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6

이범주 - [현대조선의 탄생] 독후감. (내일을 여는 책/ 박경순)

이범주 - [현대조선의 탄생] 독후감. (내일을 여는 책/ 박경순) - 우리에게 북은 815이후 소련 따라 내려와...



이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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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조선의 탄생] 독후감. (내일을 여는 책/ 박경순)

- 우리에게 북은 815이후 소련 따라 내려와 소련의 적극적인 도움을 배경으로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북하면 한때 북을 북괴(北傀)라고 불렀겠나.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북은 1930년대 초부터 만주에서 일제에 대항해 무장항쟁 했던 우리 민족 빨치산 세력이 중심으로 되어 자체 역량으로 건국되었다.

-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 세력이 일본군 무장해제 하겠다고 북으로 들어온 소련에 그냥 묻어 들어온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소련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만큼 견고했던 일본 요새들을 맨 선두에 나서 제압, 돌파하면서 소련의 진격로를 열었다. 그리고 이 싸움에 빨치산 부대에 호응한 국내 지하혁명세력이 합류했다. 이런 싸움은 거의 이북 전역, 심지어 이남 일부까지 포괄했다. 이 전투들의 성과는 눈부셨다. 조선인들의 활약으로 인해 소련군의 진격은 예상보다 훨씬 수월했다. 일본이 일찍 무조건 항복한 데는 만주에서의 괴멸적인 패배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이런 연유로 북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제를 타승했다고 주장한다.

- 해방은 되었으나 북의 내부사정은 매우 복잡했다. 박헌영 계열의 국내 공산주의 세력, 중국혁명에 참가했던 신민당 세력, 조만식 중심의 우파 기독교 세력 등이 복잡하게 얽혀 저마다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 이후 북을 미국과 같은 부르조아 민주주의 사회로 할 것인가 아니면 소련과 같은 소비에트 사회주의사회로 할 것인가를 놓고 변혁세력 내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의 빨치산 세력은 각계 각층의 총의를 모아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을 구현하기 위한 인민민주의 공화국을 제안하고 구현했다. 이는 전례 없이 매우 독창적인, 당시의 조선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한 정책이었다.

- 일제가 패망하면서 거의 모든 산업시설을 파괴하고, 각종 정파들이 난립하는 어려운 조건에서 김일성은, 그간 같이 싸워온 빨치산 세력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국내 공산주의 세력, 민족주의 세력들을 민족민주 통일전선으로 폭넓게 묶어내었다. 그것을 기초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임시인민위원회를 확대 정립하여 인민민주주의 정체(政體)로의 건국, 로동당 창당, 자체 역량에 근거한 건군(建軍)사업을 신속하게 마치고 더 나아가 인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을 이끌어 내며 경제개발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각 산업에서 생산이 급격하게 늘고 인민생활이 안정되었다.

- 이런 일들은 대단히 신속하고 효율적이면서도 인민들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참여를 통해 행해졌다. 무엇보다 희생이 별로 없었다. 계급해방을 선차적으로 주장했던 국내 공산주의 세력의 좌경노선을 억누르면서 노동자, 농민, 그리고 무엇보다 지식인까지 포괄하는 통일전선 노선을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은 그토록 신속, 정확하게 그리고 인민들을 충분히 설득해가면서 단기간에 그런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1930년대 초반 만주에서 해방구를 건설, 인민민주주의 권력을 운영하면서 그런 제도들을 실제로 시행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해방 후 북한에서 시행했던 제반 정책들은 이미 1930년 이후 무장항쟁 과정에서 준비된 것들이었다. 해방구에서 했던 정책들, 그곳에서의 군민관계, 군대 상하관계, 간고분투-자력갱생의 정신, 권력형태, 문화, 철학...등이 그대로 북한에 확장된 형태로 구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 무장항쟁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무장항쟁의 역사는 현대 북을 이해하는 일종의 유전자 지도다.

- 무엇보다 책 마지막 보론에 붙어있는 ‘1945~1949년 중국 내전 당시 중국공산당의 승리와 조선의 관계에 대한 기록’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에 의하면 조선인 혁명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중국혁명은 불가능했거나 상당히 지연되었을 거라고 결론내도 무방할 듯하다.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과 싸웠던 역량 거의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었고, 만주를 먼저 장악해야 전 중국의 패권을 쥘 수 있는 국공내전 상황에서 홍군이 장개석 군을 이길 수 있도록 북이 물적, 인적 지원을 결정적으로 해주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선인들은 중국 관내까지 진출, 장강도하 해남도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전역(戰役)마다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북으로 귀환했다. 한국 전쟁 때 중국이 북을 도와 참전했던 데는 이유가 있다. 그때 모택동이 말하기를 ”피값에는 공짜가 없다“고 했다. ‘조중혈맹(朝中血盟)’이라는 말이 수사에 불과한 게 아니다.

- 나는 한때 이 나라 독립투쟁의 역사를 초라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라를 뺏겼는데 저항은 시원찮았고 한때 독립군의 무장항쟁, 윤봉길 나석주 등의 의거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1930년대 들어서면서 거의 대부분 소멸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아보니 역사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1930년대 들어 등장한 만주 조선인 공산주의자 빨치산들의 투쟁은 기간과 치열함에 있어서 중국 홍군의 그것에 못지 않았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분들의 투쟁은 위대했고 세계의 진보에 크게 기여했다. 그들의 가열찬 투쟁으로 관동군을 붙들어 매지 않았으면 관동군은 중국의 관내와 소련으로 거침없이 쳐들어 갔을 것이고 중국과 소련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체 게바라, 카스트로, 호치민이 위대하다고 하지만 만주에는 수천, 수만의 그에 못지 않는 조선인 혁명가들이 활약했다. 난 우리 나라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 북이 지구상 최강대국 미국에 맞서 단 한 발자욱도 물러서지 않고 중국 소련 같은 대국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주적 태도를 견지하는 데는 이런 역사에서 축적된 힘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전통의 힘이다.

- 통일을 지향하는 시대....북 역사를 알아야 지금의 북을 안다. 알아야 통일을 하던지 더불어 잘 살던지 할 거 아닌가.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충분히 읽고 음미할 가치가 있다. 일독을 권장함.

** 추가 참고문헌; 또 하나의 한국전쟁 (엄인호)/ 중국인 이야기(김명호)




19Lee Woosang and 1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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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철 공감합니다. 일면 부족한 면도 있겠지만 이런 측면도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남쪽의 많은 항일지사들이 반민족 부역세력이 중심인 남에서 벗어났을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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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Woosang 읽을 책이 늘었네 고마워. 근데 왜 공유는 안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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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주 replied · 4 replies 23m


Nam Gi Kim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다만 아직 공부가 부족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남북한의 역사학자들이 앞으로 교차검증을 하며 밝혀낼 것이 많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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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 Gi Kim 와다 하루끼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을 집필했을때, 북의 학자들이 이 책을 검토 했다고 합니다. 북측 학자들도 책에 대해 상당히 공감했지만, 조선인민혁명군 부분에 대해선 양측 입장이 달랐던 것으로 압니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학교서 대출하여 재밌게 읽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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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 Gi Kim 예전에 쓴 리뷰도 공유.ㅋ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2432076776837981&id=10000107047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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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 Gi Kim added a new photo to the album .
25 September 2019 ·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서평: 북조선의 김일성은 독립운동가였다

김일성! 우리에게 있어서 이 이름을 공개적으로 꺼내는 건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과 북한 괴뢰 도당은 나쁜 놈”이라는 식으로 북조선과 김일성에 대해 가르쳐 왔던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동안 북조선과 김일성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았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시절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관해 그저 악마화된 이미지만 부각했던 우리 사회는 일제시기 그가 만주에서 전개했던 항일무장투쟁을 인정하지 않았었고, 군사정권 시기 어용학자들은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북한 괴뢰 정권의 수괴 김일성이 아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김일성 가짜설은 대중들에게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졌고, 이런 궤변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탄생한 수구 세력인 뉴라이트가 이어받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뉴라이트와 수구 세력들의 주장과는 달리 북조선의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그 김일성이 맞다. 김일성 가짜설은 1945년 10월 그가 평양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대회에서 모습을 비추면서 떠돌게 된 얘기였다. 당시 민중들은 1937년 보천보 전투를 전개했던 김일성의 얼굴을 알지 못했었기 때문에 생겼던 해프닝이었다. 그 과정에서 해방 후 우익들이 이를 이용 또는 악용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 부장을 지냈던 김형욱이 자신의 저서에서 밝혔듯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김일성은 북조선의 김일성이 맞았다. 1980년대부터 남한으로 탈북한 북측의 고위급 인사들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경력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북조선의 지도자 김일성은 일제시기 무장투쟁을 했던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렇다면 왜 뉴라이트와 수구세력들은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부인하거나 축소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는 김일성의 항일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다. 1912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1920년대 중후반부터 반일 활동을 했었다.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의 저서 제국주의론을 읽었던 그는 만주로 갔고, 1931년 9월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일본군대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1932년에는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었다. 김동한을 비롯한 친일변절자들이 설립한 민생단 공작으로 인하여, 숙청의 피바람이 불 때 살아남은 김일성은 1933년 둥닌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하기도 했었다.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은 무송현성 전투와 대덕수 전투, 소덕수 전투 그리고 이도강 전투 등을 치르는 등 전투를 계속하면서 장백산지구에 근거지를 형성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1달 전인 1937년 6월 김일성은 만주 국경지대에 있는 식민지 조선의 보천보에 잠입하여 진공작전을 개시했었다. 그 과정에서 최소 14명 이상의 일본군 순사와 군인이 죽고 부상당했다. 보천보 전투 이후 김일성 휘하의 부대는 간삼봉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격해지면서 일제는 1938년부터 매우 조직적으로 만주에 있는 유격대를 진압하기 시작했고, 김일성 휘하의 부대들은 이른바 100일에 걸친 ‘고난의 행군’을 해야했다. 1939년 10월 일본의 관동군은 또 다른 토벌작전을 개시했는데, 1940년 3월 김일성 휘하의 부대는 홍기하에서 추격해오던 마에다 부대 120명을 매복공격하여 섬멸했다. 이후 김일성과 그의 부대는 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넘어갔고, 1942년 8월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 휘하의 제88특별여단에 배속되게 된다. 1940년 10월 소련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김일성이 속해있던 만주의 독립군들은 1942년까지 일제에 맞서 무장투쟁을 했었다. 비록 1945년 8월 소련군이 개시한 만주 진공 작전에는 참가하지 못했지만, 김일성을 포함한 북조선의 만주 빨치산파 지도부들은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초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었고, 소련에서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이렇듯 김일성은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립운동을 해왔다. 따라서 반공주의에 심취한 수구 세력들에게는 이러한 김일성의 항일 경력이 당연히 부담스러울 테고, 국민들에게 숨기고 싶었을 테며, 이를 왜곡하거나 축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 와다 하루끼는 이 책을 통해서 수구세력들이 왜곡해오거나, 숨기고 싶어했던 김일성 항일투쟁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부분이야말로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을 읽다보면, 항일무장투쟁 당시 군사 지도자 김일성의 지도력이 잘 발휘되는 모습들이 무장투쟁에 같이 참여했던 후세대들의 증언을 통해서 드러난다. 북조선의 지도자 김일성 또한 자신이 지휘하던 병력을 잘 통솔했다. 그랬기에 보천보 전투를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고, 일본군의 끊임없는 추격을 피해 ‘고난의 행군’을 이겨낼 수 있었으며, 추격해오던 관동군 측 마에다 부대를 홍기하에서 전멸시킬 수 있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1930년대 중반 김일성은 장백산에 근거지를 형성했었다. 여기서 말한 장백산은 우리가 아는 백두산이다. 즉 김일성은 1930년대 중반에 백두산을 근거지로 항일투쟁을 했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봣을 때, 현재 북측에서 백두산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선 김일성과 만주 빨치산파들이 1948년 북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뒤, 이후 북조선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나온다. 만주 빨치산파 대다수는 북조선에서 주요요직을 차지했고, 북조선 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북조선에서 주요 요직을 차지하게 된 인사들의 인적구성을 보면 대다수가 항일운동을 했다. 1949년 조선 인민군 창설 1주년에 수여된 48명의 군 간부 서훈을 보면 일본사관학교를 나온 자가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조선 인민군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와다 하루끼가 쓴 이 책은 소련 연방이 해체되고 난 지 1년 뒤인 1992년에 출간되었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2년 전에 출판한 이 책을 읽으며 필자는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을 다시 한번 공부할 수 있었고, 그 또한 항일 투사로서의 경력을 당연히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산 김원봉 선생마저 빨갱이로 모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 당장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인정하는 것은 절차 및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와다 하루끼나 브루스 커밍스 같은 양심적인 역사학자들이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튼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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