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Yanghyun Song to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13 September 2019 at 09:50 ·
[지승호의 경청] 日강제동원 전문가 정혜경, '반일 종족주의'를 논하다①
news.v.daum.net2020[지승호의 경청] 日강제동원 전문가 정혜경, '반일 종족주의'를 논하다①
김호경 입력 2019.09.13. 06:00 수정 2019.09.13. 20:57 댓글 50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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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 에 강제동원 유족들 상처 많이 받았을 것
이영훈·이우연·주익종, 우수한 능력 갖고 무책임한 길 걸어
'관련 자료가 얼마 없어서 모든 자료 다 봤다' 주장에 놀라
노무자 공탁금 자료만 6~7명이 팀 만들어 몇 년 연구해야
젊은이들 동조 보며 반성.. <반일 종족주의> 반론서 준비
피해자성을 밝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자료 모으는 일
학계에 가장 큰 책임..피학적인 부분만 얘기해서는 안 돼
식민지 피해 진짜 교훈, 우리 주변 약자들 헤아리는 실천
'日에 소송하러 갈 때마다 치욕감에 죽고 싶다'는 피해자
'나라 없어서 남편도 잃었지만, 지금은 나라가 있는데 왜?'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게 내버려두지 말고 정부가 나서야
【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정혜경 박사가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토즈에서 지승호 인터뷰 전문 작가와 '반일 종족주의' 등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9.13. dahora83@newsis.com
【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정혜경 박사가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토즈에서 지승호 인터뷰 전문 작가와 '반일 종족주의' 등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9.13. dahora83@newsis.com
【서울=뉴시스】지승호 인터뷰 전문 작가 = <반일 종족주의>(이영훈 외)라는 책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이 상황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이 분야 대표적 전문가 중 한 분인 정혜경 박사를 얼마 전 만났습니다. <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좀 더 근본적인, 우리가 성찰하고 반성해야 될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혜경 박사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식민지 시기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11년 동안 조사과장을 지내며 3000명의 피해자를 면담, 조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감동과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 학계가 해야 할 일, 국가의 책무 등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한번쯤 곱씹해서 생각해볼만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길지만 한번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지승호(이하 지) - 요즘 많이 바쁘시죠?
정혜경(이하 정) - 매년 3월 삼일절부터해서 8월 광복절까지는 바쁜데, 요즘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 때문에 조금 더 바쁘네요. 제가 또 일을 벌이는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어서요.(웃음)
지 –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정 – 저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우연씨 글을 보면 강제동원, 노무동원 됐거나, 그 유족 분들이 계신데요. 이 분들이 참 많은 상처를 받으셨겠다, 하는 생각을 먼저 했습니다. '학자가 도대체 뭔데, 남한테 상처를 주나? 자기는 자유롭게 말하고 글쓰고 하지만, 어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생각을 못하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더라구요.
【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정혜경 박사가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토즈에서 지승호 인터뷰 전문 작가와 '반일 종족주의' 등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9.13. dahora83@newsis.com
【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정혜경 박사가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토즈에서 지승호 인터뷰 전문 작가와 '반일 종족주의' 등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9.13. dahora83@newsis.com
지 – 누군가 상처를 받든 말든 우리 주장을 하겠다는 거 아닌가요?(웃음)
정 – 몇 년 전에 그 분을 행사장에서 봤는데요. 그때는 표정이 좋지 못했는데, 요즘 보면 자신감이 넘치더라구요. 이영훈 선생도 그렇고, 이우연, 주익종 선생 다 일본어도 물론이고, 한학도 정말 뛰어난 분들이에요. 주익종 선생님은 제가 위원회에 있을때, 피해조사 한 건 한 건을 직접 검토하는 분과위원으로 오셨어요. 우리가 피해자 판정을 하는데, 객관성을 담보해야 하잖아요.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일본 우익이 와서 봐도 '아, 맞다' 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 낙성대연구소 쪽에 연락을 했습니다. '어떤 분이 좋겠냐'고 하니까 주익종 선생을 추천해주셨어요. 이 분이 기업사를 하니까 이 분을 모셔서 자료를 분석하는 일을 부탁드렸죠. 자료들을 피해자들이 기증을 해요. 사진도 있고, 명부도 있고, 밥 숟가락도 있고, 담배 케이스도 있고, 그렇거든요. 그것을 하나 하나 검토해서 평가하는 평가위원으로 모셨습니다. 이 분이 기업 관련 자료만 보다가 이런 자료를 보니까 너무 좋아하시는 거에요. 그러면서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판정하는 일을 하셨는데요. 조서를 쓴 조사관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이 분들이 하나씩 검토하시고, 질문을 하시면 답변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굉장히 세밀하게 하죠. 하나 하나 딸린 자료들을 보시면서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하시냐. 이게 피해가 아니면 뭐가 피해겠습니까?' 하는 말씀도 하셨어요. 제가 이번에 얼른 주익종 선생이 쓴 부분을 봤는데요. 다행히 위원회에서 피해 판정을 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비판도 하지 않으셔서 본인도 의미있는 작업에 참여했다고 생각하시나 보나, 라고 느꼈죠.(웃음) 이렇게 우수한 능력을 가지신 분들이 왜 이렇게 학문 외적인 의도를 가지고 무책임한 길을 걸어가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한겨레 신문에 기고문을 냈는데요. 이우연씨가 반론서라고 써서 뿌려요. 그런데 반론서 내용은 더 그래서, 페이스북에다가 대응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반론서를 준비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일본하고 한국에서 동시에 낼 거거든요. 거기에서는 그 분들이 간과하고 있거나, 방향을 잘못잡고 있는 것을 독자분들에게 좀 더 제공을 해드려야 될 것 같아서요. 그 당시의 체제가 어떻고, 시스템이 어떻고, 이걸 우리가 단순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그런 문제를 좀 다양하게, 그야말로 실증적으로 제시해볼려고 합니다.
지 – <반일 종족주의>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는데요. 한일 관계가 악화되고, 많은 국민들이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을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사람들이 그 책에 그렇게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요? 유튜브 독자도 많다고 하던데요.
정 – 열광까지는 아닌 것 같구요. 제가 볼 때는 유튜브의 독자들이 기본 구독자가 됐다고 봅니다. 조국 수석이 책도 안 읽고 비판을 하는 것을 보고 샀다는 사람들도 있구요. 우리 같이 분석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유튜브의 내용하고 책이 같지는 않아요. 유튜브 내용보다는 책이 순화된 부분이 있어서요. 유튜브를 보고 젊은이들이 상당히 동조를 한다고 해서 학계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반성을 해야 되는 것 아니냐, 그 젊은이들이 동조하게끔, 우리가 다른 것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서울=뉴시스】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상이 20일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고노 외상은 21일 열리는 한일 외교장관 회담 때 징용을 둘러싼 문제에 한국 정부의 신속한 대응을 거듭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출처 : NHK> 2019.8.20
【서울=뉴시스】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상이 20일 베이징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고노 외상은 21일 열리는 한일 외교장관 회담 때 징용을 둘러싼 문제에 한국 정부의 신속한 대응을 거듭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출처 : NHK> 2019.8.20
지 –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이런 책이 나옴으로서 반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반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겠습니까?(웃음)
정 – 저도 구석에 쳐박아놨던 책을 끄집어냈습니다. 이 말을 하려면 확실히 이게 맞는지도 확인을 해야 되니까 공부를 좀 더 하게 되구요. 우리 연구회가 있지만, 연구회 사람들이 책을 내고 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책을 내자'고 하면 '뭘 귀찮게 이런 것을 하냐?'고 했는데, 이번에는 본인들이 먼저 '내야 되지 않겠냐'고 하니까요.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학계의 오류들이 있어요. 그런 오류들을 앞에 먼저 제시를 할 생각입니다. 이런 것들은 제가 계속 주장했던 거거든요. 오류라고. 오류를 생산하는 사람들 중에서 친한 사람들도 있어요. '그건 하지마' 그래도 안 듣고 그랬었어요. 친하니까 어디 드러내고 글을 쓰거나, 이름을 밝히거나, 하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이번에는 '이건 오류다. 당신들도 이런 주장하지 마라' 하고, 실명을 밝히고, 그렇지만 이런 오류가 있다고 해서 사실이 이런 식으로 왜곡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얘기를 전부 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주장하는 사진 네 장이 있잖아요. 그건 제가 페북에다가도 '이 사진 쓰지마라. 이건 아니다'라고 계속 올리고, 방송 감수 하면 제가 그것부터 제일 먼저 빼주는데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지금도 계속 그렇게 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도 계속 주장을 하고, 여러 사람이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을 잘못 썼다고 해서 있었던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봐요. 이 분들은 '한건 했다. 우리는 진실이고, 너희는 가짜야' 라고 하니까요. 학문 세계가 그렇게 단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학문이라는 것이 객관성을 추구하는 지리한 과정인데요. 자료 하나 봤다고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하면 정말 공부하기 편한 거죠. 그래서 '이 분들 참 행복하게 사시는구나' 하는 생각도 좀 하게 됐습니다.(웃음)
지 – 일부러 그랬는지, 학자로서 게을러서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요. 침소봉대도 많이 있었던 것 같구요. 지엽적인 사실을 하나 찾아내서는 '이게 팩트야. 니들은 다 거짓말쟁이야'라고 하는 것 같거든요.
정 – 제가 KBS하고 인터뷰를 하는데요. PD가 이우연씨하고 인터뷰한 내용을 들려줬습니다. 거기서 너무 놀랐던 사실은 뭐냐 하면요. 저희 고민이 그거거든요. 강제 동원 관련해서 자료가 너무 많아요. 개인적으로는 다 읽을 수가 없어서 팀 플레이를 해야 된다고 해서 팀을 짜서 자료를 읽고 있는데요. 그래도 다 읽지를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여기에 관련된 자료가 얼마 없어서 나는 모든 자료를 다 봤다'고 하셨대요. '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는 그래도 운이 좋아서 현장을 많이 다녔거든요.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 동남아, 사할린, 만주, 태평양을 다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이 다 달라요. 현장도 안 가보시고, 자신있게 '탄광은 넓이가 이 정도예요, 근대화가 이렇게 됐어요' 이렇게 얘기할 수가 있다니, 탄광 좁은 데서 밀차를 밀다가 밀차가 거꾸로 떨어져서 죽은 사람을 화장했다는 기록도 나오는데, 그 분은 근대적인 곳에서 왜 손으로 밀다가 그렇게 됐을까,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현장과 자료와 경험자가 있는데, 저는 그래도 그 중에서는 제일 많이 봤다는 사람인데요. 그래도 조심스러운 부분들이 있습니다.
【서울=뉴시스】이영환 기자 = 광복절인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자주와 평화를 위한 8.15민족통일대회·평화손잡기 행사를 마친 참가자들이 강제징용노동자상과 함께 일본대사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2019.08.15. 20hwan@newsis.com
【서울=뉴시스】이영환 기자 = 광복절인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자주와 평화를 위한 8.15민족통일대회·평화손잡기 행사를 마친 참가자들이 강제징용노동자상과 함께 일본대사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2019.08.15. 20hwan@newsis.com
지 – 일제 시대 때는 탄광의 넓이도 그렇고, 근무 환경이 굉장히 좋았다는 건데요. 그럴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 일본이 전쟁에는 왜 졌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웃음)
정 – 총동원 전쟁이라고 하지만, 일본은 당시 전쟁 참전국 중에서 총동원 전쟁을 할만한 능력이 안됐었거든요. 의무 교육이 다 안 돼서 끌고 가려고 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기도 했구요. 징용제도도 1939년에 법을 만들었지만, 기술직만 하게 된 것이 이 사람들을 다 파악할 수 있는 국민동원 시스템이 안 되어 있었거든요. 호적은 있지만, 주민등록제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지방 같은 경우는 시골에 사니까 우리 마을에 50명 산다고 파악이 되지만, 도시 같은 데로 이동을 했을때는 파악이 안 돼서 징용장 전달을 못했거든요. 그 다음에 독일 같은 경우나 영국 같은 경우 전쟁을 해도 배급제도를 나중에 실시했어요. 일본은 일찍부터 배급제도에 들어가요. 그러니까 국민들이 '이기고 있다며, 근데 뭐가 부족한 거야. 잘 안 되는 거야' 하는 불안감을 가지게 됐구요. 독일은 당시 7시간 노동제를 주장했다고 하거든요. 나치에 노동자들이 혹했던 이유가 뭐냐 하면 7시간 근무가 끝나면 별장 같은 데서 휴식을 취하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일상의 여유를 제공했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산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들어오고, 생활이 풍요로워졌는데요. 일본은 그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직장이 있는데, 이 직장을 버리고 가서 일을 하는데, 돈을 조금 밖에 안 주면서 일을 시키면 도대체 이게 뭐냐?' 이렇게 돼서 일본 민중들이 구청에 가서 항의하고, 어떤 사람은 안 간다고 자기 손가락을 자르고 했거든요. 그게 자료에도 나오고 하는데요. 그런 시스템인데, 어떻게 일본을 근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나요? 물론 한국보다는 근대적이었죠. 탄광도 사할린의 탄광을 가보면요. 1930년대부터 탄광을 개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기업이 안 가니까, '우리가 여기다가 도로를 깔아줄게, 근대화를 해줄게' 해서 전체를 기계화를 합니다. 그래가지고 밀차가 올라올 때 기계로 돌릴 때 동력 장치를 해놨더라구요. 제가 2005~2006년에 갔을 때 그 기계를 그때도 쓰고 있었어요. 그것을 돌려서 탄이 올라오면 그 밑에 밀차가 대기하고 있고, 호퍼라는 기계에서 문을 열어서 떨어지면 딱딱 이동해서 항구로 가는 시스템이 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1880년대부터 판 일본의 탄광들은 점점 안으로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갱도도 더 좁고 상황이 더 열악했죠. 탄질도 안 좋고, 탄을 끌어올리는 것도 힘들고, 그러니까 1000미터, 2000미터를 들어갔어야 되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을 끌어올릴 때 동력이 아니고, 사람이 끌어올려야 되니까, 더 고생스러웠죠. 탄을 언제 캤느냐, 탄질이 어떠냐, 탄의 성분이 어떠냐에 따라서 같은 석탄이라도 하더라도 역청탄이냐, 무연탄이냐 등에 따라서 노동 환경이 달랐거든요. 그래서 저는 탄광이 이렇다는 말씀을 못 드리구요. 다만 하시마는 이랬다, 사도광산은 이랬다, 제가 특정한, 확인해본, 조사를 해본 곳, 연구를 해 본 곳에 대해서만 말씀드릴 수 있지, 전체 탄광이 이랬다, 1930년대에는 이랬다, 이렇게는 말씀을 못 드리거든요. 제가 그 외에 자료현황만 논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워낙 자료가 많기 때문에요. 그것도 한국에 공개된 자료 현황만 썼는데도 두꺼운 논문이 한 편 나올 정도로 자료가 많구요. 아시아 역사 자료센터라고 일본 정부에서 만드는 디지털 아카이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일제 시대에 있었던 모든 자료를 계속 올리고 있습니다. 수백만 건의 자료를. 파일로 다 다운을 받고, 출력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고, 한국어로도 들어가서 검색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거기 자료를 다 볼 수가 없습니다. 너무 많아서. 그 다음에 예를 들면 한일협정문서 자료도 한국 정부 자료는 얼마 안 되는데요. 일본에서 시민들이 재판을 해서 공개를 받은 것이 있습니다. 전부가 아니고, 일부인데도 한국에 공개한 자료보다 몇십배가 많습니다. 제가 출력을 하다가 포기를 했습니다. 너무 많아서. 그래서 하나의 주제에 팀을 만들어요. 예를 들어 노무자 공탁금 자료, 그러면 6~7명이 팀을 만들어서 몇 년 연구하고 이런 식으로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안 하면 도저히 그 자료를 볼 수가 없어서요. 그런데 그 많은 자료를 다 보셨다고 하니까.
지 – 선생님께서는 자료를 충분히 조사를 해둬야 일본하고 협상을 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이스라엘이 야드 바셈(기억하라)을 설치해서 1953년부터 2000년까지 조사를 해서.
【서울=뉴시스】이영환 기자 = 광복절인 15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광복 74주년 일제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대회 및 국제평화행진에 참가한 강제징용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이춘식 할아버지가 행진을 하고 있다. 2019.08.15. 20hwan@newsis.com
【서울=뉴시스】이영환 기자 = 광복절인 15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광복 74주년 일제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대회 및 국제평화행진에 참가한 강제징용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이춘식 할아버지가 행진을 하고 있다. 2019.08.15. 20hwan@newsis.com
정 –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지 – 2000년에 소송을 제기해서 독일의 배상을 받아냈다고 하던데요. 우리가 거기로부터 교훈을 얻어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정 – 그게 단지 배상 때문이 아니라요. 우리가 피해자성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자료를 모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피해자성 하면 많은 분들이 그게 뭘까 하고 생각을 하시는데요. 세월호 얘기하면 이해하실 것이라고 보거든요. 세월호의 유가족이 원하는 것이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자 하는 거잖아요. 또 하나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된다는 거잖아요. 그럴려면 옛날에 강제동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싶다고 하면 자료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소위 말해서 피해국에게는 공식 자료가 없어요. 가해국이 가지고 있죠. 그러면 피해국이 할 수 있는 것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 꾸준히 자료를 축적을 했다면 지금 같은 열악한 한일 관계는 없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했다면 사람들이 '아, 옛날에 우리가 이런 일을 겪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 '우리가 이런 일을 겪었으니까, 이런 권리가 있다'는 주장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구요. 나아가서 '이런 일을 겪었으니까 앞으로는 이런 일을 겪지 말자' 하고 나갈 수 있는데요. 우리는 첫번째 단계에서 막혔어요. 우리가 무슨 일을 겪었지? 하면 잘 몰라요. 대표적인 것이 일본군 위안부가 몇 명이 갔지? '3만명에서부터 40만명까지요', 이건 통계가 아니죠. '모릅니다' 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일본 위안부가 이러니 저러니, 징용이 이러니 저러니 말을 하게 되는 거잖아요. 광복 74주년인데, '강제 동원이 있었다, 없었다'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피해자성을 유지하지 못했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지금 있는 자료라도 열심히 분석해서, 공개를 해서 사람들에게 '이런 자료가 있습니다' 그러면 모르는 사람들도 보면 '이게 피해 자료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서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디딤돌이 되거든요. 그 과정에서 배상을 받는 부분도 있을 수 있는데요. 우리는 그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라도 자료는 열심히 모으기도 해야 되고, 지금 있는 자료도 활용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된다고 봅니다. 지금 한국 내에 상당히 많은 자료가 있어서 우리도 이런 자료들을 국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만 만들면 많은 분들이 피해 내용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최소한 <반일 종족주의> 같은 책이 나왔을 때 '자료 찾아보니까 이게 아니네' 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정부 기관이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런 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민을 해야 된다고 봐요.
【서울=뉴시스】최동준 기자 = 14일 서울 용산역 일제강제징용노동자상 앞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강제징용노동자들을 추모하는 화환이 놓여 있다. 2019.08.14. photocdj@newsis.com
【서울=뉴시스】최동준 기자 = 14일 서울 용산역 일제강제징용노동자상 앞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강제징용노동자들을 추모하는 화환이 놓여 있다. 2019.08.14. photocdj@newsis.com
지 –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료 조사, 공부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일본하고의 관계에서도 감성적으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잘 모르잖아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을 보면서 답답하면서도 반론을 하기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일부에서는 '이런 분위기에서 진짜 사이다 같은 책이다'라고 반응하고 있구요.
정 – 저는 그런 점에서 학계가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책에서 지적하는 것 중에서 일본인 사진인데 조선인 사진이라고 한 것이 있잖아요. 그 사진은 재일동포 역사학자가 사진집도 냈습니다. '일본인 사진'이라는 캡션도 달려있고, 사진집이 한국에서 출간도 됐어요. 그런 것을 처음에 누군가가 잘못 사용했죠. 그것이 계속 오류로 가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서 '어머니 배가 고파요'는 학자들도 많이 썼어요. 교과서에서도 썼구요. 그런데 그것도 2000년에 '아니다' 하고 공개가 됐거든요. 그러면 안 써야 되잖아요. 그런데 지금도 부산역사관에 돌에다가 새겨 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역사 학자 중에 유발 하라리가 있는데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냐 하면 '역사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해방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거죠. 우리가 계속 새로운 것을 의문을 가지고 탐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데요. 학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어요. 친한 사이니까, '논문에다가 잘못됐다고 써' 하면 절대 쓰지 않습니다. 저도 잘못 본 사례들이 있었어요. 군인이 아니고 군무원인데, 군인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 있었습니다. 다음 논문을 쓸 때 그것을 썼습니다. '몇년 전에 이런 글을 썼었는데, 잘못 쓴 것이다'라고. 그렇게 자기 오류를 자기가 수정하면, 남이 지적하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요. 그렇게 했으면 지금 같이 이렇게 오류가 계속 제거되지 않았을 수는 없다고 보구요. 저는 중요한 것은 그 거라고 봅니다. 제가 시민강의를 1년에 열 번 이상 하는데요. 그때 항상 강조하는 건데요. '우리가 왜 일본한테 잘못했다고 얘기하는지 한번 생각해본 적이 있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일본 싫어요. 되게 싫어요' 라고 해요. 그것은 콤플렉스입니다. 하나는 우리를 침략했으니까, 그랬지, 침략만 해서 그럴까, 그게 아니라 침략했는데,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고, 강제 동원을 했는데도 거기에 대해서 인정하고, 사과를 하지 않는 거잖아요. 결국 뭐냐하면 너희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야, 뭘 잘못했으면 사과해, 그런데 그런 말을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사과하세요. 사과하고 같이 가요'라고 해야 되는데요. 우리는 그게 아니라 '저것들은 종자가 못되먹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잖아요.(웃음) 우리 스스로도 문제 의식을 못 가진다는 거예요. 최소한 우리가 먼저, '우리가 왜 일본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 왜 문제를 제기하지' 하는 생각을 해보자, 그러고 나서 비판을 하고, 일본이 거기서 대해서 따라오면 같이 손잡고 가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가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가 좀 비참해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일단은 우리가 먼저 그 생각을 해야 되는데요. 교육자료를 감수하면서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다 피학적이에요. 이렇게 당했고, 이렇게 당했고, 이렇게 당했어요. 그러면 학생들한테 물어봐요. 이런 것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냐고 해요. '그래서요? 어쨌다는 거예요?' 이런 생각이 든데요. 저도 그렇거든요. 일본을 떠내려보낼 겁니까, 옆나라인데. 그거 안 되잖아요. 친구는 절교할 수 있어요. 이웃은 이사를 가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사를 못 가요. 그러면 저 사람들한테 손을 내밀어서 가르쳐주고, 같이 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학생들한테 피학적인 것만 가르치면 '우리가 당했구나, 어우 나쁜 놈들' 하고 끝나는 겁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냐 하는 대안을 제시해야되죠. 그러면 우리가 가르쳐주고, '같이 갑시다', 무엇을 향해서,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서. 전쟁이 나니까, 여성이나 아이나 노인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잖아요. 이런 세상이 없도록 가야 된다고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뒤를 잘라내고, 앞부분만 이야기하니까요. 제가 <군함도> 영화를 감수를 했습니다. 자료를 제공해드리니까 영화 표를 주셔서 저희 팀이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학생들이 나오면서 '일본놈들 다 죽어야 돼'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이게 잘못됐구나' 저런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저러니까 전쟁은 나쁜 거야' 이래야 되는데, 우리는 <실미도>를 보고 나와도 그렇잖아요. '김일성을 죽이러 우리가' 이렇게 하지, '저렇게 하면 안 되지' 하는 교훈을 못 얻는다는 거죠. 역사의 교훈은 널려있는데, 우리가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74년 전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보니까 저런 책을 보고 '사이다'라고 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나 싶습니다. 저것을 보면 사이다라고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고 언론사에서 물어보더라구요. 우리 세대가 반성을 해야죠. 우리 세대가 젊은 사람들에게 저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한 것은 아니냐. 젊은 세대들이 역사의 왜곡에서 이미 벗어났어야 되는데, 여전히 철사줄로 꽁꽁 묶여서 끌고 가고, 총칼로 끌어가고, 밤에 자는데 닭장에서 닭을 채가듯이 갔다는 이야기를 지금도 하고 있고, 지금도 어느 장소에서 어느 학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그렇게 알고, '우리를 괴롭힌 저 놈들을 어떻게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해서 건강한 세계 시민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반성을 해야지, '사이다'라고 하는 사람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자격은 없다고 봐요. 그 말씀은 다시 말씀드리면 당시에도 징용 가면, 또는 강제 동원을 가면 좋은 곳인 줄 알고 갔다가 속은 사람들도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니고, 그렇게 속이고 데려가는 사람, 속이도록 한 사람의 잘못이라는 것도 똑같이 봐야된다는 거죠.
지 – <실미도>도 말씀하셨지만, 그런 영화를 보고 나면 인권에 대해서 생각하고, '저런 야만의 시대가 다시 안 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를 고민해야 될 것 같은데요. 김일성을 욕하거나, 박정희를 욕하고 끝나잖아요.
정 – 그러니까 사이다가 아니고, 답답한 거예요. 박정희, 김일성은 죽었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최소한 우리는 저렇게는 안 살아, 저렇게 살지는 말자'라고 해야죠. 제가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강의할 때마다 소개를 합니다.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상가집을 갔습니다. 그때는 요새 같이 위안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없었을 때인데요. 그게 4~5년 전인데, 상갓집에 사람이 별로 없는 거예요. 문상을 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문상객이 별로 없어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자제 분을 많이 두셨고, 다 성공하신 분들입니다. 따님이 장학사에 교감을 하시고, 손자가 박사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는 났지만, 가족 부고는 안 내서 아무도 없더라구요. 며느님이 혼자 상가를 지키고 계셨는데, 며느님이 미용사였어요, 그런데 그 분이 뭐라고 하시냐 하면 우리 어머님이 활동을 많이 하셨대요. 일본 대사관 앞에서 활동을 많이 하셨는데, 자기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니까 드는 생각이, 자기 남편은 계속 보상을 받아야된다고 하는데, 자기는 '그건 의미가 없다고 본다, 안 줄려고 하는데 거지 같이 달라고 하냐' 그런 게 하나 있구요. 또 하나는 '우리 어머님 아픔은 그게 아닌 것 같다'고 하시더라구요.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 약한 사람, 그 분 표현이 그렇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이런 사람들 있잖아요. 일하러 온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 우리 어머니의 아픔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말씀하세요. 제가 그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어요. 제가 정부에서 일을 하면서도 왜 이런 것을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말로는 인권을 주장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뭘 해야 되는지에 대한 구체성은 없었는데, 미용사 그 분이 바로 그 말씀을 하실 때 정신이 번쩍 나면서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큰 얘기만 하잖아요. 베트남에 가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을 반성하자는 이야기는 합니다. 그런데 생활 속에서 시민들이 지킬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했단 말입니다. 이 분이 그 얘기를 하면서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잖아요' 하세요. 영등포구였는데, 그런 분들이 많다는 거죠. 그런 사람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차별 안 하는 것이 우리 어머니의 아픔을 우리가 되새기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기 집에 일본의 시민단체 사람들이 많이 왔대요. 아이들이 철이 없어서 일본 사람이 오니까 좋아서 오면 꼭 '게임 시디 갖다 주세요' 하는 얘기를 했대요.(웃음) 자기는 그러는 게 너무 싫었답니다. 할머니한테 일본에서 손님들이 왜 오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게임 시디나 받으면 좋아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애들을 잘못 가르쳤네' 하는 생각이 들더래요. 자기 어머니가 커밍아웃을 했을 때, 시누이가 자살을 기도했었다고 합니다. '위안부와 위안부 피해자 가족들의 인권도 생각해주세요' 그러면서 자기는 '우리 고모를 탓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해요. 얼마나 힘들었겠나, 하면서. 사회적으로도 어려운 일인데, 당사자가 자기 엄마라는 사실을 본인이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딸이 그랬다고 손가락질을 하는데, 위안부 피해자와 그 가족의 인권을 생각하면 그러면 안 되잖아요. 시어머니와 평생 같이 살았던 며느님이 느꼈던, 그 며느님이 제시한 해법이 바로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구나 하고 느껴서 그 다음에는 제가 지하철 화장실에서 청소하시는 분들에게 인사를 해요. 그러면 그 분이 '보험 회사에서 나왔나' 하고 뜨악하게 쳐다보시는데요.(웃음) 저는 그렇게 주변에 따뜻하게 말 한 마디라도 하고, 식당에 가서 알바생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그것을 실천해야겠구나, 그 정도까지 나아가야 되는구나, 그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서울=뉴시스】최동준 기자 = 어린이청소년단체 세움이 8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 징용 노동자와 위안부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고향의 봄' 연주를 하고 있다. 2019.08.08. photocdj@newsis.com
【서울=뉴시스】최동준 기자 = 어린이청소년단체 세움이 8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 징용 노동자와 위안부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고향의 봄' 연주를 하고 있다. 2019.08.08. photocdj@newsis.com
지 – 말씀하신대로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반말 안 하고 그러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줄어들텐데요. 다른 데서 당한 것을 여기서 갚아야지, 하다보면 악순환이 되는 건데요.
정 – 요새는 더 사회가 불안한지, 우리 동네가 봉천동인데, 거기 보면 밤에 남자 어르신들이 술 드시고 때리고 싸우시는 분들이 계세요. 여유가 없으신 거예요. 나를 누가 무시하지 않나, 이런 생각도 들고 하니까, 그렇게 우리가 진짜 식민지 피해의 교훈을 그 며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실천을 했다면 정말 사회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지 – 정말 좋은 말씀을 해주셨네요. 우리가 예전에 외국인 노동자들을 추방하기 전에 가둬뒀는데, 불이 나서 죽었잖아요.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 일을 하다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엄청나게 분노했을텐데요.
정 – 저는 그때 어떤 생각을 했냐 하면요. 제가 일제시대 재일조선인 노동운동사를 전공했습니다. 오사카가 노동 운동을 가장 격렬하게 했던 지역입니다. 거기는 한인도 많이 사셨지만, 이 분들이 보통 투쟁을 하신 분들이 아니시거든요. 그래서 정말 권리를 쟁취했어요. 그 분들이 메이데이 때 일곱 시간 노동, 이런 거 플래카드 들고, 애기 엄마가 한복을 입고 애기를 업고 나가서 플래카드를 들고 나가서 집회를 하고 그랬습니다. 파업도 많이 하시고. 집달리들이 '무단 점거를 했다'고 쫓아내면, 일본 변호사들이 나타나서 막아주고 했거든요. 제가 그걸 보면서 일제 시대 때 일본에서 노동하던 사람들도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했는데, 그것보다도 이 분들은 못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얼마나 우리가 반성을 해야 될 부분이 많은가, 그런데 반성을 한다고 우리가 마이너스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반성을 하면 앞으로 나갈 수 있는데, 반성을 하면 마치 자존심이 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 것도 생각을 좀 해야 되지 않나, 싶어요.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법원 노조가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부정하는 아베 정권 규탄 법원공무원 기자회견 중 아베 사진과 일본 전범기업 사진에 압류물표시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2019.08.07. park7691@newsis.com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법원 노조가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부정하는 아베 정권 규탄 법원공무원 기자회견 중 아베 사진과 일본 전범기업 사진에 압류물표시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2019.08.07. park7691@newsis.com
지 – 말씀드린 것처럼 서로 존중하면 좋을텐데, '내가 백화점에서 얼마를 샀는데, 주차요원이 이럴 수 있나' 이러고 나면 자기도 피곤하거든요. 늘 일상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그렇게 되는 것 같기도 하구요.
정 – 저는 강의할 때도 학생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게 웃긴 것이 뭐냐 하면 북한 같은 사회주의 국가나 일본에서는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반말을 하지 않거든요. 한국에서는 학교에서 반말을 한단 말이죠. 학교 내에서 인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고, 거기서부터 시작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간 아이가 잘 모르니까 일본 애들 보면 반말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존대를 해요. 그 속에서 아이들의 인권 의식이 싹트는 거잖아요. 우리는 반말을 하니까 '이것부터 좀 바꿔야되지 않겠나' 싶어요.
지 – '국무총리 소속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회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서 11년 동안 조사과장을 하셨잖아요. 2004년에서 2015년까지, 그때 피해자 3000여명을 면담, 조사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어마어마한 숫자인데, 만나보고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정 – 제가 3000명을 만났던 것은 사할린에 갔기 때문입니다. 1995년부터 다니면서 많은 분들을 만났는데요. 사할린을 가서는 강제 노동 피해조사를 해야 되는데요. 그 전에 사할린에 갔던 정부 기관 사람들은 유즈노사할린스크에만 갔어요. 가서 '어디 모여라' 해서 교민들이 모이면 설명회를 하고 끝났습니다. 우리는 지역을 다 돌아다녔거든요. 지역을 가서 학교를 하나 빌려서 거기서 피해 조사를 하고, 그러면 그 분들을 차로 모시고 오고, 못 오시는 분들은 저희가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분들을 만날 수가 있었구요. 그 다음에 위원회 있으면서 만주나 중국의 동북지역을 가면 거기서 옛날에 피해를 당한 분들도 다 찾아다녔으니까요.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요. 저는 그 분들이 일단 노무 동원으로 가신 분들은 계층이 상당히 열악한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전시 동원 체제라 물자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은 강제 동원을 안 갔습니다. 쌀을 낼 수 있는 사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안 가고,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이 가는 겁니다. 저는 이 분들이 상당한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랬습니다. 뭐냐하면 일단 이분들이 피해 내용을 말씀하시고 나서 저희가 물어보잖아요. '당시에 누가 때렸어요' 하고 물어보면 조선 사람들이 더 많이 때렸다고 얘기하고 그래요. '그러면 그 사람 밉지 않았어요?'라고 하면 '그 사람 탓인가, 시킨 사람이 있는데' 라고 하세요. 그렇게 말씀하시기는 쉽지 않다고 봐요. '그러면 일본 사람이 밉지 않아요?' 하면 '일본 사람도 사람인데, 그 사람도 똑같이 전쟁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들 잘못인가 싶을 때가 있잖아'라고 하시기도 하구요. 또 하나는 평창에 갔는데, 95년인가 지도교수가 일본의 시민단체 사람들을 모시고 와서 이 분들을 안내해서 거기 가서 조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처음 인터뷰를 하는 거였습니다. 그때는 제가 강제동원도 잘 모르고 하니까, 박경식(일본 내에서 강제연행 및 징용 문제를 처음 공론화했던 재일 사학자) 선생님 책을 얼른 읽고 그걸 가지고 질문지를 만들어서 녹음기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 분들은 한국말도 잘 모르고 하니까. 제가 인터뷰를 하고, 그 분들 질문을 대신 받아드리고 했는데요. 그 분들이 옛날에 태평양에 군무원으로 가셔서 정말 먹을 것이 없어서 뱀이나 쥐를 잡아 먹는 것은 물론이고, 굉장히 고생하다가 온 분들이 계셨어요. 북해도 가신 분들도 계시고, 여러분들이 계셨는데요. 그 분들이 마을에다가 조그맣게 역사관 같이 민속관을 하나 만들어놨어요. 집 하나에다가 인형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결혼식 하는 모습, 공부하는 모습, 실생활의 모습들을 만들어놨는데, 이걸 자비로 하신 거예요. 그런데 운영비가 없어요. 전기세 이런 것이. 그래서 학생들이 거기에 소풍 같은 것을 오면 그때 문을 열어 주신데요. 그 앞에 마당도 있고, 굉장히 이쁘게 잘 만들어놨어요. 그런데 비용을 만들려고 이 분들이 풍물을 잡아요. 지역 유지도 아니고, 마을에서 여유 있는 분도 아니고, 그냥 농사 짓고 근근히 사시는 분들이 마을에 있는 것을 다 모아놓은 겁니다. 솥단지부터 그릇 같은 것을 다 모아서 역사관 같은 것을 만들어서 운영비용을 만들려고 풍물까지 잡으면서 저걸 하시는 게 어떤 에너지에서 나오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 분이 그러시는 거예요. '옛날에 그런 피해를 당했다고 그렇게 살 수만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학생들한테 제대로 역사를 가르쳐주고 싶은데, 집들을 허무니까, 집이 없어져요. 그래서 옛날 모습을 보여주려고 우리가 만들었어요' 라고 하세요. 잘 만들었어요. 인형 옷도 입히고. 그렇게 어려움을 겪었는데, 상당한 역사 인식도 가지고 계시구나, '우리가 옛날에 이런 역사를 겪었는데, 앞으로 우리가 뭘 해야 될지' 하는 것을 분명히 아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한테 얘기를 할 때도 '우리가 고생했으니 일본놈 다 죽여버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에 그런 시절이 있었어. 그런 시절을 다시 살면 안 되지' 이런 이런 말씀을 해주시니까요. 저런 분들은 저렇게 하시는데, 공부를 업으로 한다는 분들이 뭐 하나 적발했다고, 그야말로 한건 했다고 뭐나 되는 것처럼 하는 것이 과연 저 분들하고 정말 격이 많이 차이가 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겠더라구요.
지 – 이걸 또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피해를 입었어도 저렇게 멀쩡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왜 자꾸 피해를 입었다고 얘기를 하냐?'고 할 것 같은데요.(웃음)
정 – 안내해주신 그 분은 일주일 동안 한끼도 못 먹고, 해상에서 봉쇄되어서 물자가 공급되지 않으니까 거기서 간신히 살아돌아오신 분이었어요. 피골이 상접해서. 언제 먹을 것을 먹었냐 하면 수용소에 들어갔더니 비타민을 과자처럼 만들어서 주더래요. 그걸 먹고 살아난 건데요. 죽을 고생을 했죠. 죽을 고생을 했지만, '할아버지 거기 가라고 한 사람, 밉지 않냐'고 했더니 '당시에는 그게 그 사람 일인데 안 하면 어떻게 하겠냐, 이 조선팔도에서 살겠냐' 고 말씀하시는 여유, 그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3000명 중에 그런 분들에게 받은 감동이 정말 컸어요. 그때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부정부패를 하지만, 저렇게 저런 경험을 하신 분들이 정말 굳건하게 바닥을 지키고 계시니까 우리 사회가 지금 유지가 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지 – 국가가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과하고, 보상하는 것이 창피한 것이 아니잖아요. 발전한 사회와 국가가 해야 될 일인데요.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는데도 미리 용서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 – 그 대목에서 한가지 예를 들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제가 큰 영향을 받은 피해자 유족 회장님이 계세요. 여자 분인데, 지금은 100세가 되셔서 오늘내일 하세요. 이 분은 집안이 워낙 좋았고, 평양의 부잣집 따님이셨구요. 여기서도 경성 여학교를 나왔고, 결혼식도 이화예식장에서 했어요. 남편이 결혼하고 나서 아이가 갓난쟁이일 때 군속으로 가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 이후에 본인은 본인의 아픔만 생각했고, 집도 여유가 있고 하니까 친정에서 편하게 살았대요. 이 분은 제가 봤을 때 피해자성을 정말 올곧이 지켜가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처음에는 자기 아픔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느날 광주에서 유족을 만났는데, 너무 기가 막힌 유족을 만난 거예요. 그래서 보니까 그런 사람이 한 명, 두 명이 아니고, 여러분이 계세요. 정말 많은 분이. '나는 저 사람들에 비해서는 행복했는데, 그런 것을 몰랐구나' 하는 생각을 해서 단체를 만드셨어요. 천인소라고 천인을 이끌고 소송을 했는데요. 그게 얼마나 힘드냐 하면 소송을 하면 변호사가 계속 서류를 제출해야 합니다. 변호사 한 사람이 세명 것 밖에 못합니다. 진술서를 써야 되고, 내야 할 서류가 많습니다. 이 분이 1000명의 진술서를 일본어로 직접 다 쓰신 분입니다. 얼마나 엘리트입니까, 이 분의 피해자에 대한 헌신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자기 집을 아예 내놓고 했으니까요. 이 분은 지금은 오도가도 할 데가 없게 됐는데요. 이 분이 기가 막힌 말씀을 하셨는데요. 천인소를 위해 일본에 소송하러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요. 표현을 어떻게 하냐 하면 '내가 적국에 소송을 하러 갈 때마다 치욕감에 견딜 수가 없어서 약을 먹고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시냐 하면 '내가 나라가 없어서 내 남편을 잃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나라가 없어서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지금은 나라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가 왜 적국에 가서 우리 피해를 이야기해야 됩니까' 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때 제가 느낀 것이 '아, 정부가 해야 되는구나' 지금도 소송을 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미쓰비시에 1억을 달라고 하잖아요. 저 분들이 저렇게 하도록 한국 정부는 왜 내버려둡니까, 일본 아베하고 멱살을 잡든지, 어디 가서 무릎을 꿇든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국민들이,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서 그렇게 하지는 않도록 해야 되잖아요. 우리가 세월호 때도 봤잖아요. 왜 피해자들이 나서서 진상규명을 요구해야 됩니까? 정부가 해줘야죠. 그 분이 이금주 회장님이신데, 정말 연약한 여성이에요. 그런데 결연한 표정으로 '내 나라가 있는데, 내가 왜 적국에 가서 우리 피해를 이야기해야 되는가. 그렇게 할 때마다 치욕감 때문에 죽고 싶습니다'라고 하는데, 우리 정부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느꼈습니다. 제가 정부 일을 하면서는 공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같이 생각해야 된다고 하면서 직원들에게도 늘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회장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우리는 공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일하는 과정에서 사익이 들어갈 수 있다. 만약에 사익이 들어가면 우리는 여기서 일을 하면 안 된다. 내가 만약에 사익에 따라서 지시하면 내 지시를 받지 마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도 또한 제 윗사람이 사익에 따라 지시를 하면 지시를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인사 조치도 많이 당했습니다.(웃음) 윗분들한테 '천벌을 받을 것이다' 라는 악담도 퍼부어서 미움도 많이 받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제가 위원회를 나오면서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은 '거기를 그만두고 나와서 아쉽지 않으세요?' 하는데, 하나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말 거기 있으면서 정말 공익을 위해서 일을 하겠다고 생각했고, 우리팀들은 그렇게 했구요. 정말 좋은 직원들하고 같이 그것을 11년 동안 원도 한도 없이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고 늘 얘기하는 거죠.
(2부에서 계속됩니다)
【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정혜경 박사가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토즈에서 지승호 인터뷰 전문 작가와 '반일 종족주의' 등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9.13. dahora83@newsis.com
【서울=뉴시스】배훈식 기자 = 정혜경 박사가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토즈에서 지승호 인터뷰 전문 작가와 '반일 종족주의' 등에 대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9.13. dahora83@newsis.com
□ 지승호 작가는
1966년 부산 출생. 월간 <인물과 사상>에서 인터뷰 코너를 오래 담당했으며, 월간 <전원생활>의 인터뷰를 맡고 있다. 인터뷰 단행본 저서로 <마주치다 눈뜨다> <7인 7색> <만화, 세상을 그리다> <영화, 감독을 말하다> <감독, 열정을 말하다> <우석훈,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 <신해철의 쾌변독설> <공지영의 괜찮다, 다 괜찮다> <박원순, 희망을 심다>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 <강신주, 맨 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이석연의 페어플레이는 아직, 늦지 않았다> <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 <바이러스가 지나간 자리> <김의성, 악당 7년>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등 50여권이 있다. 인터뷰론을 정리한 책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인터뷰 특강>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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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16 August 2019 at 1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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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August 2019
태평양 전쟁시 일본 근로정신대 사진을 '항공기 제조 공장에 동원된 학도근로대의 조선인 소녀들' 로 둔갑시킨 경향신문 보도.
정혜경 저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에 수록된 사진이라고함.
허위 조작이 일상인 그들.
사진은 1954년 영화 지옥문에서 미술 의상으로 오스카상을
받은 와다산조 (和田 三造 Wada Sanzō, 1883 –1967)사진작품으로 쇼와시대 산업근로자 시리즈중 하나로
USC에 소장돼있음.
http://www.myjapanesehanga.com/…/lathe-operator-machinist-f…
굶주림·질병·성폭력 등 시달리다 죽어서야 공장문 나서기도소년들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주로 군수공장·...
NEWS.KHAN.CO.KR
[단독]“아버지 만주 보낸다” 순사 협박에 대신 따라나선 9세 소녀
굶주림·질병·성폭력 등 시달리다 죽어서야 공장문 나서기도소년들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주로 군수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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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khan.co.kr[단독]“아버지 만주 보낸다” 순사 협박에 대신 따라나선 9세 소녀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입력 : 2019.08.01
일제강점기 ‘아동 강제동원’ 사례 살펴보니
항공기 제조 공장에 동원된 학도근로대의 조선인 소녀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수록 사진
항공기 제조 공장에 동원된 학도근로대의 조선인 소녀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의 아이들> 수록 사진
굶주림·질병·성폭력 등 시달리다 죽어서야 공장문 나서기도
소년들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주로 군수공장·탄광산 끌려가
“나는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에 살았습니다. 벼를 타작하면 일본 순사들이 와서 싹 쓸어가 살기가 말도 못하게 힘들었지요. 어느 날 학교 마치고 집에 갔는데 순사하고 아버지가 마당에 서 있었어요. 아버지가 만주 보국대로 징용 간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보낼 수 없어 내가 대신 가겠다고 했습니다. 기차 타고 가는 내내 울었어요. 그때 내 나이 9살이었습니다.”
1931년생인 옥순 할머니는 서울 영등포에 있는 방적공장으로 징용됐다. 전국에서 징용된 또래 소녀들과 함께 실을 만드는 일을 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배고픔이었다.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면 식당에 가서 쓰레기통을 뒤졌습니다. 그러면 무 껍질, 수박 껍질 같은 게 나왔어요. 그걸 주워서 잘 씻어서 언니들이랑 나눠 먹었습니다. 껍질을 구하지 못하면 소금으로 배를 채우다 설사를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개나 돼지도 그렇게는 안 먹일 겁니다.”
공장에서는 매질도 있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때리고, 실을 끊어 먹는다고 때렸다. 감독들의 화풀이는 매일 어린 소녀들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매질의 고통보다 가슴 아픈 기억은 아버지와의 짧은 면회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감자를 쪄서 면회를 오셨어요. 얘기도 몇 마디 못했는데 면회 시간이 다 끝났다고 했습니다. 눈물 흘리는 아버지에게 ‘울지 마세요, 울지 마세요’ 하다가 나도 울었습니다. 아버지의 건강한 모습을 뵌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 죽음보다 더한 고통 겪은 소녀들
운이 좋아 살아남으면 다행이었다. 죽어서야 공장문을 나설 수 있었던 사례도 많다. 1933년 12월 충남 태안군에서 태어난 옥련은 1944년 8월 부산에 있는 조선방직공장에서 사망했다. 옥련의 유일한 유품은 ‘소화 20년(1945년) 6월28일 오전 4시 부산부 범일정 700번지 조선방적 기숙사 사망’이라는 사망신고서 하나였다. 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29년 전북 김제군 출신의 귀녀는 1942년 3월 광주의 가네보 방적공장에서 폐병에 걸렸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13살 소녀는 감독에게 제발 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감독은 “지금 시국에 이 정도로는 귀가 조치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귀녀는 1945년 5월13일 죽어서야 공장문을 나설 수 있었다.
폐쇄된 공장에 갇힌 아이들은 성폭력에도 무방비로 노출됐다. 1931년 충남 서천에서 태어난 연순은 11살 때인 1942년 영등포에 있는 한 방적공장으로 끌려갔다. 연순은 1944년 정신착란증에 걸려 공장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연순은 여섯살 아래 동생에게 “방적공장에서 수시로 헌병대에 불려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 군수회사·탄광에 끌려간 소년들
1943년 10월 후쿠오카현 야마다 탄광으로 동원된 여주 출신 조선 사람들이 탄광에 도착해 찍은 단체사진, 앞줄에 어린 소년들의 모습이 보인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소장 자료
1943년 10월 후쿠오카현 야마다 탄광으로 동원된 여주 출신 조선 사람들이 탄광에 도착해 찍은 단체사진, 앞줄에 어린 소년들의 모습이 보인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소장 자료
남자아이들도 징용에 끌려가긴 마찬가지였다. 주로 군수공장에 끌려갔다. 당시 한반도에는 802군데의 군수공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사망한 소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해국인 일본도 피해국인 한국도 조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두세 줄의 짧은 사망기록으로만 남겨져 있다. 병주는 1929년 9월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병주가 14살 되던 1943년 8월, 함경남도 흥남에 있는 일본질소비료(주) 소속 군수회사로 동원됐다. 병주는 7개월 만인 1944년 3월, 공장 부속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알 수 없다. 용철은 1929년 8월 충남 연기에서 태어났다. 역시 14살 되던 1943년 12월, 병주와 같은 군수회사로 동원됐다. 용철도 11개월 만인 1944년 12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소년들은 주로 광산으로 동원됐다. 대부분 1944년 말에서 1945년 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더 이상 마을에서 성인 남성을 찾기 어려우니 소년들을 데려간 것이다. 당시 일본에는 887곳의 탄광산이 있었다. 193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태순은 14살 때 일본 홋카이도 미쓰비시광업 소속 신시모카와 광산으로 끌려갔다. 징용 온 태순을 본 일본 회사 직원은 “어디서 이렇게 꼬맹이를 데려왔냐”고 할 정도였다.
국내 탄광산으로 동원된 사례는 더 많다. 짧은 사망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소년들도 많은데 이들 중 최연소자는 12살에 동원된 낙천이다. 1931년 4월 전남 함평 출신인 낙천은 1943년 1월 함경북도 회령군 이와무라 탄광에 동원됐다. 22개월 만인 1944년 12월20일 갱내에서 사고로 사망했다.
■ “체계적인 조사·연구 절실”
2004년부터 2015년까지 운영된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접수받은 피해사례 21만여건을 강제동원으로 판정했다.
하지만 이후 정부 차원에서 해당 사례들을 활용한 지식화·정보화 작업은 없었다. 관심 있는 연구자가 피해자들을 알음알음 찾아다니며 구술을 듣는 것이 후속 연구의 전부다. 이마저도 피해자들의 고령화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혜경 박사는 “정부에서 개인정보 등을 이유로 접수받은 피해 내용들을 공개하지 않는다”며 “개인정보 부분만 가리고 공개해도 징용 문제를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또 “피해사례들을 활용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됐다면 일본이 지금처럼 큰소리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학자들은 일본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인천대 이상의 교수는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구술을 수집하고 있다”며 “일본이 강제동원 과정에서 ILO 협약을 명백하게 위반한 사례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단독]남양군도로 끌려간 6세 금복은 뙤약볕 아래서 카사바를 심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010600025&code=940100&utm_source=facebook&utm_medium=social_share#csidxc5034b08435c920a509d2fcf45f660a
48李宇衍 and 47 others
Byungheon Kim to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2 September 2019 at 17:48 ·
"임금이 높고 근로 조건이 좋았으면 왜 동원된 조선인들이 현해탄을 건너기 전 40%나 탈출했겠는가."<정혜경>
현해탄을 건너기 전이라면 부산이나 통영에서 배를 타기 전에 탈출했다는 말인데, 도대체 어떤 근거로 하는 말인가?
강제 동원에서 탈출해야 할 절박한 상황이라면 밀항은 왜 있고 밀항 뿌로커는 왜 있었는가?
이건 명백한 사기다.
7월 초 출간된 책 '반일종족주의'는 일제하 강제동원은 '허구'이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성노예로 시달린 게 아니라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는 도발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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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일제하 강제동원 "1944년 이전 渡日은 자발적 선택" "현해탄 건너기 전 40% 탈출"
7월 초 출간된 책 '반일종족주의'는 일제하 강제동원은 '허구'이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성노예로 시달린 게 아니라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는 도발적 ..
①일제하 강제동원 "1944년 이전 渡日은 자발적 선택" "현해탄 건너기 전 40% 탈출"연구자 3인이 본 '반일종족주의' 3대 쟁점②일본군 위안부 피해자"軍·警이 납치했다는 주장은 거짓… 수입 괜찮고 선택의 자유있었다""고노 담화도 '강제 동원' 인정… 인플레 고려하면 형편없는 수입"③독도 영유권"조선 지도, 우산도 위치 제각각… 1905년 日 편입 때 항의도 안 해""메이지정부 '독도는 조선땅' 확인… 외교권 박탈당해 항의 못했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입력 2019.09.0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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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 출간된 책 '반일종족주의'는 일제하 강제동원은 '허구'이고 위안부 피해자들은 성노예로 시달린 게 아니라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는 도발적 주장을 편다. 최근 '반일(反日)'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이 책은 오히려 더 주목받고 있다. 8월 중순부터 연속 3주 교보문고 주간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올랐을 정도다. '반일종족주의'가 제기한 일제하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독도 영유권 등 3대 쟁점에 대해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의 도시환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장, 최운도 독도연구소장 등 전문 연구자들이 지상(紙上) 논쟁을 펼친다.
지난주 '동해 영토 수호 훈련'에 참가한 해군 군함이 독도 인근을 항해하고 있다.지난주 '동해 영토 수호 훈련'에 참가한 해군 군함이 독도 인근을 항해하고 있다. '반일종족주의'는 '조선시대에는 독도에 관한 인식이 없었다'며 독도 영유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논란을 빚고 있다.①일제하 징용 등 강제동원
―'반일종족주의'(이하 반일): 일제시대 헌병·순사가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가 임금도 주지 않고 노예처럼 부렸다는 '강제동원'은 허구다. 강제적 성격의 '징용'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8개월간 실시했을 뿐이고, 인원도 10만명 이하였다. 1939년 9월부터 '모집', 1942년 2월부터 시행한 '관(官) 알선'은 지원자의 자발적 선택이었다. 민족 차별 때문에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임금을 낮게 주고, 더 위험한 작업을 시켰다는 건 역사 왜곡이다.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 강제동원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시절, 일부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피해자 증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헌병·순사가 조선인을 강제로 끌고간 것처럼 표현한 건 잘못이다. 하지만 헌병·순사가 붙잡아가는 것만 강제동원이 아니다. 일본은 1938년 아시아·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했다. 법에 따라 이뤄졌지만 일본도 가입한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위반한 강제노동이었다. 일본 정부도 2015년 7월 군함도 등 '메이지산업혁명 유산' 23곳을 세계문화유산에 올리는 과정에서 조선인의 강제노동을 인정했다. 사토 구니(佐藤地) 주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일부 시설에 수많은 한국인이 자기 의사에 반해(against their will)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을 했다"고 밝혔다. 다음 날 일본 외무상이 강제성을 부정했으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임금이 높고 근로 조건이 좋았으면 왜 동원된 조선인들이 현해탄을 건너기 전 40%나 탈출했겠는가. 극히 일부 자료만 가지고 일반화해서 말할 수 있나.
'반일종족주의' 주요 쟁점②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반일: 헌병과 경찰이 길거리 처녀를 납치하거나 빨래터 아낙네를 연행해 위안소로 끌어갔다는 통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신매매나 취업 사기는 있었지만, 국가 권력에 의한 강제 연행은 없었다. 위안부들은 철저한 감시를 받으면서 임금도 못 받고 성노예로 일한 게 아니라, 상당한 선택의 자유가 있었고 수입도 괜찮았다.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장: 일본 정부는 1993년 8월 발표한 고노 담화에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했다. 20개월에 걸친 정부 조사로 나온 결과다.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와 관리, 위안부 이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했다. 위안부 모집은 군(軍)의 요청을 받은 민간 업자가 주도했는데, 감언, 강압 등 피해자 의사에 반해 이뤄진 경우가 많았고, 경우에 따라 관헌 등이 직접 가담했다고 밝혔다. 위안소 생활도 '강제적 상황하에서의 사역 등 참혹했다'고 인정했다. 버마(현 미얀마)에서 일한 위안부 피해자(문옥주)의 저금 기록(2만6551엔)을 근거로 수입이 높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이다. 버마의 전시 물가 인플레(1800배) 때문에 실제론 20엔 정도의 가치에 불과하고 송금도 자유롭지 않았다. 그나마 종전으로 휴지 조각이 됐다.
③독도 영유권
―반일: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조선시대 지도엔 우산도 위치가 제각각으로 그려질 만큼 독도에 대한 영토 인식이 없었다. 1905년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를 편입했을 때도 대한제국은 이렇다 할 항의도 하지 않았다.
―최운도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장: 16세기 지도를 현대 지도와 같은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다.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 우산도는 17세기 말 안용복 사건을 계기로 울릉도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우산도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동국문헌비고'(1770년) 등에는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인데, 우산은 바로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독도)"라고 기록돼 있다. 일본이 1905년 독도를 영토로 편입하자 이 사실을 파악한 울릉군수가 정부에 보고했다. 참정대신은 지령 3호를 내려 '독도 영지 운운하는 설은 전혀 그 근거가 없다'는 것과, '다시 조사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조선은 일본에 항의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1877년 메이지 정부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이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는 관계가 없는 곳이고 조선 영토"라고 확인했다.李宇衍 to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17 September 2019 at 06:20 ·
[왜냐면] ‘반일 종족주의’ 반박 기고에 대한 저자의 반론 / 이우연
n.news.naver.com[왜냐면] ‘반일 종족주의’ 반박 기고에 대한 저자의 반론 / 이우연
입력2019.09.16.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반일 종족주의> 공동저자
「편집자 주: <한겨레>는 9월2일치 신문에 <반일 종족주의> 반박 특별 기고 시리즈로,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의 글을 게재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해당 책의 공동저자인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반론글을 보내왔습니다. 관련 이슈에 대한 활발한 토론의 장을 제공하는 취지에서 이우연 연구위원의 글을 게재합니다.」
필자는 책 <반일 종족주의>에서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다”고 썼다. 전시 노무동원이 실시된 1939년 9월부터 1945년까지 일본으로 간 조선인은 72만4천여명이다. 그런데 같은 기간에 전쟁과 관계없이 순전히 돈벌이를 위해 일본으로 간 조선인이 180만여명이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본은 최고 선진국 중 하나였고, 임금은 조선의 몇배였지만, 조선에서는 일자리를 찾기조차 어려웠다. 장대한 미래를 꿈꾸는 조선 젊은이들에게 일본이 “로망”이 아니었다면 그 무엇이었겠는가?
피동원 노무자 중에서 4할이 사업장 도착 전후에 도망했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한겨레> 9월2일치 <반일 종족주의> 반박 특별기고(강제동원 아닌 취업? 조선인 ‘도망자’ 40%는 왜 나왔나)에서, 이를 두고 “로망인데 왜 탈출”을 했겠느냐고 말했다. 그에게 일본은 로망이든가 지옥이든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순화가 지나치다.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본은 로망이었지만 조선인 중에서 5할 이상이 배치되었던 탄광·광산은 기피 대상이었다. 일본에는 가고 싶지만 (탄)광부로 일하기는 싫었다. 도망자들은 조선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작업환경이 더 좋은 곳에 취업했다. “로망”과 “도망”은 공존하였다.
정혜경 연구위원이 예시한 1944년 초 경북 경산군의 “집단 항거”도 마찬가지다. 그 저항이 일본행 자체에 대한 거부라고 단정해서는 곤란하다. 도망자 중 상당한 수는 오히려 노무동원을 이용하였다. 무비용에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망한 것이다. 도주를 염두에 두고 노무동원에 응한 것이 60%였다는 조사도 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었던 격이다.
전시 노무동원은 일본을 향해 썰물처럼 밀려오는 조선인의 흐름을 노동력 부족이 극심한 탄광·광산으로 유도하려는 정책이었다. 이 속에서 “강제동원”에 해당하는 것이 1944년 9월 이후의 ‘징용’인데, 정혜경 연구위원은 필자가 “강제동원”을 부정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징용은 법률이 규정하는 그야말로 강제적인 동원 방법”임을 필자는 명기했다.
임금과 관련해서는 그가 해당 부분을 읽고 이해했는지 의심스럽다. 임금은 정상적으로 지불되었고, 그에 있어서 민족 차별은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었다. 정혜경 연구위원은 조선인의 인도금액이 일본인보다 적었다는 필자의 서술이 그와 모순된다고 비판한다. 조선인은 대부분 단신으로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일본인은 부양가족과 함께 살았다. 따라서 조선인은 임금으로부터 식대가 공제되었고, 가족이 없었기에 저축의 여력이 일본인보다 더 컸다. 그 결과 인도금액에서 차이가 발생했다. 필자는 에무카에(江迎) 탄광 운탄부(運炭夫)의 자료를 이용하여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필자는 조선인의 월수입이 일본인보다 적었지만 민족 차별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정혜경 연구위원은 그것도 모순이라고 말한다. 당시 임금은 성과급이었고, 위 운탄부의 10시간 노동에 따른 기본급에서는 민족 차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인들의 월수입이 높은 이유는 초과 근로가 조선인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근로의식의 차이도 있겠지만 조선인과 달리 일본인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조선인들의 일상에 대해 ‘주색잡기로 수입을 탕진하는 경우도 있을 만큼 그들의 생활이 자유로웠다’고 주장했다. 그에 대해 정혜경 연구위원은 “도주자를 잡아다가 린치를 가해 목숨까지 앗아”갔다고 말한다. 잠재적 피살자가 4할인 셈이다. 그런데 조선인이 린치로 인해 사망하였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어렵게 조달한 노동자를 손해를 무릅쓰고 살해했겠는가? 전시 일본이 무법과 야만의 사회였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혜경 연구위원의 비판은 상세하지 않다. “방대한 공개자료와 연구 성과를 외면하고, 편향적으로 취사선택한 자료를 근거로 한 왜곡된 주장”이라는 일방적 선고가 중심이다. 무엇을 외면하고, 방기하고, 왜곡하였는가? 독자들도 그것이 궁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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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l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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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연 박사의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습니다. 정혜경 연구위원의 반박은 근거가 없는 뇌피셜이 주를 이루었습니다.2019.09.1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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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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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다운 건전하고 활발한 토론의 장이 열리길 기대합니다.2019.09.16.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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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October 2019
"1931년 만주사변을 필두로 시작한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전쟁의 확대와 장기화에 따라 군수물자의 보급과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전면적인 국가통제와 동원을 목적으로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공포하고 국가총동원법 및 하위법령에 의해 일본본토와 식민지, 점령지를 대상으로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총동원 정책을 실시했다. 인력동원은 노무자, 군인, 군무원, 위안부(일본군위안부, 노무위안부)로 대별되는데, 일본군 위안부는 1931년부터, 기타 인력은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 동원되었다."<조선인 강제연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집필자 : 정혜경(재일조선인 강제동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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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강제연행(朝鮮人强制連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31년부터 1945년(아시아태평양전쟁기) 사이에 일본이 군수물자의 보급과 인력 공급을 위하여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한 인력수탈정책.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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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강제연행(朝鮮人强制連行)
근대사개념용어
1931년부터 1945년(아시아태평양전쟁기) 사이에 일본이 군수물자의 보급과 인력 공급을 위하여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한 인력수탈정책.
조선인 강제동원.
이칭
정의
1931년부터 1945년(아시아태평양전쟁기) 사이에 일본이 군수물자의 보급과 인력 공급을 위하여 조선인을 강제로 동원한 인력수탈정책.조선인 강제동원.
개설1931년 만주사변을 필두로 시작한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전쟁의 확대와 장기화에 따라 군수물자의 보급과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전면적인 국가통제와 동원을 목적으로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공포하고 국가총동원법 및 하위법령에 의해 일본본토와 식민지, 점령지를 대상으로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총동원 정책을 실시했다. 인력동원은 노무자, 군인, 군무원, 위안부(일본군위안부, 노무위안부)로 대별되는데, 일본군 위안부는 1931년부터, 기타 인력은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 동원되었다.
연원 및 변천1937년 7월 중일전쟁을 개시한 일본은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공포하였는데, 이 법은 5월 5일부터 한반도에도 실시되었다(칙령 제316호). 일본은 인력 동원 이전에 노동력의 양과 질, 소재에 관한 실태파악을 위해 사전에 각종 직업능력 조사제도를 실시했다. 국민징용령(1939년 7월 8일 제정, 칙령 451호)을 실시하기 위해 국민직업능력신고령을 공포(1939년 1월 7일. 한반도에는 6월 1일부터 적용)하고, 다음 단계로 노동력통제, 자금통제, 사업통제, 문화통제에 관한 각종 관련 법령을 제정 공포한 후 이를 근거로 인력을 동원했다.
내용노무동원이란 국가총동원법(1938.4 공포)에 의거해 정책적·조직적·집단적·폭력적으로 동원된 각종 산업의 노무자를 의미한다. 동원된 지역은 한반도·일본·중국 관내 및 만주·남사할린·동남아시아·태평양(남양군도)이고, 직종별로 보면, 군수공장·군공사장·토목건축현장·석탄광산·금속광산·항만운수관계·집단 농장이다. 이 가운데 직종별로는 석탄광산이, 지역은 한반도와 일본이 다수를 차지했다.
일본이 실시한 노무동원은 할당모집(1938년 5월~1945년), 국민징용(1939년 7월~ 1945년), 관알선(1942년 2월~1945년) 등 세 종류로 구분된다. 세 종류는 모두 조선인을 고용하고자 하는 고용주(일본 기업)가 신청한 인원수를 일본정부가 조정·배당하고, 조선총독부와 조정을 거쳐 확정하는 방식으로써 국가권력이 강제력을 발동하여 동원하고 수탈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할당 모집(1938년 5월~1945년 4월까지)은 조선총독부가 노무자의 모집지역과 인원을 결정해 인허하고, 해당 지역의 행정기관(군청, 경찰서, 소방서 등)이 기업 모집담당자와 함께 노무자를 송출하는 방식으로 지역과 지역별 동원인원을 할당한다는 의미에서 ‘할당모집’이라 칭한다. 수송책임을 행정기관과 해당 기업이 함께 담당한다.
국민징용(1939년 10월~1945년 4월까지)은 일본정부가 국민징용령 및 국민직업능력신고령에 의거하여 등록한 자 중에서 선정하여 징용영장을 발령·교부하여 송출하는 방식이다. 일본정부가 선정에서 수송은 물론, 식량 조달과 인력 관리 등을 직접 담당하는 체제로써 수송책임은 행정기관이 전담했다. 초기에는 기술직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운용되었으나 1944년(국민징용령 3차 개정) 이후에는 일반 노무자로 확대되었다.
관알선(1942년 2월~1945년 4월까지)은 조선총독부가 작성·결정한 ‘조선인내지이입알선요강’에 의해 실시된 동원 방식으로써 인력에 대한 관리·책임 소재는 할당모집과 국민징용의 중간 단계에 놓인 과도기적 체제이다. 조선인을 고용하고자 하는 사업자 혹은 대행단체가 신청을 하면 조선총독부가 모집지역, 인원을 허가·결정하고 조선총독부 및 지방행정기관과 경찰관헌, 조선노무협회, 직업소개소 등이 협력하여 노무자를 선정하여 송출하는 방식을 취했으므로 수송책임도 행정기관, 기업, 조선노무협회 등이 공동으로 담당했다.
한반도와 남양군도 등지와 달리 일본지역으로 노무자 송출은 1939년 7월 28일, 내무성과 후생성이 발표한 통첩 「조선인 노무자 내지(內地) 이주에 관한 건」을 계기로 실시되었으며, 세 가지 동원방식을 시행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각각 노무동원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부서를 설치했다.
중앙 조직은 조선총독부 소속 부서 가운데 노무 동원 전반에 관한 업무를 직접 전담한 부서와 그 외 관련 부서가 해당한다. 노무 동원을 포함한 총동원 계획의 수립 및 총동원 운동 업무를 담당한 부서, 노동자 단속 업무 담당 부서, 국민 연성 및 근로 교육 업무 담당 부서, 원호 관련 업무 담당 부서 등이다. 이 가운데 직접 노무 동원 송출 관련 업무를 전담한 중앙 행정기구는 1939년 2월 내무국 사회과 노무계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부서다. 중앙 행정기구는, ‘내무국 사회과 노무계(1939년 2월)→내무국 노무과(1941년 3월)→후생국 노무과(1941년 11월)→사정국 노무과(1942년 11월)→광공국 노무과(1943년 12월)→광공국 근로조정과, 광공국 근로동원과, 광공국 근로지도과, 근로동원본부(1944년 10월)→광공국 근로부 조정과, 광공국 근로부 동원과, 광공국 근로부 지도과(1945년 1월)→광공국 동원과, 광공국 근로부 근로제1과, 광공국 근로부 근로제2과(1945년 4월)’로 변천되었다.
지방 조직은 도 단위에서 지사관방, 내무부, 광공부가 담당했고, 그 이하 행정 조직인 부와 군, 도島의 노무 관련 업무는 서무과와 내무과, 그 하위의 서무계와 내무계가 각각 담당했다. 읍과 면에서는 노무계, 병사계, 권업계, 서무계, 사회계 등 지역의 사정에 따라 소속 부서가 달랐다.
병력동원은 일본정부의 법령(국가총동원법, 육군특별지원병령, 개정 병역법 등)에 의해 영장을 받고 일본군에 동원된 인력으로써 지원병과 징병으로 대별된다. 조선인을 병력으로 동원하는 문제는 민감해서 중일전쟁 발발 이전에 일본 정부와 군부는 의견 차이를 보였다. 일본 정부는 조선 청년의 징병이 불가피하다고 예상하고 황민화 교육의 강화와 교육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인데 반해 군부는 ‘조선인이 우리 등 뒤에서 총을 겨누게 하려는 것인가’ 하고 반발하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 전선이 확대되고 교착상태에 빠지자 병사가 필요했고, 식민지 청년들을 군인으로 동원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조선의 행정 체계 미비와 조선인의 권리 요구 예상 등으로 인해 대규모 인원의 징병 동원은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하고 전 단계로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기로 했다. 지원병은 육군특별지원병·해군특별지원병과 학도지원병으로 대별된다.
일본당국은 조선인을 징병제도에 포함하는 일에 주저했으나 급박한 전세로 인해 조선인 징병을 미룰 수 없었다. 따라서 각종 법령(해군징용공원규칙, 국민징용령, 육군군속선원취급요령, 군수회사징용규칙, 선원징용령, 의료관계자징용령 등)에 의한 동원과 현지 지휘관의 판단에 따른 차출 및 신분 전환의 방식이 적용되었다. 후방에서는 각종 법령에 의한 동원이 적용되었지만, 후방에서는 변수가 작용했으므로 동원 경로도 일관되지 않았다. 현재 일본정부가 공개한 자료에서는 국민징용령에 의해 동원된 피징용자와 혼용되어 있다.
군무원은 크게 군노무자와 기타 군요원(문관, 운전수, 간호부, 포로감시원)으로 구분된다. 군무원 가운데 다수는 군부(軍夫), 고원(雇員), 용인(傭人)이라 불리는 ‘군노무자’이다.
군노무자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업무종사자인 포로감시원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과 말레이 상륙을 필두로 일본군이 마닐라(1942년 1월)와 싱가포르(1942년 2월), 자바(3월), 필리핀(5월)을 점령하면서 만든 제도로, 이 시기 일본군의 포로가 된 연합국 병사 261,000여명에 대한 관리의 필요성에서 1941년 12월 육군성에 포로정보국을 설치하고 이듬해 5월부터 포로감시원을 모집했다.
포로감시원은 타이완인과 조선인을 대상으로 충당하였는데, 한반도에서는 1942년 6월에 모집했다. 조선총독부는 각 읍면에 인원수를 할당하여 면서기와 순사들을 앞세워 3,223명의 청년들을 동원해 노구치(野口)부대(부산 서면 소재)에서 2개월간 사격과 총검술 등 군사훈련을 받도록 한 후 한반도,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뉴기니아, 미얀마, 태국 등 각처 포로수용소에 배치해 말단 실무자로 사역했다. 기간은 2년 계약이었으나 기간이 만료된 이후에도 귀국은 불가능했고, 급료도 초기에 지급하다 중단했다. 이들은 패전 이후 연합군에 의해 포로에 대해 가혹행위를 한 혐의로 전범으로 기소되어 네덜란드와 싱가포르, 보르네오 등지에서 재판을 받았다. 조선청년들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지만 스스로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지 못하고 일본당국의 철저한 책임회피와 식민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재판부의 결정으로 인해 유죄가 확정된 20명이 처형되었다.
일본군위안부는 일본이 만주사변(1931.9.18)을 일으킨 이후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아래 일본군의 성병 예방이나 군기 누설 방지, 현지 여성 강간 방지 등을 목적으로 설치한 ‘위안소’에 동원되어 일본군의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의미한다.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수행하는데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일본군의 요구에 따라 위안부 제도를 운영했다. 1931년에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후부터 한반도는 물론 일본군이 배치된 모든 지역에 위안소를 운영했다. 일본군위안부 외에 탄광과 군공사장 등지에 동원한 노무위안부도 있다.
일본군위안부는 문헌과 증언에서 작부(酌婦)·특수부녀·추업부(醜業婦)·예기·창기·여급 등으로 나타나고, 위안소도 육군오락소·구락부·군인회관·조선요리옥 등의 호칭으로 불렸다. 일본은 조선 여성은 물론 중국·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버마·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 여성들까지 위안부로 동원했으며, 그 형태는 취업사기, 협박 및 폭력에 의한 동원, 인신매매 및 유괴 등의 세 가지 방법이었고, 당국이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취업사기이다.
일본군 당국은 위안소를 경영할 업자를 선정하고, 일본군과 경찰이 동원과정에 협조했다. 업자들은 모집인을 이용하거나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여성들에게 접근해 동원했다. 이 과정에서 취직이나 돈벌이를 미끼로 여성들을 끌어 모으거나 협박과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납치까지 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일어나기 전에는 도항증명서를 받아 국외 위안소로 이동했으나, 이후에는 군증명서를 발급받아 수송했다. 군증명서는 모집인이나 인솔자가 소지했으며, 일본군은 이동에 필요한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현황노무자, 군인, 군무원, 위안부로 동원된 조선인들은 당초 계약과 다른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 사역당했고, 동원 현장에서 폭격이나 사고, 질병 등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나 몇몇 개별 사례만 알려졌을 뿐, 총수를 확인할 수 없다. 일본이 패전한 후에도 일본정부가 정보를 알려주지 않거나 방치함으로써 작업현장에서 귀국 방법을 찾지 못하고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오랜 기간 항구에서 유숙하다가 다양한 방법으로 귀국했다. 귀국하는 과정에서 기상이변이나 화재사고, 폭격 등으로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강제동원 피해 현황은 명확하지 않다. 일본정부가 공개한 통계를 근거로 한국정부(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추계한 인원은 중복 인원 포함 7,827,355명이다. 이 숫자는 위안부피해자를 포함하지 않은 수치이다. 한반도 도내(道內) 동원 피해자의 경우, 관알선이나 국민징용, 국외 노무동원, 병력동원 등에 중복 동원되었으므로 실수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현재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의 총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위안부동원 인원수를 보여주는 체계적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이 일본군의 ‘병사 몇 명 당 위안부 몇 명’이라는 계획이 적힌 자료나 구술자료를 근거로 추측하는데, 최소 3만명에서 최대 40만명까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의의와 평가강제로 동원된 조선인들은 현장에서 강제노동을 강요당했으나 피해보상은 물론 당시 일본 정부가 약속한 급여조차 지급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본 패전 이후 일본정부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급여 및 수당, 예저금을 공탁해 현재까지 지급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은 1990년대부터 일본정부과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있으나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패소·기각됨으로써 개인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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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나요』(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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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청년이여 황국신민이 되어라』(정혜경,서해문집,2010)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원병제도 연구』(표영수,숭실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08)
『조선인 강제연행·강제노동1 : 일본편』(정혜경,선인출판사,2006)
『일제의 조선인노동력 수탈 연구』(김민영,한울사,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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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時下朝鮮の民衆と徵兵』(樋口雄一,總和社,2001)
『戰時下朝鮮人勞務動員基礎資料集2』(樋口雄一 편,綠陰書房,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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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經濟統計要覽』(厚生省 調査局,1949)
『조선징용문답』(宮孝一 저,上田龍男 역,每日新報社,1944)
『朝鮮事情』(朝鮮總督府,1941~1943)
『釜山往復』(北海道炭鑛汽船株式會社,1943〜1944)
「朝鮮人勞務者關係綴」(南洋廳 西部支廳 土木課,1943~1944)
「最近に於ける朝鮮の勞務事情」(近藤釰一 編,『太平洋戰下の朝鮮(5)』,友邦協會,1964)
「戰爭と朝鮮統治」(大藏省 管理局 編,『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통권 제10책 朝鮮篇 제9분책,1947)
國立公文書館아시아역사자료센터
(www.jacar.go.jp)
집필자- 집필
(2013년)
- 정혜경(재일조선인 강제동원위원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선인 강제연행(朝鮮人强制連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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