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못난 조선 - 16~18세기 조선.일본 비교
못난 조선 - 16~18세기 조선.일본 비교
문소영 (지은이) | 나남출판 | 2013-07-05 | 초판출간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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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논설위원 문소영의 16~18세기 조선.일본 비교. 그동안 '왕실', '유림', '정치', '제도'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조선 백성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기자라는 직업적 특성을 살려 도자기, 미술품, 역사책, 통계자료, 지도 등을 샅샅이 조사해 조선시대의 감춰진 '흑역사'를 밝혀낸다.
서론: 조선은 못난 나라였다
1. 문화
조선의 도자기 길을 잃다
조선백자, 고립의 흔적
17세기 조선의 가난이 낳은 철화백자
17세기 세계 유색자기를 선도한 일본자기
16~18세기 조선의 수출품, 분청사기
일본 판화, 인상파에 미치는 영향
18세기 진경산수화 vs 11세기 야마토 화풍
16세기 중국·일본의 서양화 전래
2. 경제
조선과 일본의 16~17세기 해외교역
은 수출국 일본까지 확대된 실크로드
조선후기 중산층이 무너지다
국력의 격차를 벌린 조선과 일본의 해양진출
일본, 쇼군이 나서 부국강병을 꾀하다
조선·중국·일본의 쇄국은 수준이 달랐다
인구증가와 구황작물의 전래
(도기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흙을 굽는 온도다. 도기는 섭씨 800-90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굽고 자기는 섭씨 13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굽는다. (중략) 도자기 원조 국가인 중국이 고화도 자기를 굽기 시작한 것은 7세기 무렵이었다. (중략) 신라 ...
조선에서 백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중국 명나라의 백자가 소개된 덕분이었다. 명나라의 백자는 순수한 백자가 아니라 서양에서 ‘블루 앤 화이트’로 부르는 청화백자였다. 푸른색 안료(코발트)로 새하얀 도자기 위에 용이나 새, 중국 산수화 등을 그려 넣은 자기였다. (중략)...
(위에서 계속) 조선 왕실과 사대부는 계속 푸른색 그림이 그려진 백자를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의 청화백자 사용을 법으로 금지했다. (중략) 조선 후기 즉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세계적인 도자기의 유행은 청화백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여러 ...
저자 : 문소영
최근작 : <못난 조선>,<못난 조선> … 총 2종 (모두보기)
소개 :
여름방학이면 자전거로 국경을 넘어 여행하는 유럽의 대학생을 부러워하던 20대에는 젊음을 희생하고 맹렬하게 살면 20년 뒤쯤엔 세상이 바뀔 줄 알았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건강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나의 신념도 변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생각으로 조선사와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와 <서울신문>에서 22년째 기자로 일한다. 국회 여당반장과 청와대 출입기자, 경제부 금융팀장, 학술ㆍ문화재 담당기자를 거쳐 2013년 현재 논설위원에 재직중이다. 20...
요즘 16~18세기 조선시대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외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근대화되기 전에 이미 조선 내부적으로 근대를 지향하는 개혁의 싹이 돋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광해군, 영·정조 시대를 다룬 수많은 드라마, 영화, 책들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다. 예컨대, 2012년 개봉해 관객수 1,300만명을 돌파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하선(이병헌, 광해로 위장한 광대)이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백성들의 입장에서 유림과 대립하며 명과 청 사이의 중립외교를 지지하고 대동법을 시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왕실’과 ‘백성’, ‘제도’와 ‘현실’의 간극은 없었을까? 이렇게 융성했던 조선은 왜 19세기에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가? 반면 우리가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일본은 어떻게 초강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을까?《못난 조선》은 이러한 물음들에서부터 시작하는 책이다. 그동안 ‘왕실’, ‘유림’, ‘정치’, ‘제도’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조선 백성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기자라는 직업적 특성을 살려 도자기, 미술품, 역사책, 통계자료, 지도 등을 샅샅이 조사해 조선시대의 감춰진 ‘흑역사’를 밝혀낸다.
이 책은 ‘이것만이 16~18세기 조선의 실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방향을 제시하여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한다는 기자정신으로 저자는 용감하게 일본과 견주어 조선이 부족했던 점에 대해 파헤친다.
이 책을 통해 부끄럽고 아프고 슬프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조선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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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2편
리뷰쓰기
못난 조선 - 16~18세기 조선.일본 비교
문소영 (지은이) | 나남출판 | 2013-07-05 | 초판출간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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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논설위원 문소영의 16~18세기 조선.일본 비교. 그동안 '왕실', '유림', '정치', '제도'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조선 백성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기자라는 직업적 특성을 살려 도자기, 미술품, 역사책, 통계자료, 지도 등을 샅샅이 조사해 조선시대의 감춰진 '흑역사'를 밝혀낸다.
서론: 조선은 못난 나라였다
1. 문화
조선의 도자기 길을 잃다
조선백자, 고립의 흔적
17세기 조선의 가난이 낳은 철화백자
17세기 세계 유색자기를 선도한 일본자기
16~18세기 조선의 수출품, 분청사기
일본 판화, 인상파에 미치는 영향
18세기 진경산수화 vs 11세기 야마토 화풍
16세기 중국·일본의 서양화 전래
2. 경제
조선과 일본의 16~17세기 해외교역
은 수출국 일본까지 확대된 실크로드
조선후기 중산층이 무너지다
국력의 격차를 벌린 조선과 일본의 해양진출
일본, 쇼군이 나서 부국강병을 꾀하다
조선·중국·일본의 쇄국은 수준이 달랐다
인구증가와 구황작물의 전래
(도기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흙을 굽는 온도다. 도기는 섭씨 800-90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굽고 자기는 섭씨 13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굽는다. (중략) 도자기 원조 국가인 중국이 고화도 자기를 굽기 시작한 것은 7세기 무렵이었다. (중략) 신라 ...
조선에서 백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중국 명나라의 백자가 소개된 덕분이었다. 명나라의 백자는 순수한 백자가 아니라 서양에서 ‘블루 앤 화이트’로 부르는 청화백자였다. 푸른색 안료(코발트)로 새하얀 도자기 위에 용이나 새, 중국 산수화 등을 그려 넣은 자기였다. (중략)...
(위에서 계속) 조선 왕실과 사대부는 계속 푸른색 그림이 그려진 백자를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의 청화백자 사용을 법으로 금지했다. (중략) 조선 후기 즉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세계적인 도자기의 유행은 청화백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여러 ...
저자 : 문소영
최근작 : <못난 조선>,<못난 조선> … 총 2종 (모두보기)
소개 :
여름방학이면 자전거로 국경을 넘어 여행하는 유럽의 대학생을 부러워하던 20대에는 젊음을 희생하고 맹렬하게 살면 20년 뒤쯤엔 세상이 바뀔 줄 알았다.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건강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나의 신념도 변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생각으로 조선사와 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있다.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와 <서울신문>에서 22년째 기자로 일한다. 국회 여당반장과 청와대 출입기자, 경제부 금융팀장, 학술ㆍ문화재 담당기자를 거쳐 2013년 현재 논설위원에 재직중이다. 20...
요즘 16~18세기 조선시대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외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근대화되기 전에 이미 조선 내부적으로 근대를 지향하는 개혁의 싹이 돋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광해군, 영·정조 시대를 다룬 수많은 드라마, 영화, 책들은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다. 예컨대, 2012년 개봉해 관객수 1,300만명을 돌파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하선(이병헌, 광해로 위장한 광대)이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백성들의 입장에서 유림과 대립하며 명과 청 사이의 중립외교를 지지하고 대동법을 시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왕실’과 ‘백성’, ‘제도’와 ‘현실’의 간극은 없었을까? 이렇게 융성했던 조선은 왜 19세기에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가? 반면 우리가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일본은 어떻게 초강국으로 떠오를 수 있었을까?《못난 조선》은 이러한 물음들에서부터 시작하는 책이다. 그동안 ‘왕실’, ‘유림’, ‘정치’, ‘제도’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조선 백성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기자라는 직업적 특성을 살려 도자기, 미술품, 역사책, 통계자료, 지도 등을 샅샅이 조사해 조선시대의 감춰진 ‘흑역사’를 밝혀낸다.
이 책은 ‘이것만이 16~18세기 조선의 실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방향을 제시하여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한다는 기자정신으로 저자는 용감하게 일본과 견주어 조선이 부족했던 점에 대해 파헤친다.
이 책을 통해 부끄럽고 아프고 슬프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조선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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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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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선> 통치 대신 권력유지에만 매달렸던 댓가
마냐 ㅣ 2014-04-13 ㅣ 공감(10) ㅣ 댓글 (0)
일본이 2차 대전에서 승리하고 있고, SF영화에나 나올법한 무기를 개발했다고 굳게 믿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의 문제는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을 뿐이다. (참고 : 일본은 전쟁에 지지 않았다고 믿었던 사람들, 카치구미(勝ち組) )
뉴스가 제 역할을 못하면, 당대의 기록은 조작될 수 있구나 싶었다. ‘현재’는 왜곡되기 쉬워도 ‘과거’는 제대로 기록되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과거’도 구멍이 많다. ‘역사’를 제대로 못 배운 탓인지. 막연한 반일 감정이 있었던건지. <못난 조선>은 조선과 일본, 중국을 비교하며 조선의 ‘실수’를 따져보는 책이다. 즉 “광복 이후 식민사관을 씻어내고 민족적 자긍심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한국 민족 최고’라고 강조, 열등감을 떨쳐냈는지는 모르지만,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해는 덜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책의 목적은 분명하다. 현재와 미래를 겨냥한다. 어떻게? 살펴보자.
조선 후기, 일본은 선진국이었다.
일단 일본에 대해 백제 문명을 얻어가고 조선시대에는 도공을 납치한 ‘후진국’으로 오해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개인적으로 놀라운 몇 가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은 578년 설립된 일본의 건축회사 콘고구미. 창업자는 백제에서 건너간 콘고 시게미쓰. 한반도인. 그와 그 동료들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시텐노지(사천왕사)를 593년 건립. 일본 문화 원조가 한반도에서? 무려 1500년 이상 지속할 수 있는 기업을 일본 사회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었느냐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좋겠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 2, 3위도 보유. 708년 창업한 온천 여관업의 케이운칸. 718년 창업한 여관업 호시..일본에서 100년 이상 된 기업은 5만 개이고, 200년 이상 된 기업도 3146개나 된다.”
“21세기에도 일본은 책을 많이 읽는 민족으로 소개되지만, 17세기에도 일본은 조선인보다 더 많이 책을 읽은 것 같다. 고려 팔만대장경을 얻기 위해 조선에 매달렸던 일본은 17세기 말 출판의 대중화. 에도에 약 6000명이 넘는 출판업자. 교토에는 1만 점이 넘는 서적이 출판됐다”
“자포니즘(Japonism)이 유럽에서 맹렬하게 대중적으로 유행한 시점은 19세기 중엽. 17세기 중엽부터 일본에서 도자기 칠기 가구 등을 수출한 것이 바탕이 됐다. 자포니즘의 본격화는 일본의 다색 목판화인 우키요에가 유럽에 진출하면서. 1856년부터 파리의 콜렉터들은 열정적으로 일본의 우키요에를 수집, 일본문화의 유행을 만들었다.. 자신의 부인을 모델로 <일본 여인>을 그린 모네는 물론, 로트렉,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과 <해바라기>의 고흐와 고갱 등 후기 인상파 화가, 아르누보의 대가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클림트, 현대미술 아버지 피카소, 마티스와 같은 야수파 등도 일본의 우키요에의 영향권에 있었다.. (86~87쪽)”
열린 사회랄까. 기업가 정신을 존중하며, 새로운 걸 배우는데 열심이었다.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멕시코와의 무역도 희망했을 정도. 네덜란드 등 유럽은 물론, 시암(태국)제국과 인도차이나 안남, 캄보디아의 파타니 등과도 교역했다.
정권 유지에 밀려난 조선의 국정 철학
반면 조선의 쇄국 정책이 아쉬운 것은, 국가 운영에 대한 철학이나 전략이 아니라 제 밥그릇을 지키고자 했던 지배층 정쟁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14세기까지 고려는 국제 국가로서 흠잡을 것이 없었다”고 한다. 16세기 이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조용한 은둔의 나라’가 된 배경이 무엇일까. 16세기 이전 조선에는 일본에 없던 도자기, 면화와 면직물, 인삼까지 귀한 상품을 가진 국가였는데 어디서 꼬인 걸까.
“광해군의 실용주의 외교노선을 배척하고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인조반정의 승리자들은 이후 명분과 의리, 착시와 자기암시로 점철됐던 조선 후기의 사대주의를 만들었다. (355쪽)”
조선 초기만 해도 유연했던 사회였으나 치열한 당쟁은 학문적, 정치적 선택을 강요했다.
주자학 외의 학문은 ‘사문난적’으로 지목되고 다른 해석은 곧바로 이단이 됐다.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종북'으로 몰아가는 것과 닮았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 송시열과 노론의 정치적 기반.
당시 통치철학으로 효력을 상실, 중국은 물론 일본도 외면한 주자학에 집착했다.
흔히 계몽 군주로 알려진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택한 전략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순수한 한문의 문장체를 옹호하는 반면, 참신한 문장이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금서로 만든 문체반정. 정조는 새로운 문화적 경향을 억압하고 언로를 봉쇄하고 과거로 회귀하려고 했다. 규장각 조차 문체반정을 뒷받침하는 책만 골라놓았다 한다. 박지원은 물론 당대의 실학자 정약용도 뜻을 펼칠 기회조차 없었다.
황당한 것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150년 황금기’의 청나라를 거부해놓고, 1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명백히 쇠락하기 시작한 19세기 중엽부터 청나라를 받아들였다는 점. (354~355쪽) 세계 정세를 저렇게 못 읽을 수가.
저자는 "조선의 지배층에게 (박지원, 정약용 등) 북학파의 주장은 그저 비주류의 아우성. 이런 경향은 21세기 현재도 비슷하다. 대한민국의 주류라는 계층에서는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틀만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거나 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서문에서 아쉬움을 밝힌다.
흔히 계몽 군주로 알려진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택한 전략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순수한 한문의 문장체를 옹호하는 반면, 참신한 문장이나 새로운 문물을 소개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금서로 만든 문체반정. 정조는 새로운 문화적 경향을 억압하고 언로를 봉쇄하고 과거로 회귀하려고 했다. 규장각 조차 문체반정을 뒷받침하는 책만 골라놓았다 한다. 박지원은 물론 당대의 실학자 정약용도 뜻을 펼칠 기회조차 없었다.
황당한 것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150년 황금기’의 청나라를 거부해놓고, 1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명백히 쇠락하기 시작한 19세기 중엽부터 청나라를 받아들였다는 점. (354~355쪽) 세계 정세를 저렇게 못 읽을 수가.
저자는 "조선의 지배층에게 (박지원, 정약용 등) 북학파의 주장은 그저 비주류의 아우성. 이런 경향은 21세기 현재도 비슷하다. 대한민국의 주류라는 계층에서는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틀만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거나 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서문에서 아쉬움을 밝힌다.
조선 초기와 달리 신분제는 굳어져, 한 번 노비는 대대로 기회가 없는 노예사회였으며
중산층 상당수가 노비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 이 와중에 군대도 안 가고, 세금도 안 내는...것이 양반들의 특권이었다고 하니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뻔뻔스럽기 짝이 없다. (책 읽다 상당히 충격 받았던 이 부분은 번외편 별도로 짧게 정리 ^^;;)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으니, 백성은 경제적 궁핍에 내도록 시달렸으며...조선의 국력은 청화백자 조차 일종의 사치금지법으로 막을 지경이었던 그 시절. 오히려 채색 도자기 유행을 이끌며 중국과 일본이 각광 받은 사연을 비롯해 책은 조선의 문화와 경제, 사회와 정치를 찬찬히 살핀다.
책을 쓴 문소영 선배는 청와대 국회 등을 취재하는 훌륭한 정치부 기자였고, 글이 너무 매서운 탓인지(^^;;) 최근 몇 년 문화부에서 미술 등을 담당했다. 덕분에 도자기와 그림에 대한 얘기를 비롯해 문화와 사회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엮어내는 솜씨가 매끄럽다. (단언컨대 최근 문 선배에게 밥 얻어먹은 적 없음을 밝혀둡니다. 책은..2010년에 받은게 사실이지만^^;;) 기자가 쓴 책은 사실 빤하거나 깊이 있거나 인데.. 인용 수준만 봐도 놀라울 정도로 공을 들였다.
이런 책을 몰라보고, 팽개쳐두었던 무심한 후배로서 뒤늦게 리뷰로 예의를 갖추고 싶다. 책이 괜찮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얼마전 김탁환쌤의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을 읽고서 팔랑귀 답게 역사에 관심이 생겨 꺼내들었지만, 이제라도 읽어 얼마나 다행인지. 서론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국사학자들이 술자리에서는 "조선은 임진왜란이나 늦어도 병자호란 때 망했어야 했다"는 말이 나온다. 조선은 500년 넘게 왕조를 이어간 세계적으로 드문 왕조였다. 하지만 백성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편안하게 살게 했느냐는 의미에서 보면 성공적인 왕조는 아니었다. 중국의 왕조는 대체적으로 200~300년간 이어졌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가 망하게 된 원인을 파악하고, 국가를 일신했다.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고 제도개혁을 통해 나라를 혁신했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권력이 500여 년 지속되자 혁신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이 아닐까?"
'못난 조선'을 돌아보는 것은 오늘을 곱씹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조선의 지배층이 저질렀던 실수를 찬찬히 살펴보면, 오늘날 정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을 유지하려던 사대부들이 '딴 말' 못하게 금지했던 것과 달리 오늘날에는 이견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란게 다를 뿐인데...
21세기 한국은 사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잘 사는 나라다. 하지만 기회가 어떻게 열릴지, 촉을 세워야 마땅하다. 결론 부분에서 몇 구절 더 인용한다.
"친북 종북 낙인찍는... 그러나 묻고 싶다. 북한과 친하게 지내면 정말로 안되나? 사회주의 종주국 중국, 과거 식민지배로 우리를 괴롭혔던 일본하고도 경제적, 외교적 이익을 내세워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판인데."
아니 이 분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씀을..ㅠ 살짝 얼었다가...그런데 또 안될건 뭐지? "통일 없이 남한만으로 21세기를 무사히 통과해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에 어쩐지 끄덕.
'강한 대한민국'을 위해 1인당 국민소득 어쩌구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배타적 민족주의나 안하무인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변화에 대한 지치지 않는 노력과 개방성, 포용성, 다양성 등을 확보해나가야 한다. 가장 기초적으로 정부와 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너무 단순하고 간단한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계속 역사를 들여다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글은 제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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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 <못난 조선> 새창으로 보기
mizuaki ㅣ 2013-10-14 ㅣ 공감(1) ㅣ 댓글 (1)
(도기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흙을 굽는 온도다. 도기는 섭씨 800-90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굽고 자기는 섭씨 13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굽는다. (중략) 도자기 원조 국가인 중국이 고화도 자기를 굽기 시작한 것은 7세기 무렵이었다. (중략) 신라 말에 장인들이 스스로 터득했든지 아니면 중국의 혼란기에 월주요의 장인들이 흩어져 고려로 들어와 자기기술을 전수했든지 간에 늦어도 10세기 후반에는 고려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중략) 16세기까지 자기를 만들 수 있었던 민족은 전세계적으로 중국, 한국, 베트남밖에 없었다고 하니, 10세기 안팎의 고려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소유한 나라였다고 자부해도 된다.-39-42쪽
조선에서 백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중국 명나라의 백자가 소개된 덕분이었다. 명나라의 백자는 순수한 백자가 아니라 서양에서 ‘블루 앤 화이트’로 부르는 청화백자였다. 푸른색 안료(코발트)로 새하얀 도자기 위에 용이나 새, 중국 산수화 등을 그려 넣은 자기였다. (중략)중국에서 청화백자의 수출을 금지하자 조선 왕실은 직접 백자 생산을 지시했다. (중략) 청화백자의 몸통인 백자 만들기에 성공하자 15세기 중반, 세조 때부터 백자 위에 코발트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 제작에 본격적으로 들어간다. 즉, 조선의 백자는 원래 명나라의 청화백자와 닮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지 단지 하얗게 빛나는 백자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순백자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략) 코발트를 수입해 청화자기를 생산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조선 왕실은 국산 코발트를 발굴하려고 노력하 정도로 청화백자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중략) 그러나 전문가들은 청화자기 안료를 국산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노력은 실패했다고 분석한다. 세조와 예종 때를 지난 뒤에는 기록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51-58쪽
(위에서 계속)
조선 왕실과 사대부는 계속 푸른색 그림이 그려진 백자를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의 청화백자 사용을 법으로 금지했다. (중략) 조선 후기 즉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세계적인 도자기의 유행은 청화백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색으로 꽃이나 새 등 도안을 채색한 채색도자기로 진화했다. 일본식 채색도자기의 도약이었다. 18세기에는 채색도자기의 원조인 중국조차도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기 위해 일본식 채색도자기를 모방해야 할 정도로 유럽에서 인기를 모았다. (중략) 백의민족의 이미지를 강조해주는 조선의 백자는 이런 세계적인 도자기 시장의 흐름에서 완전히 비켜난 결과에 불과하다.
(아래에 계속)-51-58쪽
(위에서 계속)
조선의 사치금지법이 아니었으면 조선에서도 채색자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마디 더 추가하겠다. 일본에서도 1787년에 사치생활 금지법이 발효되었다. (중략) 중국도 명나라 등에서 종종 사치금지법을 내리곤 했다. 중국이나 일본 모두 유교의 세례를 받은 나라였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조선처럼 모두 사치를 금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사치금지법이 조선에서는 비교적 확실하게 지켜졌던 반면 일본과 중국에서 잘 지켜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의 경제적 수준이 일본의 막부나 중국의 황실에서 백성들의 사치를 금지한다고 해도 지켜지지 않을 정도로 풍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모든 백성들이 다 사치했다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사치풍조를 막으려고 해도 상업이 발달하고 수공업의 수준이 향상되는 등 경제적 수준이 높아지면, 문화적으로 한 발짝 진보한 것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사치금지법 등이 일시적으로 상업과 수공업을 위축시킬지라도, 봄날 새싹이 돋아나오듯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51-58쪽
조선은 17세기에 회회청(코발트)을 구할 경제적 외교적 능력이 부족해 청화백자 생산을 중단하고 철화백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일본은 나가사키를 들락거리는 네덜란드와 중국인 상인들을 통해 코발트를 구해 청화백자를 만들고, 그뿐만 아니라 유럽에 수출했다. 일본은 유럽에 중국도자기를 모방한 ‘짝퉁’ 청화백자의 시장을 확보했고, 점차 그 수요를 늘려 나갔다. 그리고 18세기부터는 진정한 의미의 일본 도자기의 유럽 시장을 창출해냈다.(중략)
17세기 전세계적으로 청화백자가 유행이던 시기에 경제적 이유로 철화백자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조선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부터 짝퉁 청화백자를 주문받아 유럽에 수출했던 일본은 이후 완전히 다른 국부의 축적과정을 형성해나갔다. 일본 도자기의 유럽 수출이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이끌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이다.17세기 조선의 철화백자는 물론 아름답다. 21세기의 현대적인 시선으로도 꽤나 멋지다. 그러나 철화백자의 아름다움 뒤에는 조선의 가난이 숨겨져 있다. -65-66쪽
신라시대 촌락문서에 기록된 442명의 주민 가운데 노비는 25명뿐으로 5.7%이다. 그때부터 700년쯤 흐른 조선 성종 때인 15세기 말에 이르면 노비의 수는 전체인구의 30%를 넘게 된다. (중략) 17세기 초반 경상도 산음현의 호적을 분석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양반은 23%, 양인은 60%, 천민은 18%였다. 즉 담세자가 60% 수준이었다. 왕실의 친인척과 관리들이 살았던 한성의 경우 신분별 인구비율은 양반 16%, 양인 30%, 노비 53%였다. 노비의 비율이 53%나 되는 것은 한성은 관리와 양반들이 거주하는 특수한 지역이고 이들의 시중을 드는 노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략) 노비가 20-30%에 이르는 인구구성 때문에 미국의 한국사학자 제임스 팔레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도 노예제 사회(Slave Society)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30%를 넘는 조선의 노비 비율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의 수준으로 아시아의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사회의 발전 단계가 서구에서 바라보는 원시-고대-중세로 일률적으로 구성되지는 않겠지만, 팔레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은 중세가 없이 고대 노예제 시대에서 근대로 건너뛰기를 한 것이다. -146-147쪽
노비문제를 두고 조선 왕실과 양반은 대립했다. 조선의 왕실은 양인층이 노비로 몰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또한 노비를 양인으로 확보하고자 애쓰기도 했다. 양인이 담세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 양반은 양인을 노비로 만들기 위해 양천교혼(良賤交婚)을 통해 그들의 자식까지도 노비로 만들고자 애썼다. 조선시대에 양인은 양인끼리만 결혼해야 했다. 그러나 양반들은 자신의 재산을 늘릴 요량으로 양천교혼을 일삼았다. 양반에게 노비는 토지와 더불어 중요한 재산이었던 탓이다. 양인을 확보하려던 조선의 왕실은 양반의 이해관계 때문에 번번히 양반들의 범법행위를 눈감아줘야 했다. 조선 왕실은 양천교혼 금지령을 자주 내렸지만, 양반사회였던 조선에서 양천교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양천교혼 금지령을 자주 내렸다는 것은 그만큼 양반들이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17세기 울산호적을 보면 양반의 노비 중 솔거노비의 94%가 양인 여자와 결혼했다.
-148-149쪽
일본 사학자 사카타 히로시가 경상도 대구 지방의 호적을 분석한 결과 1690년 9.2%에 불과하던 양반은 1858년이 되면 70.3%로 160여년 만에 수직 상승한다. 같은 시기 양인의 인구비율은 53.7%에서 절반 수준인 28.2%로 뚝 떨어진다. 담세자들이 20%대로 줄어든 것이다. 노비 등 천민은 37.1%에서 1.5%로 비중이 떨어졌다. 이는 조선후기 해방노비가 급증한 덕분이다. 드라마 ‘추노’처럼 도망 노비가 속출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경제적 토대가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50쪽
공식적으로 조선은 1886년 노비 세습제 폐지령을 내렸고, 1894년에 노비제도는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에서야 비인간적인 세습 노비가 사라진 상황은 이웃나라와 비교해 보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900년대에 이미 노비제를 폐지했다. 다른 형태의 천민제도인 게닌(下人)이 나타나 1871년 해방령이 내려질 때까지 지속됐지만, 공식적으로 노비제는 10세기에 폐지됐다.
중국에서는 노비가 세습되지 않았고 옹정제 때 마지막으로 세습적인 천민집단이 거의 없어졌다. 18세기 초 옹정제가 해방시킨 것이다.
(아래에 계속)-151쪽
(위에서 계속)
옹정제는 1723-1731년에 걸쳐 중국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사회적 법외인’으로 천대받고 차별받았던 집단들을 해방하는 칙령을 잇따라 선포했다. 결혼식이나 상가에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산시 지방의 노래하는 사람들, 저장 지역의 천민들, 안후이 지역의 세습적 하인들, 장쑤 지역의 세습적 걸인들, 동남 해안지역 뱃사공, 굴채취와 진주조개 어부로 살아가는 사람들, 저장성과 푸젠 성 경계지방에서 삼과 대마와 쪽물 재료들을 모아 살아가는 사람들, 가내 노비들이 그 대상이었다. 옹정제는 이들 천민 집단에도 염치있는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 고결한 인간이 되려고 하는 뜻있는 인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분해방의 기회를 주고, 천업을 그만 둔 자손에 대해 과거응시 자격도 부여했다.-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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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선
작가
문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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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문창극씨가 총리 후보로 지명되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낙마하는 일대 해프닝이 있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그가 한 과거의 발언 중에 식민사관을 옹호하는 듯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링크: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4940146&cloc=olink|article|default
워낙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그의 총리로서의 적합성 여부를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조선이 못나서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부분만 떼어 놓고 본다면, 나도 그 부분에는 일정 부분 공감한다. 물론 침략을 한 일본 제국의 잘못이 크다. 그러나 그 잘못을 논하기에 앞서, 침략을 당한 우리 스스로에게 문제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개인이건 민족이건, 수치스런 과거가 있었다면 그 원인을 밖에게서 찾기에 앞서서 스스로에게서 찾는 것이 건강한 태도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수치스런 과거의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는 사람은 과거의 문제점을 찾아서 고쳐 나감으로써 미래에는 같은 수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수치스런 과거의 원인을 밖에서 찾는 사람은 미래에도 동일한 수치를 당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민족이나 국가의 경우에도 똑 같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문창극씨의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은, 그의 발언을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성은 원래 열등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실제로 문창극씨가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강연내용만 가지고 판단하기에는 다소 의문이다). 나는 그런 사고방식 즉 ‘우리 민족성은 열등하다’는 것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성이 우수하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나는 ‘영구 불변의 민족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민족성’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고쳐 나갈 수 있다고 믿으며, 역사에서 그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성은 열등하다’라던가 ‘엽전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자조에 나는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못난 조선”은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단면을 부각시킴으로써 뼈아픈 반성을 일깨우는 매우 가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저널리스트의 책 답게 쉬운 문장으로 이해하기 쉽게 쓰여 있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권할 만하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론에 잘 요약되어 있다.(23쪽 이하)
한국인들은 흔히 근대 이전의 조선은 ‘선진국’, 일본은 ‘후진국’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문명의 흐름이 대륙에서 반도를 거쳐 섬나라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고전적인 문물의 이동경로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 이런 관점을 연장해 조선이 일본에 덜미를 잡히고 국력을 추월당한 시점을 1853년 일본의 개항 이후라고 추정한다.
… 좀더 곰곰이 따져보자. 조선은 19세기 말 개혁에 성공하지 못해서 일본에 추월당했을까. 일본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가 19세기 말 개혁의 실패 탓일까. 과연 그랬을까?
일본과 조선이 외세에 의해 각각 강제 개항하게 된 것은 일본은 1853년, 조선은 1876년이다. 두 나라의 개항은 불과 23년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지 23년만에 일본은 조선의 강화도에 와서 미국과 똑같은 불평등조약을 강요할 만틈 급속히 성장했다. 산술적으로만 따지자면 조선도 23년 뒤에 다른 나라에 찾아가 강제적으로 불평등조약을 요구할 만틈 국가가 성장했어야 맞지 않겠나. 그러나 조선을 그렇지 못했다.
그런 차이는 왜 발생한 것일까. 강제 개항을 앞두었던 두 나라의 경제적 토대가 이미 달랐다고 본다. … 중국과 조선, 일본을 비교해 보면, 개항에 앞서 일본이 이미 조선보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0년 이상 경제적으로 앞선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 18세기 무렵부터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문물교류 역전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문물은 더 이상 조선에서 일본으로 흐르지 않고 일본에서 조선으로 흘렀다. 18세기 초 일본에는 서양과의 교역을 토대로 서양의 자명종, 발전기, 서양의 세계지도, 아메리카의 고구마와 감자, 담배 등 서양의 과학기술과 신문물이 상당히 도입돼 있었다. 이것들은 조선의 부산을 통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혹자는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반박한다.(27쪽)
역발상을 해보자. 임진왜란이 역설적으로 조선과 일본의 국력이 역전됐음을 보여주는 주요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 현대전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전쟁 수행 능력 = 경제력’이었다. 16세기 말의 임진왜란은, 일본이 이미 서양식 총을 개량한 조총을 제작했고 16만 명의 군사를 먹일 수 있는 군량미를 조달할 경제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전쟁이다.
저자는 여기서 학계의 동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31쪽)
이런 문제의식을 해결하려 찾아본 동양사들에서 조선은 선진국, 일본은 후진국이라는 도식이 이미 깨져 있었다. 특히 서양의 학자들이 일본과 중국을 연구한 내용을 보면, 다시 말해 세계사적 흐름에서 조선사를 보면, 오히려 일본이 조선보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훨씬 앞섰다는 단서들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었다. 다행히 국사학자들은 최근 19세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조선의 문제를 아주 조심스럽게 조선의 내부, 지배계층인 양반들에게서 찾는 연구들을 내놓고 있다. 조선의 지배층이 사회를 정체시키고, 세계사적으로 새로운 흐름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학자들의 이 같은 문제의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연구들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는가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유를 제시한다.(31쪽)
첫째, ‘일본이 조선보다 더 앞서 있었다’고 발표했다가 감정적 민족주의자들에게 뭇매를 맞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 연구의 내용이 대중들을 분노하게 할까 우려해 국내 학자들은 16~18세기 조선과 일본을 비교하는 연구를 충분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국사학자들이 관련 연구를 발표해도 대중적 관심을 끌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언론에도 책임이 있다. 조선과 일본의 과거를 직시하는 진실한 연구논문이 나온다고 해도, 한국인의 자긍심을 해친다는 이유로 언론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황색 저널리즘적 성향이 강한 한국 언론은 반일감정, 혐일감정을 즐기는 편이다.
이후 저자는 한민족이 세계사의 흐름 속에 비추어 낙후된 모습을 하나 하나 열거하는데, 가장 구체적인 예를 든 것이 바로 “도자기”이다. 사실,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재를 열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바로 이 도자기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그런데 내 전공이 재료공학이다보니, 나는 대학 시절부터 도자기에 대해 조금은 관심을 가져 오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과연 우리의 도자기 문화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수준이었는가에 대해서, 사실은 진즉부터 조금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이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간결하고도 설득력있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폭로하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상당히 상세하게, 충분한 논거를 들어 서술하고 있는데, 아래 문장이 상당히 압축적으로 저자의 결론을 전달하고 있다.(67~68쪽)
17세기 조선의 철화백자는 물론 아름답다. 21세기의 현대적 시선으로도 꽤나 멋지다. 그러나 철화백자의 아름다움 뒤에는 조선의 가난이 숨겨져 있다. 청화백자를 제작할 것이냐, 철화백자를 제작할 것이냐의 문제는 각 나라의 문화적 취향의 차이가 아니었다. 한 나라의 경제적 수준을 나타내 주는 지표였던 것이다.
저자는 또 하나의 문화적 낙후성의 예로 미술을 언급하고 있다. 먼저 세계의 미술사가들이 우리 민족의 미술세계의 독자성을 18세기 이후의 것부터 언급하기 시작한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왜 18세기 이전의 한국 미술이 언급되지 못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03쪽 이하)
어떤 나라의 미술과 문화를 소개하려면, 그 나라만의 독특하고 창조적인 양식이 필요한데 한반도의 미술은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했다. 특히 남송시대 주희의 주자학을 건국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미술은 중국 회화와 다른 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또한 문인화는 선비의 이상향을 그리는 것인데, 그 철학적 배경마저도 중국의 문인화가 추구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조선의 수묵화는 본질적으로 공자나 주희가 꿈꾼 이상적 나라, 사회, 선비의 모습 등을 그리거나, 중국에서 들어온 최신 유행의 수묵화를 따라 그렸던 것이다. … 이런 이유로 중국 수묵화와 조선 수묵화를 구분하려면 수묵화나 한국화에 대한 전문 교육을 받았거나, 엄청난 수묵화 애호가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18세기 이후의 것들은 언급이 되기 시작하는가? 이에 대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06쪽)
한국인들이 애착을 가진 한복 바지저고리와 한옥이 보이고, 씨름하는 풍속이나 서당 등을 묘사한 그림은 18세기 후반에나 나타난다.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 긍제 김득신 등 조선 후기 풍속화가 3인방과, 오원 장승업 등이 활동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모두 18~19세기의 인물들이다. 좀 야박하게 말하자면 한국 민족의 독창성을 드러내는 미술작품은 5천년 찬란한 한국의 역사에서 지금으로부터 겨우 300년 전에야 비로소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일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본도 초기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견당사를 폐지하여 중국으로부터의 문화적 영향력이 줄어든 이후부터는 독자적인 발전을 시작한 것으로 본다.(108~9쪽)
… 일본 초기 회화양식이란 견당선을 폐지한 후 일본 사회의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중국풍의 화법인 당화(唐畵)와 구별되는 야마토화(大和畵)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만화인 풍자화 <쵸주기가>(鳥獸戱畵)가 나타나기도 한다. 1130년 경 역시 종이 두루마리에 의인화된 개구리와 토끼들이 웃고 있는 풍자화인 <쵸주기가>를 두고 미술사가 줄리언 벨은 “귀족들의 세련된 취미와 예법을 갖춘 조직을 형성하며 지배권을 획득해나가는 틈을 타고 불안정하고 파괴적인 요소가 문화공간에 나타난 것”이라고 평가한다. 불교의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쵸주기가>는 가볍지만 무거운 비판의 힘을 느끼게 한다.
※ 한마디로, 조선은 지배층의 문화적․사상적 종속성이 강력했기 때문에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독창성 있는 미술품을 내놓지 못했지만 일본은 그보다 전에 종속성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독창성 있는 미술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독창성”의 문제이다. 아무리 수준 높은 미술품을 내놓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중심국의 미술품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세계사적 관점에서 이를 다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문화, 경제, 사회, 정치로 나누어서 조선시대가 세계사의 흐름에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너무 큰 주제를 한 권의 책에 담으려다보니까 이 책에서 들고 있는 논거가 다소 편협하고(예를 들어, 문화의 낙후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자기와 회화를 예로 들고 있는데 그 두 가지 사례만으로 전반적인 문화의 낙후성을 입증하기에는 역부족이다)일부 논리의 비약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용기 있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낮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담
저널리스트 답게(?), 저자는 fact를 바탕으로 일정 부분 추리를 하기도 하는데 일부 갸웃한 부분도 없지는 않다. 예를 들어 저자는 조선인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해서 흰 옷을 입은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지만(49쪽),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조선인은 흰 옷을 좋아했다. 오죽하면 정부에서 흰 옷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려도 이를 무시하고 입었을 정도이다.
관련 링크: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41&contents_id=10069
[출처] 못난 조선|작성자 Peru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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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통치하지 못했으니, 백성은 경제적 궁핍에 내도록 시달렸으며...조선의 국력은 청화백자 조차 일종의 사치금지법으로 막을 지경이었던 그 시절. 오히려 채색 도자기 유행을 이끌며 중국과 일본이 각광 받은 사연을 비롯해 책은 조선의 문화와 경제, 사회와 정치를 찬찬히 살핀다.
책을 쓴 문소영 선배는 청와대 국회 등을 취재하는 훌륭한 정치부 기자였고, 글이 너무 매서운 탓인지(^^;;) 최근 몇 년 문화부에서 미술 등을 담당했다. 덕분에 도자기와 그림에 대한 얘기를 비롯해 문화와 사회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엮어내는 솜씨가 매끄럽다. (단언컨대 최근 문 선배에게 밥 얻어먹은 적 없음을 밝혀둡니다. 책은..2010년에 받은게 사실이지만^^;;) 기자가 쓴 책은 사실 빤하거나 깊이 있거나 인데.. 인용 수준만 봐도 놀라울 정도로 공을 들였다.
이런 책을 몰라보고, 팽개쳐두었던 무심한 후배로서 뒤늦게 리뷰로 예의를 갖추고 싶다. 책이 괜찮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얼마전 김탁환쌤의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을 읽고서 팔랑귀 답게 역사에 관심이 생겨 꺼내들었지만, 이제라도 읽어 얼마나 다행인지. 서론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국사학자들이 술자리에서는 "조선은 임진왜란이나 늦어도 병자호란 때 망했어야 했다"는 말이 나온다. 조선은 500년 넘게 왕조를 이어간 세계적으로 드문 왕조였다. 하지만 백성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편안하게 살게 했느냐는 의미에서 보면 성공적인 왕조는 아니었다. 중국의 왕조는 대체적으로 200~300년간 이어졌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가 망하게 된 원인을 파악하고, 국가를 일신했다.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고 제도개혁을 통해 나라를 혁신했다. 하지만 조선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권력이 500여 년 지속되자 혁신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이 아닐까?"
'못난 조선'을 돌아보는 것은 오늘을 곱씹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조선의 지배층이 저질렀던 실수를 찬찬히 살펴보면, 오늘날 정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권력을 유지하려던 사대부들이 '딴 말' 못하게 금지했던 것과 달리 오늘날에는 이견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란게 다를 뿐인데...
21세기 한국은 사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잘 사는 나라다. 하지만 기회가 어떻게 열릴지, 촉을 세워야 마땅하다. 결론 부분에서 몇 구절 더 인용한다.
"친북 종북 낙인찍는... 그러나 묻고 싶다. 북한과 친하게 지내면 정말로 안되나? 사회주의 종주국 중국, 과거 식민지배로 우리를 괴롭혔던 일본하고도 경제적, 외교적 이익을 내세워 친하게 지내고자 하는 판인데."
아니 이 분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말씀을..ㅠ 살짝 얼었다가...그런데 또 안될건 뭐지? "통일 없이 남한만으로 21세기를 무사히 통과해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에 어쩐지 끄덕.
'강한 대한민국'을 위해 1인당 국민소득 어쩌구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배타적 민족주의나 안하무인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변화에 대한 지치지 않는 노력과 개방성, 포용성, 다양성 등을 확보해나가야 한다. 가장 기초적으로 정부와 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너무 단순하고 간단한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계속 역사를 들여다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글은 제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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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 <못난 조선> 새창으로 보기
mizuaki ㅣ 2013-10-14 ㅣ 공감(1) ㅣ 댓글 (1)
(도기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흙을 굽는 온도다. 도기는 섭씨 800-90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굽고 자기는 섭씨 13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굽는다. (중략) 도자기 원조 국가인 중국이 고화도 자기를 굽기 시작한 것은 7세기 무렵이었다. (중략) 신라 말에 장인들이 스스로 터득했든지 아니면 중국의 혼란기에 월주요의 장인들이 흩어져 고려로 들어와 자기기술을 전수했든지 간에 늦어도 10세기 후반에는 고려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중략) 16세기까지 자기를 만들 수 있었던 민족은 전세계적으로 중국, 한국, 베트남밖에 없었다고 하니, 10세기 안팎의 고려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소유한 나라였다고 자부해도 된다.-39-42쪽
조선에서 백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중국 명나라의 백자가 소개된 덕분이었다. 명나라의 백자는 순수한 백자가 아니라 서양에서 ‘블루 앤 화이트’로 부르는 청화백자였다. 푸른색 안료(코발트)로 새하얀 도자기 위에 용이나 새, 중국 산수화 등을 그려 넣은 자기였다. (중략)중국에서 청화백자의 수출을 금지하자 조선 왕실은 직접 백자 생산을 지시했다. (중략) 청화백자의 몸통인 백자 만들기에 성공하자 15세기 중반, 세조 때부터 백자 위에 코발트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 제작에 본격적으로 들어간다. 즉, 조선의 백자는 원래 명나라의 청화백자와 닮은 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지 단지 하얗게 빛나는 백자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순백자가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략) 코발트를 수입해 청화자기를 생산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조선 왕실은 국산 코발트를 발굴하려고 노력하 정도로 청화백자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중략) 그러나 전문가들은 청화자기 안료를 국산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노력은 실패했다고 분석한다. 세조와 예종 때를 지난 뒤에는 기록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에 계속)-51-58쪽
(위에서 계속)
조선 왕실과 사대부는 계속 푸른색 그림이 그려진 백자를 구하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의 청화백자 사용을 법으로 금지했다. (중략) 조선 후기 즉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세계적인 도자기의 유행은 청화백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여러 가지 색으로 꽃이나 새 등 도안을 채색한 채색도자기로 진화했다. 일본식 채색도자기의 도약이었다. 18세기에는 채색도자기의 원조인 중국조차도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기 위해 일본식 채색도자기를 모방해야 할 정도로 유럽에서 인기를 모았다. (중략) 백의민족의 이미지를 강조해주는 조선의 백자는 이런 세계적인 도자기 시장의 흐름에서 완전히 비켜난 결과에 불과하다.
(아래에 계속)-51-58쪽
(위에서 계속)
조선의 사치금지법이 아니었으면 조선에서도 채색자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마디 더 추가하겠다. 일본에서도 1787년에 사치생활 금지법이 발효되었다. (중략) 중국도 명나라 등에서 종종 사치금지법을 내리곤 했다. 중국이나 일본 모두 유교의 세례를 받은 나라였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조선처럼 모두 사치를 금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사치금지법이 조선에서는 비교적 확실하게 지켜졌던 반면 일본과 중국에서 잘 지켜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의 경제적 수준이 일본의 막부나 중국의 황실에서 백성들의 사치를 금지한다고 해도 지켜지지 않을 정도로 풍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모든 백성들이 다 사치했다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사치풍조를 막으려고 해도 상업이 발달하고 수공업의 수준이 향상되는 등 경제적 수준이 높아지면, 문화적으로 한 발짝 진보한 것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사치금지법 등이 일시적으로 상업과 수공업을 위축시킬지라도, 봄날 새싹이 돋아나오듯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51-58쪽
조선은 17세기에 회회청(코발트)을 구할 경제적 외교적 능력이 부족해 청화백자 생산을 중단하고 철화백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일본은 나가사키를 들락거리는 네덜란드와 중국인 상인들을 통해 코발트를 구해 청화백자를 만들고, 그뿐만 아니라 유럽에 수출했다. 일본은 유럽에 중국도자기를 모방한 ‘짝퉁’ 청화백자의 시장을 확보했고, 점차 그 수요를 늘려 나갔다. 그리고 18세기부터는 진정한 의미의 일본 도자기의 유럽 시장을 창출해냈다.(중략)
17세기 전세계적으로 청화백자가 유행이던 시기에 경제적 이유로 철화백자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조선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부터 짝퉁 청화백자를 주문받아 유럽에 수출했던 일본은 이후 완전히 다른 국부의 축적과정을 형성해나갔다. 일본 도자기의 유럽 수출이 메이지유신의 성공을 이끌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이다.17세기 조선의 철화백자는 물론 아름답다. 21세기의 현대적인 시선으로도 꽤나 멋지다. 그러나 철화백자의 아름다움 뒤에는 조선의 가난이 숨겨져 있다. -65-66쪽
신라시대 촌락문서에 기록된 442명의 주민 가운데 노비는 25명뿐으로 5.7%이다. 그때부터 700년쯤 흐른 조선 성종 때인 15세기 말에 이르면 노비의 수는 전체인구의 30%를 넘게 된다. (중략) 17세기 초반 경상도 산음현의 호적을 분석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양반은 23%, 양인은 60%, 천민은 18%였다. 즉 담세자가 60% 수준이었다. 왕실의 친인척과 관리들이 살았던 한성의 경우 신분별 인구비율은 양반 16%, 양인 30%, 노비 53%였다. 노비의 비율이 53%나 되는 것은 한성은 관리와 양반들이 거주하는 특수한 지역이고 이들의 시중을 드는 노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략) 노비가 20-30%에 이르는 인구구성 때문에 미국의 한국사학자 제임스 팔레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도 노예제 사회(Slave Society)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30%를 넘는 조선의 노비 비율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의 수준으로 아시아의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라는 분석이다. 사회의 발전 단계가 서구에서 바라보는 원시-고대-중세로 일률적으로 구성되지는 않겠지만, 팔레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은 중세가 없이 고대 노예제 시대에서 근대로 건너뛰기를 한 것이다. -146-147쪽
노비문제를 두고 조선 왕실과 양반은 대립했다. 조선의 왕실은 양인층이 노비로 몰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또한 노비를 양인으로 확보하고자 애쓰기도 했다. 양인이 담세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면 양반은 양인을 노비로 만들기 위해 양천교혼(良賤交婚)을 통해 그들의 자식까지도 노비로 만들고자 애썼다. 조선시대에 양인은 양인끼리만 결혼해야 했다. 그러나 양반들은 자신의 재산을 늘릴 요량으로 양천교혼을 일삼았다. 양반에게 노비는 토지와 더불어 중요한 재산이었던 탓이다. 양인을 확보하려던 조선의 왕실은 양반의 이해관계 때문에 번번히 양반들의 범법행위를 눈감아줘야 했다. 조선 왕실은 양천교혼 금지령을 자주 내렸지만, 양반사회였던 조선에서 양천교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양천교혼 금지령을 자주 내렸다는 것은 그만큼 양반들이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17세기 울산호적을 보면 양반의 노비 중 솔거노비의 94%가 양인 여자와 결혼했다.
-148-149쪽
일본 사학자 사카타 히로시가 경상도 대구 지방의 호적을 분석한 결과 1690년 9.2%에 불과하던 양반은 1858년이 되면 70.3%로 160여년 만에 수직 상승한다. 같은 시기 양인의 인구비율은 53.7%에서 절반 수준인 28.2%로 뚝 떨어진다. 담세자들이 20%대로 줄어든 것이다. 노비 등 천민은 37.1%에서 1.5%로 비중이 떨어졌다. 이는 조선후기 해방노비가 급증한 덕분이다. 드라마 ‘추노’처럼 도망 노비가 속출하기도 했는데,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경제적 토대가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50쪽
공식적으로 조선은 1886년 노비 세습제 폐지령을 내렸고, 1894년에 노비제도는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에서야 비인간적인 세습 노비가 사라진 상황은 이웃나라와 비교해 보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900년대에 이미 노비제를 폐지했다. 다른 형태의 천민제도인 게닌(下人)이 나타나 1871년 해방령이 내려질 때까지 지속됐지만, 공식적으로 노비제는 10세기에 폐지됐다.
중국에서는 노비가 세습되지 않았고 옹정제 때 마지막으로 세습적인 천민집단이 거의 없어졌다. 18세기 초 옹정제가 해방시킨 것이다.
(아래에 계속)-151쪽
(위에서 계속)
옹정제는 1723-1731년에 걸쳐 중국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사회적 법외인’으로 천대받고 차별받았던 집단들을 해방하는 칙령을 잇따라 선포했다. 결혼식이나 상가에서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산시 지방의 노래하는 사람들, 저장 지역의 천민들, 안후이 지역의 세습적 하인들, 장쑤 지역의 세습적 걸인들, 동남 해안지역 뱃사공, 굴채취와 진주조개 어부로 살아가는 사람들, 저장성과 푸젠 성 경계지방에서 삼과 대마와 쪽물 재료들을 모아 살아가는 사람들, 가내 노비들이 그 대상이었다. 옹정제는 이들 천민 집단에도 염치있는 마음을 가지고 스스로 고결한 인간이 되려고 하는 뜻있는 인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분해방의 기회를 주고, 천업을 그만 둔 자손에 대해 과거응시 자격도 부여했다.-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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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조선
작가
문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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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문창극씨가 총리 후보로 지명되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낙마하는 일대 해프닝이 있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그가 한 과거의 발언 중에 식민사관을 옹호하는 듯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링크: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4940146&cloc=olink|article|default
워낙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그의 총리로서의 적합성 여부를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조선이 못나서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부분만 떼어 놓고 본다면, 나도 그 부분에는 일정 부분 공감한다. 물론 침략을 한 일본 제국의 잘못이 크다. 그러나 그 잘못을 논하기에 앞서, 침략을 당한 우리 스스로에게 문제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개인이건 민족이건, 수치스런 과거가 있었다면 그 원인을 밖에게서 찾기에 앞서서 스스로에게서 찾는 것이 건강한 태도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수치스런 과거의 원인을 스스로에게서 찾는 사람은 과거의 문제점을 찾아서 고쳐 나감으로써 미래에는 같은 수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수치스런 과거의 원인을 밖에서 찾는 사람은 미래에도 동일한 수치를 당하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민족이나 국가의 경우에도 똑 같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문창극씨의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은, 그의 발언을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성은 원래 열등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실제로 문창극씨가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강연내용만 가지고 판단하기에는 다소 의문이다). 나는 그런 사고방식 즉 ‘우리 민족성은 열등하다’는 것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성이 우수하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에 나는 ‘영구 불변의 민족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민족성’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고쳐 나갈 수 있다고 믿으며, 역사에서 그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성은 열등하다’라던가 ‘엽전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자조에 나는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못난 조선”은 우리 역사의 부끄러운 단면을 부각시킴으로써 뼈아픈 반성을 일깨우는 매우 가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저널리스트의 책 답게 쉬운 문장으로 이해하기 쉽게 쓰여 있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권할 만하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서론에 잘 요약되어 있다.(23쪽 이하)
한국인들은 흔히 근대 이전의 조선은 ‘선진국’, 일본은 ‘후진국’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문명의 흐름이 대륙에서 반도를 거쳐 섬나라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고전적인 문물의 이동경로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 이런 관점을 연장해 조선이 일본에 덜미를 잡히고 국력을 추월당한 시점을 1853년 일본의 개항 이후라고 추정한다.
… 좀더 곰곰이 따져보자. 조선은 19세기 말 개혁에 성공하지 못해서 일본에 추월당했을까. 일본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가 19세기 말 개혁의 실패 탓일까. 과연 그랬을까?
일본과 조선이 외세에 의해 각각 강제 개항하게 된 것은 일본은 1853년, 조선은 1876년이다. 두 나라의 개항은 불과 23년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지 23년만에 일본은 조선의 강화도에 와서 미국과 똑같은 불평등조약을 강요할 만틈 급속히 성장했다. 산술적으로만 따지자면 조선도 23년 뒤에 다른 나라에 찾아가 강제적으로 불평등조약을 요구할 만틈 국가가 성장했어야 맞지 않겠나. 그러나 조선을 그렇지 못했다.
그런 차이는 왜 발생한 것일까. 강제 개항을 앞두었던 두 나라의 경제적 토대가 이미 달랐다고 본다. … 중국과 조선, 일본을 비교해 보면, 개항에 앞서 일본이 이미 조선보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0년 이상 경제적으로 앞선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 18세기 무렵부터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문물교류 역전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문물은 더 이상 조선에서 일본으로 흐르지 않고 일본에서 조선으로 흘렀다. 18세기 초 일본에는 서양과의 교역을 토대로 서양의 자명종, 발전기, 서양의 세계지도, 아메리카의 고구마와 감자, 담배 등 서양의 과학기술과 신문물이 상당히 도입돼 있었다. 이것들은 조선의 부산을 통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혹자는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이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반박한다.(27쪽)
역발상을 해보자. 임진왜란이 역설적으로 조선과 일본의 국력이 역전됐음을 보여주는 주요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 현대전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전쟁 수행 능력 = 경제력’이었다. 16세기 말의 임진왜란은, 일본이 이미 서양식 총을 개량한 조총을 제작했고 16만 명의 군사를 먹일 수 있는 군량미를 조달할 경제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전쟁이다.
저자는 여기서 학계의 동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31쪽)
이런 문제의식을 해결하려 찾아본 동양사들에서 조선은 선진국, 일본은 후진국이라는 도식이 이미 깨져 있었다. 특히 서양의 학자들이 일본과 중국을 연구한 내용을 보면, 다시 말해 세계사적 흐름에서 조선사를 보면, 오히려 일본이 조선보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훨씬 앞섰다는 단서들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었다. 다행히 국사학자들은 최근 19세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조선의 문제를 아주 조심스럽게 조선의 내부, 지배계층인 양반들에게서 찾는 연구들을 내놓고 있다. 조선의 지배층이 사회를 정체시키고, 세계사적으로 새로운 흐름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학자들의 이 같은 문제의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연구들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는가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유를 제시한다.(31쪽)
첫째, ‘일본이 조선보다 더 앞서 있었다’고 발표했다가 감정적 민족주의자들에게 뭇매를 맞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 연구의 내용이 대중들을 분노하게 할까 우려해 국내 학자들은 16~18세기 조선과 일본을 비교하는 연구를 충분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국사학자들이 관련 연구를 발표해도 대중적 관심을 끌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언론에도 책임이 있다. 조선과 일본의 과거를 직시하는 진실한 연구논문이 나온다고 해도, 한국인의 자긍심을 해친다는 이유로 언론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황색 저널리즘적 성향이 강한 한국 언론은 반일감정, 혐일감정을 즐기는 편이다.
이후 저자는 한민족이 세계사의 흐름 속에 비추어 낙후된 모습을 하나 하나 열거하는데, 가장 구체적인 예를 든 것이 바로 “도자기”이다. 사실,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재를 열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바로 이 도자기라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그런데 내 전공이 재료공학이다보니, 나는 대학 시절부터 도자기에 대해 조금은 관심을 가져 오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과연 우리의 도자기 문화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수준이었는가에 대해서, 사실은 진즉부터 조금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이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간결하고도 설득력있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폭로하고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상당히 상세하게, 충분한 논거를 들어 서술하고 있는데, 아래 문장이 상당히 압축적으로 저자의 결론을 전달하고 있다.(67~68쪽)
17세기 조선의 철화백자는 물론 아름답다. 21세기의 현대적 시선으로도 꽤나 멋지다. 그러나 철화백자의 아름다움 뒤에는 조선의 가난이 숨겨져 있다. 청화백자를 제작할 것이냐, 철화백자를 제작할 것이냐의 문제는 각 나라의 문화적 취향의 차이가 아니었다. 한 나라의 경제적 수준을 나타내 주는 지표였던 것이다.
저자는 또 하나의 문화적 낙후성의 예로 미술을 언급하고 있다. 먼저 세계의 미술사가들이 우리 민족의 미술세계의 독자성을 18세기 이후의 것부터 언급하기 시작한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왜 18세기 이전의 한국 미술이 언급되지 못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03쪽 이하)
어떤 나라의 미술과 문화를 소개하려면, 그 나라만의 독특하고 창조적인 양식이 필요한데 한반도의 미술은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했다. 특히 남송시대 주희의 주자학을 건국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미술은 중국 회화와 다른 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또한 문인화는 선비의 이상향을 그리는 것인데, 그 철학적 배경마저도 중국의 문인화가 추구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조선의 수묵화는 본질적으로 공자나 주희가 꿈꾼 이상적 나라, 사회, 선비의 모습 등을 그리거나, 중국에서 들어온 최신 유행의 수묵화를 따라 그렸던 것이다. … 이런 이유로 중국 수묵화와 조선 수묵화를 구분하려면 수묵화나 한국화에 대한 전문 교육을 받았거나, 엄청난 수묵화 애호가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18세기 이후의 것들은 언급이 되기 시작하는가? 이에 대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06쪽)
한국인들이 애착을 가진 한복 바지저고리와 한옥이 보이고, 씨름하는 풍속이나 서당 등을 묘사한 그림은 18세기 후반에나 나타난다.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 긍제 김득신 등 조선 후기 풍속화가 3인방과, 오원 장승업 등이 활동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모두 18~19세기의 인물들이다. 좀 야박하게 말하자면 한국 민족의 독창성을 드러내는 미술작품은 5천년 찬란한 한국의 역사에서 지금으로부터 겨우 300년 전에야 비로소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일본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본도 초기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견당사를 폐지하여 중국으로부터의 문화적 영향력이 줄어든 이후부터는 독자적인 발전을 시작한 것으로 본다.(108~9쪽)
… 일본 초기 회화양식이란 견당선을 폐지한 후 일본 사회의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중국풍의 화법인 당화(唐畵)와 구별되는 야마토화(大和畵)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만화인 풍자화 <쵸주기가>(鳥獸戱畵)가 나타나기도 한다. 1130년 경 역시 종이 두루마리에 의인화된 개구리와 토끼들이 웃고 있는 풍자화인 <쵸주기가>를 두고 미술사가 줄리언 벨은 “귀족들의 세련된 취미와 예법을 갖춘 조직을 형성하며 지배권을 획득해나가는 틈을 타고 불안정하고 파괴적인 요소가 문화공간에 나타난 것”이라고 평가한다. 불교의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쵸주기가>는 가볍지만 무거운 비판의 힘을 느끼게 한다.
※ 한마디로, 조선은 지배층의 문화적․사상적 종속성이 강력했기 때문에 세계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독창성 있는 미술품을 내놓지 못했지만 일본은 그보다 전에 종속성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독창성 있는 미술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독창성”의 문제이다. 아무리 수준 높은 미술품을 내놓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중심국의 미술품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 세계사적 관점에서 이를 다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문화, 경제, 사회, 정치로 나누어서 조선시대가 세계사의 흐름에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너무 큰 주제를 한 권의 책에 담으려다보니까 이 책에서 들고 있는 논거가 다소 편협하고(예를 들어, 문화의 낙후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자기와 회화를 예로 들고 있는데 그 두 가지 사례만으로 전반적인 문화의 낙후성을 입증하기에는 역부족이다)일부 논리의 비약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용기 있는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낮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담
저널리스트 답게(?), 저자는 fact를 바탕으로 일정 부분 추리를 하기도 하는데 일부 갸웃한 부분도 없지는 않다. 예를 들어 저자는 조선인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해서 흰 옷을 입은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지만(49쪽),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조선인은 흰 옷을 좋아했다. 오죽하면 정부에서 흰 옷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려도 이를 무시하고 입었을 정도이다.
관련 링크: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41&contents_id=10069
[출처] 못난 조선|작성자 Peru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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