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11

03 서울대 김윤식 교수의 ‘이광수 비판’을 批判한다. 이중오(뉴욕주립대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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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김윤식 교수의 ‘이광수 비판’을 批判한다.
이중오(뉴욕주립대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TJYKA 200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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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수 담론의 진정한 부활을 위하여

그때 그곳에서 그가 뼈저리게 경험했던 것은 두 가지 동포들의 삶의 모습이었다. 첫째는 적빈 속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동족들의 실상이었고 둘째는 제국주의에 병탄된 조국을 해방하려는, 명색이 지도자들인 사람들이 사분오열 찢겨 상쟁(相爭)하는 이전투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착상에 명료한 윤곽을 부여하여 그의 사상 혹은 비전으로 결정화(結晶化)시키도록 이끈 것은 안창호였다. 그와 1년여의 광음을 함께 보내면서 벌인 숱한 대화와 토론의 결과 춘원은 안창호의 점진적 개혁 사상이 동포들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합리적인 운동방향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민족개조론’의 골격은 내가 주장하는 대로 러시아 유랑 시절 착상된 것이며 아직까지도 그의 정신적 대부였던 도산의 영향권 안에 놓였을 때의 사상적 산물이라고 본다면 그 책에 수반되는 모든 비난들, 가령 총독부의 사주에 의한 집필이며, 친일 반역을 담보하는 미명과 곡학아세(曲學阿世)의 표본이라는 등 이 저서를 겨냥하여 쏟아내는 모든 비난들은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민족개조론’의 사상적 근원은 두 종류의 서양 사상, 즉 기독교 사상과 다윈의 진화론의 세례를 받고 탄생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이광수는 이 사상의 발원지가 상하이(上海) 흥사단 운동의 지도자 안창호임을 앞머리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르봉의 이론에 따라 우리 민족에게 가변적인 특성과 불변적인 특성이 있음을 구분하고 전자가 특히 조선조에 들어와 부정적으로 굴절되어갔음을 개탄했다. 그래서 그 굴절된 양상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우리 민족이 앞으로 고등민족으로 목적론적으로 진화해 나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부정적으로 변질된 우리의 민족성을 다시 새롭게 개조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춘원 연구의 제 1인자이며 한국 평단의 대부로 알려진 서울대 김윤식 교수에 의해 틀지워지는 ‘민족개존론’에 대한 나의 불만을 털어놓고자 한다. 내가 굳이 김윤식의 ‘민족개조론 비판’을 논의 상대로 삼은 이유는 그의 비판이 내가 우려하는 비판의 부정적 요소가 곳곳에서 드러나는 대표적인 한 사례로 보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올해 개정 증보판까지 출판된 김윤식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라는 방대한 평전은 그가 바친 세월로 보나 자료의 양과 분석의 치밀함으로 보나 자타가 공인하는 이광수 연구의 결정판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권위있는 비평가의 업적에서조차 옥석은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어 이광수에게 접근하는 우리의 시야를 뿌옇게 흐려놓고 있다.

가끔은 실로 그가 과연 이광수 연구의 자격을 떠나 도대체 양식있는 평론가의 기본을 갖추고 있는지 의구심이 생기는 대목마저 보인다. 물론 이런 발언을 겁없이 쏘아대는 나의 김윤식 비판이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가 만들어내는 기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광수 담론에는 기형이 필요하다. 정형들은 죄다 김윤식이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권위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광수 담론을 새로운 문맥에서 부활시킬 수 있는 것은 행간과 여백으로 밀려난 비주류의 시각들, 비(非)전문가의 열정들이다. 그것들만이 저 강고한 편견과 선입관을 깨고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을 그 본래의 맥락 안에서 독해해낼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만이 친한의 탈을 쓰고 우리에게 은근히 엽전의식을 부추기는 일본인들의 한국 비판서를 엄밀하게 변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 김윤식이 저지른 잘못들

이제 김윤식이 저지른 오류를 살펴보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은 다음과 같은 ‘변언’으로 시작한다.

‘나는 많은 희망과 끓는 정성으로 이 글을 조선 민족의 장래가 어떠할까, 어찌하면 이 민족을 현재의 쇠퇴에서 건져 행복과 번영의 장래에 인도할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형제와 자매에게 드립니다. 이 글의 내용인 민족 개조의 사상과 계획은 재외 동포 중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내 것과 일치하여 마침내 내 일생의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외다. 나는 조선 내에서 이 사상을 처음 전하게 된 것을 무상한 영광으로 알며, 이 귀한 사상을 선각한 위대한 두뇌와 공명한 여러 선배 동지에게 이 기회에 또 한번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원컨대, 이 사상이 사랑하는 청년, 형제 자매의 순결한 가슴 속에 깊이 뿌리를 박아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이다.’(신유 십일월 십일일 태평양회의가 열리는 날에, 춘원)

이 ‘변언’부터 문제가 된다. 다음은 김윤식의 설명이다.

“그 당시 3·1 운동을 치른 많은 젊은이들은 생활계층이 아니라 이념형 지식층이기 때문에 비록 국내에서 어쩔 수 없이 허무주의적 상태에 빠져 있지만 이념만은 바람을 먹고 이슬 속에 잠자는 해외 망명객 쪽에 향해 있었다. 그런 망명객들이 춘원으로 하여금 ‘민족개조론’을 쓰도록 종용했다는 춘원의 주장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총독부 밀정이 아니고는 감히 해외 지사를 그토록 모독할 수 없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설령 그 당시 이광수가 자신의 귀국으로 ‘변절자 춘원’이라는 소문에 휩싸여 있었다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적어도 이 변언에서는 해외 지사들이 이광수로 하여금 이 글을 쓰도록 종용했다는 의미는 포착되지 않으며, 더군다나 총독부 밀정으로서 이 일을 감행했다고 느낄 만한 어떤 대목도 발견되지 않는다. ‘민족개조론’을 발표할 당시는 이광수에게 힘을 실어줄 만한 지지층이 없었다. 그 주위에는 사회주의자들, 보수적 기득권층, 무위도식하는 식자들, 그리고 다수를 이루는 무지한 일반 백성들이었다.

이른바 엘리트 양성론을 표방하는 춘원의 주장에 사회주의자들이 찬성할 리 없었고, 이미 그의 소설·논설 등을 통해 비친 구습타파에의 소신이 보수적 기득권층에게 반가울 리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으로서의 역할 운운하는 그의 논조는 하는 일 없이 우쭐함에 빠져 있는 식자계층에게는 귀찮은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 당연하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에 바쁜 대다수 무지한 민중들은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말이 관념적으로만 들렸을 것이다.

그 당시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민족개조론’에 대한 비판들을 김윤식은 아무런 제한이나 유보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설사 백보를 양보하여 그 당시 젊은이들이 ‘변절자 춘원’이라는 틀에 얽매여 그런 식으로 독해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김윤식은 지나치게 나아가고 있다.

춘원이 ‘민족개조론’이 재외동포들에게서 나온 것이지 자신의 독단적인 생각이 아니라고 한 듯한 논법을 쓴 것은 일종의 기만책이 아니고 무엇이랴.

여기서 재외동포란 다름아닌 그 당시 상하이에 머물러 있던 이광수의 정신적 지주 도산 안창호와 그가 이끄는 흥사단 조직을 이름이다. 민족개조론 이전의 그의 저술들에서 주장되고 있듯이 그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도산과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역사적으로 민족개조운동이라 일컬어질 수 있는 사례를 열거하며 그 실패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이어 갑신정변 이래 조선의 개조 운동의 성과와 실패 원인을 분석하면서 단체의 조직 운영이 필수적이며, 조선 민족 쇠퇴의 근본 원인을 도덕적 원인으로 생각하였기에 조선의 개조는 도덕적 개조, 정신적 개조가 근본임을 밝히고 있다.

그가 ‘민족심리학’의 저자인 르봉의 학설을 인용하는 까닭이 다른 데 있지 않다. 조선 민족의 근본적 성격은 좋으나 그 부속적 성격이 일시적으로 피폐한 것이므로 조선민족의 개조는 매우 용이하며 그 가능성이 풍부함을 논증하려는 데 이용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김윤식의 눈에는 이 또한 못마땅하게 보인다.

‘춘원은 민족개조론에서 프랑스의 제국주의 학자 르봉의 학설에 기대었다. 한국 민족성의 못남을 낱낱이 들추어내 이를 개조해야 된다는 논법이 제국주의 학자들의 민족이론임을 그가 알아차릴 능력까지 없었음은 새삼 이 자리에서 말할 것도 못된다. 영국·프랑스·일본 등의 우수 민족은 한국·중국 같은 저능한 민족들을 지배할 수 있다는 논리를 춘원은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제국주의 학자들이 식민지 지배방식을 논리화한 민족 이론을 춘원은 겁도 없이 그대로 수용하여, 한국 민족의 저능성을 논증하기에 신바람났던 꼴이었다.’

이것이 한 시대의 인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려 한다는 권위있는 비평가의 논조의 일부분이다. ‘민족개조론’을 읽어보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이 글은 이광수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게 했는가. 친일의 논공행상을 위해 민족성을 볼모로 하는 천하의 매국노로 비치지 않겠는가.


과연 그런가. 독자들이여, 부디 한번 “민족개조론”을 직접 읽어봐 주기 바란다. 과연 춘원이 그런 통절하는 심정으로 써내려갔던 ‘민족개조론’에 내려지는 저 권위있는 비평가의 평어가 과연 온당하게 과녁을 꿰고 있는지 직접 판단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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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光洙 민족개조론 - 위키문헌,  한글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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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김윤식의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이광수가 ‘겁도 없이 받아들인’ 민족성 이론이 어떤 이유에서 터무니없는 헛소리인지 먼저 논증해 보여야 한다. 내가 이해하는 한 이광수는 결코 한국 민족의 저능성을 논증하기에 신바람을 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어떻게 하면 과거의 영예로운 민족정기를 다시 회복해낼 것인가에 고심참담했을 뿐이다.

그가 우리 민족의 근본적 성격이 갖고 있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여과 없이 드러내 주고 있는 까닭은 동족과 이 민족에 대한 저주와 증오심에서가 아니다.

그가 숱한 과거의 전적들을 인용하면서 제시하는 한국 민족의 근본적 성격은 ‘관대, 박애, 예의, 염결, 자존, 무용, 쾌활’이다. 이러한 성격이 잘못 발휘되어 나타나는 결점이 ‘허식, 나타, 비사회성, 경제적 쇠약, 과학의 부진’등이라는 것이다. 이광수가 르봉 박사의 이론을 빌어온 것은 민족성을 논하는 그의 체계뿐이다. ‘민족개조론’을 다시 한번 인용해 보자.

‘민족적 성격에는 근본적 성격과 부속적 성격이 있고 부속적 성격은 가변적이나 근본적 성격은 거의 불가변적이니 오직 유전적 축적으로 지완한 변화가 있을 뿐이라 합니다.… 그래서 박사는 주위의 사정, 무슨 대사변, 또 교육은 어떤 민족의 부속적 성격을 변하게 할 수 있으되 그 근본적 성격을 변하게 할 수는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부속적 성격은 일시 변하더라도 얼마를 지나면 다시 그 근본적 성격이 우등하게 된다고 합니다.…

또 박사는 민족의 성격을 해부적 성격과 심리적 성격의 둘로 나누어, 우리가 흔히 민족성이라고 일컫는 바를 심리적 성격이라 하고, 체질의 특징을 해부적 성격이라 합니다. 그래서 박사는 일 민족의 해부적 특징의 근본적인 몇가지가 변할 수 없는 모양으로 일 민족의 심리적 특징, 즉 민족성의 근본적인 몇 가지도 변할 수 없는 것이라 합니다.’


이광수도 이미 이 이론에 따를 때 빠질 수 있는 함정을 미리 앞질러 내다보고 있다. 우리 민족의 부정적 성격에 대한 자조감에 빠질 독자들을 향해 ‘만일 그렇다 하면 우리는 일종의 실망에 빠지게 됩니다. 민족성의 개조란 불가능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생깁니다’ 하며 최대치의 반론적 여부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독자들을 위해 이광수는 가장 최저치의 전제에서 설득을 시도한다. 이른바 제국주의 학자의 식민 지배 합리화를 위한 이론의 전제를 인정하는 선에서 출발한다 해도 민족성의 개조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려는 것이다.

‘…만일 민족의 근본적 성격도 변할 수 있는 것이라 하면 다시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르봉 박사의 설과 같이 민족의 근본적 성격은 불가변의 것이라 하고 민족의 개조할 방법을 연구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는 두 가지 경우가 있겠습니다.(1)근본적 성격은 좋지만 부속적 성격이 좋지 못한 경우와 (2)근본적 성격 자신이 좋지 못한 경우…’

이광수는 먼저 (2)의 경우에서도 개조할 길이 있음을 논증하고 다음으로 우리 민족의 경우는 (1)에 해당됨을 주장하며 개조의 가능성이 실로 풍부함을 주장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그가 유전되어온 우리의 전적들을 인용하며 내세우는 조선 민족의 근본적 성격은 다음과 같다.

‘남을 용서하여 노하거나 보복할 생각이 없고, 친구를 많이 사귀어 물질적 이해 관계를 떠나 유쾌하게 놀기를 좋아하되, 예의를 중히 여기며 자존하여 남의 하풍(下風)에 입(立)하기를 싫어하며, 물욕이 담(淡)한지라 악착한 맛이 적고 유장(悠長)한 풍이 많으며, 따라서 상공업보다 문학·예술을 즐겨하고, 항상 평화를 애호하되 일단 불의를 보면 ‘투사구지(投死救之)의 용(勇)을 발하는 사람이외다.’

반면 이러한 민족성이 갖고 있는 결점으로 그는 허위와 나타와 비사회성과 경제적 쇠약과 과학의 부진을 들면서 이러한 요소가 조선 민족을 금일의 쇠퇴로 이끈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민족성의 모습은 이광수로 하여금 민족 개조의 가능성과 용이함을 확신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다음 순서는 당연히 이러한 개조를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 제안이다. 이광수는 8항목의 구체적인 개조 내용을 말하고 있거니와 이를 줄이면 덕(德) 체(體) 지(知)의 삼육(三育)과 부의 축적, 사회 봉사심의 함양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개조 내용의 근본되는 사상은 이른바 무실(務實)과 역행(力行)이다.

‘무실이란 무엇이나 거짓말을 말자, 속이는 일은 말자, 말이나 일에 오직 참되기를 힘쓰자 함이요, 역행이라 함은 공상을 말자, 공론을 말자, 옳은 일이라고 하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였거든 말하였거든, 곧 행하기를 힘쓰자 함이외다.’

나아가 그는 무실과 역행과 사회봉사심으로 축약되는 개조의 이상을 실현할 구체적 방법으로 ‘동맹’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렇듯 개조의 가능성이 충분하고 또 그를 위한 구체적 대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에는 당시 일제하에서의 조선 민족의 현실은 몹시도 피폐함 그 자체로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이광수에게 조국은 회복할 수 없는 몰락으로의 급전직하(急轉直下)의 순간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결론에서 조급해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채 다소 격한 어조로 어서 구체적인 개조의 실천으로 가자고 외친다.

‘나는 차라리 이 조선민족의 운명을 비관하는 자외다.… 우리는 과연 순치 못한 환경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피폐한 경우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구제할 길은 무엇인가? 오직 민족개조가 있을 뿐이니 곧 본론에 주장한 바외다.

이것을 문화운동이라 하면 그 가장 철저한 자라 할 것이니, 세계 각국에서 쓰는 문화운동의 방법에다 조선의 사정에 응할 만한 독특하고 근본적이요, 조직적인 일 방법을 첨가한 것이니 곧 개조 동맹과 그 단체로써 하는 가장 조직적이요, 영구적이요, 포괄적인 문화운동이외다. 아아, 이야말로 조선 민족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외다.’


내가 이해하는 하나의 텍스트로서 ‘민족개조론’에는 어떤 친일의 흔적도, 제국주의 앞잡이의 혐의도 찾아낼 수 없다. 그런 것들은 오직 나중에 친일의 빨간 안경을 썼을 때 비로소 채색되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민족개조론’은 그 자체로서는 하자가 없는 논문이다. 진정 조국을 사랑하는 우국지사라면 응당 쓸 수 있는 그런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가령 그 표지에 이 광수라는 이름을 지우고 도산 안창호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더라면 그 논설은 지금 다른 운명을 맞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조국이나 민족의 위대성만 소리치며 찬양하는 선각자들은 없다. 조금씩은 톤과 리듬을 달리하면서 약점을 반성하고 다시는 어떤 비극이나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자는 계몽적인 제언을 수반하게 되어 있다. 물론 한 텍스트는 그것이 놓이는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심리적 콘텍스 위에서 정밀하게 분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빠질 수 있는 맹점은 그러한 환원주의가 한 텍스트가 고유하게 가질 수 있는 모든 가치를 산산이 흐트러뜨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텍스트가 맞을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운명이다. 불행하게도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그런 불행한 운명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 “원효대사”를 통해 이광수가 의도했던 것은?

누가 봐도 너무도 철저했던 이광수의 친일 행각에 반하여 결정적으로 그의 의도를 가늠하게 해주는 사례는 “원효대사”를 집필했다는 사실이다. 원효대사는 춘원이 친일을 본격적으로 공공연하게 표방하기 시작한 이후 최초로 발표한 소설이다. 그런 만큼 이 작품을 쓰는 춘원의 감회는 특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변절자 춘원의 심리세계가 이 작품 안에 어떤 형태로든 투영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광수의 “원효대사”가 “매일신문”에 연재되는 때는 실제로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돌진하면서 총독부 역시 그동안 간간이 보여주던 유화책을 강성 억압정책으로 대체해 갔다. 조선어 전면폐지, 창씨개명, 신사 참배 등 악랄한 식민정책이 기승을 부렸던 것도 이 무렵이었고 3만8,000명의 숙청 리스트에 대한 설이 이런저런 체널로 흘러 나왔던 것도 이즈음이었다.

실제로 전쟁이 계속되고 식민시대가 더 길게 이어져간다면 이제 우리의 언어, 훈민정음, 그리고 우리의 입술에서 정겹게 회자되던 순이 돌이 덕이 철이 등등의 이름조차 영영 사라져버릴 이 문화적 위기는 겉으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정치적 위기보다 사실은 더 절박한 것이었다. 적어도 당대의 지성인들은 이 사실을 심각하게 고뇌했다. 언어를 빼앗긴다는 상황이란 정신 자체를 통째로 몰수당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광수의 “원효대사”는 바로 이 시기에 당당한 우리말로 그것도 순화될 대로 순화된 아름다운 모국어로 집필되었다. 그는 확실히 이 작품을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예술적 역량으로 결정화시켜 놓으려 애썼던 흔적들을, 남겨진 자전적 자료들을 통해 도처에서 보여주고 있다.

만일 바늘로 찌르면 일본피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 이광수의 레토릭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일본 피가 나올 정도의 친일로, 완전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이루게 되는 것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왜 그가 자신의 능력을 이미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던 일본어로 발표하여 일본 문단을 기웃거리지 않았을까. 왜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마지막 예술적 천분을 짜내어 한자 한자 치밀한 고증을 거치면서 빛나는 울림과 다채로운 뉘앙스들을 가진 모국어로 그의 작품들을 만들어 갔던가.

이광수 연구가 김원모는 그의 연구논문 ‘이광수의 친일과 민족보존론’에서 이 작품 안에 나타나는 이광수의 이런 노력에 주목하여 ‘이광수의 친일은 민족 보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일지 모른다’는 가설을 제시한 바 있다. 그의 주장대로 일본은 이광수를, 이광수는 일본을 서로 이용해야 할 필요가 너무 절실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밖에는 달리 “원효대사” 집필 사실을 설명할 수 없어 보인다.

이광수의 친일, 이것은 너무도 단순하다. 한 용의자가 확실한 증거들을 통해 정당한 사법절차를 거친 끝에 유죄로 판결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될 권리를 갖는 것처럼 이광수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새로운 평결의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일본 식민 제국주의의 역사가 청산되었다. 그러나 그 상흔은 우리의 의식 안에 남아 우리를 지속적인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우리를 끝없이 황망하게 하는 친일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다.


◎ 평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친일, 이 주제를 낭만적인 해변에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주고받는 한담의 소재로 가볍게 접근하는 한국인은 없다. 이 주제만 만나면 모든 한국인들의 내분비기관은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고, 안면 근육은 한껏 긴장하며, 시신경은 경련까지 일으키며 일종의 집단적 과민반응 상태에 빠진다. 심지어 친일은 우리에게 학문적으로 접근할 객관적인 주제로 돼 본 적도 없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에게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무엇엔가 쫓기듯 언제나 황망하였고 또 어떤 눈길이 감시하기나 하듯이 항상 과장된 몸짓을 보여왔다. 그래서 그것이 이상한 흑백논리에 휘말려 끝없이 소모적인 논쟁으로 일관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혐의조차 가져보지 못했다. 아니 그런 시도 자체가 금기시되어 왔다. 과민할 대로 과민해진 상처가 우리에게서 그렇게 할 용기를 가져가버린 것이 아니라 이것이 용기냐 아니냐를 생각할 분별력 자체를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친일은 흑백개념이 아니다. 그것 또한 우리의 심리, 그리고 그러한 심리의 반영으로서의 모든 삶이 그러하듯이 흑과 백 사이에 놓이는 명도 차이만을 갖는 무한한 회색의 스펙트럼 중의 어딘가에 위치지워질 수 있는 어떤 것일 뿐이다. 회색은 조금씩 검은색일 뿐 아니라 조금씩 회색이다. 차이는 이 ‘조금씩’에서 보여주는 정도의 다름뿐이다. 아니, 인간 자체가 파스칼의 표현처럼 중간자에 지나지 않는다. 공간적으로는 무한대와 무한소의 중간이고 시간적으로는 영원과 순간의 중간이며 윤리적으로는 천사와 악마의 중간자이다. 인간 자체가 중간자라는 회색의 숙명 속에 던져져 있는 것이 아닐까.

이광수를 변절자, 친일파라고 선언하고 그 틀 속에서 한 지성인의 생애와 작품을 통틀어 비난하는 데는 이름있는 학자들의 필력까지 필요하지 않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시정잡배들의 걸쭉한 입술로 족하다. 이제 모든 지성인들은 이광수 담론이라는 미묘한 현안 앞에서 자신들의 양심과 지성을 반추해 봐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광수는 한 실존적 실존의 이름이기에 앞서 우리 각자가 떠 맡아야 할 한국인의 역사적 자아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 한국적 자아는 격동기의 역사를 집약하고 현재의 우리 자신으로 살아 남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나는 이 말이 몹시 격한 쟁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안다. 모두가 죄인이므로 모두가 모두에 대해 면죄부를 주자는 말이 아니다. 단죄의 목소리를 신중하게 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은 내 자신을 단죄하는 언설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그러한 단죄의 대상에서 나 자신이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 시작해야 할 이광수 담론에서 우리는 먼저 무죄 추정의 관용에서부터 풀어나가는 매듭의 한 해결방식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칼 가진 자가 그 칼로 결박된 죄인을 처단하는 일은 쉽다. 그것은 망나니만 할 수 있는 지난사가 아니다. 형편에 따라서는 누구라도 그런 일을 떠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좀 더 성숙한 위치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검토하고 나아가 미래의 구체적 전망을 제시해야 할 때가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잊고 무엇을 잊지 않고 있는지.

이 땅을 그토록 처참하게 유린했던 일본은 잊고 그 격동기에 심약한 문사, 아니 어쩌면 너이고 나이고 우리 모두일 수 있는 한 인물의 죄과에 대해서는 잊지 않고 그 이름을 후렴구처럼 외치고 있지 않은지. 그러한 일종의 집단행위에 은근히 동조함으로써 자신은 엽전족에서 열외된다는 특권의 환상을 남몰래 즐기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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