주의라는 아름다운 미명 하에 말이죠. 이런 부분은 카진스키의 '산업사회와 그 미래'에 잘 비판되어있고요. (좌파주의 운동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열등감이다. 좌파들은 강한 것, 좋은 것, 성공한 것의 이미지를 지닌 것이라면 무엇이든 증오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저는 좌파 운동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보를 표방하고 있지만 나아지는 건 없습니다. 오로지 끊임없이 어느 하나가 탁월함이나 우월성을 입증하고 그걸로 자신의 헤게모니의 타당성을 선포하는 것 자체를 피로할 정도로 경계하고 두려워 때문이지요. 이래서 나아지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를 말하자면, 없지요. 예.
그래서 결론적으로, 좌파에게 그런 지적,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객관적 근거가 있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걸 애초부터 거부한다고 이야기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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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ung-joong Yoon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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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 Hak Sa
진보좌파는 피해의식에, 보수우파는 과대망상의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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