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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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대화가 이뤄질 가능성은 없다.
<제국의 위안부>에 관한 내 글에 대한 반론(?)들도 사실 나와의 대화를 염두에 두고 이뤄진 것들이 아니다. 자기네들끼리 돌려보며 욕하고 침뱉고 그정도의 수준들이다.
그런 식으로 할 바에는 차라리 무시하고 넘어가기를 바라지만, 인간관계라는 게 함께 욕할 대상이 생기면 얼마나 친밀해질 수 있는지를 알고 있기에 허망한 기대라는 것도 이해한다. 근거를 대지 않은 것은 아니나 논문처럼 체계적으로 쓴 글도 아닌데 그걸 읽고 생각이 바뀐다거나 대화할 용의가 생기는 것도 생각해보면 기괴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기대할만한 일이 아니라는거다. 결국 우리가 하는 짓은, 어떠한 가치에, 규범에 동의하고 있는지를 전시함으로써 각자의 경계를 확인하는 정도일 것이다.
박유하의 수상에 관한 것도 그렇다. 박유하가 상을 받을만하다 생각하는 이들은, 아마도, 추측하건대, 박유하가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학술의 자유에 대한 부당한 박탈/침해 등을 당했기에 그것을 극복했다는 의미에서 공로상을 주고자 했을 것이다. 반대로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학문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위안부 등의 피해자들에 대한 증오/혐오 발언을 용인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반대하는 것일테다. 각자가 지닌 입장에서 나오는 어떤 윤리적 가치랄까, 신념이랄까 그 경계를 확인하는 용도로 사안을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논란의 근간에는 <제국의 위안부>에 관한 '해석'의 차이가 놓여 있기에 논란을 반복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독해가 정확한지 되짚어보고 반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본 이들 거의 대부분은, 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철회하거나 수정할 생각이 없다. 저자 자신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서경식, 정영환 등의 비판 중에 가려 받아들일 게 없지도 않을텐데 박유하 본인은 집요하리만큼 그 모든 걸 부정하였다. 나중에 진보진영을 비판하며 북조선의 역사해석을 수용했다는 망발을 내뱉기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발언을 한 것에 대한 사법적 판단을, 단순히 국가폭력에 의한 탄압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서로 자신의 입장을 바꿀 용기가 없다면, 상대의 주장을 수용할 용기가 없다면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게 현명한 일이다. 나도 마찬가지이기에 이것을 끝으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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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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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는 시바하라 다쿠지의 <소유와 생산양식의 역사이론>를 갖고 강의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 책에 대해 언급하면 19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이들은 벌써 '피식' 거리기 시작한다. <경제사총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을 읽어보았다는 것이다. 자기네들이 학생운동할 때 읽어보았는데 별 게 없더라, 이런 것이겠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은 왜 '소유'와 '생산양식'의 역사이론입니까? 그 둘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게 물어보면 갑자기 당황한다. 거의 예외없이 당황한다. 끝내 잘 모르겠다거나 생각해본 적이 없다, 는 말을 받아내는 내 성정도 딱히 좋지는 않다고 생각한다만.. 그래도 제목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비웃는 그 태도들이 불쾌하기 그지없다. 물론 시바하라의 저작을 읽어보면 고루하고 조잡하다는 느낌을 준다. 나도 처음에 읽었을 때 일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수준이란 참으로 알만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소유가 왜 생기는지, 그것이 왜 생산양식과 분리, 괴리되는지 등을 중심으로 하여 역사를 구성한다. 바로 거기에 이 책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생산양식과 그것의 고정화된 법제적 형태로서의 소유구조의 '관계', 이 관계를 다루는 이론으로서의 "역사이론"이야말로 이 책의 본령에 해당한다. 그 부분을 섬세하게 비판하고 체계적으로 대안을 재구성하면서 말 그대로 '이론', "역사이론"을 재구성해야 한다. 그런 작업의 유용성을 인정받으려면 저렇게 알지도 못하면서 무시하는 태도부터 어떻게든 비판하고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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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구자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면서도 아쉬움을 감추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총력전체제에 관해서도 참고할만한 문헌이 거의 없지만, 다카시 후지타니의 <총력전 제국의 인종주의>가 그나마 도움이 많이 된다만, 다른 역사개념들에 관해서도 그렇다. 강의를 준비하면서도 새롭게 깨달은 바이지만, 우리가 쉽게 쓰는 절대주의 왕정, 절대왕정, 절대주의 등의 용어를 정리한 책이 없다. 프랑스사 연구자들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임승휘 선생의 짧은 저서 외에는 서정복, 김장수 등의 개별사 연구서만 있을뿐이다. 학술논문들로 범주를 넓혀도 참고할만한 문헌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
공사분리, 정치와 경제의 분리, 자연과 인간의 분리 등과 같은 고전적인 개념들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음미해볼만한 연구들이 생각보다 적다. 일본학계의 경우에는, 아! 정말이지, 일본인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데.. 일본 학계의 경우에는 강좌파들이 천황제를 '절대주의'로 규정한 이래로 비록 결론이 나지는 않았지만 절대주의에 대한 학술적 규정을 시도한 것들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바타 미치오 등과 같은 사단국가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문제의식에는, 서유럽의 절대왕정(=사단국가)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사단국가 but 절대왕정이 아닌)의 대비가 놓여 있다.
근세국가라는 동일성을 공유하면서도 서유럽의 경우 교회 등의 중간단체들이 '보편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국왕에 대항할 수 있었고, 국왕도 그들에 맞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주권개념과 같은 자신만의 '정치이론'이 존재해야 했다.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가속화했던 게 중간단체와 절대군주의 그러한 대립이었다. 절대주의 왕정의 연장에서 프로이센 개명군주와 같은 것이 나오는 건 그런 맥락이다. 왕 자체가 '학자'로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계몽'을 수행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고종황제를 '개명군주'로 규정하거나 이헌창과 같이 조선왕조의 군주제를 '절대군주제'로 규정하는 연구들이 있지만 정작 절대군주제를 무엇이라 볼지, 개명군주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보편주의적인 특질을 지닌 중간단체들, 귀족, 교회 등의 도전에 맞서서 자신의 영유권적 지배를 정당화할 정치이론을 산출해내지 못했다는 데에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적 특질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과연 동아시아의 역사적 전개에 있어 공사분리, 정치와 경제의 분리, 자연과 인간의 분리 등과 같은 근대성이 출현할 수 있을지를 논해보고 그 연장에서 오늘날의 한국의 상황을 감각할 필요가 있는데 그게 안된다는 말이다.
시바타 미치오는 강좌파적 역사인식을 일정 부분 계승하고 있는 사람답게 일본이 근세국가에는 도달했지만, 중간단체들과의 관계에서 사실상 막부의 우위가 전제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절대왕정은 유럽 특유의 체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시바타와 다르게 일본도 '아시아'라 말하고 싶다. 일본에서조차 아시아적 특질을 극복할 어떠한 사상적 기반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본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이런 생각을 정리하고 뒷받침할만한 개념서, 이론서 등이 부재하다보니 여전히 절대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페리 앤더슨의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를 읽어야 한다. 나도 답답하지만 추천할만한 저작이 없다. 절대주의가 무엇인가? 절대주의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절대주의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마르크스적 의미의 절대주의 국가의 정의란 무엇인가? 이런 강의를 하면서도 국내 학자들의 연구를 많이 인용할 수 없다는 데서 슬픔을 느낀다. 우리의 근대를 폭넓게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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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이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 자체는, 솔직히 지나치게 정치화되어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어서 그렇지, 그렇게까지 대단한 저작이라 보기 힘들다. 나는 진보좌파 성향의 논자들이 이 책에 유독 발작적으로 반응하는 게 이해가 안된다. 젠더, 내셔널리즘 비판 등등 이쪽이 좋아할만한 얘기를 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사실 내 취향에는 맞지 않는 책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하나의 '정치적 사건' 혹은 '현상'이 되어버렸다면 이 책을 소재로 해서 다양한 논의를 해볼 필요가 있다.
박유하가 주목했던 건 '제국'이라는 현상 그 자체인데, 그러면 여기서의 제국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사실 단순히 일본제국주의, 미제국주의 같은 표현을 사용해서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결국 위안부를 동원했던 제국이란 '총력전의 제국'이었다. 야마노우치 야스시(山之内靖)의 <총력전체제>(2015) 같은 명저가 번역되지 않은 한국에서 '총력전 제국'에 관한 언급이 부재한 건 당연하기까지 하다. 나는 지금 나오는 거의 모든 논의에서 생략되어 있는 질문이 바로 "조선인에게 총력전체제란 무엇인가"라 생각한다. 우리의 입장에서 일본제국의 총력전체제로의 전환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빠져 있어서 대화가 안되는 것이다.
예컨대 총력전 체제에 대한 개념 규정만 있어도 하지 않을 논의가 바로 '책임소재'의 문제이다. 야마노우치는 총력전체제를 "좁은 의미의 전선, 전투 등을 넘어서 국내 일상생활의 전 영역을 동원하는 체제"로 규정하고 있다. 단순히 물리적인 자원을 동원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정신세계까지도 그 동원의 대상으로 삼아 국가가 활용하는 과정에서 개개인들은 그 자신이 기존에 속해 있던 지역공동체 등의 여러 중간단체를 넘어 "국민"이라는, "죽음의 운명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개인을, 시민을 "죽음의 운명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조선인'이란 대체 무엇이냐, 어떤 존재였느냐, 제국이 조선인을 동원할 때 조선인의 정신세계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국민국가 체제 하에서 살고 있는, 언제든지 북조선과의 전쟁 상태에 돌입할 수 있는 '총력전체제' 하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에게 제국의 총력전 경험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우리가 물어야 한다. 당연히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묻지 않는다. 묻지 않은 결과가 무엇인가. 박유하가 '조선인 업자', '포주' 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일본제국의 책임을 희석시킨다는 '비난'이다. 앞서 총력전 체제의 개념을 언급한 이상, 이러한 비난은 전혀 유의미한 것이 될 수 없다. 일본제국의 총력전은 바로 그 포주, 업자 등의 중간적 존재들까지도 모조리 동원할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을 하나의 '죽음의 운명공동체'의 구성원인 "국민"으로 주조해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모든 책임의 최종적인 소재지는 제국 그 자체가 된다. 뉴라이트의 <반일종족주의> 등의 언술이 지니는 가장 큰 문제가, 총력전 제국에 대한 인식을 "의도적"으로(나는 의도적이라 강조해서 말하는데 이건 이영훈, 정안기 등이 총력전체제 개념을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탈각시키고 그냥 보통의 '국가', 근대국가 일반의 문제로 전화시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를 '성노예'라 규정하는 것의 문제점도 이 지점에서 나타난다. 포주, 위안부 등은 제국이 총력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총력전 수행의 부속 혹은 군속으로 동원하였으며 그들의 정신세계에는 총력전의 정신적 동원의 그림자가 좋든 싫든 드리워져 있다. 위안부를 피해자로만 보기도, 성노동자로 보기도 어려운 건 바로 이 동원의 성격 때문이다. 조선인에게 총력전이란 무엇이었는가. 우리 한국인은 언제든지 총력전 체제에 동원될 수 있으며 미중대립의 최전선에 위치한 '불침항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나는 한국의 지성계가 이 문제를 좀더 지적으로 세련되게 풀어내기를 바라지만, 세련된 지성의 소유자들조차도 저열하게 구는 걸 보면 정치가 참 사람 어럿 망친다는 생각이다..
YongYeon Hwang
서경식은 아예 이렇게 질러 버렸죠.
"'협의의' 강제동원이 있었는지 따위를 왜 따지냐? 어차피 식민지가 되었을 때 조선인 모두가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 강제동원된 건데..."
1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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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황용연 으이구..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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