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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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선원이었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이 1653년 상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난파되어 제주도에 표류하고 조선에서 13년 동안이나 억류되어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 탈출하여 1668년 네덜란드로 귀국하기까지의 개고생여정을 기록한 책. 전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보러가기
17세기 조선의 생활상을 세세하게 기록한 최초의 유럽 서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원래는 억류되어 있는 동안 밀려있던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동인도회사에 제출한 일종의 보고서이고, 때문에 자신들이 고생한 부분을 과장했다는 평도 존재한다.
17세기 조선의 생활상을 세세하게 기록한 최초의 유럽 서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원래는 억류되어 있는 동안 밀려있던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동인도회사에 제출한 일종의 보고서이고, 때문에 자신들이 고생한 부분을 과장했다는 평도 존재한다.
2. 하멜의 표류기[편집]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찬〔吉利是段〕인가?’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1],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 제주도)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2]라 하였습니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 여행이 금지된 곳. 한양)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제주도에 표류하게된 하멜과 일행 38명은 권극중과 노정이 보낸 군대에 의해 잡히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양까지 불러와서 벼슬도 시켜주고 나름대로 잘 대해줬지만 하멜 일행중 두사람이 청나라 사신들에게 달려들어 집으로 보내달라고 난동을 부리는 사건으로 일행 전원의 목숨까지 위태로워졌다가 귀양으로 끝났다.[3] 게다가 하멜이 13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탈출할 때까지 조선 조정은 그들이 남만인인[4] 줄 알고있었다가 나중에 하멜을 심문했던 일본측의 통보를 받고서야 네덜란드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일본 에도 막부는 하멜에게서 조선의 상황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은 다음 이를 무기로 조선을 외교적으로 압박했다.
여담이지만 고향 말조차 거의 잊고 조정에서도 불려다닐 정도로 자리잡은 벨테브레이(박연)와 길거리에서 끌려다니면서 거의 신기한 '생물' 수준의 구경거리가 되는 하멜 일행의 모습이 참 대조적이다. 헌데 박연은 "여기 들어온 이상 나갈 생각 말아라."라는 식으로 말하니...사실 하멜 일행도 몇 번씩 탈출 시도를 하고 몇 번씩 또 실패하면서 탈출에 성공했다. 중국 사신이 오는 것을 알고 길막한 뒤 단체로 호소를 하거나, 아는 어부를 회유해 배를 구입하거나...
그렇다고 섣불리 일본으로 보내줄 수도 없는 것이 효종은 북벌을 추진 중이었는데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었고 효종은 가뜩이나 약점이 잔뜩 잡힌 판국에 또 조선 사정을 알게 된 외국인이 들어왔으니 유용하게 부려먹을지언정 내보낼 수는 없다고 판단했었고[5] 거기에 더해 당시 일본으로 인도한 청나라 사람, 대만 사람, 유구국 사람들이 기독교도라고 마구 참수되는 일이 적잖았는데 하멜 일행은 자신들이 모두 기리시단이라고 일본말로 진술한 바가 있어 조선에서는 얘들 보냈다간 다 죽는다면서 잡아두자고도 했다. 실제로 하멜이 데지마로 간 이후 그가 기독교도인지 아닌지를 일본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런데 자신이 기독교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풀려났는지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라고 해서 풀려났는지는 추가 바람
아마 당시 데지마에서는 후미에라는 방법으로 키리시탄을 가려냈었고, 칼뱅파 개신교도며 이미 본토에서 성상 파괴 운동이 진행됐었던 네덜란드인은 후미에를 하는데에 거리낌이 없었을것이다.
하멜 표류기가 서구 중심적이며 조선에서 잘해줬는데도 악담을 늘어놓았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이유에는 하멜 표류기에는
"조선인은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 되지 못한다. 남을 속여 넘기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한 일로 여긴다. 그들은 여자같이 나약한 백성이다. 타르타르(청나라)가 얼음을 건너와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 적과 싸워 죽은 것보다 산으로 도망해서 목매달아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그들은 피를 싫어한다. 전투에서 누군가가 쓰러지면 곧 달아나고 만다."
라는 구절과
"한 여인이 남편을 죽였다. 관아에서는 이 여인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한길 가에다가 어깨까지 파묻었다. 그 여자 옆에는 나무톱을 놓아두었는데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양반을 제외하고 누구나 그 톱으로 한 번씩 그녀가 죽을 때까지 목을 잘라야 한다."[6]
라는 구절이 있고 당시 조선의 사회상과 형벌, 민족성을 하멜이 적어놓았기 때문이다. 보러가기
다만 하멜이 서양인이니 당연히 서구 중심적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고, 조선이 하멜에게 대우한 것도 피장파장이라고 생각해야 할듯. 실제로 대우가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다. 첫 탈출 실패 이전의 대접은 융숭했긴했지만 억지로 잡혔으니 벗어나고 싶은건 이상할게 아니다.아무리 잘 대해준다 한들 고향 가고싶은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무조건 욕한 것도 아니다. 하멜 표류기를 읽어보면 내용이 상당히 객관적이지 '저 더러운 야만인 이교도들이 우릴 괴롭혔어염.' 하면서 징징대는 구절은 없어서 일부 학자들은 '이 인간은 피도 눈물도 없나? 십수년간 고생한 얘기를 쓰면서 뭐 이리 밋밋해?' 라면서 마치 영수증을 보는 것 같다라고 평하기도 했다사실 밀린 임금 타내려는 보고서니 영수증맞다. 오히려 '내가 이 이교도들에게 받은 대접은 어떤 기독교도에게 받은 대접보다 좋았다'라는 구절이라든지 조선인들은 정이 많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평한 부분도 많고 자신들에게 호의적으로 접근하여 같이 교류한 승려들이나 전라수사 이도빈, 제주목사 이원진 등의 경우에는 매우 긍정적이고 호의적으로 서술했다. 뭐 자신들 좋게 봐준 사람을 나쁘게 써서 뭐하려만은.... 그리고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하멜이 좋게 서술한 수사들은 대개 조정에서 공이 크다면서 서울로 불러 높은 벼슬을 줬고 하멜이 깐 수사들이나 병사들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무능하고 탐욕한 탐관오리라고 역시 디스를 해서 그의 사람보는 안목도 제법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달리 생각해 보면 탐관오리놈들이 다른 어떤 부분에서는 가식을 떨더라도 표류해와서 끈 떨어진 외국 오랑캐를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잘 대해줄 리도 만무하기 때문에..
3. 기타사항[편집]
[1] ja는 네덜란드어로 '그렇다'는 뜻[2] 당시 나가사키에는 일본에서 몇안되게 외국인의 체류가 인정된 인공섬 데지마가 있었다.[3] 여담으로 전 항목에는 단순히 가뭄이 들어서 귀양보내 부려먹었다고 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됐다면 벨테브레이나 수많은 명나라 귀순 병사들은 왜 남겨두고 얘들만 보냈겠냐는 의문이 생긴다.[4] 남만은 동이-서융-남만-북적, 즉 남쪽 오랑캐를 의미한다. 즉 그냥 이런 하얀놈들 사는 어떤 동네. 그들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이딴 식으로 국가를 세웠다는 사실 자체는 아예 모르고 얘들은 남만인 중에서도 화란인이다 라는 일본의 통보를 받고서야 그런 나라도 있구나 했다.[5] 정작 다른 왕 때 들어온 미국인들의 경우에는 그냥 청나라로 보내버렸다. 당시 기사를 보면 이들의 국적을 '견미리'로 표현했는데, 이를 현대 표준중국어로 읽으면 '메이리전' 정도가 된다. '아메리칸'에서 '아'는 슈와, 이른바 약한 어 모음이므로 '메리칸' 정도로 들렸을 것이고 이게 메이리전으로 음차된 것으로 추측.[6] 이런 처형 방식은 에도시대 6가지 처형 방식 중 하나인 노코기리비키(鋸挽き)와 정확히 일치한다. 하멜이 일본에서 본 처형 장면을 조선에서 본 것으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은 대명률에 따라 처벌했는데 아내가 남편을 죽인 경우 참형, 남편이 아내를 죽인 경우 교형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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