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31

3.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한국문화 이해 / 임희국 :: pctscwm

3.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한국문화 이해 / 임희국 :: pctscwm

3.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한국문화 이해 / 임희국권별내용/13집 2011.04.21 15:34 Posted by pctscwm

I. 1차 문헌, 글쓰기 방법, 연구 상황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사이에 한국에서 일한 미국 선교사들의 한국문화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1884년에서 1910년 사이에 한국에 들어온 미국 개신교회 선교사가 약 499명이고 이 가운데서 북(北)장로교회에 소속된 선교사는 165명(약 33.1%)이었다.1) 이렇게 많은 선교사들이 각각 이해한 한국문화에 관하여 한꺼번에 살펴보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을 남긴 선교사들의 글을 가려 뽑아서 살펴보고자 한다.

미국 북장로교회에 소속된 선교사들 가운데서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2) 제임스 게일(James Scanth Gale, 한국 이름은 기일(奇一), 1863-1937)3), 그리고 릴리아스 언더우드(Lillias H. Underwood, 1851-1921,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4)의 기록을 이 글의 ‘제1차 문헌’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세 선교사는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 살면서 같은 선교부에서 일한 공통점이 있고, 그러면서도 각자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일한 차이점이 있다. 게일은 주로 목회자로 일하였고 알렌과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의료 선교사로 일하였는데, 그러던 중 알렌은 미국의 외교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하였다. 이 점을 바탕으로 이 글은 세 선교사의 기록에 담긴 공통점과 차이점 그리고 다양성을 살피면서 그 기록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세 선교사의 한국문화 이해에서 다루어진 공통된 주제를 찾아내고 이 주제를 바라보는 서로의 입장 차이를 가려내고자 한다.

이 글은 거대담론 곧 아시아나 한반도 전체를 거론하면서 큰 관점을 잡아 서술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자칫 선험(先驗)적 판단에 근거하여 대충 어림잡아 개괄적으로 섣불리 서술할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거시(巨視)적 관점이 아니라 미시(微視)적 관점에서, 선교사들이 개별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느낀 한국문화에 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하여 살피려는 우선적인 관심은 당시의 한국사회 상황이나 선교정책이 아니라 세 사람이 각각 서로 다른 관점과 입장에서 한국문화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알아보는데 있다. 

그리고 이것을 귀납적으로 서술하려고 한다.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것’(멀리 미국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안을 바라보는’(선교현장 안에서 한국의 토착문화를 바라보는) 선교사의 문화이해를 서술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이 글은 
게일의 『전환기의 조선』(Korea in Transition),5) 
알렌의 『알렌의 조선 체류기』(Things Korean),6)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상투의 나라』(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r Life in Korea)7)를 1 차 문헌으로 선택하였다.

21세기와 더불어 인문학 연구나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이 같은 경향에 발맞추어서 그 당시 내한 선교사들이 한국문화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미진진한 작업이다. 그런데 당시의 한국문화는 오로지 한 가지의 단일형태가 아니라 사회계층별로 적어도 세 가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궁중문화, 양반문화, 평민문화 등이다. 이 가운데서 하나를 고른다면, 우리는 평민문화를 우선적으로 선택해서 이들의 일상생활 문화인 의(衣), 식(食), 주(住) 문화를 선교사들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먼저 살피고자 한다. 그렇게 선택하려는 이유는 1890년 봄에 서울을 방문한 중국 선교사 네비우스(John L. Nevius)를 통하여 내한 선교사들이 그가 제시한 선교방법을 받아들여서 선교정책으로 채택하였고,8) 그 이후로 선교활동의 무게중심은 일반평민과 여성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집중되었기 때문이다.9) 그리고 그 다음엔 선교사들이 이해한 한국의 정신문화가 선교정책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한국교회사 연구에서, 지금까지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관한 연구가 크게 미흡한 실정이다.10) 그들의 선교활동이 한국에서 개신(장로)교회의 형태가 잡혀지고 그 성격이 형성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고 또 그 다음 세대에도 영향을 끼쳤는데도 아직도 이렇다고 할만한 학문적 해석과 평가가 아쉬운 실정이다. 이것은 선교학 분야와 교회사 분야가 공동으로 진행해야 할 연구과제이기도 하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이 글을 통하여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기록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은 이제까지의 한국교회사 연구에 대한 반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한국교회사 연구는 초창기엔 백낙준의 선교사관아래 머물러 있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교회역사를 민족이라는 주제와 연결시켜서 진행하였다. 백낙준의 역사관은 19세기 모더니즘시대의 낙관론을 바탕으로 미국 개신교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으로 표출되었고 더 나아가서 서양의 제국주의 관점도 반영하고 있다. 이 역사관을 극복하려는 1980년대 이후의 교회사 연구는 민족을 중심주제로 잡아서 새롭게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 연구는 그 중심주제에 집중되느라 한국 교회역사의 초창기에 주춧돌을 놓은 외국(미국)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를 알게 모르게 소홀히 여겼다는 지적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1980년대 이래의 연구 줄거리를 따라가면서도 이 소홀히 여긴 점을 극복하려는 연구논문과 단행본이 나오고 있다. 예컨대 서구 중심적 선교에 대한 반성,11) 미국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 한국관 등이다.12) 이 글은 이러한 최근 연구를 살피면서 서술하고자 한다.




II. 선교사들이 이해한 일상생활 문화




미국을 떠나 25일 동안 태평양을 항해하고 일본 요코하마에 들렸다가 다시 배를 타고 부산이나 제물포(지금의 인천)항구에 도착한 내한 선교사들이 받은 첫 인상은, 선교현장에 대한 부푼 기대감이 빗나가면서 대체로 그리 밝지 못하였다. 알렌은 “배의 갑판에서 볼 때 조선의 해안은 황량하고 메마르며 대체로 매력이 없어 보인다”고 하였다.13) 릴리아스 언더우드 역시 “제물포 항에 도착하여 해안을 바라보니. . .휑한 풍경(에다). . .황량한 갯벌이 불쾌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고 회상하였다.14) 3월의 항구언덕에는 나무 한 그루조차 없었고 아직도 눈으로 허옇게 덮여 있었다. 이러한 첫 인상은 이들이 이 땅에 온 이방인으로서 겪어야 할 문화충격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상응하여, 토착주민들(한국인들) 역시 -선교사를 단지 서양에서 온 낯선 사람으로 파악하였으므로- 서양인의 허연 피부색과 우스꽝스러운 행동에다 이상한 옷차림을 호기심 있게 쳐다보았다. 선교사는 이들의 구경거리였고 가끔은 놀림감이 되었고 간혹 겁을 집어먹게 하는 무서운 이방인이었다.15)

이처럼 선교사와 토착주민들이 서로 낯설고 어색한 가운데서 선교사는 낯선 땅의 문화에 충격을 받고 이것으로 말미암은 문화충돌 속에서 선교사역을 담당해야 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선교사가 초창기에 겪은 당시 한국 평민의 일상생활 문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음식문화:

세 선교사는 하나같이 자기네 입맛에 익숙한 미국음식을 기준으로 선교지의 음식문화에 관하여 평가하였다. 고기, 감자, 빵을 먹지 않고 쌀밥과 소금에 절인 배추(김치)를 날마다 먹는 점을 자주 언급하였다. 이 나라에는 설탕이 없고 그 대신에 꿀을 쓰거나 쌀과 곡식에서 단 것을 얻는 조청이 있다고 말하였다. 미국 음식이외에 다른 나라의 음식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이 나라에 우유가 없다는 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16) 그녀는 또한 미국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잔치문화에 놀랬는데, 평소에 잘 먹지 못하는 음식(떡, 과일, 고기 등)이 잔치 상에 오르자 손님들은 -이 음식들을 기대하면서 며칠 동안 일부러 굶었으므로- 엄청나게 이것을 먹어 치우고 또한 남은 음식을 옷소매에 가득히 담아 가는 관습을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게일은 한국 토속음식 문화의 특징이 매운 맛에 있다고 말하면서 고추장과 고추 가루가 들어간 음식에 적응하기가 대단히 고통스럽고 괴롭다고 토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체구가 작고 말라서 가냘프게 보이는 한국 사람들이 고기를 좀체 먹지 않고 쌀밥과 야채만 먹는데도 큰 힘을 쓰고 무거운 짐을 나른다는 점을 언급하였다.17) 알렌은 김치 담는 방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자신이 “김치를 즐겨먹는 극소수의 외국인”이라 밝히면서 김치냄새의 고약함에 적응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고 하였다.18) 그렇지만 그는 아직도 마늘을 넣은 김치를 먹지 못한다고 얘기하였다.

세 선교사의 한국 토속음식에 대한 이해는 이들이 선교현장의 일상생활 문화에 관하여 어떤 자세를 취하였는지 엿보게 해준다. 김치의 경우를 놓고 따져 본다면, 알렌은 한참동안 노력한 끝에 이 문화에 훌륭하게 적응해 나갔고, 게일은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계속 노력하고 있었고, 이에 비하여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적응해 보려는 노력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늘 구경꾼으로서 멀찌감치 바라보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릴리아스는 한국인들의 지나친 음주문화(술주정)를 비판하면서, 가난에 찌들어 한숨만 쉬는 이 사람들에게 술 말고는 달리 마실 거리(차, 커피)가 없는 탓이라고 말하며 은근히 일반대중의 음식문화 전반에 관하여 과소평가하였다.19)

2) 의복문화 :

릴리아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하던 3월의 하늘은 구름으로 잔뜩 찌푸려 있고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이렇게 썰렁한 분위기 때문인지 그녀의 눈에는 토착주민들이 간편하게 입은 흰옷이 “더럽고” 추하게 비쳐졌다. 한 달에 한두 번 옷을 제대로 갈아입는지 의아해 했다.20) 이와 달리, 게일은 발목까지 오는 “깨끗한 흰옷”(두루마기, 도포)을 입은 대중들을 언급하면서 흰색이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색깔이라고 말하였다.21) 알렌도 흰색이 한국민족의 색깔이라고 평하면서 “백의민족”이라 하였다.22)

이처럼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의복문화는 그 색깔이 먼저 보였는데 그것은 흰색이었다.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그 흰색을 “더럽다”고 평가하였고, 게일은 “깨끗하다”고 얘기하였으며, 알렌은 주관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보이는 그대로 담담하게 서술하였다.

3) 주택문화 :

구한말 평민들의 일반 가옥인 초가집은 선교사들에게 대단히 이질적인 문화체험이었다. 규모와 구조 및 실내 생활공간까지 본국에서는 전혀 경험하지 못하였던 집이었다. 황토로 외벽을 바르고 짚으로 지붕을 이은 작은 집은 방안의 천장이 낮아 어른은 똑바로 설 수가 없으며, 실내가 매우 어두운데 창문인 듯 아닌 듯 흰 종이로 바른 작은 봉창에 벽지는 흰 종이로 바르고 방바닥은 노란 기름종이로 바르고 또한 방바닥에는 구들을 놓아 온돌로 난방장치를 해 놓았으므로 세 선교사 모두 다 이것을 대단히 신기해하였다.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여성의 눈으로- 가옥의 구조에 남성들이 거처하는 “사랑방” 공간과 여성들이 거처하는 “안방” 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점을 크게 부각하였다.23) 그리고 여성들의 생활공간은 집 바깥에서 들여다 볼 수 없게 되어있고 가족이나 친척 이외의 남성들은 이 곳으로 들어올 수가 없으며 이 공간에는 여성들의 활동을 위한 작은 뜰이 있다는 점을 얘기하였다.


III. 일상생활 문화와 투쟁한 선교사들

구한말 평민의 일상생활 문화에 대한 세 선교사의 경험은 하나같이 ‘불편함’, ‘불결하고 비위생적’, 그리고 ‘가난함’이었다. 이에 따라 이 문화는 이들에게 일차적으로 ‘투쟁의 대상’이었다. 문화충격과 충돌 속에서 이 문화와 투쟁해야 했다. 투쟁하는 가운데서 선교현장의 문화를 이해해야 했고 또한 이 문화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서양(미국)식 일상생활을 그대로 영위하였다.

게일이 얘기한 불편함에 관하여 좀 더 자세히 언급하면,24) 본국에서 날마다 빵과 고기를 먹고 커피와 우유를 마시던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인 한국에서 쌀밥과 소금에 절인 배추와 고추장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은 여간한 고통이 아니었다. 또한 의자와 침대생활에 익숙해있는 서양 사람이 이 곳에서 방바닥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일은 마치 고문처럼 느껴졌다. 무릎과 엉덩이뼈 그리고 발목뼈가 끊어지듯 아파오기 때문이었다. 온돌방 체험은 더욱더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방바닥이 마치 “빵 굽는 오븐”처럼 달구어져서 잠자는 사람이 “빵으로 구워지는” 느낌이었다.25) 밤새도록 뜨거운 방에서 시달리며 악몽으로 뒤척이고 몸부림치는데, 게다가 방안은 환기가 잘 되지 않아 맥박은 뛰고 머리는 곤두서고 숨이 막혀서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알렌과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구한말의 주택이 지독히도 비위생적이고 불결하다는 점을 자주 언급하였다. 알렌은 이 나라의 주택에 위생시설이 없다고 말하면서,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내년의 농사에 쓸 오물과 쓰레기를 한데 모아서 발효시키는 퇴비구덩이가 있는데 이 구덩이에서 악취가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의사로서 이 악취가 -미국 시카고의 강에서 솟구치는 가스처럼- 사람의 건강을 해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26) 릴리아스는 불결함과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에 관하여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생활하수인 구정물이 사람 다니는 길 양편의 좁은 도랑으로 흘러가는데 이 불결한 도랑에는 해충으로 가득함을 보았다. 이 도랑이 종종 쓰레기로 막혀서 길로 흘러넘치며 더러운 옷을 세탁한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우물이 오염되어 있고 썩어 냄새나는 야채들이 길가와 집의 창문아래 수북이 버려져 있어 불쾌한 냄새를 풍긴다고 하였다. 집 주변에 고여 있는 녹색의 이끼 낀 물웅덩이에서 독성이 있는 수증기가 뿜어 나온다고 하였다.27) 그런데 이 두 사람에 비하여 게일은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생활환경에 대하여 그렇게 예민하게 불평하지 않았다.28)

알렌과 릴이아스 언더우드가 위생환경에 관하여 큰 관심을 갖고 예민하게 관찰한 것은 아마도 이들의 직업이 의사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들의 예민한 불평은 결코 불필요한 과민반응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 당시엔 해마다 여름철이면 전염병이 도져서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앓아눕고 사망하였다. 천연두와 콜레라가 가장 심각한 전염병이었다. 특히 1887년에는 콜레라가 온 나라를 휩쓸어서 수천 명이 쓰러졌다. 이 전염병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아침에 건강했던 사람이 정오에 사망하였고 또 한 가족 몇 명이 같은 날에 죽기도 하였다. 부모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졸지에 고아가 된 아이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의료 선교사들은 무력감 속에서 진료를 그만두고 “하나님의 응징(전염병)이 속히 멈추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29)

이뿐만이 아니었다. 선교사들 자신들도 이 전염병에 걸릴까봐 무서워 벌벌 떨었다. 한 번은 게일이 천연두의 발진으로 온 몸이 부르튼 환자의 가정에 심방하였는데, 그 가정에 머무는 동안에 이 질병이 자기에게 옮을까봐 무섭고 떨렸다고 한다.30)

이처럼 당시의 유행성 질병과 전염병은 선교사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치 죽음에 포위된 듯한 느낌이었다. 이 질병과 전염병이 대체로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한 선교사들은 이 환경과 투쟁해야 했다. 따라서 질병퇴치와 청결이 중요한 선교활동 가운데 하나였다.


IV. 선교사들의 일상생활 문화이해와 오리엔탈리즘 논의

이처럼 일상생활 문화와 투쟁한 당시 선교사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논의를 떠올리게 한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에 따르면,31) 오리엔탈리즘이란 19세기에 서양세계가 자기 정체성에 관하여 의식하는 가운데서 스스로를 “우리”로 표현하고 서양 바깥의 다른 모든 세계를 “그들”로 표현한데서 시작되었다. 이 속에는 동양에 대한 서양(백인, 기독교)의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자기 우월의식이 깔려 있다. 따라서 서양은 스스로를 문명으로 파악하고 서양의 바깥 세계를 야만으로 가공(架空)하여 규정하였고, 자기네 멋대로 만들어 낸 가공의 규정을 동양 사람들에게 주입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야만이라 이해하게 하였다. 따라서 동양 사람들은 서양이 만들어 준 가공의 자기를 참된 자기라고 받아들였다. 이 이론을 내한 선교사들이 이해한 토착 일상생활 문화에 반영해 본다면, “우리”인 미국 선교사들이 “그들”의 세계인 한국으로 들어와서 받은 첫 인상인 불편함, 불결함과 비위생적, 가난함은 그들이 갖고 있던 오리엔탈리즘적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류대영과 이향순은 미국 선교사들이 갖고 있던 한국 인식은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이미 지적하였다.32) 그렇게 지적하는 근거는 19세기 말 당시 미국에 널리 소개된 한국의 별칭이 “은둔의 나라”(The Hermit Nation)나 “고요한 아침의 나라”(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인데 이것은 바로 오리엔탈리즘을 함축한 두 개의 책 제목이라는 것이다. 즉 은둔의 나라는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가 지은 『은둔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 1882)에서 가져왔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이 지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en: The Land of Morning Calm, 1886)에서 가져왔으며,33) 이 두 책에 묘사된 한국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이고 또 많은 점에서 편협하고 터무니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한국에 관하여 소개된 책이 미국에 거의 없었고 또한 『은둔의 나라 한국』을 지은 그리피스는 상당한 사회적 신뢰를 받고 있었으므로 미지(未知)의 나라 한국에 관심을 가진 미국 사람들은 이 책을 정독하였다. 알렌, 게일, 릴리아스 언더우드도 이 책을 읽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들이 쓴 기록에 드문드문 “은둔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오고 또한 그 책의 내용도 조금씩 인용되었기 때문이다.34) 또한 앞에서 언급한 첫 인상, 곧 알렌과 릴리아스가 한국에 도착하면서 받은 ‘부정적인 첫 인상’ 역시 이 책에서 받은 영향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세 선교사의 서울생활에 대한 기록이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적 한국관을 확인하게 해 준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선교사들의 생활환경에 놀랐다. 제물포의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서울의 선교사들은 “전통 한옥을 수리하여 내부를 다소 서양식으로 개조하고 벽은 아름답게 치장하고 융단과 안락한 가구들을 구비하여 잘 살고 있었다.”35) 비문명 세계(‘사막’)의 한 가운데서 문명세계(‘오아시스’)의 생활을 즐기는 문명인처럼 선교사들 대부분은 서울 한 복판에서 토착주민들과 동떨어져 미국생활을 그대로 영위하였다. 알렌 또한 선교사들의 생활이 넉넉하고 부유한 수준을 유지할 뿐만이 아니라 편리하게 살고 있다고 말하였다. 게다가 “미국 돈으로 월 3달러에 식생활을 스스로 해결하는 하인들을 구할 수 있으므로” 선교사나 선교사 부인이 적은 비용으로 시간을 절약하며 쾌적하게 살아간다고 하였다.36) 이렇게 기록된 선교사들의 생활은 가난하고 비참한 “그들의 세상”속에서 윤택하고 부유한 “우리의 세상”을 구축하여 “그들과는 별개로” 살아가는 “우리”였다.37) 이런 식으로 오늘날의 오리엔탈리즘 논의가 19세기말의 내한 선교사들에게 적용될 타당성이 충분하다.

오리엔탈리즘 논의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에 보다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선교를 통한 서양문명화 담론 때문이다. 즉 쇄국정책의 종식과 문호개방(1876)이래로 한국(조선)은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고 이 과정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이 나라에 들어왔고 또 당시의 정부는 이를 위하여 선교사를 불러들였는데, 선교사의 선교활동 속에는 -의료선교와 서양식 학교교육을 통하여- 서양 문명의 이식과 정착도 포함되었다. 그 이후에 한국의 전통문화는 점차 근대화의 이름으로 서양문명에 잠식되어 버렸다. 이러한 현상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게 설득력을 부여한다. 즉 문화란 그 문화가 지니고 있는 힘(force)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파악되는 것이다.38) 서양과 동양의 관계도 힘의 역학관계, 곧 힘센 문명이 힘 약한 문명을 삼킨다는 것이다. 이것을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대입시켜보면, 선교사의 활동을 통하여 시대에 뒤떨어져 그 수명을 다한 전통문명이 힘센 서양문명에 잠식되어서 그 자리를 근대화의 이름으로 서양문명이 차지해 버렸다고 해석된다. 이렇게 오리엔탈리즘은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적 패권주의로 말미암아 전통문명이 쇠퇴함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세 선교사의 기록을 꼼꼼히 살펴보면 오리엔탈리즘의 논리가 적용될 수 없는 부분들이 나타난다. 먼저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태도 변화이다. 그녀의 기록에 보면, 선교현지의 주민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그녀의 태도가 조금씩 누그러지다가 동료 선교사 매켄지(W. J. McKenzie)의 “타자를 위한” 선교활동을 보면서 커다란 인식변화가 일어난다.39) 매켄지는 황해도 장연의 소래교회에서 일하였다. 그는 여타 다른 내한 선교사들과 달리 1894년 가을에 서울을 떠나서 오지(奧地)마을인 소래로 들어가서 토착주민들과 함께 살며 토착언어(한글)를 배우고 그들과 꼭 같은 생활방식(음식, 잠자리)으로 살았다. 주민들은 그가 엉터리 한국어로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이미 그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 감동을 받았으므로 하나 둘 씩 복음을 받아들였다. 매켄지처럼 그렇게 서양식 삶을 포기하고 토착인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더불어 먹고 지내면서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한 경우를 다른 내한 선교사들에게서는 좀체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선교현지의 주민들을 타자로 파악하고 이들과 동떨어져서 살았는데, 매켄지는 이와 다르게 타자와 더불어 살면서 행위와 삶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이 사실이 릴리아스 언더우드에게 커다란 자극과 충격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만약에 충격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매켄지에 관하여 이렇게 길게 서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년 뒤에(1895), 매켄지가 질병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그녀는 대단히 침통해지고 가슴이 저려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40) “7월의 어느 슬픈 날 ... 매켄지가 심하게 앓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편지가 온 후 곧이어 그가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뒤따랐다. 천둥번개 치듯 바람이 몰아쳤다. 그렇게 열성적이고 헌신적이며 유능한 사람을 그토록 빨리 앗아갔는가!”

이어서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남편의 사역에서도 타자를 위한 선교가 있다고 기록하였다.41) 앞에서 언급한대로, 1887년에 콜레라가 온 나라를 휩쓸자 수천 명이 쓰러졌다. 이 전염병에 대처하려고 의료 선교사들은 긴급히 응급조직을 구성하였다. 의사 애비슨(O. R. Avison)이 응급병원과 위생업무의 총책임을 맡았고 그의 지휘아래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조별로 여러 지역에 검역소를 설치하여 전염병퇴치에 나섰다. 물론 토착교인들 가운데서도 많은 자원봉사자가 나섰다. 이들과 선교사들이 하나 되어 검역소에 있는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았고 또 가가호호(家家戶戶) 방문하여 주민들에게 전염병 예방교육과 위생교육을 실시하였다.42) 이렇게 희생적으로 진료하자, <환자가 기독교 병원에 가면 죽지 않고 살아난다>는 내용의 홍보벽보가 성벽에 나붙었다. 콜레라와 목숨 걸고 싸우며 희생적으로 환자를 돌보는 선교사들에게 감동받은 주민들은 “이 외국인들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들이 이방인을 위해 하는 것만큼 우리는 우리 가족 중 하나(환자)를 위해서 그만큼 희생하려고 할까?”라고 말했다.43) 또한, 어느 날 새벽미명에 서둘러 환자가 있는 천막으로 걸어가는 선교사 언더우드를 본 주민들이 “저기 인간예수가 가는군. 그는 쉬지도 않고 밤낮 환자 곁에서 일한다네!”라며 탄복하였다.44) 이렇게 감동으로 와 닿은 언더우드의 복음실천이 선교의 열매로 맺혔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사람들이 우리의 봉사를 통하여 주 예수를 발견하게 되는 것보다 더 달콤한 보상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스스로 반문하면서 감격하였다.45) 이러한 사례는 선교사와 토착주민들이 서로가 서로를 더 이상 타자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반증해준다. 오히려 양자가 함께 힘을 합쳐 전염병과 싸우는 가운데서 한마음이 되었다. 적어도 이 사건 속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염병과 죽음에 포위되어서 공포에 질린 선교사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오리엔탈리즘 논의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

게일의 입장 변화도 눈에 띈다. 처음에 그는 한국의 일상생활 문화가 불편하고 불결하며 비위생적인 사실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의 정신문화 수준이 대단히 높다는 점을 알아채게 되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생활문화는 하잘 것 없지만 정신문화가 높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인이 본래 “책읽기를 좋아하는 민족”이고 “학문을 좋아하는 심성”을 가져서 매우 “높은 교육열”이 있는 점을 파악하였다. 그는 이어서 한국의 전통학문의 깊이와 넓이를 크게 인정하면서 “학문적 성과로 따져 본다면 조선의 (유)학자들의 수준이 예일대학이나 옥스포드대학 또한 존스 홉킨스 대학출신보다 높다”고 하였다.46) 이 말 속에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감을 찾아볼 수가 없고 오히려 한국문화를 ‘존중’하고 있다.

게일은 또한 한국의 예절문화는 성경시대의 히브리문화와 아주 친밀하여서 마치 자신이 다윗, 다니엘, 베드로 그리고 바울 시대의 문화를 경험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47) 이를테면, 다윗이 사울 앞에 고개를 숙이고 경배하듯이(삼상 24:8) 한국 사람들도 그렇게 고개 숙이고 절을 한다. 성경의 히브리 사람들이 ‘샬롬’하며 인사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인사할 때마다 비슷한 뜻을 가진 ‘안녕’이라 인사한다. 그는 더 나아가서 성경의 내용들이 “서양 사람들보다도 한국 사람들에게 훨씬 더 명료하게” 들려진다고 보았다.48) 예를 들어,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제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로 명하셨는데(마 9:5-7) 이 말씀을 미국에서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방금 중병에서 놓임 받은 연약한 사람이 어떻게 다리가 넷 달린 무겁고 큰 침대를 들고 갈 수 있겠는지 의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야 비로소 이 내용을 훤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곳의 침상은 서양의 침대가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간단히 개고 펼치는 이부자리이기 때문이다. 게일은 한국 사람들의 관습과 언행에 배어 있는 ‘체면문화’까지 잘 이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니고데모가 체면을 차리는 전형적인 한국적 인물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낮에 찾아오다가는 체면이 손상될까봐 밤이 되어서야 찾아왔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게일은 한국사회의 관습과 예절문화가 성경시대의 문화와 친밀하다는 점을 발견하였고 이것을 복음전파에 활용하였다.

이 같은 한국의 정신문화와 예절문화에 대한 게일의 이해에는 오리엔탈리즘에 채색된 오만함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한국전통 문화를 존중하는 자세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V. 복음이 토착문화 속으로 성육신(Inkulturation)




1. 한글의 가치를 발견, 사전편찬, 성경번역

1) 선교사로서 한글의 가치를 발견 :

게일이 한국의 정신문화를 발견하고 그 문화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문화를 존중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오랜 세월 감추어져있던 한글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였다. 한글이야말로 누구에게나 “배우기 쉽고” 익히기에도 “간단한” 글인데 너무 쉽고 간단하므로 사용되지도 않았고 도리어 멸시만 당해왔는데 “서기 1445년에 발명되어 조용히 먼지투성이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가운데서” 선교를 위해 “준비된” 아주 훌륭한 언어라고 감탄하였다.49)

한글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한 점은 내한 선교사들에게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본다. 토착언어로 복음을 증거하여서 그 문화 속으로 복음이 성육신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창기의 한국 선교가 선교사 위주의 선교가 아니라 ‘선교현장 중심으로’ 정착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본다. 복음이 토착문화 속으로 성육신(Inkulturation)하여서 그 문화 속에서 새로운 형체(Gestalt)를 갖게 되는 것을 뜻한다.50)

그러나 한글 배우기는 선교사들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릴리아스 언더우드가 고백한대로,51) 내한 선교사들은 선교사역을 시작하면서 토착언어(한글)를 배우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선교사의 한글학습을 위하여 매년 1단계에서 3 단계에 이르는 학습과정이 개설되었고, 모든 내한 선교사는 반드시 일년에 3차례 아주 엄격한 한글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이와 관련하여서 게일은 한글문법을 연구하여 『문법책』(Grammatical Forms)을 출판하였고 또 『한영자전』(Korean-English Dictionary)도 출판하였다.

2) 사전 편찬:

게일의 사전편찬에 앞서서, 선교사 언더우드는 선교사들이 한글을 배우는데 반드시 필요한 사전을 만들었다. 릴리아스는 남편이 한국에 도착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885년부터 5년 동안- 한글사전을 만들고자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온갖 정성과 열정을 기울인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당시에는 『한불자전』(韓佛字典)이 선교사의 한글학습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는데,52) 언더우드는 이 사전의 한계점 곧 한국어를 외국어 발음으로 표기한 점을 뛰어넘는 완벽한 사전을 만들되 『영한(英韓)자전』과 『한영자전』을 동시에 만들기로 하였다. 그는 5년 동안 한글단어를 수집하고 이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다른 선교업무 때문에 바빠서 이 일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으므로 틈틈이 짬을 내어 작업하되 해마다 여름 휴가기간 동안에 이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는 이제까지 한글의 맞춤법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점을 파악하였다. 사람마다 한글을 소리 나는 대로 제각기 표기해 왔으므로 모든 사람이 각기 자기 나름의 한글맞춤법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두 사람만 한 자리에 함께 있어도 한글 쓰기규칙이 제각기 서로 달라서 맞춤법 때문에 서로 우기고 싸우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형편에서, 언더우드는 『전운옥편』(全韻玉篇)을 표준으로 삼아 맞춤법을 통일시켜 나갔다. 그러나 옥편에 없는 글자 곧 중국에서 빌어오지 아니한 순 우리말이 대부분이므로 이 단어들을 다른 사전들과(예, 『한불사전』) 참조하면서 맞춤법을 고안하고 만들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송순용(宋淳容)이 언제나 그와 함께 일하였다. 그의 도움이 없이는 사전 만들기가 불가능하였다. 그는 맨 먼저 모음과 자음의 차례와 받침의 차례를 만들어서 사전에 들어갈 단어 순서를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모음의 순서에 따라(“ㅏ”부터 시작) 단어를 배열하되 한글단어를 먼저 적고 이에 상응하는 한자를 적고 그 다음에 영어로 그 뜻을 적었다. 가령, “아오, 弟, A younger brother of a brother, a younger sister of a sister”로 적었다. 또한 한자(漢字)에서 온 “초목”(草木)이란 단어는 『전운옥편』에 있으므로 그대로 받아썼으나 순 우리말인 “나무”란 단어는 당시에 “나모”라고도 하고 “나무”라고도 했다. 이 경우에 습관적으로 “나모 목”이라 하니 “나모”라 쓰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한문(漢文)에 젖은 사람들이 “의”를 뜻하는 “지”(之)와 “에”를 뜻하는 “어”(於)를 서로 분간하지 못하고 혼용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이것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가령, “입어목(入於目) 재어가(在於家)”로 쓰고 나서 “눈에 티가 들었소 집에 있소”라고 말하기고 하고 “눈의 티가 들었소 집의 있소”라고 말하는데 이 경우에는 “에”로 쓰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또, “타인지가(他人之家) 공자지언(孔子之言) 인지수(人之手)”로 쓰고 나서 “타인의 집 공자의 말씀 사람의 손”이라 말하기도 하고 “타인에 집 공자에 말씀 사람에 손”이라고도 말하는데 이 경우에는 “의”로 쓰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이런 식으로 언더우드는 -여러 선교사들이 앞서 해놓은 작업을 바탕으로- 사전을 만들면서 맞춤법의 표준도 만들었다. 그는 단어 하나하나를 일일이 『한불사전』과 대조하여서 권위 있는 표준맞춤법을 만들었다. 이 사전이 완성되자 일 만개의 단어와 동의어가 정리되었다. 물론 이 방대한 작업을 혼자서 해낼 수가 없었다. 게일이 『한-영 자전』을 만드는 작업에 동참하였고, 헐버트는 『영-한 자전』을 만드는 일에 동참하였다. 드디어, 1890년 4월 26일에 『한영문법』과 『한영자전』이 완성되었고,53) 이것을 일본에서 출판하여 국내로 들여왔다.

한글과 씨름하고 한글학습에 구슬땀을 흘리는 선교사들을 위해 사전편찬을 착수한 언더우드는 자기도 모르게 이 땅의 백성을 위해서도 방대한 작업하였다. 선교를 위한 이 작업은 한글의 발전은 물론이고 한국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본다.




3) 한글로 성경번역:

언더우드의 사전편찬 작업은 성경번역 작업과 연계되어 있었다. 1887년 2월에 본격적으로 성경을 번역하기 위한 공식기구가 그의 집에서 구성되었다.54) 언더우드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4월에 성경번역을 위하여 <한국상임성서위원회>(The Permanent Bible Committee in Korea)가 발족되었고, 이 위원회 안에 번역위원회와 개정위원회를 두었다.55) 1900년에 신약성경의 번역이 완성되었다.56) 구약성경은 아직 번역 중에 있었고 앞으로 일년 뒤에 이 작업이 마쳐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런데 이미 『창세기』, 『출애굽기』, 『사무엘서』, 『열왕기』, 『시편』, 『이사야서』는 번역 출판되어 서점에서 팔고 있었다.




2. 토착교회 설립

릴리아스 언더우드에 따르면,57) 그녀가 한국에 도착하던 때에(1888) 의료선교사업이 정부와 왕실의 높은 호감 속에서 잘 진행되고 있었다. 한해 뒤에 릴리아스의 남편이 될 호레이스 언더우드의 선교사역은 고아원설립과 학교설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교회설립을 위하여 그는 이제까지 약 30명 정도 세례를 주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기회가 주어지면 종교서적을 팔고 복음을 전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선교사인 그의 신분이 아직도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선교사들과 한국 정부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게 되면 선교사들은 언제든지 본국으로 귀환조치를 당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선교 상황이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 1894년 무렵의 평양에서는 박해가 여전하였고 선교사들이 이 도시로 쉽게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더우드는 그의 활동 안에서도 종종 황망한 일을 겪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앙적인 동기가 아니라 생계와 보수를 위하여 교인이 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좋은 보수를 바라며 선교사의 조수노릇을 하려고 신앙이 있는 척하는 경우나 혹은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려고 지원하면서 많은 보수를 요구하는 경우는 그를 곤혹 속으로 빠트렸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인이 되려는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고 최소한 며칠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의 신앙을 여러 가지 측면으로 시험해 보고, 그리고 나서 비로소 세례를 베풀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더우드는 도대체 어떻게 선교해야 할 것인지 여러 가지로 고민에 빠졌다. 그는 선교에 대한 “대단한 책임감과 더불어 느껴지는 무지함, 무능력, 무경험의 자각” 속에 빠져 있었다.58) 그러면서 그는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 네비우스(Nevius)의 저서를 꼼꼼하게 읽으며 그의 선교방법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90년 봄에 언더우드 부부는 서울에 온 네비우스 부부를 방문하였다. 곧 이어서 네비우스와 내한 선교사들이 여러 차례 회합을 가졌다. 네비우스는 자신의 선교방법을 제시하고 설명하였다. 내한 선교사들이 “오랫동안 기도하며 숙고한 끝에” 네비우스가 제시한 소위 “네비우스 방법”을 선교정책으로 채택하였다.59) 이때 언더우드가 요약 정리한 네비우스 방법은 다음과 같다:60) 1) 모든 사람(토착인) 각자는 그리스도를 위한 교역자이며 자기의 생업을 가지고 스스로 생계를 해결한다. 2) 토착인들이 교회를 돌볼 수 있고 운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교회조직을 만든다. 3) 자질이 훌륭한 토착인들을 뽑아 이웃에게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게 한다. 4) 토착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교회당을 짓게 한다. 교회당은 토속적인 건축술과 건축양식에 따라 지음으로써 토착교회의 모습을 띠게 해야 한다.

그 이후에 언더우드 부부는 최초의 토착교회인 소래교회(황해도 장연에 소재)를 자주 찾아갔다.61) 이미 그와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오기 전에 토착인 교회지도자 서상륜(徐相崙)이 이 교회를 세웠고(1883),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도입한 내한 선교사들이 이제부터 이 교회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돌보기 시작하였다. 1894년에 선교사 매켄지가 소래마을로 들어와 이 ‘타자들과 더불어 살며 그들을 위해’ 선교하는 동안에 소래교회는 토착교회로서 날로 발전하고 번창하였다.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기록에 따르면,62) 교인들 스스로가 가난한 중에도 힘껏 헌금하여 교회운영비를 -선교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지불하였다. 매켄지의 장례예배를 드린 1895년 여름에는 예배당 안에 교인들이 가득히 모였다. 그 이후에도 언더우드 부부는 자주 소래로 찾아가서, 남편은 성경공부를 인도하였고 부인은 진료도 하고 여성교인들과 신앙에 관하여 얘기하고 아이들에게 찬송을 가르쳤다. 1900년 추수감사절에 이 부부가 방문하였을 때에는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이 너무 많아서 교회 마당에 대형 천막을 쳤다. 이 당시에 이 교회의 교세는 세례교인 수만 250명 이상이었다. 또한 성경공부 교실이 확장되었고 주일예배 참석을 위해 멀리서 오는 교인들이 편히 쉴 곳도 마련되었다.

한국 개신교회의 역사에서 첫 번째 토착교회로 정착된 소래교회 교인들의 신앙형태는 엄격한 예배참석, 부지런하고 규칙적인 성경공부 그리고 실천적 신앙이었다. 가령 1899년 주변지역에 극심한 기근이 왔을 때에 교인들이 주변의 여러 마을을 도와주었다. 또 인도에 기근이 심하게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이를 위해 교인들이 헌금하여 50원을 거두었다. 헌금할 수 없는 교인들 가운데는 유일한 장신구인 은반지를 바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첫 번째 토착교회가 발전을 거듭하자 선교사들은 다른 교회들도 소래교회를 본받아 따르게 하였다. 이 정책에 응답한 토착교인들은 평신도 가운데서 교역자노릇을 하면서 교회를 이끌어 토착 지도자를 위하여 스스로 쌀과 논밭과 땔감을 지급하였다. 이 지도자는 선교사에 의해 발탁되는데, 선교사는 신앙에 열심이고 학식이 풍부한 지도자를 선발하여서 그로 하여금 예배를 인도하게 하고 교인들을 돌보며 선교부에 교회 상황을 보고하게 하였다. 평신도 교역자들은 정기적으로 농한기에 모여서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교회의 역사를 배우고, 교회의 조직을 배우고,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을 배웠다.

1896년 8월에 미국 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총무 스피어(Robert E. Speer)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부산, 제물포, 평양 그리고 서울을 두루 방문하면서 선교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살펴보았고 또 그리스도교 교인이 된 한국인들도 만나보았다. 미국으로 돌아 온 그는 한국 선교현장 답사에 관한 보고서 47쪽을 작성하였는데,63) 한국의 선교사들이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도입하여서 그곳에 “토착교회”(The Native Church)가 정착되어 가는 상황을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그는 이 보고서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 지었다:64) “(선교현장에서) 우리들의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의 교회를 설립해야 한다65)… 우리는 모세와 예언자에 관하여 선포하는 자들이며,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 관하여 선포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며, 이 교회는 결코 제도로서의 교회 곧 미국의 제도교회가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란 어떤 이념이나 제도로서의 교회가 아니며 사랑의 법으로 역사하시는 그분의 능력 안에서 세워지는 교회를 뜻한다.” 이 말을 나름대로 풀이해보면, 선교는 미국 교회의 제도와 이념(신학)을 선교현장으로 가져가서 그대로 옮겨 심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증언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새로운 토양(문화)에서 새로운 형체로 자라나는 토착교회를 뜻한다고 본다.




VI. 정리, 앞으로의 연구과제




이제까지 19세기 말 내한 선교사들 가운데서 미국 북장로교회에 소속되어 일한 알렌, 게일, 그리고 릴리아스 언더우드의 기록을 살펴보면서 이들이 한국의 일상생활문화(衣, 食, 住)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세 선교사들의 이해가 각자 조금씩 서로 달랐다. 그런데도 세 사람 모두 공통적으로 불편하고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생활문화를 경험하였다. 그래서 이 문화는 이들에게 대체로 투쟁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해마다 전국적으로 휩쓰는 무서운 전염병(특히 콜레라)은 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죽음에 이르는 전염병에 둘러싸인 선교사들은 죽음의 공포속에서 위생과 청결을 중요한 선교사역으로 보았다.

한국의 일상생활 문화에 대한 선교사들의 인식과 태도와 관련하여서 우리는 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한국인식을 적용해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의식이 서양 중심적 문명관에 배여서 한국문화를 낯선 타자로 인식하며 불편하고 불결하여 비위생적인 생활문화를 업신여긴 점, 이들 대부분이 선교현장에서 미국의 생활을 그대로 영위하면서 현장의 주민들과 동떨어져 화려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본다. 더욱이 당시에 이들을 통해 뿌려진 서양문명이 싹트고 자라서 열매 맺힌 결과로 오늘날의 서구화된 한국 사회를 바라보면, 문명들 사이에 패권주의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견해를 수긍할 수 있었다. 선교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복음전파는 곧 서양문명의 확장이란 등식도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 선교사의 기록을 꼼꼼히 읽어보면 오리엔탈리즘적 한국인식이 적용될 수 없는 점도 많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선교사 매켄지가 소래마을에서 보여준 ‘타자를 위한 선교사역’이 그러하였다. 전염병(콜레라)과 목숨 걸고 싸운 선교사들의 자기희생적 자세가 선교지의 주민들에게 감동으로 전해진 사실은 선교사들이 가졌다는 오리엔탈리즘적 한국인식에 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이와 같은 관찰을 통하여 우리는 그 당시 내한 선교사들의 사역에 대한 양극단의 엇갈린 평가를 모두 다 거두어 들여야 할 것이다. 종전처럼 선교사들의 사역을 무조건 좋게 보고 숭배하려는 태도도 버리고, 이와 반대로 최근 오리엔탈리즘의 논의에 따라 선교사들이 서양 제국주의 첨병이었다는 평가도 유보해야 할 것이다. 선험적인 전제를 깔고서 ‘선교사들이 이렇게 하였을 것이다’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고 본다. 이 글을 통하여 파악되는 과제를 거론한다면, 우리는 선입견을 깔고서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섣불리 결론짓는 성급함을 버리고 냉철한 눈으로 선교사들의 기록 문서를 꼼꼼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제까지는 모든 선교사의 사역을 모두 하나로 엮고 몽땅 함께 묶어서 집단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해 온 점이 흔하였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하여 파악된 점은, 선교사들 각자의 견해와 사역이 크거나 작게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낱낱의 선교사를 각각 구분하여 개별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통하여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세 선교사가 한국의 일상생활문화에 관하여 물질문명의 차원에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 이들은 한국의 ‘정신문화’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크게 인정하였다. 굳이 오리엔탈리즘의 용어인 ‘우리, 그들-타자’를 그대로 살려서 말하더라도, 선교사들은(특히 게일) ‘타자 속에서 숨쉬고 있는 정신문화’ 곧 ‘우리와 다르고 또 우리에게 없는 그들의 정신 문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하였다. 예를 들어서 예절문화, 높은 교육열 그리고 글 읽기를 즐기는 문화 등이다. 특별히 게일이 한국의 예절문화와 생활관습 속에서 성경시대의 문화를 찾아낸 점은 우리의 관심을 크게 끌고 있다. 이러한 문화이해를 바탕으로 선교사들이 한글을 깊이 연구하고, 사전을 편찬하고, 더 나아가서 성경을 번역하였다고 본다. 이를 통하여 이들은 한국의 정신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인식을 통하여 우리는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이 아니라- ‘토착문화 속으로 복음이 성육신’(Inkulturation)되었다는 관점에서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사역을 앞으로도 계속 파악해야 필요가 있다고 본다. 1890년 이래로 시행된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한국에 토착교회가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자랐는지 새롭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66) 이 연구를 위하여 반드시 찾아내어야 할 자료가 있는데, 그것은 초창기 한국 개신(장로)교회의 토착교회 형성을 위하여 지대한 역할을 한 권서(勸書 혹은 賣書)들과 조사들의 활동을 광범위하게 밝혀내는 일이다.67) 이 점에서 이 글은 ‘미완(未完)의 반 쪽 논문’이다. 왜냐하면 토착교회 형성과정에 관하여 선교사들의 기록만 살펴보았고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토착인 지도자들(권서, 조사)의 목소리를 전혀 담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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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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