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의 한국 인식에 대한 진실
- 배경한 신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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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과 타이완(臺灣)을 비롯한 국제학계의 중국현대사 연구자들로부터 가장 주목받는 연구주제 가운데 하나는, 20세기 중국의 가장 대표적 정치 지도자인 장제스(蔣介石)에 관한 평가 문제다. 장제스는 일생 동안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1917년~1973년) 일기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2003년 그의 후손들이 방대한 분량의 일기 원본을 미국 스탠포드대학 후버연구소에 기증하였고 2005년 이후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이념적·정치적 평가에 가려져 있던 장제스에 대한 역사학적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소금상인의 아들, 국민정부의 주석이 되다
장제스는 1887년 10월, 져쟝(浙江)성 펑화(奉化)현 씨코우(溪口)에서 소금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의 사숙에서 유교경전 교육을 받았으며 16세 때인 1903년부터 고향의 학당에서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육군예비학교인 진무(振武)학교에 들어갔으며 1910년 12월 니가타(新潟)현 타카다(高田)에 있는 일본육군 포병부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혁명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한 장제스는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곧바로 귀국하여 상하이(上海), 져쟝 지역 혁명운동에 가담하였다. 이후 군사적 능력에 대한 신임을 얻어 쑨원의 측근으로 자리잡았으며 1924년 소련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황푸(黃埔)군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됨으로써 군사·정치적 기반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전개된 국민혁명을 통하여 1928년 전국을 통일하고 난징(南京) 국민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1924년부터 시작된 제1차 국공합작(國共合作) 초기부터 군사 정치적 주도권을 둘러싸고 소련고문 및 중국공산당 측과 마찰을 빚고 있던 장제스는 1927년 4월 상하이 난징 지역 점령 이후 공산당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소탕작전(4.12정변)을 벌이면서 소련 및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반공주의자로서의 정치적 면모를 분명히 하였다. 1928년 이후부터 전개된 공산당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토벌작전(剿共)은 공산당 세력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으나 내전의 정지와 일치항일을 요구하는 국민적 저항(1936년 12월, 西安事變)에 직면하여 제2차 국공합작을 받아들였다. 1937년 이후 8년간에 걸친 일본과의 전면전을 전개하였으며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참전과 지원으로 항일전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장제스의 정치적 대두과정이나 이후 정치가로서의 활동은 군사력이 정치(민주주의)나 혁명(사회혁명)을 압도하던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것이며, 그런 점에서 장제스는 군사정권을 이끌던 군인정치가 내지 군사독재자라는 평가를 받곤 한다.
항일전 종전 후 1946년부터 본격화된 국공 간의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정권은 1949년 타이완으로 옮겨갔다. 이후 전개된 장제스의 타이완 통치 또한 군사적 억압통치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어서 국민적 저항(2.28사건)과 함께 민주화 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한편으로 강력한 정부 주도의 개발독재에 의한 타이완의 경제 발전은 긍정적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명·청시대 조선 정책과 같은 맥락에서 한국을 보다
1953년 한국정부는 중국 내의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공로를 인정하여 장제스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그러나 그간에 중국(혹은 타이완) 학계나 한국 학계에서 강조해왔던 것과는 달리, 중화민국 정부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은, 식민지로 전락한 이웃나라에 대한 순수한 지원이라고만 보기 어려운 부정적인 측면들을 적지 않게 가지고 있다.
예컨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충칭(重慶)에 있던 한국임시정부와 장제스 정부(국민정부)사이에 벌어진 한국광복군 창설을 둘러싼 논의는 당시 임시정부 측에서 광복군의 독자적 운영권 확보를 위하여 얼마나 지난한 노력을 전개했으며 이에 대하여 중국 측에서는 어떠한 견제 및 통제정책을 구사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 측에서는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의 제정을 통하여 광복군을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고 그 실제적 운영도 군사위원회에서 파견한 중국 장교들이 장악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41년 말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한·중 간에 중요 현안으로 떠오른 임시정부에 대한 외교적 승인 문제에 있어서도 장제스와 국민정부 측에서는 적극적인 승인 의지보다는 소극적이고 관망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특히 1942년 11월의 카이로회담을 통하여, 미국의 외교 전략에 따라 강대국의 지위를 갖게 된 중국은 신탁통치에 의한 전후 한반도 문제 해결이라는 미국 주도의 방안에 동조하면서 사실상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포기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중국 측에서는 종전을 앞두고 동맹군의 한국 진공 시에 중국군도 참여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었고 재정적 원조와 민간투자의 확대 등을 포함한 한국에 대한 지원책을 검토하면서 영향력 확대를 노리기도 했다. 아울러 국민정부 측에서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이전에 거치도록 규정한 '적당시기'에 대한 방안으로 외교와 국방을 중국인 고문이 담당하는 고문정치를 검토하는 등 적극적인 개입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요컨대 중일전쟁 시기 장제스나 국민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은, 전후 강대국으로 부상할 중국이 구상하는 아시아 국제질서의 일부로서 중국의 주변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보를 목표로 한 것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약소민족에 대한 호혜적 지원'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장제스나 국민정부의 이러한 한국 인식이나 대 한반도 정책은 앞세대 중국의 정치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쑨원이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멀게는 책봉조공관계를 기본 축으로 하는 명·청시대의 조선에 대한 인식이나 정책과 그 맥락이 닿아 있다. 2000년 이후 급속하게 전개되고 있는 중국의 경제성장과 초강대국화는 한·중·일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에 걸쳐 중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가져올 것이 확실시 된다. 이런 시점에서 바라보는 장제스의 한국인식은 우리에게 중국은 과연 어떤 존재이며 이런 중국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심각한 문제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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