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이승만의 업적 | ㅍㅍㅅ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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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22, 2015 - 그럼에도 이승만에 관한 글을 하나 쓴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 싶다가 그냥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이승만 정권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
반론: 그것은 이승만의 업적이 아니다 | ㅍㅍㅅ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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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24, 2015 - 자칭 '역덕'이라는 이가 새해를 맞이해서 식민지, 이승만, 박정희 등의 주제 중 하나를 물으면 답해주겠다며 올린 글을 <ㅍㅍㅅㅅ>가 받아서 게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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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이승만의 업적 | ㅍㅍㅅ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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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22, 2015 - 그럼에도 이승만에 관한 글을 하나 쓴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 싶다가 그냥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이승만 정권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
반론: 그것은 이승만의 업적이 아니다 | ㅍㅍㅅ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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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24, 2015 - 자칭 '역덕'이라는 이가 새해를 맞이해서 식민지, 이승만, 박정희 등의 주제 중 하나를 물으면 답해주겠다며 올린 글을 <ㅍㅍㅅㅅ>가 받아서 게재한 ...
Sejin Pak January 25, 2015 ·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이승만의 업적
저희집에 놀러와 보시면 알겠지만 정말 책장 한가득 박정희 천지입니다. 제가 모르는 박정희 관련 책이나 논문은 거의 무의미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할정도로..?
그에 비하면 이승만에 관한 자료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박정희-조선-식민지(위안부 등등)-이승만 순으로 관심이 가다보니 상대적으로 소외된 느낌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승만에 관한 글을 하나 쓴다면 어떤 것이 좋을까 싶다가 그냥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이승만 정권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것이 몰락했는지는 다음 글에서 논해보고자 하고 업적을 우선적으로 써보겠습니다.
1. 이승만의 수많은 실정, 그러나…
이승만은 박정희와 함께 그에 대한 호불호에 따라 정치적 견해가 갈릴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입니다. 일단 이승만은 12년에 걸친 장기집권 과정에서 수많은 실정을 범했습니다.
건국 초에 친일파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더라도, 민족적 자존감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잘못된 전황 보도로 서울 시민들을 고초에 빠뜨렸고 그러고 나서도 예고도 없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킴으로써 무고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던 점, 거창양민학살과 국민방위군 사건과 같은, 이승만 옹호자이신 유영익 선생조차 ‘천인공노할’ 사건이라 표현할 만큼의 실정을 저지른 것은 사실입니다.
단순한 실정을 넘어서 52년의 부산정치파동, 54년 있었던 사사오입과 같은 억지논리로 개헌, 마지막으로 60년 대규모 부정선거의 자행은 민주주의에 크나큰 해를 끼쳤습니다. 또한 진보당 탄압과 조봉암의 법살法殺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의 입장에 서더라도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자아냅니다.
2. 경제계의 반대에도 이익균점권을 성립
이러한 명백한 실정이 있으면서 동시에 이승만은 그의 반대되는 평가를 받을만큼의 놀라운 업적 또한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이승만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중요한 인물로 간주하는 것은 그가 꾸준히 “미국화”를 추진했던 인물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간단하게 나눠서 각 분야에서의 업적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우선 정치 분야에서 우익들은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했다는 업적이 있다고들 합니다만 저는 거기에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 헌법기초자인 유진오는 건국헌법에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대거 포함했다고 평가했고,
- 박명림 교수님은 미국이 이승만 정권에다 헌법상 사회주의적 요소를 제거하지 않으면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했을 정도로 사회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 또한 이흥재 교수님은 기업 이윤을 노동자들에게도 분배하라고 못 박아 둔 건국헌법 18조, 즉 소위 말하는 ‘이익균점권’ 조항이 경제계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립됐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아직은 확실하게 주장하기 어렵지만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 이승만이 당시 “정치”를 경험한 미국은 시기적으로 뉴딜기였습니다.
- 루즈벨트의 민주당이 장기집권하면서 뉴딜 정책을 펼치던 시기였는데, 이 시기를 통해 정치를 배운 이승만의 정치 사상에 직간접적으로 뉴딜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이승만은 해방 이후에도 공산당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국내의 사회당 창당에도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에는 좌익 정당이 존재해야 한다고 축하 서한을 보냈던 사람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박헌영과의 사이가 틀어져서 공산당을 싫어하게 됐다는 생각이 매우 강하게 듭니다.
당시 임시정부를 비롯해 해외 독립운동 세력의 건국 이후의 건설방침이 민주사회주의로 수렴하고 있었다는 것이 독립운동사 연구 분야의 통설이라는 점을 고려해봐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승만은 확실히 동시대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사회주의를 이념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했습니다.
3. 선거를 정착시킨 대통령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했다는 주장에서 한 가지 새겨들어야 할 주장이 있습니다. 바로 “대통령제”의 도입입니다. 이승만은 48년 헌법기초위원회에서 마련한 내각제 헌법 초안을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도록 압력을 넣어 자기 주장을 관철시켰고 52년 1차 개헌으로 직선제를, 54년 2차 개헌으로 국무총리제를 폐지함으로써 한국을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식 대통령제”를 도입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 이 과정을 많은 진보적 사학자들은 ‘독재화’로 보지만
- 시각을 바꿔서 이승만이 원하던 것이 한국의 “미국화”라는 것을 이해하고 본다면
- 미국식 대통령제의 도입과정으로 이해가 됩니다.
- 이러한 강력한 대통령제야말로 한편으로 그 뒤에 있을 발전의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앞서 말했듯이 이승만은 자유당을 앞세워 권위주의적인 정치를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럼에도 이승만은 민주주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우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기란 정치학계에서도 이견이 많으나 적어도 자유민주주의라 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인 선거와 선거를 통한 정권 창출의 가능성, 그리고 비판적 언론의 존재”는 충족을 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특히나 정기적으로 민주적 선거를 치르는 ‘관행’을 정착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한국전쟁 중에도 전국에서 선거를 치뤘으며 최초의 지방자치제 도입을 이뤄냈으며, 설령 자유당이 선거에서 불리할지라도, 물론 부정선거를 하기는 했습니다만, 선거를 통해 권력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지방자치제도 없애버리고 인구비례당 국회의원 수를 반으로 줄여버린 박정희나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비하면 훨씬더 “민주적”인 독재였습니다. 게다가 조용중 선생님은 이승만이 국회해산을 여러 번이나 고려했음에도 “초대대통령인 나로서는 국회를 해산했다는 전례를 만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해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즉 의회 제도를 유지함으로써 민주주의라는 “익숙하지 않은” 제도에 국민들이 익숙해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57년 언론규제조항을 국회에서 통과시켰음에도 비판적 언론은 더 활성화됐으며 59년 경향신문을 폐간할 때까지는 노골적인 언론 탄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레고리 핸더슨도 이승만기에 언론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간접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 비판적인 언론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성장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독재와 이것이 어떻게 상응하는가? 이승만이 참가한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한인총대표회에서 참가자들이 택하고 1920년 서재필이 이승만에게 건의한 민주주의관이 “교도민주주의敎導民主主義”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민주주의를 향유하기 전에 준비단계로 일종의 철인정치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승만은 나름대로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독재를 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했다고 할 수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4. 높은 교육열과 문맹 퇴치에도 노력한 대통령
이러한 저의 주장이 이승만을 “옹호”하는 것으로 비춰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과 권위주의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가 민주주의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내세웠기에 비판적 언론을 폭넓게 허용했으며,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 주기적으로 선거를 치뤄 민주주의적 관행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게다가 교육적인 면에서 이승만은 연평균 총예산의 10% 이상의 예산을 교육 부문에 투입하여 1945년 문맹율 78%로 식민지기 고작 22%만이 취학 경험을 갖고 있던 한국을 1959년 전국 학력 아동의 95.3%가 취학하는 국가로 변모시켜놓았습니다.
문맹퇴치에도 노력해 45년 78%였던 문맹율은 59년 22%로 경이적인 수준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게다가 이때 미국으로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유학을 떠났고 이것이 나중에 경제개발의 자원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이와 같이 교육을 통한 국민의식의 성장은 이승만 스스로를 “몰락”시키는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대학생이 엄청나게 증가해 60년에는 무려 10만 명이나 됩니다. 이런 교육과 지식인 계층의 성장은 민주주의의 확산에 기여합니다.
가령 4.19 혁명 이후 <광장>이라는 소설을 쓴 최인훈은 그 서문에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게는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을 들여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습니다. ‘서구적 자유의 풍문’을 국민들에게 보급한 것은 비판적 언론뿐만 아니라 “교육”의 역할이기도 했습니다.
5. 농지개혁을 통한 경제개혁
다음으로 무엇보다도 경제를 빼먹을 수 없습니다. 사실 이승만은 경제적으로는 조금 무능했다고 많이들 생각하는데 근거는 있습니다. 농이지만 유영익 교수님에 의하면, 단적인 예로 조지 워싱턴대 재학 시절 선택한 수학 과목 2개에서 D와 E학점을 받았으며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수학했을때도 D학점을 받았고 게다가 후에 동지식산주식회사를 차렸지만 사업에 실패하기까지 했습니다.
진지하게 말하자면 집권기동안에 인민들의 경제적 생활수준에 있어 현격한 변화가 있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농지개혁이라는 엄청난 개혁을 성공시켰다는 것만으로 이승만 정권의 경제 분야에서의 업적은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농지개혁이 한국 자본주의에 끼친 영향은 두말하면 입이 아플정도이나 민주주의에 끼친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농지개혁법의 입안 자체가 굉장히 “민주적”이었습니다. 계급이해에 기반한 정당정치의 산실은 이미 이때 존재했습니다. 자세한 부분은 김일영 교수님의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한국과 국제정치], Vol. 11 No. 1, 1995)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요약하자면 이승만은 정부의 이해를, 한민당 의원들은 지주의 이해를, 신진 정치인들은 농민의 이해를 최우선으로 여겨 갑론을박의 토의를 통해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본다면 과연 우리가 50년대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향유하고 있는지, 오히려 내용적인 면에서는 후퇴한게 아니냐는 후지이 다케시 교수님의 통렬한 지적이 와닿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상의 민주성은 최장집 교수님이 지적하시듯이 북조선의 농지개혁과 비교해보았을때 적어도 지주 계급 또한 자신의 이해관계를 주장하고 정치에 반영시킬 기회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북조선의 개혁이 단순히 지주 계급을 ‘타도’하는데 급급해 그들이 월남 이후 남한 내에서 가장 강력한 반공세력화 하는 것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남한의 개혁이 훨씬더 미래지향적이며 공동체를 튼튼하게 만드는 개혁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지주 계급의 정치적 세력화 가능성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추후에도 지주 계급이 지배계급으로서의 정치세력화 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서구의 역사 및 다른 국가의 역사와 비교해보았을 때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 엄청난 역할을 했습니다. 김성호 교수님에 따르면 농지개혁을 통해 전체 면적지의 무려 92.4%라는 엄청난 면적이 자작 농지화 되어 해방 직후 35%에 지나지 않았던 수준에 비하면 엄청난 수준입니다. 이는 선진적이라는 전후 일본의 농지개혁 결과가 90%였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훨씬더 철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농지개혁은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고취해 농업생산성을 높힐 뿐만 아니라 농민들이 이승만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게 됨으로써 체제 유지에 막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를 갖게 됐다는 점에서 자식의 교육에 엄청나게 투자할 수 있는 재원이 마련됐다는게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에 엄청난 기여를 했습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이승만이 농지개혁을 강하게 추진한 이유는 지지의 근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지배를 위해 행한 농지개혁의 결과로 농민들은 민주주의에 적응할 수 있는 시민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지배의 결과가 지배를 유지못하게 만든다는 역사의 변증법은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6. 개신교 국가화를 추진
마지막으로 종교를 보자면 이승만은 그야말로 한국을 개신교국가로 만드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의 원칙을 어기고 국회나 국가 의전, 국무회의 등에서 하나님을 언급하고 기도를 하는 행동을 했습니다. 국가 의전 자체를 기독교 방식으로 하는 것을 보면 확실한 의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국기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로 대체하고, 군종제와 형목제를 도입했으며, 정부 주요 부서에 기독교인을 대규모로 등용하고 결정적으로 한국전쟁 중에 외국의 구호물자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통해 분배함으로써 인민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몸소 체험할 수 있게 했습니다. 아멘.
이승만 정권기 장차관 242명 중 38%, 국회의원 200명 중 25%가 기독교인이었으며 적극적이 정권의 비호 아래 1950년 60만이었던 개신교 교인 수는 60년 114만으로 급증하게 됐습니다. 명실 상부 동아시아의 “미국”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 토대를 건설하려 했던 이승만의 노력은 매우 성공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7. 민주주의의 성장을 이끌고, 민주주의에 의해 밀려난 대통령
이러한 이승만의 업적을 종합해 보자면 이승만은 분명 한국을 기독교 국가화해 동아시아의 미국으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정권의 비호 아래 적극적으로 개신교 세력을 키워주고 미국식 대통령제를 도입했으며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최인훈의 말처럼 “아시아적 전제”를 휘두르던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행한 ‘업적’의 결과로 더이상 정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민주주의는 점차 성장해갔고 이제 더이상 그의 통치가 유지될 수 없을만큼 민주주의가 성장하자마자 그는 몰락해버렸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했던 여러 정책들이 자신의 권력을 더이상 유지 못하게 만드는 이 변증법적 모순은 이승만 또한 역사의 신이 갖고 놀다 버리는 장난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반론: 그것은 이승만의 업적이 아니다
정초부터 왜 갑자기 ‘이승만’인가 했다.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를 주도하고 있는 인사가 국사편찬위원장으로 발탁되었지만, 박근혜 정부에서는 이승만을 두 팔 벌려 찬양하기가 쉽지 않았다. 박정희의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쿠테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군사혁명사>를 편찬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무능과 부정부패를 지탄했기 때문이다. 비록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미완성의 혁명이었기에 군부 자신들이 들고 일어나 혁명을 완수했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정부의 무능과 부정부패를 극심하게 그리면 그릴수록 쿠테타의 정당성을 더더욱 확보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승만과 박정희는 제로섬 관계였기에 박정희의 후광으로 집권한 이 정부가 이승만을 대대적으로 칭송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 뜬금없이 웬 이승만 재평가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찾아봤다. <ㅍㅍㅅㅅ>에 오른 햄벨스 님의 글은 애초에 자신의 페북에 자신의 역사 지식을 대중들에게 알리겠다며 썼던 것이었다. 자칭 ‘역덕’이라는 이가 새해를 맞이해서 식민지, 이승만, 박정희 등의 주제 중 하나를 물으면 답해주겠다며 올린 글을 <ㅍㅍㅅㅅ>가 받아서 게재한 것이다.
햄벨스 님의 글은 이승만에 대한 진보진영의 역사인식을 교정하기 위해 이승만의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바를 짚어보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ㅍㅍㅅㅅ>를 통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자 글의 뉘앙스가 많이 달라졌다. 같은 글이지만 페북에 새해맞이 역사지식 소개 정도로 썼을 때와 인터넷 이슈 매거진에 공식적으로 게재했을 때 읽히는 방식은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하 존칭 생략)
역덕을 위한 제안 1 : 막대구부리기를 넘어 근대성 비판으로
햄벨스는 진보진영이 덮어놓고 이승만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했던 <백년전쟁> 같은 자료를 생각해보면 그러한 우려에 공감할 수 있다. <백년전쟁>과 같은 자료들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협력자’와 ‘저항자’ 사이의 투쟁으로 축소시켜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제국주의에 협력해서 제국의 과실을 따먹고, 식민지 경험을 오히려 자신들의 시초축적 계기로 삼은 이들이 아직까지 호가호위하며 살고 있기도 하다. 반면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주장하면서 식민정권을 상대로 싸웠던 운동가들의 자손들은 어려운 형편을 이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협력과 저항의 이분법으로는 식민주의를 제대로 성찰할 수 없다.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였던 허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는 어떻게 식민지의 인권변호사가 될 수 있었을까?
그의 인권의식이나 변론 능력과 동시에 판사가 그의 변론을 듣고 조선인 운동가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던 형법 체제도 고려해야 한다. 도면회 선생은 일본의 식민주의가 근대적 형법체제라는 무기로 조선에 대해 문명의 우월함을 주장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식민주의자들은 형법체제의 근대성을 내세워 자신들이 식민지민들을 계도하고 훈육해서 문명으로 이끌어야 할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내세웠던 근대의 문명은 군주통치의 자의성을 법적 논리라는 합리성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주의자들은 식민지민들이 문명의 온전한 혜택을 입기에는 ‘민도(民度)’가 떨어지는 족속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식민자들이 식민지민들을 계도하고 훈육할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따라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운용한 형사재판은 근대적 합리성과 태형 같은 전근대성이 섞여있었다. 이처럼 식민지배의 합리성과 폭력성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허헌과 같은 이가 재판을 통해 식민자들과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햄벨스가 진보진영의 역사인식을 교정하고자 할 때 이 정도의 정황을 설명하는 데에서 멈추는 것이 문제다. ‘진보진영은 여지껏 식민지배의 합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마는 것이다.
편향을 바로잡기 위한 ‘막대 구부리기’시도하고 있다고 이해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햄벨스의 글을 읽다가 보면 왠지 모르게 뉴라이트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을 떨쳐내기도 어렵다. 기존의 역사인식을 교정하기 위해 일부러 반대 사실을 강조해버리고 말면서, 정작 문제화해야 할 것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식민지배의 다면성을 강조하기만 하고 식민지배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근대성’을 문제 삼지 못하니 이러한 문제가 생긴다.
예컨대 나치 독일 시절 유대인 정책에 대한 일상사적 연구를 수행한 이안 커쇼가 나치 지배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방식을 참조해볼 수 있다. 커쇼가 나치 독일 시기의 일상을 연구하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 학살을 가능케 했던 요소로 발견한 것이 바로 유대인 문제에 대한 독일인들의 ‘무관심’이었다. 악명 높은 홀로코스트가 예상과는 다르게 열광적인 증오와 혐오보다는 무관심 위에서 벌어진 폭력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독일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방화, 폭행 등의 폭력이 불법적으로 벌어지면 규탄했다. 그러나 유대인을 공공연히 차별하는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되고 여기에 입각한 폭력이 행해지자 독일인들은 비로소 폭력을 지지했다. 그래서 커쇼는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증오로 건설되었지만, 무관심으로 포장되었다.”라고 결론지었다. 법의 근대성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식민지배와 인종학살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헌법재판소를 통해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 나자 ‘종북’ 몰이가 대중적인 힘을 받는 현실을 성찰하기 위해서 근대적 사법체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역덕을 위한 제안 2 : 인물을 넘어 사건과 관계로
햄벨스가 이승만에 대한 진보진영의 역사인식을 교정하겠다고 나설 때 넘지 못하는 또 하나의 문제가 바로 인물에 대한 집착이다. 이승만을 국부로 세우겠다는 뉴라이트 세력이나 그들을 비판하기 위해 이승만의 치부를 드러내겠다는 <백년전쟁> 같은 비판물들이 역설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부분도 이승만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특정 인물만을 역사연구의 대상으로 삼기는 곤란하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이기에 대통령이 당대 사회를 모두 움직였을 것처럼 보이곤 하지만 현실이 작동하는 방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어떤 시대를 움직이는 것이 구조냐 주체냐를 묻는 논쟁은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계급 구조의 법칙이나 개별 주체의 의지 문제로 환원해서는 당대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최근에는 사건사가 대안으로 제시된다. 사건을 강조하는 이유는 어느 시기의 사회적인 현상에서 행위자의 판단과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구조의 문제, 그리고 무엇으로 환원하기 어려운 삶의 우연성과 독특성의 문제를 모두 시야에 넣기 위해서이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 맥락과 여러 행위자들이 맺는 관계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사건사의 관점에서 햄벨스의 역사인식 ‘교정’을 분석해보자. 햄벨스는 이승만의 업적으로 민족사회주의, 교육율 증가, 농지개혁, 민주주의적 선거 정착 등을 제시했다. (‘개신교 국가화’는 다소 뜬금없는데, 이승만이 ‘미국화’를 지향했다고 강조하기 위해 끼워 넣은 것 같다.)
우선, 민족사회주의를 지향했다는 대목을 살펴보자. 제헌헌법에 나타난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이승만의 업적으로 이야기하기는 곤란하다. 제헌헌법은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하여 만들었기에 이승만 정권의 업적이라고 말한다면 삼권분립에 어긋나는 말이 된다.
정부수립이 제헌일보다 느리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또한 굳이 어느 인물의 업적으로 이야기하려면 이승만이 아니라 헌법기초자인 유진오의 업적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사실 햄벨스의 이승만론은 근거로 인용하는 선행연구들의 입장과 매우 큰 모순을 보인다. 햄벨스가 제헌헌법의 사회주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고 인용하고 있는 박명림의 경우 제헌헌법이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1953년 8월 미대표단의 방한을 계기로 시장경제체제적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고 분석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박명림은 이승만의 업적을 운운하는 햄벨스의 주장과 정반대로 한국의 국민국가 형성에서 초국적 조건과 관계를 통해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북 간의 체제경쟁을 고려하기 위한 ‘대쌍관계동학’과 냉전체제에서 좌파 공산체제와 우파 파시스트체제라는 양쪽의 한계선을 설정한 ‘미국의 범위’를 고려하자고 제안했다.
박명림은 이러한 관점에서 해방 직후 좌파와의 헤게모니 투쟁과 미국의 현실 판단이 제헌국회의 사회적 시장경제체제 성격을 창출했다고 분석했다. 반면 한국전쟁 직후에 국내 정치구도와 미국과의 관계 등이 변하면서 헌법의 개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했다. 이처럼 박명림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관계망’이다. 이는 이승만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파악할 수 없는 맥락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햄벨스의 이승만론은 교육율 증가와 농지개혁의 문제에서도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우선, 1950년대 초등교육이 급속하게 팽창했으나 이를 이승만의 업적으로 환원하기는 어렵다.
이 시기의 초등교육 팽창을 연구한 김기석과 강일국은 정부의 정책의지보다도 학부모의 재정 부담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당시에 대중들은 교육을 유일한 신분상승의 길로 여겼다. 적어도 매뉴얼은 해독할 수 있을 기초 노동자들을 양산하려던 정부는 높은 교육열에 편승했지만 학부모들에게 부담을 떠넘겼다.
초등교육은 의무교육이었음에도 학부모들은 사친회비의 형식으로 학교 운영비를 책임져야만 했다. 사정이 이렇기에 중장년의 구술생애사에서 ‘사친회비를 내지 못해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는 언급이 나오곤 한다. 또한 일선 현장교사들을 중심으로 미국식 자유주의 교육을 시행하려는 새교육운동도 일어났지만, 한국전쟁 이후 반공국가주의를 강조했던 이승만 정부에 의해 좌절되기도 했다.
교육문제는 농지개혁의 성과와도 연결된다. 햄벨스는 김일영을 인용하여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를 해체할 것을 주문한다. 햄벨스의 주장처럼 이승만 정권기의 농지개혁이 한국의 자본주의 발달과 교육수준 증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최근 학계의 정설로 굳어가고 있다.
그러나 농지개혁을 앞두고 자신의 자산을 지키고자 했던 지주들은 교육재단을 창립하거나 토지를 기부할 수 있었다. 이는 현재의 한국 교육계에서 사학(私學) 재단의 여러 문제들을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농지개혁이 자작농 창출에는 성공적이었지만 한계 또한 명확했다. 김동노는 농지개혁 직후부터 1정보 이하의 영세 빈농이 전체의 77%였다고 분석했다. 1950년대 후반으로 가면 정부의 정책 실패와 미국 잉여농산물 유입으로 소작농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기도 했다.
장상환은 이러한 문제 때문에 1950년대 중반에는 머슴의 숫자가 다시 늘어나기까지 한다고 비판했다. 햄벨스가 “농지개혁의 결과로 농민들은 민주주의에 적응할 수 있는 시민으로 탈바꿈”했다고 단언할 때 이러한 빈농들과 머슴들의 존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적 선거를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살펴보자. 햄벨스의 설명과 달리 이승만은 정치를 불신하여 선거를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 제헌국회는 임기가 2년이었기 때문에 1950년 5월 말까지 선거를 치러야 했다. 정부수립 후 첫 총선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11월로 연기하겠다고 밝히는 등 선거를 회피하려고 했다. 반면 미국은 자신들이 점령했던 지역에서 안정적인 국민국가를 세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총선의 안정적 실시가 필요했다. 1950년 총선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선거는 정착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1952년 개헌 당시에는 군대가 국회를 포위한 뒤에 공개적으로 기립하는 투표를 진행하여 166명 중 찬성 163표, 기권 3표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의 재선을 위한 직선제 개헌이었다.
이 때 헌병대가 야당 의원들을 버스에 실어 사라졌다. 이처럼 한국전쟁 중에는 이승만이 극도의 독재체제로 치닫자 제거 계획도 세웠다. ‘에버레디 계획’이 바로 그것이다. 이승만의 반공국가주의 독재는 미국의 냉전 구상에 위협이 될 정도였다.
“이승만은 미국식 대통령제를 도입했으며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말하는 햄벨스의 설명은 근거가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오히려 “아시아적 전제”라고 표현했던 최인훈의 말이 이승만의 통치 성격을 더 여실히 보여준다.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문제의식
나 또한 햄벨스처럼 진보진영의 역사인식이 더 풍부해지기를 원한다. 오늘날 우리의 삶이 놓인 세계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폭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식민주의 문제나 냉전질서의 잔존처럼 이 지역에서 살아갈 때 접하게 되는 역사적 문제들이 많다. 역사적 비판은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악마화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러한 점에서 햄벨스가 가진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그러나 햄벨스의 ‘교정’을 스스로가 교정할 필요도 있다. 이승만의 업적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애써 찾는다고 막대를 구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정인의 공과를 묻는 질문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대답은 당대의 관계성에 놓인 권력관계를 보다 풍부하게 드러낼 때 찾을 수 있다.
‘식민지’, ‘이승만’, ‘박정희’ 같은 키워드를 쪼개서 지식을 드러낼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냉전이 길항작용을 했던 당대의 권력관계를 끈덕지게 묻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최현숙 선생이 진행하고 있는 노년 빈곤층의 구술생애사 같은 작업이 그러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이승만의 업적보다 더욱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요소다.
"햄벨스, 이승만, 로맨틱, 성공적?" 이라는 제목의 반론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이 무슨 진부한 반론인가.
이승만에 관한 글이 ㅍㅍㅅㅅ에 올라가고 나서 참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솔직히 말해 답할 만한 가치가 있는 비판은 없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페이스북에 지인들을 상대로 올린 글을 일반 독자를 상정하고 쓴 글로 고쳐쓰지 않고 그대로 올린 글쓴이의 잘못 탓도 있지만 그럼에도 진의가 상당히 왜곡됐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와중에 편집자에게 백승덕씨로부터 반론 기고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솔직히 말해 백승덕씨라는 말을 듣자마자 내용이 어떨지가 너무 뻔히 예상되어 굳이 읽어볼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그래도 한 때나마 함께 “진보 역사관 재편”이라는 모임을 만들려고 했던 인연이 있는고로 백승덕씨의 비판에 간략하게나마 답변하는 것이 나름대로의 의무를 다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담이지만 나는 스스로를 “역덕”이라 칭한 적이 없다는 것부터 지적하고 싶다. 오히려 역덕이라는 표현을 혐오하는 사람이라는 점은 내 평소 글들을 유심히 관찰해봤더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1, 근대성 비판이라는 허망함
뉴라이트의 등장과 함께 힘을 얻은 또 하나의 사조가 있으니 바로 “식민지 근대성”이 그것이다. 이 사조는 기존의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한국 현대사를 해석한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자유주의와 탈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재해석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근대주의”로 규정하며 둘 모두를 뛰어넘을 새로운 사관을 모색한다. 이들이 내세우는 것은 근대성 비판으로 근대성의 문제를 지적하며 그것을 뛰어넘어 해방을 지향하는 사조로 식민지 근대성론뿐만 아니라 대중독재론 등의 파격적인 주장을 거듭하며 기존 진보진영의 역사관을 위협했다. 비판자인 백승덕씨가 이러한 입장에 서있음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논의를 전개하는데 있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글쓴이는 이러한 사조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우선 글쓴이는 “역사관”이라는 것 자체가 단순히 역사에 대한 입장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공이 역사학이라 그런지 모르겠으나 누구를 만날 때 가장 중시하는 것이 역사관이다. 아무리 대화가 잘 통하고 합리적인 사람일지라도 근본적으로 ‘역사관’이 다르면 종국에는 안 통하는 경우가 많다. 함께 진보 역사관의 재편에 대해 논하기로 했던 백승덕씨와 글쓴이가 이렇듯 공개적으로 논쟁을 하게 된 것 또한 “역사관”의 차이 때문이다. 이는 역사관에 단순히 역사 해석뿐만 아니라 인간관, 세계관, 정치관 등 한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역사관의 충돌은 기본적으로 한 사회의, 한 민족의, 한 공동체의 “관념세계”에서의 주도권에 대한 다툼이라 생각한다. 역사 해석은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객관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자신이 실증을 중시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역사 해석은 “슬프게도” 필연적으로 관념세계에서의 주도권 다툼에 일정 부분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증주의를 중시하던 故 이기백 선생님께서 편집인으로 발간하시던 <한국사 시민강좌>가 결과적으로 한국 좌파 민족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립적인 역사 해석이란 무릇 허망하고 심지어 기만적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갖고 있기에 백승덕씨가 믿는 근대성 비판이라는 사관도 단순히 하나의 사관으로만 해석할 수가 없다. 글쓴이는 노동당 당원으로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동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이 택할 이념은 맑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라 생각하며 구체적인 목표는 의회민주주의의 대표성 확대와 복지국가, 그리고 그를 위한 생산력 발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한다. 글쓴이에게 중요한 것은 이승만과 박정희가 얼마나 악독한 독재자였는지 제국주의가 얼마나 심한 착취를 했는지 ‘따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 한국 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역사학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는 생각이다. 역사란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아서 연구자를 비롯해 공부하는 사람의 문제의식에 포착되었을 때만 존재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문제의식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진보 진영은 현실의 존재하는 모든 문제를 식민통치와 이승만, 박정희의 독재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지난 100년의 역사를 통째로 부정해놓고 협력과 저항의 이분법적 관점에서만 역사를 바라본다. 그렇기에 보수 진영을 더 좋은 사회를 달성하기 위한, 정당정치에서의 경쟁자가 아니라 제거해야할 적대적 존재로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결국 진보 진영은 한국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구체적인 방향성조차 잡지 못하고 지난 대선에서와 같이 그저 반민주 대 민주라는 담론만 주구장창 사용하고 있다. “진보”라는 이름이 아깝다는 생각만 든다. 한때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보수 진영을 계도하던, 조국의 문명화를 추진하던 진보 세력은 어디 갔을까. 현재의 진보 세력은 한국 사회에서 “반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진보 진영의 이런 후진성으로 인해 보수 진영까지도 반공주의에 포섭되는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백승덕씨의 근대성 비판론을 살펴보자면 솔직히 말해 그가 진보 역사관 재편을 입에 담을 능력이나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는지 심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석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인 윤해동 교수님조차도 글쓴이의 입장에서는 비판의 대상이다. 백승덕씨와 윤해동 교수님의 연구자로서의 능력이나 문제의식을 비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연구자로서 두 분은 굉장히 뛰어나신 분들이라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작년에 나온 백승덕씨의 이승만기 징병제에 대한 담론적 분석을 시도한 석사 학위 논문은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으면 한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을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그것이 정치세력으로서의 “역사관”에 합당한가에 대해서는 심히 회의적이다.
예를 들어 윤해동과 임지현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의 “경제성장지상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한다. 임지현은 그가 자주 드는 사례로 과거사 청산에 대해 자신에게 인터뷰 왔던 한 기자가 내민 명함에 “소득 4만불 달성”이라고 적혀 있자 그러한 것을 안 하는게 과거사 청산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 어처구니없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박 정권의 경제성장지상주의 자체가 자신들의 부족한 권력 정당성을 메우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경제성장을 안 할 수가 있는가? 글쓴이는 한국이 현재 생산력이 낮은 국가이고 한국 사회가 현재 지니고 있는 문제의 많은 부분은 더 높은 수준의 시장경제와 경제발전 단계를 이룩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인 이상 우리는 경제가 가장 우선시되고 중시될 수밖에 없지 않나. 경제성장지상주의가 넘쳐서 문제가 아니라 “부족”해서 문제이다.
글쓴이가 보기에 진보 진영의 어떠한 정치세력도 어떤 발전체제를 만들 것인지 주장하지 않는다. 관성적으로 복지국가를 입에 담고 있으나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라든지 목표라든지 이러한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발전국가가 박정희의 죽음으로 폭력적으로 해체된 이후 어떠한 새로운 발전체제를 모색한 적이 있는지 의문스럽다. 아니 구체적으로 한국이 어떠한 경제발전 단계에 있으며 앞으로 어떤 발전단계에 도달해야 하는지 분석한 적이나 있는지 회의스럽다. 또 내셔널리즘의 폐해를 비판하는 것은 좋으나 내셔널리즘이 단순히 그렇게 비판된다고 극복될 수 있는 것인가?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글쓴이는 이와 같은 근대성 비판론이나 진보 진영의 지리멸렬의 원인의 상당수는 80년대 이후 급변하는 세계에 맞춰 역사관을 제대로 개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근대 자체가 또 하나의 야만이며 폭력인 것은 분명 맞다. 그러나 글쓴이는 근대는 스스로가 지닌 “합리성”으로 내재한 폭력성을 밝혀내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백승덕씨가 지적한 근대의 폭력성도 백승덕씨가 지닌 “합리성”으로 포착한 것이 아닌가. 백승덕씨가 정말 근대가 내재한 폭력성이 문제라 생각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지 단순히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해서 대체 뭐가 달라지는지 모르겠다. 백승덕씨가 든 예를 봐도 대체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근대 사법체계를 개혁하자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하자는 건가? 없애버릴 것인가? 근대성이 문제일지라도 근대성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은 결국 근대성이다.
글쓴이의 관심사는 과연 한국 사회가 어떤 식으로 “근대화”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떠한 문제가 있었는지 밝혀내고 어떻게 더 수준 높은 근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근대화가 없이는 근대성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글쓴이는 백승덕씨의 주장에서 지난 세기 일부 맑스주의자들의 오류를 발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엇을 하든 소용없다고, 상대를 개량으로 몰아붙이며 정치에서 손을 놓아버린 맑스주의자들의 오류를 글쓴이는 여기서 발견한다. 백승덕씨와 비슷한 근대성 비판론자들이 근대주의자라 비판하는 맑스주의자들과 이러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이 가엾은 “아름다운 영혼”들.
이러한 입장에서 글쓴이는 백승덕씨의 근대성 비판론은 연구자 개인의 사관으로서는 훌륭할지 몰라도 대안세력으로서의 진보의 역사 담론으로서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소위 말하는 “힙한” 매력은 있을지 모르겠다. 근대성 비판의 눈빛이나 포즈는 매혹적이다.
2, 구조냐 주체냐
일단 글의 서문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글을 서술한다고 했음에도 이와 같은 비판이 백승덕씨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로부터 많이 나온 것은 글쓴이로서는 약간 의외였다.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놓고 민주주의가 어떻게 정착되어 가는지 설명하는 과정에서 미국 등의 외부적 요인을 왜 안 끌어다 설명하냐고 비판하는 것은 조금 황당하다. 게다가 이 글은 현재의 자유민주주의의 입장에서 그것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왔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목표이지 그 당시의 “맥락”이나 “사건 자체”를 분석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그런 입장에서 백승덕씨의 비판이나 다른 분들의 비판 대부분은 답할 가치도 없는 것들뿐이다. 글조차 제대로 이해 못한 비판들에 답할 이유가 있을까. 그럼에도 백승덕씨의 비판에 성실하게 반론하는 것이 나름대로 글쓴이의 주장을 사람들에게 선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쓴이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국내학계에서 사건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 생각된다. 백승덕씨도 인정하듯이 어떤 시대를 움직이는 것이 구조인지 주체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수많은 논쟁이 있었으며 특히나 서구에서는 스탈린과 관련된 논쟁에서, 한국에서는 박정희와 관련된 논쟁에서 가장 치열하게 논쟁이 이뤄졌으며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
손호철 교수님을 비롯한 수많은 진보좌파 진영의 논자들은 박정희기의 경제개발이 이전의 농지개혁 등으로 인해 이미 “구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그 반대 진영에서는 박정희의 영도력 운운하며 주체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좌파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통합적으로 인식할 것인가? 사건사적 입장에서 인식할 것인가? 글쓴이는 사건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이에 대해 비판할 능력이 없다. 그러기보다는 글쓴이의 관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논의에 있어 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글쓴이는 역사를 봄에 있어 <루이 보나파르트와 브뤼메르18일> 서문에 나오는 맑스의 관점을 많이 차용한다. 그는 주체를 중심으로 보는 빅토르 위고와 구조를 중심으로 보는 프루동 모두를 비판하며 어떻게 나폴레옹 3세라는 ‘기괴한’ 범인凡人이 어떻게 영웅의 탈을 쓸 수 있었는지 프랑스의 상황과 구조를 계급투쟁이라는 주체적 요소와 연결시켜 분석하였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책은 “인간”이 인간의 역사를 만든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주체는 주체 스스로가 선택한 환경 하에서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맞닥뜨린 그리고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전수된 구조라는 제약 아래에서 만든다. 맑스에게 있어 문제는 어떠한 ‘객관적’ 구조가 존재했으며 그것에 의해 ‘주관적’ 주체의 행동이 어떻게 제약되었으며 주체가 그러한 조건들 하에서 어떻게 역사를 창조했는지를 밝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맑스의 관점을 차용해 한국 현대사를 본다면 이승만 외에도 다양한 주체가 존재했음은 분명하지만 정권의 수반자이자 최고 결정권자인 이승만을 중심으로 두고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우리는 이 “늙은 보나파르트”가 어떻게 ‘역사의 장난감’으로 전락해 스스로의 몰락을 재촉하는지를 느긋하게 서술하면 된다.
글쓴이의 이승만론을 더 펼칠 수 있으면 좋겠으나 이 글의 목적은 반론이기에. 우선 제목과 목차 자체가 글쓴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주위 분들 중에 몇 분은 편집자가 햄벨스의 안티가 아니냐는 지적을 하기도 했었는데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글쓴이가 제헌헌법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승만의 “업적”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뉴라이트 진영에서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자’로 ‘국부’로 규정하는 담론에 대한 대항담론으로서, 그 프레임을 정면 반박하기 위함이었다. 오직 미국적 ‘자유민주주의’만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부합하며 심지어 “문명사적”으로도 적합하다는 서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뉴라이트 담론에 대항해 건국헌법이나 당시의 정치인들이 지녔던 사회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적 지향을 드러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민족사회주의를 사회주의라 해석하고 사회적 시장경제이니 자본주의라 반박하는 백승덕씨의 주장을 보고 있자면 이승만을 자유민주주의자로 한정지으려는 것은 뉴라이트나 그나 마찬가지라는 생각만 든다. 어찌됐든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작업이 이승만에 대한 옹호로 읽힌다는 점에서 글쓴이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 보자. 백승덕씨의 지적대로 제헌헌법 제정에 있어 유진오 박사의 기여를 배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제헌의회의 “의장”이었던 사람이 누군가? 바로 이승만이다. 제헌의회에서 의원 198명 중 188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던 사람이 이승만이다. 이 사실은 왜 빼먹는가? 그가 의장으로서 헌법을 제정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헌법은 “이승만의 이름”으로 공포되었다. 결국 건국헌법의 진보성은 이승만의 동의하에 이뤄진 것이다. 게다가 기존 내각제가 아닌 대통령제로 결정된 것은 명백하게 이승만의 목적 아니었던가. 유진오에 비해 더 큰 점수를 준다 해도 과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승만과 유진오가 내각책임제를 놓고 다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둘의 지향점은 같았다. 그리고 내각책임제를 반대한 것은 이승만 뿐만이 아니라 진보진영이 경애해 마지않는 조봉암도 마찬가지였다. 유진오 박사의 회고에 의하면 조봉암은 이론적으로는 자신도 내각책임제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면 한민당계가 정권을 장악할 것이기에 반대한다고 그에게 사석에서 말했다고 한다. 이승만과 달리 참으로 권력 욕심이 없으신 분이시다. 아주 그냥 사심私心이 없으시다. 소위 친일지주 정당의 정권 장악을 막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이승만을 반反입헌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는 차고 넘친다. 글쓴이도 이를 모르는게 아니다. 학계에서 나오는 비판의 논거는 권영설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크게 4개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로 입헌과정에 있어 정부형태를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변경할 때 무리하게 강요했다는 점, 둘째로 대통령제에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무분별하게 혼합함으로써 국가기능의 비효율성을 증가시켰다는 점, 셋째로 재임 중의 두 번의 개헌이 모두 그 내용이나 절차에 있어 위헌적이었으며 그 주된 동기가 장기집권 내지 종신집권의 기도였다는 점, 마지막으로 12년의 재직기간이 “천인공노할” 인권유린, 언론탄압, 정치적 권리의 억압, 선거과정에서의 부정부패가 있다. 이 모든 주장들은 나름대로의 합리적 근거를 지니고 있다. 글쓴이도 그것을 모르지 않고 또 인정한다.
백승덕씨의 민주주의 정착에 대한 비판도 이러한 4가지 비판과 상당 부분 중첩된다. 사례를 하나하나 꺼내서 풀자면 끝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난 글에서 말했듯이 대통령제로의 이양은 ‘미국화’라는 입장에서 평가받아야 하고 그러한 개헌의 결과가 뒤의 역사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제를 통한 강력한 리더십의 존재를 생각한다면, 특히나 일본과 비교했을 때, 과연 그것이 비효율성만을 지니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다음으로 두 번의 개헌 과정에서 나온 비민주성은 사실 변명의 여지가 거의 없는 그의 과오이다. 그러나 1차 개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자세한 것은 조용중의 <대통령의 무혈혁명>과 김일영의 “전시 정치의 재조명―부산 정치 파동의 다차원성에 대한 복합적 이해”(<해방전후사의 재인식>)를 참고하라 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2차 개헌, 그러니까 사사오입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마지막 비판에 대해서도 글쓴이는 적극 공감한다. 그러한 부정부패와 인권유린이 이승만의 몰락을 재촉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 특히나 그가 과거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 6개 강령 중 하나로 “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면 그의 집권기동안의 이러한 비민주성과 반인권적인 면모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상당히 곤혹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글쓴이는 지난 글의 초두에서 이러한 이승만의 비민주성과 반인권적인 부분에 대한 비판을 했으며 그것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글의 목적이 그러한 비판이 아니라 현재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다음으로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백승덕씨의 지적에 공감하면서도 생각이 다르다. 말하는게 입이 아픈데 이승만은 분명 자기 자신밖에 모르며 권력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스스로가 이루고 싶어했던 것을 모두 이룬 그의 모습을 보면 이렇게 수첩에 “참 나쁜 사람”이라 적을만한 사람치고 한국사에서 그에 필적할 하늘의 사랑을 받은 인물은 이명박 외에는 없지 않나 싶다. 그건 글쓴이도 안다. 박명림의 “1950년대 한국의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 민주주의 ‘제도’와 권위주의 ‘실천’의 역사적 조건”(<1950년대 남북한의 선택과 굴절>)에도 나오지만 그는 분명 국민을 계도대상으로 인식하였으며 대의민주주의를 우회해 국가와 인민의 직접적 연결을 통한 권위주의적 또는 국민(투표)민주주의 특성을 보여준 것은 분명 사실이다. 여담이지만 글쓴이는 이와 같은 특성이 이승만 개인만의 것이 아니며 조선시대부터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고 민주정권 10년이나 그 이후의 촛불집회 등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백승덕씨의 생각과 달리 박명림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1950년대의 교육부문의 성취는 이승만의 업적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물론 백승덕씨의 지적대로 한국의 높은 교육열 등이 다양한 요인이 그 원인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박명림도 그것을 적극 인정한다. 하지만 이승만은 박명림의 표현을 옮기자면 “정치인이나 행정가이기 이전에 교육자이자 당대 최고 수준의 학자”였다. 그렇기에 박명림은 “교육 기적에 해당하는 성취와 변화를 빌어 그를 교육(자) 정치인, 또는 학자 대통령, 교육 대통령으로 불러야 한다고 믿는”다. 이젠 박명림도 뉴라이트인가?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도 뉴라이트의 소굴이 된 것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 박명림은 이승만이 그가 의도를 했든 의도하지 않았든지 간에 국가건설과 국민형성이라는 목표를 충실하게 달성했다고 지적한다. 글쓴이는 이러한 박명림의 주장에 이어 바로 그러한 “발전”으로 인해 이승만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농지개혁의 결과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나의 주장이 이승만 “옹호”로 보인다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해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찌됐든 답할 가치가 없다 생각하면서도 백승덕씨의 비판에 답한 것은 그를 그 대표격으로 생각해서이다.
결코 무시해도 되는 문제의식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하며 그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상대의 주장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주장의 타당성을 따지는 것이다. 그것이 “합리성”을 지닌 근대 사회의 시민으로서 할 일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후진사회인지라 정치 관련 글을 쓸 때 논지로 승부를 내는게 아니라 내가 뉴라이트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를 해명해야 하는 이따위 글을 써서 승부를 내야 한다.
글쓴이는 스스로가 좌파라 하기에는 지적 수준 등이 너무 뒤떨어진다고 생각해 좌파를 자처하지는 않으나 객관적으로 개량 좌파정도라고 주위에서 말들을 한다. 가뜩이나 욕을 많이 먹는 입장에서 “개량”이라는 말이 가져올 오해를 생각해 주저되지만 어찌됐든 그정도의 스탠스를 갖고 있다. 하지만 글쓴이는 굳이 역사를 바라보면서 “급진적인 대답”을 원하지 않는다. 글쓴이에게 급진성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다는 말과 동일하게 들린다. 그런 문제의식은 백승덕씨나 열심히 탐구하시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글쓴이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하면 한국 좌파 진영이 정권을 잡을 수 있으며 사람들을 좌익 쪽으로 포섭할 수 있냐는 것에 있다. 글쓴이는 글쓴이대로 백승덕씨는 백승덕씨대로 할 일을 하면 되지만, 스스로가 진보 역사관의 재편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 너무 “급진적인 대답”이다.
양 극단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입을 벌리기가 힘든 사회다. 양 극단이 아닌 중간 어디쯤에 해당하는 얘기를 했다가는 한쪽 편의 사람들에겐 '빨갱이다' 소리를 듣고 다른 편의 사람들에겐 '친일파 일베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양 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사실 같은 부류다. 김지하, 김문수 같은 사람들을 봐도 그렇다. 극좌에서 극우로 극우에서 극좌로 변하기는 쉽다. 종교적 광신에 빠지는 사람들의 특성도 비슷하다. 믿음의 대상은 쉽게 바뀔 수 있다. 이런 양극화 분위기가 심해지는 것 같아 우려스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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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도망' 글을 쓰고 이런 일을 겪으며 나도 후회한 점이 있다. 제목부터 좀 자극적으로 달았던 건 사실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었고, 놀라게 하고 싶었다. 친이승만-반이승만 프레임에 익숙한 사람들이 오해할 만도 했다.
특히 한강다리 얘기는 좀 더 확실하게 말했어야 했다. 다리 폭파는 해야 했지만, 그 위에 사람들을 피하게 하지 않고 너무 빨리 폭파한 건 잘못이라는 얘기를 본문에도 적긴 했지만 그래도 좀 더 강하고 확실하게 말했어야 했다. (덧붙이자면, 군인과 민간인이 다리 위를 지나고 있는 가운데 다리를 폭파한 게 이승만 본인의 막무가내 명령에 의한 참사였는지, 참모총장이 독자적으로 내린 명령이었는지, 아니면 현장 지휘자 스스로의 판단 미스 혹은 지휘계통 어딘가의 미스커뮤니케이션때문이었는지의 여부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분 말씀대로, 유비가 신야에서 백성들 이끌고 탈출하듯이 이승만이 서울 시민들을 몽땅 데리고 어디론가 피난갔어야 하는 건 아니다. 내 원문을 읽고도 이 점을 이해할 수 없다면 내가 가진 말주변으로서는 더 이상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악플, 악성댓글엔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생각이다. 댓글을 다는 건 개인이지만 그 댓글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건 해당 언론사(포털 포함)의 행위다. 댓글의 내용도 기사를 퍼블리싱하는 언론사(포털 포함)가 당연히 책임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은 한국의 그 어떤 온라인/오프라인 언론사와 포털도 댓글에 책임지고 있지 않은데, 이런 업계 관행이 한국 사회를 전반적으로 저질화시키고 있다.
댓글은 기사보다도 파워풀하다. 특히 초반에 달리는 몇 개의 댓글이 이후 논의의 수준과 방향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국가정보원이 불법인 줄 알면서도 직원들을 시켜 인터넷에 문재인 후보를 공격하는 댓글들을 달고 추천을 눌렀던 것이다.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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