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7

Philo Kalia - *동학답사後記 종로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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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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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답사後記

종로지역은 동학과 천도교 관련 흔적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동학 관련 사건들에서 흘린 핏물이 땅에 스며들어 얼어붙었다가 다시 봄이 와 해빙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고독의 땅이다.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에서 신동엽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로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하여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10시 종각역 5번출구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앞에 26명이 모였다. 오늘 답사 해설사는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대표 박길수 선생이다. <모시는사람들>은 동학과 천도교 및 개벽사상 관련 전문 출판사이다. 박길수 선생은 오랫동안 동학과 천도교를 연구하신 분이다. 
6차 강의 진행.

1차 강의

녹두 장군의 포즈는 안도현의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의 모델이 아니라 일본인의 도끼로 무릎에 맞은 전봉준이 들것(단카)에 실려 나가는 사진, 시선이 아주 날카롭다. 녹두 장군은 참형을 당한 것이 아니라 1895. 4. 25 에는 참형이 없어지고 교수형을 당한다. “나를 죽이려면 종로 네거리에서 죽이는 것이 옳거늘 캄캄한 감옥에서 죽일 수 있단 말이냐” 일본 신문 기사에 많은 내용들이 나온다. 일본이 동학과 조선의 사정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일본의 고급 장군들이 조선을 탐색하기 위해 오다.
건너편 제일은행 본점은 재판소 터, 의금부 이후 재판소로 바뀐 곳에서 재판을 받음, 해월도 여기서 재판 받음, 3.1 운동 당시에도, 정동의 서울미술관 자리도 재판소. 번호표 받음 사람만 입장 가. 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신영우 학자의 주도로 전국민 모금 운동을 해서 여기에 1918년 4월 24일에 세워짐. 서울은 사실 동학의 천국, 동학의 사적지가 너무 많이 널려있다. 서울역사공원은 천주교 성지가 아니라, 그냥 서울역사공원이다. 이름 없는 의병들이 처형당한 곳이다. 1893년 복합상소가 광화문, 7월 23일에는 경복궁 점령, 고종을 볼모, 군인 무장 해제. 동학 2차전쟁 발원지는 경복궁. 1893년 복합상소시 벽서운동(대자보)에서 늬네 나라로 돌아가고 우리 나라를 침탈하지 말라는 대자보를 여기저기(외국 공관 등) 붙임. 김구 선생이 애기 접주로 황해도에서 참여.
탑골 공원으로 이동하다가 김응교 교수님이 바로 이 자리가 김수영 시인이 태어난 집이라는 곳을 소리높여 알려서 보니 표지석이 있다. 거기를 얼마나 무심히 통과 했던가. 알아야 보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
삼일운동에 참여한 동학 대접주들은 6분 중 3분이 동작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서울은 동학의 도시다.
1차 동학강의후 이동중 김수영 생가터. 박인환이 자주가는 아지트 확인하며 탑골공원까지 도보 걷기 .
2차 강의
삼일문을 지나 탑골공원에서 최시형 2대접주와 주변인물 동학활동관련 2차 강의
탈골에서는 의암 손병희 선생 중심,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
최초의 근대식 왕실에서 세운 공원
1956년에 이승만 동상 있었음
1960. 4. 26에 세가지 큰 사건: 교수님들이 연대 시위, 이승만 동상 끌려내려짐, 남산의 동상과 함께, 이승만 하야. 서울에 다시 이승만 기념관을 중심에 세운다는 것이 역사의 반역.
우금치 전투는 남북 접주의 동학군들의 모여 최후 접전했던 전투.
의암 손병희가 전봉준과 결의. 일본과의 엄청난 무력의 차이로 공주 시내로 들어가지 못하고 참패. 그후 일본군의 패주해서 남하하는 동학군을을 끝까지 추적하여 모두 몰살. 김개남, 손화중, 김덕용, 그리고 전봉준 모두 잡힘.
3.1운동이 끝나, 국내외 7개의 임정이 만들어짐, 그중 3개의 대통령이 손병희. 당시 의암은 감옥수감. 상해와 한성 임정이 중요. 한성은 의회 형태로 정부구성, 인민의 민의를 반영하여 임정, 상해임정으로 합치 1919년 4월 13일 구성. 이승만 동상 제치고 손병희 동상이 세워진 것은 역사적 정통성, 사실 국부는 이승만이 아니라 손병희!
3.1문. 해방직후, 1967년 박정희가 친필로, 2003년 에 다시 3.1문으로 글자를 고증하여 바꿈
이 주변에 아케이드가 많았고 일제 때는 방정환의 기록으로 보면 완전 핫플레이스. 원조교제 장면, 요정, 요릿집, 연못, 정자들이 많았다. 노동자들끼리 모여 정담, 한담, 세상타령, 포장마차들도 있었다. 사대문 안 만 서울, 밖은 모두 경기도. 방정환이 품위 있는 사람이 아니라, 편력이 좀 있는 사람, 이런 얘기가 재밌다는 김응교 교수님의 목소리
3차 강의
단성사 앞 최시형 순교 장소
다시 이동 현재 종로 주민센터 옆에 골목 도착 3.1 기미독립선언 관련 기획 활동과 천도교 관련 3차 강의 듣고 이동 .
4차 강의
정독도서관 계단에서 햇살 받으며 경기중 덕성여중등 천도교 ( 동학 ) 교도 들이 교육사업을 통한 독립운동과 동학관련 활동 4차 강의 이동.
동덕... 덕성 .... 보성중고등학교, 천도교 초기 운동을 위한 건물을 짓기 위해 많은 모금을 했는데, 그 돈중 상당 부분이 3.1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감. 최린(천도교), 이승훈(기독교). 3.1운동은 최린의 기획 작품, 최린, 권동진, 오세창 3인방. 손병희가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 개벽 1920년 6월 25일 창간, 26년 까지. 소파의 결혼도 천도교 교당에서 이루어짐. 의암이 아들 없고 딸이 5, 셋째 딸하고 결혼, 양자 사위가 됨. 소파가 큰 나무인 의암의 딸과 결혼했으니 가정적이었을까 의문. 소파는 처음 청혼에서 거절 당함, 빼빼 말라서. 조계사 자리는 원래 보성의 자리. 보성사라는 인쇄소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
경기고등학교. 조재호 교장, 교육자, 부자, 일제말기 문교부장관, 친일파로 등재되었지만 색동회를 부단히 지원. 명문으로서의 경기고를 이룬 사람
덕성여중 터에서 역사 유적지 살피고 < 선천(宣川 > 식당으로 로 이동 식사및 교류 . 황석형의 <손님>의 배경인 황해도 선천, 주인장 할머니는 정정한 94세의 노익장
5차 강의
천도교 회당 마당에서 시일식 < 기독교로 치면 예배 불교로 치면 법회 >및 천도교 : 동학을 천도교로 변경: 관련 5차 강의 들음. 교당 안 보기는 처음이다. 공간에 기둥이 없어 Y와 함께 대중 강연과 집회의 단골 장소.
6차 강의
마지막으로 천도교 중앙 대교당 바로앞 어린이 선언문이 쇄겨진 방정환 표식앞에서 방정환 선언문 6차 강의 들음. 1920년에 완공
기독교와의 연합이 늦어진 것은 천도교가 무장투쟁을 하지 않나 의심, 의심해소에 오래걸림.
이 건물이 없었으면 3.1운동이 없었다. 삼일이 없었으면 임정도 없었다.
일정 마치고 조계사 뒤편을 지나면서 독립관련 신문인쇄한 곳 등등 근현대사 관련지 찿아 보고. 연합뉴스 건물에서 담소. 자세한 강의 기록은 좀더 기억을 되살려 내야 함
덧1:
어른이 어린이를 내려누르지 말자
삽십년 사십년 뒤쳐진 옛사람이 삼십년 사십년 앞선 옛사람을 잡아 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사람을 위하고 떠 바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데로 나아갈수 있고 새로워 질수가 있고 무덤을 피할수 있는 것이다
<1930년 7월 방정환 강의중 어록>
역사의 단절을 심하게 느꼈던 근현대사
같이 걷는 도반들의 길위에서 열려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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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개벽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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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거닐면 여기 저기 프랑스 혁명의 자취가 있다. 김영 교수님께서 안내해주신 파리 시청에 안나 조각상,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에 마리안 동상부터 파리 곳곳은 혁명의 흔적이 넘친다. 건물 벽에 그 집에 살았던 주부 혁명가, 노동자 혁명가, 학생 혁명가들의 이름이 세겨진 동판들이 독특해 보였다. 어제 서울 시내를 다니면서 서울이야말로 4.19혁명, 촛불혁명 이전에 동학농민개벽이 곳곳에 이어지는 '개벽의 도시'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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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야학하던 독서실에서 우연히 시집 하나를 꺼냈다가 정신없이 읽었다. 끝까지 읽을 무렵 어두워졌고, 안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야학 교실문을 경비가 잠가버려서 갇힌 적이 있다. 스무살 청년의 정신을 온통 흡입해버린 책은 신동엽 서시시 「금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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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배경이 되는 동학혁명을 몰라 혼자 책을 구해 읽고, 이이화 선생님의 역사기행을 따라다니며 우금치, 전봉준 생가를 다녔지만, 1987년 「신동엽 시 연구」로 석사논문을 썼을 때, 내 겉핥기 동학공부는 빈천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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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여러 모임을 만들어 동학사상과 역사를 공부해 왔지만, 아직도 공부가 부족하다. 1990년에 정석종 선생의 「조선후기 사회변동 연구」, 1993년에 나온 신용하 교수의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쓴 「The German revolutions: The Peasant War in Germany」 등을 소설가 김주일, 민청련의 벗 한영수 등과 함께 읽었지만 역사의 흐름만 알았지, 동학사상의 깊이에 이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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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세 모임에서 동학을 공부한다.
첫째는 동학과 서학(기독교)를 공부하는 모임이다. 학회 수준의 내공이 깊은 연구자들이 모여 있다. 동학은 한울사상에 이르기까지 유학→서학의 신론을 내재신론(內在神論)으로→정감록의 대중적 표현→불교의 개인해탈주의를 수용 혹은 변용하면 깊어지는데, 기독교회사에서 동학과 서학의 관계 연구는 그리 깊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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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매주 한 번 최시형의 「해월신사법설」을 강독하는데, 김태창 교수님, 신용하 교수님, 한문학자 윤세형 선생님 등과 함께하여 다른 시각에서 많이 배운다.

셋째는 한 달에 한 번 신동엽학회에서 신동엽의 「금강」과 수운의 「동경대전」을 비교하며 읽는 모임이다. 어제 신동엽학회 모임에서 서울동학답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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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잊지 못할 동학기행을 많이 했다. 여주, 원주 등 이 나라에서 동학의 흔적이 없는 지역은 거의 없다. 지역에 강연 가면, 강연 말미에 이 동네에 동학에 관계된 곳이 있으면 가고 싶다고 하면, 누군가가 꼭 안내해주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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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수운의 탄생지이며 용담정이 있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주동학기행, 혁명이 아니라 동학 '전쟁'이라고 하는 구미동학기행, 황토현 전적지가 있는 정읍동학기행, 우금치의 눈물이 아직도 선연한 공주동학기행, 마지막 석대들 전투가 있었던 장흥동학기행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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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1년간 신동엽의 「금강」과 수운의 「동경대전」을 비교하며 공부해온 28인의 구도자들이 박길수 선생(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대표)의 안내로 '서울동학기행'을 했다. 박길수 선생님은 놀라운 기억력으로 현대사와 동학의 깊이를 설명해주셨다. 다음에 강연을 듣는 자리를 마련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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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을 마치고, 만보기 어플로 거리를 잰 분에 따르면, 6킬로 미터를 걸었다고 한다. 물리적인 거리는 6킬로미터이지만 마치 600리를 걸은 듯 긴 역사를 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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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수운 최제우의 탄생 200주년이다.
1893년 2월 11~14일, 사흘 동안 엎드려 40여 명의 교도들이 벌인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했던 광화문 앞 광장이야말로 동학도에 의한 최초의 촛불집회가 벌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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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지역으로 영풍문고 자리는 전봉건이 1895년 4월 25일 효수 당한 곳이다. 맞은편 제일은행 본점은 조선시대 때 의금부 터로 이후 재판소로 바뀌어 해월이 저 자리에서 재판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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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지역은 파고다 공원이다. 파고다 공원 가는 길에 김수영 생가터와 박인환의 '마리서사(茉莉書舍)' 자리가 있다. 탑골공원은 3대 교조인 의삼 손병희의 동상이 있고, 3.1운동 기념탑이 있다. 파고다 공원 안에 있던 이승만 동상 이야기를 들었다. 1960년 4월 26일 바로 이곳에 있던 이승만 동상이 끌어내려졌다. 윤씨 정권은 63년만에 이승만 기념관을 세우려 한다. 사실 실제적 국부는 이승만이 아니라 손병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새로운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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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지역은 1863년 수운에게 도통을 전수받은 신묘한 '도바리꾼' 해월 최시형 선생이 원주에서 체포되어 여주를 거쳐 끌려와 1898년 처형된 단성사 앞이다. 이곳은 천주교도들이 집단으로 처형된 카톨릭 순교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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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지역은 정독도서관 근처에 있는 3대 교주 손병희 집터다. 그 주변에 천도교 교인들이 모여 살았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딸 손용화와 결혼한 방정환 선생도 그 집에서 잠깐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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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지역은 가장 궁금했던 지역이다. 바로 1921년 천도교 지식인들이 「개벽」 을 만들던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가는 길에 정독도서관 근처 계단에 앉아 강의를 들었는데 참 다행이었다. 다리가 아팠는데, 적절한 시기에 편안히 앉아 쉬면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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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지역은 천도교 중앙대교당이다. 대교당에 들어가서 여러 전시물을 보았다. 교회에서는 주일이라고 하는 일요일을 천도교에서는 '시일(侍日)'이라고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교회에서 하는 예배를, 천도교에서는 '시일식'이라고 한다. 이후 조계사로 가서, 3.1운동 당시 유인물을 인쇄 배포했던 현 조계사 뒤편 보성전문학교 자리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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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신문 1층 로비에서 하루의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로비에서 소설을 읽다가 지쳐서 잠깐 잘 들었다가 다시 깨서 소설을 읽다가 한참 잠들다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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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 두 권의 책을 꼭 내려 한다. 내려 한다가 아니라 내야 한다. 「윤동주와 성경」과 「신동엽 평전」이다. 오랫동안 해온 동학공부를 「신동엽 평전」에 녹여낼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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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신문 로비 소파에서 목이 아플 정도로 졸다가 130여 년 전 동학군의 마지막 목표였던 경복궁으로 걸어갔다. 다리가 아팠는데 130여 년 전, 걷고 또 걸었던 그들을 생각하면서 걸어보았다. 이 도시는 온통 개벽의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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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을 따라 남대문쪽으로 걸었다. 광화문에서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들이 "할 수 있다 하신 일은" 찬송을 엄청난 스피커로 틀어놓고 춤을 추고 있었다. 저 찬양을 하나님이 들으실까. 그저께 뵈었던 전남 지역 신실한 목사님들 모습이 떠올랐다. 신앙은 울리는 쾡과리로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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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서 시청역 쪽으로 향하자, 촛불집회의 함성 소리가 다가왔다. 오랜만에 마지막 촛불 모임에 참여했다. 만나고 싶었던 분들이 늘 거기에 있다. 촛불 집회에서 노래하고, 구호하고, 춤추는 사람들이 다시 태어난 동학도들로 보인다. 이 도시 근저에는 동학의 기운이 마그마처럼 끓고 있다. 이번에는 실패하지 말아야지. 이번에는 이겨내야지. 그 마그마가 언제 개벽을 알릴지, 가까이 다가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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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하신 분들 인사 드립니다. 테그를 받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친구 맺으시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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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은미 2, 전의주 3,김응교 4, 전상하 5, 정미영 6, 고작 고은진주 7, 최종천 8, 이선경 9, 윤병연 윤라비트 10, 박길수 선생님 (안내자) 11, 김재홍 12, 심광섭 13, 남궁효 14, 하정 15. 박계옥 16. 백정희 17. 김종숙 18. 조길성 19. 강효정 20.김은영. 21. 김명은. 22 이정아 23. 김형태 24.이두인 25 정숙연. 26 김자영 27 백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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