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31

게일의 한국 종교 서술에 관련된 자료들



종교학 벌레




게일의 한국 종교 서술에 관련된 자료들

http://bhang813.egloos.com/1875740
선교사 게일(James Scrarth Gale)에 대해 전에 조사해 둔 것이다. 최근에 게일에 대하여 정리할 일이 있어 옛날에 과제물로 작성해 두었던 파일을 다시 찾아 올린다. 이 글 중간 부분에 인용된 <<전환기의 조선>>의 한국어 번역은 그대로 인용되어서는 안 될 자료인데, 미쳐 원문을 찾아보지 못해서 일단은 그대로 올려둔다. 게일은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었던 선교사"라고 단적으로 말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1920년대에 "조선어풍에 맞는 성서"를 주장하면서 번역위원회에서 나와서 독자적인 번역을 출판했다는 대목은, 아직도 인상에 깊이 남아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게일의 저술은 방대한데, 아래 정리된 내용은 그 중에서도 한국종교에 관련되어 찾아본 것이다.





1. 게일의 활동(1863-1937)
캐나다 온타리오 주 출생. 1884년 토론토 대학 입학. 1886년 북미 학생하령회에 참석하여 무디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고 선교를 결심. 1888년 토론토 대학 YMCA 선교사로 내한. 1889년 황해도 해주 지방, 경상도 지방 순회 전도. 이창직으로부터 한국에 대해 공부. 1892년 헤론의 미망인 해리엇(Harriet)과 결혼. 1897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감, 거기서 목사 안수 받음. 1900년 연동교회 에서 목회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설립, 초대회장으로 선출. 이 무렵 독립 협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지식인들(이상재, 홍재기, 김정식, 이원긍, 이승만, 우성준, 안국선)을 방문하였으며 출옥 후 연동교회에 입교하도록 하였다. 190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장으로 선출됨. 평양신학교 교수로 재직. 1908년 부인 사망. 1910년 루이스와 재혼. 1917년 한국음악연구회 조직, 찬송가 개편에 힘씀. 1925년 성경전서 번역. 그러나 성서공회에서 출판하지 못하고 윤치호의 후원으로 기독교창문사에서 출판.




2. 코리언 스케치1)
이 책은 게일이 10여년의 한국 생활 후에 미국에 안식년으로 가 있던 1898년에 쓰여졌다. 그가 한국과의 첫만남에서 받은 인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 당시 나온 한국에 대한 서구인의 기록들과 비교해 볼 때, 게일의 서술은 한국인의 내면 세계를 그리는데 있어서 놀라울 정도의 깊이를 지닌다. 서구인들이 19세기말의 조선인들을 보면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점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틀어 가난함, 지저분함, 느림, 말없음, 활기 없음, 우상 숭배 등이 그러한 점들이다. 그것들은 당시 서구인들의 생활에 비추어볼 때 판이하게 다른 것들이기 때문이다. 게일 역시 그러한 ‘낯섦’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신기하다고 늘어놓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인정2)에서 비롯하여 그 신기함의 내적 논리에 다다르려고 노력한다. 그는 한국인들이라는 인간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그를 관찰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당대의 조선견문록 중에서 가장 두터운 묘사(thick description)에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인의 느릿느릿하고 태평한 자세3)에서 다른 관찰자들이 낙후된 민족의 전형적 특성을 읽어낼 때, 게일은 그러한 행동 양식이 나름대로 이유 있고 장점을 가졌다는 것을 파악한다. 그러한 태평함 속에서도 일의 처리는 능숙하며, 필요할 때는 활기찬 모습을 보이는 한국의 머슴을 묘사한 장은, 그의 날카로운 관찰의 백미이다. 다른 서구인들이 영락없는 야만 행위로 묘사했을 석전(石戰)에서 그는 그 활기를 읽어내었다. 한국인들의 가난함을 관찰하면서도 그는 그 가난한 사람들이 지닌 따스한 심성에 주목한다. 조선 어느 곳에서나 인정과 친절이 나타남을 지적한다. 양반들이 낡은 지식에 매달려 있다고 묘사하면서도, 그들이 수준 높은 지식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낡은 배를 불평하기보다는 조선인 뱃사공의 기술적 능숙함을 관찰한다. 재래의 방식으로 진찰하는 동네 의원을 보면서도, 과학과 주술을 넘나드는 그의 의술을 진지하게 기술한다. 심지어는 조선인의 난폭함 역시 그러할 필요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서술하려 한다. 가족 제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한다: “단순하고, 가장의 지배하에 있는 생활은, 우리들의 복잡다단한 체제보다도 더 용이하게 정직한 행동으로 이끈다.”(284)
그의 서술이 조선에 대한 애정으로 지나치게 기운 측면도 없지 않겠지만, 그의 기본적 태도는 타인에 대한 이해에 필요한 전제는 인간의 보편성이 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미개인이 되었든 문명인이 되었던 인간의 지적 능력은 동일하다. 주어진 환경에서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은 동일하며, 다만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른 결과가 도출될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가 상이하더라도 그 배면에 깔린 지적 과정은 나름대로의 지적 정합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이해 가능한 존재라는 구조주의 인류학의 가르침은, 게일의 서술에서도 공유되고 있다.




3. 전환기의 조선4)
이 책은 1909년에 출간된 책으로 한국 선교를 준비하는 위한 자료집인 것으로 보인다. (번역서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각 장의 끝마다 ‘생각해 볼 문제’ 형식의 질문들이 실려 있다. 장의 끝에 실려 있는 참고문헌은 ‘더 읽을 거리’에 해당한다) 편집자의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의 뒷부분인 7장과 8장은 편집부에 의해 추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어찌해서 그리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따라서 6장까지만의 내용이 게일의 서술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 한국의 종교에 대한 종합적인 서술인 3장, 선교의 관점에서 해석한 한국 상황에 대한 서술인 5장, 초기 한국인 기독교인들의 양태에 관한 자료들이 실려 있는 7장이 주목할만하다.



①한국의 종교
(이 부분은 종교학적으로 중요한 내용인데, 번역서의 이 부분은 유난히 잘못된 대목이 많다.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조선이라는 나라에는 특별한 종교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도성에는 시민들이 거주하는 주택보다 더 높이 솟은 커다란 사찰도 없다. 눈에 띨 만한 성직자도, 대중적인 기도고, 종교를 믿는 신자도, 신앙심이 깊은 고행자도, 그리고 주위를 배회하는 신성한 동물도 없다. 성경책(bell-book?)이나 촛대를 파는 곳도 없고, 배향되는 그림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종교를,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 위의 다른 영혼에 도달하는 것으로 본다면, 한국인 역시 종교적이다. 그들은 경전들을 소유하고 있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며 신과 영혼과 천국에 대하여 대화한다.(60)


널리 퍼져있는 미신: 한국의 종교는, 조상숭배와 불교, 도교, 영혼 숭배, 신점(神占), 주술, 풍수지리, 점성술, 주물숭배 등이 복합된 이상한 종교이다. 용은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귀신이나 자연 신령들은 곳곳에 충만해 있다. 도깨비가 많아 곳곳에서 장난을 친다. 사령(死靈)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며 유령(eternal shade)이 주위를 맴돈다. 언덕, 나무, 강은 물론이고 질병이나 땅 속과 허공에 각기 의인화된 정령이 있다. 그 중 몇 가지는 도덕적 요구를 주재하지만, 대부분은 성정이 악하여 인간에게 불길함과 비애를 가져다준다. 그들은 쉽사리 기분이 상하고, 무엇을 결정할 때 아주 변덕스러우며 즐겁게 해주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을 주무르는 영적 세계와 더불어 사는 것은 저승(Hades)을 통과하는 것보다 별반 나을 게 없을 정도이다.(60-1)


내가 오랫동안 조선의 환경에 접하면 접할수록 나는 더욱더, 그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본국의 평균적인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종교를 위해, 종교 때문에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61)


②성서적 관점에서 본 조선
당시의 많은 선교사들은 19세기말의 한국 상황이 기독교 선교에 매우 적절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주로 한국의 비참한 현실을 강조하면서, 현실적으로 무력한 조선인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뿐이라는 필연성을 강조하는 논의를 펼치곤 하였다.5) 한국 사회의 절망적 상황과 신앙의 필연성이라는 논리는 게일의 저서에도 간혹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한국이 하느님에 의해 예비된 선교지라고 말하는 더 큰 이유는 당시 정세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배경에 의거한 것이었다. 이것이 게일의 독특한 관점이었다. 부정적 요인을 말하는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그는 문화를 통해 긍정적 요인에서 섭리를 읽어내려 하였다.
그는 한국의 문화를 성서라는 텍스트에 기반하여 새로 읽는 서술을 한다. 조선 땅을 성서에 묘사된 예루살렘에 일치시키면서 상상적 지리(地理)를 구성하는 그의 이러한 태도를, 성서적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조선은 과거를 재현하는 곳이다: “가장 은혜스럽고 놀라운 방법으로 조선은 일종의 성경 시대나 성경 지역의 모범으로 보존되어 있다.”(114) 그러한 예는 무수히 찾을 수 있다. 한국인들이 절하는 모습(정말로 땅에 닿을 듯한). ‘평안히 가시오’라는 인사(‘Shalom’이라는 고대 유대의 인사와 비슷). 신랑이 흰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은 채 행진하며, 옆의 사람들은 “길 비켜라, 신랑 나간다”라고 소리치는 모습. 희생의 원리가 살아 있는 제사(신에 대한 제물의 필요, 완벽한 희생(제물), 벌이 따르는 죄악, 고백에 따른 용서. 예수의 대속의 기본 원리가 나타남). “그 분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라는 표현.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났다”라는 표현. 유대에서처럼 실내에서는 결코 신을 신지 않고 문지방에서 벗는다는 점.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는 표현(조선인들에게는 이불이 침상이니까). “조선에서 삼베옷이란 아직 구약에서의 의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사람들은 머리를 풀고 그 거친 자루 천으로 몸을 감싼 채 욥처럼 많아서 운다.” 조선의 장승들, 실제로 볼 수 있는 우상. 귀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 등등.
이처럼 숱한 문화적 풍광들을 통해 성서적 고대는 현실화되었고, 이것은 선교사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줄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조선에 깃든 신의 손길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외견상으로 보더라도 그들은 관습과 의식(儀式)의 형태로써 성경을 이해하도록 되어 있다. 그들이 숨쉬고 있는 공기는 그리스도 시대의 향기가 주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 세계의 움직임은 고대 팔레스타인의 방식을 따른다. 그들의 내면적 사고는 성경에 적혀 있는 그대로이다. 그들의 미신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멸망기에 가졌던 바로 그것과 같다. 정신적인 힘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유대 주변의 국가가 이해했던 것과 꼭 같다. 삶에 대한 그들의 결론은 세속이 어떠해야 한다고 성격이 결론지은 것과 같다.
이들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바로 그 놀라운 언어인 언문이다. 목표물을 향해 쏜 탄환처럼 그것은 정면으로 오늘의 기회를 맞추고 있으며 신이 요구하는 땅을 준비한다. 국가적으로 볼 때 조선이 얼마나 신의 손길에 적합한지는 이 세상의 어느 곳과도 견줄 수 없다.(119-120)


③당시 한국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대하는 태도
이 책에의 7장에서 우리는 한국인들의 신앙 태도를 증언하는 많은 자료들을 만나게 된다. 비록 게일의 서술은 아닐지라도, 이 자료들 중에서 한국인이 성서를 대하는 태도를 정리하고 넘어가자. 우선 우리는 성서가 다른 책과는 달리 평범한 독서를 통해서 전파된 텍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신께서는 처음 어디에서 복음을 들었습니까? 교회인가요? 거리인가요? 기도회인가요? 아니면 성서를 통해서인가요?” 수년간에 걸쳐 이러한 설문 조사를 했을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의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아니오. 저는 김씨, 박씨, 또는 최씨에게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가 저의 집에 와서 예배를 함께 보았습니다.” 복음은 입과 입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통해 만주에서 머나먼 골짜기까지, 두만강의 구부러진 길까지, 소용돌이치는 호수까지, 바위까지, 그리고 남해 군도의 십자 물결까지, 동서로, 모든 땅에 걸쳐서 전파되어 왔다.(146)


성서는 특수한 맥락에서 전파된다. 그것은 읽히기도, 암송되기도, 들려지기도, 불려지기도 하는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는 한국의 글읽기 문화 속에서 유통된다. 그 글읽기는 한학(漢學)의 전통에서 비롯한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의 전통적 독서 문화에 있어서 텍스트, 교과서에 대한 집념은 대단한 것이었다. 유교 경전들은 과거 시험과 연계되어서 읽혔고, 따라서 그것은 현세적 구원론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조선인들에게 기독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삶을 지배하던 경전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그 경전은 양반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층에 열려 있는 것이었다. 이제 누구나가 경전을 읽을 수 있으며 그에 의해 구원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유교 경전에 쏟아졌던 향학열이 성경으로 전이되었으며, 그것은 독점되었던 경전이 모두에게 공유되기 시작하였다. 옛날에는 천자문, 소학, 논어를 읽어야 사람이 되는 세상이었지만 이제는 성서를 읽어야 사람이 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게일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간파하고 있었다:


그들(조선인)은 지난날 숱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글을 좋아하는 국민으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상업에도 능하지 못하고 호전적이지도 않았으나 호학(好學)했다. 그들은 책 읽는 것을 칭송했고, 따라서 ‘책중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를 환영했다.(110)


그런데 그 책읽기 방식은 전통적인 유교 경전 읽기를 따른 것이었다. 그 결과 성서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의 자세와 그것에 대한 암송, 생활에의 실천의 노력 등이 뒤따르게 되었다. 성서 암송이야말로 당시 사람들의 성서 대하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느 날 북쪽으로부터 성실한 선교사 1명이 왔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 그는 방문 목적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저는 성서를 몇 구절 기억하고 있는데, 이것을 당신들에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는 백 마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는데, 나흘 밤을 여행하는 동안 목사들에게 몇 구절의 성경을 암송해 주면서 그 먼 거리를 걸었다. 특히 한 마디의 실수도 없이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성경 구절을 한국말로 암송하자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147)


이처럼 성서를 대하는 태도는 단순한 신앙의 발로라기보다는 문화적 바탕에서 나온 것이었다. 확실히 이러한 태도는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 것에 전통적인 태도를 적용해서 나온 산물로, 성서에 대한 비공식적인 태도였다. 한학적인 책읽기, 여기에서부터 한국인들은 성서에 대한 비공식적 해석을 산출해 내었다.




4. 게일의 성서 번역 작업6)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성서 번역에 착수한 것은 1893년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조직하면서부터이다. 본격적인 작업은 1887년의 성서번역위원회에서 비롯된다. 5명의 선교사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1890년에 특별히 언더우드와 스크랜튼에게 성서 번역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정에 의해 언더우드는 게일로, 스크랜튼은 아펜젤러로 교체된다.
게일이 성서 번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언더우드의 역할을 대신 맡게 되는 1892년이다. 그는 이 때부터 사도행전과 마태복음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1895년에 마무리되었고, 그 후에 신약 후반부의 단편 성서들을, 즉 <바울이 갈나대인에게  편지>, <에베소인서>, <고린도젼셔>, <고린도후셔>를 번역한다. 1900년에는 다른 선교사들의 신약 번역도 마무리되는데, 이것들은 교정작업(아펜젤러(언더우드), 레이놀즈, 게일)을 거쳐 1906년 한국 최초의 공인 역본 <신약젼셔>로 나오게 된다.
1911년에는 구약성서가 번역되어 나왔으며, 그와 동시에 구약개역자회가 구성되었다. 게일은 여기에 개역위원으로 참가한다. 처음 선임된 위원은 언더우드, 게일, 레이놀즈였는데, 위원들이 자주 교체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레이놀즈는 신약에 전념, 1916년 언더우드 사망, 어드맨, 클라크의 사임. 특히 어드맨은 게일의 성서번역 방식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냄.) 언더우드 사후 개역자회 회장직을 맡고 있던 게일은 1923년에 위원직을 사임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다른 번역자들은 모두 게일이 좋아하듯 한국적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점차 이원모의 의견을 추종하는 자세로 나아갔다. 부드러운 한국어 어투를 채용하려는 이 두 사람의 의견은 번번이 다른 위원들에 의해 부결되었는데 다른 위원들은 성서 원어의 문법적인 구조에 충실하고자 하였으며 사실은 영어성서 문법에 충실하고자 하였다.”(63)
게일은 개역위원회에서 손을 떼고 대신 이원모 함께 독자적인 작업에 착수하여 1925년에 기독교창문사에서 <신역 신구약전서>룰 낸다. 그의 성서 번역은 ‘조선어풍에 맞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다른 선교사들의 축자적 번역, 즉 성서의 원문(영어 성서)과 한글 번역문이 그 뜻은 물론이고 양도 비슷해야한다는 원칙을 가진데 반하여 게일의 번역은 ‘짧게 줄인 풀이역’이었다. 예를 들어 게일은 한국어에서는 같은 단어를 되풀이하는 것을 꺼린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앞 문장의 주어를 자주 생략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그의 창세기 번역은 개역위원회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21년 9월 창세기 21장까지 국한문 혼용으로 인쇄하여 선교사들에게 배분하고 의견을 묻게 되었는데 이 때 거센 충돌이 일어났다. 대다수 의견은 게일이 문체에 매이다보니 의미를 희생시키고 말았다고 하며 영어 문장 구조를 견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어떤 이는 그가 아주 부드러운 한글번역문을 만들어 내기는 했으나 ‘원문을 줄였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결정적인 것은 게일이 명사의 반복을 피한 것이었다. 히브리어에서 같은 명사가 반복되고 있으나 한글에서는 가급적 반복을 피해야 했다. 창세기 초반에 이것을 적용한 결과 하나님 칭호를 20여회 생략할 수박에 없었다. 어떤 선교사는 게일이 성서에서 하나님을 제거했다고 주장하였다.”(72)
이 외에 게일은 언더우드와 함께 관주성서인 <스코필드 성서>(the Scofield Bible) 번역을 시도하여 1917년 인쇄하였다고 하며, 외경 번역도 완성하여 한국을 떠나기 전(1917년) 성공회에 원고를 넘겨주었으나 한국전쟁 때 분실되었다고 한다.




5. 게일이 생각한 크리스마스7)
크리스마스에 대한 게일의 시각은 상당히 독특하다.
그는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에 대한 추억의 회상으로부터 글을 시작한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일년 내내 설레었던 마음, 선물을 받을 때의 흥분을 회상한다. 그러한 흥분이 어린아이에게는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이게 때문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묻는다: “동아시아인들에게는 어떠한가? 그들은 크리스마스를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해 게일은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등의 한국 명절을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설레임을 갖고 기다렸으며, 민속놀이를 하며 즐겁게 놀았으며, 설빔을 입고 돌아다니던 한국의 명절. 그것이 ‘한국의 크리스마스’라고 게일은 말한다. 그러한 명절들이 이제 빛을 잃는 것을 게일은 안타까워한다. 서구에서 이식된 크리스마스는 아직 아이들에게 그러한 명절과 같은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맺는다: “현대 문명이라 불리는 무자비한 움직임 앞에서 이러한 축제의 날들은 해가 가면서 점차 그늘 속으로 퇴락해 들어간다. 이제 그것은 단시일 내에 의미 없이 사라질 것이다. 새로운 축제의 날이 다가올 것이고 그것은 아마 진짜 종교적인 크리스마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동방의 아이들에게 또 하나의 설날과 같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수천년이 걸릴 것이다.”(261)




6. 게일의 한국관에 대한 논문들

주홍근, <<선교사 奇一의 생애와 한국기독교에 끼친 공헌>>, “제3장 한국학과 한국관”
저자는 게일의 한글연구, 역사연구, 번역사업, 음악연구 등의 활동을 죽 열거한 후에, 한국관이라는 표제 하에 다음의 세가지 이야기를 한다: 

①게일은, 암담한 구한말의 상황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한국이 중국으로부터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고 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입장에서 그는 처음에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나 합방 이후 일본의 잔악한 행위를 보고 생각을 바꾸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②한국은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장소로서 준비되었다.(한글, 지식에 대한 열정, 당대의 상황) 

합방이후 한국이 조선혼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한국의 부흥을 위해서는 참된 지도자의 육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한 입장에서 당시 장로교의 신학교육(목회자 이상으로,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수준으로 키우지 않는다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저자는 게일의 복음의 노력에 서술의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의 한국에 대한 태도를 대체로 우호적인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다. 한때 친일적이긴 하였지만, 그 후에는 “한국의 변천 속에서 한국인이 된 한국사람”으로서 한국 사랑에 앞장섰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현재의 혼합적 상황에 대한 절망’이 연구 동기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 때문에 게일의 성서번역 노력이 상당히 강조되고 있다. “말틴 루터없이 독일을 생각할 수 없는 것같이 奇一없이 성서와 한국을 생각할 수 없다(37)”, “(게일이 번역한) 사도행전이 읽혀지면서 원산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났고 요한 복음이 읽혀지면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고백을 하기 시작하였다(39)”, “세종대왕의 한글은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의 책이 번역될 때까지 오백년동안 그 영광을 숨기고 있었다(41)” 등의 다소 무리한 진술들이 저자의 기획을 잘 보여준다. 게일의 한국 연구는 성서의 진리를 ‘그대로’ 전하기 위한 노력이며,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러한 정신일 것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다. 복음적 동기가 강하게 깔린 그의 연구는,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게일의 입장과 연구자의 입장이 제대로 구별되지 않은 채 뒤섞여 있다.


한규무, “게일의 한국인식과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1898-1910년을 중심으로”

앞의 글의 게일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는 달리, 한규무는 냉정한 입장에서 게일의 친일적 태도와 그 영향을 분석한다. 게일이 한국을 많이 알고 사랑했던 선교사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지도급 선교사로서 한국의 기독교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의 한때의 생각은 무책임하게 넘길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이 논문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이다. 일단 게일의 한국 인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그는 한국 문화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였지만 정치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어서, 잘못된 정치에 의해서 한국의 주권 상실은 필연적인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외부적 요인보다는 내부적 요인, 즉 한국인의 잘못에만 초점을 맞추어 상황을 인식하였다. 또한 대부분의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정치 참여를 엄중히 금하는 입장이었다.

게일이 갖고 있는 생각은 다음과 같이 한국 교계에 영향을 미쳤다고 정리된다: 그는 감옥 설교를 통해서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과 접촉하며, 그들은 이후에 연동교회(게일이 담임)를 출석하며 황성기독교청년회(게일이 회장)에서 활동한다. 

이 인력들은 1904년 국민교육회 창립의 주축이 된다. 게일의 영향력아래 이들은 주로 비정치적인 활동에만 주력한다. “결국 게일은 이 땅의 지식층 교인들로 하여금 정교 분리의 원칙에 충실하게,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저항을 하지 않도록 만들었던 것이다(176)”.
저자는 짧은 시기를 포착하여 게일의 한국인식이 당시의 정치적 정황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호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난 냉철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게일에 관한 연구
Rutt, Richard, A Biography of James Scrarth Gale and a New Edition of his HISTORY OF KOREAN PEOPLE, Seoul: Royal Asiatic Society, 1972.
조경정, J. S. “게일의 한국인식과 재한활동에 관한 일연구”, <<한성사학>> 3 (1985).
주홍근, <<선교사 奇一의 생애와 한국기독교에 끼친 공헌>>, 피어선 신학연구원, 1985.
한규무, “게일의 한국인식과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 <<한국기독교와 역사>> 4 (1995).

1) Gale, J. S., 장문평 옮김, <<코리언 스케치>>, 현암사, 1970. (Korean Sketch, 1898)

2) “결국 우리들의 생각은 정반대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들과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지적 탐험과 재치 있는 처세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들과 그들의 마음이 하나로 되고, 또 정신이 어느 정도는 일치될 때가 올 것이다.”(215)

3) 게일은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지적을 한다: “이상하기 짝이 없지만 이렇게 짜증나는 나라에서 ‘서두르는’이라는 뜻의 말은 왜 그리 많은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어서’, ‘급히’, ‘얼른’, ‘속히’, ‘빨리’, ‘바삐’, ‘즉시’, ‘잠깐’. 날래‘, ’냉큼‘ 등은 우리가 쓸 수 있던 흔한 말의 일부에 불과하고, 매일 들을 수 있기도 하다.

4) Gale, J. S., 신복룡 옮김, <<전환기의 조선>>, 집문당, 1999. (Korean Sketches, Cincinnati, Jenning & Graham, 1909)

5) 이러한 논리는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강요하는 믿음으로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무관심을 표명하고 사회에 대한 노력은 하지 않은 채 하느님의 섭리만을 이야기하는 신학은 사회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얼마 전에 자식이 걸린 병을 고치지 않아 아이를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한 부모가 있었다. 그 부모는 하느님의 은총이 아이에게 나타날 것이며, 아이의 병세가 심해질수록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되심을 나타내기 위한 준비라고 말하였다. 아이를 병원에 보내지 않은 채.

6) 이덕주, “초기 한글성서 번역에 관한 연구”, <<초기한국기독교사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5, pp.320-422. 에서 요약

7) James S. Gale, “Christmas", KMF 19-12, 1922, pp.259-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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