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8

박정희 경제 신화 해부 - 정책 없는 고도성장 박근호

박정희 경제 신화 해부 - 정책 없는 고도성장
박근호 지음, 김성칠 옮김 / 회화나무 / 2017년 3월

[알라딘서재]박정희가 자신이 경제발전 시켰다고 사기쳤다

 마이리뷰
댓글(0)


newone l 2017-07-19 23:37
https://blog.aladin.co.kr/768304183/9472486



박정희 경제 신화 해부 - 정책 없는 고도성장
박근호 지음, 김성칠 옮김 / 회화나무 / 2017년 3월

평점 :


이런 책이 왜 이제나 나왔을까? 박정희의 딸이 감옥에 들어가는 때가 와서야 박정희의 신화가 깨지는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다 속았었다. 경제발전이 박정희 때문인 줄 알았다.

배우 공유가 군대가기 전에 제일 존경하는 지도자가 박정희라고 햇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내가 알 수 없다. 박정희는 그저 독재자다. 독일에서 누가 히틀러를 존경한다, 추앙한다고 하는가?

박정희는 독재자가 되기 전에 악랄한 친일파였다. 다까키 마사오 라고 스스로 개명까지 하면서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약하면서 혈서까지 썼다. 그런데 친일파로 충성을 했으면 계속할 것이지, 이 또라이는 그 충성을 하루아침에 배신한다.

박정희는 다섯 번이나 이런 식의 배신을 했다. 남로당에 들어갔다가 지 혼자 살아남을려고 동료의 명단을 갔다 바치고 배신한다. 해방이 되자 이 또라이는 다시 천황을 배신하고 지 혼자 살려고
광복군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이런 놈이 쿠데타로 정권을 갈취한 뒤, 함께 만주에서 친일 장교로 있던 자들을 총리 장관 등 주요 관직에 임명하여 권력을 행사한다. 쿠데타로 정통성이 없던 박정희는 경제의 경 자도 모르는 무식한 머리로 경제발전하겠다면서 미국에 지원을 받아 다 말아먹는다.

미국이 박정권을 도운 것은 이타심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다. 미국은 그 당시 반공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일본을 경제발전 지원국으로 삼아 엄청 돈을 쏟는다. 그래서 일본이 패전국인데도 경제발전을 한다.

그런데 그 일환으로 남한도 경제발전을 시켜 일본의 방패막이로 쓰기위해 돈을 지원한 것이다.
이 돈으로 박정희가 실패하자 미국은 직접 경제관료를 보내 경제발전 프랜을 세워준다. 박정희가 지 맘대로 안 하고 미국의 프랜대로 하기로 약속하고 돈을 준다.

그래서 경제 5개년발전 계획 등을 세우고 발전을 시킨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발전이 니가 한 것이라고 국민에게 사기를 친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고 사기다. 다 속았다. 박정희가 경제를 발전시킨 줄 알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사기당했는지 알게 되었다. 박정희 신화, 아니 사기에서 벗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찜하기ThanksTo

===========
박정희 경제 신화 해부 - 정책 없는 고도성장   
박근호 (지은이),김성칠 (옮긴이)회화나무2017-03-27
원제 : 韓國經濟發展論: 高度成長の見えざる手

Sales Point : 405 
 10.0 100자평(5)리뷰(2)
420쪽

책소개

박근호 교수는 시즈오카대학교에 근무 중이던 1998년부터 1년 반 동안 미국으로 해외연수를 떠나 미국국립공문서관(NARA) 소장 국무성 문서(RG59)의 한국 관련 문서와 존슨대통령도서관 소장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및 베트남전쟁 관련 문서 등을 차근차근 검토하면서 이 책을 구상했다. 2007년 대한민국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제8395호)이 제정된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법에 근거하여 대통령기록물의 일부가 비밀문서로부터 해제됨으로써 대통령비서실 문서, 경제기획원 문서, 경제과학심의회 문서, 재무부 문서, 상공부 문서, 총무처 문서 등을 검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당시 경제정책의 배경이나 과제, 한미정책 협조의 실태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 책의 구상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의의를 가진 사건은 󰡔3억불 수출계획󰡕이라는 대통령 관련 문서의 비밀 해제였다. 
  • 이 비밀해제문서 덕분에 수출정책과 수출실적 간에 어느 정도 인과관계가 인정되는가라는 분석이 가능했고, 
  • 한국의 고도성장 및 수출지향공업화의 진전에서 이루어진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재검토할 수 있었다. 정부의 정책계획과 실적 사이에는 연관관계가 별로 없었다. 사실상 정부의 계획이라는 것은 경제성장을 선도한 것이 아니라 산업의 발전을 뒤따라 간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는 이를 두고 ‘정책 없는 고도성장’이라고 평가했다. 
  •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친 것은 한국정부가 아니라 미국의 바텔기념연구소(Battelle Memorial Institute)였다. 이 연구소의 주도로 전자산업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 볼 수 없었던 산업계획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책은 저자의 지난 20 여 년간에 걸친 연구 끝에 탄생한 것으로, 미국의 존슨대통령 기념관과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그리고 국가기록원대통령기록관과 외교사료관 등의 소장 자료와 경제통계자료를 면밀히 분석한 “고도성장의 비사”이다.
----

목차
추천의 글
한국어판 서문
저자 서문

서장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제1부 ■■ 아시아 나라들의 발전경로와 공업화

제1장 1960년대 초기의 아시아경제
제1절 1960년대 초기의 한국경제
제2절 아시아 나라들의 발전경로와 공업화
제3절 미국의 대외원조정책과 아시아 중시

제2장 전환점, 1965년
제1절 동아시아경제와 외향형 경제발전
제2절 동아시아의 수출지향공업화와 미국시장
제3절 인도의 공업화 정체와 한강의 기적

제2부 ■■ 정책 없는 고도성장

제3장 고도성장의 시대로
제1절 ‘정체’에서 ‘한강의 기적’으로
제2절 고도성장과 정부의 역할

제4장 수출정책의 과대평가 : 수출계획 FIT&GAP 분석
제1절 과감한 수출정책
제2절 제1차 3개년수출계획 Fit&Gap 분석
제3절 수출주도형 성장의 실상과 허상

제5장 전자산업과 정책 없는 발전
제1절 전자산업의 발전과 특징
제2절 정부의 산업정책

제3부 ■■ 고도성장의 보이지 않는 손

제6장 수출주도형 성장과 바이 코리아 정책
제1절 경이적인 대미수출확대
제2절 경이적인 수출성장의 요인 : 의류제품을 중심으로
제3절 미국의 바이 코리아 정책

제7장 전자산업의 진흥과 바텔기념연구소
제1절 한국의 산업진흥과 한국판 바텔기념연구소
제2절 전자산업의 진흥과 바텔기념연구소
제3절 전자산업과 미국의 직접투자

제8장 미국국가안전보장과 쇼윈도전략
제1절 베트남전쟁과 한?미관계의 변용
제2절 미국안전보장전략과 한국모델
제3절 미국의 직접적인 역할

종장 한국의 고도성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참고 문헌
도표 목록
찾아보기
옮긴이 후기
------

추천글
  • 이 책은 한강의 기적이 박정희의 뛰어나 리더십 덕분이라는 박정희 신화를 개기 위해 읽어야 하는 중요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손호철 (서강대 정치학과 교수) 
  • 일체의 선입견을 버리고 객관적인 자료들에 천착하여 박정희 시대의 경제를 분석한 이 책이 갖는 의미가 실로 크다고 생각한다. - 원혜영 (국회의원, 국회외교통상위원회 위원) 
  • 한국의 고도성장의 역사적 기원을 알고자 하는 모든 분들께 추천한다. - 박이택 (고려대 경제연구소 연구교수) 
  • 한국 경제성장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터닝포인트가 되는 책이라고 생각하여 적극 추천합니다. - 김경남 (경북대 사학과 교수) 
저자 및 역자소개
박근호 (지은이) 

1962년 목포 출생. 조선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가나가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워싱턴대학교에서 방문교수를 지냈고, 현재 일본 시즈오카대학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박사논문을 다듬어 <한국의 경제발전과 베트남전쟁>을 펴냈으며, 그 후 비교경제발전론으로 연구영역을 확장하면서 베트남전쟁이 아시아경제에 미친 영향을 분석해왔다. 주요 저서로 <박정희의 개발독재와 정책 없는 성장: 베트남전쟁의 영향을 중심으로>, <아시아경제와 미국의 개발모델전략: ‘인도모델’에서 ‘한국모델’로>, <베트남전쟁과 ‘동아시아의 기적’>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박정희 경제 신화 해부> … 총 2종 (모두보기)
----
김성칠 (옮긴이) 

1980년 전남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에 입학해서 5.18을 경험했다. 1994년 전남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전남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케네스 헤이건ㆍ이안 비커튼 지음, 『의도하지 않은 결과-미국과 전쟁 1775-2007』, 박근호 지음,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정책 없는 고도성장』이 있다.
최근작 : … 총 4종 (모두보기)
----

출판사 제공 책소개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정책 없는 고도성장󰡕은 한국의 경제발전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의 역할이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 오히려 미국의 정치적 이해에 따른 지원과 베트남전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저작이다. 이 책은 박정희 정권이 수립한 계획과 실행 실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경제성장 과정에서 박정희의 의도가 거의 관철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발전과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한국정부가 아니라 미국 바텔기념연구소였다. 바텔연구소가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설립을 주도했고, 전자산업발전계획 등을 수립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사실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바텔연구소가 한국의 개발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 배경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베트남전 수행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한 미국이 한국에 베트남전 참전의 대가로 대규모 개발차관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립을 제안했고, 그 작업의 중심이 바텔연구소였던 것이다. 저자는 기밀이 해제된 한미 양국의 외교문서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실증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3억 달러 수출계획’의 결과를 올림픽 경기에 비유한다면, “한국정부는 특기인 태권도, 레슬링, 유도, 양궁, 복싱 등의 종목에서 금메달을 기대하며 이들 종목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정책을 실시했지만, 중점적으로 육성한 종목들에서는 금메달을 따지 못하고 오히려 축구나 육상, 수영, 승마, 농구, 요트 등 ‘예상 밖’의 종목들에서 6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정부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 “금메달 5개를 목표 했는데 금메달 6개를 획득했다”고 올림픽 경기의 성과를 발표했지만, 어떤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금메달을 목표보다 많이 획득했으니까 스포츠정책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 중점육성종목에서는 메달이 나오지 못하고, 전혀 기대조차 힘든 종목에서 어떻게 많은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는지를 물어보는 게 당연지사 아닐까? 접기
-----
북플 bookple
평점 분포    10.0

전체 (5)
공감순 
     
제1부와 3부의 내용을 촘촘히 읽어볼 만했다. 1960~1970년대 한국 경제성장에 드리워진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주 유용하고 유의미하다.  구매
독서중 2018-10-09 공감 (1) 댓글 (0)
-----
마이리뷰
구매자 (1)

     
박정희 경제신화 해부 / 박근호

서장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



제1부 아시아 나라들의 발전경로와 공업화



1장 1960년대 초기의 아시아경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한 경제재건은 소비재가공부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1950년대 후반에 이미 국내시장이 포화상태가 되어 한국의 면공업도 상대적인 정체에 빠지게 된다. 이 때문에 한국정부는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주한미군에 더 많은 면제품을 납품하고자 했다. 이에 더해 한국정부는 1957년 수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수출증대에 역점을 둔 각종 지원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원조가 1957년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돌아서자, 소비재공업부문만이 아니라 재정과 무역수지 적자의 보전까지도 미국에 전면적으로 의존해온 한국경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이는 곧 경제성장의 둔화로 나타났다. 1957년에는 전년의 성장률이 1.3%로 낮았던 까닭에 8.8%라는 성장률을 달성했지만, 그 이후로는 정체가 지속되어 58년 5.5%, 59년 4.4%, 60년에는 2.3%까지 성장률이 하락했다. 1958년 이후에는 소비재산업의 정체와 농업부문의 부진이 겹치면서 한국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빠져들었다."(39)



# 한국경제의 초기조건 : 아시아 국가들과의 비교(1964년)

1. 눈에 띄게 낮은 소득수준 : 국민소득 85달러로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의 절반에도 못 미침

2. 산업별 국민소득에서 농업부문의 비율이 높고 제조업부문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를 점유

3. 노동분배율 수준이 상당히 낮았을 뿐 아니라 하향하는 경향을 나타냄 : 한국 28.4%, 대만 44.9%, 필리핀 41.6%

4. 소비성향(소득에 대한 소비지출의 비율)이 현저히 높고 저축성향은 낮음 : 평균소비성향 98.2%, 평균저축성향 1.9%

5. 엥겔지수가 상대적으로 높아 잠재적 공업제품시장의 확대 가능성 축소와 내수부진 초래 : 한국의 엥겔지수 67%

6. 외국원조 축소로 기계설비의 수입재원 확보가 난관에 봉착 : 한국 11%, 태국 20.4%, 말레이시아 17.6% (이상 고정자본투자율)

7. 수출규모가 현저히 작음 : 한국 1억 2000만 달러, 필리핀 7억 7000만 달러, 스리랑카 3억 9000만 달러 (이상 수출총액)



"1955년 봄에 개최된 반둥회의가 국제사회의 정치·경제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반둥회의는 미국과 소련의 대외정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쳐 자본주의사회와 사회주의사회가 군사적 경쟁이 아닌 경제적 경쟁을 통해 체제의 우월성을 다투는 시대로 이끌었다. 반둥회의를 계기로 발전도상국들이 정치적으로 부상하게 된 반면, 경제민족주의(Economic Nationalism)도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세계경제는 불황에 빠져 있었고, 많은 발전도상국들이 심각한 경제부진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황은 발전도상국들의 주요 수출품이던 1차 산업제품의 가격하락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시작되었고, 선진공업국과 발전도상국 간의 경제적 격차가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른바 '남북문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이유로 반둥회의에서는 발전도상국의 '경제개발'이 긴급한 과제로 강조되었고, 국제경제협력을 호소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졌다."(67-8)



"이 같은 국제사회의 정치경제적 환경 속에서 미국 역시 발전도상국의 '경제개발'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원조정책을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57년 5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 의회에 보낸 대외원조특별교서에서 새로운 대외원조정책을 제안했다. 미국의 새로운 원조정책의 기조는 첫째, 기존 1년 단위의 무상원조방식을 장기 유상원조방식으로 바꾸어 증여를 차관형식으로 전환한다. 둘째, 이전의 프로젝트 원조방식 대신 국가개발계획을 지원하는 방식을 도입하고, 피원조국의 발전능력과 자조노력 정도를 중시한다. 셋째, 경제원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우선순위 방식으로 원조를 배분하고 대규모 원조를 통해 피원조국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한다. 한마디로 '선택과 집중'이라고 부를 만한 방침을 세운 것이다." "전환된 미국 원조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발전도상국의 경제개발과 더불어 지리적으로 아시아 지역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71-2)



"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 흐름은 동아시아와 남아시아로 구분해서 살펴보아야 하는데, 특히 남아시아에 대한 원조증가를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에 대한 원조 누계액은 변경 전 44억 달러에서 변경 후 58억 달러로 증가했지만, 남아시아는 11억 달러에서 67억 달러로 6배 이상 증가하여 누계액에서 남아시아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7%에서 30%로 급증했다. 동아시아의 비중이 27%에서 26%로 약간 감소한 것과는 대조적이다."(73-4) "또 한 가지 고찰해야 할 것은 미국의 원조정책이 인도 중심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에 대한 원조감소는 단순한 양적 문제가 아니라 미국 대외정책에서의 '지위변화'라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원조공여의 기준으로 볼 때, 이 문제는 인도의 개발능력이나 자조노력이 우수하다고 평가된 반면, 한국은 '우수하지 못하다'고 여겨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76)



# 밀리컨·로스토 제안

1.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분리하고 경제원조 실행기관을 신설한다.

2. 정책의 연속성을 도모하기 위해 장기원조를 공여한다.

3. 경제원조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피원조국의 흡수능력을 중시한다.



"미국의 전환된 원조정책은 한국정부의 경제정책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국가개발계획을 중시하는 미국의 방침에 따라 한국정부 또한 장기적인 개발계획을 수립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승만 정권은 1959년 4월 자립경제 기반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개발 3개년계획(60~62년)'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미국정부의 권고에 따라 구상된 것이었다. 계획의 담당자였던 이기홍(당시 부흥부기획국 기획과장)은 "미국의 원조가 급감할 것으로 예상되는 1957년 중반부터 AID 관리가 한국정부 정책담당자(김현철 부흥부장관)에게 장기경제개발계획안을 작성해 제출하도록 강력하게 권고"했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62년부터 이를 실행했다. 이는 미국정부에게 쿠데타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특히 지원과 원조를 확보하기 위한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급조된 것이었다.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경제개발계획이 아니라 '쇼핑목록'에 불과하다는 평가였다."(81)



2장 전환점, 1965년



"베트남전쟁이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베트남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동아시아 지역이 경제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확대되었다. 미국의 대아시아 경제원조 동향을 살펴보면, 60년대 후반 들어 남아시아의 비중은 현저하게 감소한 반면, 동아시아 지역의 비중은 확대되고 있다." "베트남전쟁이 확산되면서 아시아로의 편중 경향은 군사원조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 미국의 대아시아 군사원조액을 살펴보면, 동아시아에 대한 군사원조 누계액은 60년대 전반(1961~65년) 약 39억 달러에서 후반(1966~70년)에는 107억 달러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사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전반기 49%에서 후반기에는 거의 82%까지 확대되었다. 동아시아 나라들은 이러한 대규모 군사원조를 통해 군사비 부담을 줄이고, 재정상황을 개선할 수 있게 되어 이를 경제개발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90-2)



"아시아를 둘러싼 국제경제환경이 동아시아 지역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되면서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이 촉진될 수 있었던 반면, 남아시아 지역에는 불리해져 경제발전의 족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지역은 60년대 전반에 이미 연평균 6.6%의 성장을 달성하며 남아시아 지역의 성장률 3.9%를 넘어섰다. 60년대 후반 들어 동아시아 지역은 성장률이 9.8%까지 증가해 성장 속도가 빨라진 반면, 남아시아 지역은 2.2%로 감소했다." "베트남전쟁의 효과였던 경제원조의 확대를 통해 동아시아 나라들은 수입대체공업화에서 수출지향공업화로 전환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나라들에게 베트남전쟁은 자립적 경제발전에서 외향적 경제발전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남아시아 나라들에게는 대외의존형 경제발전 경로에서 '내향적' 전략으로 방향이 전환되는 발판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96-7)



제2부 정책 없는 고도성장



3장 고도성장의 시대로



"1960년대 전반기(61~65년)와 후반기의 연평균성장률을 비교해보면, 전반기가 6.2%였던 데 반해, 후반기는 11.1%로 높은 성장률을 나타내고 있다. 60년대 초까지 한국경제는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고, 그래서 60년대 후반의 고도성장은 '한강의 기적'이라 부를 만큼 놀라운 변화였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산업구조의 변화이다. 60년대 후반 고도성장을 주도했던 것은 2차 산업과 3차 산업의 발전이다. 산업별 평균성장률을 보면, 60년대 후반 1차 산업의 평균성장률이 3.3%였던 데 반해, 2차 산업은 20.0%, 3차 산업은 13.1%였다. 제조업 역시 21.3%라는 높은 성장률을 나타냈다. 이러한 실적 차이는 각각의 산업부문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에도 영향을 미쳐 산업구조의 변화를 초래했다." "한국의 산업구조가 이렇게 급속하게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은 제조업의 비약적인 성장 덕분이었고, 이러한 변화는 65년 이후에 뚜렷하게 나타났다."(123-5)



"60년대 초 한국의 원자재 수입은 미국으로부터의 무상원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일의존도가 28%에 불과했지만, 65년 이후 급속도로 증가해 70년대 초에는 58%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수출용 원자재는 절반가량을 대일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한국의 공업화는 일본으로부터의 우수한 기계도입과 고품질의 수출용 원자재 및 중간재 수입 등을 통해 촉진되었고, 그 결과 생산과 수출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생산재 수입을 통해 고정자본을 형성하고 공업화를 촉진시켜 공업제품을 해외시장에 수출한 뒤 이렇게 획득한 외화로 다시 생산재의 수입을 늘린다는 순환메커니즘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에서 수입한 원자재와 중간재, 자본재를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조립가공한 후 완제품을 미국시장에 수출하는 이른바 '성장의 트라이앵글'이다. '성장의 트라이앵글'은 수출지향형 공업화의 발전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127-8)



4장 수출정책의 과대평가 : 수출계획 FIT&GAP 분석



"1964년 5월, 정부는 환율을 달러당 127.5원에서 256.53원으로 인하하고 65년 3월, 환율제를 고정환율에서 변동환율제로 전환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외국환에 대한 여러 가지 개혁조치들이 한국정부의 의도가 아니라 미국정부와 IMF의 유인책에 의해 실시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IMF는 외환정책의 개혁을 담보로 한국에 차관을 공여했다. 1964년 5월 단행된 대폭적인 환율인하 역시 미국에 의해 유도된 바가 컸다. 사실 수출지향형 공업화에서 환율현실화정책이 실시되는 것은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는 "미국이 한국에 원화의 평가절하와 통화긴축을 충고했고 한국정부는 이 충고를 받아들여 실행에 옮겼다. 5월 3일 실행된 원화가치 재평가는 금년도 미국이 지원하기로 한 총 7500만 달러 중 1000만 달러의 원조금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는 미국이 환율현실화정책에 개입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146-7)



# 변동환율제 도입(1965.4)은 IMF 차관과 연계



"제1차 3개년수출계획은 수출확대를 통한 외화사정 개선이라는 정책의 실현을 목표로, 1965년에서 67년까지 본격적으로 실시된 장기수출계획이다. 그것은 국제수지 위기에 직면해 있던 한국정부로서는 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 또 수출산업을 발전시키고, 외화획득의 증대를 도모해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은 자립경제를 확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수단이기도 했다." "제1차 3개년수출계획의 입안은 대폭 지연되어 그 시안이 수립된 것은 1964년 12월 30일에 이르러서였다. 1965년 2월 16일에 수정안이 제출되었지만, 재수정을 거듭해 최종계획안은 1965년 3월 16일에야 확정되었다. 1965년부터 바로 시행하려고 했지만 시기를 맞추지 못한 것이다. 제1차 3개년수출계획이 경제장관회의에서 의결된 것은 1965년 7월 20일이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한국의 수출정책을 평가할 때 긍정적으로 지적되곤 하는 과감성과 거리가 멀다."(151-2)



5장 전자산업과 정책 없는 발전



"무역수지 악화라는 딜레마를 극복하고, 기간산업을 육성하며, 자립경제를 확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수단은 외화획득을 증대시켜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제2차 개발계획은 공업화를 위한 자본재 수입을 확대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필요한 재원을 스스로 조달하기 위해서라도 대폭적인 수출증가가 필요했다. 한국정부는 외화획득 증대라는 지침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1967년부터 71년까지 실시될 '제2차 5개년수출계획'을 급작스럽게 단행했다. 제2차 5개년수출계획은 제1차 3개년수출계획(1965~67년)의 마지막 해였던 1967년에 시작되었는데,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실시와 보조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제2차 수출계획이 경공업제품의 수출에 기반을 두고 있어 수출품목 역시 생사류나 직물류 같은 섬유제품이 중심이었고, 텔레비전이나 트랜지스터, 집적회로(IC) 같은 전자제품의 수출계획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227-9)



"라디오와 전기기기의 목표액은 1971년 1392만 달러로 1965년의 실적 190만 달러에 비해 7.3배 크게 증가되었다. 수출총액에 대한 비중도 1965년 1.1%에서 71년에는 2.5%로 커졌다. 한국정부는 라디오와 전자기기의 수출확대에도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품구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수출증가율을 보면, 다른 수출특화상품들보다 우선순위가 높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출규모를 보면, 라디오와 전기기기의 목표액은 면직물(4900만 달러)의 약 4분의 1, 생사(4485만 달러)의 3분의 1, 도자기(2800만 달러)의 2분의 1에 지나지 않았고, 수출규모는 통조림(어패류와 양송이) 1486만 달러나 고무제품 1450만 달러, 공예품 1270만 달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었다. 라디오와 전기기기가 통조림이나 고무제품, 공예품 등처럼 대규모 자본투자나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가공도가 낮은 잡화공업부문과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30-1)



"한국의 전자산업은 60년대 후반부터 비약적으로 발전해나갔지만, 이 시기에 전자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육성계획이 명확하게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제2차 개발계획은 자립경제와 중공업의 기반확립을 기본목표로 삼았을 뿐, 전자산업에 대한 명확한 육성계획 등은 제출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제2차 개발계획에 전자산업 육성계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에 전자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전자산업의 발전 과정을 되짚어보면, 전자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부터였는데, 전자공업진흥법은 1969년 1월에 가서야 제정되었고, 이를 기초로 '전자공업진흥 8개년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각종 지원제도와 같은 구체적인 실시방안들이 제출되는 등 본격적인 육성·지원이 시작된 것은 그 이후였다. 이는 한국의 전자산업이 (정부 주도의) 본격적인 지원정책이 실시되기도 전에 이미 성장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232)



제3부 고도성장의 보이지 않는 손



6장 수출주도형 성장과 바이 코리아 정책



"1960년대는 미국정부의 통상정책이 보호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던 시대였다. 한국 상품이 미국시장에서 지위를 높여가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는 기이해 보인다. 미국의 국제수지가 1958년부터 만성적인 적자상태에 빠지면서 이른바 달러위기가 초래되자, 미국정부는 다방면에 걸쳐 국제수지개선책 혹은 달러방위책을 강구했지만 근본적인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아 해마다 대폭적인 적자가 지속되고 있었다. 1960년 11월, 미국정부는 해외달러지출을 절감하기 위해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정책을 내놓았고, 63년 7월에는 대외군사지출·대외원조를 줄이거나 이자평형세(interest equalization tax)를 시행했으며, 65년 2월에는 금융계와 산업계에 해외투자·융자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정부가 한국에 대해서만큼은 바이 아메리칸 정책을 완화해 적용하고, 심지어 우대정책을 실시하기까지 했다는 사실이다."(256-7)



"(이른바 '바이 코리아(Buy Korea) 정책'으로 전환한) 미국정부는 1965년 5월 열린 박정희-존슨 정상회담을 시작으로 한국과의 무역을 우대하는 정책을 강화해나갔다. 박정희-존슨 공동성명에서 미국은 한국의 수출 진흥을 지원할 것임을 밝혔는데, 기본적인 결정사항과 관련된 비밀조약이 양국 간에 체결되었다는 사실이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박정희-존슨 정상회담의 한·미공동선언문에 명시된 한국의 안보 및 경제발전과 관련해 별도의 '각서'가 체결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각서에는 북한이 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루었고, 군사력을 강화해나가고 있는 한반도 정세와 전망을 고려할 때 한국이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명기되어 있다. 한국의 안보라는 측면에서도 한국의 경제적 도약과 군사력 강화는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미국이 지속적으로 협력한다는 내용이었다."(258)



# 한미 합의 사항

1. (비공개)

2.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미국의 지원

3. 한국의 수출확대를 위한 미국의 지원

4. 한·미상호군사협정 강화

5. 한국인 이민자의 농장노동자 수용

6. 한국의 아프리카 기술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의 재정적 지원



7장 전자산업의 진흥과 바텔기념연구소



"미국인 직접투자는 발전단계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의 자본과 기술이 없었다면, 한국의 전자산업은 비약적인 성장을 달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기술혁신에 나섰고, 민간기술의 낙후성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새로운 설비와 선진기술을 도입했다. 그 배후에는 정부주도의 활발한 연구개발 활동이 있었고, 그로 인해 산업계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기술의 수준이 높아질 수 있었다. 한국의 전자산업은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도입한 기술을 이용하여 텔레비전을 조립생산하면서 출발했지만, 같은 시기에 이미 트랜지스터나 다이오드, 집적회로(IC)와 같은 반도체의 연구개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텔레비전 같은 기초산업을 육성함과 동시에 당시 최첨단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반도체 연구개발에도 나서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른 발전도상국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274-5)



"1966년 6월 한·미협정을 근거로 한국과학기술원(KIST)과 바텔기념연구소 간에 자매결연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사실도 지적해두어야 한다. 이 협정에 의해 바텔기념연구소에 다음과 같은 지원업무가 부여되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① KIST의 창설 업무와 건설계획에 대한 지원, ② 상임연구원 모집과 기술훈련에 대한 지원, ③ 연구시설 및 기기 선정에 관한 협력, ④ 기술정보 제공, ⑤ 연구 및 조사프로젝트를 위한 전문가 파견 등이었다. 바텔기념연구소 소장이 KIST 이사회 구성원으로 참가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이는 KIST가 바텔기념연구소에 축적된 연구개발 역량과 노하우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지원해 줄 최고의 스폰서를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한국정부는 KIST의 연구활동이 한국의 산업계에서 신뢰를 구축할 수 있을 때까지 바텔기념연구소의 지원 임무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미국외교문서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281)



"특징적인 사실은 1967년 3월 8일에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 심의, 검토된 '전자공업육성방안'이 한국정부에 의해 독자적으로 작성, 입안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 방안은 실제로 (바텔의 주도로 16개 산업기술부문을 점검한) 산업실태조사보고서와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일치하고 있어서 사실상 바텔기념연구소가 정책을 수립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 시기 산업정책은 관료적 통제의 색채가 확실히 강했지만, 정부 내에 전자분야의 정책과 관련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부서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산업에 관한 정책 수립이나 검토·조정 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전자산업은 당시 최첨단 산업의 하나였고, 한국에는 전자분야를 전공한 대학교수나 과학기술자 그리고 최신기술정보 등의 자원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한국이 전자산업의 육성을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307-8)



8장 미국국가안전보장과 쇼윈도전략



#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요인

1. 유인 요인(pull factor) : 자유세계지원군(FWMAF) 병력 모집이 각국의 소극적인 자세로 난관에 부딪히고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한국군 파병 규모 확대

2. 추진 요인(push factor) : '베트남 특수'와 '파병에 대한 보상'으로 받아낼 수 있는 경제적 원조

※ 기대 효과 : 경제성장, 한·미관계 강화(방치에서 밀월관계로 급반전), 군 전투력 향상 등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그리고 미국정부 고위관계자들과의 회담결과, 한·미 두 나라는 단순한 우호를 넘어 전략적 파트너 관계로 급속하게 발전했다." "방미 당시 대통령비서실이 대미교섭을 위해 작성한 「한·미 양국의 현실적 입장과 박 대통령의 방미목표」에는 군사쿠데타정권의 정당화, 한·미관계의 강화 그리고 '한국의 쇼윈도화' 등이 열거되어 있다. ① 현 정권과 한국국민에 대한 미국정부의 절대적인 신임과 지지를 확보한다, ② 극동에서 한국을 민주주의의 '쇼윈도'로 만든다는 미국정부의 확약을 받아내고, 그에 대한 실질적인 지지를 획득한다, ③ 한·미 간 여러 현안들을 고차적으로 해결한다, 혹은 조기해결을 위한 미국 대통령의 약속을 받아낸다는 등의 내용이다. 여기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을 '쇼윈도'로 만든다는 구상이 외교정책의 주요한 버팀목 가운데 하나로 자리하고 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지원과 미국정부의 확약을 모색했다는 것이다."(338-9)



"여기에서 강조해두어야 할 것은 미국정부가 한국의 '개발독재체제' 강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이다. 그 배경으로는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를 유지해야만 했다. 미국의 '더 많은 깃발' 캠페인이 파탄을 맞이한 가운데 유일하게 박정희 정권만이 베트남파병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둘째, '한국모델'은 공업화를 경제개발의 중심으로 두고 설계되었는데, 그 개발체제의 필수적인 담당자를 군사정권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계획수행 능력을 갖춘 안정된 정권이야말로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으로 이끌어 '한국모델'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측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따라서 미국정부가 '한국모델'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군사정권을 안정화시키고 나아가 장기화시키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로스트노선'이었다."(346-7)



종장 한국의 고도성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접기
nana35 2019-12-23 공감(4) 댓글(0)
-----
     
박정희가 자신이 경제발전 시켰다고 사기쳤다

이런 책이 왜 이제나 나왔을까?

박정희의 딸이 감옥에 들어가는 때가 와서야 박정희의 신화가 깨지는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다 속았었다. 경제발전이 박정희 때문인 줄 알았다.

 

배우 공유가 군대가기 전에 제일 존경하는 지도자가 박정희라고 햇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내가 알 수

없다. 박정희는 그저 독재자다. 독일에서 누가 히틀러를 존경한다, 추앙한다고 하는가?

박정희는 독재자가 되기 전에 악랄한 친일파였다. 다까키 마사오 라고 스스로 개명까지 하면서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약하면서 혈서까지 썼다. 그런데 친일파로 충성을 했으면 계속할 것이지,

이 또라이는 그 충성을 하루아침에 배신한다.

 

박정희는 다섯 번이나 이런 식의 배신을 했다. 남로당에 들어갔다가 지 혼자 살아남을려고 동료의

명단을 갔다 바치고 배신한다. 해방이 되자 이 또라이는 다시 천황을 배신하고 지 혼자 살려고

광복군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이런 놈이 쿠데타로 정권을 갈취한 뒤, 함께 만주에서 친일 장교로 있던 자들을 총리 장관 등 주요

관직에 임명하여 권력을 행사한다. 쿠데타로 정통성이 없던 박정희는 경제의 경 자도 모르는 무식한

머리로 경제발전하겠다면서 미국에 지원을 받아 다 말아먹는다.

 

미국이 박정권을 도운 것은 이타심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다. 미국은 그 당시 반공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일본을 경제발전 지원국으로 삼아 엄청 돈을 쏟는다. 그래서 일본이 패전국인데도 경제발전을 한다.

그런데 그 일환으로 남한도 경제발전을 시켜 일본의 방패막이로 쓰기위해 돈을 지원한 것이다.

이 돈으로 박정희가 실패하자 미국은 직접 경제관료를 보내 경제발전 프랜을 세워준다. 박정희가

지 맘대로 안 하고 미국의 프랜대로 하기로 약속하고 돈을 준다.

 

그래서 경제 5개년발전 계획 등을 세우고 발전을 시킨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발전이 니가 한 것이라고

국민에게 사기를 친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고 사기다. 다 속았다. 박정희가 경제를 발전시킨 줄

알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사기당했는지 알게 되었다. 박정희 신화, 아니 사기에서 벗어야 한다.

 

- 접기
newone 2017-07-19 공감(4) 댓글(0)
Thanks to
 
공감
마이페이퍼
전체 (1)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