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11

이광수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천황을 찬양하고 내선일체를 주장해야 했을까-동포에 告함 : YES블로그 - 내 삶의 쉼표

이광수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천황을 찬양하고 내선일체를 주장해야 했을까-동포에 告함 : YES블로그 - 내 삶의 쉼표

이광수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천황을 찬양하고 내선일체를 주장해야 했을까-동포에 告함
꽃들에게희망을
2016.11.25

동포에 고함
[도서] 동포에 고함
이광수 저


3.1기미 독립선언서를 쓴 사람은 육당 최남선이었다. 그렇다면 그 직전 동경에서 있었던 2.8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는 누구일까? 춘원 이광수였다. 그의 작품 '무정'은 최초의 현대소설로 평가되며, 지금도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하지만 그 뛰어난 필력으로 친일활동에 동참함으로써, 한국 문학에 기여한 한 찬사보다는 지탄을 받는 인물이 되고 말앗다.

'동포에서 告함'. 제목만 보면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이 연상되면서 동포들의 애국심이나 각성을 촉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광수가 일본어로 쓴 70여 편의 글을 싣고 있는데, 그가 변절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충격받을 정도로 노골적이고 적나라했다. 아주 수위 높여 내선일체를 주장하고 천황을 숭배하며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몸을 바치라는, 이른바 문장보국(文章報國)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정신에 입각한 국민문학, 내선일체를 지향하는 문학 건설을 외치는 걸 보면 작가정신까지  망각하고 있었다.

"천황은 현신인現神人이시다. 십선十善의 천자이시다.일억 국민의 덕의 이상이시다."(75, 건국절의 아침)

"이제 조선인의 유일한 진로는 황민화이며,이에 대하여는 정부와 민중 모두가 일치된 생각을 갖고 있
다"(황민화皇民化의 한 길,81)

"조선의 백성이여.오래 된 작은 감정을 지금에야말로 청산하라. 그리고 깨끗이 정화된 새롭고 큰 마음으로 살자. 이제 우리의 고향은 작은 조선 반도가 아닌 것이다. 일장기 나부끼는 곳, 그곳은 모두 우리의 고향인 것이다."(기원 2600년,119쪽)

"그렇다면 애국심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일본을 내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며,내 몸, 내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이 감정은 천황을 내 아버지처럼 사모해 받들고 그 일을 해드리는 것이다. 전선의 병사들이 죽음의 순간에 ' 텐노 하이카 반자이'를 외치는 그 마음인 것이다."(조선 청년의 애국심,213)

읽다보면 돌변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하는 한탄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 책 속 글만 보자면 '무정' 아니라 그보다 더한 걸작을 남겼어도, 이광수를 현대소설의 장을 연 작가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산산조각 날 것이다. 이렇게 빼어난 필력과 재능을 하필 친일하는데 소진하다니, 그 악마적 재능에 분노를 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를 품어도 보았다. 뒤에 첨부된 사학가 김원모의 주장을 보면서.

이광수는 1940년 2월 가야마 미쓰로우(香山光郞)으로 창씨 개명한 뒤 본격적으로 친일활동에 나서고 있다. 그런데  그전에 이광수는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도산 안창호와 100여명과 함께 체포된 상태였는데  김원모의 주장에 따르면 1938년 그가 하늘처럼 모시던 도산 안창호가 사망하자, 도산의 자리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민족지도자들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그 심적 부담에 자신이 친일로 나서는 대신 지도자들을 보호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라는 것이다. 조선어 사용이 금지된 시기에 원효대사를 집필하며  민족 정신을 보존하려고 했고, 겉으로는 친일이었지만 내심에는 조선의 독립에 대한 기원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광수의 친일행적을 변호하는 시각이 있다는 것이 이색적이기도 했고, 사실 이 주장에 살짝 귀가 솔깃해지기도 했다. 민망할 정도로 일본을 찬양하고 있는 점이 오히려 더 친일파로 위장한 건 아닌가하는 역설적인 의심을 품게 한 것이다.
이광수도 자신이 해방 뒤에 쓴 '나의 고백'에서 자신의 친일은 민족을 위해서였다고 기술했지만, 그것은 친일행위에 대한 치졸한 변명일 뿐이라는 비난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그의 민족 보존론 주장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은 이정도로 이광수가 망가지진 않았으리라고, 이광수가 저 정도로 조선인으로서 정신을 팔지는 않았을 거라고, 조선인 작가 이광수의 마지막 자존심을  믿어주고 싶은 미련이 손톱만큼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 바람과는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이 주장은 소수 견해인 모양이다. 김원모 뒤에 실린 문학평론가 정현기의 글에서는  이광수의 친일이 여지없이 비판당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비겁한 일본 지식 권력자의 하수인이었고 조선인 앞에서는 추악한 지식권력자라며 지식인으로서  수행해야 할 책무와 운명을 거론하고 있다.일본인은 이용가치가 높은 이광수를 이용해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꺾으려 한 것이고, 이광수는 이에 협조한 지식인 부역자라는 것이다.
앞의 사학자의 글이 1997년이라  그 뒤 20여년동안 친일, 혹은 이광수에 대한 연구가 좀더 진행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현재로선 이쪽 주장에 더 무게가 실려있지 않을까.

내년이 '무정'이 연재된지 100주년, 문인협회에서 춘원 문학상을 제정했다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친일 경력 때문에 상의 제정은 불투명해진 상황이고, 이것은 작가 이광수와 지식인 이광수의 간극을 초래한 이광수의 업보인 것이다. 동시에 개인적인 선택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일제 침략기라는 역사적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던, 개인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이라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문제는 작가 이광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그것이 숙제로 남는다.
친일파라는 이유로 그의 문학적 평가까지 매도돼야 하는것인지. 냉철하고 다각적인 시각과 인식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친일청산이 제대로 됐다면, 작가 이광수에 대해서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친일청산이 여전히 과제로 남은 상황이라 비판적 시각을 유지해야 되는 점도 있을 것이다.
'무정' 100주년를 계기로 이제 춘원 이광수를  재점검하는 불씨가 지펴졌으면 한다. 친일행적이나 근대적 작가로서의 공적 어느 한쪽으로 매몰되는 일차적인 평가를 지양하고, 작가 이광수의 업적에만 눈길을 두지 않는 작가와 지식인으로서 춘원을 어떻게 비판하고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문학적으로 역사적으로 다면적이고 총체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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