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31

[16] 서양인의 눈에 비친 . . .-제임스 게일의 '조선의 마음' (KoreanIdentity)

[16] 서양인의 눈에 비친 . . .-제임스 게일의 '조선의 마음' (KoreanIdentity)

서양인들이 본 개화기 조선과 조선인들
James Gale:Korean Sketches(현암사 간행)에서

이달에는 제임스 게일의 코리언 스케치(Korean Sketches, 현암사 간행)에 실린 '조선의 마음'이란 글을 소개합니다. 낯 설은 이국땅에 와서 모든 것이 낯설은 가운데서도 가장 낯설었던 사람들의 속마음. 말과 행동이 다른 조선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지만 그것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숨겨진 저류임을 깨닫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게일 목사(1868-1937, 한국명 기일奇一)는 미국의 선교사요 신학박사로 한국어 학자이기도 합니다. 1889년에 처음 한국에 와서 당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신생활 면에서 역사상 가장 참담한 시련을 겪고있던 이조말기의 현황을 직접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대로 스케치 한 것이 입니다.
변환기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풍습 등에 관한 관심과 연민을 가지고 이 책을 썼으며 후에 <한영사전>을 비롯해서 한국문화에 관한 많은 저서들을 출판하였습니다.

조선의 마음-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숨겨진 저류(底流)

정반대의 세계

극동에서 무슨 일을 하건 간에 당연히 부닥치게 되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동양의 마음이다. 그들에게 접근해서 애정과 존경을 얻기는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모든 일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특별한 지적 구조때문에 몹시 어리둥절하게 되는 수가 있다. 그만치 생활의 대부분은 그들의 정신속에서, 우주만물의 실재와는 정반대로 되어 있다. 조선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세계가 둥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서방에서 사는 우리들은 파리들처럼 저 아랫 세계의 천정 위에 꺼꾸로 달라붙어서 걸어다니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니다, 밑에 있는 것은 당신네들이다.”라고 대답한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별도리 없이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거꾸로 서서 다니며, 우리들의 형제인 동양인들한테서 뭔가를 배울 재주가 없는 한 우리들로서는 반대 의견을 고집하는 수 밖에 없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우리들의 갖가지 생활원리를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것이 동양에서는 엉망으로 혼란스럽게 뒤섞여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조선의 경우는 무엇보다도 사랑이 필요이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헌신적인 사랑은 동양의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조선어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데 알맞는 단어가 없다. 그것을 표현하려면 여러 단어를 한데 묶어야 한다. 조선인은 몹시 생색내는 말, 경의를 표하는 말, 존경하는 말 따위는 쓰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일방적인 말은 가지고 있지 않다.

부부와 사랑과 혈통

남자는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해서 부부를 이룬다. 이런 일은 동양의 마음에 합당하다. 그러나 첫번째 아내가 죽으면 이번에는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두번째 아내로 취한다. 이것은 잘못이다. 사실은 죄를 짓는 일이다. 실제로 그는 자기의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 아내는 사랑을 받는 존가 아니라 아버지한테서 아들로 혈통이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봉사하는 목석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결국 그녀는 별수 없이 대(代)를 이어 주는 그런 가계상(家系上)의 교량 역할을 감수하는 수 밖에 없다.

언젠가 내 아내와 나는 산책하러 나갔다가 어부 같은 사내 하나를 보았다. 그는 돌 위에 주저앉아서 아주 절망한 사람처럼 울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러시오?” 그는 잠깐 눈을 치떳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계속해서 울었다. 우리들은 그 이유를 캐물었다. 그는 자기 아내가 죽었다고 말하면서 “아이고! 아이고!” 통곡했다. 그야말로 아내가 죽은 순간 애정의 눈이 떠진 모양이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의 원리를 가지고 그를 위로하려 했다.
“그 여자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당신은 그 여자를 사랑하는 거요?”
“사랑이라니요? 누가 그 여자를 사랑한단 말씀이요? 아무튼 그 여자는 내 옷을 빨아주고 내 밥을 지어주곤 했오. 그 여자 없이 내가 어떻게 산단 말씀이요? 아이고! 아이고!”


독립은 미친짓
서양의 독립사상도 조선인에게는 아무 감동을 주지 않는다.<에 폴루리부스 우눔(e plumbus unum>이란 표어가 붙은 미국깃발의 영광도, 조선인이 생각하기에는 아주 미치광이 수작이다. 어째서 사람들이 그런 미친 짓을 생각했는지, 조선인은 상상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인생을 다만 복종하는 상태로 알고 있다. 독립이란 것은 그들에게 상호간의 의심, 불신, 불법행위 따위만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거리에서 흔히 묻는 것은 “어디 가는 길이냐?”이다. 그 다음에는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묻는다. 또 “그 편지는 누구한테서 온 것이냐?”고 묻고, 같이 보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그런 일상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 역시 모욕적인 행위일 리가 없다. 그래서 어린애들의 장난 같은 일을 하는 데에도 두 사람이 같이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처첨 동료의 불편을 함께 겪어서 훨씬 더 마음 편해진다는 것은 항상 독립을 두려워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런 때는 오히려 과잉 상태에 있는 모든 지적 기능에 역행(逆行)하는 것 같다.

억압을 위한 교육
교육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들은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 우리들은 학생이 장래의 생활을 위해 실제적인 방법으로 발전하고 또 준비하도록 한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현재를 젖혀 놓고 오직 과거안에서만 살기 위해 마음을 조정하거나 또는 질식시키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다. 바꿔 말하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발전이고 조선인들의 경우는 억압이다. 서양의 학생은 여러가지의 학식을 얻게 되는 것을 몹시 기뻐한다. 반대로 조선인들은 한문의 주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읽고 쓸줄은 안다. 읽고 쓰기 위해서는 20여 년 동안이나 은둔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오랬동안 은둔생활을 해도 많은 학생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서양에서의 교육은 정신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기능훈련이다. 그러나 조선의 교육은 두 발을 묶는 짓이거나 기프스를 만들어 붙이는 짓에 해당한다. 일단 그렇게 해 놓으면 더 이상 성장하지도 못하고 발전하지도 못한다. 이런 사실 때문에 누구보다도 유생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반대한다.
*역자 주-유생들이 서양에서 온 이교를 반대한 중요 이유는 재래의 충효사상에 어긋나고, 군신의 도를 어지럽히며,조상의 제사를 못지내게 하고 사회의 윤리를 문란케 하고 침략의 앞잡이로 본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양의 위협을 올바로 파악했으나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랐다.

미국인은 제아무리 게으름을 피게 되더라도 노동은 고귀하다는 것을 뼈 속 깊이 느끼고 있다. 아무튼 이론적인 면에서 어린이들은 노동의 존엄성을 배운다. 그러나 조선에는 그와 정반대되는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노동은 ‘일’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2차적인 의미는 손해, 손실, 재난, 불행이고, 이런 생각은 모두 ‘일’이란 말과 관계있기도 하고, 이 말로써 표현되기도 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사실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어있는 사람은 풍습상의 논리에 의해서 가장 고귀한 사람으로 인정되어 있다.

*역자 주-조선말에서 ‘일이 생겼다’하면 궂은 일, 참변, 재난, 걱정거리 등 ‘큰일 났다’는 뜻이며 일하는 사람에게도 인사말로 ‘욕 본다’고 한다.

무표정 속에 숨겨진 가슴 속 심연(心淵)
우리들의 경우에는 정신이 가슴과 얼굴 사이의 통신수단 노릇을 하고 있다. 갑자기 우리들을 덮치는 기쁨이나 슬픔은 가슴에서 얼굴로 타전되므로 얼굴의 표정을 보면 곧 그 사람의 기분이 어떤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조선의 정신은 다른 임무를 띄고 있다. 우선 그 첫째 임무는 가슴과 얼굴간의 통신을 두절시켜서 둘 다 각각이게 한다. 말하자면 얼굴에는 다만 거짓 표정을 짓거나 필요에 따라 무표정해 진다. 조선인은 아내나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 거의 냉담한 태도에서 철저한 무관심을 드러낸다. 이와 반대로 자기의 감정에 충실한 서양인은 가슴이 느끼는 것을 목소리나 얼굴의 표정으로 나타낸다. 우리들은 동양에 잠깐만 머물러도 가슴과 얼굴이 통신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며, 상상조차 못한 심연과 저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임금님의 거동
인간은 실체를 겉모양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에 자주 고통을 느낀다. 진실은 진실을 위해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겉모양에 필요한 것이다. 정신은 진실의 어떤 면이 가장 일반적인 것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왕이 행차하면 온 시민이 동원돼서 그 허식에 이바지하게 된다. 어가(御駕)가 불결한 흙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붉은 흙이 뿌려지지만 그것은 아일랜드 스튜우에 뿌려지는 소금이나 후추보다도 적은 소량이다.
야단법석에는 굉장한 허식이 있다. 바빠서 쩔쩔매는 병정들은 사방으로 다름박질친다. 심지어는 조랑말들이 그 틈에 끼어 닥치는대로 사람을 물어 뜯는다. 화살깃들과 깃발들. 5백 년 전부터 물려 내려온 제복을 입은 관리들의 무질서한 행렬, 거기 없어서는 안 될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굉장한 막대기를 가진자들. 때로는 두들기고 , 때로는 뽐내기만 하는 북들, 수천 벌의 헐렁헐렁한 바지들과 짚신들, 붉은 저고리들과 번쩍이는 화살 깃들, 말 안장 위에 높이 앉아서 팔장을 낀채 건들거리며 언제라도 앞으로 고꾸러지거나 뒤로 자빠질 태세를 갖춘 멋들어진 관리들. 한자가 쓰여 있는 위풍당당한 깃발들. 연기를 내뿜는 담뱃대와 소리 나는 대통들. 갖가지 총들. 활과 화살과 향료들.부적들, 웅담과 뱀의 껍질, 근대식 모자와 고대식의 모자. 혼란, 무질서, 웅장, 위엄과 지천, 먼지와 구름과 수레바퀴 고리 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섞여 움직이는 수만 명의 인파. 그 무질서하고 다채로운 깜짝 놀랄만한 군중.
서양인은 깜짝 놀래지만 조선인은 그 전체적 조화가 심히 웅장한데 도취돼서 환희에 젖는다. 그래서 조선인은 그 행렬의 구성 요소가 어떤 것인지, 과연 참된 것인지, 또는 소용있는 것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역자주-이조 때 왕의 거동은 사직이나 종묘에서 제향할 때의 대가식, 무과 전시 등의 법가식, 능에 갈 때의 소가식 등 여러가지인데 으례 호화로운 의장이 행해졌다. 고종 때에는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거둥 때 한 번 제대로 격식을 갖추었을 뿐 그 밖에는 그런저런 것을 갖출 여유가 없는 초라한 거둥이었음에도 외국인의 눈엔 놀랍게 보였던 것 같다.

겉치레와 빈말
식객(食客)을 많이 가진 사람은 그만큼 위대한 사람이다. 이런 생활 체제속에서 하인이 주인을 섬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인을 한, 두 명 가량 더 고용하게 하여 부엌에서 빈둥빈둥 놀고 먹게 하거나, 아니면 찾아오는 사람들 한테서 돈을 더 짜내게 하는 것이다. 그 집은 패가망신하게 돼서 안밖의 모든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모든 벽이 궁상맞게 갈라질런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모든 의식과 소동은 계속되고 주인의 ‘나으리’라는 위치도 확보된다. 즉 실체 아닌 겉모양이 생활지침으로 된다.
사람이 사람의 말에 의존하지 않을 때에 모든 도덕상의 희망이 사라진다는 것은 서양의 진리이다. 동양에 이런 통칙을 적용하면 동양의 대륙 전체를 절망시하게 된다. 우리들이 남의 말을 우리들 멋대로 몹시 중시하는 이유를 조선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조선인들은 생활에서 가장 무가치한 것이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말을 신성시하기 바라는 것은 우리들이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정의를 이룩하려는 거나 마찬가지이기도 하고, 또 그들의 한결같은 대화-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숙고-에 실질적으로 간섭하는거나 마찬가지이기도 하다. 사실 그들의 의사소통은 이해하는 것으로써 이루어지므로 말은 아무 소용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안녕하시오?”라고 말하고 “안녕하시오?”라는대답을 들을 때에는 누구나 그순간 그런 질문에 의해서 명백한 대답을 듣게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거나 마찬가지다.

서양에서는 숙녀가 반갑지 않은 초청자한테 자기 형편이 좋지 않다고 말할 때에는 으례 이성과 본심간에 불쾌한 갈등이 따른다. 그러나 조선인은 자기 형편이 좋지않다거나 몸이 불편하다고 말할 때 이렇게 적당한 핑게를 대서 거절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젊잖은 행위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조선에 갔을 때에는 나의 친구들(조선인들)한테 굳이 충실해지기 위해서 그들이 초대할 때마다 꼭 참석하였다. 가장 흔히 쓰이는 헤어질 때의 인사말은 “내일 또 오리다”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안 왔다. 꼭같은 약속을 하고 돌아갔던 사람들인데 ‘다시’ 오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안가서 나는 그 좋은 친구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후, 그들의 말이나 약속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며 나는 안전한 곳에서 나의 동양인 친구와 제법 화목하게 그리고 서로 신뢰하며 행동을 같이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우리들의 생각은 정반대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들과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지적탐험과 재치있는 처세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들과 그들의 마음이 하나로 되고, 또 정신이 어느 정도는 일치될 때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제임스 게일 저 <코리언 스케치> 장문평 역 현암사 간 에서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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