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01

손민석 - 박유하에 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

손민석 - 내가 박유하에 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텍스트 해석에는... | Facebook

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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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유하에 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는 텍스트 해석에는 "정답"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아니, 믿는 게 아니라 그게 사실이다. 추가로 새로운 맥락이 주어지지 않는 한,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필연적으로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따져보고 논쟁할 "의지"가 없어서 그렇지, "주어진" 텍스트에 대한 해석에는 정답이 존재한다. 실제로 내가 반복해서 해본 작업들이 그런 것이다. 대학교수든 연구자든 노동자든 주부든 학생이든 뭐든 텍스트가 주어진 상태에서 논쟁을 거듭하다보면 거의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합리성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라 그렇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꼭 근대주의자라고 비난하던데.. 이런 걸 안 해보고도 어떻게 연구자를 자처하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동일한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인내'할 "의지"가 우리에게 있느냐? 이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고 그러는 건 사회가, 정치가, 전문가들이 대중들로 하여금 '인내할 의지'를 갖지 못하도록 조장하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인내를 '강제'할 권위와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적 입장이라는 게 그런 걸 굉장히 쉽게 만든다. 정치적 반대파의 주장에서 합리성을 취하는 건 한국에서는 거의 성인군자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인내할 '의지'가 있다면 그 다음에는 해석을 위한 공통의 기반으로서의 '텍스트'가 강조되어야 한다. 상대와의 대화를 매개하는 요소로서의 텍스트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화란 공통의 기반이 성립할 때나 가능하고 이런 문제에서는 '텍스트'가 그런 역할을 한다. 우리는 텍스트의 한계를 알면서도 적어도 타인과 대화할 때는 그것의 '절대성'을 숭배해야 한다. 최소한 인정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가 어려워진다.
나는 최소한 내가 그렇게 해석하게 된 텍스트를 제시했다. 내 해석은 박유하 본인이 직접 나와의 만남에서 자신의 본의였다고 인정한 것이었다. 그러면 내 주장을 반박하려면 그렇게 "읽히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같은 자신의 '감상평'이 아니라 텍스트로 말을 해야 된다. 하지만 연구자들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몇몇 구절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그렇게 보이지 않고, 그렇게 읽히지 않는 구절들을 가져와서, 예컨대 '동지적 관계' 같은, 동지라고 했으니 이 사람이 뭐고 뭐고.. 이쯤 되면 연구자가 아니라 심리학자다. 그렇게 되면 대화가 불가능해진다. 박유하 같은 심성을 지닌 사람들은 억울함, 자기연민 등에 침잠하며 스스로를 망쳐버리기 때문이다. 대중을 상대로 나설 사람이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그런 것이다. 다들 '감상'을 말할 뿐이지, 제대로 된 해석을 내놓지 않는다. 정영환 선생의 글이 그나마 그래도 대화의 시도라 읽혔던 건, 어찌됐든 텍스트를 놓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놓고 저자와 대화를 시도하고 그래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된다. 이건 독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저자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저자로부터도 일정한 정도로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걸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대화가 불가능한 이유는 텍스트의 절대성과 공통성에 대한 부정, 그리고 텍스트에 근거해 끝까지 밀고 나갈 의지의 부재. 이렇게 두 가지라 본다. 그리고 나도 후자에 대해서는 나이 먹을수록 없어지고 있다. 피곤할 따름이다..






Laplume de Matante

작가도 죽었는데 독자도 죽여야 할듯 싶군요.

Author손민석

Laplume de Matante 하하하.

양승필

탈맥락이 시대 정신입니다.
맥락 위에서 텍스트를 해석하는게 아니라 자기입맛대로 맥락에서 오려내서 자기생각(주장)을 강화하는데 써먹는 거죠.
맥락을 파악하고 그 위에서 논의를 진행한다? 상당한 노력(&훈련된 능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게 가능한 사람은 의외로 소수일거에요.

이호중

이게 다 프랑스철학하는 뜨내기들이 자신들의 부족한 독해력을 아름답게 포장했기 때문ㅠㅠ


Author손민석

이호중 뽀오스트 모오던 아닙니까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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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Favourites ·rSndoepsotiu16fcm7tlggt0i763icu4a1lh0170m34ttfg10h05u8318uhf ·


하루종일 박유하 관련 글들이 올라온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처음 나왔을 때 추천하는 글을 기고했다가 봉변을 당한 적도 있고 해서 부채감이랄까, 책임감이랄까 그런 걸 느낀다. 그에 대한 과도한 비판들을 볼 때면 해명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받고는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만 말하고 싶다. 이미 이 사태는 어떤 공론장, 그런 게 있다면, 의 영역을 벗어난지 오래이다. '대화'라는 게 불가능해졌다. 누구보다도 박유하 본인이 그러한 대화의 계기를 모두 틀어막았다.
본인을 한나 아렌트에 비유하는 이들을 주변에 두는 걸 보고 기함을 했다. 자기연민이 지나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가 항상 말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지나칠 정도로 상찬한다면 한번쯤 경계해볼 필요가 있다. 대체로 내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렇게까지 상찬하는 것일테다.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이들은 내 주장의 한계까지도 두루 살펴보기에 그렇게까지 과도하게 상찬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녀를 과도하게 상찬하는 몇몇 인물들은 <제국의 위안부>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에 대해 거의 모른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에 최범이라는 작자가 있다. 미술 평론 같은 걸 하는 작자 같은데 뭐하는지는 모르겠다. 어느날부터인가 뉴라이트 사관에 동조하며 이상한 소리를 하도 하길래 몇 번 지적한 적이 있다. 주익종과 조선민족은 원래 근대와 맞지 않는데 일본과 이승만 덕분에 근대를 맛봤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하며 낄낄거리고 있길래 제정신들이 아니구나 싶어 둘다 차단했던 기억이 있다.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사상전향이 무슨 '힙한' 일인양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떠들고 다니는 이들이 많아졌는데 그런 유형의 인간이다. 당연히 글을 읽을 줄도 모른다.
어느날 박유하의 저작을 이해 못하는 건 조선인들의 전근대성의 발현이고 어쩌고 하면서 NL적/주사파적 사고방식으로부터의 탈피를 말하길래 어이가 없어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의 핵심은 "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라고 지적했다. <제국의 위안부> 4부의 제1장의 2절과 3절이 미국이라는 "제국"이 위안부를 소재로 하는 한일대립을 매개로 어떻게 계속해서 미군기지를 유지하고, 여성들의 성을 착취하며, 가부장적인 지배와 내셔널리즘을 재생산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일본'제국'의 과거와 미"제국"의 현재를 연결시켜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박유하 본인이 내 해석을 두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누구나 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으니, 설마 이걸 부정할까, 박유하의 본의라 해도 좋다. 책 제목이 왜 "제국"의 위안부이겠는가. 박유하의 말을 옮겨보겠다.
"이 책(<제국의 위안부> - 인용자주)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단순히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국가의 세력 확장)의 문제로 다루었다. 근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 ‘위안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생각해본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다보니 ‘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문제일 뿐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며, 구체적으로는 일본과 한국에 존재하는 ‘미군기지’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든 것은 ‘냉전’적 ‘좌우갈등’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책의 또 하나의 결론이다. 나는 그런 상황을 모두가 함께 보는 일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풀고 제국과 냉전이 남긴 문제들을 함께 넘어설 수 있는 ‘동아시아’를 상상하고 기대하면서 이 책을 썼다."
"(한일간의 - 인용자주) 불화는 보수를 우경화시키고, 냉전적 사고는 기지를 존속시킨다. ‘위안부’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고 싶다면 기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도 일본과의 화해는 필요하다. 진정한 ‘아시아의 연대’는 그렇게 일본의 제국주의에 앞서 시작된 서양의 제국주의와 그들이 남긴 냉전적 사고를 넘어설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렇게 대놓고 위안부는 한일양국의, '국가'간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의 문제이며, 더군다나 미국이라는 "제국"이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미군기지'의 문제임을 드러내고 있어도 읽어내지를 못한다. 최범이라는 작자는 내게 <제국의 위안부>가 반미주의를 내포하고 있는지 몰랐다며 자신이 읽었을 때는 그런 내용이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잘못 독해했다는 식으로 말하길래 황당해서 책을 인용해 보여주자 자신이 따로 확인해보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안다. 이런 자들은 절대로 확인하지 않는다. 글을 읽고 자신의 삶과 사유를 깨뜨리거나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삶과 사유를 치장하기 위해 글을 갖다붙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전근대적이고 미개하다는 '놀이'를 이어가야 되는데 글을 읽으면 그런 걸 못하게 된다.
나는 박유하에 대한 비판자들 중에 박유하가 "제국"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걸 지적하는 이를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책 제목을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라고 지은 경박한 편집자와 출판사도 있었다. 박유하는 제국의 변호인이 아니다. 제국의 문제를 국가의 문제로 이해하지 말자고, 그래서는 미제국이라는 현재의 '제국주의'를 제대로 다룰 수 없을뿐만 아니라 제국을 넘어서는, 서구를 넘어서는 동아시아적 연대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이다. 박유하가 자기연민에 침잠하여 스스로를 망치게 된 데는, 그에 대한 경박한 비난을 퍼부은 한일 양국의 진보진영의 책임도 크다. 내가 추천하는 기고글을 썼을 때만 하더라도 진보 학계 일각에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호평을 내놓는 이가 몇몇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자로서의 박유하"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그녀 혹은 그녀의 저작을 비판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제발 모든 이들이 이성을 갖고, 합리적인 공론장에서의 논의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지만 한국 학계에는 그걸 강제할 권위도, 조율할 권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각자 속한 진영에 먹힐 얘기만 하며 갈등을 증폭하고 서로 적대하기만 할 뿐이다. 과학 커뮤니케이터니 뭐니 많은 얘기들이 있었지만, 전문성을 지닌 학자가 다른 전문성을 지닌 중간매개자를 비판했을 때 나오는 반응이란 기껏해야 개인들 간의 비난으로 파악하고 특정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표시하는 것뿐이었다. 사회적 분업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라든지, 어떻게 지식을 보다 잘 전달하고 합리적인 논의공간을 만들지 등에 대한 얘기가 나올 수가 없다. 이 글도 아마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박유하 옹호글로 읽히든지 뭐.. 모르겠다. 그럴 것이다. 별 기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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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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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에 덧글 추가 수정]
SNS에 최근 출판문화협회가 <제국의 위안부> 저자와 출판사에 특별공로상을 수상하기로 한 데 대해 비판(비난?)하는 입장문(*)이 올라와서, 개인적으로 단 댓글...ㅠㅠ
(* 정의기억연대 명의의 입장문은 관심 있는 분들은 검색해보시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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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럽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이미 대법원에서까지 위안부의 진실을 왜곡하는 서적이 아니라는 사법적 판단을 받았습니다.
<제국의 위안부>는 위안부의 진실, 실체가 일의적으로 무고한 소녀들을 국가(일제)가 개입해 강제연행한 단일한 사안이 아니라, 강제연행을 포함해 좀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구조로 이루어졌고 그 구조에 일제가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서술한 연구서이며,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들도 그런 맥락에서 굳이 오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대법원 판결문에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적시돼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공감하고 일본을 비판하는 많은 분들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소녀'로 표상되는 일본군 위안부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이면에서 위안부의 복합적 존재(기혼녀로 끌려간 경우라든가)를 부정하고 지워버리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정의기억연대가 그동안 노력해온 공로를 높이 평가하는 한편으로, 위안부에 대한 해석의 절대적 전권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한편으로 <제국의 위안부> 같은 실증적인 노력들이 위안부의 실체, 의미에 대한 왜곡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함의를 더욱 생명력 있고 풍부하게 함으로써 해외의 위안부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포함해 일본제국주의 비판과 진실 규명 운동을 더욱 강화시켜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저는 교조(Orthodox)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세계관이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미 10년에 이르는 재판과 사회적 논쟁을 통해 확인되고 정리된 사실을 계속 자신들의 해석, 주장만을 되풀이 강조하면서 부정하는 데 대해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ㅠ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하, 위 언급한 SNS에 다시 댓글 단 분들과 짧게 주고받은 얘기..^^;;
A:
일본군국제국주의 파시즘 체제의 전방위적인 폭압적 지배 아래서 이루어진 일들을 본질은 접어두고 실증이니 객관이니 하는 전형적인 반동적 입장을 이곳에서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바로 뉴라이트의 출발이 이런 실증과 객관을 위장한 반역사적 사고방식임을 아실 만한 분이 이러시다니요.

나:
실증 자체가 문제는 전혀 아닙니다. 예컨대 아시아적 정체성 논쟁에서 한국사회 식민화 논리를 주장하던 일제 사회과학자들의 주장을 웅변적으로 논박한 김용섭 교수님의 경영형 부농론은 실증적 연구가 아니면 나올 수 없었던 대작입니다.
뉴라이트의 출발이 실증이라고 실증을 부정하는 건, 좀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윤석열이 한글을 쓰니 한글을 쓰지 말자는 주장과도 통한다고 봅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 합리성을 지향하는 많은 분들이 <제국의 위안부>를 일제를 비판 극복하는 실증적 노력으로 이해하시는 한편으로, 정작 뉴라이트나 수구진영은 (기존의 위안부 운동이 위안부를 일의적으로 강제연행으로 단순화하고 그 예외는 모두 왜곡이라고 매도하듯이 -__-) 일부 예외적인 자발적(?) 참여 사례(라고 주장하는 수기도 있는 걸로 압니다)를 역시 전체화해서 위안부가 자발적 매매춘이라는 식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국의 위안부>와는 전혀 맥락이 다릅니다..-__-
B:
사실을 현학적으로 뱅뱅 돌리네요.
대법원 판결?로 입증?

나:
판결문은 읽어보셨는지요?
굳이 판결이랄 것도 없이, 국문과 출신으로서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독해력'에 대한 빨간펜이었습니다...ㅠㅠ
A:
상황에 맞지 않는 터무니 없는 비유 이런 거 하지 마세요.
모든 실증을 부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식민지지배 하예서 이루어진 왜곡된 것들을 얘기하는 건데,
굳이 이렇게 까지 억지를 쓰는 이유가 뭔가요
.
나:
누가 억지(-__-)인지는 읽는 분들이 알아서 판단해주시겠지요..ㅠㅠ
위 성명만 해도, 대법 판결문에 조목조목 설명돼 있는 '왜 왜곡이 아닌지'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이 일방적으로 10년 동안 되풀이해온 주장만 반복돼 있을 뿐입니다.
하다못해 왜 판결문의 설명이 오류인지에 대한 사례라도 담았으면 조금은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겁니다 ㅠㅠ
하여튼 논란만 던져놓고 도망가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일단 제 개인 생각을 밝힌 것으로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밴드에서 서로의 입장은 더 얘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Park Yuha
어려운 싸움을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Author
최병현
박유하 애고...민망합니다 ^^;
현상송
저 A와 B 개딸일 가능성이 농후 ㅋㅋ
조정
샘은 용기있는 분.
Author
최병현
조정 IBM이라서...ㅋ
(이왕 버린 몸...^^;;;)
현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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