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9

구스 겐타쿠葛生東介가 쓴 김옥균의 평전(윤상현 역)

 

Kim Bong-Jun shared a memory.
2h

요즘 김옥균과 마주치는 일이 많다. 마침 작년 이맘때도 김옥균과 썸씽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매년 11월은 김옥균의 달로 정해야겠다.

요즘 정리하고 있는 자료의 해제를 작성하다가 문득 책상 한 구석에서 전에 비행기에서 읽다만 김옥균 책을 다시 펼쳐 보았다. 또 마침 정리하고 있는 문건이 갑신정변에 관련된 부분이라 유독 눈이 간다. 이 책은 구스 겐타쿠葛生東介가 쓴 김옥균의 평전(윤상현 역)으로 분량이 많지 않고 중복되는 내용의 글이 많아 생각보다 빨리 읽을 수 있었다.

한국 근대사의 여러 인물 중에 김옥균은 유별나게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그에 대한 평가는 조선과 일본 그리고 청나라마다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조선에는 역모죄인 혹은 친일파,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급진개화파 등의 수식어가 붙지만, 일본에서는 조선의 지사와 의인으로 평가 받는다. 청나라에서는 조선의 평가와 유사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본과 결탁한 조선난당朝鮮亂黨 혹은 고려난당高麗亂黨의 수괴로 평가를 받고 있다.

19세기 말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당시 일본에서 김옥균은 한 사람의 지사志士와 동등한 평가를 받는다. 구스 겐타쿠 등 당시 김옥균과 관련된 일본인들이 쓴 글을 보면 당시 존왕양이와 메이지 유신을 거친 분위기를 가진 일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김옥균을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는 지사와 동일시하고 있는듯 하다. 성격상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의 행적과 죽음에 동질감과 애도를 느끼는 일본인들이 있었던 듯하다. 물론 다케조에나 이노우에처럼 김옥균을 사사건던 문제만 일으키는 말썽꾸러기로 보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반면, 당시 조선과 조선왕실에서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주동한 수괴보다 더한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원수로 보고 있는 듯 하다. 물론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일파가 살해하려고 한 인물 중에 민영익이 있어 민씨일족의 깊은 원한을 산 것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조선왕실은 일본으로 몸을 피한 김옥균을 처단하기 위해 사전에 많은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리 청나라와 김옥균의 처우에 대해 긴밀히 상의하기도 했으며, 자객인 홍종우를 몰래 김옥균의 측근에 두고 살해할 타이밍만을 살피고 있었다. 이 정도면 김옥균에 대한 조선왕실의 원망은 굉장히 깊고 치밀했다.

본심을 속이고 측근이 된 홍종우를 통해 일본에서 바로 살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살해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살해할 경우 생길 국제적 충돌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미리 청나라와 모의하여 넌지시 이홍장과의 접견 가능성이라는 미끼로 상해까지 꾀어 낸 다음에 살해한다. 그리고 김옥균의 시신도 청나라군의 압력으로 조선까지 가져오고 인천 양화진에 목을 효수해 걸어두는 방식으로 역모죄인 김옥균에 대한 조선왕실의 분노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김옥균에 대한 청나라의 태도는 어떠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당시 청의 눈은 김옥균과 조선 왕실에 있지 않았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일본과 쉴틈없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기에 조선에서 일본에 우호적인 김옥균을 좋게 봤을리는 없다. 갑신정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지만 향후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에서 불리해질 수 있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김옥균을 최대한 무리없이 처분하려고 하였다. 김옥균에 대해 조선이 뜨거운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면 청은 차가운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청에게 있어서 김옥균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계획을 틀어지게 하는 눈엣가시였을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김옥균을 처리할 수 있는 좋은 발판을 조선정부에 마련해준다. 차도살인인 것이다. 그리고 당시 사료를 보면 청은 김옥균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에게도 주목한다. 조선에 미치는 일본의 영향력과 배경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갑신정변의 배경에는 청이 청불전쟁의 불을 끄기 위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빼내면서 김옥균과 그 개화당에게 찬스를 준 것도 있다. 그리고 그 찬스가 다시는 없다는 것을 직감한 김옥균은 당시 일본공사 다케조에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불완전한 준비에도 정변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 유명한 삼일천하로 끝맺게 되는 이 정변으로 일본에 대한 조선왕실의 경각심과 의심은 더욱 심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외부에서 파트너가 필요했던 조선왕실은 러시아를 일본의 대체로 여기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을 해본다. 당시 김옥균의 타도 대상이 조선왕실 자체가 아닌 당시 민씨 일족이라는 점에 있어 그 타도대상이 내부집권세력에 그쳤다는 점에서 김옥균이 가진 사상적 한계와 지사로서의 평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불교를 믿었던 그가 척사나 존왕양이 같이 유교적 명분을 내걸었다면 급박했던 정변이 그래도 어느 정도 반골 유학자들의 지지를 받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김옥균은 그저 일본이 듣기좋게 내건 조선은 자주국이라는 말에 넘어간 순진한 아나키스트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김옥균에 대한 조청일 삼국의 상이한 관점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에는 주도적 집단 및 주체의 영향력에 따라 갈린다.

아울러 재미있는 점은 상해에서 김옥균을 살해한 홍종우는 그 당시 프랑스까지 유학을 다녀온 사람으로 단순한 자객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김옥균의 살해에 성공한 이후 홍종우가 고종에서 시국에 대한 건의를 올린 글이 다른 사료에서 보이는 걸로 봐서는 홍종우는 이 일 이후 나름 조선왕실로 부터 중용되었던듯 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고나서 부터는 홍종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총애를 받아 높은 자리에 까지 올랐으나 홍종우의 입 바른 소리에 왕실이 질렸을지도 모른다. 당시 조선왕실은 그런 모습이었다.

갑신정변의 최대 수혜자는 원세개였다. 혈연의 낙하산으로 들어온 말직의 무관 원세개는 김옥균 일당과 일본군을 성공적으로 제압하여 이후 이홍장의 항구적인 총애와 신임을 받게 된다. 이 일 이후 원래 총상무위원으로 조선의 현지 책임자로 있던 진수당은 원세개에게 그 자리를 가로채이고 김옥균 등이 남긴 무골해삼(無骨海蔘)이라는 치욕적인 별명만을 짊어진채 사라진다. 나름 미국까지 파견다녀온 관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래 사진은 양화진에 효수된 김옥균의 목이다. 이 시신을 조선으로 가져오는 데에도 청과 일본 그리고 조선의 신경전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의 시신 하나 처리하는 데에도 치밀한 알력다툼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김옥균의 일본 지인들은 김옥균의 시신의 일부를 몰래 일본으로 들여와 도쿄 분쿄구의 사원에 모시기도 하였으며, 또 김옥균의 미망인을 찾아가 애석한 마음을 전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본이 김옥균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알려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들이 애석해 한다고 해서 김옥균의 행적과 정치적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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