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30

건건록 -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 비록 무쓰 무네미쓰,나카츠카 아키라 2021

건건록 -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 비록 
무쓰 무네미쓰,나카츠카 아키라
(지은이),이용수 (옮긴이)
2021-08-20
원제 : 蹇蹇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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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es Point : 255

10.0 100자평(1)리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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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27,000원



474쪽










책소개
『건건록蹇蹇錄』은 청일전쟁 당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가 동학농민운동의 발발부터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국간섭, 일청강화조약까지의 외교사안을 서술한 책이다.

무쓰 무네미쓰는 ‘외무성의 공문기록을 기초로 하면서도 공식 문서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진의를 드러내어 외교의 진면목을 다시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혔으나 일본과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삭제했다. 새로운 번역과 청일전쟁연구의 권위자인 나카쓰카 아키라의 해설과 교주를 통해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킨 최종목적과 청일전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다.


목차


서언
제1장 동학당의 난

동학당의 난 ■ 조선국 파병의 내각 회의 결정 ■ 일청 양국의 조선에서의 권력다툼 ■ 위안스카이袁世凱, 왕봉조汪鳳藻 등의 오판 ■ 조선 국왕, 청국에 원병을 청함

제2장 일청 양국 군대의 조선 파견

톈진조약 ■ 청국 정부가 조선국에 파병함을 우리 정부에 공문으로 통보함 ■ 청국 정부의 공문에 있는 ‘보호속방’이라는 말에 대한 제국 정부의 항의 ■ 제국 정부가 청국 정부에 대해 조선국에 파병한다는 공문 통보

제3장 오토리 특명전권공사의 귀임 및 취임 후 조선의 형세

오토리 특명전권공사의 귀임 ■ 오토리 공사, 해병을 인솔하여 경성에 들어가다 ■ 조선에서의 구미 각국 관민官民의 정황

제4장 조선국 내정 개혁을 위한 일청 양국 공동위원 파견 제안

일청 양국 공동위원의 조선 파견에 관한 각의 ■ 일청 양국 공동위원회의 조선국 파견에 대해 청국 특명전권공사 왕봉조를 거쳐 동 정부에 공문으로 통보함 ■ 일청 공동위원설립 제안에 대한 청국 정부로부터의 이의 ■ 청국 정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제1차 절교서

제5장 조선 개혁과 청한 종속 문제에 관한 개설

서구적 신문명과 동아적 구문명의 충돌 ■ 조선 내정 개혁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 조야朝野의 여론 ■ 조선 문제에 관한 주제와 객제의 관계더보기



책속에서


P. 20 “만약 청국에서 어떤 명분이든지 간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에는 일본 또한 그에 상다한 군대를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뜻밖의 변화에 대비하고, 일청 양국이 조선에 대해 권력을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 - P
P. 49 “바야흐로 우리 외교는 백척간두의 일보를 내디뎠다.” - P
P. 55 “제국 정부는 결단코 현재 조선국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 - P
P. 142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어떤 구실을 써도 지장 없다. 실제의 움직임을 개시하라.” - P
P. 76 “23일 새벽을 기하여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약간의 병력을 급히 입경케 하였을 때 왕궁 근방에서 갑자기 조선 병사가 먼저 발포함에 따라 우리 군은 이를 추격하여 성문을 밀어 열고 궐내로 진입했다.”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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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무쓰 무네미쓰 (陸奧宗光)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844~1897)
에도江戸 막부 말기 기슈번紀州藩(와카야마현和歌山県) 출신 무사武士. 메이지明治 시대 외교관, 정치가. 메이지 초의 판적봉환, 폐번치현, 징병령, 지조개정 등에 큰 영항을 끼쳤다.
10대 중반에 에도에 유학, 야쓰이 솟켄安井息軒, 미즈모토 나루미水本成美 등에게 배우면서 도사土佐의 사카모토 료마坂本竜馬, 죠슈長州의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교유했다. 1863년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고베神戸 해군조련소에 들어갔고, 1867년 이후 사카모토 료마의 가이엔타이海援隊에서 활동하며 시종일관 그와 행동을 같이 했다. 료마가 암살된 후 복수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덴만야天満屋사건).
메이지 신정부에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의 천거로 외국사무국에서 관직을 처음 맡았다. 그 후 효고현兵庫県 지사(1869),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지사(1871)를 지냈으나 삿쵸薩長의 번벌 정치에 격분, 사직하고 와카야마로 낙향했다. 1877년 고치현高知県 도사의 자유민권운동 정치단체 릿시샤立志社의 정부전복기도에 연루되어 금고 5년형으로 투옥된다. 1883년 1월 특사로 출옥한 뒤 이토 히로부미의 권유로 유럽에 유학, 런던과 빈에서 내각제도, 의회, 민주정치 등에 관해 공부했다.
1886년 귀국, 변리공사 직책으로 외무성에 들어간 후 주미 공사, 농상대신을 거쳐 중의원 의원이 된다. 1892년 이토 히로부미 제2차 내각의 외무대신(제5대)에 취임, 청일전쟁 개전 직전 1894년 7월 16일, 영일통상항해조약을 체결, 막말 이래 불평등조약인 영사재판권 철폐에 성공한다. 이후 미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과도 조약을 개정. 그해 7월 25일 발발한 청일전쟁의 전후 과정 및 삼국간섭의 외교를 주도하여 ‘무쓰외교’라는 말이 생겼다.‘면도칼 대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일본 외무성 구내에 유일하게 그의 동상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접기

최근작 : <건건록>,<건건록> … 총 4종 (모두보기)

나카츠카 아키라 (中塚明) (지은이)


오사카大阪 출신. 교토京都대 사학과 졸업. 일본근대사 전공. 1960년대부터 근대 일본 역사에서 ‘조
선 문제의 중요성’을 자각, 청일전쟁을 비롯한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사 등 조일관계 역사를 주로
연구했다. 1963년부터 나라奈良여자대학 문학부 강사, 조교수, 교수로 근무하며 1993년에 정년
퇴임. 그 사이 조선사연구회 간사, 역사과학 연구회 대표위원, 일본학술회의 회원 등을 지냈다. 나
라여자대학 명예교수.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대표적 지성인으로 꼽힌다.
저서에 『日淸戦爭の硏究』(1968), 『近代日本と朝鮮』(1969), 『蹇蹇錄の世界』(1992), 『近代日本の朝鮮認識』(1993), 『歷史の仕造をただす』(1997), 『歷史家の仕事』(2000), 『これだけは知っておきたい日本と韓国·朝鮮の歷史』(2002), 『司馬遼太郞の歷史観- その‘朝鮮観’と‘明治栄光
論’を問う』(2009)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건건록>,<동학농민전쟁과 일본>,<현대 일본의 역사인식> … 총 8종 (모두보기)

이용수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연세대학교 및 동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일본근세사상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에도시대 일본사상에 주목하여, 일본근세・근대사상의 본질과 근대화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연세대・한국항공대・경희대에서 동양철학과 일본의 사상・문화를 강의하였다. 현재 동아시아문화사상연구소장,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전문연구원으로 있다.
「다산 정약용과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실학관 비교」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고, 역서에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사상>(源了圓, <德川思想小史>, 2000), <일본사상으로 본 일본의 본질>(前田勉, <兵学と朱子学・蘭学・国学-近世日本思想史の構図>, 2014), <에도 후기의 사상공간>(前田勉, <江戸後期の思想空間>, 2020), <건건록-일본의 청일전쟁 외교비록>(陸奧宗光 著, 中塚明 校注 <新訂蹇蹇錄>, 2021)이 있다. 접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건건록』과 무쓰 무네미쓰

『건건록』의 저자 무쓰 무네미쓰는 일본 역사와 메이지시대 일본 정치외교사에 밝지 않은 보통의 한국인에게는 낯설며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일본 외교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청일전쟁(1894~1895)’ 당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이 바로 무쓰 무네미쓰다. 무쓰가 청일전쟁 발발과 경과, 그리고 삼국간섭 등의 수습을 외교적으로 ‘지도指導’한 전말을 기록한 것이 이 책 『건건록』이다.
건蹇은 ‘한 쪽 다리를 절름거린다, 즉 어렵고 힘들다’는 뜻이다. ‘건건蹇蹇’은 『역경易經』의 제39괘인 「건괘蹇卦」의 “왕신건건, 비궁지고王臣蹇蹇, 匪躬之故[임금과 신하가 험난한(절름거리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 이유를 두지 않음이다(제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때문이다.)]”라는 글에서 따 온 것이다. 즉 이 책의 제목은 청일전쟁을 전후한 어려운 시기에 일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일본의 이익을 위해 군주와 나라에 충성을 다한 과정을 기록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쓰 무네미쓰는 근대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끌어올리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정치가로 평가 받는다. 일본 외무성 구내에는 일본 역대 외무대신 중 무쓰 무네미쓰만 유일하게 동상이 세워져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무쓰는 조선멸시·낙후·정체론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무쓰 외교’의 핵심은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타국의 주권과 인권 침해는 조금도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반국제적·반평화적·반인도적·반민족적 인식의 현실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일본 사회는 여전히 무쓰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되묻고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청일전쟁의 본질: “경복궁을 점령하라”

일본 정부와 군부는 『메이지27년일청전사明治二十七年日淸戦史』를 통해 “조선의 독립 실현을 방해하는 청국세력을 조선에서 배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청국과 싸웠다”고 청일전쟁의 목적을 밝혔다. 과연 그러한가.
무쓰 무네미쓰는 이 책 제10장 「아산 및 풍도 전투」 첫머리에서 “청일전쟁에서는 육지와 해상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수없이 많았는데 오직 ‘아산 전투’만 외교가 앞서서 전쟁의 발단을 열었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무쓰는 이 책에서 스스로 청일전쟁의 목적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 책의 행간과 교주자 나카쓰카 아키라의 철저한 교주 및 해설에서 우리는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청일전쟁의 최초 무력충돌이 1894년 7월 25일의 ‘풍도해전’이라고 소개하며 대부분의 일본인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무쓰의 지휘 아래 오토리 조선 주재 일본공사가 실행한, 풍도해전 이틀 전인 7월 23일의 ‘경복궁 무력점령’이 최초의 무력충돌이다. 이른바 7·23 사변, 즉 경복궁 점령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청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된 각본에 따라 수행된 군사작전이었다.
이 책에서 무쓰는 이를 시인한다. “가혹하게 말한다면 먼저 조선 국왕을 우리 수중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본서 141~142쪽)”고 했다.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조선 국왕을 ‘포로’로 삼은 뒤 조선 정부로부터 “아산의 청국 군대를 몰아내는 위탁을 조선 조정으로부터 강압적으로 받아내게 된 것”(본서 140쪽), 바로 그것이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청일전쟁의 승리를 기점으로 일본의 실질적인 조선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일본의 승리는 곧 조선의 망국이었다.

청일전쟁의 최고 권위자 나카쓰카 아키라의 해설과 교주

『건건록』은 일본 외무성에서 처음 인쇄하여 1896년에 간행되었다. 그러나 외교 기밀에 관련된 비밀문서로서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다가 1929년 1월 이와나미 출판사가 『백작 무쓰 무네미쓰 유고』를 전문과 함께 출판하면서 비로소 대중들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일본 내에서는 칭송받으며 읽히는 명저이다.
한국에서는 두 차례 번역되었으나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번 번역에서는 선행 서적에서 일부 오역과 오류, 오식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바로 잡고 청일전쟁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나카쓰카 아키라의 상세한 해설과 교주를 추가했다. 따라서 이 책은 제대로 된 한국어판이라 할 수 있다. 나카쓰카 아키라는 『건건록』 출판과정 및 초고와 간행본 사이의 차이를 세밀하게 비교하여 청일전쟁의 본질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았다고 평가받는다. 외교의 진면목을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고 무쓰 스스로 서언에서 밝히기도 했으며, 후대의 연구에서도 무쓰가 청일전쟁의 외교를 빠뜨리지 않고 기록했다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다른 외교기록 문서와 비교하면 무쓰는 일본에 불리한 사항은 언급하지 않거나 자신에게 누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은 삭제했다. 나카쓰카 아키라의 교주는 『건건록』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에서 삭제되었고 개변된 부분의 원 문장을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 해설 또한 80년대 이후 새롭게 밝혀진 사실을 바탕으로 대폭 수정되었다. 이를 통해 독자는 무쓰의 퇴고의 흔적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무쓰의 심정을 추적하고, 청일전쟁기에 일본외교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망국의 원인을 되새기고 반성하다

‘청일전쟁’ 그 자체를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전쟁을 먼 옛날 중국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벌어진 두 나라만의 싸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19세기 말 일본과 중국이 조선을 영유하기 위해 싸웠다는 사실, 그 전쟁이 이 나라와 민중의 삶을 짓밟고, 민중의 재산과 노동력을 강제로 수탈한 결과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기반을 구축한 사실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문제다. ‘청일전쟁’의 가장 큰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반성하지 않는 것 역시 오늘날 다시 되짚어 보아야 할 정치외교적 이슈가 아닌가 생각한다.
국가 존립의 근거는 국토를 보전하고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국익이다. 대한제국이 망한 이유,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에 다시 되새겨 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건건록』을 다시 번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읽는 내내 뼈아플 것이지만, 역사를 바로 알고 그 맥락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제대로 이해해야 미래를 위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접기





건건록은 청일전쟁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났는지 그리고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암기식 위주의 공부가 아닌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입체적 분석 그리고 재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다시 한 번더 깨닫게 됩니다.
반달현 2021-09-17 공감 (2) 댓글 (0)

건건록

『건건록』 무쓰 무네미쓰(지음) | 이용수(옮김) | 논형책을 읽기 전에 무쓰 무네미쓰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 청일 전쟁의 발발 이유부터 청일 양국의 외교교섭, 조선 내정 개혁문제, 삼국간섭의 내용까지 기록한 공문서를 기록했다.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의 '건건' 무쓰는 이 책 『건건록』에서 자신의 공적을 서술했으나 청일전쟁 직후 사건의 당사자가 직접 쓴 책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무쓰 무네... + 더보기
shinwoojoo1115 2021-09-2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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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건록 by 무쓰 무네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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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현 2021-09-26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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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건록>: 청일전쟁, 그리고 식민지가 되는 조선의 기록



“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불법 점거가 계속되고 있다.”

“다케시마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일본 고유의 영토이다.”

일본의 외교를 총괄하는 기구인 외무성의 공식 입장입니다. 이 외무성 앞에는 어느 한 사람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는 청일전쟁 시기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



일본 외무성에 서 있는 유일한 동상입니다. 이는 그가 일본의 외교사에서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살펴볼 책은 그가 남긴 시대의 기록, 바로 <건건록>입니다.




무쓰가 외무대신이었던 1894년, 조선에서 동학 농민운동이 발발합니다. 그리고 무쓰 무네미쓰는 이 사건에 대단히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동학 농민군이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를 점령하자, 조선 조정이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무쓰는 톈진 조약을 들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만약 청국에서 어떤 명분이든지 간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에는 일본 또한 그에 상다한 군대를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뜻밖의 변화에 대비하고, 일청 양국이 조선에 대해 권력을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p.20-21)



<건건록>은 ‘동학당의 난(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됩니다. 사실 무쓰는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이나 본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일본이 이 사건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를 조선에서 완전히 몰아낼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청일전쟁을 일으킨 인물이 바로 무쓰 무네미쓰였습니다.

사실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치닫기까지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무쓰는 청과 대결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바야흐로 우리 외교는 백척간두의 일보를 내디뎠다.”(p.49)



무쓰의 주장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합니다. 그러자 동학 농민군과 조선 조정은 서둘러 화약을 맺고, 양국 군대의 철군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함께 군대를 철수하자고 일본에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무쓰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국 정부는 결단코 현재 조선국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p.55)



조선의 내정이 어지러우니 개혁하기 전까지는 결코 군대를 철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본과 청나라의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게 됩니다. 이를 반영하듯, 각국에 주재하는 일본과 청나라 외교관들이 본국과 주고받는 교신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의 교신 내용을 무쓰는 이미 감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보다 먼저 조선을 제압해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치밀한 외교 활동을 통해 서양 국가들은 여기에 간섭하지 못할 것이

라고도 판단합니다. 과연 무쓰의 판단은 적중했습니다.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어떤 구실을 써도 지장 없다. 실제의 움직임을 개시하라.”(p.142)



무쓰가 작성한 이 전문을 통해, 우리는 외교라는 것은 때로는 교섭을 통해 평화를 쌓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관계를 파탄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전문에 따라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조선의 경복궁을 점령합니다.



“23일 새벽을 기하여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약간의 병력을 급히 입경케 하였을 때 왕궁 근방에서 갑자기 조선 병사가 먼저 발포함에 따라 우리 군은 이를 추격하여 성문을 밀어 열고 궐내로 진입했다.”(p.76)



무쓰는 어떤 방법으로 청나라의 교신 내용을 감청했을까요? 이번에 번역된 <건건록>의 주석에 자세한 사정이 밝혀집니다. 지금 소개하는 <건건록>은 나카쓰카 아키라 교수가 교정을 보고 주석을 단 책입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교토 대학을 졸업하고 나라여자대학의 교수로 강의를 했던 분입니다. 그는 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철저하게 연구하여 논문과 책으로 공개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업적을 소개하자면, 일본이 청일전쟁을 앞둔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기습 공격을 했다는 공식 기록을 발견한 일입니다.



그동안 이 사건은 일본 측의 왜곡 때문에 조선군이 선제 공격하여 일본이 반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바로 잡은 것입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이를 ‘조일전쟁’이라 부를 만큼 중대한 사건으로 보았으며, 청일전쟁의 목적도 조선 침략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런 나카쓰카 교수가 <건건록>을 철저히 분석했습니다. 그에 따라 무쓰의 조선 침략과 청일전쟁 의도느 더욱 분명해집니다. 또한 무쓰가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비롯해 수많은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그 내용을 바로잡고 보충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결과물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한 이틀 뒤인 1894년 7월 25일, 아산에서 청나라 군대를 기습 공격합니다. 이렇게 청일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전쟁의 승패는 군인들의 몫으로 넘어갔을까요? 아니, 여기서부터 무쓰의 또다른 전쟁이 시작됩니다.



개전 직후, 영국 국기를 게양한 채 아산으로 향하던 청나라 함선, 고승호가 일본 해군에 의해 격침됩니다. 바로 고승호 사건입니다. 고승호가 영국 국적이었으므로 이 사건은 금방 국제 문제로 치달았습니다. 영국은 일찍이 비슷한 사건으로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한 적도 있었지요(제2차 아편전쟁). 무쓰는 외교 라인을 총동원하여, 고승호 격침이 정당한 행위였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또, 랴오둥 반도의 여순구를 점령한 일본군이 청나라 민간인을 학살하는 여순구 학살이 보도되어, 일본에 대한 여론은 물론, 당시 진행되던 미구과의 불평등 조약 체결에도 차질을 빚게 됩니다. 이 때 무쓰는 평소 일본군이 군기가 엄정했다고 주장하며 여순구 학살을 부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전쟁 수행에 관여합니다.



한편, 조선과는 ‘일한양국맹약’이라는, 일시적인 군사 동맹을 맺도록 합니다. 이 동맹으로 일본은 조선을 전쟁에 끌어들였습니다. 물론 무쓰의 치밀한 기획에 따라 이뤄진 일입니다. 일본은, 조선이 독립국이니 당연히 동맹을 맺을 권리가 있다고 국제 사회에 선전하는 한편, 실제로는 조선을 청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동맹을 과연 동맹이라 할 수 있을 것일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결과는 동맹을 맺은 나라 백성들의 떼죽음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공주, 그리고 장흥에서 섬멸했고, 그 잔당을 철저하게 추적해 살해했습니다, 나카쓰카 교수는 동학농민운동을 일본이 저지른 최초의 제노사이드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석연치 않은 군사 동맹과 동맹국 백성의 대량 학살. 그 의미는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무쓰는 청과 전쟁을 벌이려고 조선을 제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무쓰가 조선에 이와 같은 외교 정책을 실시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건건록> 전반에 걸쳐 조선에 대한 온갖 편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내용에 관해서는 번역자인 이용수 연구원이 해제에서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으니, 책을 참고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사이, 무쓰는 안으로는 전쟁에 대한 일본 국내의 여론을, 그리고 밖으로는 열강의 동향을 살피며 전쟁 지도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이 시기 일본 국내에서는 전쟁에 대한 지지와 청에 대한 적개심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은 예상치 못하게 일본이 선전을 거두자, 일본에 대한 인식을 크게 전환하게 됩니다.



무쓰는 이러한 상황에 편승해, 새로운 점령지를 확보해 국민들의 욕망을 채우는 한편, 자칫하면 국민들의 감정이 교만으로 변하지 않을지 예의주시합니다. 한편,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이 확산되는 데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며, 냉정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그는 전세가 유리한 상황을 적극 활용하여 유럽 국가들과 교섭하여,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의 숙원이었던 불평등조약 개정 작업을 마무리짓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쓰는 외국이 점차 일본에 위협을 느끼고 이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하고, 우세한 상황에서 이 전쟁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긴박한 전쟁 외교를 개인의 내면은 물론 세계적 차원에서 통찰할 수 있게 됩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조야의 엇갈린 요구들이 사방에서 쏟아집니다. 이에 무쓰는 강화 조약을 준비하여 청에 강요했습니다. 청나라가 당시 국제 관례에 따르지 않고 전권대사를 파견하자 이를 돌려보내는 등으로 외교상의 기선을 제압했으며, 이를 예상해 미리 각서까지 준비해 둔 것은 무쓰의 주도면밀함을 다시금 떠올리게 합니다. 마침내 시모노세키에서 강화 회담이 열렸고, 청나라의 대신 이홍장이 왔습니다. 무쓰는 이홍장을 상대로 능수능란한 외교전을 펼쳤습니다. 이 때 이홍장의 외모에 대한 감상이나, 만날 때 느낀 바를 이야기합니다. 세상 모든 것을 외교관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를 교섭에 활용하려는 태도는 한편으로는 경이롭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이홍장은 강화회담이 패전에 따른 배상이 아니라, 청일 양국의 국교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며, 역으로 청일 동맹을 주장하는 등 강화 회담의 프레임을 전환하고자 하는 노회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동시에 청나라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휴전을 주장합니다. 무쓰는 이에 대해 휴전 조건을 가혹하게 내세우는 식으로 이홍장의 시도를 저지합니다.



그러던 중, 이홍장은 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 괴한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의 몸을 내던져 강화 회담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홍장을 마구 비웃던 국내 인심마저도 그를 동정할 정도였으며, 국제 여론도 청나라에 동정적으로 흘러갈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이홍장이 주장했던 휴전을 받아들였습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피를 덜 흘리게 된 것입니다.



강화 조약 체결을 앞두고, 이홍장은 무쓰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일본국은 현재 세력이 이미 강대하고 인재도 많아 더욱 더 융성하게 되어 그칠 줄 모르는 형편이다. 지금 배상 금액의 많고 적음과 할지(할양지)의 넓고 좁음 같은 것은 모두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지만, 양국 정부 및 신민이 장래 영원히 화목하게 될 것인가 또는 영원히 원수로 볼 것인가.”(p.286)

이는 일본의 앞날에 대한 무서운 경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쓰는 <건건록>에 이홍장의 이 말을 기록하면서, 자기 조국의 앞날에 대해 일말의 불안을 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마침내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제 일본은 방해를 받지 않고 조선을 침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 타이완과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비롯한 영토를 일본에 할양합니다.

그러나 이 때, 러시아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도록 압박합니다. 그 유명한 3국간섭입니다. 무쓰는 이 사건이 일본 육해군을 비롯해, 국민 일반에게 미칠 영향을 경계하는 한편, 3국에 맞서 다른 나라를 끌어들이려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 자칫하면 시모노세키 조약 전체가 파탄될 수도 있는 상황.



무쓰는 러시아를 비롯한 3국은 처음에 이와 같은 간섭을 고려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예상 외로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 탓에 간섭이 이뤄졌다고 판단합니다. 마냥 승리하는 것이 오히려 훗날의 외교적 고립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 외교의 곤란을 생각하게 합니다. 한편, 서로 민족 감정으로 강렬하게 충돌했던 프랑스와 독일마저 한 편을 이루었을 만큼 상황은 중대했습니다.



전쟁은 전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진정한 싸움은 전쟁이 끝난 뒤부터라는 것임을, 그것이야말로 전쟁이고, 또 외교임을 <건건록>은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일본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의 군함들이 전투 태세를 갖추는 등 상황은 일촉즉발. 막상 실제 위협을 받자 강경하던 언론까지도 겁을 먹을 정도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제군들의 훌륭한 생각과 뛰어난 의견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군함과 대포를 상대로 숙의해야 할 것이다.”(p.365)



마침내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반환합니다.

불과 2주 동안 일본을 뒤흔들었던 3국 간섭은 청일 전쟁의 결과를 최종적으로 결정지었습니다. 이는 각국의 지략이 총동원된 또다른 전쟁이었으며, 그 한가운데 무쓰 무네미쓰가 있었습니다.

이 때 무쓰는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굴욕감과 불만이 점차 커져 가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훗날 이 감정은 무쓰가 죽은 뒤 일본이 러일전쟁으로 치닫도록 합니다. 그 결과, 일본은 광대한 식민지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국가로 나아가게 되고, 결국에는 패망하게 됩니다만 이는 과연 무쓰의 계산에 있었던 것일까요.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전쟁은 무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무쓰 무네미쓰는 이렇게 청일 간의 갈등을 유도했고,

청일 전쟁의 승리에 외교적으로 기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3국 간섭이 일어났을 때는 이를 방어하며 전쟁으로 얻은 이익의 손실을 최소화합니다.

일본의, 그리고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의 운명을 세 번이나 결정지은 것입니다.



<건건록>은 제국주의와 전쟁의 시대를 살았던 외교관들의 사고방식 전반, 곧 그의 내면과 계산, 정책 결정 과정을 보여 주는 긴요한 자료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시각이 아니라, 침략과 전쟁을 기획한 자의 기록.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식민지가 되었고, 동아시아는 수십 년에 걸쳐 전쟁에 휘말렸였으니, 이 중대한 기록을 읽을 필요는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청국에서 어떤 명분이든지 간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에는 일본 또한 그에 상다한 군대를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뜻밖의 변화에 대비하고, 일청 양국이 조선에 대해 권력을 나란히 유지해야 한다" - P20



"바야흐로 우리 외교는 백척간두의 일보를 내디뎠다." - P49



"제국 정부는 결단코 현재 조선국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없다" - P55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어떤 구실을 써도 지장 없다. 실제의 움직임을 개시하라." - P142



"23일 새벽을 기하여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약간의 병력을 급히 입경케 하였을 때 왕궁 근방에서 갑자기 조선 병사가 먼저 발포함에 따라 우리 군은 이를 추격하여 성문을 밀어 열고 궐내로 진입했다." - P76



"일본국은 현재 세력이 이미 강대하고 인재도 많아 더욱 더 융성하게 되어 그칠 줄 모르는 형편이다. 지금 배상 금액의 많고 적음과 할지(할양지)의 넓고 좁음 같은 것은 모두 그다지 큰 관계가 없다지만, 양국 정부 및 신민이 장래 영원히 화목하게 될 것인가 또는 영원히 원수로 볼 것인가." - P286



"지금은 제군들의 훌륭한 생각과 뛰어난 의견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군함과 대포를 상대로 숙의해야 할 것이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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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021-09-2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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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건록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하지만 사실 청일전쟁이라 함은 근현대사 시간에 수능만을 위해 배웠고 십여 년이 지나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 시점이기에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전무한 나였다.😢

그러나 일본의 청일전쟁 외교 비록으로 전해지는 “건건록”이 새 번역으로 출간되어 다시금 읽게 되는 감사한 기회를 얻게 되어 읽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외교관 무쓰 무네미쓰의 외교정책 대한 서술이라 일본의 입장에서 기록되었는데, 읽으며 각주에 한국에서 다루는 역사적 사실로서의 설명이 함께 나와있어 한 쪽으로만 치우치지 않고, 서로의 입장에서 어렵고 딱딱한 부분을 조금이나마 쉽게 풀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잘못 기록된 사실도 있어 사실이 아님을 명시해 두었기에 실제 역사를 알 수 있어 도움이 많이 되었고 각주의와 해설, 교주 범례의 상세한 인물 설명도 정말 좋았다.

마치 최근 방영되고 있는 벌거벗은 세계사의 강연을 듣는 것 같기도 하여 역사를 논하는 저서임에도 읽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조선과 청과 일본의 관계뿐만 아니라 구미 각국의 입장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운 부분도 많았다.

읽는 동안 애국심이 솟아나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 난무해 화가 나기도 하고 정말 뻔뻔하다는 생각 등 만감이 교차했다.😡

조선에게는 자주적으로 국치를 다스릴만한 능력이 없어 절대적으로 침략의 목적이 아니라 안정화를 위한 결정이라는 언급이 수도 없이 나오는데 이후 결론을 알기에 결코 중립적으로는 읽을 수 없었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쓰인 글이기에 그들은 이러한 입장이었구나 답답하기도 하고 부들부들 화가 나는 것을 참아가며😮‍💨 읽었다.

배경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읽었기에 단순히 청일전쟁이라고 하여 중국과 일본만의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실은 유럽 각국의 이해관계까지 엮여 있어 몰랐던 영국이나 러시아, 미국 등과의 눈치 싸움, 속 사정까지 알 수 있게 되어 흥미로웠다.

백여 년 전의 기록이며 역사적 사실, 타국의 입장에서 쓰인 글이긴 하지만 많은 역사적 인물, 사건들을 정리해 다시금 역사를 이해하고 알 수 있는 기회라 읽는 동안 한층 더 성장하는 기분이 들어 뜻깊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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쏭지 2021-09-22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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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건록

역사를 잊은 민족에는 미래가 없다.

'건건록’ 책 이름만 들어봤을 때는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건건록이란 단어를 한자어로 해석하면 절뚝거리며 걷다라는 뜻이다. 일본 외무대신인 무쓰 무네미쓰가 외교를 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이런 의미를 확장해서 ‘건건록’이라는 책 제목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첫 번째, 임금을 위해 마음을 써가며 고생하는 모습이고, 두 번째는 아부하지 않는 충정한 모습이다. 이 책을 쓴 목적은 외교대신인 자신이 아부하지 않고 천황을 위해 충정을 다한 모습을 담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책의 기록은 동학농민운동 이후부터 청일전쟁 이후 강화조약을 맺을 때까지 기록이다. E.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역사에서 절대자는 과거나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쪽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는 미래에 있다”라고 말한다. 사실 아픈 역사는 기억하기도 쉽지 않고 잊고 싶은 역사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픈 역사도 기억해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픈 역사를 통해 그때의 결정들을 반면교사 삼아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나라의 위대한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자신들의 과오를 나열한 이유는 후손들이 자신들의 과오를 배우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일본이 당시에 세계정세를 매우 정확히 분석하고 있었으며 그런 것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야욕을 펼쳐 나갔다는 사실이었다. 동아시아의 섬나라이고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왜’라고 불리며 오랑캐라고 불리던 민족이 메이지 유신으로 다른 나라로 탈바꿈해나갔다. 자신들도 포르투갈이나 서양 열방에 의해 고통을 당한 역사가 있었지만, 그것을 발판삼아 세계 제국으로 나아가려고 한 인물들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역시도 세계정세를 정확히 파악했고 협상을 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매우 정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중근 역시도 이토 히로부미의 ‘동양평화론’에 심취했었던 이유로 알 수 있었다. 세계정세에 밝았기에 일본은 동양을 발판으로 삼아 세계로 나가고자 했던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청나라와 조선은 나약한 모습만 보였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관두지 못했고 자신들만의 방식대로 세계정세를 이해했기에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조선은 더 심각했다. 명성황후 시해 이후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내부적으로도 개혁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결국 자기모순에 빠져 무너져내려가고 있었다. 17세기 무렵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한 후 조선은 소중화라고 해서 자신들이 작은 중국이라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제 명나라의 정통을 이어받아 유교의 정통을 세우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유교적 질서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영정조 시대의 다시 회복하는 듯했으나 이후 조선은 세도정치기를 거치면서 몰락의 길로 가게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세계열강들이 결정할 수밖에 없는 조선의 모습. 너무 나약했다. 외세들은 강했고 조선은 약했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청나라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일본은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한다.
러시아는 청나라와 일본의 갈등 사이에 개입하였지만, 후에 한발 물러난 결정을 하게 되었다. 영국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중재를 하려고 하였지만 강력한 경고만 할 뿐이었다. 일본은 재빠르게 계산을 통해 영국이 전쟁에 개입할 의지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미국은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공식문서를 보냈으나 청일전쟁에 개입할 의지가 없음을 일본은 재빠르게 계산한다. 러, 영, 미의 입장을 확인한 뒤 이들이 전쟁에 대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통해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결국 그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후 강화조약을 통해 청나라가 굴욕적인 협상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가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협상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실 안타까운 것은 일본이 그랬던 거처럼 조선 정부 역시도 노력해야 하는데 너무 무능했다는 점. 명성왕후의 시해 이후 민씨 일가가 쫓겨나자 대원군이 다시 집권했지만, 정세를 읽는 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느끼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아픈 역사이지만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세계 정세를 빠르게 파악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파악하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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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2 : 청일전쟁은 '경복궁 점령'으로 부.. : 네이버블로그


서평 2 : 청일전쟁은 '경복궁 점령'으로 부터 시작됐다

-무쓰 무네미쓰의 <건건록(蹇蹇錄)>


오탁 ・ 2021. 9. 6.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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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우리는 청일전쟁이 1894년 7월 25일 청일 군 사이의 아산전투 또는 풍도전투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대체로 교과서에도 그렇게 나온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청일 사이의 전투가 시작된 사건일 뿐이다. 실제 청일전쟁은 그 이틀 전인 7월 23일 오토리 게이스케 당시 조선주재 일본공사가 이끄는 일본군 1천여 명이 '경북궁 점령'한 사건 때부터 시작됐다.



청일전쟁 당시 이토 히로부미 총리 내각에서 외상을 지냈던 무쓰 무네미쓰가 청일전쟁 발발부터 시노모세키조약 체결, 그리고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과 요동반도 반환까지의 외교비화를 기록한 책 <건건록-일본의 청일전쟁 외교 비록>(논형출판사, 2만7천원)을 보면, 이런 사실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청일전쟁은 우발적인 전쟁이 아니라, 조선을 청의 세력권에서 떼어내어 자신의 지배 아래 두려는 일본의 기획 전쟁이었다. 1894년 민생고에 지친 농민들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일제히 봉기했다. 바로 갑오 동학 농민전쟁이다. 무능한 조선 조정은 자력으로 농민의 봉기를 제압할 수 없자, 종주국인 청에 원병을 요청했다.



호시탐탐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던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과 맺은 제물포조약과 갑신정변 이후 청과 맺은 텐진조약을 교묘하게 활용했다. 제물포조약에서는 일본이 공관 경비를 위해 군의 주둔권을 확보해 놨다. 텐진조약의 핵심 내용은 청일 양국이 "조선에 군을 파견할 때는 동시에 파견하고 동시에 철수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 두 조약을 활용해, 청이 조선에 파견한 사실을 통보받자 바로 육해군으로 편성된 대부대를 인천으로 보낸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고 복통 터지는 일이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는 조약에 따른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국가 목표인 조선의 지배권 확보를 위해, 청과 무력충돌(전쟁)을 기획한다. 위에서 말한 '경복궁 점령' 사건이다. 군대를 파견돼 있지만 청과 싸울 명분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 조정을 협박해, 청과 싸울 명분을 만들어냈다. 일본 군대가 경복궁에 진입해 왕을 볼모로 잡고, 조선의 독립을 위협하는 청 군을 몰아내달라는 위탁을 강제로 받아낸 뒤 이틀 뒤 아산에서 청군과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강화도수호조약에서 조선은 독립국으로 돼 있는데, 청이 조선을 종주국으로 취급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난다는, 그럴싸하게 포장된 논리였다. 강도가 마치 피해자를 걱정해 주는 것처럼. 이 사건을 보면, 한일 강제병합의 시발점이 된 1905년 을사늑약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청일전쟁은 1년 만에 일본의 승승장구로 끝난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 사이에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청으로부터 거금의 배상금 외에 요동반도와 대만을 할양받기로 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국, 조선 등에 이권 획득을 노리던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와 손 잡고 요동반도를 반환을 요구한다. 이른바 3국 간섭이다.



이 책은 1894년 7월 청일전쟁 발발에서 1895년 5월 삼국간섭의 타결까지 1년여 동안의 외교 비사를 다루고 있다. 외국 외교 사절과 협상, 각 국에 파견된 일본 외교관들의 보고와 본국의 지시 공문, 일본 정부의 비밀회의 내용 등이 책 곳곳에 생생하게 나와 있다. 몇 년 동안이나마 외교관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실감나는 장면이 많았다. 국익을 다루는 외교관의 움직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저자가, 내가 근무했던 오사카총영사관 관할지인 와카야마현(기슈번)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묘한 인연도 느꼈다. 물론 이 책의 기록은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하지만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 일부 내용은 빼거나 은폐하고 기록됐다고, 이 책을 교주한 나카쓰카 아키라(청일전쟁의 최고 권위자)는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아팠던 부분은 조선을 두고 강대국 청일이 벌인 전쟁이지만, 거기에 정작 조선의 목소리는 없었다는 점이다. 청과 일본뿐 아니라 러시아, 영국, 독일, 미국 등 모든 열강들이 조선을 '장기판의 졸'로도 취급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매달려 나눠먹기 게임에만 몰두했다. 세상이 아무리 진보하고 인권 의식이 커졌다고 해도, 120년 전의 그때나 지금이나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은 변함이 없다. 자기를 지킬 힘이 없는 나라는 강한 자의 노리개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지 않는 자를 결코 돕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 <건건록( 蹇蹇錄)>의 건은 '한쪽 다리를 절름거린다'는 뜻이다. 청일전쟁의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일본의 국익을 위해 군주와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런 그의 헌신 때문인지 일본의 역대 외상들 가운데 무쓰 무네미쓰의 동상만이 유일하게 일본 외무성에 세워져 있다 한다. 반면, 조선은 그 때문에 너무 고단했다.


[출처] 서평 2 : 청일전쟁은 '경복궁 점령'으로 부터 시작됐다-무쓰 무네미쓰의 <건건록(蹇蹇錄)>|작성자 오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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