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7

손민석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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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말했듯이 지인과 대화를 하다가 문재인 정부가 친중이라는 근거로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를 근거로 들길래 황당해서 찾아보았다가 더 황당해졌다. 그의 글을 읽지 않은지 오래이지만 황당해서 몇 개 책을 들춰보았다가 덮었다.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책은 '환상의 나라'라는 유튜브에서 진행한 시리즈의 한 챕터라 한다. 여기서 이영훈은 한국이 중세적 환상에 사로잡혀 사리분별을 못하는 나라라고 비판하며 그 근거를 대고 있는데, 첫번째 책이 바로 이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이다. 이제서야 작정하고 읽어보는데 읽다가 도무지 읽기가 힘들어 덮어버렸다. 내가 정말 존경했던 학자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서글픈 기분이 든다.

이영훈은 이 책에서 세종이 사대주의, 노비제 확립 등을 한 사람이라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조선왕조는 중국 중심의 유교 문명권에 속한 제후국으로 조공체제 속에 편입되어 황제 - 제후 - 대부 - 사 - 양인 - 천민으로 이어지는 위계 속에서 사회를 재편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는 세종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미일관적으로 대중 사대주의를 이념화하여 습득한 군주라 주장한다. 행동과 말이 일치했다는 점에서 세종은 대단히 수준 높은 인격체였다는 그의 발언을 보고 있노라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생각난다. 그는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에서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것과 별개로 문재인 대통령은 반일종족주의를 체현하여 수미일관적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이념형 정치인이라 주장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의 세종에 대한 평가는 문재인 대통령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해서 조선왕조가 세종을 기점으로 친중 사대주의 문명으로 넘어간 것을 오늘날 문재인 대통령의 통치와 연결시켜 역사적 시야에서 조망하려는 게 그의 관점이 아닌가 싶다. 자칭 '자유인'인 그가 나서서 이 역사의 회귀를 막으려는 "전사戰士"가 되겠다는건데 스페인에서는 근대로의 여정에 돈키호테 한 명으로 충분했는데 한국에는 돈키호테가 6명이나 필요하다는 게 우리의 비극 아닌가 싶다. 소가 웃을 관점이지만 진지하게 다뤄주자면 그렇다. 문재인이 친중이라는 그의 주장에 대해서는 어제 다뤘으니 넘어가자.

계속해서 이어가자면 나는 이영훈이 왜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지 대충 이해가 된다. 그의 노예제에 대한 이해는 과거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그것에서 출발하여 최근에는 민법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 상당히 많이 변용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노동력의 존재양태라는 관점에서 노예제 개념을 규정한다. 그가 노비제의 존재양태를 깊이 연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그는 노비제가 서양의 노예제, 농노제 개념과 상통하기 어려운 나름의 역사적 독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연구자로서 일찍부터 알고 있었기에 최근에 이르러 노예제 개념을 민법에 맞추어 "공적 영역에서의 무無권리적 존재"로 파악하는 것 같다. 조선왕조는 국가 이외의 다른 독자적인 영역을 법적 권리로 추인하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사실상 무권리의 존재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이러한 무권리의 존재를 노예로 파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노예제 개념을 설정하게 된다면 그러한 무권리의 존재인 노비라는 범주가 어떻게 규정되었는지 논리적으로 따질 수밖에 없게 된다. 왜 노비라는 "천인"이 필요했는가? 왜 사대부는 노비라는 천인을 필요로 했는가? 그가 기존의 노비제의 확장을 세조 연간에 있었던 호구제 개혁에서 찾던 것과 달리 세종의 사대주의 정책에서 찾는 걸로 입장을 바꾼 것은 아마도 노예제의 개념 변화가 그 원인일 것이다. 사실상 노동력의 존재양태라는 관점에서 사대부에 의한 대농장의 확장을 다루는 것보다도 황제를 정점으로 한 위계제의 존재가 훨씬 더 중요하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 - 제후 - 대부 - 사士 - 양인 - 천민이라는 위계적 질서 속에서 조선왕조의 지배 계층은 조선사회 전체를 유교화시키려 노력하였다. 노비제를 유지하려는 강고한 사대부들의 노력은 이 문명적 질서에 대한 그들의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그들 나름의 인식에서 이 질서는 인간과 비非인간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었기에 노비제의 존재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 사학계가 근대로의 맹아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내세웠던 실학자 정약용조차도 양반에게는 노비가 있어야 한다며 고공제 형태로의 노비제의 부활을 주장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국제적으로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에 편입된 조선왕조는 사대주의 속에서 사회 전체를 유교적 질서에 맞게 변용하였고 그것이 경제사적으로 "대분기大分岐"의 시기와 일치하게 된다. 중국에 명나라가 들어서는 것을 기점으로 중국과 서유럽 간의 격차가 심화되어 결국 19세기 이후 100년의 굴욕이라는 동아시아의 (반半)식민화 과정이 진행되는데 그 근간에 동아시아의 경제적 후퇴가 자리하고 있다. 이 대분기를 낳은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조선왕조는 명나라 중심의 유교 문명권에 편입되는 바람에 근대적 경제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흐름을 타지 못하고 그로부터 이탈하게 되었다는 역사인식이 아마도 이영훈의 배후에 깔려 있을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조선 사회는 노예제 사회로 전락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식민화되어 이 민족이 타국의 노예가 되었다. 이 안타까운 대분기 과정에서 한국을 중국 문명으로 이끈 원흉으로 이영훈은 세종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그의 입장 전환이 비교적 최근에 이뤄져서 그런지 대단히 비실증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모두 자세하게 다룰 수 없지만 예컨대 그는 세종이 주인이 노비를 함부로 죽여도 처벌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하지만 당장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만 읽어보아도 공사노비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여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계속해서 나온다. 그가 지적한 시기 이후에도 그러한 기록이 꾸준히 나오기 때문에 단순히 세종이 노비제의 조건을 열악하게 만들기만 했다고 주장하는 건 실증적으로 무리가 있다. 내가 잠깐동안 실록에서 찾은 처벌 기록만 해도 대여섯개나 된다. 세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나름대로 노비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하기도 하였다. 만약 이영훈의 주장처럼 사대부의 존재근거가 노비의 문명화, 유교화에 있다면 논리적으로도 그 명분에 맞게 노비를 문명인으로 교화시키기 위해 험하게 다룰 수가 없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적어도 명분상, 논리상으로는 당연한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왕조는 노비를 나름의 공민으로 취급하였다. 예속민으로 교화시키기 위해 지배했을지언정 함부로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미국의 흑인 노예제에서도 노예는 일종의 '재산'이었기에 대단히 세심하게 다뤄져야 할 존재였다. 함부로 죽일 수가 없다. 죽이는 것 자체가 재산상의 손해였기 때문이다. 노비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느 사회이든지 예속민에게 가혹했다는 점에서 신분제 사회의 잔혹함이 드러나지만, 실상 노예에 대해 생사여탈권까지 갖고 있었다고 하는 로마 노예제에서도 주인이 노예를 함부로 죽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비록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비난하기 위해 억지로 끄집어낸 주장들이기는 하지만 많은 로마 노예제 연구들이 로마 사회가 노예에게 얼마나 너그러웠는지,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얼마나 인권친화적이었는지(아예 노예화를 안 했더라면 더 인권친화적이었을텐데 말이다), 실상 평민과의 차이가 얼마나 적었는지를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다. 그 많은 연구들이 보여주는 바는 결국 예속민조차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장기지속되기 불가능하다는 점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같은 인간들이 서로 상하관계를 설정하고 왜 지배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지를 설명하기란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하다못해 부모가 자식한테 왜 부모 말을 따라야 하는지조차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은 누구나 쉬이 이해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인간이기 때문에 예속관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 또한 적지 않았다.이영훈이 기존의 연구들에서 많이 지적했듯이 노비 또한 예속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예속민이기에 더 치열하게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지배계층의 허위의식에 대항하는 피지배계층의 논리는 결국 "니가 뭔데"라는 것이다. "니가 뭔데"만큼 지배계층의 온갖 이론을 쉽게 논파하는 게 별로 없다.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는가? 라는 말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데올로기의 근원을 가차없이 파훼하고 있는지 그 무서움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출연하는 방송에서 인류의 역사란 대단히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니가 뭔데"와 "내가 혹시?" 간의 투쟁이라 말했던 것이다.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그 지난한 투쟁 과정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역사를 볼 필요가 없다. 후퇴가 없을 수 없겠으나 전진을 무시할 것도 아니다. 나는 그가 발굴한 사실 중에 세조의 찬탈 혁명(?)이 성공한 직후에 반역에 참여했던 노비들이 자기 이름부터 바꿨다는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름을 바꾸어 예속민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려 했다는 그의 해석에 공감하는 바가 깊었기에 노비제에 대한 그의 난폭한 해석이 안타까울 뿐이다.


근본적으로 그는 계속해서 한국의 인민들이, 지성들이 근대를 얼마나 모르는지 개탄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도 근대에 대해 잘 모른다. 그는 대한민국이 환상 속에 사로잡혀 있다고 개탄하기 급급한데 실상 근대라는 것 자체가 환상 없이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은 이해하지 못한다. 동시에 그 자신이 얼마나 환상 속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근대라는 것 자체가 실상 그런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조건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많은 환상 속에서 유지되고 있는가. 그러한 이데올로기는 근대뿐만 아니라 전근대에도 당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 이데올로기성을 비판하고 폭로하는 것을 좌익이 아닌 우익을 자처하는 지식인이 행한다는 게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지만 어찌됐든 모든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가 일찍이 170여년 전에 지적했듯이 환상에 근거해 자기정당화를 꾀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셔널리즘과 같은 이데올로기가 단순히 환상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환상이 환상이면서 환상이 아닌 것으로 나타나는 건 그것들이 계급적 기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의 계급성에 대해 말하기는 곤란하고 한국과 같은 비유럽 지역의 역사적 경로에 대해 지적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마르크스는 생전에 중요한 논고들을 많이 작성했는데 그 문헌들을 읽고 있자면 그가 참으로 예리한 지성인이었다는 점을 쉬이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안타깝게도 거의 200여 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그의 논고들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예컨대 마르크스의 '인도론' 논고들을 보면 그는 상당히 예리하게 비유럽 지역의 후진 민족들의 운명을 논하고 있다. 인도론에서 그는 인도 독립과 재생을 위한 여러 조건들이 어떻게 지배민족인 영국인들에 의해 갖춰지는지를 논한다. 철도의 도입, 신식군대의 육성, 지식인 계층의 등장과 성장, 인도인의 근대인으로의 재편, 자본주의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인데 바로 인도 대륙의 "통일"과 그 통일을 지탱할 "근대국가기구"의 도입이 그것들이다. 마지막 부분만 다루자면 마르크스는 인도대륙이 단 한번도 인도인들에 의해 통일된 적이 없다는 역사적 사실을 신랄하게 지적한다. 인도민족이라는 관념조차도 영국인들이 인도대륙을 통일해 하나의 형태를 부여했기에 생겨날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근대세계에서 후진 민족들은 심지어 민족이라는 것조차도 근대인들이 만들고 심어준 것에 기초해서 성립시킬 수밖에 없다. 근대에 대항하는 운동조차 근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잔혹한 진리를 마르크스는 일찍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예를 우리는 레닌 - 스탈린 시기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찾을 수 있다.


레닌과 스탈린의 혁명전략은 그들이 놓여 있던 역사적 상황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데 여기서 핵심은 세계대전과 혁명, 내전기를 거치면서 혁명의 주체세력이라 할 노동자 계급이 산산조각 났다는 데 있다. 그로 인해 국내적으로는 농민 계급의 광범위한 포위가 존재하고 있었고, 국외적으로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포위와 위협이 도사린다는 위기의식이 볼셰비키 집단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닌이 내놓은 해법은 아시아 민족들의 독립투쟁 열기를 제국주의론을 매개로 하여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정부 및 서구 노동자 계급의 혁명투쟁과 연결시키려 하는 것이었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매개로 하여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간의 대립은 국제적으로 억압민족과 피억압민족 간의 대립으로 전화되었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행하는 노동자 국가는 피억압민족 내에 존재하는 부르주아 계급과 연대할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이론적 활로가 열리자 볼셰비키 집단의 혁명 전략은 국내외적 '적'을 제거할 동지, 지지세력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로 바뀌게 된다.


그 결과로 국내의 적인 농민 계급을 어떻게 급격하게, 폭력적으로 노동자 계급으로 재편할 것인가의 문제와 국외적으로 억압 민족에 대항할 피억압 민족 연합과 소비에트 정부 간의 유대를 어떻게 창출해낼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전자가 스탈린의 그 잔혹한 공업화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와 같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전문연구자들조차도 곧잘 무시하는 지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구자정의 연구논문인 "이식된 근대 만들어진 민족 강제된 독립 소비에트식 민족창조"가 대단히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중앙아시아 지역의 우즈베키스탄은 1920년대 소련의 민족정책에 의해 민족이 "창조"되면서 만들어진 국가이다. 소비에트 정부는 민족분류를 통해 각 개인에게 할당했던 민족 정체성의 호명을 1926년의 센서스를 통해 "객관적 진실"로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로 우즈벡인들과 다른 정체성을 품고 살아가던 사르트인과 차가타이 튀르크인들은 역사적으로 우즈벡인들과 대단히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심지어 이들이 실제의 우즈벡인들에 비해 인구수에서 압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우즈벡인으로 재편되어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투르크멘인도 이런 식으로 새롭게 민족으로 창조되고 재편되었는데 중앙아시아에서 우후죽순으로 이러한 새로운 민족들이 창조되는 과정은 피억압민족을 만들어내어 사회주의 혁명에 참여시키려는 스탈린의 혁명전략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은 학술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는데 하자노프의 <유목사회의 구조>에서 그 단초를 엿볼 수 있다. 스탈린 시기부터 소련 사회는 유목사회 또한 농경사회와 마찬가지로 노예제 - 봉건제 - 자본제라는 발전단계를 동일하게 거칠 것이라 주장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소련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대단히 폭력적으로 진행시켰던 '혁명' 과정들이 현실적 근거가 부재한 상황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사발전단계에서 봉건제 사회 수준에 도달해 있었어야 했고, 그에 따라 소련의 해방 덕분에 하나의 민족으로 재편되어 사회주의 단계로 이행해야만 했다. 소련의 고고학, 인류학, 민속학 등의 여러 "과학"들은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었다. 이들이 왜 민족인지, 민족이 무엇인지, 유목사회의 생산양식이 무엇인지 등이 상당히 장기간에 걸쳐 논의되고 개념화되었다. 이런 식으로 민족이 아닌 이들을 근대성을 기준으로 민족으로 분류하여 새롭게 민족공동체를 창출해낸 소련의 민족정책은 역설적이게도 혁명정부를 붕괴시키는 모순으로 이어진다.


다양한 민족공동체들을 공산당이라는 중앙기구를 통해 묶어내어 하나의 연방체제를 형성하려던 레닌 - 스탈린의 혁명전략은 1991년 중앙 역할을 하던 당이 소멸하게 되자 모래성처럼 붕괴해버렸다. 그 과정에서 중앙의 공산당에 충성을 바쳤던 관료진들은 당의 붕괴 과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이 만들어놓은 민족공동체로 도피해버린다. 그들은 공산주의자에서 이제는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되어 생존을 꾀했고 이들의 행동은 결국 소련 연방제를 붕괴시키는 도화선으로 작용하게 된다. 우리의 인식과 달리 오늘날의 러시아 민족은 자신들을 냉전의 승리자라 규정하는데 소련 연방제를 무너뜨리고 냉전을 해체시킨 민족이 바로 러시아 민족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 공산당 관료진들이 재빠르게 러시아 민족주의자로 탈바꿈하며 이런 새로운 이해를 내세웠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다양한 민족공동체들의 지지를 받는 사회주의 혁명 정부라는 소련 연방의 이데올로기는 결국 그 내부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창출해내는 과정으로 이어졌으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소련 연방의 해체와 지금까지 발생하는 여러 민족문제로 이어지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을 우리는 무겁게 보아야 한다. 근대성이라는 단일기준이 존재한다는 환상 속에서 얼마나 많은 폭력이 난무했는가, 그것을 알지 못하면 곤란하다.


우리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누구보다도 근대를 열렬히 추구하고자 했던 집단이 얼마나 환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무너졌는지를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영훈 같은 이들한테 소비에트 사회는 근대가 아닌 사회라 그는 아무런 동요없이 이 문제를 제낄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인이 아닌 이들과 근대인들이 어떻게 70여년 넘게 협력하고 대결하고 살았는지 나로서는 도통 모를 일이고 소련 사회도 러시아 자본주의라는 근대 세계 내에서 나타난 사회이지만 아무튼 그는 여전히 근대가 환상 속에서만 자리할 수 있다는 걸 모를 것이고 모르고자 노력할 것이다. 자본주의 맹아론이라는, 서구 선진 사회를 단일 근대성으로 환원해 그것으로 다른 모든 사회를 재단하고 재편하려는 관점의 문제점을 가장 맹렬히 비판해온 그가 역설적이게도 여전히 서구 선진 사회를 기준으로 세우고 그 사회들을 추종해야 한다는 이론을 펼치는 모순을 범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결단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남의 허물은 티끌이라도 태산처럼 보이고 자신의 허물은 태산이라도 티끌처럼 보이는 법이다.


그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그 자신의 근대성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해 다른 이데올로기로 귀결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영훈을 비판하는 한국 진보학계 또한 이데올로기 비판보다는 정치적 비난으로 전락하며 단순히 이영훈 주장의 실증성만을 문제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내셔널리즘이 갖고 있는 환상성을 비판하는 이영훈의 주장을 실증적으로만 검토하는 것은 결국 기존의 내셔널리즘이 지니고 있는 환상성을 여전히 추인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들의 투쟁이 그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학술적으로 유의미하고 생산적으로 소비되지 못하는 건 바로 근대성 내부의 투쟁, 그것도 서구 선진 사회를 기준으로 한 근대성 내부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탈근대론을 주장한다고 오해하지는 말자. 나는 근대성의 업그레이드를 주장하는 사람이다. 기존의 한국 내셔널리즘이 갖고 있는 환성성에 대한 비판은 시대적 변화에 맞는 이데올로기의 고도화로 귀착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여러 문제를 포괄하여 하나의 세계관을 제공해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의 순기능을 나는 대단히 중요시한다. 내셔널리즘을 기준으로 양쪽이 저열하게 투쟁하게 되면 한국 사회의 진전은 어려워진다. 근대라는 것이 무엇인지, 근대 사회에서의 자유라는 게 무엇인지를 논하며 어떤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고 가야 하는지를 논하지 못한다면 인민한테 선택지를 줄 수 없는 조잡한 정치놀음밖에 되지 않는다.


근대 사회가 무엇인지 보다 심도 깊게 연구함으로써 고작 생각을 바꾸는 걸로 자유인이 될 수 있네 없네를 논하기보다 자유인을 자유인으로 만드는 그 기반이 무엇인지, 그 기반에서 어떻게 정신세계의 변화가 나타나는지 등을 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마르크스로 돌아가야 한다. 근대를 넘어서기 위해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근대를 탐구한 사상가로서의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근대를 제대로 실현할 수도, 넘어설 수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진행하는 마르크스 관련 방송과 그 묶음으로 출간될 책을 열심히 구매해서 읽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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