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jin P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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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줌으로 나누기] 후머니즘 - 반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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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큰 누나 옥경님이 나에게 유럽으로 보내진 북조선 고아들에 대한 다큐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을 보았냐고 물었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알고는 있었으나, 올해 나온 영화이고 돈을 내어야 볼 수 있으니 관심은 있어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옥경님은 나에게 이 영화를 꼭 보라는 것이었다. 영화에 대한 나의 반응을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나의 반응이 궁금할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 옥경님은 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감독의 모금운동에 호응하여 미불 100불을 기부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가 남한은 전쟁고아들을 해외에 (옥경님의 표현으로는) "팔았는데", 북조선은 동구국가들에서 위탁교육시켰다는 데 북조선의 조치를 높히 평가한다는 것이었다. 감독 김영덕은 옥경님의 기부에 보답하여 영화를 온라인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의 전개가 흥미롭다.
- 옥경님은 영화를 보고 아주 긍적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김영덕 감독과 페친이 되었고, 그 후로김영덕 감독의 페북의 글들을 읽어왔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페북에 나오는 글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댓글 대화가 북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또 그 영화가 의미하는 것이 북조선 비판이었다는 식으로 페북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옥경님은 북조선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말하는 사람에게 영화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보았다고 답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같은 영화를 보고 그렇게 다르게 해석을 할 수가 있는가고 옥경님은 물었다. 그리고 김감독에게도 그 영화가 의도 한 것이 무었이었나고 물었다. 김감독의 답은 비판적이었던 것은 의도한 것이었다는 답이었다. 옥경님에게는 이 답이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같은 영화를 두고 보는 눈이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고. 옥경님은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김 감독은 옥경님의 반응이 기분 나빴던지, 더 보여줄 수는 없다고 했다.
- 이러한 사유로 옥경님이 나에게 그 영화를 보고 어떻게 ㅅㅇ각하는가를 알려달라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온라인 관람료가 만만치 않았다. 한화로 12,000원. 나에게는 영화가 보고 싶어도, 그런 돈을 내고 이 영화를 볼 의사는 없었었다. 그런데 어제 그 영화를 돈내고 볼 마음이 갑자기 생겼다. 그 이유가 또한 재미있다.
- 얼마전부터 줌이용의 붐물결을 타고 여러나라에 퍼저있는 우리 자매들간에도 정기적인 줌미팅을 하자는 아이디어가 생겼다. 한국 영암에 반아님, 호주 애들레이드의 나, 카나다 몬트리얼의 옥경님. 켈리포니아이 살던 반아님이 영암으로 와 있다. 서울에 동생 유진님이 있는데, 생활이 바빠 우선은 우리들 셋 끼리만 줌모임을 하고, 언제인가 유진님이 시간이 있을 대 초청하기로 했다. 몬트리얼과 한국은 시차가 13시간으로 서로가 맞는 시간의 선택이 까다로왔다. 그러나 한국과 호주의 화요일 오전, 몬트리얼의 밤으로 시간이 결정되어, 어제가 두번째 줌모임이었다. 매주 무슨 이야기를 할까, 토픽을 결정해야 하는데, 나에게 갑자기 생각난 것이 <김일성의 아이들>을 줌으로 같이보고 토론을 갖는 것이었다. 1,2000원도 3인이 같이 본다면 돈이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도 나중에 보아서 4명이 보는 샘이 되는 것이다. 온라인 관람료를 내면 이틀간 볼수가 있는데, 내 생각에 줌미팅에서 스크린 쉐어링을 하면 여러 나라에서 같이 볼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옥경님은 대단히 좋은 아이디어라고 방가와했다.
- 어제 영화를 보았다. 나나 반아님의 평은 대단히 좋은 다큐영화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의 기본 정신은 휴머니즘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감독의 휴머니즘이고 북조선 정부의 휴머니즘이었다. 그런데 왜 옥경님과 감독 사이에 충돌이 있었나? 북조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옥경님이 페북에서 알게된 김영덕 감독은 상당히 반북조선이란 것을 알고 놀라게 되었던 것이다. 옥경님은 김영덕 감독의 의도를 알게 되자 기부를 한 것 자체도 후회를 하는 듯했다.
- 나도 김영덕 감독의 페북을 찾아가 여러 글을 읽어보았다. 그는 북조선에 비판적이었다. 그렇다면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영화에 대하여는 왜 휴머니즘적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북조선에 비판적인 감독의 시각은 영화에 어디에 들어있는 것일까? 그걸 염두에 두고 영화를 생각하면 여러가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북조선 정부의 반휴머니즘적 조치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간단히 보아 세가지를 말할 수 있다.
1] 첫번째는 동유럽에 까지 보내젔지만 거기서도 아이들에게 북한식 사상교육이 철저했다는 것이다. 50년대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김일성 우상화 교육이 동유럽의 전쟁고아들에게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면은 북조선의 정치철학이 그러니 어쩌겠는가 함 보아줄 수가 있겠다. 그러나 다른 두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2] 한가지는 고아들을 교육시키려고 북조선으로 부터 불가리아에 파견된 남자 선생이 젊은 불가리아의 여선생과 사랑에 빠저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학생들과 함께 북조선으로 돌아가야만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외국인과의 결혼이 금지되어, 이런 경후 이혼을 해야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부부는 같이 북조선으로 가게 된다. 평야에서 딸이 태어난다. 그리고 남편은 어디론가 파견이 되어 부인은 딸과 혼자 평야에 살게 된다. 50년대 말, 60년대 초, 이 당시에는 주체 사상이 정착(?)하는 단계여서 우호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온 외국인에게도 배척의식이 강했다고 한다. 말도 잘하지 못하며 평양에서 딸을 키워야 하는 부인은 불가리아로 돌아가기로 한다. 돌아와서는 계속 남편과 연락을 하려고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는다. 수 없이 쓴 편지는 그냥 돌아오다. 불가리아의 북조선 대사관은 거짓말 같은 대답만 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60년이 지났다. 이 부인은 아직도 남편을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반휴머니즘의 례라고 할 수 밖에 없다.
3] 또 한가지는 동유럽에서 7년인가를 보내다가 갑자기 북조선을 돌아가게 된, 이제 십대가 된 고아들의 이야기이다. 북조선은 처음에는 이 고아들이 북조선에 유용한 인재들이 되어 북조선에 돌아와 국가 건설에 기여하기를 바랬을텐데, 그들을 갑자기 불어들일때에는 생각이 바뀌었던 것이다. 이 동유럽에서 자란 이 고아들은 북조선에 돌아오면 유용한 인제로 쓰이기 보다, 반체제 그룹으로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을 뿔뿔이 흐터지게 말들었다. 당시에는 북조선에 기차를 타고 돌아왔는데, 돌아오는 도중에 아이들을 흩어서 여러 역에서 계속 내리도록 하였다는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데, 그 결과는 그들의 행방은 알려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나 자신도 더 알아보아야 하겠으나, 이 영화에서는 북조선 정부의 이런 조치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 결론으로 말하자면 옥경님의 눈에는 영화를 볼 때 이 영화의 그 반휴머니즘 적인 면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를 나중에 본 아내의 커멘트가 "김일성이 죄를 많이 지었네" 한마디였다. 영화의 휴머니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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