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0

[북한 인권,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보혁·김덕진 대담 - 진보가 진보에게 - 경향신문

[북한 인권,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보혁·김덕진 대담 - 진보가 진보에게 - 경향신문


[북한 인권,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보혁·김덕진 대담 - 진보가 진보에게

특별취재팀 전병역·손제민·송윤경·심혜리 기자 junby@kyunghyang.com

입력 : 2012.11.01


“탈북자 강제북송반대 시위할 때, 진보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진보진영은 그동안 인도주의적 지원 외에 북한 인권문제에 소극적이었던 까닭에 ‘북한 정권 눈치를 본다’고 비판받았다. 북한 인권이 열악한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실질적인 해법의 한계와 남북관계 특수성, 내정간섭 등의 이유로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 최근 들어 진영 내에서 ‘진보가 나서야 한다’는 자성이 일고 있다. 다만 아직 머리만 무거울 뿐, 구체적 방향이나 방법은 찾지 못한 상태다.


경향신문은 천주교인권위원회 김덕진 사무국장(38)과 서울대 서보혁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46)의 대담을 통해 북한 인권에 대한 진보진영의 자세를 돌아보고 대안을 들어봤다. 대담은 지난달 22일 서울 장충동 코리아연구원에서 있었다. 김 국장은 “북한 인권운동에서 진보가 선수를 뺏긴 건 사실이지만, 국내 거주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처우 개선처럼 비정치적으로 가능한 일부터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북한 인권문제를 폭로하고 북 정권에 창피 주는 기존 방식을 넘어 이제는 진보·보수 모두 어떻게 개선시킬 것이냐가 중요하다”며 “미우나 고우나 북한과 만나 협상하고 달래기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보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왼쪽)와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이 지난달 22일 서울 장충동 코리아연구원에서 북한 인권운동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서보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체제 문제 꺼내지 않으면서
북 자유권 논의 하는 게 관건
현재로선 구체 방안이 없다”


▲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진보가 북한 인권운동에서
주도권 뺏긴 건 사실이지만
비정치적으로 풀어나갈 것”



- 진보진영은 북한 인권문제의 심각성을 인식 못하는 것 아니냐 하는 말이 있습니다.


김덕진 국장 = 북한에서 제일 심각한 문제야 식량, 의류, 에너지 등 기본적인 것들이 부족한 것이고 누구나 다 인정하는 것 아닌가요. 북한을 이탈하는 이유가 정치적, 이념적 탄압보다는 경제적 문제가 더 심하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생존권과 표현의 자유, 출판, 인터넷이 기본적으로 제한되는 인권문제가 있죠. 정당한 재판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서방의 일관된 보도와 북한이탈주민의 폭로로 볼 때 과장, 왜곡된 부분은 있더라도 기본적인 인권문제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서보혁 교수 = 솔직히 진보진영은 2000년대 초에 탈북자가 많이 발생하고 증언이 나와도 의심했어요. 이유는 나오는 사람 80~90%가 함경도 출신이니까 ‘함경도 인권은 열악하다는데 북한 전체를 대표할 수 있을까’였죠. 중간 브로커들, 지원단체, 국가기관 등이 개입하며 부풀려진다고 본 겁니다. 이후 유엔 인권위원회 보고서가 나오니까 전반적으로 인권이 열악한 것은 사실이겠다고 여기게 됐어요. 진보·보수 간 북한 인권실태 논쟁은 사실 2000년대 초·중반에 끝났어요.


김덕진 = 북한 인권문제가 ‘장사’가 좀 되면서 정보의 독점이 생겼죠. 우리도 중국에 가서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났어요. 2006~2007년에 두 차례 헤이룽장성에서 수십명을 만났는데 당시 남쪽으로 오고 싶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일하면서 북한에 돈 좀 부쳐주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볼 거냐 고민됐고, 먹고살러 나온 ‘이주노동자’로 볼 수 있었죠. 당시 탈북했다가 잡혀간 사람들이 신체 어디를 잘렸다든지, 아이를 삶아서 팔았다든지 하는 말초적인 얘기는 남한에 와서야 처음 들었어요. 유럽의 북한 인권보고서에도 그런 건 안 나오잖아요.


- 그래도 진보가 북한 인권문제 제기에 소극적이란 비판이 틀린 것 같지는 않은데요.


김덕진 = 10년째 그 얘기를 듣거든요. 우리 사회의 인식을 바꾸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보가 주도권을 뺏긴 건 사실이죠. 중국 대사관 앞에서 박선영 전 의원이 강제북송반대 시위할 때 진보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죠. 인권 관점에서 보면 한 사람이 가고 싶은 곳에 가게 하는 게 맞아요. 국제법, 국내법이 있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이 있지만….


서보혁 = 이른바 진보진영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통일운동 쪽은 북한 체제를 민감하게 건드릴 수 있는 얘기는 안 하는 거죠. 국내 민주화운동이나 인권개선에 노력해온 진보 인권운동단체들은 남한 인권개선 활동을 하는 게 1차적이었으니까 북한까지 손대지 못한 거죠. 북한 인권만 가지고 하는 보수단체 하고는 평가가 달라야죠. 북한 인권만 보면 진보들은 뒤처져 보이고 의지가 없고 역량의 한계가 있어 보여요. 소극적이었던 것은 객관적인 평가입니다.


김덕진 = 천주교인권위나 인권운동사랑방, 참여연대, 평화네트워크 등은 사람도 적고 남한 내 인권문제 처리만으로도 버거워요. 북한 인권개선만 말하면 인권단체가 되는 건가요. 북한 인권단체들은 정부지원금 받고, 미국 국립민주주의기금(NED)도 받잖아요. 북한 인권문제는 남북 민간교류를 확대하는 과정이 아닌, 폭로나 강압책으로는 풀 수 없다고 봐요.


- 진보는 특히 북한의 정치적 자유권에는 관심이 적지 않습니까.


서보혁 = 진보는 북한 인권문제가 과장되는 것을 걱정해서 자유권에는 소극적이었죠. 기획탈북이나 종교단체 등이 개입되면서 과장된 부분이 있겠지만 우리 군사정권 시절에 비춰봐도 북한에 사회권과 자유권까지 전반적인 문제가 있다고 봐야죠. 보수는 인권 범주를 북한 내 자유권에 초점을 맞추고, 체제 문제를 얘기하려고 좁혀서 접근하죠. 진보는 사회권과 자유권, 탈북자 문제를 전쟁과 분단으로 파생된 인도적 문제까지 다 합쳐서 얘기합니다.


김덕진 = 이라크 예를 봤을 때 외부 힘으로 사담 후세인이 사라졌다고 해도 인권이 보장되는 평화가 왔다고 얘기할 수 없어요. 정권이 바뀌면 다 해결된다는 식의 접근방식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서보혁 = 북한하고 남한하고 체제도 다르고 적대하고 있는데 직접 문제제기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판단이었죠. 북한 자유권을 개선하기 위한 대안 매뉴얼을 갖고 있지는 못했어요. 그렇더라도 분단 상황에서 체제문제를 얘기하지 않으면서 북한의 자유권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관건인 것 같아요. 보수 쪽은 북한은 인권을 탄압하는 체제여서 정권을 교체하면 북한 인권이 개선될 것이라고 하는데 위험할 수 있어요. 체제 이념으로 인권문제를 환원시키면 사실 전체를 다루지 못해요. 실제로 가능하냐는 문제도 있고….


- 보수는 인도주의적 지원 시 분배감시를 강화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김덕진 = 지원 때 감시가 필요하지만 조건부라면 인도주의적 지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진보도 북한에 빵 공장 짓고 했을 때 모니터링하러 많이 갔어요. 김대중 정부 후반부와 노무현 정부 때 사진도 찍어오고 많이 감시하러 갔죠. 100개를 북에 보내면 80개를 전용하더라도 20개만큼은 주민에게 돌아간다고 보고 지원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보혁 = 인도주의적 지원은 사실 진보·보수를 가르는 주제가 아니에요. 인도주의 자체가 탈이념적이고 보편적이죠. 보수단체도 인도주의적 지원을 하는 데 많아요. 개인적으로 모니터링 방북도 해봤는데, 인도주의적 지원은 무조건성, 긴급성 원칙 아래 주는 것이 맞습니다. 일단은 도와주되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등 개선할 건 있죠. 이제 우리도 국제기구처럼 북측과 관계가 좋은 민간단체의 모니터링 요원을 북한에 상주시키는 것도 추진할 때가 됐습니다.


- 중국 내 탈북자 북송문제는 어떻게 보시나요.


김덕진 = 중국 내 북한이탈주민의 난민 지정은 어려워요. 당장 돌아가서 죽을 수도 있어야 하는데 갔다가 또 나오기도 하잖아요. 중국과의 외교적인 문제도 있고요.


서보혁 = 보수 쪽하고 이주노동자냐, 난민이냐 하고 논쟁한 적도 있어요. 제 결론은 난민 신청하는 사람에게는 절차를 열어주고 심사해서 판단하면 돼요. 난민 규정은 해당국가가 판단해요. 재외 탈북자는 임시체류를 하든, 북한으로 돌아가든 그 나라에 있을 동안 인권침해를 받지 말고 자유의사에 따라 삶을 결정하게 해야죠.


- 북한 인권운동을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봅니까.


서보혁 = 북한 인권이 문제가 많다고 폭로하는 식의 접근이 북한 인권을 잘 모르는 사람한테 경각심을 주는 효과는 있죠. 사실 북한 인권이 정말 심각하다는 건 다들 알잖아요. 이제는 폭로하고 북한에 창피 주는 단계를 넘어서 어떻게 개선시킬 것이냐는 단계가 됐어요. 실질적으로는 미우나 고우나 북한 정부와 만나야 합니다. 아니면 채널 자체가 없는 거죠. 협상하고 달래기도 하고 해야죠. 보수는 기존 단계에 머물려는 게 문제예요. 남북대화와 북한 인권 개선을 연결지어서 봐야죠.


김덕진 = 보수처럼 서울시청 앞 규탄집회를 하지 않았다고 북한 인권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어요. ‘공개처형하는 북한은 반인권적인 국가야’라고만 비판하는 건 인권운동이 아니라고 봅니다. 인권운동은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건 아니죠. 원인을 차단하는 게 근본문제를 푸는 거예요. 보수 쪽에서는 언제까지 기다릴 거냐고 하는데 처음 유엔의 보편적 정례인권검토(UPR)가 나왔을 때 인권단체들은 북한에 인권 개선하라고 권고했어요. 정당 이외에는 북한 정권 눈치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이해찬 민주통합당 의원이 ‘내정간섭’이라고 말했다면 그 정도 수준밖에 안되는 거죠. 남한 내 북한이탈주민이나 중국을 포함한 제3국의 북한주민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손길 닿는 일부터 할 필요가 있어요. 진보진영이 국내 이주노동자 인권운동을 했듯이 중국 내 북한주민들의 처우 개선을 얘기할 수 있어요. 유엔의 북한인권특별보고관 입국도 북한이 허가해야 합니다. 국제사회에 문을 열어야 북한도 문제해결 방안이 생겨요. 스스로 움직일 명분을 만들어주는 거죠.


- 보수와 진보의 ‘북한 인권대화’가 가능할까요.


김덕진 = 기본적으로 인권에 대한 개념 인식과 감수성 차이가 있어요. 인권을 얘기하려면 최소한 세계인권선언 기준에 동의하는 등 지식이든 경험이든 공감대가 있어야죠. 보수 쪽도 진짜 인권단체가 더 나와야 해요. 그래야 대화할 수 있고 같이 뭘 모색하죠. 북한인권시민연합처럼 합리적인 분들은 만나서 얘기해볼 의사가 있어요.


서보혁 = 서로 진정성을 가지고 각기 사회권, 자유권 개선에 주안점을 두고 선의의 역할분담을 할 수 있죠. 서로 대상화시켜서 정치적으로 접근하면 진정성을 의심하게 됩니다. 평화나 화해라든지, 개발이라든지 보편가치에 입각해 조화롭게 협력하면 됩니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손제민(정치부), 송윤경(사회부), 심혜리(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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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 전병역·손제민·송윤경·심혜리 기자 junb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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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11.01 21:54 수정 : 2012.11.05 17:12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
김상헌 북한인권정보센터 이사장, 제3의 길 모색 나서

“햇볕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인권 문제도 얘기할 여지가 생긴 거죠. 북한인권 관련 자료들을 제가 그동안 무슨 힘으로 얻을 수 있었겠어요. 화해정책에 큰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바늘 하나 들어갈 여유가 없던 북한에 변화가 생긴 겁니다.”

김상헌 북한인권정보센터 이사장(81·사진)은 20년 남짓 북한인권에 몰두해온, 말하자면 북한인권운동 1세대다.
10월25일 만난 그에게선 대다수의 북한인권운동가들이 하지 않는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반공의 입장에서 북한인권을 다루는 사람들이 많아요. 과거 남한 내 고문·인권탄압은 외면하던 사람들이 아무 반성 없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화해정책을 공격하기 위해서 북한인권 얘기를 하는 거죠.”김 이사장은 그러나 북한인권에 관한 한 진보진영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고 했다.

사진 | 김기남 기자
사진 | 김기남 기자

“민주세력은 또 남북화해라는 이름으로 북한인권을 외면해요. 처음 만나 화해하려고 하는데 욕지거리부터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이해는 됩니다. 정부는 북한인권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라는 게 제 입장이기도 해요. 하지만 민간단체가 국제사회와 연대해 활동하는 것까지 냉담하게만 보더라고요.”

김 이사장은 원래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에서 일하다 북한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를 만든 윤현 이사장과 함께 북한인권시민연합을 창립한 데 이어 북한인권정보센터의 이사장을 맡았다.

오랫동안 북한의 인권유린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일에 천착해 온 그는 남한 내에서 북한인권 이슈를 대하는 보수·진보의 방식이 답답했다. 최근 만든 ‘북한인권 제3의 길’이라는 작은 단체는 그런 고민이 바탕이 됐다.

그는 “국제사회에서보다 남한에서 오히려 북한인권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 근본원인은 “박정희 독재정권에 있다”고 봤다. “반공정책이 북한을 마치 딴 나라처럼 만들어버렸고, 남한 사람들 마음속에 ‘저 사람들(북한주민들)이 우리 동포가 아니었으면’ 하는 게 생겨버렸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반공과 결합한 보수 주도의 북한인권운동을 그가 강하게 비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 이사장은 이제라도 진보진영이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민주화를 이뤄내고 인권 의식이 제대로 잡혀 있는 민주계열이 나선다면 북한인권 문제의 전망은 훨씬 더 밝아질 겁니다. 그들이 원한다면 함께 연구하고 돕고 싶습니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손제민(정치부), 송윤경(사회부), 심혜리(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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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1012154005&code=210100#csidx9e019fb4b16659f99c449dd9f6c4f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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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11.01 21:53 수정 : 2012.11.05 17:12인쇄글자 작게글자 크게


남한 인권에 앞장섰던 진보, 북한 인권엔 무관심·변명 ‘이중성’


“솔직히 진보진영은 북한 인권이라는 이름의 운동을 할 수 없게 돼 버렸죠.”


지난달 만난 한 진보적 인권단체 활동가는 인터뷰 후반 어렵게 고백했다. 독재에 맞서 남한의 민주화를 이뤄내고 이후 민중들이 고통받는 곳마다 현장을 지키며 인권을 돌보던 한국 개혁진보 운동 내에는 ‘북한 인권’이라는 불가사의한 공백이 있다. 한국 진보는 왜 북한 인권 딜레마에 빠졌을까.


남한에 사실상 첫 북한 인권 민간기구로 평가받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이 탄생했던 1996년. 설립자 윤현 이사장(82)은 창립 당시 “우리 사회의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많은 이들이 주사파를 의식해 북한 인권문제에 입을 다물고 있다”며 “통일 후 20만명에 이르는 수용된 정치범과 그 가족이 ‘우리가 죽어갈 때에 당신들은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북한 인권의 실상이 ‘고난의 행군’ 이후 남한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이미 진보진영은 북한 인권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 내에서 북한을 이성적으로 보는 부류보다 역사적, 즉 민족주의적으로 보는 부류가 다수였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와 더불어 한국의 진보가 추구해 온 이념의 양축이었다.



북한 수재민들을 위해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가 지원하는 밀가루 500t을 실은 트럭들이 지난달 5일 경기도 파주시 경의선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 개성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당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등 이른바 운동권 내부에선 북한의 기근과 아사 상황에 대해 “과장된 이야기”라는 반응이 중론이었다. 한국의 운동권은 분단 상황으로 인해 민족해방(NL)진영이 주류였다. 이명준씨(35·<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저자)는 1990년대 후반 당시 운동권 내 북한 인권 담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이씨는 “민족해방진영은 처음에 고난의 행군을 믿지 않았다”며 “이들은 북한이 남한보다 풍족하진 못하지만 사회주의 시스템이 모범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는 사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진보의 담론을 점유하고 있던 민족해방 진영은 한국사회를 ‘미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규정했다. 북한을 해방운동의 정통성을 갖고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60년 동안 투쟁하고 있는 우리의 또 다른 민족으로 봤다. 이들에겐 한국이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주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북한과의 협력은 필수적이었다.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이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북한 인권은 불편한 이슈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 진보진영은 북에 인권문제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탈북자들의 고문 증언이 과장됐다’ ‘대북 지원 단체들이 국가보조금을 받기 위해 아사자의 수를 늘렸다’는 식이었다. 실제 북한 인권 실상이 전혀 과장과 왜곡 없이 유통된 것은 아니었지만 진보진영은 유독 북한 인권문제만 나오면 결벽증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후 인권·식량기구들의 조사로 북한 인권이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국제 공론화가 된 후에도 이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진보진영은 북의 인권을 건드리지 않을 ‘인권적인’ 논리들을 개발해왔다. 한국이 북한 인권을 지적하는 것은 내정불간섭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논리, 북한 정권이 3대 세습을 하는 것은 내부의 그럴 만한 체제적 사정이 있다는 내재적 접근, 남한의 인권 상황도 북한 못지않게 열악하다는 주장, 혹은 평화가 우선이라는 식으로 ‘보편적 인권은 주권에 앞선다’는 원리를 ‘진보적’으로 희석시켜 왔다.



이에 더해 대북 유화책을 펴느라 인권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못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을 거치면서 북한 인권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노선 대립은 더 선명해졌다. 보수세력은 햇볕정책을 공격하기 위해 인권 이슈를 더 물고 늘어졌고, 진보는 교류협력과 상호 신뢰구축이 인권을 해결하는 본질적인 방법이라고 대응했다. 또 사회권을 더 중시한 진보는 지원을 통한 생존권 해결을 더 우선하는 인권 과제로 봤다. 대북 포용정책을 통한 점진적인 인권 개선 방법은 실효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 지난 8월 경향신문 특별취재팀이 중국에서 만난 한 함경도 주민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남한의 무상지원과 차관에 대해 “전용이 되기도 하겠지만 물량이 많아진 덕에 쌀값이 내려가 주민들이 전보다 더 수월하게 쌀을 구할 수 있었다”고 얘기했다. 또 지난달 만난 30대 탈북자 김지원씨(가명)는 “법없이 살던 나라 북한에 건국 이래 만들어진 모든 법들보다 개성공단 지구법, 금강산 관광 관련법 등이 더 많았다”며 “포용정책은 실제 북한을 조용히 변화시켰다”고 얘기했다.


진보적 북한 인권 개선운동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연세대 문정인 교수(60)는 “대북 포용정책이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북한체제를 전환해야겠다는 보수적 인권개선 방식은 북한입장에서는 공격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진보진영이 소극적, 우회적 인권개선 방식을 고수하는 사이, 보수진영은 한국의 북한 인권 운동을 서서히 전유해갔다. 진보가 인권운동을 외면하고 보수가 적극 나선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현상이었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유엔 인권위의 북한 인권 결의안 표결에 불참하고 2005년엔 기권하자 미국 주재 한국외교관들은 “북한 인권문제를 남북관계의 특수성으로만 설명하면 국제사회를 설득할 수 없다”며 “인권의 논리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북한 인권운동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보수는 진보진영을 ‘종북’으로 몰고 북한 인권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공교롭게도 북한 인권을 소란스럽게 외치는 이들은 과거 민주화운동 때 침묵하고 반공을 지지하던 세력이었다. 그러나 보수의 잘못된 주도가 진보의 나태에 대한 변명이 될 순 없다는 것이 인권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내 한 진보정당의 대표는 진보진영이 그동안 북한 인권운동에 가담하기 힘들었던 이유에 대해 “북한 인권이 국내에선 주로 남한 인권을 짓밟던 사람들에 의해 제기됐다”며 “국내에서는 정치적으로 활용되고 남북관계는 오히려 악화돼 진보는 같은 운동을 하기가 힘들어졌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인권활동가는 “용산이나 평택 현장에 가면 사람들의 피드백(반응)이 있지만 북한 이슈는 그렇지 않다”며 “인권활동하는 입장에선 동력이 크게 생기기 힘들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인권연구가인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50)는 보수의 인권관 및 동기, 목적, 방법론에 대한 진보진영의 비판에 “일리가 있지만, 진정으로 건설적인 비판이 되려면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개입을 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 5년. 북한 인권은 보수 정권과 보수 시민사회가 일방적으로 주도해버렸고, 진보진영은 더 멀리 와버렸다. 북한 인권문제는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미 국제적인 현안이 돼버렸다. 올해 3월 유엔 인권이사회는 북한 인권 결의안을 표결 없이 채택했다. 2003년 유엔이 북한 인권 결의를 채택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진보 내부에서 더 이상 북인권 문제제기를 유보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조효제 교수는 “인권에 정통한 진보진영이 북한 인권을 훨씬 더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 특별취재팀 전병역·손제민(정치부), 송윤경(사회부), 심혜리(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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