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12

알라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알라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은이)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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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는 개인으로서는 전인격체의 이상적인 인간상이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독점적 지배층이자 유일한 지식인 계층이었고, 정치적으로는 500년 조선왕조의 오랜 실세들이자 주인공들이었다. 따라서 어느 특정 사안만을 드러내어 마치 그것이 선비의 전체 이미지인 것처럼 단정하고 평가해버리면, 선비의 실체를 설명하는 데에는 과장과 왜곡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에 저자는 선비들이 중요시한 덕목, 유교 이론, 그들의 생활 모습, 그들이 중요시한 가치관, 그들에게 주어진 지위와 직책에 대한 임무 수행 능력, 그리고 그들이 지배한 조선의 실상 등을 종합해 선비들을 분석하고 평가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그동안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 있던 기존의 선비 평가를 뛰어넘어 선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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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선비 천국

1장 역사를 보는 눈
쉽고도 힘든 인물 평가 | 너무 일방적인 선비 평가 | 선비정신의 탄생

2장 선비 덕목과 조선 선비의 실상
선비의 조건 | 지조와 의리 | 청빈과 안빈낙도 | 공선후사와 극기복례 | 조선 선비의 실상

3장 검증된 바 없는 유교 이론
수신·제가·치국·평천하 | 덕치와 교화 | 상고주의 | 왕도와 신도 | 군자와 소인

4장 선비가 꿈꾼 나라, 그들이 만든 나라
차별의 나라: 서얼 | 또 차별의 나라: 노비 | 새로운 차별의 나라: 여성 | 철저한 차별의 나라: 명분 | 특권층의 나라: 양반 | 소인배의 나라: 작당 | 가난한 나라: 곤궁 | 모화의 나라: 소중화 | 상복의 나라: 장례와 제사

5장 유교적 선비와 21세기 대한민국
유교사회: 조선 버전의 세계화 | 트라우마: 식민지 경험 | 무서운 도박: 유교 부흥 운동 | 본말전도: 유교자본주의 | 견강부회: 유교민주주의
소통의 부재: 선비권력의 유산

에필로그: 이제 그만 선비를 역사로 놓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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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9 : 그렇다면 조선 사회가 추구한 선비의 덕목이자 조건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다른 말로, 선비란 어떤 사람이었나? 조선시대의 정리는 이이가 참 선비의 의미로 말한 ‘진유’와 홍대용이 역시 같은 뜻으로 말한 ‘진사’에 잘 드러난다. 곧, 재화에 대한 물질적...
P.68 : 영남사림파의 종장의 위치에 오른 김종직은 선산과 밀양과 금산 일대에 전답을 보유했으며, 소유한 노비는 그 전답에 따라 사는 외거노비를 제외하고도 뜰에 가득할 정도로 많았다. 정여창도 전택이 서울과 함양과 악양 등지에 널려 있었으며, 소유한 노비도 수백 명에...
P.103-104 : 이렇듯, 유교 정치 이론의 근간이랄 수 있는 덕치와 교화 이론은 3,000년에 가까운 긴 유교 역사 중에 그 효과가 백일하에 드러난 실례가 없다는 점과 공자와 맹자가 말한 덕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탓에 적어도 정치 무대에서는 통할 수 없다는 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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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계승범
 최근작 : <중종의 시대>,<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정지된 시간> … 총 5종 (모두보기)
 소개 :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원(외국어)고등학교에서 7년간 역사교사로 근무했다. 1990년에 공부를 다시 시작해 서강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워싱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워싱턴대학교, 시애틀대학교, UCLA에서 한국사와 동아시아사를 가르쳤다. 2008년에 귀국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의 HK연구교수를 거쳐 2012년부터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조선시대 양반 지식인들의 중국관과 유교의 한국적 특성이 결합되어 조선 사회를 형성해가는 과정과 그 역사적 유산이 현대 한국 사회에 전이되어 나타나는 양태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지된 시간 : 조선의 대보단과 근대의 문턱>(2011)과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2009),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2011)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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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선비, 그 고상한 이미지에 대한 발칙한 검증

선비는 개인으로서는 전인격체의 이상적인 인간상이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독점적 지배층이자 유일한 지식인 계층이었고, 정치적으로는 500년 조선왕조의 오랜 실세들이자 주인공들이었다. 따라서 어느 특정 사안만을 드러내어 마치 그것이 선비의 전체 이미지인 것처럼 단정하고 평가해버리면, 선비의 실체를 설명하는 데에는 과장과 왜곡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에 저자는 선비들이 중요시한 덕목, 유교 이론, 그들의 생활 모습, 그들이 중요시한 가치관, 그들에게 주어진 지위와 직책에 대한 임무 수행 능력, 그리고 그들이 지배한 조선의 실상 등을 종합해 선비를 분석하고 평가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그동안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기존의 선비 평가를 뛰어넘어 선비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꾀하고 동시에 500년 동안 조선을 통치한 위정자로서 그들의 모습을 규명하고자 한다.


▶ 선비가 권력을 잡으면 나라가 좋아질까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선비에 대해 다양하게 정의하고 평가했지만 유교적 가치와 덕목을 지키는 것을 지상과제로 하며 살아온 그들을 한 마디로 단언하기란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은 선비를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유교적 지식과 윤리로 무장하고 지배층을 형성한 최고 엘리트 집단, 곧 사대부”로 정의한다. 선비는 곧, “성리학적 가치를 체득하고 실천한 유학자와 그 학생들로 조선시대라는 특정 기간 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한 특권 지식인 계층”이다. 그러나 이렇게 유교적 가치와 덕목으로 무장하고 경제력과 지식뿐 아니라 정치권력까지 독점한 선비들이 지배한 조선은 가난했으며, 왜란과 호란 동안 국가의 존망이 백척간두에 섰을 정도로 군사력은 약했고, 민심은 조정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선비들은 조선이 당면한 문제들과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그들은 왜란과 호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겪었으면서도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와신상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조선의 부국책에도 진정 어린 고민을 하지 않았다.


▶ 선비들의 지조와 의리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지조와 의리는 선비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개념으로 실제로도 조선의 선비들이 목숨보다 중시한 유교 덕목들 중 하나다. 선비들이 의리를 가장 잘 실천한 예로 의병 활동을 꼽을 수 있는데, 저자는 ‘난신적자를 처단하기 위해 일어난’ 의병은 실제로 ‘명나라가 주도하는 중화 질서 혹은 중화 문명을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 규정한다. 왜란 때 조선에서 봉기한 의병이 조선에서만이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의병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호란 때 삼학사가 죽음까지 불사하며 지키려 했던 지조와 의리 역시 그 본질은 중화 질서였으며, 그 바탕이 되는 유교적 가치였다. 후금을 치기 위한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려는 광해군에게 비변사의 당상관들이 “차라리 전하에게 죄를 범할지언정 천자에게 죄를 범할 수 없다”고 말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을 풍미한 위정척사 운동에서 선비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 역시 중화에 바탕을 둔 보편적 유교 문명이었다. 이렇게 조선의 선비들이, 조선의 사대부들이 충성을 바치고자 한 궁극의 대상은 조선 왕이 아니라 명나라, 그리고 중국의 천자였다.


▶ 선비들이 이야기한 청빈과 안빈낙도 바로 보기

흔히 가난한 선비가 선비의 진정한 기질을 잘 간직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이라는 역사적 공간에 실재했던 선비는 대개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여 특정 직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도 먹고 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재산가들이었다. 500년 동안 선비들이 조선에서 독점적 지배권을 누릴 수 있었던 까닭도 그들이 노비와 전토를 소유한 재력가였기 때문이다. ‘사림’의 상징으로 알려진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이황, 이이 등 역시 서울과 지방에 막대한 노비와 전택을 보유한 부호였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선비들이 이야기한 청빈과 안빈낙도는 절대빈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가진 자들만의 유유자적이었으며 그들이 꿈꾼 이상적인 생활방식의 표현이었음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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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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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리뷰]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새창으로 보기
모카베어 ㅣ 2016-03-06 ㅣ 공감(1) ㅣ 댓글 (0)
선비에 대한 인상에서 개인적으로 좀 애매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는 순간 명쾌하게 뚫렸다.

선비를 그저 청렴하고 지조높음의 대명사로만 보려고 하니까 뭔가 다른 문제에서는 석연치 않았던 것이다.

선비는 사대부였고 양반이었고 지배층이었고 정치가였으며 작았든 크든 지주였다.

그리고 중국 중심, 천자 중심의 유교적 세계관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저자가 계속적으로 한 말이 있다. 이런 유교는 개인적으로 자기수양의 근본으로 삼는 데에는 좋으나 이런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었다는 것이 조선의 비극이라고. 개인이 개인 수양에만 그치면 될 일을 모든 사람에게 법을 바꿔가며 강요했으며(재가금지 귀걸이 착용금지 등...) 경제는, 파이를 키울 생각은 안하고 작은 파이를 어떻게든 나누려고 하다 보니 치열한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나라는 가난해졌다는것 등.

처음엔 제목을 보고 너무 격한 논조의 책이려나 했는데 읽어보니 논리적이게 주장이 전개된다.

나는 만족스럽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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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윤리가 아닌, 정책으로서의 선비정신 비판  새창으로 보기
marine ㅣ 2014-09-26 ㅣ 공감(3) ㅣ 댓글 (0)
오랜만에 재밌는 책을 읽었다.
제목이 좀 자극적이라 갸웃거리면서 빌린 책인데 저자의 생각에 90% 이상 동의한다.
선비정신이 개인 윤리로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국가 정책으로 작용했을 때 어떤 폐해가 나타나는지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 결과가 바로 식민지화라고 하겠다.
자본주의 맹아론이니 유교 민주주의니 유교 자본주의니 하는 주장들이 허구에 가깝다는 사실은, 다른 여러 책을 통해 공감해 왔던 바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옳은 말이구나 확인했다.
조선이 양란을 거치면서도 굳건히 500년 체제를 유지한 저력이 유교 문화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저자는 청나라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고, 청일전쟁 후 청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자 곧 망하게 됐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조선 선비들이 추종했던 화이론, 모화사상은 오늘날의 근대국가나 민족국가론과 전혀 다르다고 본다.
사대주의가 마치 외교술의 하나인 것처럼 말하지만 단순한 외교정책 수준이 아니라, 중화라는 거대한 질서 안에 편입되어 체제 유지를 위해 내면화 시킨 강력한 규범이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명이 망한 이후에도 여전히 대보단에 제사를 지내면서 관념적인 북벌을 국시로 삼았던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요컨대 조선의 선비들이 충성을 바친 것은 조선의 왕이라기 보다는 궁극적으로 중국의 천자였고, 중화는 단순한 선진문명의 개념이 아니라 한족이라는 종족과도 일치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므로 고려 시대에는 원나라를 중화로 볼 수 있었으나 (이 정도면 사대주의를 외교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청나라를 중화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유교는 재화를 키우는 것보다 있는 재화를 나누는 분배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검약을 강조하고 상업적 이익을 천시했다.
이런 유교가 자본주의와 어떻게 어울릴 수 있겠는가.
조선말 서양인들이 조선의 가난함을 강조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하다.
정말 조선은 자본주의가 발전한 서구에 비해 농업으로 자급자족하는 매우 가난한 나라였던 것이다.
또한 유교는 민주주의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자기 분수에 맞는 신분적 차별을 예로 규정하고 있고, 正과 邪 를 나누는 교조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으니 다양함을 기본으로 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어떻게 어울리겠는가.
서얼, 노비, 여성차별 등이 19세기 말까지 공고히 이루어진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식민지배, 오늘날은 세계화라는 신자유주의를 겪으면서 정체성 확보를 위해 전통을 내세우고 있으나, 저자의 표현대로 정치가로서의 선비정신은 역사적 비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개인윤리로서의 선비정신과는 또다른, 정책으로서의 선비정신을 환기시킨 점이 의의가 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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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을 가치는 있으나 주의해야 할 것.  새창으로 보기
가넷 ㅣ 2014-08-10 ㅣ 공감(1) ㅣ 댓글 (4)

  계승범 교수는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에 실린 글을 보고 알게 되었다.  누르하치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 성공하고 실패했는지를 다룬 논문이였는데 아주 인상깊어서 이름을 기억해 두고 있다가 몇권의 책을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구입한 책이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그리고 방금 다 읽은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라는 책이다. 얼마전에는 <중종의 시대>를 구입하기도 했다.  그만큼 뭐랄까, 학자에게 이런 평가를 내려도 되는가 모르겠다. 좀 색다르고 화끈한 면이 있다.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도 그런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를 이용하는데 있어서[비록 정확한 평가는 할 주제가 못되지만서도] 신중하지 못해보인다거나, 내가 봐도 논리적으로 뭔가 이해가 안되는 면은 없었다.  하지만 본 도서는 좀 너무 나간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과격하다.  학술서와 대중서의 차이를 두고 그런 건지 모르겠다.

 여튼 그런 탓에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서도 재미있게 읽은건 분명하다.  우선 제일 인상 깊은 것은  저자가 말한 세가지 평가 기준이다. 저자 말에 따르면 최소한 이 세가지 기준으로 평가를 하면 '헛소리'는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가 어떤 인물이 살던 해당 사회의 보편적 가치에 어느정도 충실하였고, 보다 나은 가치 창출을 노력했냐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러한 인물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 우리에게 어떠한 보편적이고 표본적인 의미를 가지냐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 인물이 위치한 자리, 그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를 얼마나 수행하였는지 그 책임감과 능력을 보는 것이다.

 선비의 덕목과 그 덕목을 수행하여야 할 선비의 실상을 다루는 2장 역시나 아주 인상깊었다. 지조,의리,청빈 등등의 덕목은 선비라는 인물군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덕목이다. 하지만 이러한 많은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선비가 많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이 덕목 자체만을 가지고 선비를 칭송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덕목이 누구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하였던 것인지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촉즉발의 남한산성에서 척화파도 마찬가지였지만, 주전파가 내세웠던 논리가 무엇이었던가?  구차하게 나라를 유지하니 끝까지 싸우다 죽으면 후세에 할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조선을, 조선국왕에 대한 지조와 의리가 아니라 중화문명의 담지자인 중국 명나라 천자에 대한 지조와 의리였다. 당대에 사회적 가치관에서는 보편적 의미를 가졌을지 모르나, 현재 우리에 있어서는 괴이한 일이며, 당시 그들이 위치하고 있던 자리의 기대임무를 수행하였다고 보기에도 힘들다.  이처럼 지조와 의리 등의 덕목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향하는 방향과 대상을 보아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정당하다.  많이 배웠다.  그리고 3장 '검증된바 없는 유교이론'에서 다룬 내용은 그렇게도 이야기 해볼 수 있다고 생각이 들게 하였다.   사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순서가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음을 물론이고, 왕도정치가 제대로 펴진 사례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것은 치치하고,  윗사람이 솔선수범을 하여 아랫사람을 교화시킨다라는 유교이론(???)은 소규모 친족집단에서나 가능할 일이지, 규모가 큰 국가에서는 이루기 힘들다는 지적을 볼때 손뼉을 나도 모르게 치게 하였다.  나머지 장은 익히 접해온 내용이라 별 새롭게 읽히지는 않았지만, 항상 그렇듯, 속으로 욕을 하며 읽어내려갔다. 조선의 남성양반들의 그 고상한 이면을 보면 욕지기가 나오게 된다.

 물론 조선 500년, 그만큼 오랜 세월을 버텨온 것은 그 내재적 시스템의 힘이 있을 것이라고 보인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 관련 서적을 읽으면서는 그러한 내재적 시스템의 힘이라기 보다는 명-청이 존재했던 중화질서의 울타리에서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다. 이 의문은 조선에 대한 공부와 중화질서에 대한 공부(랄 것도 없지만)가 더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이 든다.  여하튼, 요즘에 들어서 선비에 대한 조금 더 진실에 가까운 평가를 위해서는 한번 읽어 본느 것이 좋으리라 생각된다. 저자의 말처럼 선비는 조선시대의 정치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고,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한 원인이라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그러한 선비'정신'을 받을 만한 것인지 개중에 받을만한 것이 있다면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어떻게 재해석을 해야할지 고민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비를 조금 더 종합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준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너무 과격한 면이 있어 적극 추천하기 저어하나] 읽어볼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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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귀준거의 딜레마, 불구하고 내가 아는 선비는 없다  새창으로 보기
차트랑   ㅣ 2012-02-21 ㅣ 공감(6) ㅣ 댓글 (1)
 이 책은 부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부제는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이다. 책의 제목과 부제만으로 판단 할 때는 저자가 매우 격한 감정을 쏟아 부을 것만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저자는 ‘선비정신’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조선의 지배세력이었던 선비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역사적인 증거물들을 통하여 명쾌하게 시도하고자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저자가 사용하고 있는 평가의 기준설정이다.

올바른 평가의 기준은 왜 중요한가?

 이 책은 국민들의 ‘선비’라는 용어 인식을 역사의 구조 속에서 파악하고 그 용어에 대한 국민적 이해를 바탕으로 서술함으로서 ‘선비’라는 용어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실상을 독자들에게 알리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라는 대상을 평가해야하고 그 평가를 위해서는 평가의 객관적 근거를 장치해야 했다. 저자는 이 평가의 기준장치를 매우 명료하게 설정하고 있으며 그 근거는 지극히 개관적이고 합리적이며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충분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 어느 내용보다 가장 값진 소득이 바로 ‘평가 기준’이라는 바로 이 대목이라 여겨진다.

 바른 평가의 기준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편견은 평가의 오류를 낳는다. 오류는 당사자에게만 해당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본질이 숨어있다. 단순히 개인적 범주에서 판단과 정의가 감금된 상태라면 위험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개개의 인식이 타자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고, 결과론적으로 그의 사고와 행동까지도 지배할 수 있는 동기요인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책을 저술하는 주체이다. 시중에 출시되어 읽히는 도서들을 저술한 주체가 역사이든 인물이든 그 어느 팩트에 대한 평가의 적절한 기준을 갖추고 있지 못할 때, 그 결과물은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독자들은 그 영향으로 바르지 못한 인식의 주체가 된다. 이러한 일련의 수많은 과정들이 세대를 거듭한다면 어떤 또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일까... 단순한 오류의 문제를 넘어 왜곡이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게 된다. 이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나라 전체에도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선비’라는 용어에 대한 올바른 평가의 부재가 가져온 결과물들을 저자는 이 책에서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선비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에 어느 정도 충실했으며, 보다 나은 가치의 창출을 위해 얼마나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가. 물론 이는 해당 인물의 시대적 기준에 의거한다.
2. 인물의 삶이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선의의 보편적, 표본적 의미를 지니는가. 현재와 관계하는 역사성을 관찰하는 것이다.
3. 인물의 직책, 지위에 부여된 기대에 얼마나 잘 부응했는가. 저자는 이를 인간 본연의 책임감과 해당 능력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상의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면서 이는 보편적인 평가의 기준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한 이 보편적인 세 가지 기준에 의거하여 역사의 인물을 바라보고 평가하여 저술한 관련도서들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는 개인적으로 매우 회의적이다. 이 책이 수많은 교양 역사서들과 차별되어야 하며 별점 다섯을 받아 마땅한 이유는 그 평가의 기준을 명료하게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그를 근거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장치했다는 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높이 살만한 부분이라 하겠다.

‘선비’라는 용어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이유
최근 미국을 위시하여 경제 열강들이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만난 대한민국은 경제력의 한계에 봉착했고, 이를 수용하는 입장에 있다. 이는 마치 청나라에게 조선의 국왕이 한 겨울 얼어붙은 땅 바닦에 피를 흘리며 머리를 찧던 사건, 즉 병자호란이라는 굴욕적인 수치를 맞본 조선이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정체성이 흔들렸던 당시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국민들이 한미 FTA를 반대하는 이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시대적 상황이 이러한 때에 대한민국의 출판계,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양서들의 저자들은 ‘선비정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정체성의 일환으로 삼고자 해왔다.

 ‘선비정신’이라는 용어는 엄밀한 의미에서 유교의 부흥과 그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말이기도 하다. 유교는 조선을 지배해온 강력한 이념임을 부인 할 수는 없다. 또한 우리의 전통 문화적 요소로서 배제할 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교의 부흥’이라는 공식은 과연 현대의 우리에게 적합한 성질의 것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조선의 유교를 현대에 부흥시키는 목적이 단순히 ‘우리 역사적 사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타당성을 부여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고 저자는 생각하고 있다. 왜냐면 선비에 대한 저자의 평가기준으로 볼 때 유교는 우리 역사에서 실패작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유교라는 조선의 지배이념을 새롭게 이해해야 할 필연성의 재조명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 연유에서 유교의 가르침을 받들며 조선을 지배해왔던 조선의 선비를 보편적이면서도 엄정한 평가의 기준으로 재해석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현대의 대한민국이 유교를 어떻게 부활시킬 것 인가하는 방향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의 의미를 단순히 우리의 것이라는 미시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때 다시 한 번 국가적인 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경계하고자 한다.


저자 계승범, 재귀준거의 딜레마를 마주하면서도 조선 선비의 진면목을 드러내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좀 더 넓은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선비라는 인물을 조선이라는 영토 안에 가두어둔 채 미시적인 안목으로 서술한 수많은 교양서들과는 달리, 저자 계승범은 조선의 성리학을 거슬러 중국이라는 대륙과의 관계 속에서 바라본다. 이 책을 읽은 후의 독자들은 분명히 조선에 한정된 미시적 역사인물로서의 선비가 아니라 조중관계 속에서 거시적 선비의 모습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의 공자, 맹자, 노자의 가르침이 중국에서의 유교와 사회와의 관계하는 방식과 대조적으로 조선에서 공맹노자의 가르침을 선비들이 이용하고 있는 방식이 얼마나 다르며 심지어 그 얼마나 통탄스러운 것이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연 공맹노자께서 자신들의 학문을 이용, 대중을 혹은 국왕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조선의 선비들에게 과연 무어라 말했을까...마치 이 상황은 변질된 막시즘에 저항하며 칼 막스 스스로가 막스주의자이기를 거부한 상황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은 아닐까...

 후대의 우리들은 존경해 마지않는 조선의 거룩한 선비들이 과연 그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어떤 행동을 했고 그들의 언행이 조선 사회에 끼친 결과물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막연한 개념의 선비’가 아니라 ‘분명하고도 또렷한 조선 선비’의 모습을 드러내며, 그들이 지배했던 조선의 진면목을 조목조목 따져 간다. 저자의 일목요연한 글을 읽으면서 실망을 금치 못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슬픔을 느끼는, 혹은 배신감이나 분노를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는 바로 수많은 역사관련 저자들이 밝혀내기를 꺼려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 가지, 혹은 단편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선비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왜곡시켜 온 것이 사실이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라더라도 말이다. 하여 이제 '선비'라는 명제를 그 누군가는 다루어주어야 하며, 어쩌면 치명적인 아킬레스건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스스로의 치부를 공개하는 일에는 그만한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니 말이다. 때론 욕먹을 각오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통은 우리의 과거, 즉 현재와 분리할 수 없는 우리들의 역사를 바로보기 위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일종의 재귀준거이다. 한 나라의 역사를 다루는 학자로서 재귀준거의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저자의 고뇌를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조선 선비들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고 평가함으로서 미래를 향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문제점과 개선점을 극명하게 제시해주고자 하는 저자의 뜻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한 마디가 있다, "그대가 걸어온 발자국을 되돌아보라, 그리하면 그대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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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의 부끄러움을 엿보다(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계승범)  새창으로 보기
월천예진 ㅣ 2012-02-01 ㅣ 공감(0) ㅣ 댓글 (0)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서적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아흔 다섯 번째 서평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계승범

선비의 부끄러움을 엿보다.

참 오래 가지고 다녔던 책인가 보다. 명절에도 가지고 갔지만 그다지 많이 보지는 못했다. 병원에 갈 때마다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다녔지만 대부분 생각할 것들이 많아 책이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짧은 찰나의 시간 집중하기 좋은 책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계승범의 선비 이야기는 두 가지 상반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하나는 늘 좋아하는 역사물이기에 역사 이야기를 다시 만난다는 긍정적 설레임이 작용한다는 점이겠지. 그러나 다른 하나는 조금은 부정적이다. 여기서 부정이라 명명함은 단순하게 긍정의 반대의 의미일 뿐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어쩐지 개인적으로 살짝 뒤로 한걸음 물러나는 듯한 분위기가 짙다.

각설하고 책의 총체적인 느낌은 비틀어보기, 또는 거꾸로 세워 털어보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도 아니면 하나씩 껍질을 벗겨 본연의 것을 여실하게 그것도 알토랑 같은 알맹이만 속속 골라서 살펴보는 식의 방법이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지은이 계승범 그 스스로가 이야기했듯이 책은 기존의 인식이 가져다 준 질서에 안주하지 않는, 반항적인 내용의 전개로 이어지고 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선비의 이미지를 모조리 그보다 더 격하게 표현하자면 깡그리 깔아뭉개는데 고군분투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저자 계승범의 비판이 단순히 감정에 의해서 또는 개인적인 역사적 사관에 의한 것이 아닌 논리적 근거에 의한 비판과 지적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이다.

책은 비단 선비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대 조선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정치,경제, 사회 그리고 인권과 주변 환경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로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의 흐름이 이어진다. 개인적으로는 2장 ‘선비의 덕목과 조선 선비의 실상’과 3장 ‘검증된 바 없는 유고 이론’, 그리고 4장 ‘선비가 꿈꾼 나라, 그들이 만든 나라’를 쉽게 집중해서 읽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찌보면 위에 언급한 내용이 이 책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갖는 다양한 패러독스의 매력은, 짐짓 일절부분 과장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과히 인식의 쓰나미처럼 다가왔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내가 알고 있던 참 선비들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학문의 진정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정치와 사람과의 타협에 사활을 거는 다소 비천하기까지 한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말뿐인 선비들의 냉혹한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자는 계승범은 왜 이다지도 솔직한가. 아니다. 그는 어쩌자고 이렇게까지 선비님들의 용안에 찬물을 끼얹는단 말인가. 물론 이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책은 옳지 않은 잘못된 인식의 모든 것들에 대해 이를테면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자, 일종의 따끔한 일침을 가하기 위한 통합된 목적을 갖는다. 때문에 책을 읽는 이는 항상 저자의 말에 귀를 열어두어야 할 것이며 가장 중요한 조건을 충당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그동안 알고 왔던 진실을 뒤집어 바라볼 수 있는 시선과 그렇게 할 수 있는 나름의 용기를 품어내야 한다는 점이지 않을까.

비장하게도 또는 조금은 서글프게도 계승범의 책은 올곧고, 점잖고, 기품 있는 선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이러니하면서도 씁쓰름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가 이 책의 큰 메리트가 아닌가 싶다. 평소 좋아하는 퇴계에 관한 계승범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는 생각이 많아지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원인이 간사해서일지, 아니면 영악해서일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유리한 쯕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습성을 갖는 듯하다. 아니 습성의 차원이 아니라 본능일지도 모른다. 계승범이 침을 튀기며 풀어놓은 글을 접하면서도 나는 어딘지 모르게 그래도.. 퇴계인데..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듯하다.

책은 다양한 설득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해관계를 동시에 짊어져야하는 약간의 위험성도 동시에 지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는 이의 관점마저 저자 것으로 바꿔 흡수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어쨌거나 관점은 다양  할수록 좋은 것일 테니까. 계승범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는 얼치기 독자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냐고 짐짓 너스레를 떠는 모양새가 좋아보이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책은 겉과 안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생각하자면 저자 계승범의 의도는 그만의 독특한 온고지신인 셈이다. 원뜻에서 살짝 의미를 비틀어 새롭게 만든 계승범식의 온고지신은 옛것이 지닌 모순과 다양한 분야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부조리를 정확하게 알고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저자의 이야기를 떠나서 일정부분 독자가 판단할 몫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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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1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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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141020  새창으로 보기
마립간 ㅣ 2014-10-20 ㅣ 공감(6) ㅣ 댓글 (1)
 * 讀書日記 141020 <장자 & 노자 : 道에 딴지걸기> 서평 별점 ; ★★★ 여러 모로 기대에 비해 부족함을 느끼게 한 책이었다. 장자를 전공한 강신주, 도道 그리고 ‘딴지’라는 말이 나의 기대를 키웠다. 그러나 분량이 많지 않은 글에 감정만 과잉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의 글쓴이는 현대의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선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 역시 글쓴이의 의견에 동감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선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한 가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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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정신줄 놓지마...........  새창으로 보기
블루데이지 ㅣ 2012-06-22 ㅣ 공감(40) ㅣ 댓글 (12)
3.9kg의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낳고 나서 아이얼굴을 그 자리에서 볼수있다는게 자연분만의 최대장점! 그때의 감동은........나이들어 할머니가 되어도 눈물나오록 안잊혀질듯.........하다!   셋째아이라서 난 그냥 약간의 힘만 주만 거저 나올줄 알았지만......그건 나만의 착각! 임신 35주부터 끝없이 오르는 혈압때문에.......건강한 출산이 보장되지만은 않았었다. 혈압이 많이 높으면 임신유지가 많이 어렵다고한다.... 38주까지 난 최대한 혈압에 조심하며 38주 중반쯤 유도분만을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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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이단아, 그리고 공산당 다산 정약용  새창으로 보기
차트랑 ㅣ 2012-05-14 ㅣ 공감(30) ㅣ 댓글 (5)
  여유당도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조선의 유학자였다. 성리학을 통해 배운 학문이 곧 여유당의 학문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을 지배 해온 성리학자적 면모들과는 또 다른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관과 할 수 없는 분이 여유당이기도 하다. 이는 여유당의 생애가 주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흔히 경세치용 학파를 유형원, 이익과 더불어 정약용을 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학자이면서도 그들의 길과는 다른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이 여유당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대중을 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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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역사의 현장 방문기 (2)  새창으로 보기
차트랑 ㅣ 2012-03-13 ㅣ 공감(3) ㅣ 댓글 (0)
 대전, 역사의 현장 방문기 (2) 이번 대전행 당시 선생님께서는 중요한 가르침을 2가지 주셨다. 한 가지는 행동으로, 다른 한 가지는 말씀으로...  차를 타고 점심 식사를 하러가면서 지나치게 된 곳은 바로 우암사적공원 이었다. 선생님을 만나면 늘 우리 역사의 정취가 느껴지는 사적지를 방문하는 것은 필수 코스이다. 심지에 역사적 인물들이 잠들어있는 산소를 방문하기도 한다. 목적은 지리공부이다. 사적지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수 없이 많은 교훈을 가르치는 장소이다. 그것도 침묵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 침묵의 외...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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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새창으로 보기
마립간 ㅣ 2012-02-20 ㅣ 공감(7) ㅣ 댓글 (6)

* 讀書日記 120220

<아빠, 딸을 이해하기 시작하다> 서평 별점 ; ★★☆
 별점이 2개로 시작해서 다시 3개로 갔다가 그리고 최종적으로 2개반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 많다. 그렇다고 이 책이 나를 설득한 것도 아니다.

 남녀의 차이에 관해 평균이 갖는 통계 해석의 오류에 대해 너무 길게 설명하고 있다.
p 243 딸의 친구가 되지 마라 ; 아빠는 딸의 왕이자 스승이자 친구이다. 앞의 말은 딸의 친구만으로 부족하다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p 278 반가운 소식이 있다면, 우리 부모들이 가정을 안전하게 꾸려갈 경우, 자녀들이 **장애로부터 상당히 해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이 섭식에만 해당될까?

 그래도 제목이 주는 교훈은 잊지 않겠다. (그래서 별 반개 추가) - 제목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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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모 살인 사건> 서평 별점 ; ★★★☆
 추리 소설이라기보다 묘사가 뛰어난 문학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추리 소설적 요소인 트릭은 자동차 사고 불발부터 의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He Loves Me’ 영화에서 반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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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서평 별점 ; ★★★★☆
 나는 스스로 냉소적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직원을 뽑을 때 냉소적인 직원은 절대로 뽑지 말라고 한다. 즉 내가 입사 시험을 치를 때, 면접관이 나의 본 모습을 안다면 채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 이는 순차적으로 이뤄져야 하는가 동시적으로 이뤄져야 하는가?
 사치/낭비의 반댓말은 청빈淸貧인가? 그럼 구두쇠/수전노는?

* 밑줄 긋기
p 19 그 사람이 살던 당시의 기준으로 보는 것이다./어떤 선의의 보편적, 표본적 의미를 지니는지 살핀다. 현재와 연결되는 역사성을 보는 것이다./인간 본연의 책임감과 해당 능력을 보는 것이다.
p 47 선비는 “학식이 있으나 벼슬하지 않는 사람” 또는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가리킨다.
p 53 선비의 조건 중에 으뜸을 차지하는 넓은 의미의 정치라는 주요 잣대를 배제한 채 내린 반쪽짜리 평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 번도 벼슬을 하지 않고 처사로 은거한 이들을 더욱 높이 평가하는 풍조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조식의 삶과 그에 대한 평가는 좋은 예다.
p 77 그 결과, 유교의 제일 덕목인 충성의 대상이 점차 왕에서 붕당의 리더로 바뀌고, 군신유의 덕목은 관념적인 것으로 변질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 이 시기에 있어 신권 정치의 부작용을 보이지만 보편적으로 군권 정치가 신권 정치 보다 우월하다고 볼 수 있나?
p 144 일천즉천一賤卽賤 ; 근친결혼도 마찬가지지만 기득권 수호를 위해 나타나는 현상
p 152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한국의 전통은 90퍼센트 이상이 대개 조선 후기 (17~19세기)에 형성되었다.
p 166 명분 ; 일반적 의미는 “일을 꾀할 때 내세우는 구실이나 이유”이며/ 또 다른 의미는 “각각의 이름이나 신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 이것이 유교에서 의도한 본래의 뜻이다.
p 245 조선왕조가 이처럼 급격하게 몰락한 이유가 단지 호전적인 외세때문이었을까?
p 273 이제 그만 선비를 역사로 놓아주자 ; 우리가 아는 (이상의) 선비는 없다. 그러나 선비 상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대는 나무를 보았는가? 보았다고. 아니, 내가 묻는 것은 소나무, 사과나무, 단풍나무가 아닌 나무. 나무를 보았는가?”
 책을 다 읽을 즈음, 너무 속상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의 현 상황이 구한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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